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 of 1

Chapter 1

시관(詩観)이라고는 하나, 쓰고자 하는 것은 결국 나의 문학관이며, 세계관의 개략이기도 하니, 그것도 오늘이나 어제 떠올린 일이 아닌 것을 적는 것이므로, 많은 사람들이 읽어 주었으면 한다.

왜 이것을 쓰기에 이르렀는가 하면, 본디 죽기 전에 한 번은 기어이 쓰고 싶다는 오랜 희망이 있었던 까닭이기도 하지만, 본래 서정시인이라 하면 아무것도 모르면서 서정만은 어떤 까닭에선지 부릴 줄 아는 인간을 두고 하는 말이라는 정도로 여기는 것이 일반의 형편이며, 논의가 한창인 요즘에 이르러서는 더욱이 그러한 식으로 여겨지는 분위기가 많은 까닭에, 잠시나마 거기에 답하여 보고 싶다는 것이 직접적인 동기다.

차라리 이것은, 이 시관이 대체로 결착을 본 무렵, 곧 지금으로부터 13년쯤 전에 썼더라면 좋았을 것이지만, 당시는 청춘으로 가득 차 있어 논문을 정리하는 따위의 마음가짐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 후 점차 나의 이론적 생활은 쇠퇴하고, 직관에만 의지하는 경향은 점차 늘어났다. 그 13년쯤 전에는 하루에 적어도 세 페이지의 노트를 잡지 않은 날이 없었으며 실로 많은 것을 생각했지만, 지금 여기서 그 백분의 일이라도 떠올릴 수 있을지 마음 한구석이 허전하다. (그 노트들은 그 후 모두 폐기해 버렸다.) 체계의 모습이야 갖추지 못했지만, 스스로는 시종일관한 세계관을 붙잡았다고 여겨 왔던 까닭에, 지금 쓰려고 하면 극도로 격식을 차려 손을 대고도 싶어지지만, 논문의 방법에 익숙지 않은 나로서는, 도리어 떠오르는 대로 세부를 늘어놓고 그러고 나서 그것을 한데 묶는 식의 태도를 취하는 것이, 도중에 권태를 느낄 염려가 없이 끝낼 수 있을 것 같으니, 그렇게 하기로 한다.

이런 머리말을 쓰면 자못 긴 글을 쓸 듯도 하지만, 골자만 적는 데 그치고, 갖가지 경우에 적용하여 보여 드리는 일은 일체 빼기로 하니, 그렇게 길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충분히 이해해 주기만 한다면 물론 갖가지 경우로의 적용도 예상할 수 있도록은 쓸 작정이다.

쇼와 5, 6년(1930~31) 무렵부터, 그러니까 고바야시 히데오가 문단에 모습을 드러낸 지 얼마 안 된 무렵부터, 문예 평론은 부쩍 활기를 띠어, 지금도 더욱더 성하다.

그러나 그 다수는, 문예 평론이라기보다는 문예와 일반 세간의 상식 간의 관계를 논한 것이라 할까, 문예와 사회를 연관 지어 논한 것이라 할까, 어쨌든 문예 자체에 관한 일보다도 그것과 다른 것의 관계를 논한 것이다. 이는 가와카미도 말하는 바와 같이, 지금 일본에만 일어나고 있는 일이며, 짐작건대 문예의 빈곤을 말해 주는 것이리라.

그러한 가운데, 내가 지금부터 쓰는 것 따위는 너무도 평화로워 보일 듯도 하지만, 내게 있어서는 내 생명의 ‘거취’를 정하기 위해 필수 불가결한 사유의 계절이었으며, 보통 주관적이라 여겨지는 서정시이기는 하나, 주관적인 것에 표현의 안정성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객관적인 것을 다루는 경우보다도 도리어 한층 더한 객관적 능력을 요하는 일이기도 하니, 근래의 논문에 익숙해진 독자가 도중에 손을 떼지 않기를 바란다. 말하자면 그 주관적인 서정시의 배후에 어떠한 식으로 객관적 능력이 작동하고 있는가를 보이는 것이야말로, 이 소론의 주된 취지이기도 하다.

덧붙이자면, 소리라는 무형의 것에 형상을 부여하는 작곡이라는 일에는 가장 남성적인 능력이 필요하다는 바이닝거의 견해를, 예술의 일에 관한 한 저속한 의미에서의 ‘좋아하는 일에 능하다’로 치워 버리는 우리 상식계에, 미흡하나마 철저히 박아 두고 싶다.

신은 있는가. 신이 ‘있는가 없는가’를 생각하는 이상, 있다고도 없다고도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있는가 없는가’를 생각하는 이상, 그 생각하는 행위는 존재한다. 그렇다면 그 생각하는 행위는 어떻게 가능한가? 이러할 때 사람은 아무래도 어떤 근원을 설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설정을 무엇이라 명명하든 자유지만, 아마도 그것이야말로 인류가 ‘신’이라 불러 온 것의 기원에 다름 아닐 것이다.

가령 무신론자가 신은 없다고 주장할 때, 그 주장은 무엇에 의거하는 것인가? 어쨌든 무엇인가에 의거하고 있는 것은 사실일 것이다. 그것을 ‘신’이라 부르면 어찌하여 안 되는가? ‘신’이라는 말이 종교 재판의 그 가혹함을 낳은 유럽에서, 곧 신 자체보다도 신을 모시는 인간의 습속 가운데서 종종 불행을 불러왔다는 까닭으로 ‘신’을 꺼린다 한다면 그래도 이해할 수 있겠으나, 일본에서 ‘신’을 어찌하여 꺼리는 자가 있는가?

니체는 ‘신은 죽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운명’이라는 것은 믿었다. 그 ‘운명’을, 어찌하여 신이라 불러서는 안 되는가?

뇌세포 운동의 우연한 작용이 사고 작용이라 하는 학자도 있었다. 그렇다면, 뇌세포의 우연한 작용이 사고가 되도록 만든 것이 신이라고, 어찌하여 생각하면 안 되는가?

그런데, 나는 지금 신이 있느냐 없느냐를 그저 결정하기만 하면 된다는 심산은 아니다. 신이 있다면 어떤 좋은 일이 있는가, 그것이 문제다.

본디 ‘신이 있다’는 것은 나의 직관에 뿌리내린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니시다 기타로의 ‘순수의식’에 뿌리내린다. 자, 나의 직관이 신은 있다고 한다면, 그 나의 직관은 어찌하여 그렇게 말하는 것인가? 나의 직관, 곧 나는, 이 세상에 살면서 사상(事象)과 물상(物象)에 신비를 느끼는 까닭이다. 그리고 그 신비는 영혼의 환희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말투는 너무도 이른바 고원(高遠)에 흐른다고 여기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 영혼의 환희라는 것은 일상의 극히 평범한 상태에서 느껴지는 것이며, 가와카미의 말에 따르자면 ‘허무의 미’이고, 포가 ‘시의 본질은, 정중히 말하자면 마음의 도취인 정열로부터도, 정신의 양식인 진실로부터도, 전혀 독립한 것이다(요네 노구치 역)’라고 말한 그 ‘독립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신비를 느끼고 영혼의 환희를 맛보는 일이 나의 직관만의 일이라고 한다면, 문제는 조금도 긴요한 일이 못 될 것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나는 그 환희라는 것은 농담(濃淡)의 차이야 있을지언정 모든 인간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없다고 하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없다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없다고 느낀다고는 하되 너무도 막연히 지각하는 까닭에 없다는 표현을 취하는 것이다.

(모든 오류는 직관 자체 안에 있지 않다. 그것의 표현 절차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또, 모든 사유의 모순은 그 대상 자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사유의 수단, 곧 언어, 그것의 비탄력성·비동시성 등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게다가, (인간에게 있는 모든 요소는, 그 배합의 비례라는 점이나 진화의 정도라는 점에서는 다양하다 할지라도, 요소의 수라는 점에서는 전적으로 동수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만일 그 수가 다르다고 한다면, 인간과 인간이 논의를 주고받는다는 것은 도무지 우스운 일이 되고 만다.)

신비도 영혼의 환희도 필요 없다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인간이 무언가를 창조한다는 것은 그 근원에서는 그 신비라느니 영혼의 환희라느니 하는 것이 아니던가?

어쨌든, 이 세상에 갱신을 부여하는 것의 그 시초, 그 태반은 무엇인가? 사람들이 보통 일반적으로 생각할 만큼 유형적인 시초라는 것은 없다. 공장이 가동하기 위해서는, 우선 발명가가 제작품의 설계를 건네야 한다. 설계가 생기기 위해서는, 처음에는 그저 맹목적인 의욕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발명가의 의지가 있어야 한다. 그 의지를, 발명가 자신은 신비라고도 느끼지 않겠는가?

신은 있다. 그러면, 나의 신은 선의의 신인가? 물론이다. 어째서냐 하면, 선의라는 것이 있고 그러고 나서 신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신이라는 일체의 근원이 있는 ‘있는 모양’ 자체가 선의일 터이기 때문이다. (이 부근을 좀 더 엄밀한 말로 쓰지 못할 것은 없으나, 나는 독자의 머리를 신용하고 싶고, 공연히 시끄러워지고도 싶지 않다.)

물론, 이렇게 믿는 내 위에 신의 악의의 짓으로 보이는 일도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도중의 일이다. 어째서냐 하면, 귀결되는 곳은, 이 길 저 길을 거쳐 다다를 선의의 나라일 터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잠깐 덧붙여 두고 싶은 것은, ‘그런가, 그렇다면 악의의 짓으로 보이는 일이 있어도 마음 쓸 일은 못 되겠구나’라고 생각해 버리기 쉬운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점이다. 그러나 악의의 짓으로 보이는 일이 일어나는 일이 있다는 것은, 일어나도 좋다는 뜻이 아니다. 상태의 설명을 의지에 대한 시사로 잘못 받아들이는 일은, 종종 인간 두뇌가 범하는 습성적인 오류다. (다만 그 습성이라는 것은 근본적인 것으로서, 순수 지속의 완전한 표현은 절대로 불가능하다는 데서 비롯한다. 그러나 여기서도 또한, 완전한 표현을 기대하지 않는 편이 좋다고 여길 이유는 없음을 덧붙여 둔다.)

곧, 나는 신의 악의의 짓으로 보이는 일, 불행이나 재해가 일어날 때마다 한탄하지 않을 수 없다. 한탄하고 있는 동안에는 신마저도 잊고 있다. 그러나 이내 신이 떠오른다. 만일 떠오르지 않는다고 한다면, 한탄은 언제 끝난다는 것인가? 얼버무린다는 수단은 내게는 없다. 신은 순간 떠오르나, 또 이내 사라져 간다. 나는, 내 기질은 이성적이지는 않다. (이성적이지 않다는 것은 이성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A가 B의 백 배의 이성을 가지고 있다 해도, A가 또 B의 백다섯 배의 아집을 지녔다면, A는 B보다 ‘이른바 감정적’이다.)

유마니테(Humanit, 인류애)에 관하여. 나는 유마니테를 의심할 수 없다. 가령 한사코 그것을 의심하고 싶어졌다고 하자, 그 의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양심이 있는 까닭이며, 양심도 없다고 한다면 의심해 보지조차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양심이야말로, 유마니테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양심이나 도덕을, 인류의 후천적 획득물이라고 하는 설이 있다. 그렇다 한들 상관없다. 문제는, 그렇다면 어찌하여 그것은 후천적으로 획득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어쨌든 ‘후천적으로 획득되기에’ 이른 선천적 사정은 존재한 것이 아닌가?

또, 도덕은 시간과 장소에 따라 다르다고 한다. 그것은 그렇겠지. 그러나 그대는, 그대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시간과 장소의 도덕적 감정을 통해서만 사물에 대하여, 사물을 느낄 것이다. (도덕의 양식이 다르다는 것은, 도덕 정신이 다르다는 뜻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 유마니테는, 시와 어떠한 관계가 있는가? 유마니테가 논리적으로 시와 직접 관계가 있는지 어떤지는 논의가 갈리는 부분이다. 그러나 내게도 이만큼은 알겠다. 앞서의 ‘신비’를 다소간 느끼는 자로서, 유마니테는 느끼지 않는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예컨대 신비의 탐구에 사로잡혀, 유마니테에 비교적 무심해진 상태라는 것은 생각할 수 있어도, 신비에는 느끼지만 유마니테에는 느끼지 않는 식의 일은 생각할 수 없다. 또 그 반대로, 유마니테에는 느끼지만 신비에는 느끼지 않는다는 일도 생각할 수 없다. 유마니테에는 느끼면서 어떠한 미의 양상에도 느끼지 않는, 세상에 흔히 있는 도의가는 다소간 기계적인 인간이다. (여기서 증명을 시도하는 것은 무모한 일이다. 어째서냐 하면 동감(同感)의 형식으로만 전달할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은 있는 법이다. 예컨대 직관의 역증명은 성립하지 않는다. 만일 그것이 성립한다고 한다면, 심의(心意)라는 것은 존재를 잃는다. 곧 시간은 해소된다. 그러나 우리가 있는 곳은 시간의 세계다.)

이리하여, 유마니테와 시가 가령 전혀 무관계한 것이라 할지라도, 유마니테에 느끼는 사람에게가 아니라면 시는 태어나지 않으며 또 감상도 할 수 없는 것이라고는 할 수 있다.

자, 사사로운 이야기지만, 신은 믿었으나 종교가라는 인간 직업의 한 양식에도 끌림을 느끼지 못했고, 그렇다고 신학자가 되고 싶다고도 생각지 않았으며, 또 유마니테는 믿었으나 예컨대 사회사업에 어떤 인연도 생기지 않았고, 그러면서도 시에는 마음이 두근거렸던 것이다. 고바야시의 말로 하자면, 나의 ‘생리의 비밀’이 시로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정작, 그러면 시를 해 볼까 결심하기 위해서는, 시의 한계를 분명히 본 뒤가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것은, 다시 말하자면, 시가 시이기 위해 필수인 조건은 무엇인가를 살피는 일이었다.

그동안의 탐구를 여기에 옮겨 적는 것은 헛수고로 돌아간다.

불충분하게, 더구나 단편적으로 적을 수 있다 할지라도, 적어도 이 소론 안에 쓴다고 하면 전적으로 무의미하기까지 하다. 보들레르가 ‘기교론의 불가능’이라 부른 것이, 여기서 사무치게 떠오른다고만 말해 두자.

그러나 굳이 한마디로 말하자면, 나는 나 자신의 문체를, 그야말로 아슬아슬한 지점에서 붙잡았다.

인터프리테이션이 아니라, 우선 시이기 위해서는, 괴롭다고 하면 괴로운, 긴 길을 걸은 셈이다.

근래 유행하는 ‘문학과 정치’의 일에 잠깐 언급하자면, 문학의 대상으로서는 일체 만물이 대상이 되는 것이니, 물론 그 안에 정치도 포함된다. 그래서 거기에 흥미를 가질 수 있는 문사는 가질 수 있는 만큼 가지면 되는 것이고, 다만 정치적 관심이 없으니까 그래서 안 된다거나 좋다거나 할 까닭은 없다.

나는 정치에 관해서는 조금도 알지 못하지만, 그러나 그것과 문예의 관계는 알고 있다. 또 경제학이나 자연과학에 관해서도 도무지 알지 못하지만, 역시 문예와의 관계는 알고 있다. 곧, 사물이 마땅히 속해야 할 범주를 보는 일은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뒤에는, 인연이 닿아 정치에 흥미를 가질 수 있는 때가 오면 흥미를 가질 것이다. 그것으로 시인으로서 어찌하여 안 될 일이 있겠는가? 안 된다고는 하지 않더라도, 그래서는 시인이 좁은 그릇이라고 여기는 사람은, 시의 세계의 너르기를 모르는 까닭일 것이다. 나로서는, 읽고 싶은 시의 백분의 일도 읽지 못하고 죽을 것이라 여겨지고 보면, 내 자식에게도 시를 해 주었으면 할 정도다.

(1936·8)

무엇인가를 위하여. 나는 니시다 기타로의 저서 『자각에 있어서의 직관과 반성』에 공명하는 사람이다. 우리 시인 제군이 그것을 읽으시기를 은밀히 바라 마지않는다.

시적 이력서. 다이쇼 4년(1915) 초였던가 끝 무렵이었던가 어쨌든 추운 아침, 그해 정월에 세상을 떠난 동생을 노래한 것이 그야말로 첫 시작이다. 학교 독본의 마사쓰라가 작별을 고하는 대목, ‘이제 한 번 더 천안(天顔)을 우러러 뵈옵고서’라는 구절이 단서가 되었다.

다이쇼 7년(1918), 시를 좋아하는 교생을 만나다. 은사다. 그 무렵 지방 신문에 단가란이 있어, 단가를 투고하다.

다이쇼 9년(1920), 러시아 시인 벨리의 작품을 잡지에서 보고, 파격 어법 따위는 진작부터 행해지고 있던 일이로구나 하고 안심하다.

다이쇼 10년(1921) 친구와 『스에쿠로노』라는 가집(歌集)을 인쇄하다. 다소 팔렸다.

다이쇼 12년(1923) 봄, 문학에 빠져 낙제하다. 교토 리쓰메이칸 중학으로 전학하다. 태어나 처음으로 양친과 떨어져, 가슴 들뜨는 심정이었으나, 그해 가을 저물녘 추운 밤에 마루타마치 다리께 헌책방에서 『다다이스트 신키치의 시』를 읽다. 가운데 몇 편에 감격.

다이쇼 13년(1924) 여름 도미나가 다로가 교토에 와서, 그를 통해 프랑스 시인들의 존재를 배우다. 다이쇼 14년 11월에 죽었다. 그립다.

같은 해 가을 시의 선언을 쓰다. ‘인간이 불행해진 것은, 최초의 반성이 잘못이었던 것이다. 그 최초의 반성이 인간을 정치적 동물로 만들었다. 그러나 잘못이었다 해도, 정치적 동물이 되어 버린 것은 되어 버린 것이다. 나란 결국, 그 되어 버린 것을 결코 탓하지는 않는 비탄자다.’ 이것이 그 첫머리다.

다이쇼 14년(1925) 4월, 고바야시에게 소개되다.

다이쇼 14년 8월 무렵, 마침내 시에 전념하기로 대체로 결정되다.

다이쇼 15년(1926) 5월, 『아침의 노래』를 쓰다. 7월 무렵 고바야시에게 보이다. 그것이 도쿄에 와서 시를 남에게 보인 첫 번째다. 곧 『아침의 노래』로써 거의 방침이 서다. 방침은 섰지만, 단 14행을 쓰기 위해 이렇게나 손이 가는 것이냐며 낙심하다.

쇼와 2년(1927) 봄, 가와카미에게 소개되다. 그 무렵 아테네 프랑세에 다니다.

같은 해 11월, 모로이 사부로를 찾아가다.

쇼와 3년(1928) 부친을 잃다. 거짓말을 하여 니혼대학에 다닌다고 했으나 실은 다니지 않고 있던 것이 어머니에게 들통나다. 어머니가 걱정하다. 그러나 이쪽은 오히려 거짓이 명백히 드러난 까닭에, 지난 3년 반 동안의 꽤 괴롭던 자책감을 떨쳐 내다.

같은 해 5월, 『아침의 노래』 및 『임종』, 모로이 사부로의 작곡으로 일본청년관에서 발표되다.

쇼와 4년(1929) 동인 잡지 『백치군』을 내다.

쇼와 5년(1930) 8호가 나온 뒤 폐간되다. 이후 칩거.

쇼와 7년(1932) 계간지 『사계』 제2집 여름호에 시 세 편을 게재.

쇼와 8년(1933) 5월, 우연한 일로 문예 잡지 『기원』 동인이 되다.

쇼와 8년 12월, 결혼.

쇼와 9년(1934) 4월, 『기원』 탈퇴.

쇼와 9년 12월, 『랭보 학교 시절의 시』를 미카사쇼보에서 간행.

쇼와 10년(1935) 6월, 지드 전집에 『달력』을 번역.

같은 해 10월 사내아이를 얻다.

같은 해 12월 『염소의 노래』 간행.

쇼와 11년(1936) 6월 『랭보 시초』(야마모토 문고) 간행.

다이쇼 4년부터 지금까지의 제작 시편 약 700편. 그중 500편 폐기.

다이쇼 12년부터 쇼와 8년 10월까지, 매일매일 줄곧 걸어 다니다. 독서는 한밤중, 아침에 자고 정오 무렵 일어나, 그로부터 밤 12시 무렵까지 걷는 것이었다.

●도서 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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