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 of 1

Chapter 1

내가 가나자와에 머문 것은 다이쇼 원년(1912) 말부터 다이쇼 삼년(1914) 봄까지였다. 살았던 곳은 노다데라마치의 쇼게쓰지(照月寺, 한자가 다를지도 모른다) 바로 정면, 사이가와(犀川)에 면한 뜰에 큰 소나무가 있는 집이었다. 그 소나무에는, 지금은 세상을 떠난 동생과 함께 어느 날 야단을 맞아 매달린 적이 있다. 줄기는 굵고, 가지는 무척 잘 뻗어 있었으나, 키가 크지 않은 소나무였다. 쇼와 칠년(1932) 여름 가나자와를 찾았을 때 그 소나무를 보고 싶었지만, 지금은 모르는 사람이 빌려 쓰는 집의 뜰에 들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집은 정면에서 본 바로는, 옛 그대로였다. 옆집은 다카지아스타제(소화제 상표) 발명자의 형이나 남동생 댁으로, 아이가 여덟쯤 있어 몹시 시끌벅적했다.

가나자와에 도착한 밤은 추웠다. 역에서 여관까지 가는 인력거 위에서 내쉰 입김이 낯선 거리의 어둠 속에 하얗게 피어오르던 것을 꿈처럼 기억하고 있다. 이튿날은 아버지와 어머니와 동생과 할머니와 함께 가나자와 거리를 둘러보았다. 기세 좋게 흐르던 시냇물만이 그날의 기억으로 남아 있다.

열흘쯤 지나 집이 정해지자 여관을 나와 그쪽으로 옮겼다. 그 집이 노다데라마치의 앞서 말한 집이었다. 저녁 무렵 동생과 둘이서 근처 아이들이 모여 노는 절 마당으로 갔다. 좀처럼 아무도 다가오지 않았는데, 그러던 중 한 아이가 “이름이 뭐냐”고 물었다. 나는 내 이름인 추야(中也)라는 게 몹시 싫었던지라, “이치로(一郎)”라고 작은 소리로 머뭇거린 끝에 대답했다. 그것을 들은 쪽에서는 “이치오”로 잘못 알아듣고는, “이치오래”라며 다른 아이들에게 알렸다. 그러자 모두가 갑자기 마음을 풀고 “이치오, 같이 놀자”며 다가왔다. 그 뒤로 가나자와에 머무는 동안 줄곧 사람들은 나를 “이치오”라고 불렀다.

아침이 올 때마다 옆집의 다카지아스타제 댁 막내에서 셋째 아이가 “이치오…… 이리 와아” 하고 몇 번이고 부르는 것이었다. 눈 오는 아침이면 부르면서 두 손을 입에 갖다 댔다. 부르기와 손 데우기를 한꺼번에 해치우는, 일거양득인 셈이었다.

겨울에는 하오리(羽織)를 벗어 그것을 접어서 “가부토(兜, 투구)”로 만들어 머리에 쓰는 놀이가 있었다. 그 가부토의 접는 법이 세 가지쯤 있었다. 작년 겨울 그것을 만들어 보려 했지만 어느 접는 법도 기억나지 않았다.

절뿐이라 해도 좋을 만한 거리에 살고 있었던 까닭에, 장례식은 실로 많이 보았다. 장례식이 있을 때마다 아이들은 장례식이 치러지는 절에 명함을 들고 가서 과자를 받아 오는 것이었다. 나는 그것이 부러워서 어머니에게 명함을 달라고 했지만 “그건 장례 행렬을 따라가는 사람의 자식만 받을 수 있는 거란다”, 그러니까 명함을 들고 갔다고 해서 과자를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까 싶었지만, 그런데도 장례식이 있을 때마다 다들 명함을 들고 나가서는 과자를 들고 돌아오곤 했다. 지금 와 생각해도 신기한 일을 이야기하자면, 한번은 동네 아이들이 모조리 모여 주신구라(忠臣蔵)를 흉내 내며 줄지어 다닌 적이 있다. 긴 행렬이었다. 그 선두에서는 호라가이(소라고둥)를 불고 있었다. 아이들끼리만 한 일치고는 너무나 일사불란했다. 그건 부모들도 거들었던 것일까? 아니면 그런 풍습이 가나자와에 있었던 것일까?

그 무렵 가나자와에는 아직 전차가 없었다. 가타마차(덜컹마차)가 있었다. “가타마차 왔다 왔다, 타라 타라” 하고 우리는 노래하곤 했다. 자동차가 한 대(언제 봐도 그것은 거뭇한 초록빛으로 칠해져 있었으니 같은 차 한 대였을 것이다), 이따금 “쓰바진(鍔甚)” 앞에 서곤 했다. 그것이 오면 아이들은 죄다 달려가 그 곁으로 갔다. 운전수는 아이들을 야단치느라 정신이 없었다. 야단을 맞으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신메이칸(神明館, 한자가 다를지 모른다)이라는 영화관이 있었다. 그곳 변사의 아들이 유치원 같은 반에 있어서, 이따금 필름 토막을 들고 와 모두를 부럽게 만들었다. “노기 대장 일대기”라는 영화는 지금도 또렷이 기억난다. 그것이 재미있었던 터라, 바로 다음 영화 제목이 걸리자 할머니에게 졸라 데리고 가 달라고 했지만, 그때는 혼간지(本願寺) 고승의 장례식을 찍은 실사 같은 것이라, 줄줄이 줄줄이 끝없이 스님뿐인 행렬이었다. 가끔 개가 나타나 꼬리라도 흔들라치면 안도하곤 했다.

한번은 신메이칸 옆 빈터에 가루와자(곡예) 천막이 섰다. 아버지를 따라간 것이었는데, 아버지가 표를 사고 있는 사이에 불쑥 내 앞에 그 변사의 아들이 나타나, 신메이칸과 곡예 중 어느 쪽이 좋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곡예 쪽은 환한 데다가 악대가 한창 세차게 울리고 있었다. 한편 신메이칸 쪽은 어슴푸레하고, 그 옛날식 영사기가 우울한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있었다. “이쪽이지” 하고 내가 곡예를 가리키자, “아니야, 필름만 따져도 신메이칸 쪽이 백 배는 더 값어치 있어”라는 것이었다.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나는 감탄했다.

유치원은 겐로쿠 공원(兼六公園) 옆의 호쿠리쿠 유치원이었다. 갈 때나 올 때나 사이가와 다리(犀川橋)를 건너야만 했다. 건너서 조금 가다가 오른쪽으로 돈다. 그러면 거기에 자전거 가게가 있었고 큰 개를 키우고 있었다. 그놈이 무서웠다. 눈 녹는 날에는 사이가와 다리를 건너는 것도 무서웠다. 그 물소리는 지금도 또렷이 기억난다.

쇼와 칠년에 갔을 때, 유치원은 곧장 가 보았다. 여름방학이었으므로 덧창은 모두 닫혀 있었다. 그 페인트는 너덜너덜 벗겨져, 건물도 덧창도 손가락으로 누르면 그 자리에서 우지끈 부서질 것만 같았다. 건물 뒤편의 그네가 있는 자리를 보고 싶어 건물 옆을 돌아가려 했지만, 어쨌든 휴가 중이고 아침 다섯 시 반이었으며, 사환의 아내인지 여학부의 사감인지 알 길이 없으나 부엌 쪽 작은 창에서 살짝 얼굴을 내밀고 미심쩍게 이쪽을 보았으므로, 단념하고 슬그머니 발길을 돌렸다. 그 그네도 지금 있는지 어떤지 알 수 없지만, 그네 둘레는 온통 클로버밭이라, 우리는 곧잘 꽃다발을 만들며 놀곤 했다.

아무튼 문에서 건물까지의 화원은 옛 그대로였다. 여름풀이 우거지고, 갓 떠오른 아침 해는 이슬에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겐로쿠 공원에서 놀란 것은 야마토타케루노미코토(大和武尊)의 동상이었다. 그것을 나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아침 하늘에 우뚝 서 있는 것을 발견한 순간, 소스라치게 놀라 퍼뜩 떠올랐다. 그러고 나서 그 동상 아래로 가 쉬었는데, 눈물이 자꾸 나와 어쩔 수가 없었다.

고사카 신사(小坂神社)에 갔다. 경내의 삼나무에, 길이 두 치(약 6센티미터)나 되는 민달팽이가 있었다. 그것도 잊고 있었지만, 이윽고 어렴풋이 떠올릴 수 있을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 뒤편의 높직이 솟은, 붉은 흙이 그대로 노출된 자리는 깎인 모양까지 옛날 모습 그대로라는 것에 어딘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유치원 소풍으로 왔을 때 일찍이 미끄러져 자빠진 자리도 그대로였다.

후쿠스케자(福助座)가 보고 싶었다. 후쿠스케자는 내가 살던 당시 가나자와에서 첫째가는 극장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보지 못하고 말았는데, 어쩌면 이미 사라지고 없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러고 나서 고린보(香林坊)로 가, 나는 곤드레만드레가 되어 버렸다.

●図書カー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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