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
프롤레타리아 문학론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여기서는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험담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를 옹호하려고 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부르주아 작가로 여겨지는 내가 옹호한다고 하면 도리어, 너 같은 자가 옹호할 필요는 없다는 말을 들을지도 모른다.
프롤레타리아 문학이란 무엇인가. 이에 대해서는 여러 사람이 저마다 다른 견해를 펴고 있으나, 나는 이를 프롤레타리아 문명이 낳은 문학으로서, 부르주아 문명이 낳은 부르주아 문학과 대비되어야 할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현재의 사회에는 프롤레타리아 문명이 존재하지 않는 까닭에, 그 문명에 의하여 태어난 프롤레타리아 문학은 본디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무언가 다른 데에 들어맞는 것이 있는가를 묻는다면, 같은 부르주아 문명이 낳은 문예 중의 하나를 프롤레타리아 문학으로 보는 일일 것이다. 즉 같은 문명 아래에 있더라도 그 작가에 따라 프롤레타리아 문학이 되기도 하고 부르주아 문학이 되기도 한다. 다시 말해 프롤레타리아 작가가 만든 것이 프롤레타리아 문학이다. 그러나 작가가 프롤레타리아인지 아닌지는 좀처럼 따지기 매우 어려워,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작가로 일컬어지는 저 버나드 쇼(Bernard Shaw) 같은 이는 자못 호사스러운 생활을 누리고 있어 일본의 부르주아 작가보다도 더 부르주아적인 생활을 한다. 쇼 외에도 그러한 생활을 하는 프롤레타리아 문학자는 대륙에 많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작품 안에 프롤레타리아의 생활을 그렸는가 그리지 않았는가에 의하여 부르주아 문학과 프롤레타리아 문학이 구별되어야 하는가. 이 또한 의문이다. 쇼의 작품에는 프롤레타리아의 생활이 표면에 드러나지 않는다. 등장인물은 대개 부르주아거나 중산계급이다. 그러나 그의 작품을 두고 프롤레타리아 문학이라 부르는 까닭은, 인물이나 생활이 프롤레타리아의 그것이 아니더라도 배후에 부르주아 생활 따위의 붕괴가 암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 문학과 부르주아 문학의 구별은 작자나 소재에 의하여 정해지는 것이 아니다. 즉 작가의 태도로 결정되는 것이리라. 작가가 프롤레타리아 정신에 반대하는가 찬성하는가에 따라 갈리는 것이다. 그리하여 프롤레타리아 정신에 — 비록 표면에 드러내지 않더라도 — 편드는 작가가 그린 것은 자연히 프롤레타리아 문학이다. 그러나 그렇게 한마디로 검정과 흰색이라고 가르듯 단정 지을 수는 없다. 검정과 흰색 외에도 빨강이나 파랑 같은 색이 있는 것처럼, 프롤레타리아 정신에 반대하지도 편들지도 않는 중간적 위치도 있다. 그리고 이 위치는 부르주아 정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또 문학 가운데서도 하이쿠 같은 것은 비록 작자가 프롤레타리아 정신에 편든다 하더라도, 그 한 구 안에 프롤레타리아 정신을 드높일 수는 없다. 또 음악에서도 군가와 같은 것으로 프롤레타리아 행진곡이라도 만든다면 얼핏 프롤레타리아 음악인 듯 받아들여지지만, 그것은 군가일 뿐 음악의 범위 밖에 있다. 이처럼 예술의 어떤 영역에서는 그 형식과 본질로 인하여 필연적으로 프롤레타리아 정신에 편들지 못하고 그것을 표현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 이 점에서 자유롭다 일컬어지는 소설이나 희곡에서도 연애를 중심으로 한 작품인 동시에 프롤레타리아 정신을 드높이려 하면 무리이듯, 그 예술에 무엇이든 프롤레타리아 정신이 표현되어 있지 않다 하여 그것을 부르주아 예술이라 부르는 것은 과녁을 빗나간 생각이다. 그러므로 분명히 프롤레타리아 정신에 반항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만이 프롤레타리아 문학에 대립하여야 할 것이다.
자, 프롤레타리아 정신에 편든 것에는 대체로 두 갈래가 있다고 본다. 첫째는 선전을 목적으로 한 것이요, 둘째는 문예를 짓는 한편으로 선전하는 것이다. 둘째 부류에는 쇼의 작품 따위가 들 것이다. 그러면 그 선전이란 무엇인가 하면, 많은 사람들은 우선 계급투쟁의 정신을 요지로 삼고, 싸움을 향하여 나아가는 힘이 선전의 내용이자 목적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실제 사회는 매우 복잡하여, 자본가와 프롤레타리아라는 식으로 큰 줄로 또렷이 갈라져 있지 않다. 한 예를 들자면 A라는 과자가게는 B라는 단골과의 관계에서는 자본가와 노동자의 대립에 가깝지만, 그 A라는 과자가게는 C라는 직공(과자를 만드는 직공)과의 관계에서는 도리어 자기가 자본가가 되는 자리에 놓인다. 이처럼 이른바 선전의 대상도 분명치 않으며, 그 선전 때문에 폐를 입는 자본가 아닌 사람도 있다. 그것은 어쨌든, 프롤레타리아 문학은 역시 빼어난 것이어야만 한다. 서툰 것은 안 된다. 왜냐하면 비록 프롤레타리아 문학이 음으로 양으로 선전을 주장하고 있음에서 짐작되는 것처럼, 그들의 목적이 프롤레타리아 천하를 가져오게 하기 위한 하나의 계몽적이고 한때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그리고 장차 문학으로서 훌륭한 프롤레타리아 문학이 나오겠지만 현재로서는 그 발판이다. 그것으로 좋다, 그러니까 서툴어도 좋다는 논리는 서지 않는다고 본다. 또 모든 문예는 죽지 않을 수 없다. 전통은 멸한다. 그러나 과거의 죽어 사라진 문학도 그 당시에는 훌륭히 살아 있었던 것처럼, 장차 좋은 것이 반드시 나오리라 하여 현재의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미흡함을 옳다고 받아들일 수는 없다. 현재에도 좋은 프롤레타리아 문학을 지어야 한다. 마치 나라는 인간이 머지않아 죽기는 하겠지만 현재는 이대로 살아 있는 것과 같다. 매우 식견 높은 사람의 눈으로 보자면 나는 살아 있는 듯 보일 뿐 실은 속은 죽어 있다고 말할지도 모르나, 어쨌든 무어라 하든 나는 이렇게 살아 있는 것처럼, 한 과도기의 산물이며 장차의 발판이나 다름없는 프롤레타리아 문학이라 하더라도, 현재 우리들의 가슴을 치는 힘을 지닌 것이어야 한다. 어느 정도 예술 작품으로서 무게가 있는 것이어야 한다. 사토 하루오 군이 프롤레타리아 문학에는 생생한 실감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 것도 결국 좋은 것을, 빼어난 프롤레타리아 문학을 구하고자 하는 외침에 다름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가 문단에서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외침을 들은 지 서너 해가 되지만, 내가 보는 한 우리들의 가슴을 치는 프롤레타리아 문학이라 할 만한 것은 아직 한 번도 나타난 적이 없는 듯하며, 또한 동시에 프롤레타리아 문학은 그 누구에 의해서도 아직 형체를 갖추기에 이르지 못한 처녀지와 같은 것이라 본다. 오늘날 우리 작가 다수가 이른바 부르주아적인 까닭에, 이제부터 새로운 문학을 세우려는 신인은 마땅히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처녀지를 크게 개척해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좋은 것은 좋은 것이다.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완성을 나는 크게 기대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