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 of 1

Chapter 1

소설총론

후타바테이 시메이

인물의 선악을 가리려 하면 내게 극미(極美, 이상)가 없어서는 아니 되리라. 소설의 옳고 그름을 평하려 하면 내게 정의가 없어서는 아니 되리라. 그러한즉 이제 『서생기질(書生気質)』의 비평을 함에 있어서도 미리 주인(主人, 쓰보우치 쇼요)의 소설 본의(本義)를 일러두지 않으면 아니 되리라. 본의라느니 하는 것은 도무지 흥겨운 노릇이 못 되어, 읽는 분께도 지루하고 쓰는 주인에게도 폐가 막심하니, 차라리 없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나, 이 또한 일의 차례인지라 송두리째 생략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하여 되도록 짧게 적어볼 터이니 잠시만 참고 들어 주시기 바라노라.

무릇 형(形, 폼)이 있으면 거기에 의(意, 이데아)가 있느니라. 의는 형을 통하여 드러나고, 형은 의를 통하여 존재한다. 사물의 생존이라는 면에서 말하자면, 의가 있어야 형이요 형이 있어야 의이니, 어느 것을 무겁다 하고 어느 것을 가볍다 하기 어려우리라. 그러나 그 본바탕이라는 면에서 말하자면 의야말로 긴요한 것이다. 의는 안에 있기에 비로소 밖으로 드러나기도 하니, 형이 없어도 오히려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형은 의 없이는 한순간도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의는 자신을 위하여 존재하고 형은 의를 위하여 존재하는 까닭에, 엄밀히 말하자면 형의 의라 할 것이 아니라 의의 형이라 일러야 마땅하리라. 저 미린스키(米リンスキー, 러시아 비평가 벨린스키)가 “세상에는 오직 의장(意匠, 이데아)이 있어 존재한다”고 말한 것도 굳이 허투루 던진 말이라고는 못하리라 여겨진다.

형이라는 것은 물(物)이라. 물이 움직여 사(事)를 낳는다. 그러므로 사도 또한 형이라. 의가 물에 드러난 것을 일컬어 물의 본성이라 한다. 물질의 화합이니라. 그 사에 드러난 것을 일컬어 사의 본성이라 하니, 사의 본성도 물의 본성과 마찬가지로, 이 또한 형을 이루는 까닭이라. 불의 형에 뜨거움의 의가 있다면, 물의 형에도 차가움의 의가 있다. 그러므로 불을 보면 뜨거움을 떠올리고 물을 보면 차가움을 떠올리며, 매화 가지에 지저귀는 꾀꼬리의 소리를 듣자면 마음이 한가로워지고, 가을 잎새 끝에 모여 우는 벌레 소리를 듣자면 애잔함을 자아낸다. 만약 이렇듯 내가 느낀 바를 그 사물에 돌린다면, 어찌 천하에 의 없는 사물이 있으리오.

이렇게 말한다 하여, 굳이 실제로 있는 어떤 사 어떤 물 가운데에 어떤 의가 온전히 드러난다고 여겨서는 안 되리라. 어떤 사물에는 저마다 그 고유의 형상이 갖추어져 있으므로, 어떤 의도 그로 인해 가려지는 바가 있어 명백히 드러나기 어려우니라. 비유컨대 장삼(張三)도 사람이요 이사(李四)도 또한 사람이라. 사람에 둘은 없으니 차별이 있을 까닭은 없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을 보고 내가 느끼는 바에 차별이 있음은 어찌된 일인가. 사람의 의가 모두 장삼에 드러났다고 한다면 저 이사는 무엇이며, 만약 이사에 드러났다고 한다면 저 장삼은 또 무엇인가. 그렇게 보자면 장삼도 이사도 사람은 사람임에 틀림이 없으나, 이는 사람의 한 갈래일 뿐 참된 사람은 아니라. 그러므로 아직 사람의 의를 온전히 드러내기에는 부족하다. 대저 사람의 의는 내 머릿속의 사람에서 드러나는 것이지, 실제 낱낱의 사람에게서 온전히 드러나는 것은 아니리라. 그 까닭을 묻자면, 실제 낱낱의 사람에게는 저마다 본디 갖추어진 고유의 형이 있어, 저 사람의 의도 그로 인해 방해받아 끝내 온전히 드러나기 어려운 까닭이라. 고로 가로되, 형은 우연한 것이라 변치 않는 법이 없으나, 의는 자연한 것이라 만고에 변치 아니한다. 변치 않는 것은 의지할 만하나, 변하기 마련인 것을 어찌 의지하리오.

우연 가운데에서 자연을 천착하고 가지가지 가운데에서 일치를 천착함은, 본성의 요구로서 사람에게 없어서는 안 될 것이라. 천착이라 하여도 두 갈래가 있다. 하나는 지식으로써 깨치는 학문상의 천착이요, 또 하나는 감정으로써 느끼는 미술상의 천착이 그것이다.

지식이란 본디 감정의 변형이며, 흔히 말하는 지식과 감정이란 곧 고참 감정과 신참 감정을 일컫는 것이라느니 하고 풀어 늘어놓자면 번거롭기 짝이 없어, 결국은 갈피 못 잡을 폐의 씨를 뿌리는 셈이 되리라. 그러니 익숙한 “지식” “감정”이라는 말을 그대로 써서 말하자면, 대체로 세상만사 지식만으로도 되지 않으며 또 감정만으로도 결판나지 않는다. “2 곱하기 2는 4”라는 셈은 지식으로써 비로소 수긍할 만하나, 흔히들 말하는 바 “기요모토(清元, 에도 정루리 한 갈래)는 의기(意気, 이키 풍취)가 있고 도키와즈(常磐津)는 깊이가 있다”는 것은 감정으로써가 아니면 알 수 없는 일이라. 지식의 눈으로 보자면, 기요모토든 도키와즈든 무릇 창가(唱歌)라 일컫는 것은 모두 사람의 목소리에 가락을 붙인 것이니, 그 가락에 깊이가 있는 것이 도키와즈가 되고 산뜻한 것이 기요모토가 된다고, 우선 이렇게 말하지 않으면 안 될 노릇이라. 그러나 만약 그 깊이 있는 가락이라느니 산뜻한 가락이라느니 하는 것이 어떠한 것이오, 이 몸은 아직 그것을 맛본 적이 없소이다, 하고 익살꾼이 나서서 묻기라도 한다면, 설령 부루나(富婁那, 부처 십대제자 중 설법 제일)의 변재가 있어 일 년 삼백육십 일을 줄곧 떠벌인다 하여도 이 답은 다 끝내지 못하리라. 그런 부질없는 입씨름으로 시간을 허비하느니, 손쉽게 기요모토와 도키와즈를 들려주어 견주게 함이 나으리라. 그 사람이 귀가 안 들리지만 않다면, 손뼉을 치며 “과연!” 하고 외칠 것은 분명하다. 이는 결국 기요모토와 도키와즈가 직접 듣는 이의 감정 아래에 작용하여, 그 사람의 감동(感動, 인스피레이션)을 불러일으키고, 이리하여 사람의 거듦을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능히 설명하는 까닭이라. 이를 어떤 학자의 말을 빌려 말하자면, 이는 사물의 의가 어우러지는 가운데 드러난 것이라 일러야 하리라.

그러나 “의기”와 “깊이”라 일컫는 의는 천하의 의이지, 한두 가락 창가의 사유물은 아니라. 다만 창가는 천하의 의를 취하여 거기에 소리의 형을 입힘으로써 한 낱의 현상이 되게 한 것일 따름이라. 그러므로 의가 아직 창가에 드러나기 전에는 우주 안의 삼라만상 가운데에 있기는 있으나, 우연한 형에 가려지거나 다른 의와 뒤섞여 있어 손쉬이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렇듯 알기 힘든 무형의 의를 단 하나의 감동(인스피레이션)에 의지하여 느껴 잡아내고, 거기에 창가라는 형을 입혀 보통 사람도 손쉬이 느낄 수 있게 만든 것, 이는 미술의 공이라. 고로 가로되, 미술은 감정으로써 의를 천착하는 것이라.

소설에는 권징(勧善懲悪)과 모사(摸写, 사실 그대로 그려냄) 두 갈래가 있으나, 앞서 논한 바와 같은 까닭에 모사야말로 소설의 참된 면목이라. 그런데 오늘날의 작자가 무지몽매하여 옛사람의 함부로 던진 말에 그릇 이끌려, 치질을 다스리기라도 하듯이 무턱대고 권징, 권징 하는 것은 어찌된 일인가 하고, 근래 두엇 학자 선생들이 이를 갈며 답답해하시는 것은 지당하다 여겨진다. 주인의 미술 정의를 넓혀 이를 소설에 미치게 하더라도 같은 이치라. 본디 소설은 부세(浮世)에 드러난 가지가지 잡다한 현상(형) 가운데에서 그 자연한 정태(의)를 직접 느껴 잡아내는 것이니, 그 느낀 바를 남에게 전하고자 하여도 직접이 아니면 통하지 않는다. 직접이 되려면 모사가 아니고서는 통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모사가 소설의 참된 면목이라는 것은 자명하다. 저 권징소설이라는 것은 어떠한 것인가. 주실주의(主実主義, 리얼리즘)를 천히 여기고 이신교(二神教, 듀얼리즘)를 받들어, 선이 악을 이긴다는 어림짐작을 잣대로 삼아 세상의 현상을 풀이하려 든다. 이는 교법(教法)의 등불잡이일 따름이요, 소설을 가장한 설교일 따름이라. 어찌 이를 일러 참된 소설이라 할 수 있으리오. 그렇다고는 하나, 모사 모사 하기만 하고 어떠한 것이라고 못 박아 두지 않는다면, 이쪽에도 어딘가 미덥지 못한 데가 있다 하리라. 그래서 시험 삼아 그 대략을 펴 보자면, 모사라 일컫는 것은 실상을 빌려 허상을 그려내는 것이라. 앞서도 적은 바와 같이, 실상계의 모든 현상에는 자연한 의가 없는 것은 아니나, 저 우연한 형에 가려져 분명히는 알기 어려운 것이라. 소설에 모사된 현상도 물론 우연한 것임에 틀림은 없으나, 말씨의 운용과 각색의 솜씨로써 이 우연한 형 가운데에 명백히 자연한 의를 그려내는 것, 이것이 모사 소설이 목적하는 바이라. 본디 문장은 살아 움직이게 함을 요한다. 문장이 살아 움직이지 않으면 의가 있다 한들 명백하기 어렵다. 각색은 의에 맞아떨어지게 함을 요한다. 맞아떨어지지 않으면 의가 충분히 펼쳐지지 못한다. 의는 실상계의 모든 현상에 있어서는 자연의 법칙을 좇아 펼쳐지는 것이지만, 소설의 현상 가운데에서는 그 펼침도 왕왕 논리에 맞지 않는 법이라. 이를테면 “사무친 정은 능히 사람을 죽인다”를 의로 삼은 소설이 있다 치고, 그 본존(本尊)인 남녀 두 사람이 모두 바람기 있는 성품으로, “스에노마쓰야마, 파도 넘지 않으리”의 맹세도 죄다 입에 발린 거짓말이요 한때의 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할진대, 끝에 이르러 별다른 곡절도 없이 다만 부친의 승낙을 얻지 못함을 이유로 손에 손을 잡고 깊은 못에 몸을 던진다는 대목에 다다르면, 이는 어쩐지 객기로 목숨을 던지려는 듯이 들려 이야기의 결이 풀리지 않으니, 이러한 부류는 이른바 의의 펼침이 논리에 맞지 않는 것이라, 의가 있다 한들 없는 것과 매한가지라. 이를 일러 졸작 중의 졸작이라 하리라.

대저 한마디로 모사라 한들 어찌 손쉬운 일이리오. 왕희지의 글씨를 어설픈 서가가 흉내 낸다 한들 그 필의(筆意)를 잡아내기는 어렵고, 가나오카(金岡, 헤이안 화가 고세노 가나오카)의 그림을 푼돈 화가가 그대로 베껴 그린다 한들 그 정신을 옮기기는 어렵다. 소설을 엮음도 같은 일이라. 부세의 형을 그려내는 것조차 손쉬운 일이 아닌데, 하물며 그 의를 그려냄에 있어서랴. 부세의 형만을 그리고 그 의를 그리지 못하는 것은 서투른 자의 작품이라. 그려내어 의와 형을 모두 갖춘 것은 능란한 자의 작품이라. 의와 형을 모두 갖추고 살아 움직이는 듯한 것은 명인의 작품이라. 대저 의의 있고 없음과 그 펼침의 솜씨와 서툼을 살피고, 이를 논리에 비추어 보고 사실에 견주어 보아, 이로써 소설의 값어치를 매기는 일, 이것이 비평가가 마땅히 힘써야 할 바이라.

(메이지 19년 4월 『중앙학술잡지』)

Chapter 1 of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