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충렬전 1 — 유심의 기자 발원과 충렬의 탄생
각설이라. 대명국 영종황제 즉위 초에 황실 기세가 미약하고 정령이 행해지지 아니하는 중에, 남만·북적과 서역 오랑캐가 강성해져 모반할 뜻을 품었더라. 이런 까닭에 천자는 남경에 머물 뜻이 없어 다른 곳으로 도읍을 옮기고자 하시더니, 이때 마침 창해국 사신이 왔으매 성은 임이요 이름은 경천이라 하는 사람이었거늘, 천자 반기어 인견하시고 접대한 후에 도읍 옮기는 일을 의논하시니, 임경천이 아뢰되, 소신이 옥루에서 육대 산천을 바라보오니 지금 황성 자리가 마땅하옵고, 천하 명산 오악 중에 남악 형산이 가장 신령한 산이요 일국 추룡이 되었으며, 창오산 구리봉은 변화하여 외청룡이 되었고, 소상강 동정호는 수세가 광활하여 내청룡이 되어 내수구를 막으니 제왕 자리로 길이 유지될 것이옵나이다.
또한 소신이 수년 전에 본국에서 바라보온즉, 북두칠성 정기가 남경에 하강하고 삼태성 채색이 황성에 빛나며 자미원 대장성이 남방에 떨어졌으니, 머지않아 신기한 영웅이 날 것이오니 황상께서는 이처럼 조그마한 일로 이 금성지를 버리시며 선황제의 만구방지를 어찌 하루아침에 버리시렵니까. 천자 이 말을 들으시고 마음이 상쾌하여 도읍 옮기심을 파하시고 국사를 다스리시니, 시절이 태평하고 인심이 조화로웠더라. 이때 조정에 한 신하가 있으되 성은 유요 이름은 심이니, 전일 선조 황제 개국공신 유기의 십삼 대손이요 전 병부상서 유현의 손자라. 세대 명가 후예로 공후작록이 떠나지 아니하더니, 유심의 비살리정은 주부 곁에 있는지라.
위인이 정직하고 성정이 민첩하며 일심이 충성스러워 국록이 중하니 가산이 요부하고, 작법이 화평하니 세상 공명은 일대의 제일이요 인간 부귀는 만민이 칭송하되, 다만 슬하에 일정 혈육이 없어 매일 한탄하더니, 일 년에 한 번씩 선영 제사를 지내면 홀로 앉아 우는 말이, 슬프다, 내 몸이 무슨 죄 있어 국록은 먹건마는 자식이 없으니, 세상에 좋다 한들 좋은 줄 어찌 알며 부귀가 영화롭되 영화된 줄 어찌 알리요. 나 죽어 청산에 묻힌 백골을 뉘라서 거두며 선영 행화를 뉘라서 주장하리. 해음 없는 눈물이 옷깃을 적시는지라. 이리 탄식하며 서러워하니, 부인 장씨는 이부상서 장윤의 장녀라. 주부 곁에 앉아 따라 일심이 비감하여 이르되, 상공의 무후하심은 소첩의 박복함이라.
첩의 죄를 논한다면 벌써 쫓겨날 것이로되 상공의 음덕으로 지금까지 부지하오니, 부끄러운 말씀을 어찌 다 하오리이까. 듣사오니 천하에 절승한 산이 남악 형산이라 하오니 수고를 생각지 말고 산신께 발원하여 정성이나 들려보사이다. 주부 이 말을 듣고 대왈, 하늘이 점지하지 않아 팔자에 없으니, 빌어 자식을 낳을진대 세상에 무자한 사람이 있으리요. 장부인이 여쭈오되, 체면을 생각하면 그 말씀도 당연하되, 만고 성현 공부자도 이구산에 빌어 나셨고 정나라 정자산도 우성산에 빌어 났으니 우리도 빌어보사이다. 주부 이 말을 듣고 삼칠일 재계를 정히 하고 소복을 정제하며 제물을 갖추고 축문을 별도로 지어, 부인과 함께 남악산을 찾아가니 산세 웅장하더라.
봉이 높은 곳에 청송은 울창하여 태고시를 띠었고, 강수는 잔잔하여 탄금 소리를 도왔더라. 칠천 심이봉은 구름 밖에 솟아 있고, 층암절벽 위에 각색 백화가 만발하였으며, 소상강 아침 안개는 동정호로 돌아가고, 창오산 저문 구름은 호산대로 돌아들며, 강수성을 바라보고 수양가지 부여잡고 육칠 리를 들어가니 연화봉이 중겠구나. 상대에 올라 사방을 살펴보니, 옛날 하우씨가 구년 지수를 다스리시고 층암절벽 팠던 터가 어제인 듯 완연하며, 산천이 심히 엄숙한 곳에 천제당을 높이 묻고 백마를 잡던 터가 완연하였더라. 추연을 돌아보니 옛날 위부인이 서동 오륙 인을 거느리고 도학하던 일층단이 뚜렷하다. 일층단에 별도로 마련하여 노구밥을 정결히 담아 놓고, 부인은 단하에 배좌하고 주부는 단상에 궤좌하여 분향 후 축문을 내어 옥성으로 축수할 제, 그 축문에 이르되, 유세차 갑자년 갑자월 갑자일에 대명국 동성문 안에 거하는 유심은 형산 신령 전에 비나이다.
오호라, 대명 태조 창국공신의 지손이라. 선대의 공덕으로 부귀를 겸전하고 일신이 무량하나, 연광이 반이 넘도록 일성 혈육이 없으니 사후 백골을 뉘라서 엄토하며 선영 행화를 뉘라서 봉사하리요. 인간의 죄인이요 지하의 악귀로다. 이리한 일을 생각하니 원한이 만심이라. 이러한 고로 더러운 정성을 신령 전에 발원하오니, 황천은 감동하여 자식 하나 점지하옵소서. 빌기를 다하매 지성이면 감천이라 황천인들 무심할까. 단상에 오색구름이 사면에 옹위하고, 산중에 백발 신령이 일제히 하강하여 정결히 지은 제물을 모두 흠향하는구나. 길조가 여차하니 귀자가 없을손야. 빌기를 다한 후에 만심 고대하던 차에 얼핏 한 꿈을 얻으니, 천상으로서 오운이 영롱하고 일원 선관이 청룡을 타고 내려와 이르되, 나는 형용을 차지한 선관이더니 익성이 무도한 고로 상제께 아뢰어 익성을 취죄하여 다른 방으로 귀양을 보내었더니, 익성이 그로 인해 함심하여 백
옥루 잔취 시에 익성과 괴대 전하던 흐로 상제 전에 투죄하여 인간에 내치시매 갈 바를 모르더니, 남악 산신령이 부인 덕으로 자시하기로 왔사오니 부인은 이 훌하옵소서. 하고 타고 온 청룡을 오운 간에 방송하며 이르되, 일후 풍진 중에 너를 다시 찾을 것이라 하고 부인 품에 달려들거늘, 놀라 깨어나니 일장춘몽 황홀하다. 정신을 진정하여 주부를 청입하여 몽사를 설화하매, 주부 기쁜 마음 비할 데 없어 부인을 위로하고 춘정을 붙여두었더라. 생남하기를 만심 고대하더니, 과연 그달부터 태기 있어 십삭이 차 인수에 옥동자를 탄생할 제, 방 안에 향취 있고 문밖에서 서기 빛이 넘쳐 서광은 만지하고 서채는 충천하는 중에, 일원 선녀가 오운 중에 내려와 부인 앞에 궤좌하여 백옥상에 놓인 과실을 부인께 드리며 하는 말이, 소녀는 천상 선녀옵더니 금일 상제 분부하시되, 자미원 장성이 남기어 유심의 집에 환생하였으니 네 바삐 내려가 산모를 구완하고 유아를 잘 거두라 하시
기로, 백옥병에 행탕수를 부어 동자를 씻기시면 백병이 소멸하고, 유리대에 있는 과실을 산모가 잡수시면 명이 장생불사하오리다. 부인이 그 말을 듣고 유리대에 있는 과실 세 개를 모두 쥐니, 선녀 여쭈오되, 이 과실 세 개 중에 하나는 부인이 잡수시고, 또 하나는 공자를 먹일 것이요, 또 한 개는 일후에 주부가 잡수실 것이니 다 각기 임자를 옥황께서 점지하신 과실이오니 잊지 말고 잡수시렵니까. 행탕수를 부어 한 개를 잡수신 후에 옥동자를 채금 속에 뉘어 놓고 부인께 하직하고 오운 속에 싸여 가니, 반공에 어렸던 서기 떠나지 아니하더라. 부인이 선녀를 보낸 후에 일어나 앉으니 정신이 상쾌하고 청수한 기운이 전일보다 배나 더하더라. 주부를 청입하여 아기를 보이며 선녀의 하던 말을 낱낱이 아뢰니, 주부 공중을 향하여 옥황께 사례하고 아기를 살펴보니 웅장하고 기이하다. 청정이 광활하고 지각이 방원하여 초상 같은 두 눈썹에는 강산 정기 서렸고, 명월 같은 앞
가슴에는 천지조화 풍이 스며 단산의 봉황 눈은 두 귀밑을 돌아보고, 칠성의 사인종학융준용안이 번듯하다. 북두칠성 맑은 별은 두 팔뚝에 박혀 있고, 뚜렷한 대장성이 앞가슴에 박혔으며, 삼태성 정신별이 배 위에 떠 있는데 주홍으로 새겼으되 대명국 대사마 대원수라 은으로 막혀 있으니, 웅장하고 기이함은 만고에 제일이요 천추에 하나로다. 주부 기운이 상쾌하여 부인을 돌아보며 왈, 이 아이 상을 보니 천인 적강이 적실하고 만고영웅 분명하다. 전일 황상께서 도읍을 옮기고자 하시어 창해국 사신 임경천에게 물으시니, 임경천이 아뢰기를 북두 정기는 남경에 하강하고 자미원 대장성이 황성에 떨어졌으니 머지않아 신기한 영웅이 나리라 하더니, 이 아이가 적실하니 어찌 아니 기쁘오리까. 오래지 아니하여 대장절월을 요하에 횡대하고 상장군 인수를 금낭에 넌지시 넣어 두고, 부귀영화는 선영에 빛내고 맹기영풍은 사해에 진동할 제 뉘 아니 칭찬하리요. 산신의
깊은 은덕은 사후에도 잊지 못할 것이요 백골이 될지라도 잊을손야. 이름을 충렬이라 하고 자는 성학이라 하다. 세월이 여류하여 칠 세에 당하매, 골결은 청수하고 총명은 발체하여 필법은 왕희지요 문장은 이태백이며, 문예 장략은 손오에게 지지 아니하더라. 천문지리는 흉중에 갈무리하고 국가흥망은 장중에 매였으니, 말 달리기와 용검지술은 천신도 당치 못할 것이라. 오호라, 시운이 불행하고 조물이 시기한지 유 주부 세대 부귀 지극하더니, 사람의 흥진비래가 미쳤으니 어찌 피할 가망이 있을손야. 유 주부는 조참 적소하고 장부인은 피화 봉수적하다. 각설이라. 이때 조정에 두 신하 있으되 하나는 도총대장 정한담이요 또 하나는 병부상서 최일귀라. 본디 천상에 성으로 자미원 대장선과 백옥루 잔취에 대전한 죄로 상제께 득죄하여 인간에 적강하여 대명국 황제의 신하가 되었는지라. 본시 천상지인으로 지략이 유여하고 술법이 신묘한 중에, 금산사 옥관도
사를 데려다 기별달에 기처하고 술법을 배웠으니, 만부 영시에 용이 있고 백만 군중 대장지지라. 벼슬이 일품이요 포악이 무쌍이라. 만민의 성사는 장중에 매여 있고 일국의 권세는 손끝에 달렸으니, 초나라 회왕의 항적이요 당나라 명황의 안록산이라. 일상 마음이 천자를 도모하고자 하되, 다만 정언 주부의 직간을 꺼렸고, 또한 퇴저상 강희주의 상소를 꺼려 중지한 지 오래더니, 영종황제 즉위 초에 열국 제왕들이 사신을 보내어 조공을 바치되, 오직 토번과 가달이 강포만 믿고 천자를 능멸히 여겨 조공을 바치지 아니하거늘, 한담과 일귀 두 사람이 때를 타서 천자께 여쭈오되, 폐하 즉위하신 후에 덕이 만민에 미치고 위엄이 사해에 진하며 열국 제신이 다 조공을 바치되, 오직 토번과 가달이 강포만 믿고 천명을 거스르니, 신들이 비록 재주 없사오나 남적을 항복받아 충신으로 돌아오며 폐하의 위엄이 남방에 가득하고 소신의 공명은 후세에 전할 것이니, 복원 황상은
깊이 생각하옵소서. 천자 매일 남적이 강성함을 근심하더니 이 말을 듣고 대희하여 왈, 경의 마음대로 기병하라 하시니라. 이때 유 주부 조회하고 나오다가 이 말을 듣고 탑전에 들어가 복지 아뢰되, 듣사오니 폐하께서 남적을 치라 하시어 기병하신다는 말씀이 올으니이까. 천자 왈, 한담의 말이 여차여차하기로 그런 일이 있노라. 주부 여쭈오되, 폐하 어찌 망령되게 허락하셨나이까. 왕실은 미약하고 외적은 강성하니, 이는 잠자는 범을 찌름 같고 물러나는 세를 놓침이라. 한낱 새알이 천근 무게를 떠받들 수 있겠사오며, 가련한 백성이 사장의 고혼이 되면 귀신인들 아니 적할 것이오니, 복원 황상은 기병치 마옵소서. 천자 그 말을 들으시고 호의만단하던 차에, 한담과 일귀 일시에 합주하되, 유심의 말을 들으시오니 살지무석이요 오국 간신과 동류로소이다. 대국을 저버리고 도적놈만 칭찬하여 개미 무리를 대국에 비하고 한낱 새알을 폐하에 비하니, 일대의 간신이요 만고의 역적이
라. 신들은 저어하건대 유심의 말이 가달을 못 치게 하니 가달과 동심하여 내응이 된 듯하오니, 유심을 선참하고 가달을 치사이다. 천자 허락하려 하거늘, 한림학사 왕공열이 유심 죽인다는 말을 듣고 복지 아뢰되, 주부 유심은 선황제 개국공신 유기의 손이라 위인이 정직하고 일심이 충전하오니, 남적을 치지 말자는 말이 사리 당연하옵거늘 그 말을 죄라 하여 충신을 죽이시면, 태조황제 사당 안에 유상공을 배향하였으니 춘추로 행사할 때에 무슨 면목으로 뵈오리이까. 유심을 죽이면 직간할 신하 없을 것이니 황상은 생각하여 죄를 용서하옵소서. 천자 이 말 듣고 한담을 돌아보니, 한담이 여쭈오되, 유심을 죄하실진대 만사무석이오나 공신의 후예이니 죄목대로 다 못 하오나 정배나 하사이다. 천자 옳다 하시고 황성 밖에 원찬하라 하시니, 한담이 청명하고 승상부에 높이 앉아 유심을 잡아내어 죄를 물어 말하기를, 네 죄를 논한다면 선참 후계 당연하나 국은이 망극하사 네 목숨을
살려주니, 일후는 그런 말을 말라 하고 연북으로 정배하여 어서 바삐 발행하라. 만일 잔말하다가는 능지처참하리라. 주부 이 말을 들으매 분심이 창천하여 잠시 후 하는 말이, 내 무슨 죄 있기에 연북으로 간단 말가. 왕망이 십정하매 한실이 미약하고 동탁이 작란하니 충신이 다 죽었다. 나 죽은 후에 내 눈을 빼어 동문에 높이 달아, 가달국 적장 손에 너의 머리 떨어지는 것을 완연히 보리라. 지하에 돌아가되 오자서의 충혼에 부끄럽게 말라. 한담이 말 듣고 분심이 창천하여 왈, 어명이 여하하니 무슨 발명이냐 하고 궐문에 들어가며 금부도사 재촉하여 유심을 치질하여 연북으로 가라 하는 소리 성화 같이 재촉하니, 유 주부 하릴없어 적소로 가려 하고 집으로 돌아오니 일가가 망극하여 곡성이 진동하더라. 주부 충렬의 손을 잡고 부인에게 하는 말이, 우리 연광이 반이 넘도록 일개 자녀 없더니 황천이 감동하사 이 아들을 점지하여 봉황의 짝을 얻어 영화를
보려 하였더니, 가운이 소체하고 조물이 시기하여 간신의 참소를 만나 말리 적소로 떠나가니 살아 돌아올지 모르겠구나. 언제 어느 날에 다시 볼고. 나 같은 인생은 조금도 생각 말고 이 자식을 길러내어 후사를 받들게 하며, 황천에 돌아가도 눈을 감고 갈 것이요 부인의 깊은 은덕은 후세에 갚으리다. 하고 충렬을 붙들고 슬피 울며 하는 말이, 너의 아비 무슨 죄로 먼 연경에 간단 말가. 너를 두고 가는 서름이 단산에 나는 봉황 알을 두고 가는 듯, 북해 흑룡이 여의주를 버리고 가는 듯, 통박하고 서러운 원정을 입으로 다 설이라 생각하니 기가 막혀 말할 길이 없고, 일시나 있자 하니 가슴에 맺힌 한이 죽은들 잊을손야. 너의 아비 생각 말고 너의 모친을 모셔 무사히 지내며, 봄풀이 푸르거든 부자 상면한 줄 알고 있으라 하며 방성통곡하며, 죽도를 끌어 충렬을 채우면서, 구천에 상봉한들 부자 신표 없을손야. 이 칼을 잃지 말고 부디 간수하여 두라. 처자를 이별하고 행장을 바삐 챙겨
문밖에 나오니 정신이 아득하고, 한 번 걸음 두 번 걸음 열 걸음 백 걸음에 구곡 산장 다 녹으며 일편단심 다 녹겠다. 성중에 보는 사람 뉘 아니 낙루하며 강산초목이 다 슬퍼하는구나. 동성문 나서면서 연경을 바라보며 영거사를 따라갈 제, 삼일을 행한 후에 첨송영을 지나 옥해관에 당도하니 이때는 추말월 당간이라. 찬 바람은 소슬하고 낙목은 소한한데, 정전에 국화꽃 짙어 추구수심 떠 있고, 벽공에 걸린 달은 삼경 아회를 돕는데리, 창한 등 깊은 밤에 촉불로 벗을 삼아 객침 베고 누웠으니, 타향의 가을 소리 손의 수심 다 녹인다. 공산에 우는 두견 소리는 귀촉도 불여귀를 일삼고, 청천에 뜬 기러기는 창밖에 슬피 울 제, 행역에 곤한들 잠들 가망이 전혀 없어 그 밤을 지낸 후에, 이튿날 길을 떠나 소상강을 바삐 건너 멱라수에 다다르니, 이곳은 흔히 초나라 회왕 때 만고충신 굴삼려가 간신의 해를 보고 역반에 장사한 땅이라. 후인이 비감하여 회사정을 높이 짓고 조문을 지었으되, 일월
같이 빛난 충은 만고에 빛나 있고 금석 같이 굳은 절개 천추에 밝았으니, 이때 지내는 사람 뉘 아니 감심하리. 이리 서글픈 일을 선판에 붙였거늘, 유 주부 글을 보니 충심이 직발하여 행장의 필묵을 꺼내 들고 회사정 동벽 위에 대자로 쓰기를, 대명국 유심은 간신 정한담과 최일귀의 참소를 만나 연경으로 적거하더니, 일월 같이 밝은 마음 변백할 길이 없고 빙설 같이 맑은 절개 뵐 곳이 바이없어 멱라수에 지내다가 굴삼려의 충혼 만나 물에 빠져 죽으니라. 쓰기를 다한 후에 물가에 내려가서 사향날에 축수하고 일성통곡에 옷자락으로 눈을 가리고, 만경창파 깊은 물에 훌쩍 뛰어드니, 이때 영거하던 사신이 이를 보고 전지도지 달려와 손을 잡고 말려 왈, 충성은 천신도 알 것이라. 그대의 죄 안은 천자께 매여 있으니, 명을 받아 적소로 가옵다가 이곳에서 죽으면 나도 또한 죽을 것이요, 그대 적소를 버리고 죽으면 무죄함은 천하가 아는 바이라. 천행으로
천자 감심하사 수히 방송할 줄 모르오니, 죽어서 충혼이 될지라도 살아서 못할손야. 한사하고 말유하여 백사장에 들어내니, 유 주부 하릴없어 회사정을 지나 황주에 다르니, 서회가 여기로다. 송나라 망국 시에 일품 대신들이 국사를 돌보지 아니하고 풍악만 일삼아 한때 취함으로 서회의 고운 태도 서시에게 비하였으니 어찌 아니 망극하랴. 그 땅을 지나니 삼색만에 연경에 당도한지라. 유 주부 자사께 예사한대, 자사 본 후에 주부를 인도하여 객실로 전송하니, 주부 물러나와 적소로 들어가니 이때는 동절이라. 연경은 본디 극한한 땅이라 삼장 백설이 쌓여 있고, 퇴락한 객실 방에 냉풍은 소슬하고 백설은 분분하여 인적이 끊어지니 불상하고 상한 뜻 충량치 못할 데라. 각설이라. 이때 정한담 최일귀가 유 주부를 참소하여 적소로 보낸 후에 마음이 교만하여 별당으로 들어가 옥판도사를
청하여 천자를 도모할 묘책을 물은대, 도사 문밖에 나와 천기를 자세히 보고 들어와 하는 말이, 이사에 밤마다 살펴보온즉 두려운 일이 황성에 있는가 하나이다. 한담이 문왈, 두려운 일이라 하오니 무슨 일이 있나이까. 도사 왈, 천상에 삼태성이 황성에 빛쳤으되 그중에 유심의 집에 빛쳤으니, 유심은 비록 연경에 갔사오나 신기한 영웅이 황성 안에 살아 있으니 그대 도모할 일이 어려울 듯하노라. 한담이 말을 듣고 내당에 나와 도사 하던 말을 일귀에게 하니, 일귀 대왈, 도사의 신기함은 천신에게 지나니 신기한 영웅이 황성 안에 있다 하니 진실로 마음이 황공하나이다. 한담이 왈, 내 생각하니 유심이 연로하고 자식이 없는 고로 수년 전에 형산에 산제하여 자식을 얻었다 하더니, 도사의 말씀이 황성에 있다 하니 의심컨대 유심의 아들인가 하노라. 일귀 왈, 적실히 그러하다면 유심의 집을 합몰하여 후환이 없게 함이 옳을까 하노라. 한담이 옳다 하고 그달 삼경에 가
만히 승상부에 나와 나졸 십여 명을 최출하여 유심의 집을 둘러싸고, 화약 염초를 갖추어 그 집 사방에 묻어 놓고 화심에 불 붙여 일시에 불을 놓으라고 약속을 정하니라. 이때 장부인이 유 주부를 이별하고 충렬을 데리고 한숨으로 세월을 보내더니, 이날 밤 삼경에 피로하여 곤히 침석에 졸더니, 어떠한 흰 노인이 홍선 일병을 가지고 와서 부인에게 주며 왈, 이 날 밤 삼경에 대변이 있을 것이니, 이 부채를 가졌다가 화광이 일어나거든 부채를 흔들면서 후원 단상 밑에 은신하였다가 충렬만 데리고 인적이 끊긴 후에 남쪽을 바라보고 갓 없이 도망하라. 만일 그렇지 아니하면 옥황께서 주신 이 달에 화광 중에 고혼이 되리다 하고 문득 사라져 없거늘, 놀라 깨어나니 남가일몽이라. 충렬이 잠을 깊이 들어 있고, 과연 홍선 한 자루 금침 위에 놓였거늘, 부채를 손에 들고 충렬을 깨워 앉히고 경불매하던 차에, 삼경이 당하매 일진광풍이 일어나며 난데없는 천불이 사면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