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
운명은 개척하는 것
고다 로한
여기 한 갓난아이가 태어났다고 합시다. 그 갓난아이가 화족(華族)의 집, 부족할 것 없는 자리에서 태어났다고 합시다. 그러할 때 이 갓난아이는 자연히 비교적 행복합니다. 또 먹는 둥 마는 둥 가난한 집, 아비 되는 자는 어디론가 떠돌이 신세가 되어 버려, 홀로 외로이 살아가는 부인에게서 태어났다고 합시다. 그러할 때 이 갓난아이는 자연히 비교적 불행합니다. 선한 일을 한 것도 아니고 악한 일을 한 것도 아닌데, 귀한 가문에 태어나느냐 궁핍한 집에 태어나느냐로 그 갓난아이의 운명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이 큰 차이를 갓난아이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도리가 아니며, 이는 미리 정해진 운명을 그 갓난아이가 지고 태어난 것입니다. 또 같은 갓난아이라도 잘난 모습으로 태어나는 이도 있고 못난 모습으로 태어나는 이도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아름답게 태어나고 싶어 태어난 것이 아니며, 추하게 태어나고 싶어 태어난 것도 아닙니다. 천연 자연으로 부모를 닮고, 또 조상을 닮고, 다른 이의 모습을 닮아 태어날 따름이지요. 그러나 아름답게 태어난 자는 그 아름답게 태어났다는 까닭으로, 추하게 태어난 자와는 자연히 다른 운명을 지니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는 운명이 미리 정해진 것에 틀림이 없습니다.
정백(鄭伯)처럼 태어난 방식이 예사롭지 않아, 기묘한 운명에 얽혀 든 사람도 있습니다. 정백은 오생(寤生)이라 하여 (어머니가 잠든 사이에 태어났다, 곧 잠결에 낳은 출산이었다는 설과, 거꾸로 나와 난산이었다는 설, 두 가지가 있습니다만) 어쨌든 어머니의 심기를 거스르는 방식으로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것은 물론 그 영아가 일부러 그렇게 한 것도 무엇도 아닙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그 심기 거스른 일 때문에, 적자(嫡子)임에도 그 아이에 대한 사랑이 엷어지는 것을 면치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 탓에 뒤에 태어난 동생을 더 사랑하여, 동생 쪽에 나라를 물려주고 싶어 하는 마음이 어머니에게 생겼습니다. 그리하여 큰 소동이 일어, 무기를 들이대는 일까지 벌어졌다는 이야기가 옛 역사에 있습니다. 이는 실로 기묘한 운명을 그 아이가 태어날 때 짊어지고 나온 것으로, 운명 전정론을 떠받치는 한 드문 사건입니다. 드문 일은 논의의 강한 재료는 되지 못합니다만, 이러한 드문 사례를 굳이 들지 않더라도, 누구든 자기가 시기를 골라, 곳을 골라, 가문을 골라, 자기의 체질이며 용모를 골라 태어난 것이 아니라는 데 생각이 미친다면, 운명의 전정이 적어도 절반은 진리라는 것을 자연스레 깨달을 것입니다. 운명이 없다는 따위의 말은 아무리 자만이 강한 사람이라도 입에 올릴 수 없는 일이겠지요.
그렇지만 운명이 미리 정해져 있다는 것은 절반만 진실이며, 운명이 전부 미리 정해져 있다고 여긴다면 그것은 분명 잘못입니다. 그에 따라 운명 전정설에서 비롯한 운명 측지술, 즉 갖가지 점복의 술수 따위를 신성한 것인 양 떠받든다면, 인간의 본연의 희망, 곧 향상심이라는 드높은 것을 짓밟는 비굴한 사상에 떨어지고 마니 매우 좋지 않습니다. 즉 그것은 「현재 상위(現在相違)」, 곧 눈앞의 사실에 어긋나는 잘못에 빠지는 것입니다. 사람은 살아 있는 동안 향상과 진보의 소망을 버릴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이것이 곧 단적인 현재의 사실입니다. 이 현재 사실에 등을 돌리려 함은, 현재 상위라는 시시한 일에 지나지 않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점성술 같은 것은 비록 수많은 사례가 있었다 한들, 어찌 오늘날의 사람이 이를 마음에 두겠습니까. 제갈공명이 죽었을 때 큰 별이 떨어졌다, 그것을 보고 적장 사마의가 공명의 죽음을 알아채고 쳐들어왔다는 이야기는, 군담으로는 흥미로운 일이지만 그것은 물론 그저 이야기일 뿐입니다. 그런 일이 정말이라면, 사람은 한 하늘의 별 하나하나에 대응하고 있는 셈이니, 별의 수와 사람의 수가 같지 않으면 안 되는 셈이 됩니다. 영웅호걸은 붉은 별, 미인 재녀는 아름다운 별, 흉악한 자는 빗자루별, 평범한 사람은 좁쌀별이나 보일 듯 말 듯한 별, 우스꽝스러운 사람은 별똥별,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태어난 연·월·일·시에 따라 사람의 운명이 정해진다면 견딜 수가 없습니다. 바깥주인이 책력을 펼쳐 십간십이지를 헤아리며 산모에게 「지금이 마침 좋은 날이다, 상길일이로다, 거기 안사람아, 오늘 세 시에 사내아이를 낳거라, 어서 힘주어 낳거라」 하고 말하거나, 「오늘은 악일이니, 참아 두었다가 내일 아침까지는 낳지 말거라」 하고 말하는 일이 벌어진다면 견뎌 낼 수가 있겠습니까. 옛사람 중에도 과연 도리에 밝은 이가 있어, 한(漢)나라 왕충이라는 사람이 말했습니다만, 진(秦)과 조(趙)가 싸웠을 때 진의 백기라는 맹장이 조의 항복한 군졸 사십만 명을 죽여 버린 일이 있다, 그 사십만 명이 모두 같은 해 같은 달에 태어났더란 말인가, 어떻겠는가, 그럴 리는 없을 것이다, 그리 본다면 태어난 해와 달로 운명이 어떻고 저떻고 하는 말은 미덥지 못하리라, 하고 논했습니다. 루시타니아호의 침몰, 지난해의 대지진, 한꺼번에 많은 이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것이 어찌 태어난 해와 달의 어떠함에 달렸겠습니까. 이십팔수도, 칠요(七曜)도, 구성(九星)도, 모두 그것을 미덥다 여기는 사람에게는 미덥게 느껴질지 모르나, 미덥지 못하다 여긴 날에는 어찌 미더울 수 있겠습니까. 마치 꿈꾸는 듯한 이야기가 아니겠습니까. 방위에 따라 종래 행동의 길흉과 복을 따지는 것도, 이천 년도 전 위료자(尉繚子)라는 병법가가 이미 비웃었으며, 방향의 좋고 나쁨으로 전쟁의 승패가 정해질 까닭이 어디 있겠는가 하고 말한 정도입니다. 지나(支那, 중국)의 옛사람조차 그러합니다. 지금 사람이 어찌 이치 보는 일이 옛사람만 못한 시시한 생각을 품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사람의 용모와 골격도 그 당사자가 스스로 정한 것이 아니므로, 운명 전정설은 일단 절반은 인정될 수밖에 없는 셈입니다. 아무래도 못난 모습으로 태어나서는 남자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일이 잦고, 못난 사내로 태어나서는 부인의 마음에 들지 못하는 일이 잦으니, 거울 앞에서 멍하니 한숨 쉬는 사람도 세상에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사람은 소나 말이 아닙니다. 스스로 자기를 끌어올릴 수 있는 존재이므로, 무리하게 융비술(코를 높이는 시술)을 행하거나 미용법을 연구하지 않더라도, 「한 데가 모자라도 다른 데가 더하면 그것으로 능히 스스로를 잘 가꿀 수 있다」는 도리이니, 그렇게까지 마음에 둘 일은 아닙니다. 예를 들자면, 무염군(無塩君)은 추한 여인이었으나 파격의 출세를 하였습니다. 오노노 코마치는 미인이었으나 솟토바코마치(卒塔婆小町)의 슬픈 신세로 떨어졌습니다. 지나의 큰 철인 노자의 어머니는 매우 추한 여인이었다고 전해집니다. 그리스의 현인 가운데 추한 용모의 사람이 있었던 것은 누구나 아는 일입니다. 제갈공명은 실로 훌륭한 사람입니다만, 그 아내를 맞이할 적에 일부러 추한 여인을 골랐기에, 당시에 짤막한 노래를 지어 그 일을 떠들썩하게 노래한 자가 있었습니다. 일본에서도 모리의 기린아라 일컬어진 한 영웅은 일부러 공명의 행적을 본받았습니다. 공명의 아내가 되고 노자의 어머니가 된다 하면, 추한 여인의 콧대도 자못 높아지지 않겠습니까. 알키비아데스는 빼어난 미남에다 영걸의 인물이었으나, 그 끝은 좋지 못했습니다. 담대 자우(澹台子羽)는 용모가 떨치지 못하여 공자께서조차 가벼이 보셨으나, 덕을 닦고 도에 정진하였기에, 뒷날에 이르러 공자께서도 「내가 잘못이었다」 하고 탄식하셨다 합니다. 아름답고 추한 것은 분명 그 사람에게 이로움과 해로움을 주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이해(利害)를 주는 것만은 아닙니다. 「미인박명」이라는 말까지 있어, 아름다운 까닭에 도리어 해를 입은 예는 역사에도 전설에도 차고 넘치도록 있습니다. 관상가들 사이에서는, 세속이 아름답다 하는 쪽이 도리어 좋지 않고, 세속이 추하다 하는 쪽이 도리어 좋다고 보는 일이 매우 많습니다만, 미추를 논하는 데에서조차 앞서 말씀드린 대로, 반드시 이렇다 저렇다 단정 지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천 년 먼 옛적의 순자라는 학자조차 「비상론(非相論)」을 지어, 용모로써 운명이 정해져 있다는 사상을 산산이 부수어 놓았습니다. 단지 용모만 두고 말씀드리자면, 공자께서는 양호라는 시시한 사람과 몹시 닮았던 까닭에 사람을 잘못 본 일이 있을 정도입니다만, 양호의 사람됨이며 운명이 공자와는 큰 차이가 있었다는 데에는 누구도 이론이 없습니다.
관상가의 설에 반대한 사람은 먼 옛적부터 빼어난 인사들 가운데에 얼마나 있었는지 모릅니다. 한 걸음 두 걸음 양보하여, 용모와 골격으로 사람의 운명이 정해져 있다고 친다 한들, 인상이라는 것은 변하는 것이므로, 인상이 변하는 이상 운명 또한 변하는 셈입니다. 그리 본다면 마음가짐이며 행실이며 처지에 따라 운명도 줄곧 변한다고 여기는 것이 정당합니다. 여기에 지극히 장수할 상을 가진 사람이 있다 한들, 그 사람이 복어를 마구잡이로 먹거나, 폭음을 하거나, 황음(荒淫)을 거리낌 없이 한다면, 그 장수가 지켜질 것이라는 점은 자못 위태로워, 날로 그 장수의 상은 변해 가겠지요. 굵은 양초라도 바람 부는 자리에 두면 빨리 다해 버리고, 가는 양초라도 바람 자는 자리에 두면 길게 간다는 도리 그대로, 세상에는 튼튼한 사람이 일찍 죽고 병약한 사람이 오래 사는 예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주역에 「늘 병들되 늘 죽지는 않더라」는 글귀가 있습니다만, 실로 그러한 일도 세상에 흔한 예입니다. 마음가짐 여하에 따라, 인상이 흉하게 태어났더라도 아름다워지는 일이 있으니, 이 점이 실로 인상에 있어 어느 정도까지는 인상이 미더운 까닭이 됩니다.
이는 실로 인상의 흥미로운 대목으로, 빼어난 관상가가 적중하는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것도 그 변하는 자리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인상이 태어난 그대로 전혀 변하지 않는 것이었다면, 인상론도 「현재 상위」가 되어 성립하지 못하는 것이 되었겠으나, 용모는 변하는 것이므로 인상론은 「현재 상위」가 되지 않으며, 그리하여 운명 전정설을 절반만 인정하고, 또 나머지 절반은 「운명은 그 사람의 마음가짐에 따라 좋게도 나쁘게도 된다」는 운명 비전정설을 함께 둘 수 있는 것입니다. 손쉬운 예를 들자면, 같은 사람이라도 술에 취하면 취하지 않은 때와는 인상이 달라집니다. 취해도 골격은 변하지 않으나, 한두 시간 사이에 기색은 바뀌어 버립니다. 취하여 좋은 인상이 되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열에 아홉까지는 취한 인상이 좋지 않습니다. 즉 나쁘게 변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제자리를 지키지 않고 떠다니고 흘러넘치는 인상이 되니, 그 인상은 잘못에 가까워지기 쉬운 인상이 되는 것입니다. 이 도리로, 악한 꾀를 품기 시작하면 나쁜 인상이 되고, 선행과 선의를 마음에 두면 좋은 인상이 됩니다. 그리하여 불경에는 「보시(布施)는 아름다움의 근원이라」 하는 식으로 풀이되어 있습니다. 인심(仁心)이 곧 보시의 근본입니다만, 인심을 늘 품고 있노라면 자연스레 그 향이 드러나 아름다워지는 도리가 있습니다. 제(齊)나라의 현인 관중의 글에 「악녀가 원망의 기운을 떨친다」는 말이 있습니다만, 추한 여인이 원망의 마음을 품은 인상 같은 것은 달갑지 않은 것의 으뜸이라, 더욱더 흉한 인상이 되겠습니다만, 아무리 추한 여인이라도 인심을 품고 있다면 결코 보기 흉한 모습이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인상은 마음을 따라 변하는 것이며, 마음가짐 따라 행위 따라 용모는 변하고, 그에 따라 운명도 변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까닭에, 운명은 전부 미리 정해져 있다고 보는 것은 거짓입니다. 또한 전혀 미리 정해져 있지 않다고 말하는 것도 거짓입니다. 절반은 미리 정해져 있다고 말함이 옳습니다. 그러나 절반은 마음가짐 따라 행위 따라 좋아지기도 하고 나빠지기도 한다고 말함이 옳습니다. 천연 자연으로 정해져 있는 것을 선천적 운명이라 한다면, 그 사람의 마음가짐과 행위에서 비롯되는 것을 후천적 운명이라 부르겠습니다. 자기 수양을 통해 후천적 운명을 개척하여, 혹은 선천적 운명을 좋은 위에 더 좋게 하고, 혹은 선천적 운명의 나쁜 것을 좋게 만들어 가는 이가 참으로 훌륭한 사람이라 일컬을 만합니다. 역사의 위에 광휘를 남긴 사람들이야말로 대개 후천적 운명을 개척한 이들입니다. 헛되이 운명을 따지는 일 같은 것은 성현이라 할지라도 삼가시는 바입니다. 하물며 무학 범재의 몸으로 운명을 따지거나 운명을 미리 알아내려 함은, 하루살이라는 벌레가 큰 나무를 흔들려 하는 것과 비슷하니, 자못 시시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어떠해야 하는가」를 따지기보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따지는 편이, 우리에게 슬기롭기도 하고 옳기도 한 일이라는 말은, 진실로 우리에게 충실한 가르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