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
「자연을 옮기는 문장」
나쓰메 소세키
자연을 옮기는 데에 어떠한 문체가 좋은가 하는 점은 나로서는 무어라 말할 수가 없다. 오늘날에는 가장 언문일치(言文一致)가 행해지고 있으나, 구절 끝에 「~이다」 「~인 것이다」 따위의 말이 있어 언문일치로 통하고 있을 뿐, 「~이다」 「~인 것이다」를 빼면 어엿한 우아체(雅文)가 되는 것이 허다하다. 그러므로 언문일치가 편리하기는 하나, 굳이 이것이 아니면 자연을 옮길 수 없다는 문체는 따로 없으리라. 그러나 한문 풀이체(漢文崩し)가 좋은가, 언문일치의 세밀한 곳까지 손이 닿는 문체가 좋은가 하는 점은, 운치(韻致)나 정밀함이라는 면에서 잠시 한번 생각해 볼 만하리라 본다.
운치라든가 정밀함이라든가 하는 것은 받아들이는 방식에 따라서도 다르겠으나, 정밀하게 묘사가 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여운이 풍부한 그러한 문장은 나는 아직 본 적이 없다. 어느 한 풍경에 대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정연하게 옮겨 놓아, 그것이 자못 눈앞에 떠도는 듯한 문장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것은 도무지 가능하지 않은 일이리라 본다. 내 생각으로는 자연을 옮기는 일 ― 곧 서사(敍事)라는 것은, 무엇 하나 그렇게 정밀하고 치밀하게 옮길 필요는 없다고 본다. 옮긴다 한들 그것이 반드시 가치 있는 일도 아닐 것이다. 가령 이 여섯 다다미(六疊) 방만 하더라도, 책상이 있고 책이 있고, 어디에 주인이 있고, 어디에 다바코본(煙草盆, 담배 받침대)이 있고, 그 다바코본은 어떠하며 담배는 무엇이라는 식으로 아무리 옮겨 본들, 독자가 읽기에 거북할 따름이요 아무런 가치도 없으리라 본다. 그 여섯 다다미 방의 특색을 드러내기만 하면 족하다고 본다. 램프가 어둑어둑하였다든가, 어수선해져 있었다든가 하는 것을, 읽고서 자못 마음에 떠올릴 수 있게끔 적으면 충분하다. 그림에서도 그러하리라. 서양에서도 화가들 사이에 그러한 의론이 풍부하고, 일본의 도바 승정(鳥羽僧正) 등의 그림에서도 별달리 정밀한 점은 조금도 없으나, 슬쩍 점을 한 번 찍어도 까마귀로 보이고, 슬쩍 막대를 빙글빙글 끌어도 그것이 소매처럼 보인다. 그것이 또 보는 자의 눈에는 매우 흥미롭다. 문장에서도 마찬가지다. 교카(鏡花)의 작품 따위가 사람에게 주는 인상이 깊다고 하는 것도 역시 이러한 점이리라 본다. 슥 한 붓이라도 좋으니 그 풍경의 중심이 되는 부분을 솜씨 있게 그어 놓은 듯한 글이 매우 흥미로우며, 눈에 떠오를 듯이 보인다. 장맛비(五月雨)의 풍경이든 달밤의 풍경이든, 그 가운데 주된 부분 ― 이라기보다 중심점을 독자에게 보여 주어, 그것으로 무척 흥미를 느끼게 하는 식으로 적는 것이 문학자의 솜씨라 본다.
그러므로 길게 길게 서경(敍景)의 붓을 부린 것보다도, 한어(漢語)나 하이쿠(俳句) 따위로 슬쩍 한 구절에 그 중심점을 집어내어 적은 글에 다대한 연상을 머금은, 운치 풍부한 것이 있다고 함은, 결국 이러한 사정(消息)이리라 본다. 요컨대, 일분일리도 어김없이 자연을 옮기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며, 또한 해낸다 한들 별달리 대단한 가치가 있는 일도 아닐 것이다. 그 증거로, 흔히 서경 따위의 글을 읽고서 정밀히 살펴보면, 어지간한 명문 가운데에도 앞쪽에서 서쪽으로 향해 있던 것이 뒤쪽에서 동쪽으로 향해 있다든가, 방위의 모순 따위가 어지간히 있건만, 누구도 그것을 잡아 의론하는 자도 없거니와 그것을 공격했다는 자도 들리지 않는다. 그러니, 요컨대 자연이든 사물이든, 이를 묘사하는 데에 있어 그 연상에 맡길 만한 중심점을 잡을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지, 정세하다 한들 흥미가 없으면 아무 소용도 없다고 본다.
― 메이지 39년 11월 1일 『新聲』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