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
성급한 사상
이시카와 다쿠보쿠
(1)
최근 몇 해 사이 문단과 사상계의 동란은, 거기에 관여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현저히 성급하게 만들었다. 짓궂게 말하자면, 오늘날 신문이나 잡지에서 흔히 마주치는 “근대적”이라는 말의 뜻은, “성급하다”라는 것에 다름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다. 같은 시각에서, “우리 근대인은”이라는 말을 “우리 성급한 자들은”으로 풀어 보는 편이, 그 사람이 말하고자 하는 바의 내용을 비교적 정확히, 그리고 손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사람은, 자신이 지금까지 복종해 오던 것에 대해 어떤 반항을 일으키지 않으면 안 되는 처지(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이치는 모두 뒤늦게 태어나는 것이다)에 이르러, 그리하여 그 반항을 일으켰을 때, 그 반항이 자기 반성(실제적으로는 생활의 개선)의 첫걸음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는 일이, 왕왕 있는 법이다. 닳아 빠진 말로 옮기자면, 건설을 위한 파괴라는 사실을 잊고서, 파괴를 위해 파괴하고 있는 일이 있는 법이다. 전쟁을 치르는 국민이, 보다 잘 자국의 국력에 부합하는 평화를 위함이라는 목적을 망각하고, 전쟁 그 자체에 열중하는 태도도, 그 한 예다. 그러한 마음가짐은, 자기 자신의 그 현재에 완전히 몰두하는 것이므로, 세상에 이만큼 성급한(동시에 비눗방울처럼 팽팽히 부풀어 오른, 그리고 발끈한 노인의 자세처럼 빈틈투성이의) 마음가짐은 없다. …… 그러한 마음가짐이, 좋다고도, 또 나쁘다고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러한 마음가짐에 빠진 그 순간에, 마땅히 알아차리지 않으면 안 될 것, 곧 오늘의 일은 내일의 일의 토대라는 사실, 종래의 정설이며 습관에 대한 반항은 곧바로 새로운 정설, 새로운 습관을 만들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일이, 하루 늦으면 하루만큼의 손실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손실은 한 사람의 인간에게도, 한 시대에 있어서도, 또 그것이 한 국민일 적에도, 결코 작은 손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처가 있으면서도 다른 여자와 통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된, 또는 그러한 일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된 남자가 있다고 하자. 그리하여, 처가 있는 남자가 다른 여자와 통하는 일을 죄악으로 삼고, 패륜의 행위로 삼고, 침 뱉어야 할 일로 삼아 추호도 너그러움이 없는 종래의 도덕을, 무리하고, 가혹하며, 자연에 어긋나는 것이라 느끼고, 본래 남녀의 관계는 전혀 자유로운 것이라는 원시적 사실에 논거하여, 종래의 도덕에 어디까지든 복종해야 할 까닭이라곤 없다고 생각했다고 하자. 거기까지는 좋다. 만일 그때, 문제의 목적이 “그렇다면 남녀 관계 위에 마련해야 할, 무리하지 않고, 가혹하지 않고, 자연에 어긋나지 않는 제약은 어떠한 것이라야 하는가”라는 것임을 잊어버리고서, 이미 종래의 도덕은 반드시 복종해야 할 것이 아닌 이상, 모든 남편이 처 아닌 여자와 통하고, 모든 처가 남편 아닌 남자와 통해도 좋은 것으로 여기며, 나아가서는 그렇게 하지 않는 남편과 처를 자각이 없는 상태에 있는 자들이라며 가엾이 여기는 데 이르러서는, 성급함도 또한 도가 지나치다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결과는, 단지 도덕상의 파산일 뿐 아니라, 모든 남녀 관계에 대한 자기 자신의 안심이라는 것을 송두리째 잃어버리지 않고는 그치지 않으니, 곧 자기 그 자체의 파산이다. 문제가 부모와 자식의 관계일 적에도 마찬가지다.
(2)
위의 예는, 일부 사람들이라면 “근대적”이라는 것과는 인연이 멀다고 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여기에 한 남자(가령 시 짓는 일을 직업으로 삼고 있는 자)가 있어, 자신의 신경 작용이 종래의 사람들보다 한층 예민해졌음을 알아차리고, 또한 그것이 근대 인간의 한 특질임을 알며, 자신도 그러한 사람들과 더불어 근대 문명에 길러진 불건강(임에 틀림없는) 상태에 있는 자라고 인정했다고 하자. 거기까지는 좋다. 만일 그때, 근대인의 자격은 신경의 예민함이라고 속단하여, 마치 입학시험의 합격자가 기꺼워하며 합격자 무리에 뛰어드는 듯한 기분으로(실은 낙제자이면서. 합격자도 낙제자도 함께 수험자인 것과 마찬가지로, 신경 조직이 건전한 인간도 불건전한 인간도 함께 근대의 인간임에는 틀림없다), 그 불건전을 믿고, 또 자랑하며, 한층 더 그 불건전한 상태를 부추겨 갈 갖가지 수단을 취하고 의기양양해진다고 한다면, 어떨 것인가. 그 결과는 말할 것도 없다. 만일 또,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른바 “새로운 시”, “새로운 문학”은 태어나지 않는 것이라 한다면, 그러한 시, 그러한 문학은, 우리, 적어도 나처럼 건강과 장수를 바라며, 자기 및 자기의 생활(인간 및 인간의 생활)을 가능한 한 개선하고자 하는 자에게는, 무턱대고 강렬한 술이며, 길가에서라도 정사를 치를 듯한 얼굴을 한 여자 따위와 더불어, 전적으로 불필요한 것이지 않으면 안 된다. 시대의 약점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은, 어떠한 경우의 어떠한 의미에서도, 또 어떠한 사람에게도 결코 명예가 아니다.
성급한 마음! 그 성급한 마음은, 어쩌면 특히 일본인에게 있어 두드러진 성벽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하고 나는 생각하는 일도 있다. 옛 일을 이르자면, 저 무사도라는 것도, 예로부터 미신가의 고행과 더불어 세계에서 가장 성급한 도덕이라고 한다면 한다고 할 수도 있다. …… 일본은 그 국가 조직의 근저가 굳고, 깊은 점에서, 어느 나라보다도 빼어난 나라이다. 따라서, 만일 여기에 진정으로 국가와 개인의 관계에 대해 진지하게 의혹을 품은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의혹 내지 반항은, 같은 의혹을 품은 어느 나라 사람보다도 깊고, 강하고, 통절해야 할 터이다. 그리하여, 근래 일부 일본인에 의해 일어난 자연주의 운동이라는 것은, 옛 도덕, 옛 사상, 옛 습관 모두에 대해 반항을 시도한 것과 똑같은 까닭에서, 이 국가라는 기정의 권력에 대해서도, 그 회의의 창끝을 들이대지 않으면 안 되는 성질의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무엇을 그 사람들에게서 들을 수 있었던가. 거기에도 또한, 저주할 만하고 가엾이 여길 만한 성급한 마음이 고개를 쳐들어, 깊고, 강하고, 통절해야 할 고찰을 회피하고, 일찌감치 이미, 마치 남편에게 충실한 처, 처에게 충실한 남편을 비웃고, 신경이 과민하지 않은 사람을 비웃는 것과 같은 태도로, 국가라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을 비웃는 듯한 경향이, 어떤 종류의 청년들 사이에 풍조를 이루는 일은 없는가. 적어도, 그러한 실제 사회 생활상의 문제를 언급하지 않는 일을, 충실한 문예가, 발랄한 근대인의 면목이라는 식으로 보이고 있는, 혹은 보고 있는 사람은 없는가. 실제상의 문제를 경멸하는 일을 근대의 허무적 경향이라며 속단하는 사람은 없는가. 있다. 적어도, 우리로 하여금 그러한 식으로 의심하게 만드는 경향이, 현대의 어느 한 구석에 분명히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3)
성급한 마음은, 목적을 잃은 마음이다. 이 산봉우리에서 저 산봉우리로 가려 하면서, 마땅히 거쳐야 할 길을 밟지 않고, 한달음에, 발을 땅에서 떼어 놓은 마음이다. 위험하기 짝이 없다. 목적을 잃은 마음은, 그 사람의 생활의 의의를 파산케 하는 것이다. 인생의 문제를 고찰한다는 사람으로서, 만일 자기 자신의 생활의 내용을 이루고 있는 실제상의 여러 문제를 경멸한다면, 자기 그 자체를 경멸하는 자이지 않으면 안 된다. 자기를 경멸하는 사람, 땅에서 발을 떼어 놓은 사람이, 인생에 대해 생각한다는 그 자체가 이미 모순이며, 골계이며, 또 비참하다. 우리는 무엇을 그러한 사람들에게서 들을 수 있겠는가. 값싼 고백이라거나, 공상상의 회의라는 비평이 있는 까닭이다.
다나카 기이치(田中喜一) 씨는, 그러한 현대인의 성급한 마음을 보고, 지극히 두려워할 만한 웃음을 지었다. 가로되, “모든 행위의 근저이며, 모든 사색의 방침인 지식을 지니지 않은 그들 문예가가, 조금이라도 일을 논하려 들면, 관찰의 착오와, 추리의 모순이 거듭 잇따라 나오는 것인데, 이 원인을 캐어 보면, 결국 두 가지로 귀착된다. 그 하나는 그들이 한때의 상태를 영구한 경향이라 보는 것이며, 또 하나는 국부의 측상을 전체의 본질이라 여기는 것이다.”
자기를 경멸하는 마음, 발을 땅에서 떼어 놓은 마음, 시대의 약점을 공유하는 일을 자랑으로 삼는 마음, 그러한 성급한 마음을 만일 “근대적”인 것이라 한다면, 아니, 이른바 “근대인”이 그러한 마음을 지니고 있는 자라면, 우리는 차라리 물러서서, 자기가 그러한 사람들보다 더 많이 “비근대적”임을 믿고, 또 자랑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가장 성급하지 않은 마음으로써, 가능한 한 빨리 자기 생활 그 자체를 개선하고, 통일하고 철저히 해야 할 노력에 종사해야 할 것이다.
우리 일본인이 최근 사십 년간의 새로운 경험에서 비롯하여 일으킨 반성은, 모든 의미에서, 아직 얕다.
또한 만일, 내가 여기에서 지적한 것과 같은 성급한 결론 내지 고백을 입에 올리고, 붓에 옮기면서, 한편으로 자기 생활을 개선하는 어떠한 노력을 영위하고 있는데, 가령 퇴폐적이라는 말을 입으로 찬미하면서, 자기 뇌신경의 불건강을 앓아 코 치료를 하고, 부부 관계가 무의미하다고 말하면서 가정의 사정을 누그러뜨릴 어떠한 노력을 하고, 그리하여 그 모순에 근대인의 슬픔, 괴로움, 내지 절망이 있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경우에 있어 “근대적”이라는 것은 허위이다. 우리는, 그러한 사람도 언젠가는 그 이중의 생활을 통일하고, 철저히 하고자 하는 요구와 마주치게 되리라 믿고, 어디까지든 장래 일본인의 생활에 대한 신념을 힘차게 부둥켜안고 가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