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 of 1

Chapter 1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흐린 겨울 날의 해 질 무렵이었다. 나는 요코스카 발 상행 이등 객차 한 귀퉁이에 자리를 잡고 앉아, 멍하니 출발 신호를 기다렸다. 이미 전등이 켜진 객차 안에는 웬일인지 나 외에 승객이 한 명도 없었다. 창밖을 내다보니, 어스름한 플랫폼에도 오늘따라 배웅 나온 사람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았다. 다만 우리에 갇힌 작은 개 한 마리가 이따금 슬피 짖어댈 뿐이었다. 이 모든 것이 그때 내 심정과 기이할 만큼 잘 어울리는 풍경이었다. 내 머릿속에는 형언하기 어려운 피로와 권태가, 마치 눈구름 낀 하늘처럼 칙칙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외투 주머니에 두 손을 깊이 찌른 채로, 그 안에 든 저녁 신문을 꺼내 볼 기력조차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윽고 출발 신호 소리가 울렸다. 나는 희미한 안도감을 느끼며 뒤쪽 창틀에 머리를 기댄 채, 눈앞의 정거장이 슬슬 뒤로 물러나기를 기다리는 건지 아닌 건지 모를 자세로 앉아 있었다. 그런데 그보다 먼저 개찰구 쪽에서 요란한 나막신 소리가 들려오더니, 잠시 후 차장이 무어라 고함치는 소리와 함께 내가 타고 있는 이등 칸의 문이 드르륵 열리면서, 열세넷쯤 돼 보이는 어린 소녀 하나가 허둥지둥 안으로 들어왔다. 그와 동시에 한 번 묵직하게 흔들리더니, 기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나씩 눈에 박혀 지나가는 플랫폼의 기둥들, 놓고 간 듯 덩그러니 선 급수차, 그리고 차내 누군가에게 수고비 인사를 건네는 붉은 모자 짐꾼 — 이 모든 것이 창문으로 밀려드는 매연 속에서 미련스럽게 뒤로 쓰러져 갔다. 나는 비로소 한숨 돌리는 기분이 되어, 궐련에 불을 붙이면서 처음으로 나른한 눈을 들어 맞은편 자리에 앉은 소녀의 얼굴을 한 번 흘긋 바라보았다.

윤기라고는 없는 머리카락을 빳빳하게 당겨 은행잎머리로 묶고, 옆으로 긁힌 자국이 남은 튼 살투성이의 두 볼을 불쾌할 만큼 새빨갛게 달아오르게 한, 어디 보아도 시골 촌년 같은 아이였다. 게다가 때가 켜켜이 앉은 연두색 털실 목도리가 축 늘어진 무릎 위에는 커다란 보자기 꾸러미가 올려져 있었다. 그 꾸러미를 끌어안은 동상 손에는 삼등 빨간 차표가 소중한 듯 꽉 쥐어져 있었다. 나는 이 소녀의 천박한 용모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옷차림이 지저분한 것도 역시 불쾌했다. 이등과 삼등의 구분조차 가리지 못하는 둔한 머리통이 얄미웠다. 궐련에 불을 붙인 나는, 한편으로는 이 소녀의 존재를 잊고 싶다는 마음도 있어, 주머니 속의 저녁 신문을 무심히 무릎 위에 펼쳐 보았다. 그러자 그때, 신문 지면에 떨어지던 바깥 빛이 갑자기 전등 빛으로 바뀌면서 인쇄가 거친 몇 단인가의 활자들이 뜻밖에 선명하게 눈앞에 떠올랐다. 두말할 것도 없이 기차는 지금 요코스카선에 많은 터널 가운데 첫 번째 속으로 들어선 것이었다.

그러나 전등 빛에 비쳐진 신문 지면을 훑어보아도, 내 울적함을 달래 주기에는 세상이 너무도 평범한 사건들로만 가득 차 있었다. 강화 문제, 신혼부부, 독직 사건, 사망 광고 — 나는 터널로 들어서는 순간 기차가 달리는 방향이 거꾸로 된 듯한 착각을 느끼면서, 그 삭막한 기사에서 기사로 거의 기계적으로 눈을 훑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물론 저 소녀가, 마치 저속한 현실을 인간으로 빚어놓은 듯한 얼굴로 내 앞에 앉아 있다는 사실을 한시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터널 속의 기차와, 이 시골뜨기 소녀와, 이 평범한 기사로 가득 찬 저녁 신문과 — 이것이 상징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불가해하고 저열하고 따분한 인생의 상징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나는 모든 것이 시시해져서, 읽다 만 저녁 신문을 내팽개치고, 다시 창틀에 머리를 기댄 채 죽은 듯이 눈을 감고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그러고 한참이 지난 뒤였다. 불현듯 무언가에 위협받는 듯한 느낌이 들어 자신도 모르게 주위를 둘러보니, 어느새 저 소녀가 맞은편 자리에서 내 옆자리로 옮겨 앉아 연신 창문을 열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무거운 유리창은 좀처럼 뜻대로 올라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튼 살투성이의 두 볼은 더욱 붉어지고, 이따금 코를 훌쩍이는 소리가 작은 숨찬 소리와 함께 바쁘게 귀로 들어왔다. 이것이 나로서도 다소나마 동정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러나 기차가 이제 막 터널 입구로 접어들려 하고 있다는 것은, 저물어가는 빛 속에 마른 풀만 환한 양쪽 산허리가 가까이 창 옆으로 바짝 다가온 것만으로도 바로 알 수 있었다. 그런데도 이 소녀는 일부러 닫혀 있는 유리창을 내리려 하고 있다 — 그 이유를 나는 도무지 납득할 수 없었다. 아니, 내게는 그것이 그저 이 소녀의 변덕으로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마음 깊이 여전히 싸늘한 감정을 품은 채로, 동상 걸린 손이 유리창을 들어 올리려 악전고투하는 모양을 마치 그것이 영원히 성공하지 못하기를 비는 듯한 냉혹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자 머지않아 요란한 소리를 내며 기차가 터널 속으로 쏟아져 들어가는 것과 동시에, 소녀가 열려던 유리창이 마침내 탁 하고 아래로 떨어졌다. 그 사각형 구멍으로부터 그을음을 녹인 듯한 거무튀튀한 공기가 갑자기 숨막히는 연기가 되어 자욱하게 차내로 밀려들었다. 원래 목이 약한 나는 손수건을 얼굴에 댈 겨를도 없이 그 연기를 온 얼굴로 뒤집어썼고, 거의 숨을 쉬지 못할 만큼 기침을 해대야 했다. 그러나 소녀는 내 쪽을 아랑곳하는 기색도 없이 창밖으로 상반신을 내밀고, 어둠을 가르는 바람에 은행잎머리의 귀밑머리를 날리면서 가만히 기차가 나아가는 방향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매연과 전등 불빛 속에서 바라보던 그때, 이미 창 밖이 점점 밝아지며 그곳으로 흙냄새, 마른 풀냄새, 물냄새가 차갑게 흘러들어오지 않았더라면, 겨우 기침이 멎은 나는 이 생면부지의 소녀를 호되게 꾸짖어 다시 유리창을 닫게 했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그때 기차는 이미 유유히 터널을 빠져나와, 마른 풀로 덮인 산과 산 사이에 끼인 어느 가난한 마을 변두리 건널목 옆을 지나치고 있었다. 건널목 가까이에는 하나같이 초라한 초가지붕과 기와지붕이 빽빽하고 좁게 늘어서 있었고, 건널목지기가 흔드는 것이리라, 오직 한 폭의 희끄무레한 깃발이 나른하게 저물녘 빛을 흔들고 있었다. 터널을 빠져나왔다 싶은 그 순간, 그 쓸쓸한 건널목 울타리 너머로 나는 볼이 빨간 세 남자아이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 있는 것을 보았다. 아이들은 모두 이 흐린 하늘에 짓눌린 듯 한결같이 키가 작았다. 이 마을 변두리의 음산한 풍경과 같은 빛깔의 옷을 입고 있었다. 그 아이들이 기차가 지나가는 것을 올려다보더니, 일제히 손을 들기가 무섭게 앳된 목청을 높이 젖히고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함성을 죽을 힘을 다해 터뜨렸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창밖으로 상반신을 내밀고 있던 저 소녀가 동상 걸린 손을 불쑥 뻗어 힘차게 좌우로 흔들었다 싶더니, 금세 가슴이 설레도록 따뜻한 햇빛 빛깔로 물든 귤 대여섯 개가 기차를 배웅하던 아이들 위로 공중에서 우수수 떨어졌다. 나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찰나에 모든 것을 이해했다. 소녀는 — 아마 이제부터 봉공살이하러 가려는 소녀는 — 품속에 간직하고 있던 귤 몇 알을 창 밖으로 던져, 일부러 건널목까지 배웅 나온 남동생들의 수고에 보답한 것이었다.

저녁 빛을 머금은 마을 변두리의 건널목과, 작은 새처럼 소리를 높인 세 아이들과, 그리고 그 위로 어지러이 떨어지는 선명한 귤빛과 — 이 모든 것이 기차 창 너머로 눈 깜짝할 새에 지나쳐 갔다. 그러나 내 가슴 위에는 아프도록 또렷하게 이 광경이 새겨졌다. 거기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밝고 맑은 기분이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나는 당당하게 고개를 들어, 마치 전혀 다른 사람을 보듯 저 소녀를 주시했다. 소녀는 어느새 다시 내 맞은편 자리로 돌아와, 여전히 튼 살투성이의 두 볼을 연두색 털실 목도리에 파묻은 채, 커다란 보자기 꾸러미를 안은 손에 단단히 삼등 차표를 쥐고 있었다.…………

나는 그때 비로소, 형언하기 어려운 피로와 권태를, 그리고 또 불가해하고 저열하고 따분한 인생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다.

(大正八年四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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