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
하세가와 덴지로(長谷川伝次郎) 씨의 『히말라야 여행』에는 이만 척(약 6,060미터)이 넘는 영봉을 답파했을 때의 장쾌한 인상이 적혀 있다. 예부터 현세의 죄와 부정을 씻어 내고자 참배해야 할 성지로서 인도인이 동경해 온 카일라스(カイラース)의 호숫가 같은 곳은, 이 세상의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곳은 나무 한 그루 없는 망망한 흙더미 가운데 고인 물웅덩이에 불과하건만, 다만 공기가 청정하기에 천국 같은 광경을 빚어낸다는 것이다. 나로서도 그 광경이 어렴풋이나마 떠오르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해발 삼천 척(약 909미터)에 지나지 않는 가루이자와에 있어서도, 쾌청한 아침이면 문득 속세에 있을 때와는 살아 있는 느낌이 사뭇 다른, 황홀경에 든 듯한 감각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이만 척 고원이라면 가루이자와의 일곱 배 높이다. 이 세상의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이 세상의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곳에 자기 몸을 두고 있는 마음, 그러한 경지에 있다면 살아도 좋고 또 죽어도 좋을 듯한 마음. …… 하세가와 씨 같은 카일라스 순례자가 입으로도 붓으로도 미처 옮기지 못한 찬미의 감회가, 내 마음에도 어렴풋이나마 전해질 듯이 여겨진다.
나뭇가지가 어떻고 축산(築山)이며 정원의 못 모양새가 어떻다는 식의 일본식 정원 풍의 자잘한 기교 따위는, 청정한 공기 속에서는 군더더기일 뿐이며, 삼천 척, 일만 척, 이만 척의 고지에서는 맑은 공기 그 자체만이 절대미의 세계를 우리 눈앞에 그려 보인다. …… 나는 가루이자와의 큰길과 골목길을 정처 없이 이리저리 걸으며, 가 본 적 없는 히말라야 고원을 그려 보고, 한 번 흘끗 본 적 있는 스코틀랜드 고원과 스위스 산악을 떠올린다. 어느 쪽이나 소설과는 동떨어진 세계다. 이만 척 산악을 기어오른다는 것은 평범한 사람이 엄두 낼 일이 못 되지만, 카일라스 호숫가가 “이 세상의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데 비해 이쪽은 현세의 낙원이라고 하세가와 씨가 말한 인도 서북의 고지 카슈미르 정도라면 나라고 못 갈 것도 없으리라. 나는 올봄 늦봄에서 초여름 무렵에 걸쳐 시코쿠와 규슈의 명소와 고적 몇 군데를 돌아보았는데, 어릴 적부터 수십 년이나 보아 익숙한 것을 장소만 바꾸어 보는 것에 불과한 허전함을 느꼈다. 새로운 자극은 아무것도 없었다. 어디를 가도 명소에는 소나무가 즐비하게 서 있었다. 소나무가 그렇게 재미있는 것일까. 소나무는 무사도와 더불어 일본혼의 표상이라도 되는 것인가, 그런 생각을 해 보았다.
가루이자와는 소나무를 자랑하는 일본 취향의 명소가 아니다. 외국인 손에 개척된 국제적 피서지로서, 오늘날의 시국에도 여전히 외국인이 주인 행세를 하고 있는 것이 눈에 거슬릴 때도 있지만, 그보다 이 땅을 어슬렁거리는 청년 남녀의 풍속과 거동이 외국인의 흉내로밖에 보이지 않는 것이, 내게는 간지럽게 느껴질 때가 많다. 우리에게는 잘 분간이 안 가지만, 이런 일본 피서지의 외국인 풍속은 서양 본바닥 피서지의 풍속에 비하면 촌티 나고 시골스럽고 후줄근하다고 한다. 그런데도 일본 청년 남녀는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그 모방을 자랑스럽게 행하고 있어서, 국수 부활(國粹復活)의 목소리가 아무리 드세져도 외국 물든 기세는 좀처럼 막아 낼 수 없을 듯하다. 번역은 반역이라고 하지만, 메이지 이래의 번역 시대는 아직 이어질 것이 분명하다. 알아듣든 못 알아듣든, 셰익스피어는 어쩐지 위대해 보이는 법이다.
나는 산책하던 길에 이따금 우체국 옆 게시판에 붙은 갖가지 벽보를 본다. 상점 광고나 분실물·습득물 알림 옆에 동물애호회나 인도회의 취지서가 걸려 있는 것은 가루이자와다워 보인다. 십수 년 전, 내가 처음 이 땅에서 여름을 났을 때에는 에기 긴긴(江木欣々) 여사의 승마 차림과 오자키 유키오(尾崎行雄) 씨 일족의 승마 모습이 이 고장의 명물로서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여사의 일은 이제 화젯거리에도 오르지 않을 만큼 그림자가 옅어졌고, 오자키 씨는 늙어서도 아직 기력이 남아 있어 보이는 불그스름한 얼굴로 거리를 한가로이 거닐지만, 승마의 즐거움만은 단념한 듯하다. 십수 년 전에는 이 두 명사의 승마가 특히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 만큼 일본인의 승마는 드문 것이었는데, 요즈음은 젊은 남녀가 얼핏 보아 외국인이라 해도 의심하지 않을 차림으로 늠름하게 말발굽 소리를 내며 달리는 일이 부쩍 늘었다. 동물애호회의 말로는, 말 빌려주는 자가 야윈 말을 끌고 와서 혹사한다고 한다. 타고 있는 당사자는 영기 늠름한 기상에 자기 도취해 있어도, 태우고 있는 말 쪽은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다는 것이다. 또 한쪽 인도회의 주장에 따르면, 피서객은 기르던 개의 대다수를 도쿄로 돌아갈 때 내버리고 가는 모양이다. 남겨진 개는 들개가 되어, 먹이 부족과 함께 위험해진다고 한다. 몇 해 전 이 고장 변두리에서 정사(情死) 사건이 있었는데, 들개들이 그 정사한 자들의 시체를 뜯어 먹고서 사람 고기 맛을 익혀 산 사람에게도 달려들게 되었다고 수군대는 자가 있었다.
그런데 갖가지 벽보 중에서 가장 내 눈을 끄는 것은 NYK 항로의 출항 일정 광고지다. 멜버른, 시드니라든가 싱가포르, 봄베이라든가 나폴리, 마르세유라든가, 가로 글씨로 적힌 지명 그 자체가 내 마음을 부추겨, “인간도처유청산(人間到處有靑山)”이라는, 어린 시절 한학 사숙에서 외운 케케묵은 문구를 떠올리게 한다. “내 사상은 굉장한 방랑벽을 지니고 있다”라고 보들레르가 말했다. 실생활에서는 방랑벽이 너무도 부족한 나도 공상 속에서는 꽤 격렬하게 떠도는 듯한데, 대부분의 사람이 그러하리라. “오늘 나는 공상 속에서 세 채의 거처를 가지며 거기서 똑같은 환락을 발견했다. 내 영혼은 이토록 재빨리 여행을 하고 있는데, 어찌 내 육체에 굳이 자리를 옮길 필요가 있으랴? 또한 계획을 실행한다는 것은 무슨 일인가? 계획은 그 자체로 이미 충분한 기쁨인 것을”이라고 보들레르는 말하지만, 그것은 그가 빼어난 시인의 영혼을 지녔기 때문이며, 시인이 아닌 나로서는 계획만으로 충분한 기쁨을 누릴 수는 없는 일이다.
나는 이 고장의 상쾌한 공기 속을 떠돌며 히말라야 고원의 성지 맛을 칠분의 일쯤 음미한 셈치고 빌린 집으로 돌아가는데, 늘 부재중에 달갑잖은 손님이 와 있지 않기를, 달갑잖은 우편물이 와 있지 않기를 바란다. 내가 알아차린 범위에서든, 알아차리지 못한 영역에서든, 달갑잖은 일이 가루이자와 명물 천둥 같은 기세로, 또는 쥐를 노리는 고양이처럼 발소리를 죽이고 다가올 듯한 두려움이 있는데, 나는 그것을 하루라도 미루기를 바라고 있다. …… 내가 이렇게 말하면 겁쟁이의 푸념처럼 들릴지도 모르나, 이것은 보들레르 못지않은 외국 시인이 솜씨 좋게 노래해 둔 바이니, 우습게 볼 일은 아닐 것이다.
보들레르는 인적 없는 너른 공원을 거닐며, 그녀를 더없이 아름답게 꾸민 궁정에 두는 것을 그려 보고, 열대 풍경 속에 두는 것을 그려 보다가, 끝내는 닥치는 대로 들른 여관에 두는 편이 외려 그녀에게 어울린다고 그려 보며 혼자서 흐뭇이 즐기고 있었다. 나는 “돌아가면 그 다음을 읽을 수 있다”라며 그것을 즐거움으로 삼아 숲 사이 오솔길을 더듬어 언덕 위 집으로 돌아간다. 읽고 있는 것은 영문으로 옮겨진 『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인데, 거기 등장하는 인물들은 가루이자와 길에서 드문드문 마주치는 번역 풍 청년 남녀를 한층 더 아름답고 좋은 인물로 빚어 놓고 그 마음들까지 그려 내고 있는 듯하여 흥미롭다. 시인 무로 사이세이(室生犀星) 씨는 “가루이자와에서는 담배 한 모금도 사치다”라며 이 고원에서 피우는 담배 맛을 찬미했지만, 청정한 서늘함 속에서 읽는 옛이야기의 맛 또한 속세에서 읽는 것과는 절로 다른 모양이다.
“우키후네(浮舟)의 시녀 아무개는, 우키후네에게 정을 두어 이런저런 보살핌을 베풀고자 하는 미청년 가오루(薫)를 한번 본 이래로, 틈만 있으면 밤은 물론이거니와 한낮의 해가 환히 비치는 데서도 꾸벅꾸벅 가오루의 모습을 꿈꾸곤 했다. 사람이란 저마다 자기 좋아하는 것을 그려 볼 수 있는 법이다. 그녀는 가오루를 따라서라면 세상 끝까지라도 가도 좋다는 마음가짐을 하고 있었다”라고, 옮긴이 웨일리(Waley)는 적었다. 어차피 세상이란 뜻대로 되지 않는 것투성이지만, 닿지 않는 사랑일지언정 공상 속에서는 얼마든지 즐길 수 있다. 겐지의 각 권은 “만지황당언(満紙荒唐言)”이며 백일몽의 이야기가 줄지어 이어진다 한들, 사람의 마음속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흡족치 못한 후줄근한 현실 세계보다도 이런 백일몽의 아름다운 세계를 은밀히 갈망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를테면 “이 세상의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미녀는 우키후네의 모습이 되어 나타나 있다. 갖가지 남자에게 정을 받은 그녀가 외려 그것을 성가시다 하여 물에 몸을 던지고자 하거나 비구니가 되어 세상을 등지려 하는 것은, 사람으로서는 사치스러운 일이거니와, 그러한 사치를 누릴 수 있는 여인이 속세에 몇이나 있을 것인가.
젊은 그녀는 요카와(横川)의 노승을 향해 술회한다. “저는 죽을 작정이었사옵니다. 이 댁의 모든 분께서 친절히 대해 주십니다만, 그래도 저는 죽지 못하고 되살아난 것이 못내 한스럽사옵니다. 인생에 미련을 두지 않고 있사오니, 이참에 스님의 도움을 빌려 비구니가 되고 싶사옵니다. 부디 소원을 들어주시옵소서. 설령 언제까지나 살게 되더라도, 저는 결단코 보통의 생활은 하지 않을 작정이옵니다.” (영역자는, 보통의 생활이란 연인을 두는 일 따위를 뜻한다고 풀이한다.)
노승은 거기에 답한다. “그대는 그러한 결심을 하기에는 아직 나이가 너무 젊다. 훗날 마음이 바뀔 것이다. 도심이 굳지 않은 자가 부처의 길에 드는 것은 외려 죄에 빠질 우려가 있다. 갸륵한 마음가짐이라고 칭찬할 일은 못 된다. 그대가 지금 바라는 것은 본심에서 나온 것임에 틀림없다. 나는 그것을 의심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몇 달이 지나고 몇 해가 흘러도, 그대가 같은 마음을 지속할 수 있을지 어떨지. 그대도 알겠지마는, 여인이라는 것은 불쑥 마음을 일으켰다 후회했다 하여, 자못 변덕스러운 법이다.”
“하오나 저는 불쑥 마음을 일으킨 것이 아니옵니다. 어릴 적부터 끝내는 비구니가 될 사람이라고, 누구에게서나 들어 왔사옵니다. 어릴 적부터 속세를 떠나 있던 제가 나이가 들어 참된 고생을 겪고 보니, 인생의 겉껍질뿐인, 물거품 같은 환락에 등을 돌리고 내세의 일을 한마음으로 생각하게 되었음은, 마음의 이치로 보아 자연스러운 일이라 여겨집니다. 변덕이 아니옵니다. 다만 제 마음은 자못 약한 것이 틀림없사옵니다. 결심이 흔들리지 않으리라 단언할 수도 없사옵니다. 그러하오니 지금 당장 서원을 세우고 부처의 길에 들고자 하나이다.”
더없는 미모의 이 여인이 이러한 음울한 속내를 지니고 있다는 것은, 요카와의 성인 같은 노승의 마음에까지 이상한 사건으로 비쳤다. 우키후네를 사모하는 사내들이 그녀의 각오를 얼핏 듣기라도 한다면, 어찌 그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을 것인가.
이 이야기 속의 인물들은 남녀 모두 아직 스물도 채 되지 않은 나이부터 화조풍월의 소양이 풍부하여, 벌레 소리, 나뭇잎의 살랑임, 이슬 맺히는 자리에까지 마음을 기울이지만, 그와 더불어 자칫하면 세상을 등지고자 한다. 청년 귀족 가오루 같은 이는 빼어난 재주에 미모와 지위까지 갖추고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속세를 버리는 일을 자기가 가야 할 단 하나의 옳은 길인 양 말한다. 이 이야기에서는 화조풍월과 애욕과 둔세의 정을 모두가 누린다. 그 셋에 도취해 있다. “real troubles”이니 “torture”니 그들이 입에 담는다 한들, 이십 세기인 오늘날 현재의 고통이며 번뇌와는 그 말의 속뜻이 다른 듯이 여겨진다.
내가 빌려 사는 언덕 위의 집은 밤에는 적막하고, 둘레로 벌레 소리가 한창이다. 때때로 어디선가 둥둥, 북소리가 들려온다.
“무슨 소리지?”
“설마 본오도리(盆踊り)가 이 근처에 있을 리도 없고.”
“너구리가 배북(腹鼓)을 두드리는 게 아닐까.”
진지한 얼굴로 그렇게 말한 사람도 있었다. 무슨 일에든 “모노노케(物の怪)”의 짓이라 믿었던 겐지 시대의 사람들이라면 그렇게 여겼겠지만, 우리는 쉽사리 그렇게 믿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너구리의 배북은 믿어지지 않을지라도, 벌레 소리는, 겐지로부터 천 년이 지난 영역본을 거쳐 이 이야기 속 남녀의 마음에 가닿았던 것처럼 내 마음에도 가닿는다. 방울벌레 솔귀뚜라미 귀뚜라미 따위의 음색을 가려 듣지 못하는 내 귀에도, 천 년 전의 벌레 소리들이 애잔함을 전해 온다. 비바람을 견뎌 낸 용담(龍膽) 한 그루에 맺힌 이슬이 고요한 아침 빛에 빛나는 모습이 가로 글씨 사이에 떠올라 있는 것이다.
젊고 아름답고, 그러나 신경이 예민한 우키후네는 늙어 빠진 비구니들과 같은 방에서 자고 일어났다. 그 쭈글쭈글하고 비척대는 비구니들은 서로 지지 않으려는 듯이 돼지 우는 소리처럼 그르렁거리며 코를 골고 잠들었기에, 우키후네는 마치 맹수의 굴 안에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맹수들이 당장이라도 덮쳐 오지나 않을까. 자기가 물어뜯기지나 않을까 하여 두려워졌다. 그런 것을 두려워하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애초에 이 세상에 두려워할 것 따위는 없을 터이거늘. 그 비구니들은 실제로 위험한 노녀가 아닐 터이지만, 설령 그들이 야만스러운 괴물이라 한들 무서워할 것은 없는 일이며, 본디 그녀의 으뜸 가는 바람은 죽는 일이 아니었던가. ……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그녀는 여전히 떨고 있었다. …… 목매기에 꼭 알맞은 나무가 강 건너편에 있었기에, 어떤 자살 희망자는 그 나무를 이용해 뜻을 이루려 했지만, 그 나무에 다가가려면 썩은 외나무다리를 건너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무서웠다. 그와 마찬가지로, 죽기를 바라는 우키후네라 해도 자기 눈앞의 세상이 무서웠다.
이 언덕 위의 집에서 노동에 익숙지 않은 손발을 놀려 어설프게 잡일을 보고 있는 한 동거인은 보통의 체질을 지닌 중년의 남자이지만, 죽는 일을 아무것도 아닌 듯이 여기는 모양이다. 막다른 길에 부딪히면 언제든 죽어서 자기 일생을 매듭짓겠다는 듯이 곁에서 보아도 그렇게 비친다. 흥분도 하지 않고 외려 명랑한 태도로 죽음을 이야기한다. “뭘, 입으로만 그런 말을 해서 일종의 즐거움을 누리고 있는 것이겠지” 하고 인생 경험자에게 비웃음 받을 법도 한데, 실은 이 사내는 깨끗이 주머니 속을 털어 한 푼도 없는 처지가 되었을 때, 가까스로 수면제 한 갑을 살 만큼의 돈만 남았을 때 마침내 때가 왔다 여기고, 가산을 기울여 인생 결단의 자료가 될 칼모틴(カルモチン)을 구해 복용했다. 그 위에 만일을 위해 동맥까지 그었다. 완전히 숨이 끊어져 있었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은 사이에 지나가던 자에게 발견되어 의사의 처치로 되살아났던 것이다. 이를 악물고서라도 살아 내겠다는 기개를 지니지 못한 이 사내 같은 사람이, 몸에 갖춘 어떤 기예도 없이 오늘날의 세상에서 의식의 밑천을 얻어 낼 수 있다면 그것은 요행이려니와, 그 요행조차 그리 기대하지 않은 채로 손쉽게 생사를 매듭짓는 듯이 보이는 것은 일종의 달인이라 할 것인가.
그런데 나는 이따금 이 사내의 지난날의 그림자가 부득이 눈에 들어옴을 느끼는 외에는, 이 사내의 생애에 대해 굳이 캐물어 보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매일같이 현실의 그의 모습을 마주하고 있노라면, 그 반생의 발자취가 어떠하든 귀를 기울여 들어 보고 싶은 흥미는 도무지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그보다도 『Genji』에 나오는 가시와기(柏木)라는 사내의, 옳지 못한 사랑에 사로잡혀 번민으로 죽음에 이른 발자취에 마음이 끌린다. 햄릿보다도 한층 더 근대다움이 풍부한 듯한 가오루라는 사내에게는 공감마저 느낀다. 온나산노미야(女三の宮), 아게마키(アゲマキ), 우키후네 같은 여인들은 월궁전의 여인들 같으며, 공기가 청정한 이 세상의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이만 척 고원, 카일라스의 호숫가에야말로 이러한 미녀의 그림자가 비치고 있는가 그려 보이는 한편, 이 세상 여인의 참모습이 절로 물 위에 어른거리고 있음에 친근함이 느껴지는 것이다. 서양 영화의 자막에서 자주 보이며 발성 영화에서도 흔히 들리는 케케묵은 말, “나는 당신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습니다”라는 말이, 겐지를 비롯한 갖가지 사내에 의해 이 월궁전의 여인 같은 여인을 향해 말해지고 있다고 생각하면, 내 책상 둘레는 아름다운 꿈에 감싸여 있는 듯하여 자못 한가롭다. 나는 젊었던 시절부터 한 번도 이런 말을 입에 담은 적이 없었다. 또 내가 알고 있는 현실의 누군가가 이런 말을 입에 담는 것을 듣고 아름답거나 흐뭇하게 느낀 적도 한 번도 없었다.
(1942년 3월 “나그네의 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