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 of 1

Chapter 1

그려진 꽃

아리시마 다케오

색채에 관해 더없이 섬세한 감각을 지닌 한 청년이 나타났다. 그는 보통의 사진을 보면서, 흑백의 농담을 응시함으로써 찍힌 물체의 색채가 무엇이었는지를 손쉽게 분간한다고 한다. 이 천부의 예민함으로 그는 하나의 큰 발명을 이루었으나, 내가 여기서 그에 관해 이야기하려는 것은 그 일이 아니다. 그가 입에 올렸다고 전해지는 말 가운데, 내게는 암시가 깊은 한마디가 있었으니, 바로 그 말을 풀어 보려는 것이다.

그 말이란, 그에 따르면, 보통 운위되는 의미에서, 자연의 색은 화가의 색보다 훨씬 아름답지 않다, 라는 것이다.

이 말은 역설처럼, 또는 오류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예부터 지금까지 화가라는 사람들 거의 모두가, 자연의 아름다움을 경탄해 마지않았으므로. 그리고 그 자연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역설해 마지않았으므로. 그러므로 우리는 색채 전문가들의 일치된 소견을 그대로 받아들여, 자연은 모든 인공의 아름다움을 합한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답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정녕 그렇게 보이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정교한 물감도, 아무리 정교하게 배치된 그 물감으로 짜인 구도도, 자연이 독차지한 색채의 아름다움을 밀치며 우뚝 솟을 수는 없다. 그렇게 우리는 믿게끔 길들여졌다고 여기며 그것을 믿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잠시 우리가 지닌 선입견에서 벗어나, 우리가 지닌 어렴풋한 실감에 기대어, 나는 저 청년의 직관에 관해 생각해 보고 싶다.

정교하게 그려진 꽃 그림을 본 사람은 으레 자연의 꽃처럼 아름답다고 감탄한다. 동시에, 싱그러운 자연의 꽃을 본 사람은, 저도 모르게 그림 속 꽃처럼 아름답다고 감탄하지 않는가.

앞의 경우에서, 사람은 화가에게서 받은 선입견에 따라 말하고 있다. 그것은 분명하다. 뒤의 경우에서, 그는 명백히 자기가 믿어 온 바를 배반하고 있다. 그는 평소의 소신과 상반되는 의견을 내뱉으면서, 거기에 조금도 의아함을 느끼지 않는 듯이 보인다. 이는 대체 무엇 때문일까. 단지 한때의 사색적 착오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아니면 그 말 뒤편에, 어떤 미처 알아채지 못한 의미가 숨어 있는 것일까.

인간이란 과장하는 동물이다. 도구를 사용하는 동물이라거나, 웃을 줄 아는 동물이라거나, 자각의 기능을 지닌 동물이라거나 하는 정의보다, 이 나의 도그마가 더 진상에 가까이 다가선다. 만일 「무엇을 하는 동물이다」라는 제언으로 인간을 정의해야 한다면 말이다.

인간이 행하는 모든 것은 자연의 생활로부터의 과장이다. 그가 인간일 수 있게 한 모든 힘과 그 작용은, 모조리 자연이 정교한 균형 아래에 지니고 있던 것이 아닌가. 인간이 인간일 수 있었던 유일한 힘은, 자연이 지닌 균형을 깨뜨려, 그 어느 한 점을 무한히 과장하는 데서 성립한다. 인류의 역사란, 결국 이 과장적 경향의 발현의 역사다. 어떤 시대에는 자연 생활의 어떤 특수한 점이 과장되었다. 다른 시대에는 다른 점이 과장되었다. 어떤 지방에서는 이 점이, 또 다른 지방에서는 저 점이 과장되었다. 이런 식으로 문화가 이루어지고, 개인의 생활이 이루어지고, 어느새 그것이 인간의 다른 생물에 대한 우월을 가져왔다.

지혜란 과장하는 힘 외의 무엇이겠는가.

잠시 나의 도그마를 허락해 다오. 화가 또한 화가로서의 길에서 과장한다.

화가에게 자연의 생활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해 보라. 그는 그저 그릴 줄 모르는 한 사람의 야만인에 불과하리라. 그에게는 그릴 만한 자연이 어디에도 있을 리 없으리라. 자연은 그 자체로 유니크하므로. 그리고 물론 유니크한 것은 둘 이상 있는 것이 허락되지 않으므로.

그러므로 한 사람의 야만인이 화가가 되기 위해서는, 자연을 과장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그는 제멋대로 자연을 절단한다. 자연을 추려 낸다 (추려 내는 일 또한 과장을 이루는 하나의 수단이다). 자연을 강조한다. 야만인이 화가가 되어, 하나의 풍경을 색채로 표현하려 한다고 가정해 보자. 그는 먼저 자연에 존재하는 색채의 무한한 단계적 배열을 절단하여, 강한 색채만을 이어 붙일 것이다. 또 색채를 강하게 드러내기 위해, 그 곁에 있는 비슷한 색채를 추려 낼 것이다. 또 자연에 있는 각각의 색을, 그것과 비슷하면서 더 강한 색채로 강조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비로소 한 점의 풍경화가 성립한다. 그것은 분명 자연의 재현이 아니다. 자연은 재현될 수 없다. 그것은 자연의 과장이다. 동료 한 사람이 만들어 낸 그림을 본 야만인은, 아마 그 한 사람이 미쳤다고 여겼으리라. 왜냐하면 그것은 그들이 소박하게 바라보는 자연과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으므로.

그러나 본디 인간이 지닌 과장성은, 곧장 과장된 표현에 친숙해진다. 그리고 그 표현이 자연의 재현인 것처럼 느끼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정교한 그림 속 꽃은 자연의 꽃처럼 아름답게 감상되기에 이른다.

이때 화가는 말한다. 「자연의 아름다움은 끝이 없다. 그 아름다움을 모조리 드러내는 일은 인간으로서는, 천재로서조차 불가능하다」라고. 그가 마음에 둔 뜻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그러한 것이 아니다. 그 화가의 말을 들은 우리는 아마 이렇게 여기지 않는가. 자연이 지닌 색채는, 아무리 정밀하게 만들어진 물감 속에서도 발견될 수 없다. 또 그 물감의 어떤 배열 속에서도 발견될 수 없다. 또 어떠한 천재의 통찰 아래에서도 헤아릴 수 없다. 그러므로 자연이 지닌 색채는, 늘 회화가 지닌 색채보다 끝없이 곱고 아름답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 말을 내뱉은 화가 자신은 그렇게 여기며 말한 것은 아닐지라도,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화가의 그 말은 보통 그렇게 여겨지는, 앞서와 같은 의미로 발해진 것이 아니다. 자연의 아름다움은 끝이 없다고 말했을 때, 화가는 이미 과장하여 바라본 자연에 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말 이전에, 화가의 과장된 색감이 이미 자연에 투입되어 있었던 것이다. 과장된 물감의 색채로 색안경을 쓴 그의 눈은, 부지불식간에 그 색채로 자연을 덧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자연에는, 물감의 색만큼은 아닐지라도, 색의 무한한 단계적 변렬(駢列, 늘어선 줄)이 있다. 그 변렬 전부를 과장된 물감으로 표현하려 함은, 분명 불가능한 일을 꾀하려 함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이를테면 한 단계 가락을 높인 자연을 재현하려는 일이다. 과장에 의해서만 자기 존재의 자유를 확보하고 있는 인간이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천재라 한들 어찌할 수 없는 경지다. 그래서 화가의 그 탄식이 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저 청년은, 색채에는 민감했지만 화가는 아니었다. 그는 색채에 대한 과장성을 지니고 있지 않다. 이를테면 그는 과학적 정신의 소유자였다. 그래서 그는 화가들이 모두 빠져 있는 색채상의 자기 암시에 휘둘리지 않고, 자연의 색과 물감의 색을 비교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결과를 그는 태연히 보고했던 것이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단지 그 청년만이 아니다. 화가의 무의식적 속임에 흔들리지 않고, 소박하게 색채를 느끼는 보통 사람은, 싱그러운 자연의 꽃을 보았을 때, 감탄하며 말한다. 「오, 이 들꽃은 그림의 꽃처럼 아름답다」라고.

「오, 이 들꽃은 그림의 꽃처럼 아름답다.」

화가는 그를 두고 구제할 수 없는 속물이라 부르리라. 그것이 화가에게 있어 최상의 Compliment(찬사)임을 잊은 채.

자연의 한 부분만을 과장한 그 결과를 자연 전체에 덧씌워, 자연 앞에서 자기의 무력함을 통감하는 화가에게 있어, 신과도 같은 들꽃이 한 점의 그림 속 꽃과 비교되는 모습은, 용서할 수 없는 모독으로 여겨지리라. 이런 비교를 감히 하면서 의기양양해하는 그 사내가, 인간이라 할 자격을 갖추지 못한 자로까지 여겨지리라.

하지만, 화가여, 잠시 멈추라. 그는 그대의 최상의 비평가가 아니었던가. 공평하고, 또한 공평의 결과인 찬사를 망설임 없이 그대에게 바치는 자가 아니던가.

그 까닭을 말하기는 쉽다. 그는 그대가 발견한 색채의 아름다움이 자연이 지닌 색채의 아름다움보다도 더욱 아름답다고 증명한 것에 다름 아니므로. 더구나 그는 그것을 아첨 없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화가의 작업에 대한 이만한 인정이 어디에 있겠는가.

나는 이미 말해야 할 것을 모두 말해 버렸음을 느낀다. 청년의 말로 인해 주어진 암시는 내게 이만큼의 사색을 하게 했다. 그러나 그것을 들고 나는 나 자신의 영역으로 돌아간다.

예술가는 창조한다고들 한다. 온전한 창조는 예술가에게도 허락되어 있지 않다. 예술가는 자연의 어느 단면을 과장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거짓된 예술가는 의식적으로 그렇게 한다. 참된 예술가는 모르는 새 그것을 이루어 낸다. 그리고 그것을 그에게 고유한 힘과 양식으로 이루어 낸다. 그는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한 식으로 자연을 본다. 그리고 그 보는 방식으로 다른 사람들의 눈에 색안경을 씌운다. 이리하여 자연은 일찍이 지녔던 모습을 바꾼다. 창조란 그것을 가리킨다. 자연이 창조된 것이 아니다. 이를테면 자연의 환각이 창조된 것이다.

그러나 이 환각의 창조가 얼마만큼 인간 생활의 내용을 풍부하게 하는 것이냐. 왜냐하면 인간은 환각으로써만 비로소 진정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자연을 있는 그대로 객관하는 자는 과학자다. 적어도 그렇게 하려고 시도하는 자가 과학자다. 그는 자연의 어느 면에 민감해야 한다. 그리고 동시에 그것을 과장하는 습벽으로부터 벗어나 있어야 한다.

그는 늘 예술의 과장으로부터 자연을 풀어 놓는다. 그 이른바 아름답지 않은 모습 그대로의 자연을 드러나게 한다. 인간성의 약속으로서 그 또한 어떠한 면에서는 자연을 과장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종사하는 학문에서는, 인간의 본성인 과장적 경향에서 거세되어 있어야만 한다.

환각이 지닌 우쭐함을 가차없이 짓밟는 차디찬 통찰. 그 과학자야말로, 굳이 말한다면, 참된 자연을 창조하는 자다. 인간을 배반하고 자연에 항복하기를 감행하는 자가 그다.

물에 있어서는 죽은 물을, 대기에 있어서는 적도 바로 밑을, 대지에 있어서는 세균 없는 토양을, 그리고 인생에 있어서는 감격 없는 생활을.

옛사람이 악마라 이름 붙였던 것은, 곧 근대가 과학자라 부르는 것이다. 인간이 자각의 초기에, 과장된 자기를 자연을 향해 투사한 것이 신이었다. 또 그 과장성으로부터 인간을 자연으로 환원시키려는 정신을 구체화한 것이 악마였다. 그러므로 인간은 신을 숭배하고 악마를 피했다. 그러나 자각의 성숙과 함께, 신은 인간 안으로 녹아들어 예술적 충동이 되었고, 악마 또한 인간 안으로 녹아들어 비평적 정신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과학자는 결국 인간적 진군 속에 끼어든 적의 첩자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그렇다. 그리고 그렇지 않다.

인간은 이미 과장된 것을 자연 그 자체인 양 여기고서, 그것을 다시 과장하는 일이 없는가.

없기는커녕. 너무도 그러한 일이 잦다. 인간은 흔히 자기 특권을 남용함으로써, 그 특권에 의해 도리어 남용된다. 대지에 뿌리를 내리고, 우듬지를 하늘로 쳐든 것은 번성한다. 우듬지에 대지를 접붙이고, 거기에 세계를 만들려는 것은 위태롭다. 그리고 이 기괴한 곡예가, 얼마나 흔히 우리네 예술가들에 의해 즐겨 연출되는 것이냐.

과학의 차디찬 삼십방(三十棒, 선가의 깨우치는 일격)은, 대지에 의지해 선 나무 위에도 가해지리라. 그러나 그 나무는 그 삼십방을 감로비(膏雨, 만물을 적시는 단비)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삼십방이 우듬지에 접붙여진 대지 위로 내려칠 때, 그것은 천지를 어둡게 만드는 퇴람(頽嵐, 무너뜨리는 사나운 바람)이 되어 작용하는 것이다.

사람은 이 퇴람을 필요로 하지 않는가.

사람은, 흙투성이가 된 그 우듬지가 깨끗이 씻겨 정화되기를, 목을 길게 빼고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폭풍이여, 휘몰아쳐라.

과학자에게 보내는 경고.

그대는 인간 존재의 이유를 무시하는 데서 출발하는 자다. 그 시도는 용감하다.

그러나 그대는 인간의 꿈을 모조리 깨뜨려 놓을 수는 없으리라. 왜냐하면 인간의 꿈을 모조리 깨뜨린 그때, 거기에 더는 인간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의 강한 새끼줄이 되기 위해서는, 적어도 두 가닥의 잔새끼가 합쳐져야 한다.

자연과 접촉하는 곳에는, 인간 고유의 과장성을. 인간 고유의 과장성에 의해 과장된 산물과 접촉하는 곳에는, 냉엄무비한 과학적 정신을.

이것이 인간이 지켜야 할 유일무이한 도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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