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 of 1

Chapter 1

메로스는 격노했다. 반드시 저 간사하고 포악한 왕을 제거해야 한다고 결의했다. 메로스는 정치를 모른다. 메로스는 마을의 목동이다. 피리를 불고 양과 놀며 살아왔다. 그러나 사악한 것에는 남들보다 곱절이나 민감했다. 오늘 새벽 메로스는 마을을 출발하여 들판을 지나고 산을 넘어, 십 리나 떨어진 이 시라쿠사 시내에 찾아왔다. 메로스에게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없다. 아내도 없다. 열여섯 살 수줍은 여동생과 단둘이 산다. 이 여동생은 마을의 어느 성실한 목동을 머지않아 신랑으로 맞을 예정이었다. 혼례도 코앞이다. 메로스는 그래서 신부의 예복이며 잔칫상의 음식이며를 사러, 먼 길을 마다않고 시내까지 나온 것이다. 우선 그 물건들을 사 모으고, 그다음에 도성의 큰길을 한가로이 거닐었다. 메로스에게는 죽마고우가 있었다. 세리눈티우스다. 지금은 이 시라쿠사 시내에서 석공 일을 하고 있다. 그 벗을 이제부터 찾아갈 생각이었다. 오래 만나지 못했으니, 찾아가는 것이 즐거웠다. 걷는 동안 메로스는 거리의 모습이 수상하다고 느꼈다. 쥐죽은 듯 고요하다. 이미 해도 지고 거리가 어두운 것은 당연하지만, 그래도 어쩐지 밤 탓만은 아닌 듯, 시내 전체가 몹시 쓸쓸했다. 느긋한 메로스도 차츰 불안해져 왔다. 길에서 만난 젊은이를 붙잡고, 무슨 일이 있었느냐, 이 년 전에 이 시내에 왔을 때는 밤에도 모두 노래를 부르며 거리가 떠들썩했을 터인데, 하고 물었다. 젊은이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하지 않았다. 한참을 걸어 노인을 만나, 이번에는 더욱 어세를 높여 물었다. 노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메로스는 두 손으로 노인의 몸을 흔들며 거듭 물었다. 노인은 주위를 살피며 낮은 목소리로 겨우 대답했다.

“임금님은 사람을 죽입니다.“

“어찌하여 죽이는 것이냐.“

“악심을 품고 있다는 것입니다만, 아무도 그런 악심 따위 품고 있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을 죽였느냐.“

“예, 처음에는 임금님의 매부를. 그다음에는 친아들을. 그다음에는 누이를. 그다음에는 누이의 자녀를. 그다음에는 왕비를. 그다음에는 충신 알렉시스 님을.“

“놀랍구나. 국왕이 미쳤단 말이냐.“

“아닙니다. 미친 것이 아닙니다. 사람을 믿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요즈음은 신하의 마음까지도 의심하시어, 조금이라도 사치스러운 살림을 하는 자에게는 인질을 하나씩 내놓으라 명하고 계십니다. 명을 거역하면 십자가에 매달려 죽임을 당합니다. 오늘은 여섯 명이 죽었습니다.“

듣고서 메로스는 격노했다. “어처구니없는 왕이로다. 살려 둘 수 없다.“

메로스는 단순한 사내였다. 사들인 물건을 등에 진 채로, 어슬렁어슬렁 왕성 안으로 들어갔다. 이내 그는 순찰 관리에게 붙잡혔다. 조사를 받자, 메로스의 품속에서 단검이 나왔으므로 소동이 커져 버렸다. 메로스는 왕 앞으로 끌려 나갔다.

“이 단도로 무엇을 하려 했느냐. 말하라!“ 폭군 디오니스는 조용히, 그러나 위엄을 갖추어 추궁했다. 그 왕의 얼굴은 창백하고, 미간의 주름은 새겨 넣은 듯 깊었다.

“이 시내를 폭군의 손에서 구하는 것이다.“ 메로스는 당당하게 대답했다.

“네가?“ 왕은 비웃었다. “어쩔 수 없는 놈이로구나. 너에게는 이 몸의 고독을 알지 못하리라.“

“입 다물라!“ 메로스는 벌떡 일어서며 반박했다. “남의 마음을 의심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수치스러운 악덕이다. 왕은 백성의 충성마저 의심하고 계시지 않은가.“

“의심하는 것이 마땅한 마음가짐이라고 내게 가르쳐 준 것은 너희들이다. 사람의 마음은 믿을 것이 못 된다. 인간이란 본디 사욕 덩어리다. 믿어서는 안 되느니라.“ 폭군은 침착하게 중얼거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나라고 태평한 세상을 바라지 않겠느냐.“

“무엇을 위한 태평이냐. 자기 지위를 지키기 위함이냐.“ 이번에는 메로스가 조소했다. “죄 없는 사람을 죽이고서 무슨 태평이냐.“

“닥쳐라, 천한 것아.“ 왕은 번쩍 고개를 들며 쏘아붙였다. “입으로야 아무리 깨끗한 소리를 할 수 있으리라. 나에게는 사람의 뱃속 깊은 곳이 훤히 들여다보이느니라. 네놈도 이윽고 십자가에 매달리고 나면, 울며 빌어도 듣지 않으리라.“

“아아, 왕은 영리하시구나. 자만하고 계시라. 나는 죽을 각오가 되어 있거늘. 목숨을 구걸하는 짓은 결코 하지 않겠다. 다만——“ 하고 말하다 말고 메로스는 발밑에 시선을 떨구며 잠시 머뭇거렸다. “다만, 내게 정을 베풀 생각이시라면, 처형까지 사흘간의 말미를 주시오. 하나뿐인 여동생에게 남편을 맞게 해 주고 싶소. 사흘 안에 마을에서 혼례를 올리게 하고, 반드시 이곳으로 돌아오겠소.“

“어리석도다.“ 폭군은 쉰 목소리로 낮게 웃었다.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하는구나. 놓아준 새가 돌아온다더냐.“

“그렇소. 돌아오겠소.“ 메로스는 필사적으로 우겼다. “나는 약속을 지키오. 사흘만 풀어 주시오. 여동생이 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소. 그토록 나를 믿지 못하시겠다면, 좋소, 이 시내에 세리눈티우스라는 석공이 있소. 나의 둘도 없는 벗이오. 그를 인질로 여기에 남겨 두겠소. 내가 도망쳐 버리고 셋째 날 해거름까지 돌아오지 않으면, 그 벗을 교살하시오. 부디 그리해 주시오.“

그 말을 듣고 왕은 잔혹한 마음으로 살며시 음흉하게 웃었다. 건방진 소리를 하는군. 어차피 돌아올 리가 없다. 이 거짓말쟁이에게 속는 척하고 풀어 주는 것도 재미있겠지. 그리고 대신 서 준 놈을 셋째 날에 죽여 주는 것도 통쾌하겠지. 사람이란 그래서 믿을 수 없는 것이라며, 나는 슬픈 얼굴을 하고 그 대신 선 놈을 십자가형에 처해 주리라. 세상의 정직한 자라는 부류에게 실컷 보여 주고 싶은 것이다.

“소원을 들어주마. 그 대리인을 부르거라. 셋째 날 해 지기 전에 돌아오너라. 늦으면 그 대리인을 반드시 죽이리라. 조금 늦게 오거라. 그러면 네 죄를 영원히 용서해 주마.“

“뭐라, 무슨 말씀을.“

“하하. 목숨이 아깝거든 늦게 오너라. 네 마음속은 다 알고 있느니라.“

메로스는 분하여 땅을 구르며 발을 동동 굴렀다.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죽마고우 세리눈티우스는 한밤중에 왕성으로 불려 왔다. 폭군 디오니스의 면전에서 좋은 벗과 좋은 벗은 이 년 만에 상봉했다. 메로스는 벗에게 모든 사정을 이야기했다. 세리눈티우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메로스를 꼭 껴안았다. 벗과 벗 사이에는 그것으로 족했다. 세리눈티우스는 포박되었다. 메로스는 곧바로 출발했다. 초여름, 하늘 가득 별이었다.

메로스는 그 밤 한잠도 자지 않고 십 리 길을 서둘러 또 서둘러, 마을에 도착한 것은 이튿날 오전이었다. 해는 이미 높이 떠올라, 마을 사람들은 들에 나가 일을 시작하고 있었다. 메로스의 열여섯 살 여동생도 오늘은 오라비 대신 양 떼를 돌보고 있었다. 비틀거리며 걸어오는 오라비의 기진맥진한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리고는 성가시리만큼 오라비에게 질문을 퍼부었다.

“아무것도 아니다.“ 메로스는 억지로 웃으려 애썼다. “시내에 볼일을 남겨 두고 왔다. 곧 다시 시내에 가야 한다. 내일 네 혼례를 올리마. 이른 편이 좋겠지.“

여동생은 볼을 붉혔다.

“기쁘냐. 고운 예복도 사 왔다. 자, 이제 가서 마을 사람들에게 알려 오너라. 혼례는 내일이라고.“

메로스는 다시 비틀비틀 걸어, 집으로 돌아가 신들의 제단을 꾸미고 잔칫상을 마련한 뒤, 이윽고 바닥에 쓰러져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깊은 잠에 빠져 버렸다.

눈을 뜬 것은 밤이었다. 메로스는 일어나 곧바로 신랑의 집을 찾았다. 그리고 좀 사정이 있으니 혼례를 내일로 해 달라고 부탁했다. 신랑 목동은 놀라며, 그건 안 된다, 이쪽은 아직 아무 준비도 되어 있지 않다, 포도 철까지 기다려 달라고 했다. 메로스는 기다릴 수 없다, 부디 내일로 해 달라고 더욱 밀어붙여 부탁했다. 신랑 목동도 완강했다. 좀처럼 승낙하지 않았다. 날이 밝을 때까지 논쟁을 이어, 겨우 어떻게든 신랑을 달래고 어르고 설득했다. 혼례는 한낮에 치러졌다. 신랑 신부가 신들에게 서약을 마칠 무렵, 먹구름이 하늘을 덮고 빗방울이 뚝뚝 떨어지더니 이윽고 억수같은 대비가 쏟아졌다. 잔치에 참석한 마을 사람들은 무언가 불길한 기운을 느꼈으나, 그래도 저마다 기분을 북돋워, 좁은 집 안에서 무덥고 후텁지근한 것도 참아 가며 흥겹게 노래 부르고 손뼉을 쳤다. 메로스도 온 얼굴에 기쁨을 띠고 한동안은 왕과의 그 약속조차 잊고 있었다. 잔치는 밤이 깊어갈수록 더욱 흐트러지고 화려해져, 사람들은 바깥의 폭우를 아예 개의치 않게 되었다. 메로스는 평생 이대로 여기에 있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 좋은 사람들과 한평생 살아가고 싶었으나, 지금의 자기 몸은 자기 것이 아니다. 뜻대로 되지 않는 노릇이다. 메로스는 자신에게 채찍질하며, 마침내 출발을 결심했다. 내일 해 질 녘까지는 아직 시간이 넉넉하다. 잠깐 한숨 자고 곧바로 출발하자고 생각했다. 그때쯤이면 비도 잦아들리라. 조금이라도 오래 이 집에 꾸물거리며 머물고 싶었다. 메로스만한 사내에게도 역시 미련이라는 것은 있는 법이다. 오늘 밤 넋을 잃고 기쁨에 취해 있는 듯한 신부에게 다가가,

“축하한다. 나는 지쳐 버렸으니 잠깐 실례하고 좀 자야겠다. 눈을 뜨면 바로 시내로 떠난다. 중한 볼일이 있다. 내가 없어도 이제 너에게는 다정한 남편이 있으니, 결코 외로울 것은 없다. 네 오라비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남을 의심하는 것과, 그리고 거짓말하는 것이다. 너도 그것은 알고 있지. 남편과의 사이에 어떤 비밀도 만들어서는 안 된다. 네게 하고 싶은 말은 그것뿐이다. 네 오라비는 아마 대단한 사내일 테니, 너도 그 자부심을 품고 살거라.“

신부는 꿈결인 듯 고개를 끄덕였다. 메로스는 이어서 신랑의 어깨를 두드리며,

“준비가 없는 건 서로 마찬가지다. 내 집에도 보물이라고는 여동생과 양뿐이다. 그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 전부 주마. 한 가지 더, 메로스의 아우가 된 것을 자랑으로 여겨 다오.“

신랑은 두 손을 비비며 쑥스러워했다. 메로스는 웃으며 마을 사람들에게도 인사하고, 잔칫자리에서 물러나, 양 우리에 기어들어가 죽은 듯이 깊이 잠들었다.

눈을 뜬 것은 이튿날 새벽녘이었다. 메로스는 벌떡 일어나, 아차, 늦잠을 잤나, 아니, 아직 충분하다, 지금 당장 출발하면 약속한 시각까지 넉넉히 댈 수 있다. 오늘이야말로 저 왕에게 사람의 신의가 어디에 있는지 보여 주리라. 그리고 웃으며 십자가 위에 올라가리라. 메로스는 여유롭게 채비를 시작했다. 비도 다소 잦아든 듯했다. 채비가 끝났다. 자, 메로스는 두 팔을 크게 휘두르며 빗속을 화살처럼 내달렸다.

나는 오늘 밤 죽는다. 죽으러 달리는 것이다. 대신 선 벗을 구하려고 달리는 것이다. 왕의 간교한 계략을 깨부수려고 달리는 것이다. 달려야만 한다. 그리하여 나는 죽는다. 젊을 때부터 명예를 지켜라. 잘 있거라, 고향이여. 젊은 메로스에게는 괴로운 일이었다. 몇 번이고 멈춰 설 뻔했다. 에잇, 에잇, 큰 소리 지르며 자신을 꾸짖으며 달렸다. 마을을 나서 들을 가로지르고 숲을 빠져나와, 이웃 마을에 이르렀을 즈음 비도 그치고 해는 높이 떠올라 슬슬 더워지기 시작했다. 메로스는 이마의 땀을 주먹으로 닦으며, 여기까지 왔으면 괜찮다, 이제 고향에 대한 미련은 없다. 여동생 부부는 틀림없이 좋은 부부가 되리라. 나에게는 이제 아무런 걱정거리도 없을 터이다. 곧장 왕성에 가 닿으면 그만이다. 그리 서두를 것도 없다. 느긋이 걷자, 하고 타고난 낙천적 성미를 되찾아, 좋아하는 노래를 흥겹게 부르기 시작했다. 한가로이 걸어 이 리를 가고 삼 리를 가, 어느덧 전체 노정의 절반에 이르렀을 무렵, 뜻밖의 재난이 닥쳤다. 메로스의 발걸음이 딱 멈추었다. 보라, 앞쪽의 강을. 어젯밤 폭우로 산속 수원지가 범람하여 탁류가 도도히 하류로 몰려들어, 맹렬한 기세로 단번에 다리를 부수고, 우르릉 소리를 울리는 격류가 교각을 산산이 날려 버리고 있었다. 그는 망연히 선 채 발이 붙었다. 이리저리 둘러보고, 또 있는 힘껏 소리쳐 불러 보았으나, 매어 놓은 배는 하나도 남지 않고 파도에 쓸려가 자취도 없고, 나루지기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물줄기는 갈수록 불어나 바다처럼 되어 있었다. 메로스는 강가에 쪼그려 앉아 남자답게 울면서 제우스에게 두 손을 들어 간청했다. “아아, 잠재워 주소서, 미쳐 날뛰는 이 물줄기를! 시간은 시시각각 흘러가고 있습니다. 해도 벌써 한낮입니다. 저것이 지기 전에 왕성에 가 닿지 못하면, 저 좋은 벗이 나 때문에 죽습니다.“

탁류는 메로스의 외침을 비웃기라도 하듯 더욱 사납게 날뛰었다. 물결이 물결을 삼키고 감아 올리고 부채질하며, 그러는 사이에도 시간은 한 순간 한 순간 스러져 갔다. 이제 메로스도 각오했다. 헤엄쳐 건너는 수밖에 없다. 아아, 신들이여 지켜보소서! 탁류에도 지지 않을 사랑과 신의의 위대한 힘을 이제야말로 보여 주리라. 메로스는 첨벙 물속으로 뛰어들어, 백 마리 큰 구렁이처럼 뒤틀리고 날뛰는 물결을 상대로 필사의 사투를 벌였다. 온몸의 힘을 팔에 담아, 밀려드는 소용돌이를 이까짓 것이라며 헤치고 또 헤치며, 앞뒤 가리지 않는 사자분신의 사내 모습에 신도 불쌍히 여기셨는지, 마침내 자비를 내려 주셨다. 떠밀려 가면서도 멋지게 맞은편 강가 나무줄기에 매달릴 수 있었던 것이다. 고마운 일이었다. 메로스는 말처럼 온몸을 크게 한 번 부르르 떨고, 곧바로 다시 앞으로 서둘렀다. 한순간도 허투루 쓸 수 없다. 해는 벌써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거칠게 헐떡이며 고갯길을 오르고, 다 오른 순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을 때, 갑자기 눈앞에 한 무리 산적이 뛰어나왔다.

“서라.“

“무슨 짓이냐. 나는 해가 지기 전에 왕성에 가야 한다. 비켜라.“

“아니, 놓아주지 않겠다. 가진 것 전부 놓고 가라.“

“나에게는 목숨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 그 하나뿐인 목숨마저 이제 왕에게 바칠 것이다.“

“바로 그 목숨이 탐나는 것이다.“

“그러면 왕의 명으로 여기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게로구나.“

산적들은 아무 말 없이 일제히 몽둥이를 쳐들었다. 메로스는 홱 몸을 굽히더니, 나는 새처럼 가장 가까운 한 놈에게 덤벼들어 몽둥이를 빼앗고,

“미안하지만 정의를 위해서다!“ 하고 맹렬히 일격, 순식간에 셋을 때려눕히고, 나머지가 주춤하는 틈을 타 후다닥 달려 고개를 내려갔다. 단숨에 고개를 내달렸으나, 과연 피로가 밀려들고 때마침 오후의 작열하는 태양이 정면으로 쏟아지며, 메로스는 몇 번이나 현기증을 느끼고, 이래서는 안 된다며 기운을 다잡으며 비틀비틀 두세 걸음 걷다가, 끝내 무릎이 꺾이며 꺼꾸러졌다. 일어설 수가 없었다. 하늘을 우러러 분한 울음을 터뜨렸다. 아아, 탁류를 헤엄쳐 건너고, 산적 셋을 때려눕히고, 여기까지 뚫고 온 메로스여. 참된 용사 메로스여. 이제 와서 지쳐 쓰러져 움직이지 못하다니 한심하구나. 사랑하는 벗은 너를 믿었기에 이윽고 죽임을 당해야 한다. 너는 희대의 배신자, 꼭 왕의 뜻대로 되는 꼴이로다, 하고 자신을 꾸짖어 보았으나, 온몸이 풀려 이제는 벌레만큼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길가 풀밭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몸이 지치면 정신도 함께 무너지는 법이다. 이제 어찌 되든 상관없다는, 용사답지 못한 자포자기의 심보가 마음 한구석에 똬리를 틀었다. 나는 이토록 힘썼다. 약속을 저버릴 마음은 털끝만큼도 없었다. 신도 지켜보셨으리라, 나는 온 힘을 다해 왔다. 움직일 수 없을 때까지 달려왔다. 나는 배신자가 아니다. 아아, 할 수만 있다면 내 가슴을 갈라 시뻘건 심장을 보여 드리고 싶다. 사랑과 신의의 피만으로 뛰고 있는 이 심장을 보여 주고 싶다. 그러나 나는 이 중대한 때에 진이 빠져 버렸다. 나는 참으로 불행한 사내다. 나는 틀림없이 비웃음을 사리라. 내 일가도 비웃음을 사리라. 나는 벗을 속인 것이다. 중도에 쓰러지는 것은 처음부터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과 매한가지다. 아아, 이젠 어찌 되든 상관없다. 이것이 내게 정해진 운명인지도 모른다. 세리눈티우스여, 용서해 다오. 자네는 늘 나를 믿어 주었다. 나도 자네를 속인 적이 없었다. 우리는 참으로 좋은 벗과 벗이었다. 단 한 번도 어두운 의혹의 구름을 서로의 가슴에 품은 적이 없었다. 지금도 자네는 아무 의심 없이 나를 기다리고 있겠지. 아아, 기다리고 있겠지. 고맙다, 세리눈티우스. 잘도 나를 믿어 주었구나. 그 생각을 하면 견딜 수가 없다. 벗과 벗 사이의 신의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자랑할 만한 보물이니까. 세리눈티우스, 나는 달렸다. 자네를 속일 마음은 털끝만큼도 없었다. 믿어 다오! 나는 서둘러 또 서둘러 여기까지 왔다. 탁류를 돌파했다. 산적의 포위에서도 빠져나와 단숨에 고개를 내달려 왔다. 나이기에 해낼 수 있었다. 아아, 이 이상 나에게 바라지 말아 다오. 내버려 두어 다오. 어찌 되든 좋다. 나는 진 것이다. 꼴불견이다. 비웃어 다오. 왕은 내게 조금 늦게 오라고 귀띔했다. 늦으면 대리인을 죽이고 나를 살려 주겠다고 약속했다. 나는 왕의 비열함을 미워했다. 그러나 이제 와 보니 나는 왕의 말대로 되어 가고 있다. 나는 늦게 가겠지. 왕은 혼자 무릎을 치며 나를 비웃고, 아무 일 없다는 듯 나를 놓아주겠지. 그렇게 되면 나는 죽는 것보다 괴롭다. 나는 영원히 배신자다. 이 땅 위에서 가장 불명예스러운 인간이다. 세리눈티우스여, 나도 죽겠다. 자네와 함께 죽게 해 다오. 자네만은 나를 믿어 줄 것이 틀림없다. 아니, 그것도 나만의 착각인가? 아아, 차라리 이대로 악덕한 자로 살아남아 볼까. 마을에는 내 집이 있다. 양도 있다. 여동생 부부가 설마 나를 마을에서 쫓아내지는 않으리라. 정의니, 신의니, 사랑이니, 생각해 보면 부질없는 것이다. 남을 죽이고 자기가 사는 것. 그것이 인간 세상의 이치가 아니었던가. 아아, 모든 것이 허망하다. 나는 추한 배신자다. 어찌 되든, 마음대로 하라. 어찌할 수 없는 노릇이로다.——사지를 내던지고 꾸벅꾸벅 잠에 빠져 버렸다.

문득 귀에 졸졸,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살며시 고개를 들고 숨을 죽여 귀를 기울였다. 바로 발밑에서 물이 흐르는 듯했다. 비틀비틀 일어나 보니, 바위틈에서 콸콸, 무언가 작게 속삭이듯 맑은 물이 솟아나고 있었다. 그 샘에 빨려 들듯 메로스는 몸을 숙였다. 두 손으로 물을 떠서 한 모금 마셨다. 후, 하고 긴 한숨이 나오며 꿈에서 깨어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걸을 수 있다. 가자. 육신의 피로가 풀리자 가느다란 희망이 태어났다. 의무를 다하겠다는 희망이다. 이 몸을 바쳐 명예를 지키겠다는 희망이다. 석양이 붉은 빛을 나뭇잎에 비추고, 잎도 가지도 타오르듯 빛나고 있었다. 해 지기까지 아직 시간이 있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이가 있다.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조용히 기대하고 있는 이가 있다. 나는 믿음을 받고 있다. 내 목숨 따위는 문제가 아니다. 죽어서 사죄하겠다, 따위의 한가한 소리를 할 때가 아니다. 나는 신뢰에 보답해야 한다. 지금은 오직 그 한 가지뿐이다. 달려라! 메로스.

나는 신뢰받고 있다. 나는 신뢰받고 있다. 아까의 그 악마의 속삭임은 꿈이다. 나쁜 꿈이다. 잊어버려라. 오장육부가 지쳤을 때는 문득 그런 나쁜 꿈을 꾸는 법이다. 메로스, 네 수치가 아니다. 역시 너는 참된 용사다. 다시 일어나 달릴 수 있게 되지 않았느냐. 고마운 일이다! 나는 정의의 사나이로서 죽을 수 있으리라. 아아, 해가 진다. 자꾸자꾸 진다. 기다려 다오, 제우스여. 나는 태어날 때부터 정직한 사내였다. 정직한 사내 그대로 죽게 해 주소서.

길 가는 사람을 밀치고 뛰어넘으며, 메로스는 검은 바람처럼 달렸다. 들판의 주연, 그 한복판을 뚫고 내달려 주연의 사람들을 경악시키고, 개를 걷어차고, 시냇물을 뛰어넘으며, 조금씩 가라앉는 태양보다 열 배나 빨리 달렸다. 한 무리 나그네와 스치듯 지나가는 순간, 불길한 대화가 귀에 들렸다. “이때쯤이면 저 사내도 십자가에 매달렸을 거야.“ 아아, 그 사내, 그 사내를 위해 내가 이토록 달리고 있는 것이다. 그 사내를 죽게 해서는 안 된다. 서둘러라, 메로스. 늦어서는 안 된다. 사랑과 신의의 힘을 이제야말로 보여 주어라. 꼴이 어떻든 상관없다. 메로스는 이제 거의 발가벗은 몸이었다. 숨도 쉴 수 없고, 두 번, 세 번, 입에서 피가 솟구쳤다. 보인다. 저 멀리 작게, 시라쿠사 시내의 탑이 보인다. 탑은 석양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아아, 메로스 님.“ 신음 같은 목소리가 바람과 함께 들렸다.

“누구냐.“ 메로스는 달리면서 물었다.

“필로스트라토스입니다. 당신의 벗 세리눈티우스 님의 제자입니다.“ 그 젊은 석공도 메로스의 뒤를 따라 달리며 외쳤다. “이제 소용없습니다. 헛된 일입니다. 더 이상 달리지 마십시오. 이제 그분을 구하실 수 없습니다.“

“아니, 아직 해는 지지 않았다.“

“바로 지금, 그분이 사형당하려는 참입니다. 아아, 당신은 늦었습니다. 원망스럽습니다. 아주 조금만, 조금이라도 더 일찍 오셨더라면!“

“아니, 아직 해는 지지 않았다.“ 메로스는 가슴이 찢어지는 심정으로 붉고 큰 석양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달리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그만두십시오. 달리는 것을 그만두십시오. 지금은 당신 목숨이 소중합니다. 그분은 당신을 믿고 계셨습니다. 형장에 끌려 나가서도 태연했습니다. 왕이 온갖 조롱을 퍼부어도, 메로스는 옵니다, 하고만 대답하며 굳은 신념을 간직하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달리는 것이다. 신뢰받고 있기에 달리는 것이다. 늦고 안 늦고가 문제가 아니다. 사람의 목숨도 문제가 아니다. 나는 어쩐지, 더 두렵고 거대한 무엇을 위해 달리고 있는 것이다. 따라와라! 필로스트라토스.“

“아아, 당신은 미치셨는가. 그렇다면 실컷 달리시라. 혹시나 늦지 않을 수도 있을 테니. 달리시라.“

두말이 필요하랴. 아직 해는 지지 않았다. 마지막 사력을 다하여 메로스는 달렸다. 메로스의 머릿속은 텅 비어 있었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까닭 모를 거대한 힘에 이끌려 달렸다. 해가 흔들흔들 지평선에 잠기고, 마지막 한 조각 잔광마저 사라지려는 순간, 메로스는 질풍처럼 형장에 돌입했다. 간신히 댔다.

“기다려라. 그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 메로스가 돌아왔다. 약속대로, 지금, 돌아왔다.“ 하고 형장의 군중을 향해 큰 소리로 외치려 했으나, 목이 잠겨 쉰 목소리가 가늘게 나왔을 뿐, 군중은 단 한 사람도 그의 도착을 알아채지 못했다. 이미 십자가 기둥이 높이 세워져, 포박된 세리눈티우스가 서서히 끌어올려지고 있었다. 메로스는 그것을 목격하고 마지막 용기를 짜내어, 아까 탁류를 헤엄쳤듯이 군중을 헤치고 또 헤치며,

“나다, 형리여! 죽어야 할 자는 나다. 메로스다. 그를 인질로 세운 내가 여기 왔다!“ 하고 쉰 목소리로 있는 힘껏 외치며, 마침내 십자가 위로 올라가 끌어올려지는 벗의 두 발에 매달렸다. 군중이 술렁였다. 장하다. 용서하라, 하고 입을 모아 외쳤다. 세리눈티우스의 포박이 풀렸다.

“세리눈티우스.“ 메로스는 눈에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나를 때려 다오. 힘껏 뺨을 때려 다오. 나는 오는 도중에 한 번 나쁜 꿈을 꾸었다. 자네가 만약 나를 때려 주지 않으면 나는 자네를 껴안을 자격조차 없다. 때려 다오.“

세리눈티우스는 모든 것을 알아챈 듯 고개를 끄덕이고, 형장이 떠나갈 듯 큰 소리로 메로스의 오른 뺨을 후려쳤다. 때리고 나서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메로스, 나를 때려 다오. 같은 만큼 큰 소리로 내 뺨을 때려 다오. 나는 이 사흘 동안 단 한 번만, 잠깐 자네를 의심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네를 의심했다. 자네가 나를 때려 주지 않으면 나는 자네를 껴안을 수 없다.“

메로스는 팔에 힘을 실어 세리눈티우스의 뺨을 후려쳤다.

“고맙다, 벗이여.“ 둘이 동시에 말하고, 꼭 껴안고는, 기쁨의 눈물에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군중 사이에서도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폭군 디오니스는 군중 뒤에서 두 사람의 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이윽고 조용히 다가와 얼굴을 붉히며 이렇게 말했다.

“너희의 소원은 이루어졌다. 너희는 이 몸의 마음을 이겼다. 신의란 결코 허망한 망상이 아니었구나. 부디 나도 너희 동무에 넣어 주지 않겠느냐. 부디 이 몸의 청을 받아들여 너희 동무의 한 사람으로 삼아 다오.“

우레 같은 환성이 군중 사이에서 터져 나왔다.

“만세, 왕 만세.“

한 소녀가 진홍빛 망토를 메로스에게 바쳤다. 메로스는 어리둥절했다. 좋은 벗이 눈치를 채고 일러 주었다.

“메로스, 자네 지금 발가벗은 몸이 아닌가. 어서 그 망토를 걸치게나. 이 귀여운 아가씨는, 메로스의 벌거벗은 몸을 모두에게 보이는 것이 견딜 수 없이 부끄러운 거라네.“

용사는 몹시 얼굴을 붉혔다.

(옛 전설과 실러의 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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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of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