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
공장의 창에서
하야마 요시키
1
형제여! 이제 눈을 떠야 한다. 새벽 다섯 시다. 일어나 공장으로 일하러 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지 않으면 인류가 물자 부족에 시달릴 테니까. 얌전히 우리는 기다리자. 지금까지 기다려 왔던 것처럼. 머지않아 자본가들도 양심을 깨우치게 될 테니까.
그리고 형제여. 우리도 마음의 눈을 좀 더 또렷이 뜨자. 이상의 빛이 하늘 가득 빛나고 있지 않은가, “사랑”의 물결이 유구한 모습으로 고요히 공장 자락을 씻고 있지 않은가. 자연이 우리에게 계시하는 신의 사상과 사랑을, 노동의 모든 찰나, 십오 분 휴식 시간에, 차가운 물처럼 시원스레 우리는 마실 수가 있다.
형제여! 노동은 줄기로다. 우리는 공장에서 죽음의 위험과 마주하고, 가정에 돌아가 빈궁과 악수한다. 형제여. 이런 일들은 괴로운 일이다. 그러나 이 괴로움 속에 인류가 나아갈 길이 남아 있다. 왜냐고 형제여. 빈궁과 고통이 있는 곳에만 겸손과 사랑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형제여. 우리는 요 며칠 사이 다친 자 여럿과 죽은 자 한 사람을, 우리 형제 가운데서 내었다. 그들의 운명은 생각만 해도 가엾을 따름이다. 다리가 부러진 한 형제는 치유가 길어져 한 달 반이 지났다. 공무과 사람들의 뜻에 따라 그는 아직 움직이지도 못하는 다리를 안고 하숙으로 돌려보내졌다. 형제여. 우리는 주판알에 톡톡 튕겨져 나가는 것이다. 어느 기수는 “저놈은 술 처먹고 와서, 무너지기로 정해진 시멘트 부대 더미 밑에, 몇 번이나 주의를 받았는데도 자빠져 쉬고 있었던 거야”라고 말했다. 그렇게 말해 두면 회사는 공상으로 처리하지 않아도 되니까. 형제여, 우리를 동포라고 여겨 주는 인간이, 단 한 사람이라도 좋으니 공무과에 있어 주었으면 싶지 않은가. 거기에는 인간 대신 제도기나, 펜이나, 주판알 따위가, 양복을 입고 매일 밀려들어 오는 것이다.
형제여. 제도기나 주판알은 가지런하고 깔끔하지만, 우리는 더럽고 먼지투성이다.
형제여. 5월 19일, 형제 가운데 한 사람이 뜨거운 잿더미 속으로 떨어져 큰 화상을 입은 끝에, 병원에서 끝내 죽고 말았다. 형제여. 다른 일이 아니다. 우리 모두 슬픔과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우리도 언제, 어떤 일로 죽지 않으리란 법이 없다. 그것이 우리의 운명이다.
화상을 입은 형제가 임종의 고통을 겪을 때, “뒷일을 부디 잘 부탁드립니다”라고 말했다. 그때의 얼굴은 내 가슴에 단단히 새겨져 있다. 형제는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매달렸을 때처럼, 부드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누구를 저주하지도 원망하지도 않은 채, 천명이라 체념하고 떠난 것이다. 한 명의 아내와 네 명의 아이를 남기고서.
형제여. 그가 임종에 우리에게 부탁하고 떠난 유족은, 공장법 규정에 따른 그의 일급 백칠십 일분과, 그 밖에 약 백 엔, 합쳐서 사백 엔을 받게 되었다. 유족에게 사백 엔의 돈은 어떤 의미를 지닐까.
형제여. 십자가를 짊어지고 떠난 형제와, 그 유족을 위해, 우리 편이 되어 분투한, 한 사람의 주판알은, 공무과로부터 배척당하고, 수뇌부에 의해 목이,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 밖으로 놓이려 하고 있는 것이다.
형제여, 우리의 살과 핏줄기 위에, 기름기 흐르는 몸뚱이와, 그것을 감싸는 화려한 의복과, 거대한 저택을 얹고서, 쾌락을 탐하는 자본가에 반항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절대로 무저항주의여야 한다. 만일 반항을 시도하려거든, 목 둘레에 쇠 울타리를 둘러친 다음에 하는 게 좋다. 또는, 우리와 그 가족의 위장과 창자를 절개하여 도려낸 다음에 하는 게 좋다.
형제여. 얌전히 폭풍우가 지나가기를 기다리자. 희망과 동경을 품고서, 머지않아 다가올 이상의 따뜻한 빛을 기다리자.
2
음울한 기분이다. 형제들은 한눈도 팔지 않고 일하고 있다. 어딘지 모르게 음울한 얼굴을 하고서.
음울해질 만하다.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보고 웃어야 한단 말인가. 적어도 자기 운명의 덧없음을 비웃는 것 정도가 고작이다.
악착같이 우직하게 일해서, 한 달에 사십 엔 정도 받아, 아내와 세 아이를 먹여 살려야 한다. 아이가 활동사진을 보러 가자고 졸라도, 데려가 주는 대신 주먹질이나 한 대 먹이는 수밖에 없다. 아내는 매일 밥상의 반찬으로 곤욕을 치른다. 싫다, 싫다, 정말이지 사는 게 싫어진다. 사는 게 싫어져도 죽기까지의 결심은 서지 않는다. 공장에서 다쳐 죽어도 유족은 길거리에 나앉지 않으면 안 되는 마당에. 하물며 그냥 죽은 거라면 그야말로 땡전 한 푼이 되지 않는다. 우리가 이렇게 괴로워하며 사는 거야 어쩔 수 없다 체념도 하겠지만, 아이들은 어떤가. “열 살이 되기를 기다리지 못하고” 직공이다. 역시나 나와 똑같이 싫고 괴롭고, 어두운 운명을 짊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떤 무리든 압박이든 잠자코 견디면서 마룻바닥 밑으로 불어들어 간 풀씨처럼, 변변히 싹도 틔우지 못한 채, 자라지도 못한 채, 야위어 시들어 버리는 것이다. 과연 우리는 어엿한 생산자다. 어엿한 생산자임에는 틀림없겠으나, 살아갈 앞날이 없다는 것도 틀림없다. 일어나서 잠들 때까지는 공장에서 일을 계속하고, 잠들고 나서 깨어날 때까지는 꿈도 꾸지 않는다. 세상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어떤 바람이 불고 있는지, 그런 것은 도무지 알 수 없다. 소학교 3학년까지 다니다가 직공이 되었지만, 이제 막 직공이 되었을 무렵에는 자기 이름 정도는 쓸 수 있었다. 지금은 어떤가. 글렀다, 글렀다. 연필을 쥐어도 쥔 것 같지가 않다. 이제 내 손이 잡았다고 느끼는 것은 해머 자루나 데릭 정도나 되는 것일 게다. 절망이다! 무엇이든 다 글렀다! 어쩌다 있는 공휴일도 기쁠 것도 무엇도 없다. 우리에게 돈은 안 주고 휴일을 준들 무엇이 되겠는가. 아내에게 변변치 못한 놈이라 욕을 듣는 게 고작이다. 활동사진은커녕 하면서 아이의 머리를 쥐어박는 것도 좋은 기분은 아니다. 아아 싫다, 싫다.
차라리 아내든 자식이든 내버려 두고, 임금을 받자마자 그 길로 이삼 일 놀아나 볼까, 따위로 생각할 때조차 있다. 그렇게 하는 동료가 있다. 그러나 그것도 나는 못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일하는 것과, 밥 먹는 것과, 잠자는 것뿐이다. 그 밥이라는 것마저도…….
기력 있는 젊은 친구들은 그래도 어떻게든 해 보려고 애쓰고 있다. 그게 좀 잘되어 가나 싶으면 곧장 모가지가 되고 만다. 조합 같은 건 꿈이다, 꿈이다.
노동자만큼 시시한 처지는, 세계 어디를 찾아봐도 아마 없을 것이다. 가장 쓰라린 것이 감옥살이고, 그다음이 노동자고, 그다음이 거지일 것이다. 다만 이 순서가 예외 없이 그러하다고 단정 지을 수는 물론 없겠지만.
노동자는 대개 정직하고 선량한 인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정직하고 선량하기 때문에, 살림이 온통 엉망진창으로 자본가에 의해 짓밟힌다. 이는 결코 노동조합주의자나, 사회주의자나 종교가들만이 근심하는 일이 아니다.
국가조차 노동자의 처지를 개선하는 일에 마음을 기울이기 시작한 것이다.
누구나 평등하게 행복해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고, 바라고 있는 일이다. 다만 그것을 실현하는 일이 매우 어렵다. 실제 문제에 맞부딪히면 그 일의 한복판에 선 자는, 행복 대신 참담한 불행을 떠안게 되는 것이다.
“누구나 다 행복하도록 내가 애를 쓰면, 무엇보다 이 내가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본디 인간은 하느님의 나라를 구할 만큼 행복을 바라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불행해지는 일을 피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불우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기꺼이 희생이 되겠다는 각오가 없는 사람에게도, 결코 유쾌한 느낌을 주지는 않는다. 그래서 “어차피 지금 세상은 이기주의가 이기는 거라, 내가 사회 개량 운동에 끼어들어 눈깔을 부릅뜨고 봐 봤자 아무 소용도 없는 거다. 인류의 다수는 어차피 불행한 거다. 결국 나는, 나는 결국 그, 나만 잘되면 그걸로 좋은 거다”라고, 생각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사람은 갈라져 간다. 저마다의 길을 찾아 끝없는 미로로 뿔뿔이 흩어져 나아가는 것이다.
3
형제여. 장마철다운 하늘이, 음울하게 우리의 머리를 짓누르고 있다.
우리는 어두운 하늘과,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너럭바위 밑에서 영원히 헐떡이지 않으면 안 되는가. 우리는 아무리 애써도, 아무리 달려 봐도 이 지상이 아니면 살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온갖 사회악의 압박 바깥으로는 고개를 쳐들 수 없는 것일까.
형제여. 단무지는 위에서 가해지는 압력이 크면 클수록, 서로 밀착하고 옥죄어 맞물리는 법이다. 헌데, 노동자는 단무지인가.
형제여. 우리의 운명은 단무지다. 송두리째 먹잇감이 되는 것이다. 자본가는 갖가지 호화로운 음식에 물리고는, “이것만 한 게 없지”라며, 우리 단무지를 먹는 것이다. 그들의 음식은 단무지에서 시작해 단무지로 끝난다. 그리고 그들의 거대한 턱과, 오장육부는 지금으로서는 과식 탓에 병이라도 날 기색이 없다.
형제여. 위에서 가해지는 압력이 무거우면 서로의 관계는, 무서울 만큼 옹색해진다. 서로 발을 밟고 만다. 어깨와 어깨가 부딪힌다. 그렇지만 그것은 단무지가 알 바 아니다. 누름돌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옹색하다고 해서 서로 다투어서는 안 된다. 세계는 통 안의, 우리 시들어 버린 무와, 지게미와, 그것으로 다인 것은 아니다.
자본가 및 자본가의 꼭두각시인 누름돌들은, 무수히 늘어선 단무지 통 옆에서, 우리가 보는 세계와는 닮지도 않은 세계를 보고 있는 것이다. 단무지에서 나오는 이익을 계산하기 위해 필요한 주판이나, 컴퍼스들은, 오늘 토요일과 내일 일요일을 이용해서, 낚시를 떠나는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우리는 그저 서로 짓눌려 즙이나 짜내고 있으면 그만이지, 우리가 생기 있는 싱싱한 무라는 사실은 두려워해야 할 일인 것이다.
그러나 형제여. 우리는 단무지의 풍자에서, 인간으로 돌아오자.
형제여. 우리도 인간이다. 인간인 이상 양심을 갖고 있다. 우리의 양심은 다행히 고약을 붙이지 않았으니, 예민하다. 그러니까, 형제여. 우리는 “인류의 이상”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양심을, 너무도 음일에 탐닉시키고, 알코올에 마비시킨 자본가들의 딱지투성이 양심에는, “인류의 이상”이나 “지상에서 민중의 결합”이나, “신의 뜻의 구현” 따위는, 도무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만일 그것이 그들에게 알려진다면, 그들은 자기 존재가 부정되어야 마땅한 것이라는 사실까지도 알게 될 것이다.
형제여. 지상에, “사랑에 의한 민중의 결합”을 가져와야만 하는 사명은, 우리 노동자에게만 주어진 특권이며, 또한 무거운 책임이다. 우리는 악마의 유혹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 어디까지나 이반의 바보로 끝까지 밀고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4
“나만 잘되면 남은 짓밟아도 상관없다”는 생각은, 다른 사람의 그 생각과 충돌한다. 모두가 남을 걷어차고 자기 잇속을 좇는다면, 아마 모두가 다친 채로 쓰러질 것이다. 또 쓰러지고 있는 중이다.
인류는 “사랑”으로 아름답게 결합하지 않고, “이익”에 의해 단단히 묶여 있다.
형제여. 마음에 어떤 응어리도 없이, 이해관계도 없이, 사람과 사람이 이야기를 나눌 때, 그것은 얼마나 부드럽고, 맑고, 평화로운 관계일 것인가.
두 사람이서 어떤 일을 시작하여, 한 사람은 출자자이고 한 사람은 실무를 맡는다고 하자. 일의 이익이 시원치 않을 때, 출자자가 일변 3전의 이자를 시끄럽게 따진다고 한다면, 그 두 사람은 때마다 함께 술을 마시고, 즐거움을 나누고 있어도 “일변 3전” 대목에서 막히고 마는 것이다.
그리하여 일을 맡고 있는 자는 괴로움 끝에, 국외자에게 속을 털어놓고 도움을 청하게 되는 것이다.
형제여. 이익을 좇아서는 안 된다. 이익을 좇으면, 진실로 형제를 위해 애쓰는 사람과, 우리 앞에 장대 끝에 묶어 놓은 고기를 내미는 사람을, 뒤섞어 버릴 것이다.
형제여. 나는 내가 지닌 사상의 한 자락을 여기에 간략히 적고서 붓을 놓을까 한다.
형제여. 우리가 바라는 바는, 지금 자본가와 그 꼭두각시가 행하고 있는, 물질적 영화여서는 안 된다. 그것을 바라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우리가 부정하는 것을 우리가 마음속으로 바라고 있다는 것은, 정말 침을 뱉어야 마땅한 일이다.
만일 물질적 영화를 얻는 것이, 우리가 바라는 바라면, 그 일은 바라지 않아도 행해지고 있지 않은가. 만일 그것은 소수자뿐이지 만인이 아니라 한다면, 만인이 그렇게 되었을 때, 제군들이 바라던 물질적 영화는 어디를 보아도 없어질 것이다.
형제여. 부와 쾌락은 상대적인 것이다. 그것을 좇는 것은, 자기 그림자를 죽기 살기로 좇아가는 것과 같은 일이다.
부를 좇는 것에 우리의 의지가 있다고 한다면, 우리가 자본가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어떤 까닭으로 원망할 곳이 있겠는가. 그는 이렇게 답할 것이다. “나도 아직 충분한 부를 갖지는 못했다”라고.
우리는 부를 좇지 않고, 가난을 좇기 위해, 거기에야말로 단 하나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길이 남아 있는 것이다. 우리는 결코 자본가의 부를 빼앗으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겸손한 생명까지도 그가 거부하려 하는 것을 따지는 것이다.
자본가 제군이여. 노동자도 인간이다. 겸손한 신의 자식이다. 인간으로서 동포로서, 똑같이 일본 국민으로서, 그들에게 양심을 가지고 대하라. 제군이 만일 그들을 두려워하고 멀리하여, 그들을 생명의 불안 속으로 처박는다면, 책임은 제군 쪽에 있는 것이다. 제군은 마른 억새풀을 유령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하물며 인간을 짐승으로 보아서는 안 되지 않는가.
○
현세에 극락이 오고, 지상에 천국이 임하게 되는 것은 언제일까. 그것은 지상의 인류가 눈을 뜸으로써 곧바로 출현하게 되는 것이다.
이 생각을 공상이라고 비웃고, 꿈이라며 웃음으로써, 인류는 자기 자신의 하느님의 나라를, 악마의 제단에 바치고 있는 것이다.
이 미몽을 버리는 자가 한 사람이라도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하느님의 나라는 가까이 다가오는 것이다.
석가모니나 그리스도가 지상에 나타나 하느님의 나라의 이상을 설하고 나서 이천 년 내지 삼천 년이 된다. 그럼에도 인류는 조금도 하느님의 나라에 다가서려 하지 않는다, 따위의 변명을 늘어놓아서는 안 된다. 부처의 자비, 신의 사랑을 안 자는, 안 것만으로도, 하느님의 나라에 가까이 다가서고 있는 것이다.
형제여. 악마의 온갖 유혹을 물리치고, 하느님의 나라로 나아가자. 우리의 몸 안에는, 신과 악마가 함께 살고 있으니, 신만을 바라보지 않으면 안 된다.
형제여. 신을 알고, 신의 이름으로 천국을 지상에 가져오지 않겠는가.
당신이여, 나라가 임하시게 하옵소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다이쇼 10년 6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