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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자
1
3월 24일. 봄이 이제 완연히 우리 곁에 와 있다. 내 실험실 창밖의 커다란 마로니에 나무는 크고 끈적거리는 진액이 배어나는 봉오리로 온통 뒤덮였는데, 그중 몇몇은 벌써 자그마한 초록 셔틀콕 모양으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오솔길을 걷노라면 사방에서 풍요롭고 고요하게 움직이는 자연의 힘이 느껴진다. 축축한 대지는 기름지고 탐스러운 냄새를 풍긴다. 푸른 새싹이 여기저기서 고개를 내민다. 잔가지는 수액으로 단단히 차 있고, 축축하고 묵직한 영국의 공기에는 희미한 송진 향이 실려 있다. 울타리마다 움이 트고, 그 아래에는 새끼 양이 누워 있으니—어디를 보아도 번식의 역사(役事)가 한창이로다!
밖에서도 그것이 보이고, 안에서도 그것이 느껴진다. 우리 몸에도 봄은 찾아온다. 세동맥이 넓어지고 림프는 더 빠른 물살을 타며, 선(腺)들은 더 힘껏 걸러내고 짜낸다. 해마다 자연은 온 기계를 새로 조율하는 것이다. 바로 지금도 나는 피 속에서 술처럼 끓어오르는 발효를 느낀다. 서늘한 햇살이 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니 나도 각다귀처럼 그 속에서 춤이라도 추고 싶어진다. 실제로 그리하려 했겠지만, 그랬다가는 찰스 새들러가 무슨 일이냐며 위층으로 달려올 것이다. 게다가 나는 내가 길로이 교수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늙은 교수라면 자연스러움을 허용받을 수 있겠으나, 서른넷의 사내에게 행운이 대학 최상급 교수직 하나를 안겨 준 이상, 그는 그 배역을 일관되게 연기하려 애써야 마땅하다.
윌슨이라니, 참으로 대단한 사람이다! 그가 심리학에 쏟는 열정만큼만 내가 생리학에 쏟을 수 있다면, 나는 적어도 클로드 베르나르 급은 될 것이다. 그의 삶과 영혼과 기력은 오로지 한 방향으로만 움직인다. 그는 지난 하루의 결과를 정리하다 잠이 들고, 다음 하루의 연구를 계획하며 깨어난다. 그런데도 그의 일을 좇는 좁은 학계 바깥에서는 그에 대한 인정이 그토록 인색하다. 생리학은 이미 인정받은 과학이다. 그 건축물에 내가 벽돌 한 장만 얹어도 모두가 그것을 보고 박수를 친다. 그러나 윌슨이 하려는 것은 미래의 과학을 떠받칠 기초를 파는 일이다. 그의 일은 지하에 있어 드러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는 불평 한마디 없이 계속해 나간다. 믿을 만한 증인 하나를 얻으리라는 희망으로 반쯤 미친 자들 백 명과 편지를 주고받고, 진실의 티끌 하나를 건지리라는 가능성을 놓고 거짓말 백 개를 체로 거르며, 낡은 책을 견주어 읽고 새 책을 게걸스레 삼키며, 실험하고 강의하며, 저 자신을 태우는 뜨거운 관심을 남들에게도 옮겨 붙이려 애쓴다. 그를 생각하면 경탄과 흠모로 가슴이 벅차지만, 막상 그가 자신의 연구에 나도 합류하자고 청해 오면 나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그의 연구들이 지금 같은 상태에 머물러 있는 한, 정밀 과학에 몸 바친 사람에게는 별다른 매력이 없노라고. 그가 내게 무엇인가 실증적이고 객관적인 것을 보여만 준다면, 그때는 생리학의 각도에서 이 문제에 접근해 볼 마음이 생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피험자 절반이 협잡 기운에 물들어 있고 나머지 절반이 히스테리에 물들어 있는 한, 우리 생리학자들은 몸에 만족하고 마음은 후대에 맡겨 두어야 한다.
내가 유물론자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애거사는 내가 철저한 유물론자라고 말한다. 나는 그녀에게, 그것이야말로 약혼 기간을 단축해야 할 훌륭한 이유가 된다고 답한다. 나는 그녀의 영성(靈性)이 그토록 절실히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그러면서도 나는 교육이 기질에 미치는 영향을 보여 주는 흥미로운 사례를 자처할 수 있다. 나 자신을 속이는 것이 아니라면, 나는 본성상 심령적 감수성이 매우 강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는 신경질적이고 예민한 소년이었으며, 몽상가였고 몽유병자였고, 온갖 인상과 직관으로 가득한 아이였다. 검은 머리, 검은 눈, 올리브빛이 도는 가느다란 얼굴, 끝이 뾰족한 손가락—이 모든 것이 내 본래 기질의 특징이며, 윌슨 같은 전문가들이 나를 자기 쪽 사람이라 주장하게 만드는 까닭이다. 그러나 내 뇌는 정밀한 지식으로 흠뻑 젖어 있다. 나는 오로지 사실과 증거만 다루도록 나 자신을 훈련해 왔다. 짐작과 공상은 내 사유 체계 안에 자리가 없다. 현미경으로 볼 수 있는 것, 해부도로 자를 수 있는 것, 천칭으로 달 수 있는 것을 보여 달라, 그러면 나는 일생을 그것의 탐구에 바치겠다. 그러나 감정과 인상과 암시를 연구하라 청하는 것은, 내게 불쾌할 뿐 아니라 사기마저 꺾는 일을 강요하는 것이다. 순수 이성에서 벗어나는 일은 내게 악취처럼, 혹은 음악의 불협화음처럼 거슬린다.
그런 까닭에, 오늘 밤 윌슨 교수의 집에 가는 것이 내키지 않는다. 그래도 무례를 무릅쓰지 않고는 초대를 거절하기 어렵겠고, 더욱이 마든 부인과 애거사까지 간다고 하니, 설령 뺄 수 있더라도 빠질 마음이 없어졌다. 그러나 나 같으면 그들을 다른 어느 자리에서라도 만나고 싶다. 윌슨은 기회만 닿으면 나를 제 안개 낀 유사 과학 속으로 끌어들이리라. 열정에 사로잡힌 그에게 은근한 암시도 정중한 만류도 통하지 않는다. 노골적인 말다툼을 벌이지 않는 한, 내가 그 모든 일을 얼마나 혐오하는지 그는 실감하지 못한다. 분명 오늘 밤에도 그는 새로운 최면술사든 투시자든 영매든 사기꾼 따위든 우리에게 선보이려 하리라. 그가 여는 자리에는 어김없이 그의 취미가 묻어나기 때문이다. 뭐, 애거사에게는 그래도 좋은 구경거리가 되겠지. 여자들이 대개 그러하듯, 애매하고 신비롭고 손에 잡히지 않는 것에는 그녀도 흥미를 가진다.
밤 10시 50분. 이렇게 일기를 쓰는 습관은, 아마 오늘 아침에 적었던 그 과학자다운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나는 인상이 신선할 때 그것을 기록해 두기를 좋아한다. 하루에 적어도 한 번씩은 내 마음의 좌표를 확인하려 애쓴다. 쓸모 있는 자기 분석이거니와, 성품을 차분하게 다잡아 주는 효과도 있다고 나는 믿는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내 성품은 내가 줄 수 있는 만큼의 버팀이 필요하다. 내가 여전히 신경질적 기질을 적잖이 지닌 채, 머독이나 프랫-홀데인 교수처럼 서늘하고 차분한 정밀함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이 두렵다. 그렇지 않다면, 오늘 저녁 내가 목격한 그 광대짓이 지금까지도 내 신경을 이토록 울리게 하여 마치 풀린 현처럼 떨리게 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유일한 위안이라면, 윌슨도 펜클로사 양도, 심지어 애거사도 내 이 나약함을 알아챘을 리 없다는 점이다.
그리고 대체 나를 흥분시킬 만한 것이 거기에 무엇이 있었단 말인가?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워낙 하찮아 이렇게 적어 내려가면 우스꽝스러워 보일 정도다.
마든 댁 사람들은 나보다 먼저 윌슨의 집에 도착해 있었다. 사실 나는 가장 늦게 온 축에 속했고, 방은 이미 손님으로 북적였다. 마든 부인과, 흰색과 분홍의 드레스에 머리에 반짝이는 밀 이삭 장식을 꽂아 더없이 사랑스러운 애거사에게 겨우 인사를 건넬 참이었는데, 윌슨이 내 소매를 잡아끌며 다가왔다.
“자네 실증적인 것을 원한다고 했지, 길로이,” 그가 나를 구석으로 끌고 가며 말했다. “이보게, 오늘 내가 현상을 하나 확보했네—현상을 말일세!”
같은 말을 전에도 들어 봤지 않았다면 더 솔깃했으리라. 그의 낙천적 기상은 개똥벌레조차 별로 바꾸어 놓는다.
“이번엔 진정성에 조금의 의심도 있을 수 없네,” 그가 내 눈에 어린 희미한 재미의 빛을 눈치챘음인지 이어 말했다. “내 아내가 그녀를 오래전부터 알고 있다네. 두 사람 다 트리니다드 출신이거든, 알잖나. 펜클로사 양은 영국에 온 지 한두 달밖에 되지 않았고, 대학 주변 사람 말고는 아는 이가 없어. 그런데도 단언하건대, 그녀가 우리에게 들려준 것만으로도 투시 현상을 전적으로 과학적 기반 위에 세우기에 부족함이 없어. 아마추어든 직업이든 이만한 사람은 없네. 자, 가세, 소개해 주지!”
이런 수수께끼 장사치들치고 내가 좋아할 만한 부류는 없지만, 그중에서도 아마추어가 가장 거북하다. 돈을 받고 하는 자라면, 속임수가 보이는 순간 덮쳐서 그 자리에서 까발려도 그만이다. 그는 그대를 속이려고 거기 서 있고, 그대는 그를 잡아내려고 거기 앉아 있다. 하지만 주인 부인의 벗을 어찌하란 말인가? 느닷없이 불을 켜서 몰래 밴조를 튕기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드러내기라도 할 셈인가? 아니면 그녀가 인광병과 초자연적 상투구를 들고 슬그머니 돌아다닐 때 이브닝드레스에 연지벌레 염료를 끼얹기라도 할 셈인가? 한바탕 소란이 벌어질 테고, 그대는 난폭한 자로 보이리라. 그러니 그런 사람이 되든, 감쪽같이 속아 넘어간 바보가 되든, 양자택일이 있을 뿐이다. 나는 도무지 썩 좋지 않은 기분으로 윌슨을 따라 그 숙녀 앞으로 나아갔다.
서인도 태생이라는 내 막연한 짐작과 이토록 동떨어진 사람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녀는 작고 가녀린 체구였고, 나이는 족히 사십은 넘어 보였으며, 얼굴은 창백하고 뾰족했고, 머리칼은 매우 옅은 연갈색이었다. 존재감은 희미했고 몸가짐은 조심스러웠다. 열 명의 숙녀 가운데에 섞여 있어도 가장 마지막에 눈에 띌 사람이었다. 가장 인상적인 —그리고 내가 말해야만 하는바, 가장 거슬리는— 부분이 있다면 아마도 그녀의 눈이었다. 회색이었는데—녹빛이 살짝 도는 회색이었고—눈빛은 분명히 무언가 숨기는 듯한 음흉함이 깃들어 있었다. 음흉하다는 말이 맞는지 모르겠다. 차라리 사납다고 했어야 할까? 다시 생각해 보니, 고양이 같다고 하는 편이 더 잘 들어맞는다. 벽에 기대 세워 둔 목발이, 그녀가 일어설 때 한층 또렷이 드러나는 사실을 앞서 알려 주었다. 다리 한쪽이 불편하다는 사실이었다.
그렇게 나는 펜클로사 양에게 소개되었는데, 내 이름이 불리는 순간 그녀가 애거사 쪽으로 시선을 던지는 것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윌슨이 미리 이야기를 흘려 놓은 모양이었다. 이제 곧, 틀림없이, 하고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녀가 오컬트의 힘을 빌려, 내가 머리에 밀 이삭을 꽂은 젊은 숙녀와 약혼 중이라는 사실을 일러 주리라. 윌슨이 나에 대해 얼마나 더 많은 이야기를 그녀에게 건네 놓았을지 궁금해졌다.
“길로이 교수는 대단한 회의주의자입니다,” 윌슨이 말했다. “바라건대, 펜클로사 양, 이 사람을 돌려세워 주시지요.”
그녀가 예리한 눈길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아직 확신할 만한 것을 못 보신 거라면 길로이 교수께서 회의적이신 것도 지당하지요,” 그녀가 말했다. “그런데,” 그녀가 덧붙였다. “교수님 스스로가 아주 훌륭한 피험자가 되실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만.”
“무엇의 피험자 말씀이신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내가 말했다.
“글쎄요, 예컨대 최면술의 피험자 말입니다.”
“내 경험으로는, 최면술사들은 피험자를 구할 때 정신이 온전치 못한 사람들 쪽으로 간답니다. 그들의 모든 결과는 — 내가 보기에는 — 비정상 유기체를 다룬다는 사실 때문에 오염되어 있지요.”
“여기 있는 숙녀분들 중에 정상 유기체를 지니셨다고 보시는 분은 누구신지요?” 그녀가 물었다. “가장 균형 잡힌 정신을 지녔다고 보이는 분을 한 번 골라 주십시오. 저 분홍과 흰색 드레스의 아가씨는 어떠신지요?—애거사 마든 양이시라지요, 성함이.”
“그렇습니다. 그분에게서 나오는 결과라면 나도 무게를 둘 겁니다.”
“저분이 어느 정도까지 감응하시는지는 아직 시험해 보지 않았어요. 물론 어떤 분들은 남보다 훨씬 빠르게 반응하시지요. 교수님의 회의가 어디까지 미치는지 여쭈어도 될까요? 최면 잠과 암시의 힘 정도는 인정하시리라 믿습니다만.”
“나는 아무것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펜클로사 양.”
“어머, 과학은 그보다는 더 나아간 줄 알았는데요. 물론 저야 그것의 과학적 측면에 대해선 아는 바가 없답니다. 제가 아는 건 오로지 제가 할 수 있는 일뿐이에요. 예컨대, 저기 일본풍 도기 옆에 있는 빨간 옷을 입은 숙녀분이 보이시지요. 저는 저분이 우리 쪽으로 걸어오도록 의지로 명하겠습니다.”
그녀는 말하면서 몸을 앞으로 살짝 숙이더니 부채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 숙녀가 홱 돌아서서 누가 자기를 부르기라도 한 양, 뭔가 묻는 표정을 지으며 곧장 우리 쪽으로 걸어왔다.
“어떤가, 길로이?” 윌슨이 황홀경에 빠진 듯 외쳤다.
차마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에게 말할 수 없었다. 내 눈에는, 그것은 내가 이제껏 목격한 중 가장 뻔뻔하고 낯 두꺼운 눈속임이었다. 공모와 신호가 너무도 빤히 드러나 보였다.
“길로이 교수께선 만족하지 않으시는군요,” 그녀가 그 기묘한 작은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불쌍한 제 부채가 그 실험의 공을 다 가져가게 생겼네요. 그럼, 다른 걸 해 봐야지요. 마든 양, 당신을 잠재워도 괜찮겠어요?”
“어머, 저야 기뻐요!” 애거사가 환호하듯 외쳤다.
이 무렵 자리의 모든 이가 우리 주위로 원을 그리며 모여들었다. 가슴 장식 와이셔츠를 입은 신사들과, 드러낸 목의 숙녀들이, 더러는 외경심에 눌려, 더러는 비판적인 눈길로 지켜보는 모습이 마치 종교 의식과 요술사의 구경거리 사이의 어느 자리에 와 있는 듯했다. 붉은 벨벳 안락의자가 한가운데로 밀려 나왔고, 애거사는 그 의자에 몸을 기댄 채 볼을 살짝 붉히고 흥분으로 가늘게 떨고 있었다. 밀 이삭 장식이 흔들리는 것으로 그녀의 떨림이 내 눈에 들어왔다. 펜클로사 양이 자리에서 일어나 목발에 몸을 의지한 채 그녀 위로 다가섰다.
그러자 그 여자가 돌연 달라졌다. 더는 작지도, 희미하지도 않았다. 나이에서 스무 해가 떨어져 나간 듯했다. 눈은 빛났고, 누르스름한 뺨에 엷은 혈색이 돌았으며, 온 몸가짐이 커져 보였다. 나는 그렇게, 한때는 눈빛이 흐리고 무기력하던 소년이, 스스로 주인 노릇을 할 수 있다고 느끼는 과제 하나를 받자마자 돌연 생기와 활력으로 바뀌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그녀는 애거사를 내려다보았는데, 그 표정을 나는 영혼 깊은 곳에서부터 증오했다—로마 황후가 무릎 꿇은 노예를 내려다볼 때 지었을 법한 그런 표정이었다. 이윽고 그녀는 빠르고 위압적인 몸짓으로 양팔을 위로 치켜들더니, 자기 앞쪽 아래로 천천히 쓸어내렸다.
나는 애거사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세 번의 손짓이 지나가는 동안 그녀는 그저 재미있어하는 듯 보였다. 네 번째에 이르자 두 눈이 약간 흐릿해지고 동공이 가볍게 확장되는 것이 내 눈에 들어왔다. 여섯 번째에는 잠깐의 강직이 스쳤다. 일곱 번째에는 눈꺼풀이 아래로 처지기 시작했다. 열 번째에 이르러 두 눈이 감겼고, 숨은 평소보다 느리고 깊어졌다. 나는 지켜보는 내내 과학자의 차분함을 지키려 애썼으나, 어리석고 영문 모를 동요가 나를 경련처럼 뒤흔들었다. 감춘 것은 같지만, 어둠 속의 어린아이가 느끼는 두려움을 나도 느꼈다. 내가 아직도 그런 나약함에 고스란히 노출돼 있으리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저분은 최면 상태에 드셨어요,” 펜클로사 양이 말했다.
“자고 있지 않습니까!” 나는 외쳤다.
“그럼 깨워 보시지요!”
나는 그녀의 팔을 잡아끌고 귀에 대고 소리쳤다. 내가 아무리 애써도 그녀는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어 보였다. 그녀의 몸은 여기 벨벳 의자 위에 있었다. 장기는 작동하고 있었다—심장도, 폐도. 그러나 영혼은! 그것은 우리의 감각이 닿는 범위 너머로 미끄러져 가 버렸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어떤 힘이 그녀의 영혼을 밀어낸 것인가? 나는 당혹스럽고 혼란스러웠다.
“최면 잠에 대해선 여기까지면 충분하겠고요,” 펜클로사 양이 말했다. “암시로 말하자면, 제가 무엇을 암시하든 마든 양은 어김없이 그대로 행하실 거예요. 지금이든, 최면에서 깨어난 이후든. 그 증거를 요구하시나요?”
“그야 물론입니다,” 내가 말했다.
“그럼 보여 드리지요.” 재미난 생각이라도 떠오른 듯,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스쳐 지나가는 것이 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몸을 굽혀 피험자의 귀에 은밀하게 무언가를 속삭였다. 내 말엔 그토록 먹먹하던 애거사가, 그 귓속말에는 고개를 끄덕여 대답했다.
“깨어나시오!” 펜클로사 양이 외치며 목발 끝으로 바닥을 한 번 날카롭게 두드렸다. 두 눈이 열리고, 흐린 막이 천천히 걷히면서, 기묘한 식(蝕)에서 돌아온 영혼이 다시 한번 바깥을 내다보았다.
우리는 일찍 자리를 떴다. 애거사는 그 기이한 외유에도 별 탈이 없었으나, 나는 신경이 곤두서고 현이 풀려 있었다. 내 유익을 위해 윌슨이 늘어놓는 논평의 물줄기를 귀에 담지도, 대꾸하지도 못했다. 작별 인사를 건네는 순간, 펜클로사 양은 내 손에 종잇조각 하나를 슬쩍 쥐어 주었다.
“부디 용서하세요,” 그녀가 말했다. “제가 교수님의 회의를 이겨 볼 방도를 취하는 것을요. 내일 아침 10시에 이 쪽지를 열어 보세요. 작은 사적 시험이에요.”
그녀가 뭘 뜻하는지 짐작할 수 없지만, 쪽지는 저기 놓여 있고, 그녀가 이른 대로 열어 보리라. 머리가 지끈거린다. 오늘 밤은 이만하면 충분히 썼다. 내일쯤이면 이토록 설명할 수 없어 보이는 일도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을 테지. 나는 한 번 싸움도 없이 내 신념을 내어 주지는 않으리라.
3월 25일. 놀라고 또 당황스럽다. 분명히 이 일에 대한 내 견해를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다만 먼저, 일어난 일을 그대로 기록으로 남겨 두자.
아침 식사를 끝내고, 강의에 쓸 도표를 훑어보고 있는데, 가정부가 들어와 애거사가 서재에 와 있으니 곧바로 만나고 싶어 한다고 전했다. 벽시계를 힐끗 보고 흠칫 놀랐다. 아직 9시 반이었다.
방에 들어서니, 그녀는 난로 앞 깔개 위에 서서 나를 마주 보고 있었다. 그 자세 어딘가가 나를 서늘하게 했고, 입가에 맴돌던 인사말을 가로막았다. 베일은 반쯤 내려져 있었으나, 창백한 낯빛과 긴장된 표정이 그 사이로 고스란히 보였다.
“오스틴,” 그녀가 말했다. “우리 약혼이 끝났다는 걸 전하러 왔어요.”
나는 휘청거렸다. 실제로 휘청거렸다고 생각한다. 어느새 나는 책장에 몸을 기대어 지탱하고 있었다.
“하지만—하지만——” 나는 더듬거렸다. “이건 너무 갑작스럽구려, 애거사.”
“그래요, 오스틴, 저는 우리 약혼이 끝났음을 전하러 여기에 왔어요.”
“하지만 분명히,” 내가 외쳤다. “이유는 말해 줄 것 아니오! 당신답지 않소, 애거사. 내가 무슨 불운한 짓을 저질러 그대의 마음을 상하게 했는지 말해 주시오.”
“모든 게 끝났어요, 오스틴.”
“하지만 왜요? 어떤 오해가 있는 것 아니오, 애거사. 혹시 나에 관해 거짓된 이야기를 들은 것은 아니오. 아니면 내가 그대에게 한 말을 오해했는지도 모르겠구려. 무엇 때문인지만 알려 주시오. 한마디면 다 풀릴 일일 테니.”
“이젠 다 끝난 걸로 여겨야 해요.”
“하지만 어젯밤엔 아무 불화의 기색도 없이 나와 헤어지지 않았소. 그 사이에 그대를 이토록 바꾸어 놓을 무엇이 있었단 말이오? 어젯밤 무슨 일이 일어난 게 분명하구려. 곰곰이 생각해 보고 내 행실이 못마땅했던 것이오? 최면술 때문이었소? 저 여자가 그대에게 그 힘을 쓰도록 허락했다고 나를 탓하는 것이오? 조금이라도 눈치를 주었다면 내가 막아섰으리란 걸 그대도 잘 알지 않소.”
“아무 소용없어요, 오스틴. 모든 게 끝났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차갑고 또박또박했다. 몸가짐은 이상하리만치 격식 차리고 굳어 있었다. 내 눈에는, 그 어떤 논쟁이나 해명에도 일체 끌려들지 않겠다고 굳게 작정한 사람처럼 보였다. 나는 흥분으로 몸이 떨리고 있었고, 자제심을 잃은 모습을 그녀에게 들키는 것이 부끄러워 얼굴을 옆으로 돌리고 말았다.
“이것이 내게 무엇을 뜻하는지 그대는 알 것이오!” 내가 외쳤다. “내 온갖 희망이 부서지고, 내 삶이 파멸하는 것이오! 설마 이런 벌을 나에게 영문도 모른 채 안기려는 건 아니겠지. 무엇이 문제인지만은 내게 알려 주구려. 어떤 경우에도 내가 그대를 이렇게 대할 일은 없었으리라는 걸 생각해 보시오. 제발이오, 애거사, 내가 대체 무엇을 저질렀는지 알려 주구려!”
그녀는 한마디 말도 없이 내 곁을 스쳐 지나가 문을 열었다.
“정말로 소용없어요, 오스틴,” 그녀가 말했다. “우리 약혼은 끝났다고 여겨 주세요.” 한순간 뒤 그녀는 가 버렸고, 내가 미처 정신을 수습해 뒤따라 나서기도 전에 현관문이 등 뒤로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외투를 갈아입으러 방으로 뛰어들었다. 곧장 마든 부인 댁으로 달려가 이 불운의 까닭을 여쭙기 위해서였다. 어찌나 흔들렸던지 구두 끈 하나 매는 것도 버거웠다. 그 끔찍한 십 분을 나는 결코 잊지 못하리라. 외투를 막 걸치는 순간, 벽난로 위 시계가 10시를 쳤다.
10시! 나는 이 숫자를 펜클로사 양의 쪽지와 연결 지었다. 쪽지는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나는 그것을 북 뜯어 열었다. 유난히 각진 필체로, 연필로 휘갈긴 쪽지였다.
“친애하는 길로이 교수님께 [쪽지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이 시험의 사적인 성격을 부디 너그러이 용서해 주시옵소서. 윌슨 교수께서 오늘 저녁 제 피험자와 교수님 사이의 관계를 우연히 말씀해 주신 터라, 제가 내일 아침 9시 반에 마든 양이 교수님을 찾아뵙고 반 시간 남짓 약혼을 중단하시도록 암시를 드려 보이는 것보다 더 확실한 증거는 없으리라 여겨졌습니다. 과학은 참으로 까다로워 만족스러운 시험을 마련하기가 쉽지 않습니다만, 적어도 이번 일만큼은 그녀가 자신의 자유 의지로는 결코 할 리 없는 행동이리라 확신합니다. 그녀가 무어라 말했든 모두 잊으셔도 됩니다. 그녀는 이 일과 아무 상관이 없으며, 이 일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할 테니까요. 이 글월을 올리는 것은 교수님의 근심을 덜어 드리고, 제 암시가 잠시나마 드린 불편을 부디 용서해 주십사 간청드리고자 함입니다.
“신의로써,
“헬렌 펜클로사.
솔직히 말해, 쪽지를 다 읽고 나자 너무 안도가 되어 화가 나지 않았다. 무례한 짓이긴 했다. 기껏해야 한 번 만난 숙녀가 한 일치고는 분명 대단히 무례한 짓이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회의로써 내가 그녀에게 도전장을 내민 셈이었다. 그녀의 말마따나, 나 같은 사람을 만족시킬 시험을 고안하는 것이 다소 쉽지 않은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녀는 해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어떤 의문도 있을 수 없었다. 내게 있어 최면 암시는 마침내 하나의 기정사실이 되었다. 이 순간부터 그것은 삶의 사실 가운데 하나로 자리를 잡았다. 내가 아는 모든 여성들 가운데 가장 균형 잡힌 정신을 지닌 애거사가 자동인형의 상태로 전락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였다. 멀리 떨어진 한 사람이 해안에서 브레넌 어뢰를 유도하는 기사(技師)처럼 그녀를 원격 조종한 것이다. 다른 영혼이 말하자면 걸어 들어와, 그녀 자신의 영혼을 옆으로 밀쳐 내고, 그녀의 신경 기계를 움켜쥐고 이렇게 말한 것이다. “반 시간 동안 이것을 내가 부려 보겠노라.” 그리고 오가는 동안 애거사는 의식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 상태로 길거리를 안전히 오갈 수 있었을까? 나는 모자를 집어 들고 그녀의 안위를 확인하러 서둘러 달려갔다.
그래. 그녀는 집에 있었다. 응접실로 안내받아 들어서니, 무릎에 책 한 권을 올려놓고 앉아 있는 그녀가 보였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 오셨네요, 오스틴,” 그녀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대는 그보다 더 이른 손님이었소,” 내가 대답했다.
그녀는 당혹한 표정이었다. “무슨 말씀이세요?” 그녀가 물었다.
“오늘 외출하지 않았소?”
“네, 물론 안 나갔어요.”
“애거사,” 내가 진지하게 말했다. “오늘 아침 그대가 무엇을 했는지 정확히 말해 줄 수 있겠소?”
내 사뭇 진지한 태도에 그녀가 웃음을 터뜨렸다.
“학자 표정을 지으시네요, 오스틴. 과학자와 약혼한 대가가 이래요. 그래도 말씀은 드리지요, 뭘 그리 알고 싶어 하시는지 짐작도 안 가지만요. 저는 8시에 일어났어요. 반시간 뒤에 아침 식사를 했고요. 9시 10분에 이 방에 들어와 《레뮈자 부인 회상록》을 읽기 시작했답니다. 몇 분 지나지 않아, 그 프랑스 부인의 책장 위에서 깜빡 잠이 들어 그분께 송구스런 무례를 저질렀고요, 교수님에게는 교수님 꿈을 꾸는 아주 영광스런 치사를 드렸답니다. 깨어난 지는 몇 분밖에 되지 않았어요.”
“그래서 깨어나 보니 원래 있던 자리에 그대로 있었단 말이오?”
“세상에, 여기 말고 어디 다른 곳에 있을까요?”
“애거사, 내 꿈을 어떻게 꾸었는지 말해 줄 수 있겠소? 단순한 호기심으로 묻는 게 아니라오.”
“그냥 교수님이 그 안에 들어오셨다는 흐릿한 인상뿐이에요. 구체적인 건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아요.”
“오늘 외출하지 않았다면서, 애거사, 왜 그대의 구두에 먼지가 묻어 있는 것이오?”
그녀의 얼굴에 상처받은 빛이 스쳤다.
“정말이지, 오스틴, 오늘 아침에 대체 왜 그러세요. 제 말을 의심하시기라도 하는 것 같아요. 구두에 먼지가 앉았다면, 그야 당연히 하녀가 미처 닦지 못한 구두를 신었기 때문이겠지요.”
그녀가 이 일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이 너무도 분명해졌다. 나는 생각했다. 어쩌면 그녀에게 굳이 알려 주지 않는 편이 낫겠다고. 그녀를 두려움에 빠뜨릴 뿐, 내가 보기에 무슨 이득이 될 것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더는 그 일에 대해 말하지 않았고, 얼마 뒤 강의를 하러 그 집을 나섰다.
그러나 나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과학적 가능성의 지평이 돌연 어마어마하게 넓어진 것이다. 이제는 더 이상 윌슨의 악마적인 기력과 열정에 놀라지 않는다. 누구인들 광대한 처녀지를 눈앞에 두고 게으름을 부릴까? 생각해 보라, 나는 인(仁)의 낯선 형태나, 300배 렌즈 아래에서 보이는 가로무늬 근섬유의 사소한 특이점만으로도 환희에 휩싸이곤 했다. 그런 연구들이, 삶의 뿌리 자체와 영혼의 본질을 찌르는 이 연구에 비하면 얼마나 하찮게 보이는가! 나는 내내 영(靈)을 물질의 산물로 여겨 왔다. 뇌가 마음을 분비해 내는 것이, 간이 담즙을 만들어 내듯이 당연하다 여겼다. 그러나 마음이 멀리서 작동하여 음악가가 바이올린을 다루듯 물질을 부리는 것을 내 눈으로 보는데, 그 가설이 어떻게 버틸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몸이 영혼을 낳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이 스스로를 드러내 보이기 위한 거친 도구인 셈이다. 풍차가 바람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단지 바람을 알려 줄 뿐이듯이. 내 평소 사유의 습관과는 정면으로 어긋났으나, 그럼에도 이 가능성은 부정할 수 없었고, 탐구해 볼 가치가 있었다.
그런데 내가 왜 그것을 탐구하지 말아야 한단 말인가? 어제 날짜 아래 내가 이렇게 쓴 것이 보인다. “무엇인가 실증적이고 객관적인 것을 볼 수 있다면, 나는 생리학의 측면에서 그것에 접근해 볼 마음이 들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나는 내 시험을 얻었다. 말한 바를 지킬 것이다. 그 탐구는 분명 엄청난 흥미를 불러일으키리라. 동료 가운데 몇몇은 이를 꺼림칙하게 여길지도 모른다. 과학계는 근거 없는 편견으로 가득하니까. 그러나 윌슨에게 자기 신념을 감당할 용기가 있다면, 나 역시 그 용기쯤은 낼 만하다. 나는 내일 아침 그에게 찾아가리라—그에게, 그리고 펜클로사 양에게. 그녀가 우리에게 그만큼을 보여 줄 수 있다면, 더 많은 것도 보여 줄 수 있을 것이다.
2
3월 26일. 예상대로 윌슨은 내가 전향했다는 데에 크게 환호했고, 펜클로사 양 역시 자신의 실험 결과에 짐짓 겸손한 만족을 드러냈다. 참으로 기이하다—그녀는 자기 힘을 쓸 때가 아니면 어찌 그리 말 없고 무채색한 존재인가! 그 이야기를 꺼내는 것만으로도 그녀에게 혈색과 생기가 돈다. 그녀는 나에게 유별난 관심을 두는 듯 보인다. 방 안에서 그녀의 눈길이 나를 따라 움직이는 것을 나는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그녀 자신의 힘에 대해 더없이 흥미로운 대화를 나누었다. 물론 그녀의 견해가 과학적 무게를 주장할 수는 없겠으나, 그래도 기록으로 남겨 두는 편이 좋겠다.
“교수님은 이제 이 주제의 가장자리에 막 닿으신 거예요,” 그녀가 말했다. 내가 그녀에게서 본 암시의 놀라운 사례에 감탄을 표하자였다. “마든 양이 교수님을 찾아갔을 때 저는 그녀에게 직접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었어요. 그 아침엔 그녀를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답니다. 제가 한 일은 그녀의 마음에 시계의 자명종을 맞추듯 설정을 해 두는 거였어요. 정해진 시각이 되면 저 혼자 울리도록요. 열두 시간이 아니라 여섯 달이 암시되었대도, 똑같이 작동했을 거예요.”
“그렇다면 암시가 나를 암살하라는 것이었다면요?”
“그녀는 어김없이 그리 했을 거예요.”
“이거 무서운 힘이로군요!” 내가 외쳤다.
“말씀대로 무서운 힘이지요,” 그녀가 무겁게 대답했다. “그리고 그 힘을 알면 알수록, 그 힘은 더욱 무섭게 다가올 거예요.”
“여쭙자면,” 내가 말했다. “암시의 문제가 단지 이 주제의 가장자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셨는데, 본질이라 여기시는 바는 무엇이신지요?”
“차라리 말씀드리지 않는 편이 좋겠어요.”
그녀의 단호한 대답에 나는 놀랐다.
“저의가 호기심이 아님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내가 말했다. “당신이 제공해 주시는 사실들에 대해 과학적 설명을 찾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서일 뿐이에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길로이 교수님,” 그녀가 말했다. “저는 과학에 전혀 관심이 없고, 과학이 이 힘을 분류할 수 있든 없든 상관도 하지 않는답니다.”
“하지만 저는 바라기로는——”
“아, 그건 이야기가 또 다르죠. 이걸 개인적인 문제로 삼으신다면요,” 그녀가 더없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로서는 알고 싶어 하시는 건 뭐든 기꺼이 말씀드릴 거예요. 어디 봅시다. 뭘 물으셨더라요? 아, 더 나아간 힘들에 대해서였죠. 윌슨 교수님은 믿지 않으시지만, 그래도 다 엄연한 사실이랍니다. 예컨대, 시행자가 피험자를 완전히 자기 뜻대로 부리는 일이 가능해요—피험자가 감응이 좋은 사람이라는 전제 아래서 말이에요. 미리 어떤 암시도 주지 않은 채, 시행자가 원하는 건 뭐든 피험자에게 시킬 수 있는 거죠.”
“피험자 본인은 모르는 채로요?”
“그야 경우에 따라 달라요. 힘을 강하게 쓰면, 당사자는 마든 양이 교수님을 찾아와 놀라게 해 드렸을 때 그녀가 아는 것만큼도 알지 못하죠. 반대로 영향력을 약하게 쓰면,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는 의식하겠지만 그것을 막을 도리가 도무지 없게 되고요.”
“그렇다면 자신의 의지력을 잃은 것입니까?”
“더 강한 의지에 덮인 것이죠.”
“당신은 직접 이 힘을 써 보신 적이 있습니까?”
“여러 번이요.”
“그렇다면 당신 자신의 의지가 그토록 강한 겁니까?”
“글쎄요, 그것만으로 결정되진 않아요. 강한 의지를 지녔으나 자기 자신에게서 떼어 낼 수 없는 분들이 많거든요. 관건은 그 의지를 타인에게 투사하여 그의 의지를 밀어내는 재능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에요. 제 경우 이 힘은 저 자신의 기력과 건강 상태에 따라 들쭉날쭉하답니다.”
“사실상, 당신의 영혼을 타인의 몸 안으로 보내는 셈이로군요.”
“글쎄요, 그렇게 표현하셔도 되겠죠.”
“그럼 당신 자신의 몸은 어떻게 되지요?”
“그냥 혼곤한 상태에 빠질 뿐이에요.”
“그래도 당신 자신의 건강에 위험은 없는 것입니까?” 내가 물었다.
“조금은 있을 수 있겠죠. 자기 의식이 완전히 놓여 나가 버리는 일이 없도록 늘 주의해야 해요. 그러지 않으면 돌아올 길을 찾는 데 애를 먹게 될지도 모르거든요. 말하자면 그 연결선만은 언제나 지켜야 한답니다. 이걸 참 서투르게 말씀드리는 것 같아요, 길로이 교수님. 물론 저는 이런 걸 과학적인 말로 어찌 옮기는지 모르니까요. 그저 제 자신의 경험과 제 자신의 해석을 말씀드리는 거죠.”
이렇게 옮겨 놓고 한가로이 다시 읽어 보니, 나 스스로가 경이롭다! 이 사람이 정녕 오스틴 길로이, 치밀한 추론의 힘과 사실에 대한 헌신으로 일가를 이룬 바로 그 사람인가? 여기서 나는 한 여인의 한담을 사뭇 진지하게 옮겨 적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자기 영혼이 몸에서 투사될 수 있는지, 자신이 혼곤한 상태에 누워 있는 동안 어떻게 멀리 있는 사람들의 행동을 조종할 수 있는지를. 내가 그것을 받아들이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내가 한 걸음이라도 내어 주려면 그녀는 증명에 증명을 거듭해야 한다. 그러나 내가 여전히 회의주의자라 하더라도, 적어도 조롱하는 자이기를 그만두었다. 오늘 저녁에는 자리를 함께 할 참이고, 그녀는 내게 최면 효과를 일으킬 수 있는지 시도해 보기로 했다. 만일 성공한다면, 우리 연구의 훌륭한 출발점이 될 것이다. 적어도 누구도 나를 공모자라 몰아붙이지는 못한다. 만일 실패한다면, 카이사르의 아내 같은—추호도 의심받지 않을—피험자를 따로 찾아야 한다. 윌슨은 무슨 영향에도 꿈쩍도 하지 않는다.
밤 10시. 내가 지금 한 시대를 그을 연구의 문턱에 서 있다고 믿는다. 이 현상을 안쪽에서 들여다볼 수 있는 힘을 갖는다는 것—반응하는 유기체와, 동시에 그것을 평가하고 비판할 뇌를 함께 갖추는 것—이것이야말로 분명 유일무이한 이점이다. 윌슨이라면 내가 입증한 만큼의 감수성을 얻을 수 있다면 자기 생의 오 년쯤은 선뜻 내어 주리라 확신한다.
그 자리에는 윌슨과 그의 아내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머리를 뒤로 기대고 앉아 있었고, 펜클로사 양은 내 앞 약간 왼쪽에 서서 애거사에게 했던 것과 같은 길고 쓸어내리는 손짓을 썼다. 그 손짓 하나하나에 따뜻한 기류가 나를 때리는 듯했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몸속에 떨림과 열기가 고루 퍼져 갔다. 내 눈은 펜클로사 양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는데, 응시하는 사이 이목구비가 흐려지며 사라져 갔다. 내가 의식하고 있는 것이라곤 나를 내려다보는 그녀의 눈뿐이었다. 회색의, 깊은, 가늠할 수 없는 눈. 그 눈이 점점 커져 가더니, 마침내 두 개의 산속 호수로 돌연 바뀌었고, 나는 끔찍한 속도로 그쪽을 향해 떨어지고 있는 듯했다. 나는 몸서리를 쳤는데, 그 순간 더 깊은 층의 사유가 내게 일러 주었다. 이 몸서리가 바로 내가 애거사에게서 보았던 그 강직이라고. 한순간 뒤 나는 이제 하나로 합쳐진 호수의 수면에 부딪쳤고, 머리가 꽉 차오르고 귀에는 윙윙거림이 가득한 채 물속으로 가라앉아 갔다. 가라앉고, 또 가라앉고, 다시 가라앉다가, 별안간 위로 치솟아 올라 푸른 물결을 뚫고 쏟아지는 빛을 눈앞에서 보게 되었다. 거의 수면에 닿으려는 순간 “깨어나시오!”라는 말이 머릿속을 울렸고, 움찔하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안락의자에 도로 앉아 있었으며, 펜클로사 양은 목발에 몸을 기대어 서 있었고, 윌슨은 수첩을 손에 든 채 그녀의 어깨 너머로 고개를 내밀어 살피고 있었다. 무거움도, 피로감도 남아 있지 않았다. 오히려 실험을 끝낸 지 한 시간 남짓밖에 지나지 않았건만, 정신이 말짱해 침실보다는 서재 쪽이 더 끌린다. 우리 앞으로 흥미로운 실험들이 줄줄이 펼쳐지리라는 것이 훤히 내다보이고, 빨리 그 실험에 착수하고 싶어 좀이 쑤실 지경이다.
3월 27일. 텅 빈 하루다. 펜클로사 양이 윌슨 내외와 함께 서턴 댁에 가 있는 까닭이다. 비네와 페레의 《동물 자기》를 읽기 시작했다. 이 얼마나 기묘하고 깊은 물인가! 결과, 결과, 또 결과—그리고 원인은 완전한 수수께끼다. 상상력을 자극하는 일이지만, 나는 그쪽으로 빠져들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섣부른 추론도 연역도 금한다. 오직 견고한 사실만 다루자. 나는 최면 상태가 실재함을 분명히 알고 있다. 나는 최면 암시가 실재함을 분명히 알고 있다. 나는 나 자신이 이 힘에 감응함을 분명히 알고 있다. 그것이 지금 내가 선 자리다. 커다란 새 수첩을 하나 마련했다. 이 수첩은 오로지 과학적 세부 기록에만 바칠 것이다.
저녁에는 애거사, 마든 부인과 우리 혼례에 관해 오래 이야기했다. 여름 방학(그 초입)이 혼인식에 가장 알맞은 때라는 데 뜻이 모였다. 굳이 미룰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그 몇 달조차 나는 아깝다. 그래도 마든 부인 말씀마따나, 매듭지어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3월 28일. 펜클로사 양에 의해 다시 최면이 걸렸다. 이전과 거의 같은 경험이었으되, 감각이 사라지기까지 걸린 시간이 한결 짧아졌다. 방 안 온도, 기압, 윌슨 교수가 측정한 맥박과 호흡은 A 수첩을 참조할 것.
3월 29일. 또 최면에 걸렸다. 상세는 A 수첩에.
3월 30일. 일요일이라 실험 없는 공백의 하루다. 실험이 중단되는 날이면 어느 때건 애석하기만 하다. 지금까지의 실험은 가벼운 감각 둔화, 완전한 둔화, 극한의 둔화에 따르는 신체 징후만을 포괄할 뿐이다. 차차 우리는 암시와 명징(明澄) 상태의 현상으로 나아가기를 바란다. 낭시와 살페트리에르에서는 몇몇 교수들이 여성들을 상대로 이를 시연해 보였다. 한 여성이 한 교수를 상대로, 또 다른 교수를 증인 삼아 이를 시연한다면 훨씬 설득력이 있으리라. 그것도 나라는 자가 피험자가 된다니—나, 회의주의자, 유물론자가! 적어도 나는 과학에 대한 헌신이 내 자신의 일관성을 지키는 일보다 더 크다는 것을 증명한 셈이다. 제 말을 삼키는 일이야말로 진실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가장 큰 희생이다.
내 이웃인 찰스 새들러, 해부학의 미남 젊은 시범강사가 오늘 저녁 내가 빌려 준 《피르호 논집》 한 권을 돌려주러 다녀갔다. 나는 그를 젊다고 부르지만, 사실 그는 나보다 한 살 위다.
“자네, 길로이,” 그가 말했다. “펜클로사 양의 실험 대상이 되고 있다더군.”
“이보게,” 내가 그렇다고 시인하자 그는 말을 이었다. “내가 자네라면, 더 이상 나아가지는 않겠네. 주제넘다고 느끼겠지만, 그럼에도 나는 자네에게 그녀와는 더 이상 엮이지 말라고 충고하는 것이 내 도리라고 여기네.”
물론 나는 그에게 이유를 물었다.
“내 처지가 좀 애매해서 세세한 내용까지는 원하는 만큼 털어놓을 수가 없네,” 그가 말했다. “펜클로사 양은 내 친구의 벗이고, 내 자리는 난처한 처지일세. 이 정도만 말해 두지. 나 자신도 저 여자의 실험에 피험자로 참여한 적이 있는데, 그때 일이 내 마음에 몹시 불쾌한 인상을 남겼다네.”
그 정도로 나를 만족시킬 수 있으리라고 그도 기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기를 쓰고 좀 더 구체적인 것을 얻어 내려 했으나 끝내 성공하지 못했다. 내가 제 자리를 대신한 것을 그가 질투하는 것일 리 있을까? 아니면 선입견과 사실이 어긋날 때 개인적 모욕으로까지 받아들이는 저 과학자 부류 중 하나일까? 자기가 어떤 모호한 유감을 품었다고 해서, 이토록 풍성한 결과가 기대되는 일련의 실험을 내가 포기하리라고 진심으로 생각할 리는 없다. 내가 그의 어두운 경고를 가볍게 흘리는 것을 그는 못마땅해 하는 눈치였고, 우리는 피차 약간의 서늘함을 남긴 채 헤어졌다.
3월 31일. P양에 의한 최면.
4월 1일. P양에 의한 최면. (A 수첩.)
4월 2일. P양에 의한 최면. (윌슨 교수가 맥박 곡선도 측정.)
4월 3일. 이 일련의 최면이 전반적 체력에 다소 부담이 될 수도 있겠다. 애거사는 내가 여위어 보이고 눈 밑이 거뭇해졌다고 말한다. 전에는 내 안에서 보지 못했던 신경질적 과민함이 느껴진다. 예컨대 아주 작은 소음에도 소스라치고, 학생이 어리석게 굴면 예전처럼 웃어넘기지 못하고 짜증이 치민다. 애거사는 내가 그만두기를 바라지만, 나는 그녀에게 연구란 대개 부담을 주는 법이며, 어떤 값을 치르지 않고서는 어떤 결과에도 다다를 수 없다고 말한다. 장차 발표할 <마음과 물질의 관계>라는 내 논문이 일으킬 파장을 보면, 이 정도 신경 마모쯤은 치를 가치가 있음을 그녀도 이해하리라. 이 논문으로 왕립학회 회원(F. R. S.) 자격을 얻는다 해도 놀랄 일이 아니다.
저녁에 또 최면에 걸렸다. 이제 효과는 전보다 훨씬 빠르게 나타나고, 주관적 환영은 옅어졌다. 나는 매 시행마다 상세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윌슨이 일주일에서 열흘가량 런던으로 떠나지만, 우리의 실험은 중단되지 않을 것이다. 그 가치는 그의 관찰 못지않게 내 감각에도 달려 있으니 말이다.
4월 4일. 나는 각별히 경계해야 한다. 내가 예측하지 못한 복병 하나가 우리 실험에 끼어들었다. 과학적 사실에 대한 열의에 사로잡혀, 나는 펜클로사 양과 나 사이의 인간적 관계에 대해 어리석게도 눈을 감아 왔다. 살아 있는 어느 누구에게도 속삭여 털어놓지 않을 말을, 나는 여기에 적어 둘 수 있다. 그 불행한 여인이 나에게 정을 품은 듯 보인다.
아무리 사적인 일기라 해도 이런 글은 내가 쓰지 않았을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외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얼마 전부터—그러니까 지난 한 주간—여러 징후가 있었는데 나는 그것을 치워 버리고 생각하지 않기로 애썼다. 내가 들어가면 환해지고, 나가면 풀 죽는 모습, 자주 와 달라는 간곡함, 눈빛, 목소리의 결—나는 그것들이 아무 의미가 없다고, 어쩌면 서인도 태생 특유의 뜨거운 기질일 뿐이라고 여기려 했다. 그러나 어젯밤, 최면 잠에서 깨어나며, 나는 무의식적으로, 자기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완전히 정신이 돌아왔을 때 우리는 손을 마주 잡은 채 앉아 있었고, 그녀는 기대에 찬 미소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끔찍했던 것은, 그녀가 기대하는 그 말을 해야만 할 것 같은 충동에 휩쓸리고 있었다는 점이다. 내 얼마나 위선적인 놈이 될 뻔했는가! 그 순간의 유혹에 굴복했더라면, 오늘 내가 얼마나 스스로를 역겨워했을지! 그러나 신이여 고맙습니다,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방을 뛰쳐나올 만큼의 힘은 남아 있었다. 무례했을지 모르나, 나는 더 이상 — 결코 더 이상 — 나 자신을 믿을 수 없었다. 나, 신사로 자처하고 명예를 지닌 자, 영국에서 가장 사랑스런 아가씨 가운데 한 명과 약혼한 자—그런 내가 제정신이 아닌 정념의 한순간에, 거의 알지도 못하는 이 여인에게 사랑을 고백할 뻔했던 것이다. 그녀는 나보다 훨씬 연상이며 불구이기까지 하다. 괴물 같은 일이고 혐오스러운 일이다. 그런데도 그 충동이 어찌나 거셌던지, 한 순간 더 그녀 앞에 머물렀더라면 나는 돌이킬 수 없는 고백을 하고 말았으리라. 대체 그것이 무엇이었단 말인가? 나는 우리 유기체의 작동 방식을 남에게 가르치는 사람이다. 정작 나 자신은 그것에 대해 무엇을 아는가? 내 본성에서 더 낮은 층이 돌연 솟구친 것이었을까—사나운 원시의 본능이 별안간 제 목소리를 낸 것이었을까? 악령에 의한 귀신 들림 이야기조차 나는 거의 믿고 싶어졌다. 그만큼 그 감정은 나를 압도했다.
어쨌거나 이 일로 나는 대단히 난처한 처지에 놓였다. 한편으로는 여기까지 온, 그리고 그토록 눈부신 결과가 예상되는 일련의 실험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 다른 한편으로 이 불행한 여인이 나에게 정념을 품은 것이라면—— 하지만 분명 이 순간에도 내가 끔찍한 착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녀라니, 그녀의 나이와 불구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게다가 그녀는 애거사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내 처지를 그녀는 알고 있었다. 내가 정신이 몽롱해져 그녀의 손을 잡았을 때, 그녀는 그저 재미 삼아 웃었을 뿐인지도 모른다. 그 웃음에 의미를 부여하고, 짐승 같은 속도로 달려 나가 응답해 버린 것은 반쯤 최면에 잠긴 내 뇌였다. 정말 그랬노라고 나 자신을 납득시킬 수 있다면 좋으련만. 어쨌든 가장 현명한 방책은 윌슨이 돌아올 때까지 다른 실험들을 미루는 것이리라. 그래서 나는 펜클로사 양에게 쪽지를 썼다. 어젯밤 일은 일체 언급하지 않고, 업무가 몰려 며칠간 시행을 중단해야겠다고만 알렸다. 그녀는 사뭇 격식을 갖춘 답신을 보내왔다. 마음이 바뀌시면 늘 뵙던 시간에 평소처럼 댁에서 기다리고 있겠다고.
밤 10시. 아, 아, 나는 참으로 허수아비 같은 자로구나! 요즈음 나는 나 자신을 점점 더 잘 알게 되고 있는데, 알면 알수록 나 자신에 대한 평가는 낮아져 간다. 내가 예전에도 이토록 나약한 자였을 리는 없건만. 네 시 무렵까지도 누군가가 오늘 밤 내가 펜클로사 양의 집에 가리라고 말했더라면 나는 웃어넘겼을 것이다. 그런데 여덟 시엔 평소처럼 윌슨의 집 문 앞에 서 있었다. 어쩌다 그리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습관의 힘이겠지. 아편 중독이 있듯 최면 중독이라는 것도 있는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나는 그 희생자다. 내가 알고 있는 건 이것뿐이다. 서재에서 일하다 보니 점점 더 안절부절못하게 되었다는 것. 안달이 났다. 속이 뒤끓었다. 눈앞의 서류에 정신을 집중할 수 없었다. 그러다 마침내, 거의 내가 무엇을 하는지 의식도 하기 전에, 나는 모자를 움켜쥐고 평소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서둘러 나섰다.
흥미로운 저녁이었다. 대부분의 시간 동안 윌슨 부인이 자리에 함께 있어 주어, 우리 둘 가운데 적어도 한 사람이 느꼈을 당혹감은 피할 수 있었다. 펜클로사 양의 태도는 평소와 전혀 다르지 않았고, 내가 쪽지와 달리 찾아온 데에도 그녀는 놀란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어제의 일이 그녀에게 조금이라도 인상을 남겼음을 짐작케 할 기미는 그녀의 몸가짐 어디에도 없었다. 그래서 내가 그 일을 과장해서 본 것이리라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고 있다.
4월 6일 (저녁). 아니, 아니, 아니, 나는 과장해서 본 것이 아니었다. 나는 더는 스스로에게 감출 수 없다. 이 여인이 나에게 정념을 품었다는 사실을. 괴물 같은 일이지만 사실이다. 오늘 밤에도 또다시, 최면 상태에서 깨어나 보니 내 손이 그녀의 손 안에 있었고, 이 가증스런 감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내 명예도, 경력도, 모든 것을 내던져 버리고 싶은 충동—그녀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있을 때에는 이 세상에 이 여자에게서 어떤 매력도 찾아볼 수 없음을 나는 똑똑히 알고 있는데도. 그러나 그녀 가까이에 있을 때에는 그런 자각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녀는 내 속의 무엇인가를 깨운다. 무엇인가 악한 것, 차라리 떠올리고 싶지도 않은 것을. 그녀는 내 나쁜 본성을 자극하는 바로 그 순간, 내 나은 본성마저 마비시킨다. 분명 그녀 곁에 있는 것은 내게 이롭지 않다.
어젯밤은 전보다 더 고약했다. 도망치는커녕 나는 한참을 앉아 그녀의 손에 내 손을 맡긴 채 가장 내밀한 주제를 놓고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는 그 무엇보다 애거사에 대해 이야기했다. 내가 대체 무슨 꿈에 취해 있었단 말인가? 펜클로사 양이 애거사는 관습에 얽매인 사람이라고 하자 나는 동의했다. 그녀가 한두 번 애거사를 가볍게 깎아내리듯 말해도 나는 항의하지 않았다. 이 얼마나 치사한 자인가!
이토록 나약함을 스스로 증명했음에도, 나는 여전히 이런 일을 끝낼 만큼의 기운은 남아 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싸워 이길 수 없을 때에는 도망쳐야 한다는 분별은 내게 있다. 이 일요일 밤부터는 절대로 다시 펜클로사 양과 마주 앉지 않으리라. 절대로! 실험은 포기해도 좋다. 연구가 끝나도 좋다. 이 괴물 같은 유혹을 마주하느니 그 무엇이든 낫다. 이 유혹은 나를 이토록 저 아래로 끌어내리고 있지 않은가. 펜클로사 양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발길을 끊으면 그만이다. 그녀는 내 입을 빌리지 않고도 그 까닭을 알아차리리라.
4월 7일. 말한 대로 발길을 끊었다. 이만큼 흥미로운 연구를 망치는 것은 아까운 일이지만, 내 삶을 망치는 것이 훨씬 더 아까운 일이다. 나는 저 여자 곁에서 나 자신을 믿을 수 없음을 분명히 알고 있다.
밤 11시. 신이여 저를 도우소서! 나는 대체 어찌 된 것인가? 미쳐 가는 것인가? 차분히 이성적으로 따져 보자. 우선 일어난 일을 정확히 기록해 두자.
오늘 일기의 첫머리 몇 줄을 썼을 때가 거의 8시였다. 이상하게 마음이 어수선하고 불안하여 나는 방을 나섰고, 애거사와 그녀의 어머니와 함께 저녁 시간을 보내려 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 다 내가 창백하고 초췌해 보인다고 말했다. 아홉 시쯤 프랫-홀데인 교수가 들렀고 우리는 휘스트 한 판을 벌였다. 카드에 정신을 모으려 무진 애를 썼지만, 어수선한 느낌은 점점 커져 갔고, 마침내 맞서 싸울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나는 도무지 그 식탁에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마침내 한창 패를 돌리는 도중, 카드를 내려놓고 약속이 있었다는 무슨 말인지도 모를 사과를 웅얼거린 뒤 방을 뛰쳐나왔다. 꿈처럼 흐릿하게, 현관을 가로질러 모자걸이에서 모자를 낚아채고 등 뒤로 문을 쾅 닫은 일이 희미하게 떠오른다. 꿈속처럼 가스등의 두 줄이 눈앞을 스쳐 가는 인상도 남아 있고, 진흙이 튄 구두로 보아 길 한가운데를 뛰어 내려간 듯싶다. 모든 것이 안개 낀 듯 기묘하고 부자연스러웠다. 나는 윌슨의 집에 이르렀고, 윌슨 부인과 펜클로사 양을 만났다.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거의 기억나지 않지만, 펜클로사 양이 짐짓 장난스런 몸짓으로 목발 머리 부분을 내게 흔들어 보이며, 늦게 왔다느니 실험에 관심이 식었다느니 타박한 것만은 기억난다. 최면은 걸지 않았으나 나는 한참을 머물다 이제야 돌아왔다.
이제 머릿속이 다시 맑아졌으니 지금 일어난 일을 돌이켜 볼 수 있다. 단순히 나약함과 습관의 힘이라고 하기에는 터무니없다. 며칠 전에는 그런 식으로 설명해 보려 했으나 이젠 그것으로는 부족하다. 이것은 그보다 훨씬 더 깊고 끔찍한 무엇이다. 생각해 보라, 마든 댁 휘스트 식탁에 앉아 있던 나를 마치 올가미로 감아 끌어내듯 끌어낸 것이 아닌가. 나는 더 이상 스스로를 속일 수 없다. 저 여자가 나를 틀어쥐고 있다. 나는 그녀의 손아귀에 있다. 그러나 나는 머리를 지키고, 이성으로 따지고, 최선의 방책이 무엇인지 알아내야 한다.
그러나 나는 얼마나 눈먼 바보였던가! 연구에 대한 열의에 취해, 나는 내 앞에 입 벌리고 있는 구덩이를 빤히 보면서도 곧장 그 안으로 걸어 들어간 것이다. 그녀 자신이 나에게 경고하지 않았던가? 내 일기장에서도 읽을 수 있듯, 피험자를 완전히 장악하면 그가 시행자의 뜻대로 움직이도록 할 수 있다고 그녀 스스로 말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그녀는 나를 바로 그렇게 장악했다. 나는 당장에 이 목발 짚은 피조물의 부름 한 번이면 달려가는 꼭두각시 처지이다. 그녀가 원하면 나는 가야 한다. 그녀가 원하는 대로 해야 한다. 그리고 가장 끔찍한 것은, 그녀가 원하는 대로 내가 느껴야 한다는 사실이다. 나는 그녀를 혐오하고 두려워한다. 그러면서도 그 마력 아래 있을 때에는, 그녀는 얼마든지 나를 그녀를 사랑하게 만들 수 있다.
그러니 한 가지 위안은 있다. 내가 자책해 온 저 가증스런 충동들이 실은 내 것에서 나온 것이 전혀 아니라는 생각이다. 그 충동은 모두 그녀에게서 전이된 것이다. 당시엔 그것을 알아차릴 길이 없었지만. 그리 여기니 몸이 한결 깨끗해지고 가벼워진 듯하다.
4월 8일. 그렇다. 이제 환한 대낮에, 차분히 앉아 곰곰이 생각해 볼 시간도 두고 쓰거니와, 어젯밤 일기에 쓴 모든 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확인할 수밖에 없다. 나는 끔찍한 처지에 있지만, 무엇보다 정신줄을 놓아서는 안 된다. 나는 내 지성을 그녀의 힘에 맞세워야 한다. 어쨌거나 나는 줄 끝에 매달린 꼭두각시처럼 춤출 멍청한 인형이 아니다. 내게는 기력도, 두뇌도, 용기도 있다. 그녀의 악마 같은 잔꾀가 모두 동원되더라도 나는 아직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 모른다니! 나는 반드시 이겨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내게 무엇이 남겠는가?
이성으로 따져 보자! 이 여자는, 자기 설명에 의하면, 내 신경 유기체를 지배할 수 있다. 그녀는 자기 자신을 내 몸 안으로 투사하여 그것을 움켜쥘 수 있다. 그녀는 기생 영혼을 지녔다. 그렇다, 그녀는 기생자이다. 괴물 같은 기생자이다. 소라게가 쇠고둥 껍질 속으로 기어드는 것처럼, 그녀는 내 몸틀 속으로 기어든다. 나는 속수무책이다. 대체 어찌해야 하는가? 내가 상대하는 것은 내가 전혀 알지 못하는 힘들이다. 게다가 내 곤경을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다. 사람들은 나를 미친 자로 치부하리라. 이 일이 바깥으로 새어 나가면, 필시 대학은 귀신 들린 교수 따위는 필요 없노라 할 것이다. 그리고 애거사! 안 된다, 안 된다, 나는 이 일을 혼자 맞서야 한다.
3
저 여자가 자신의 힘에 대해 말했던 내용을 내 기록으로 다시 훑어본다. 한 가지 대목이 나를 경악케 한다. 그녀는 이렇게 암시한 바 있다. 영향력이 약할 때에는 피험자는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알지만 스스로 제어할 수 없고, 영향력을 강하게 쓸 때에는 완전히 의식을 잃는다고. 그런데 나는 언제나 내가 무엇을 했는지 알고 있었다. 어젯밤이 이전 경우들보다 덜 선명했을 뿐이다. 이는 곧 그녀가 아직까지 내게 전력을 쏟은 적은 없다는 뜻이다. 예전 세상에 이렇게 내몰린 자가 있기나 했을까?
그래, 어쩌면 있었고, 그것도 내 아주 가까이에 있었는지 모른다. 찰스 새들러가 이 일에 대해 무언가를 알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의 모호한 경고가 이제야 의미를 띤다. 아, 그때 그의 말을 들었더라면, 이 거듭된 시행으로 내 스스로 나를 묶는 사슬의 고리를 엮어 주기 전에! 그러나 오늘 그를 만나야겠다. 그의 경고를 그렇게 가볍게 대한 것을 사과하리라. 그가 나에게 도움이 될 조언을 줄 수 있을지 알아보리라.
오후 4시. 아니, 그는 조언을 줄 수 없었다. 내가 그와 이야기를 나누며 내 입에 담기 힘든 비밀을 꺼내 놓으려 처음 몇 마디를 떼자, 그는 너무도 놀란 기색이라 나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내가 (무슨 진술보다는 암시와 추측을 모아 헤아린 바로는) 알아낼 수 있는 한, 그의 경험은 내가 겪은 정도의 말 몇 마디나 눈빛 정도에 그쳤던 듯하다. 그가 펜클로사 양을 끊어 내 버린 것 자체가 그가 진짜 그녀의 올가미에 걸려든 적이 없었음을 보여 준다. 아, 그 자신은 자기가 벗어난 운명을 알지 못하는구나! 그는 자기 굼뜨고 둔한 색슨 기질에 감사해야 한다. 나는 검은 머리의 켈트계이고, 이 마녀의 손아귀는 내 신경 깊숙이 박혀 있다. 이것을 언젠가 뽑아낼 수 있을까? 불과 두 주 전의 나 자신이 될 수 있을까?
어찌하는 것이 최선일지 생각해 보자. 학기 도중에 대학을 떠날 수는 없다. 자유의 몸이라면 방책은 뻔하다. 즉시 길을 나서 페르시아를 여행할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나를 떠나게 내버려 둘까? 그리고 그녀의 영향력이 페르시아에까지 미쳐 나를 다시 그녀의 목발이 닿는 거리 안으로 불러올 수는 없을까? 이 지옥 같은 힘의 한계는 내 쓰라린 경험을 통해서만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싸우고, 싸우고, 또 싸우리라—그 밖에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으랴?
나는 분명히 안다. 오늘 밤 여덟 시쯤이면 그녀의 곁에 있고 싶은 그 갈망, 그 저항할 수 없는 안달이 또 덮쳐 오리라는 것을. 그것을 어떻게 물리칠 것인가? 무엇을 할 것인가? 방을 떠날 수 없게 해 놓아야 한다. 문을 잠그고 열쇠는 창밖으로 던져 버리리라. 하지만 그러면 아침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아침 일은 상관없다. 어떤 값을 치르더라도 나를 붙드는 이 사슬을 끊어야 한다.
4월 9일. 승리! 훌륭히 해냈다! 어젯밤 일곱 시에 저녁 식사를 급히 마치고 침실에 스스로를 가두었으며, 열쇠는 정원으로 떨어뜨렸다. 유쾌한 소설 한 권을 골라 들고 세 시간 동안 침대에 누워 읽어 보려 애썼으나, 실은 끔찍한 공포에 잠겨 매 순간 그 충동이 내 의식 위로 치밀어 오르리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고, 오늘 아침에는 검은 악몽이 비로소 내 몸에서 걷혀 나간 느낌으로 깨어났다. 어쩌면 그 피조물이 내가 어떤 조치를 취해 두었는지 알아차리고, 내게 영향을 미쳐 봐야 소용없음을 깨달았는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나는 그녀를 한 번은 이겼다. 한 번 이길 수 있다면 또 이길 수 있다.
아침에는 열쇠 때문에 몹시 난처했다. 다행히 아래쪽에 보조 정원사가 있어서, 그에게 열쇠를 위로 던져 달라고 부탁했다. 그가 내가 방금 떨어뜨린 줄 알았으리라는 것은 두말할 것 없다. 내 침대 위에서 이런 식으로 마녀에게 휘둘리느니, 차라리 문과 창문을 나사못으로 박아 두고 건장한 남자 여섯을 시켜 나를 침대에 눌러 앉히도록 하겠다.
오늘 오후 마든 부인에게서 쪽지가 왔다. 건너와 달라는 것이었다. 어쨌거나 가 볼 참이었지만, 그곳에서 불길한 소식이 기다리고 있으리라고는 짐작하지 못했다. 애거사가 유산을 물려받을 친척인 암스트롱 내외가 애들레이드에서 오로라호를 타고 귀국할 예정인데, 마든 부인과 애거사에게 런던에서 자기들을 맞아 달라고 편지를 보내 왔다는 것이다. 그들은 아마도 한 달에서 여섯 주가량 집을 비우게 될 테고, 오로라호가 수요일에 도착하니 곧 — 준비만 되면 내일이라도 — 떠나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내 위안은, 우리가 다시 만나면 애거사와 나 사이에 이별이 없으리라는 것이다.
“한 가지 부탁이 있소, 애거사,” 단둘이 있게 되었을 때 내가 말했다. “혹시 펜클로사 양을 런던에서든 이곳에서든 마주치게 되더라도, 다시는 그녀에게 최면을 걸도록 허락하지 않겠노라 약속해 주오.”
애거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머, 바로 얼마 전에 그 일이 얼마나 흥미로운지, 실험을 끝까지 밀고 나갈 작정이라 하셨잖아요.”
“그건 그랬는데, 그 뒤로 마음이 바뀌었소.”
“더 이상 하지 않으실 건가요?”
“그렇소.”
“다행이에요, 오스틴. 요즘 얼마나 창백하고 핼쑥하셨는지 모르실 거예요. 사실 저희가 지금 런던에 가기를 꺼렸던 가장 큰 이유도 이토록 기운 잃으신 교수님을 두고 떠나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어요. 그리고 교수님 태도가 이따금 참 이상하셨지요—특히 그날 밤, 프랫-홀데인 교수님을 더미 자리로 남기고 뛰어나가셨던 일 말예요. 분명 이 실험이 교수님 신경에 몹시 해로워요.”
“나도 그리 생각하오, 그대여.”
“그리고 펜클로사 양 신경에도 마찬가지고요. 그분이 편찮으시다는 이야기 들으셨어요?”
“아니오.”
“윌슨 부인이 어젯밤 저희에게 그리 말씀해 주셨어요. 신경성 열병이라 하시던데요. 윌슨 교수님이 이번 주에 돌아오시고, 당연히 윌슨 부인은 그때까지 펜클로사 양이 완쾌되기를 무척 바라세요. 그분이 꼭 진행하고 싶어 하시는 실험 계획이 잔뜩 있다고 하시거든요.”
애거사에게 약속을 받아 둔 것이 다행이었다. 이 여자의 손아귀에 우리 중 한 사람만 걸리는 것만으로도 족하니. 반면, 펜클로사 양이 편찮다는 소식은 나를 뒤숭숭하게 했다. 내가 어젯밤 거둔 듯싶었던 승리의 값이 다소 깎여 나가는 셈이다. 그녀가 몸 상태가 나빠지면 자기 힘에 지장이 온다고 했던 말이 떠오른다. 그래서 내가 그토록 수월히 나를 지켜 낼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좋다, 좋다, 오늘 밤에도 같은 예방책을 취하고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보자. 그녀를 생각하면 어린아이처럼 겁이 난다.
4월 10일. 어젯밤도 아주 잘 지나갔다. 오늘 아침 또 정원사를 불러 열쇠를 위로 던져 달라고 부탁할 때 그의 표정이 가관이라 웃음이 나왔다. 이런 일이 계속되면 하인들 사이에서 꽤 괴이한 별명을 얻게 되리라. 그러나 중요한 건, 내가 방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이 방 안에서 머물 수 있었다는 점이다. 나는 이 믿기지 않는 속박을 정말로 떨쳐 내고 있는 것일까—아니면 그저 그 여자의 힘이 기력을 되찾기 전까지 잠시 멎어 있을 뿐일까? 최선을 바라며 기도하는 길밖에 없다.
오늘 아침 마든 댁 사람들이 떠났고, 봄 햇살에서 화사함이 빠져나간 듯하다. 그래도 내 창 맞은편 푸른 마로니에를 반짝이며 어루만지는 햇살은, 이끼 얼룩으로 무겁던 낡은 대학 담벼락에까지 약간의 생기를 더해 주며 여전히 아름답다. 자연은 얼마나 부드럽고 온화하고 위로가 되는가! 그 안에 또한 이토록 흉악한 힘과 가증스런 가능성이 도사리고 있으리라고 누가 생각이나 하겠는가! 물론 나는 안다. 내게 덮쳐든 이 무서운 것이 초자연적인 것도, 초(超)자연 같은 것도 아님을. 아니, 이것은 이 여자가 활용할 수 있고 사회가 미처 알지 못하고 있을 뿐인 자연의 힘이다. 그 힘이 그녀의 기력과 함께 밀물과 썰물처럼 드나든다는 사실 자체가, 그것이 전적으로 물리 법칙에 종속되어 있음을 보여 준다. 시간이 있다면 나는 이것을 끝까지 파헤쳐 그 해독제를 손에 넣을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호랑이의 발톱 아래 깔려 있으면서 그 호랑이를 길들일 수는 없는 법이다. 몸부림쳐 빠져나오는 수밖에 없다. 아, 거울에 비친 내 검은 눈과 또렷한 에스파냐풍 얼굴을 볼 때마다 나는 차라리 황산 세례를 받거나 천연두를 한바탕 앓아 보았으면 싶어진다. 그 둘 중 하나라도 나를 이 재앙에서 건져 주었을지 모른다.
오늘 밤에는 무슨 일이 있을 것 같다. 그리 두렵게 만드는 것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오늘 길에서 윌슨 부인을 만났는데, 펜클로사 양의 몸이 나아지고 있다고 — 아직 기력은 없지만 — 전해 주었다는 점. 마음속으로 그 병이 그녀의 마지막 병이었더라면, 하고 바라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다른 하나는 윌슨 교수가 하루 이틀 안에 돌아올 예정인데, 그의 존재만으로도 그녀에게 제약이 되리라는 점. 제삼자가 함께 있어 준다면 나는 우리가 마주 앉는 것이 두렵지는 않을 것이다. 이 두 이유로 오늘 밤 무슨 일이 있으리라는 예감이 들어, 이전과 같은 예방책을 취하려 한다.
4월 10일. 그렇지 않았다, 고맙다 신이여, 어젯밤도 잘 지나갔다. 정원사를 다시 마주할 자신이 없어 이번에는 문을 잠그고 열쇠를 문 아래로 밀어 넣어 두어서, 아침에 하녀에게 문을 열어 달라 부탁해야 했다. 그러나 실은 그런 예방도 필요치 않았다. 나는 조금도 밖에 나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연달아 사흘 저녁을 집에서! 윌슨이 오늘이나 내일 돌아오니, 필시 나는 이 고통의 끝에 가까이 와 있으리라. 그에게 내가 겪은 일을 털어놓을까 말까? 그에게서는 한 줌의 동정도 얻지 못하리라는 확신이 있다. 그는 나를 흥미로운 사례로 간주하고, 심령학회 다음 회의에서 나를 주제로 논문을 읽어 내려갈 것이다. 거기서 그는 내가 계산된 거짓말쟁이일 가능성을 진지하게 논하며, 그것을 내가 광증의 초기 단계에 있을 가능성과 저울질할 것이다. 안 되지, 윌슨에게서는 아무런 위로도 받지 못하리라.
몸이 놀랄 만큼 개운하다. 이보다 더 힘차게 강의해 본 적이 없는 듯싶다. 아, 내 삶에 드리운 이 그림자만 걷어 낼 수 있다면, 나는 얼마나 행복할까! 젊고, 그만하면 형편도 넉넉하고, 내 분야의 최전선에 서 있고, 아름답고 사랑스런 아가씨와 약혼한 몸—사내가 바랄 만한 것을 모두 지닌 것 아닌가? 내 마음을 괴롭히는 것은 단 하나, 그러나 얼마나 어마어마한 것인가!
자정. 나는 미쳐 가리라. 그래, 그것이 끝이 되리라. 나는 미쳐 가리라. 이제 거기에서 멀지 않다. 뜨거운 손바닥 위에 머리를 얹고 있는데 머리가 요동친다. 온몸이 겁먹은 말처럼 떨리고 있다. 아, 오늘 밤이 얼마나 끔찍했던가! 그러나 한편으로 만족스런 구석도 있다.
내 집 하인에게 웃음거리가 될 위험을 무릅쓰면서도, 나는 어젯밤 또 열쇠를 문 아래로 밀어 넣어 두고 밤새 스스로를 감금해 두었다. 그리고 아직 잠들기에는 이르다 싶어 옷을 입은 채로 침상에 누워 뒤마의 소설 한 권을 읽기 시작했다. 갑자기 무언가가 나를 움켜쥐었다—움켜쥐고 소파에서 끌어내린 것이다. 나를 덮친 그 힘의 압도적 성질을 달리 묘사할 길이 없다. 나는 이불을 움켜쥐고 할퀴었다. 목공에 매달렸다. 광란 속에서 비명을 질렀던 것 같다. 모두 허사였고, 가망이 없었다. 나는 반드시 가야 했다. 그 밖에 길이 없었다. 처음 몇 초만 저항했을 뿐이다. 이내 그 힘은 그런 저항쯤은 압도해 버렸다. 그 자리에 참견할 구경꾼이 없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만일 있었더라면, 나는 내 행동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없었으리라. 그리고 나가야 한다는 결의와 더불어, 수단을 고르는 데에 이르러서는 더없이 날카롭고 냉정한 판단이 내게 따라붙었다. 나는 촛불을 켜고 문 앞에 꿇어앉아 거위깃 펜의 깃털 끝으로 열쇠를 이쪽으로 빼내 보려 애썼다. 하필 깃털이 조금 모자라서 열쇠를 더 멀리 밀어내고 말았다. 그러자 나는 조용한 끈기로 서랍 하나에서 편지 봉투칼을 꺼내 들고, 그것으로 마침내 열쇠를 끌어당기는 데 성공했다. 나는 문을 열고 서재로 들어가, 문서장에서 내 사진을 한 장 꺼내 그 위에 무언가를 써 넣고, 외투 안주머니에 넣고는 윌슨의 집으로 길을 나섰다.
이 모든 일이 놀랍도록 또렷했고, 그러면서도 내 삶의 나머지와는 동떨어진 듯했다. 마치 더없이 생생한 꿈속의 사건들이 그러하듯이. 기이한 이중 의식이 나를 사로잡고 있었다. 우세를 점한 낯선 의지가 있었고, 그것은 나를 제 주인 옆으로 끌어당기려 작정하고 있었다. 그 옆에는 더 가냘픈, 항의하는 인격이 있었는데, 나는 그것이 나 자신임을 알아보았다. 그 인격은 끈에 끌려가는 테리어가 제 사슬을 힘없이 잡아당기듯, 이 압도적인 충동에 대해 힘없이 버둥거렸다. 이 두 상충하는 힘을 알아보았던 것까지는 기억나지만, 걸어간 기억도, 어찌하여 그 집에 들어갔는지도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펜클로사 양을 마주한 장면은 더없이 생생하다. 그녀는 우리가 평소 실험을 치르던 작은 규방의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 누워 있었다. 머리는 한 손으로 받치고 있었고, 호피 무릎담요가 그녀 위로 반쯤 덮여 있었다. 내가 들어서자 그녀는 기대에 차 올려다보았고, 램프 불빛이 그녀 얼굴에 떨어졌을 때 창백하고 야위어 눈 밑에 거뭇한 움푹함이 있는 것이 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나를 보고 미소 지으며 자기 옆의 등받이 없는 의자를 가리켰다. 그것을 가리킨 것은 왼손이었고, 나는 허겁지겁 달려가 — 지금 이 일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스스로가 혐오스럽다 — 그 손을 움켜쥐고 미친 듯이 입술에 눌러 대었다. 그러고는 의자에 앉으며 그 손을 여전히 붙잡은 채, 가지고 온 사진을 그녀에게 내밀고 말하고 또 말하고 또 말했다 — 내가 그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녀가 앓아누운 것에 내가 얼마나 비탄에 잠겨 있었는지, 그녀가 회복된 것에 내가 얼마나 기쁜지, 그녀 곁에서 단 한 저녁이라도 떨어져 있는 것이 내게 얼마나 괴로운지. 그녀는 거역할 수 없는 눈빛과 도발적인 미소를 지으며 나를 내려다본 채 잠잠히 누워 있었다. 한 번은 개를 쓰다듬듯 그녀가 손을 내 머리카락 위로 지나가게 했던 것이 기억난다. 그리고 그것이 내게 쾌감을 주었다—그 애무가. 그 손길 아래 나는 전율했다. 나는 그녀의 노예였다, 몸도 영혼도. 그리고 그 순간만큼은 노예 신세를 기뻐했다.
그런데 그때, 축복 같은 변화가 일어났다. 섭리가 없다고 내게 말하지 말라! 나는 파멸의 벼랑에 서 있었다. 발은 이미 가장자리에 걸려 있었다. 바로 그 순간에 구원이 찾아온 것이 우연이란 말인가?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 섭리는 있고, 그 손이 나를 되잡아 끌어냈다. 이 우주에는 이 잔꾀를 부리는 악마 같은 여자보다 더 강한 무엇이 있다. 아, 그리 생각하는 것이 내 가슴에 얼마나 큰 고약인가!
그녀를 올려다보는데, 그녀가 달라졌음이 의식되었다. 전까지 창백하기만 하던 얼굴이 이제 송장처럼 핼쑥해졌다. 눈은 흐릿해지고 눈꺼풀은 무겁게 처져 내렸다. 무엇보다, 평온한 자신감의 표정이 그녀 얼굴에서 사라졌다. 입매가 풀어졌다. 이마는 찌푸려졌다. 그녀는 겁에 질리고,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 변화를 지켜보는 내 영혼이 파닥이며 몸부림쳐, 자신을 옥죄어 온 그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순간순간 풀려 가는 손아귀였다.
“오스틴,” 그녀가 속삭였다. “제가 무리를 좀 했나 봐요. 제 기력이 미처 따라 주지 못했어요. 병에서 아직 회복이 되지 않았던 거예요. 그래도 당신을 보지 않고서는 더 이상 살 수가 없었답니다. 저를 두고 가지 않으시지요, 오스틴? 잠깐의 쇠약일 뿐이에요. 오 분만 주시면 저는 다시 본래의 저로 돌아올 거예요. 창가 탁자에 있는 작은 유리병 좀 건네주세요.”
그러나 나는 내 영혼을 되찾았다. 그녀의 기력이 시들자, 그 영향력은 내게서 걷혀 나가 나를 자유롭게 두었다. 그리고 나는 공격적이었다—쓰라리고 사납게 공격적이었다. 적어도 이번만큼은 나에 대한 내 진짜 감정이 어떤지 이 여자로 하여금 알게 해 줄 수 있었다. 내 영혼은, 그것을 반동 삼아 일으킨 사랑만큼이나 짐승 같은 증오로 가득 차 있었다. 그것은 들고 일어난 농노의 야만적이고 살기 어린 격정이었다. 그 곁의 목발을 빼앗아 그녀의 얼굴을 그것으로 후려쳐 박살 낼 수도 있었다. 그녀는 일격을 피하려는 듯 양손을 치켜들고는, 소파 구석으로 움츠러들며 몸을 웅크렸다.
“브랜디!” 그녀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브랜디 좀!”
나는 유리병을 집어 창가의 종려나무 뿌리 위에 그 내용물을 쏟아부어 버렸다. 그러고는 그녀의 손에서 사진을 낚아채어 백 조각으로 찢어 놓았다.
“이 더러운 여자,” 내가 말했다. “만일 내가 사회에 대한 내 의무를 다한다면, 그대는 살아서는 이 방에서 못 나갈 것이오!”
“저는 당신을 사랑해요, 오스틴. 사랑한답니다!” 그녀가 울부짖었다.
“그렇소,” 내가 외쳤다. “그 전엔 찰스 새들러를 사랑했고. 그 전엔 또 몇 명이나 있었소?”
“찰스 새들러라니!” 그녀가 숨을 몰아쉬었다. “그가 당신에게 이야기했어요? 그랬군요, 찰스 새들러, 찰스 새들러!” 그녀의 목소리가 하얀 입술 사이로 독사의 쉿 소리처럼 새어 나왔다.
“그렇소, 나는 그대가 어떤 자인지 다 알고, 다른 이들도 알게 될 것이오. 이 파렴치한 피조물이여! 내 처지를 뻔히 알고 있었지. 그러면서도 그대는 그 추악한 힘을 써서 나를 제 곁으로 끌어다 놓았소. 앞으로도 또 그리할 수 있을지는 모르나, 적어도 한 가지만은 기억하게 되리라. 내가 진심으로, 내 영혼 밑바닥에서부터 마든 양을 사랑한다고 말했음을, 그리고 나는 그대를 혐오한다고, 증오한다고 말했음을!
“그대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나는 공포와 혐오로 가득 차오. 그대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역겨움에 몸서리가 쳐지오. 그대에 대한 내 감정은 그러하오. 혹 오늘 밤처럼 잔꾀로 나를 다시 그대 곁으로 끌어당기는 것이 즐거우시거든 그리해 보시오. 그러나 적어도 이런 정도는 되새기게 되리라 나는 생각하오. 자기가 어떤 자인지에 대한 진짜 의견을 이미 들어 놓은 사내를 연인으로 부리는 일에서 그다지 큰 만족을 누릴 수는 없으리라는 것을. 그대가 내 입에 어떤 말을 집어넣든, 그대는 기억하지 않을 수 없으리——”
나는 말을 멈추었다. 그 여자의 머리가 뒤로 꺾이며 까무러쳐 버렸기 때문이다. 내가 그녀에게 해야 했던 말을 그녀는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앞으로 무슨 일이 있건, 그녀에 대한 내 진짜 감정을 이제 그녀가 더는 오해할 수 없으리라는 생각이, 내 가슴에 얼마나 흡족한 열기를 불러오는가. 그러나 앞으로 무슨 일이 있을 것인가? 그녀가 다음으로 무슨 일을 벌일 것인가? 생각하기조차 싫다. 아, 그녀가 나를 내버려 두어 주기를 바랄 수만 있다면! 그러나 내가 그녀에게 한 말들을 돌이켜 보면—— 뭐, 그건 접어 두자. 이번만큼은 내가 그녀보다 강했다.
4월 11일. 어젯밤 나는 거의 잠들지 못했고, 아침에는 풀려 버린 현처럼 느른하고 열이 올라, 프랫-홀데인에게 대신 강의를 해 달라 청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강의를 거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정오에 일어났지만 머리는 지끈거리고 손은 떨리며 신경은 딱한 상태다.
오늘 저녁 찾아온 이가 다름 아닌 윌슨이었다. 막 런던에서 돌아온 참이었고, 그곳에서 강의하고, 논문을 읽고, 회의를 소집하고, 한 영매의 사기를 폭로하고, 사념 전이에 관한 일련의 실험을 주재하고, 파리의 리셰 교수를 대접하고, 수정구를 몇 시간이나 들여다보며, 물질이 물질을 통과하는 현상에 관한 몇 가지 증거를 얻었다는 것이었다. 이 모든 것을 그는 단번에 내 귀에 쏟아 부었다.
“그런데 자네!” 그가 마침내 외쳤다. “얼굴이 안 좋아 보이는구먼. 그리고 펜클로사 양은 오늘 아주 기진해 있단 말이야. 실험은 어떻게 되어 가고 있나?”
“나는 그만두었네.”
“허, 허! 왜?”
“내게는 위험한 주제로 보였기 때문일세.”
그의 커다란 갈색 수첩이 튀어나왔다.
“이거 아주 흥미로운걸,” 그가 말했다. “위험한 주제라 하는 근거가 뭔가? 부디 사건들을 시간 순서대로, 대략의 날짜와 믿을 만한 증인들의 이름 및 상주 주소를 곁들여 알려 주게.”
“우선 한 가지 물어도 되겠나,” 내가 말했다. “최면술사가 피험자를 완전히 장악한 뒤 그 힘을 악한 목적에 이용한 사례를 자네가 모아 둔 것이 있는가?”
“수십 건은 되지!” 그가 환희에 들떠 외쳤다. “암시를 통한 범죄——”
“나는 암시를 말하는 게 아닐세. 멀리 있는 한 사람에게서 오는 갑작스런 충동—제어할 수 없는 충동 말일세.”
“귀신 들림일세!” 그가 기쁨에 겨워 비명을 지르다시피 했다. “그야말로 가장 희귀한 사례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건 여덟 건, 그중 잘 입증된 건 다섯 건일세. 그럼 설마——” 환희에 겨워 그는 말조차 제대로 떼지 못했다.
“아닐세, 그런 말이 아닐세,” 내가 말했다. “안녕히 가시게! 양해해 주게, 오늘 밤은 몸이 영 좋지 않아서.” 그리하여 마침내 그를 내쫓았다. 그는 연필과 수첩을 휘두르며 물러났다. 내 고통이 듣기 거북한 것이라 해도, 장터의 구경거리처럼 윌슨에게 전시되느니 그 고통을 내가 품고 있는 편이 낫다. 그의 눈에는 이제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그에게 모든 것은 ‘사례’이고 ‘현상’일 뿐이다. 나는 차라리 죽을지언정, 이 일에 대해 그와 다시 입을 떼지 않으리라.
4월 12일. 어제는 축복 같은 고요한 하루였고, 별일 없는 밤을 누렸다. 윌슨이 곁에 있어 주는 것은 큰 위안이다. 이제 그 여자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분명, 내가 한 말을 듣고 나면 내가 그녀에게 느끼는 것과 똑같은 혐오를 그녀도 내게 느끼게 되리라. 자기를 그토록 모욕한 사내를 연인으로 두고 싶을 수는 — 결코 없으리라. 그래, 나는 그녀의 사랑에서는 자유로워진 것 같다—그러나 그녀의 증오는 어찌하지? 그녀가 그 힘들을 복수에 쓰지는 않을까? 허, 그림자 따위에 겁먹을 필요가 있겠는가? 그녀는 나를 잊을 것이고 나도 그녀를 잊을 것이고, 모든 것이 잘 풀릴 것이다.
4월 13일. 신경이 어느 정도 본래의 탄력을 되찾았다. 내가 그 피조물을 진정 이겼다고 믿는다. 다만 어느 정도의 긴장 속에 살고 있음은 고백해야겠다. 그녀는 다 나았다. 오늘 오후에 윌슨 부인과 함께 대로(하이 스트리트)에서 마차를 타고 다녔다는 얘기를 들었다.
4월 14일. 이 도시를 아예 떠나 버릴 수만 있다면 좋겠다. 학기가 끝나는 그날로 애거사 곁으로 날아가리라. 딱할 만큼 나약한 일이겠지만, 이 여자는 내 신경을 참으로 지독하게 긁는다. 오늘 다시 그녀를 보았고, 이야기까지 나누었다.
점심 직후였다. 서재에서 담배 한 개비를 태우고 있는데, 복도에서 내 하인 머레이의 발소리가 들렸다. 그 뒤로 또 다른 발소리가 섞여 오는 것을 나는 무심히 의식했고, 누구일지 굳이 따져 볼 것도 없다고 여긴 참이었는데, 갑자기 어떤 작은 소리가 나를 의자에서 벌떡 일으켰다. 소름이 오소소 돋는 예감과 함께였다. 목발이 바닥을 치는 소리가 어떤 성질인지는 전에는 특별히 눈여겨본 적이 없었으나, 내 곤두선 신경이 내게 일러 주었다. 지금 그것이 바로 그 소리임을, 묵직한 발걸음의 먹먹한 소리와 번갈아 나는 날카로운 나무 소리임을. 다음 순간, 하인이 그녀를 들여보냈다.
나는 상례(常例)의 사교 인사를 건네려 하지 않았고, 그녀 또한 마찬가지였다. 나는 다만 다 타 가는 담배를 손에 쥔 채 서서 그녀를 응시했다. 그녀는 그녀대로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고, 그 눈빛에 나는 떠올렸다. 내가 이 일기장에서 그녀의 눈빛을 — 음흉한지 사나운지 — 규정해 보려 애썼던 일을. 오늘 그 눈은 사나웠다 — 차갑고 가차 없이.
“그래요,” 그녀가 마침내 입을 뗐다. “지난번에 뵈었을 때와 같은 마음이신가요?”
“내 마음은 내내 같은 자리였소.”
“서로 분명히 해 두기로 하지요, 길로이 교수,” 그녀가 천천히 말했다. “저는 함부로 가지고 놀 만한 그런 안전한 사람이 아니에요. 이쯤이면 교수님도 알아차리셨을 테죠. 저에게 일련의 실험에 들어가자고 청한 것이 교수님이었고, 제 호감을 얻어 낸 것도 교수님이었고, 저를 사랑한다 고백한 것도 교수님이었고, 애정의 글귀를 적어 자기 사진을 가져다준 것도 교수님이었어요. 그러고는 마침내, 바로 그날 저녁에 그 누구도 감히 저에게 건네지 못한 말로 저를 무례의 극치에 몰아넣어도 되겠다 싶으셨던 거고요. 그 말들이 격정의 한순간에 터져 나온 것이라 말씀해 주세요. 그러면 저는 잊고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답니다. 진심으로 하신 말씀은 아니지요, 오스틴? 정말로 저를 미워하시는 건 아니지요?”
나는 이 불구의 여인을 가엾게 여길 뻔했다 — 위협으로 차 있던 눈길을 뚫고 사랑에 대한 갈구가 돌연 비쳐 나왔기에. 그러나 이내 내가 견뎌 온 일들을 떠올리자, 내 가슴이 부싯돌처럼 굳어 버렸다.
“혹 내가 사랑을 말하는 것을 들으셨다면,” 내가 말했다. “그건 내 목소리가 아니라 그대의 목소리가 내 입을 빌려 말한 것임을, 그대 자신이 가장 잘 아시리라. 내가 그대에게 진실로 건넨 말이 있다면 그것은 단 하나, 지난번에 만났을 때 그대가 들은 바로 그 말들뿐이오.”
“알겠어요. 누군가가 당신을 제 편에서 돌려세운 거로군요. 바로 그 사람이로군요!” 그녀는 바닥을 목발로 탁 쳤다. “좋아요, 제가 이 자리에서 당신을 스패니얼처럼 제 발치에 기어 엎드리게 만들 수 있다는 건 당신도 빤히 아실 테죠. 앞으론 제가 약해져 있을 때의 저를 다시는 보지 못하실 거예요. 그때처럼 저를 모욕하고도 무사할 수는 없을 테고요. 조심하세요, 길로이 교수. 당신은 지금 무서운 자리에 서 있어요. 제가 당신에게 쥐고 있는 손아귀가 어떤 것인지, 아직 제대로 깨닫지 못하셨군요.”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돌아섰다.
“좋아요,” 잠시 뜸을 들인 뒤 그녀가 말했다. “제 사랑을 경멸하신다면, 공포라면 어떻게 되는지 봐야겠군요. 지금은 웃으시겠지만, 언젠가 당신이 저에게 비명을 지르며 용서를 빌러 올 날이 옵니다. 그래요, 그토록 자존심 센 당신이 제 앞의 바닥에 엎드려 빌게 될 것이고, 저를 당신의 가장 좋은 벗에서 가장 쓰라린 원수로 돌려세운 그날을 저주하게 될 거예요. 조심하세요, 길로이 교수!” 나는 허공에서 떨리는 흰 손과, 격정에 일그러져 사람의 형상이라 하기 어려운 얼굴을 보았다. 한순간 뒤 그녀는 떠났고, 재바른 절룩임과 목발 소리가 복도 저편으로 멀어져 가는 것을 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내 가슴에 무게를 남기고 갔다. 다가올 불운에 대한 막연한 예감이 묵직하게 내리눌러 온다. 그것이 한낱 빈 분노의 말일 뿐이라고 나 자신을 설득해 보려 애쓰지만 허사다. 저 가차 없는 눈을 나는 너무도 또렷이 기억한다. 그렇게 치부할 수가 없다. 어찌해야 하는가 — 아, 나는 대체 어찌해야 하는가? 나는 이제 내 영혼의 주인이 아니다. 언제고 이 역겨운 기생자가 내 속으로 기어들 수 있고, 그러고 나면—— 누구에게든 이 소름 끼치는 비밀을 털어놓아야 한다 — 털어놓지 않고서는 미쳐 버리리라. 함께 가슴 아파하고 조언해 줄 누군가만 있다면! 윌슨은 논외다. 찰스 새들러는 제 경험이 미치는 데까지만 나를 이해해 주리라. 프랫-홀데인! 그는 균형 잡힌 사람이고, 대단한 분별과 수완을 지닌 사람이다. 그에게 가 보리라. 모든 것을 그에게 털어놓으리라. 신이여, 그가 나에게 조언을 줄 수 있기를!
4
오후 6시 45분. 아니, 소용없다. 내게 사람의 도움은 없다. 이 싸움은 홀로 치러 내야 한다. 내 앞에는 두 길이 놓여 있다. 이 여자의 연인이 되거나. 아니면 그녀가 가할 수 있는 갖가지 핍박을 견디거나. 설령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해도, 나는 두려움의 지옥 속에서 살아가야 하리라. 그녀가 나를 고문할 수도, 미치게 할 수도, 죽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결코, 결코, 결코 굴복하지 않으리라. 그녀가 내게 안길 수 있는 어떤 고통이 애거사를 잃고, 내가 거짓 맹세한 거짓말쟁이가 되고, 신사라는 이름마저 박탈당하는 것보다 더 나쁠 수 있겠는가?
프랫-홀데인은 더없이 다정했고, 내 이야기를 끝까지 예의 바르게 들어 주었다. 그러나 그의 육중한 이목구비, 느린 눈빛, 그를 둘러싼 묵직한 서재 가구들을 보고 있자니, 내가 털어놓으러 온 이야기를 도무지 꺼낼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이 너무도 실체적이고 물질적이었다. 게다가 한 달 전의 나라면, 만일 동료 가운데 하나가 내게 악령 들림의 이야기를 들고 왔다면, 나는 뭐라 했을 것인가? 어쩌면 나는 그보다 덜 인내심을 가졌을 것이다. 어쨌거나 그는 내 진술을 받아 적고는 내가 차를 얼마나 마시는지, 몇 시간이나 자는지, 최근 과로한 일은 없는지, 갑작스런 두통, 나쁜 꿈, 이명, 눈앞의 섬광은 없었는지를 물었다—모두 내 문제의 근원이 뇌충혈이라 여기는 징후로 향하는 질문들이었다. 마지막에 그는 야외 운동이며 신경 흥분을 피하라느니 하는 상투어를 잔뜩 늘어놓고는 나를 돌려보냈다. 그가 처방해 준 클로랄과 브롬화물은 종이째 둘둘 말아 도랑에 내던져 버렸다.
그렇다, 어떤 사람에게서도 도움을 기대할 수 없다. 더 이상 누구에게 상의하다가는 그들이 머리를 맞대 나를 정신병원에 넣어 버릴지도 모른다. 두 손으로 내 용기를 움켜쥐는 수밖에, 그리고 정직한 사람이 버림받지 않기를 기도하는 수밖에.
4월 10일. 기억에 남을 만큼 가장 달콤한 봄이다. 그토록 푸르고, 그토록 온화하며, 그토록 아름답다! 아, 바깥의 자연과, 의혹과 공포로 찢긴 내 영혼 사이의 이 대비여! 별일 없는 하루였으나, 나는 내가 심연의 언저리에 서 있음을 알고 있다. 알면서도 나는 일상의 절차를 이어 가고 있다. 밝은 구석이 있다면 애거사가 행복하고 건강하며 일체의 위험 바깥에 있다는 것. 만일 이 피조물이 나와 그녀 둘 다에게 손을 뻗을 수 있었다면 그녀가 무슨 짓인들 못 했을까?
4월 16일. 그 여자는 고통을 주는 데 재간이 좋다. 내가 내 일을 얼마나 아끼는지, 내 강의가 얼마나 높이 평가받아 왔는지를 그녀는 알고 있다. 그러니 그녀가 이제 나를 공격해 들어오는 자리는 바로 거기다. 결국은 내가 교수직을 잃는 것으로 끝나리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나는 끝까지 싸우리라. 싸움 없이는 그 자리에서 끌려 나가지 않으리라.
오늘 아침 강의 중에는 아무런 변화도 의식되지 않았다. 다만 일이 분 동안 현기증과 어질함이 있었다가 금세 가라앉았을 뿐이다. 오히려 나는 스스로에게 축하를 건넸다. 오늘 주제(적혈구의 기능)를 흥미롭고도 명료하게 풀어냈다고. 그래서 강의 직후 한 학생이 내 실험실로 찾아와 내 설명과 교과서의 서술이 어긋나 혼란스럽다고 하소연했을 때 나는 무척 놀랐다. 그가 내민 수첩에는, 강의의 한 대목에서 내가 더없이 해괴하고 비과학적인 이단설을 옹호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당연히 나는 부인하며 오해였을 거라고 잡아떼었지만, 그의 필기를 동료들의 것과 대조해 보니 그의 말이 맞았다. 나는 실제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쏟아낸 것이었다. 물론 그것을 한순간의 착란 탓으로 둘러댈 참이지만, 이것이 그저 일련의 첫 번째에 지나지 않으리라는 예감이 너무도 뚜렷하다. 이제 학기가 끝나기까지 꼬박 한 달 남았다. 그때까지 버틸 수 있기만을 기도한다.
4월 26일. 일기장에 무엇인가 적어 둘 기력이 생기기까지 열흘이 흘렀다. 내가 내 모욕과 수치를 기록해서 무엇 하겠는가? 다시는 이 일기장을 펼치지 않겠노라 맹세하기도 했다. 그러나 습관의 힘은 강한 것이어서, 나는 또다시 내 무서운 체험들의 기록을 붙들고 있다—자살자가 자기를 죽음에 이르게 한 독의 효과를 기록으로 남기는, 그런 심사에 가깝다.
그래, 내가 예견했던 파탄이 왔다—어제의 일이니 멀지도 않은 일이다. 대학 당국이 내 강사직을 거두어 갔다. 과로의 영향에서 나를 풀어 주고 건강을 되찾을 기회를 주기 위한 한시적 조치인 양, 더없이 조심스러운 방식으로 처리되었다. 그럼에도, 처리되기는 처리된 것이고, 나는 이제 더 이상 길로이 교수가 아니다. 실험실은 여전히 내 관할이지만 머지않아 그것마저 내 손을 떠나리라는 데 거의 의심이 없다.
사실인즉, 내 강의는 대학의 웃음거리가 되어 버렸다. 내 강의실은 그 괴짜 교수가 이번엔 또 무슨 짓과 무슨 소리를 할지 구경하러 모여든 학생들로 붐볐다. 내 수치의 세세함까지 여기에 늘어놓을 수는 없다. 오, 저 악마 같은 여자! 그녀가 내게 강제로 펼쳐 보인 광대짓과 바보 짓에 끝이 없었다. 나는 또박또박 잘 시작했지만, 늘 다가오는 식(蝕)의 기미를 안은 채였다. 이윽고 그 영향력이 느껴지기 시작하면 나는 그것에 맞서 몸부림쳤다. 주먹을 꽉 쥐고 이마에 땀방울을 맺으며 그것을 이겨 내려 애쓰는 사이, 학생들은 내가 뱉는 앞뒤 안 맞는 말들과 뒤틀리는 몸짓을 듣고 보며, 자기네 교수의 기이한 몸짓에 박장대소를 터뜨리곤 했다. 그러다 그녀가 나를 완전히 장악해 버리고 나면, 해괴하기 짝이 없는 것들이 튀어나왔다—어이없는 농담, 건배사라도 읊는 듯한 감상적 대사, 발라드 가락의 단편, 심지어 수강생 누군가를 향한 인신공격까지. 그러고는 한순간 내 머릿속이 다시 맑아져, 강의의 남은 부분은 체면을 차린 채로 이어지곤 했다. 내 행실이 대학가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이 당연하다. 대학 평의회가 이런 추문을 공식적으로 다루지 않을 수 없게 된 것도 당연하다. 오, 저 악마 같은 여자!
그리고 이 모든 것 가운데서도 가장 끔찍한 부분은 나 자신의 외로움이다. 이 흔해 빠진 영국식 내닫이창 앞에 앉아 이 흔해 빠진 영국 거리를, 요란한 합승마차와 어슬렁대는 경관이 있는 거리를 내다보고 있는 내 등 뒤에 이 시대와 이 장소와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그림자 하나가 드리워져 있다. 앎의 집에 있으면서도, 나는 과학이 아무것도 모르는 힘에 눌리고 고문받는다. 어떤 판사도 내 말을 들어 주지 않으리라. 어떤 신문도 내 사건을 다루지 않으리라. 어떤 의사도 내 증상을 믿지 않으리라. 내 가장 가까운 벗들조차 그것을 뇌 이상의 징조로 여길 뿐이리라. 나는 내 동족과 완전히 단절되어 있다. 오, 저 악마 같은 여자! 조심하라! 나를 너무 멀리까지 몰고 가서는 안 된다. 법이 사람을 지켜 주지 못할 때, 그 사람은 스스로 법을 만들 수도 있는 법이니.
어제 저녁 대로에서 그녀가 나와 마주쳐 말을 걸었다. 외딴 시골길의 울타리 사이가 아니었던 것이 그녀에게 다행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녀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아직도 길이 들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나는 대꾸조차 내려 주지 않았다. “나사를 한 번 더 죄어 봐야겠군요;” 그녀가 말했다. 조심하시지, 마나님, 조심하시지! 나는 한 번 그녀를 내 손아귀에 넣은 적이 있다. 또 한 번 그 기회가 올지도 모른다.
4월 28일. 내 강사직이 정지되자 그녀가 나를 괴롭힐 수단까지 사라진 셈이 되어, 축복 같은 이틀의 평화를 누렸다. 따지고 보면 절망할 이유는 없다. 사방에서 위로가 쏟아져 들어오고, 모두가 입을 모아 말한다. 과학에 대한 내 헌신과 내 연구의 고된 성질이 내 신경 체계를 흔들어 놓은 것이라고. 평의회로부터 더없이 따뜻한 소식을 받았다. 외유(外遊)를 권하며, 여름 학기가 시작될 무렵에는 모든 직무를 다시 맡을 수 있으리라는 확신을 내비친 내용이었다. 그들이 내 경력과 대학에 대한 내 기여에 대해 언급한 말들은 어떤 치사보다도 과분한 것이었다. 자신의 인기를 가늠해 보는 것은 오로지 불운 속에서만 가능하다. 이 피조물이 나를 괴롭히는 일에 지칠지도 모르고, 그러면 모든 것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다. 그리되도록 신이여 도우소서!
4월 29일. 우리 졸리는 작은 도시에 작은 소동이 벌어졌다. 우리가 아는 범죄라고는 기껏해야 망나니 학부생이 가로등 몇 개를 깨거나 경관과 드잡이를 하는 정도다. 그런데 어젯밤, 잉글랜드 은행 지점에 침입을 시도한 자가 있었고, 그 탓에 우리는 모두 술렁이고 있다.
지점 매니저 파큰슨은 내 막역한 벗이다. 식사를 마치고 그리 걸어가 보니 그가 몹시 흥분해 있었다. 도둑들이 회계실에 침입해 들어왔다 한들 금고까지 깨뜨려야 했을 것이므로, 방어가 공격보다 훨씬 강했다. 실상 그 공격이라는 것도 대단한 것 같지는 않다. 아래층 창문 두 개에 끌이나 그 비슷한 도구를 비집고 넣어 열려고 한 자국이 남아 있다. 경찰이 좋은 단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창틀이 바로 전날 초록 페인트로 칠해진 참이었고, 묻어 있는 얼룩으로 보건대 페인트 일부가 범인의 손이나 옷에 옮겨 붙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오후 4시 30분. 아, 저 저주받을 여자! 세 번 저주받을 여자! 아무래도 좋다! 그녀는 나를 이기지 못할 것이다! 아니, 못할 것이다! 그러나 아, 저 암마(暗魔) 같은 계집! 그녀는 내 교수직을 앗아 갔다. 이제 그녀는 내 명예마저 앗아 갈 참이다. 그녀를 상대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단 말인가, 저것밖에는—— 아, 그러나 이토록 막다른 곳에 몰려 있으면서도 차마 나는 그 생각을 입에 담을 수가 없다!
한 시간쯤 전이었다. 침실로 들어가 거울 앞에서 머리를 빗고 있는데, 돌연 내 눈에 들어온 어떤 것에 속이 울렁거리고 온몸이 차게 식어, 나는 침대 가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내가 눈물을 흘린 것은 오래전의 일이지만, 신경이 죄다 풀려 버린 채 무력한 슬픔과 분노로 그저 흐느끼고 또 흐느낄 뿐이었다. 거기, 옷장 옆 고리에는 내가 저녁 식사 후 흔히 걸치는 실내 상의가 걸려 있었고, 오른쪽 소매는 손목에서 팔꿈치까지 초록 페인트 얼룩이 두툼하게 말라붙어 있었다.
이것이 바로 그녀가 “나사를 한 번 더 죈다”며 한 말의 뜻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나를 대중 앞의 바보로 만들었다. 이제 그녀는 나를 범죄자로 낙인찍으려는 것이다. 이번에는 실패했다. 그러나 다음번에는? 생각하기조차 두렵다—애거사를 생각하고 내 늙고 불쌍한 어머니를 생각하면! 차라리 죽어 버렸으면 좋겠다!
그렇다, 이것이 그 나사를 한 번 더 죈다는 또 다른 뜻이기도 하다. 또한 내가 자기에게 그녀의 힘이 어떤 것인지 아직 깨닫지 못했다고 그녀가 말했을 때 가리킨 바도 틀림없이 이것이었다. 그녀와 나눈 대화 기록을 되짚어 보면, 그녀가 분명히 선언한 바가 있다. 의지를 약하게 쓰면 피험자는 의식이 있고, 강하게 쓰면 의식을 잃는다고. 어젯밤 나는 의식이 없었다. 내 침대에서 꿈 한 자락 없이 깊이 잠들었노라 맹세할 수도 있었을 터다. 그러나 저 얼룩이 일러 준다. 내가 옷을 갖춰 입고 밖으로 나가 은행 창을 열어 보려다 돌아왔음을. 누구에게 들켰을까? 누군가 내가 그리하는 것을 보고 집까지 쫓아왔을 가능성이 있을까? 아, 내 삶은 얼마나 지옥이 되어 버렸는가! 평온도, 휴식도 없다. 그러나 내 인내심도 끝이 가깝다.
밤 10시. 내 외투를 테레빈유로 닦아 냈다. 누구에게 목격된 것 같지는 않다. 자국은 내 드라이버로 낸 것이었다. 드라이버를 찾아보니 페인트로 온통 굳어 있어 그것도 닦아 두었다. 머리가 터질 듯 지끈거려 안티피린 다섯 그레인을 삼켰다. 애거사가 아니었다면 오십 그레인을 삼켜 끝을 내 버렸을 것이다.
5월 3일. 사흘의 평온한 날. 이 지옥의 귀신은 쥐를 희롱하는 고양이와 같다. 풀어 주는 것은 다시 덮치기 위해서일 뿐이다. 내가 가장 두려워지는 때는 모든 것이 고요할 때다. 내 몸 상태는 딱하기 짝이 없다 — 끊이지 않는 딸꾹질과 왼쪽 안검하수.
마든 댁에서 편지가 왔는데, 내일 모레 돌아오리라 한다. 반가워야 할지 서글퍼야 할지 모르겠다. 런던에 있을 때는 안전했다. 이곳에 돌아오면 내가 허덕이고 있는 이 비참한 그물 속으로 그들도 끌려들어 올지 모른다. 그리고 나는 이 일을 그들에게 말해야 한다. 나 자신의 행동에 내가 책임질 수 없는 처지임을 알면서 애거사와 혼인할 수는 없다. 그렇다, 설령 우리 사이의 모든 것이 끝나 버린다 할지라도, 나는 말해야 한다.
오늘 밤은 대학 무도회가 있는 날이니 가야 한다. 흥겨움을 차릴 기분이 이토록 아닌 적이 없음을 신은 아시리라. 그러나 내가 공석에 모습을 드러내기에 부적합하다는 말이 돌게 해서는 안 된다. 내가 그곳에 나타나 대학 원로들 몇과 말을 섞어 두는 것은, 내 교수직을 내게서 거두는 일이 부당함을 그들이 실감하는 데 큰 도움이 되리라.
밤 10시. 무도회에 다녀왔다. 찰스 새들러와 함께 갔으나 나는 먼저 자리를 떴다. 그러나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으리라. 요즈음 밤에 잠드는 것이 정말 두렵기 때문이다. 그는 명랑하고 실용적인 사내이니 그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면 신경이 가라앉으리라. 전반적으로 오늘 저녁은 큰 성과였다. 영향력 있는 이들에게 빠짐없이 말을 붙여 두었고, 내 교수직이 아직은 공석이 아님을 실감케 해 주었다고 생각한다. 그 피조물도 무도회에 와 있었다—물론 춤을 출 수는 없으니 윌슨 부인과 나란히 앉아 있었다. 그녀의 눈이 거듭거듭 내 위에 머물렀다. 내가 그 방을 나서며 마지막으로 본 것은 거의 그녀의 눈빛이었다. 내가 그녀 쪽을 옆으로 두고 앉아 있을 때 그녀를 지켜보니, 그녀의 시선이 다른 누군가를 좇고 있었다. 그때 둘째 서스턴 양과 함께 춤을 추고 있던 새들러였다. 그녀의 표정으로 미루어 보건대, 그가 내가 그녀의 손아귀에 잡혔듯 그녀의 손아귀에 잡히지 않은 것은 그에게 다행이다. 그는 자기가 어떤 운명에서 벗어났는지 모른다. 지금 거리에서 그의 발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내려가 문을 열어 주리라. 그가 만일——
5월 4일. 어제 왜 이렇게 글이 끊겼을까? 결국 나는 아래층으로 내려가지 않았다—적어도 내려간 기억이 없다. 그런가 하면 침대에 든 기억도 없다. 오늘 아침 한쪽 손이 크게 부어 있는데, 어제 그 손을 다친 기억도 없다. 그 외에는 어젯밤 흥이 되레 기분을 더 낫게 해 둔 것 같다. 그러나 이해되지 않는 것이 하나 있다. 그토록 만나려 작정했던 찰스 새들러를 어찌하여 결국 못 만났는가. 혹시—— 맙소사, 그렇고말고 그럴 법하다! 그녀가 또 나를 끌고 악마의 춤을 추게 한 것인가? 새들러의 집으로 가서 물어봐야겠다.
정오. 사태가 기로에 이르렀다. 내 생은 살 가치가 없다. 그러나 내가 죽어야 한다면, 그녀도 함께 가야 한다. 그녀가 나를 그리했듯 또 다른 사내를 미치게 두라고 뒤에 남겨 둘 수는 없다. 아니, 인내의 한계에 이르렀다. 그녀는 나를 이 세상을 걷는 그 어떤 자보다도 절박하고 위험한 사내로 만들어 놓았다. 내가 파리 한 마리도 차마 해치지 못하는 위인이었음은 신이 아신다. 그런데도 지금 저 여자에게 내 손을 얹을 수만 있다면, 그녀는 살아서 이 방을 나가지 못할 것이다. 오늘 당장 그녀를 찾아가겠다. 내게서 무엇을 각오해야 하는지를 그녀는 알게 되리라.
새들러의 집에 가 보니 놀랍게도 그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 내가 들어서자 그는 몸을 일으켜 나를 향해 얼굴을 돌렸는데, 그 얼굴을 보니 나는 속이 울렁거렸다.
“이보게 새들러, 무슨 일인가?” 내가 외쳤지만, 그 말을 하는 순간 내 가슴이 차갑게 식었다.
“길로이,” 그가 부어오른 입술로 우물거리며 대답했다. “몇 주 전부터 나는 자네가 미친 사람이라 여겨 왔네. 이제는 확실히 알겠군, 그뿐 아니라 위험한 미치광이라는 것까지. 내가 대학에 추문을 일으키는 것이 내키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자네는 경찰의 손에 넘겨져 있었을 걸세.”
“혹시——” 내가 소리쳤다.
“내가 어젯밤 문을 열자 자네가 밖에서 돌진해 와서 두 주먹으로 내 얼굴을 내리치고, 나를 쓰러뜨린 뒤, 옆구리를 사납게 걷어차 거의 의식을 잃은 채로 나를 길 위에 남겨 두고 갔네. 자네 손을 보게, 자네가 한 짓을 증언하지 않는가.”
그렇다, 그것이 거기에 있었다. 어떤 끔찍한 일격을 가한 뒤인 양 스펀지 같은 주먹 관절이 부풀어 올라 있었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으랴? 그가 나를 미친 자로 치부한다 할지라도 나는 그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아야 한다. 나는 그의 침대 옆에 앉아 처음부터 끝까지 내 고통을 죄다 풀어놓았다. 떨리는 두 손과 타는 듯한 말로 쏟아낸 이야기는, 제아무리 회의적인 자에게라도 확신을 심어 주었을 것이다. “그녀는 자네를 미워하고 나를 미워한다네!” 내가 외쳤다. “어젯밤에 한꺼번에 둘 모두에게 복수한 것이지. 무도회에서 내가 나가는 것을 보았을 테고, 자네 역시 눈에 담았을 걸세. 자네가 집에 닿기까지 얼마나 걸리는지도 알았을 테고. 그 뒤로는 그 고약한 의지를 쓰기만 하면 되었지. 아, 자네의 멍든 얼굴은 멍든 내 영혼에 비하면 사소한 것이라네!”
그는 내 이야기에 심히 동요했다. 그것은 분명해 보였다. “그래, 그래, 그녀가 내가 방에서 나가는 것을 내내 지켜보긴 했네,” 그가 중얼거렸다. “그녀라면 충분히 그럴 만하지. 그런데 그녀가 정말로 자네를 이 지경까지 몰고 갔단 말인가? 어찌할 생각인가?”
“끝장을 내겠네!” 내가 외쳤다. “나는 완전히 궁지에 몰렸네. 오늘 그녀에게 분명히 경고하리라. 다음번이 마지막이 될 걸세.”
“경솔한 짓은 하지 말게,” 그가 말했다.
“경솔이라니!” 내가 외쳤다. “유일한 경솔이 있다면 한 시간이라도 이 일을 더 미루는 일뿐일세.” 그러고는 방으로 달려 돌아왔다. 지금 여기, 내 인생의 가장 큰 고비가 될지도 모를 일의 전야에 나는 서 있다. 즉시 출발하리라. 오늘 한 가지는 얻었다. 적어도 한 사람에게는 내 괴물 같은 체험이 실재임을 실감하게 했다. 그리고 만일 최악의 일이 벌어지더라도, 이 일기장이 나를 몰아세운 채찍의 증거로 남으리라.
저녁. 윌슨의 집에 도착해 위층으로 안내되어 올라가 보니, 그는 펜클로사 양과 함께 앉아 있었다. 반 시간 동안, 강신술의 두드림의 정확한 성질에 관해 근래 진행한 연구를 시시콜콜 늘어놓는 그의 안달난 수다를 견뎌야 했다. 그 사이 그 피조물과 나는 방을 가로질러 서로 마주 보며 침묵을 지키고 앉아 있었다. 그녀의 눈에서 나는 섬뜩한 재미를 읽었고, 그녀는 내 눈에서 증오와 위협을 보았을 것이다. 그와 말할 기회를 거의 단념할 뻔했는데, 그가 무슨 일로 방을 비우게 되어, 우리는 단둘이 잠시 남게 되었다.
“자, 길로이 교수 — 아니면 이제 그냥 길로이 씨라고 불러야 하나요?” 그녀가 그 특유의 쓰디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무도회가 끝난 뒤 당신의 친구 찰스 새들러 씨는 건강하신가요?”
“이 악귀 같은 계집!” 내가 소리쳤다. “당신의 잔꾀도 이제 끝이다. 더는 당하지 않겠다. 내 말을 잘 들어라.” 나는 성큼성큼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거칠게 흔들었다. “하늘에 신이 계심이 확실한 만큼, 맹세하건대, 또 한 번 그 악마 같은 짓을 나에게 벌인다면 내가 그 대가로 그대의 목숨을 취하리라. 무엇이 오든 나는 그대의 목숨을 취하리라. 사람이 견딜 수 있는 한계까지 나는 왔다.”
“우리 사이의 셈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그녀가 내 것 못지않은 격정을 담아 말했다. “나는 사랑할 줄도 알고, 미워할 줄도 알아요. 당신은 선택을 했지요. 앞엣것을 걷어차기로 택한 이상, 이제 뒤엣것을 맛보셔야 해요. 당신 기운을 꺾으려면 좀 더 있어야겠군요. 그렇지만 반드시 꺾고 말 겁니다. 내일 마든 양이 돌아오신다지요, 내가 듣기로는.”
“그대가 그 사람을 입에 담다니!” 내가 소리쳤다. “그대가 감히 그녀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더러움이다. 만일 그대가 그녀를 해치려 든다면——”
그녀는 겉으로는 버티려 애썼으나 두려워하고 있음이 내 눈에 보였다. 그녀는 내 마음속 검은 결의를 읽고는 내게서 움츠러들어 물러났다.
“그런 수호자를 둔 분은 참으로 복이 많으시네요,” 그녀가 말했다. “외로운 여자를 감히 겁박이라도 하시다니. 마든 양께 그 보호자에 대해 축하라도 드려야겠군요.”
말은 쓰디썼으나 목소리와 몸가짐은 한층 더 가시처럼 찔렀다.
“더는 이야기할 것 없소,” 내가 말했다. “나는 다만 한 가지 말해 두려고 왔을 뿐이오—그리고 더없이 엄숙하게 일러 두거니와—이다음에 내게 가하는 그대의 만행이 그대의 마지막이 되리라.” 그러고 나는 계단에서 윌슨의 발소리가 들리는 것을 듣고는 방을 걸어 나왔다. 그렇다, 그녀가 독기 어리고 살벌한 눈빛을 할 수 있다 하나, 그럼에도 그녀는 이제 서서히 깨닫기 시작했다. 자기가 나로부터 두려워할 것이 내가 그녀로부터 두려워하는 것만큼 크다는 것을. 살인! 그 말이 불쾌한 소리를 낸다. 그러나 뱀을 잡는 일을, 호랑이를 잡는 일을 살인이라 부르지는 않지 않는가. 이제 그녀가 조심할 차례다.
5월 5일. 열한 시에 역에서 애거사와 그녀의 어머니를 맞았다. 그녀는 그토록 환해 보였고, 행복해 보였으며, 아름다워 보였다. 나를 만난 기쁨에 그녀는 어쩔 줄 몰라 했다. 이런 사랑을 받을 자격이 내게 어디 있으랴? 그들을 집까지 모셔다 드리고 함께 점심을 나누었다. 모든 고통이 한순간에 내 삶에서 쭉 걷혀 나간 듯했다. 그녀는 내게 창백하고 근심에 젖고 아파 보인다고 말했다. 그 사랑스런 아이는 그것을 내 외로움과 가정부의 소홀한 시중 탓으로 돌렸다. 그녀가 결코 진실을 알지 못하게 해 주소서! 그림자가 있어야 한다면, 그 검은 그림자는 영영 내 삶 위에만 가로누워 있고, 그녀의 삶만은 햇빛 속에 있게 하소서. 이제 막 그들에게서 돌아오니, 나는 새사람이 된 느낌이다. 그녀가 내 곁에 있어 준다면, 삶이 어떤 시련을 보내오더라도 나는 담대한 얼굴로 맞설 수 있을 것 같다.
오후 5시. 자, 정확을 기해 보자. 일이 정확히 어떻게 벌어졌는지 말해 보자. 아직 머릿속에 생생하니, 옳게 적어 둘 수 있다. 오늘의 일을 내가 잊어버릴 날은 아마 오지 않을 것이니 말이다.
점심 뒤에 마든 댁에서 돌아와, 내 냉동 마이크로톰으로 현미경용 절편을 자르고 있었는데, 순식간에 근래 너무도 익숙해진 그 증오스런 방식으로 나는 의식을 잃고 말았다.
감각이 돌아왔을 때 나는 내가 일하던 방과는 전혀 다른 작은 방에 앉아 있었다. 옥양목 커버를 씌운 긴 의자들과 색색의 커튼, 그리고 벽에 걸린 천 가지 아담한 소품들이 아늑하고 환했다. 내 앞에서 작은 장식 시계가 째깍였고 바늘은 3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모두 내가 익히 아는 것이었지만, 나는 잠시 멍한 채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피아노 위에 놓인 캐비닛판 내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그 반대편에는 마든 부인의 사진이 놓여 있었다. 그제야 물론 나는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깨달았다. 애거사의 규방이었다.
그런데 내가 어쩌다 이곳에 와 있으며, 무엇을 하려던 것인가? 끔찍한 가라앉음이 내 가슴으로 밀려들었다. 어떤 악마적 용건에 나는 내몰려 온 것인가? 그 용건은 이미 행해진 뒤인가? 분명 그럴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나에게 의식이 돌아오도록 허락되었겠는가? 아, 그 순간의 고통이라니! 내가 무엇을 저질렀단 말인가? 나는 절망에 벌떡 일어섰고, 그 순간 내 무릎에서 작은 유리병 하나가 융단 위로 떨어졌다.
병은 깨지지 않았고, 나는 그것을 집어 들었다. 겉면에 “Sulphuric Acid. Fort.”(황산. 농축)라고 적혀 있었다. 둥근 유리 마개를 뽑자 짙은 연기가 천천히 피어올랐고, 톡 쏘는 숨 막히는 냄새가 방 안에 번졌다. 내 서재에서 화학 실험용으로 보관해 두었던 것임을 나는 알아보았다. 그러나 어찌하여 내가 애거사의 방에 황산 병을 들고 왔단 말인가? 질투에 사로잡힌 여자들이 연적의 미모를 망가뜨리는 데 쓴다는 이 짙고 독한 액체가 아닌가? 빛에 비추어 병을 들었을 때 내 심장이 멎는 듯했다. 고맙다 신이여, 병은 가득 차 있었다! 아직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만일 애거사가 한 순간만 일찍 들어왔다면, 내 안에 든 저 지옥의 기생자가 이 물질을 그녀에게 끼얹지 않았으리라 장담할 수 있겠는가—— 아, 차마 생각할 수도 없다! 그러나 바로 그 목적이었음이 분명하다. 그것이 아니라면 내가 왜 이것을 가져왔겠는가? 내가 저지를 뻔한 일을 떠올리자 낡아빠진 내 신경이 그만 무너져 내려, 나는 몸을 떨고 경련하며 주저앉았다. 딱한 사람의 잔해였다.
나를 정신이 들게 한 것은 애거사의 목소리와 그녀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였다. 고개를 들어 보니, 그 푸른 두 눈이 다정과 연민으로 가득 차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당신을 시골로 모시고 나가야겠어요, 오스틴,” 그녀가 말했다. “당신에게 필요한 건 휴식과 고요예요. 너무 아파 보이세요.”
“아, 아무것도 아니라오!” 나는 미소를 지어 보이려 애쓰며 말했다. “잠깐 기운이 빠졌던 것뿐이오. 이제 괜찮소.”
“기다리게 해 드려 정말 죄송해요. 가엾어라, 반 시간이나 여기 계셨겠네요! 응접실에 사제님이 계셨는데, 당신이 그분을 썩 좋아하지 않으시는 걸 아니까 제인더러 당신을 이리로 모셔 오게 한 거예요. 그 양반이 갈 생각을 않으시는 줄 알았어요!”
“고맙다 신이여, 그가 오래 머물러 주었구나! 고맙다 신이여, 그가 오래 머물러 주었구나!” 나는 히스테릭하게 외쳤다.
“어머, 왜 그러세요, 오스틴?” 그녀가 내 팔을 붙잡으며 물었다. 내가 의자에서 비틀거리며 일어섰기 때문이다. “사제님이 오래 머무르신 게 왜 그리 다행이에요? 그리고 그 손에 들린 작은 병은 뭐예요?”
“아무것도 아니오,” 나는 외치며 병을 주머니 속에 쑤셔 넣었다. “그러나 나는 가야 하오. 중요한 일이 있소.”
“얼마나 매섭게 보이세요, 오스틴! 당신 얼굴이 그런 모습이었던 적이 없어요. 화가 나신 거예요?”
“그렇소, 화가 났소.”
“설마 저한테요?”
“아니오, 아니오, 그대여! 그대는 이해할 수 없을 것이오.”
“그런데 왜 오셨는지도 말씀하지 않으셨잖아요.”
“그대에게 묻고 싶었소. 무슨 일이 벌어지든, 내 이름에 어떤 그림자가 드리워지든, 그대는 나를 언제까지나 사랑해 줄 것이냐고. 겉보기로는 아무리 검게 보이더라도 나를 믿고 의지해 주겠느냐고 말이오?”
“그럴 거라는 걸 아시잖아요, 오스틴.”
“그렇지, 그대가 그리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소. 내가 하게 될 일, 나는 그것을 그대를 위해 하는 것이오. 그리로 내몰렸소. 다른 길이 없소이다, 그대여!” 나는 그녀에게 입을 맞추고 방을 박차고 나왔다.
망설임의 시간은 끝났다. 저 피조물이 내 앞길과 내 명예만을 위협하고 있는 동안에는, 어찌해야 할지에 대한 의문이 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 애거사가 — 나의 순결한 애거사가 — 위험에 처한 이상, 내 할 바는 내 앞에 곧게 뻗은 유료도로처럼 뚜렷이 놓여 있었다. 내게는 무기가 없었지만, 그 때문에 멈칫하지는 않았다. 온 근육이 광란에 휩싸인 사내의 힘으로 파르르 떨리는데, 내게 어찌 무기가 필요하랴? 나는 거리를 내달렸고, 해야 할 일에 온통 매여 있어서, 스쳐 지나는 벗들의 얼굴조차 흐릿하게만 인식했다—윌슨 교수 역시 똑같이 성급한 걸음으로 반대쪽으로 달려가며 나와 마주쳤다는 사실 또한 흐릿하게 의식되었다. 숨이 차오르되 결의로 흔들림이 없이, 그 집에 이르러 초인종을 울렸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하녀가 문을 열었고, 제게 들여다보는 내 얼굴을 보자 더욱 하얗게 질려 갔다.
“당장 펜클로사 양에게 안내하여라,” 내가 명했다.
“나리,” 그녀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펜클로사 양께서는 오늘 오후 3시 반에 돌아가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