Chapter 1
서리를 맞은 포플러 잎이, 풀이 죽어 늘어졌으면서도 여전히 가지를 떠나지 않은 채, 있는 듯 없는 듯한 바람에도 겁먹은 듯이 살랑인다. 추수를 끝낸 귀리밭 두렁을 따라 우뚝우뚝 키 큰 채로 줄지어 선 그 나무들의 행렬은, 니세코안 산으로 잠겨 들려 하는 새빨간 저녁 해의 빛을 받아, 잠 덜 깬 듯한 녹색으로 깊은 하늘 빛깔에서 제 몸을 가느다랗게 가른다. 그 너머의 황폐한 작은 과수원, 그곳에는 열매만 남은 사과나무가 열 그루쯤 쓸쓸히 사이를 두고 서로 마주 서 있다. 새빨갛게 익은 19호(사과 품종)의 열매가, 붉은 저녁 빛에 잠겨 마른 피 같은 검음으로 보인다. 가을이 되고부터 산에서 마을 쪽으로 내려온 어치가 때까치보다 둔한, 그러나 어딘가 닮은 데가 있는 끊길 듯 끊길 듯한 울음소리를 내며 그 검은 가지에서 가지로 옮겨 다니다, 사람 눈에 먼 그늘 속으로 숨어든다.
눈이 닿는 데까지의 밭에는 잡초가 무성하게 우거져 있다. 녹말의 재료가 되는 감자는, 녹말 시세가 떨어진 데다 감자 캐는 품삯이 유난히 비싼 탓에 캐어지지도 못한 채 남아, 작물은 거친 줄기만 서리에 마르고 말았으나, 무성히 자란 잡초는 밭을 마치 황야처럼 만들고 말았다. 감자뿐만이 아니다. 아마 자리에서도, 귀리 자리에서도, 모든 것이 아직 갈아엎혀 있지 않다. 잡초의 씨앗은 가는 솜털에 실려, 땅바닥 가까이를 검불 솜과 한데 어우러져 날아다닌다. 에조후지 산에는 늘 맑게 갠 저녁이면 그러하듯이, 부드러운 산마루의 윤곽 그대로 한 무리의 구름이 솜모자를 씌워 놓고 있다. 처음에는 그것이 갓 쌓인 눈처럼 희지만, 보는 사이에 저녁 해를 되받아 비추어, 온갖 미세한 붉은빛과 쪽빛의 색조를 거쳐 간다. 붉음에 풍요롭던 그 빛은 차츰 쪽빛으로 무르익는다. 그러다가 새빨갛게 문드러진 해가 니세코안 산의 부드러운 산등성이로 다 잠겨 들면, 구름은 갑자기 죽은 빛을 띠며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러고는 눈 깜짝할 사이에, 그 이음매 없는 솜모자는 풀어져 흩어진다. 이리하여 큰 하늘의 끝에서 끝까지, 햇빛도 없고 밤의 어둠도 없는 어스름이 들면, 그 구름은 한 조각의 그림자도 남기지 않은 채, 짙은 한 빛깔의 공기 속으로 빨려 들어 사라지고 만다. 이제 어디를 보아도 구름은 없다. 텅 빈 무엇처럼, 큰 하늘은 다만 투명하게 푸르다.
그때 동쪽에는 에조후지, 서쪽에는 니세코안, 북쪽에는 곤부 산봉우리들이, 어떤 것은 가파르게, 어떤 것은 부드럽게 기울어, 높고 낮게, 내가 바라보는 지평선에 단조로운 변화를 더해 준다. 이미 살을 에는 추위에 마음까지 다잡아진 나에게는, 하늘과 땅을 가르는 이 한 줄기 곡선의 매력은 예사로운 것이 아니다. 장엄한 음률 같은 이 한 선을 경계로, 투명함과 불투명함, 빛과 어둠, 가벼움과 무거움의 또렷한 대조가 보인다. 그리고 나는 그 어둠에 잠겨 들어 가는 땅 한가운데에, 홀로 아무 생각도 없이 우두커니 서 있다.
벌레 소리는 이미 끊겨 있다. 나는, 발밑이 어둑한 울퉁불퉁한 작은 길을 더듬어 집 뒤편으로 가 본다. 그곳에는 이미 어딘지 모르게 밤의 어둠이 감돌기 시작하고 있다. 옥수수는 이삭도 잎도 다 시든 채 열 평쯤 되는 땅에 서 있었는데, 그 이삭 끝은 조금씩 불기 시작한 밤바람에 거슬려 잘게 떨고 있는 것이 하늘에 비쳐 보였다. 하늘에 비쳐 보이는 것에는 그 밖에도 강낭콩 받침대가 있었다. 솜대의 가는 줄기에, 메마른 덩굴이 어지러이 휘감긴 채로, 가시울타리처럼 날카롭게 눈을 찌른다. 땅 위에는 토마토 덤불이 있어, 따고 남은 열매가 익어 여기에 하나 저기에 하나, 발갛게 자그마한 빛깔을 남기고 있다. 그 밖에는 호박 밭도, 완두 밭도, 양파 밭도, 캬베츠(양배추) 밭도, 한결같이 침침한 밤 빛깔이 되어 있다. 한 마리의 고양이가 내가 거기에 서 있는 것을 노렸는지 어디서 왔는지, 문득 발밑에 나타났다. 나는 허리를 굽혀, 손바닥을 그 배 아래에 받쳐 고양이를 내 가슴께까지 들어 올려 보았다. 고양이는 가르랑거리지도 않고, 싫어하지도 않는다. 배 쪽은 과연 따뜻한 손길을 느끼게 해 주지만, 내 턱에 닿은 등의 털결은 서리처럼 차가웠다.
나는 그 고양이를 안은 채로 뒷문으로 집에 들어갔다. 안마당 우물 곁을 지나 부엌 봉당까지 오자, 고양이는 지금까지의 온순함과는 달리, 무법하게도 내 품을 박차고 빠져나가, 새빨간 불꽃을 토하며 타고 있는 이로리(둘러앉는 화로)의 밑동 잔가지 가까이로 달려갔다. 막 켠 참이라 아직 심지를 다 올리지 못한 매단 램프는, 작고 누런 빛을 여우색 다타미 위에 떨구어, 가벼운 석유의 그을음 냄새가 된장국 냄새와 함께 어렴풋이 내 코를 스친다.
여섯 살이 된 개구쟁이 마쓰(松)도, 잠자코 화로 맞은편 자리에 다리를 뻗고 앉아, 껍질을 벗긴 큼지막한 무 토막을 와삭와삭 씹고 있다. 나도 별달리 말도 걸지 않고 가만히 게다를 벗고 내 방으로 들어갔다. 잘 피워 둔 화로의 숯에서는 푸른 불꽃이 일고 있다. 그리고 매캐한 이산화탄소가 방의 공기를 따뜻하게 흐리고 있다.
밤이 깊어, 잠을 청하려고 덧문의 유리 너머로 바깥을 내다보았다. 무엇이든 땅속 깊이로 다 빨아들이려는 듯한 고요함이 하늘과 땅을 다 차지하고 있다. 그 가운데서 멀리 시냇물의 졸졸 소리만이 들려온다. 어찌 됐건 죽음 같은 적막 속에서 어떤 소리를 듣는 것은 드문 일이다. 활짝 갠 큰 하늘 가득히 분주하게 깜빡이는 별 무리에 눈을 두고서, 가만히 물소리에 귀를 기울이자, 그것은 내가 익히 들어 온 것이라고는 여겨지지 않는다. 멀리 움푹한 골짜기 사이로 크고 작은 갖가지 은방울이 한없이 굴려져 가는가 의심될 정도다.
덧문의 유리는 이내 갈라지지나 않을까 싶도록 팽팽히 당겨져 보인다. 나는 거기에 손을 대는 것조차 두려웠다. 나는 서둘러 다시 잠자리로 돌아갔다. 잠자리 속의 온기는 발화로보다도 더욱 따스하게 내 발끝에 닿았다.
새벽 추위가 나에게 기침을 자아냈다. 기침이 나를 마땅한 시각보다도 일찍 깨웠다. 조금이라도 때 묻은 데에는 서리가 맺혀 있을 것만 같은 속옷의 살갗 닿는 느낌은, 이곳의 가을이 차게 깊었음을 충분히 일러 준다. 나는 가만히 집을 나서 밭 쪽으로 가 보았다. 갓 맺힌 서리, 영어로 Hoarfrost라 불릴 만한 종류의 서리가, 소복소복 눈처럼 풀 위에도 흙 위에도 내려 있었다. 한층 더 윤곽의 크기와 묵직함을 더한 에조후지는, 강철 같은 하늘을 가르고 해 뜨는 쪽 공간으로 우뚝 솟아 있다. 내가 몸을 기댄 어린 느릅나무의 우듬지에서는, 가을 산포도처럼 물들고 비비 말린 잎이, 한 점 바람도 없는데 끝없이 흩날려, 추위로 무거워진 공기 속을 가만히 춤추듯 떠돌다, 이윽고 서리 위에 바스락바스락 희미한 소리를 내며 내려앉는 것이었다.
오늘도 또, 차가운 비와 거센 바람이 찾아오기 전의 포근한 늦가을 햇볕이 이어지리라. 내가 아침 식사를 할 즈음에는, 당장이라도 비가 올 듯이 하늘은 잔뜩 흐릴 것이다. 그러다가 그것이 서남에서 불어오는 가는 바람에 쫓기면, 햇빛으로 짜낸 듯한 푸른 하늘이 누런 빛을 땅 위에 던져, 따끈따끈 따뜻하고 짧은 해를 두고두고 길게 느끼게 해 줄 것이다. 그리고 저 고요하고 쓸쓸한 저녁이 또 오는 것이다.
이렇게 북국의 거룩한 가을은 깊어 간다.
(『부녀계』 다이쇼 10년 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