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 of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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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씨전(朴氏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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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씨부인전>이라고도 불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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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씨전

우리 동방 선조대왕 즉위 초에 한양 성 안에 한 재상이 있었으되, 성은 이씨요 이름은 득춘이라. 어려서부터 학문에 힘썼으니 열 살이 되기 전에 문필과 재덕이 온 나라에 이름을 떨치고, 사람 보는 눈이 남달리 밝아 소년에 과거에 올라 벼슬이 일품에 이르렀더라. 나라를 충성으로 섬기고 만백성을 인의로 가르치니, 위엄과 명망이 사해에 진동하더라.

총명하고 영특하여 얼굴이 준수하고 풍채가 늠름하여 두목지에 비할 만하니, 이 같은 인재는 우리 동방의 명현이라. 더하여 술법이 유명하고 겸하여 남다른 용력(겸인지용)을 갖추었으니, 진실로 일대 영웅이라. 일찍이 슬하에 옥동자 하나를 두었는데,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아는 총명함에 지각이 남다르고 골격이 준수하니, 상공이 크게 사랑하여 이름을 시백이라 하였더라.

이때 상공이 바둑 두기와 옥저 불기를 즐기되 겨룰 사람이 없어, 조용하고 한적한 때에 밝은 달을 마주하여 옥저를 불면 조화가 무궁하여 화단에 피어 있던 꽃이 절로 떨어지니, 이 같은 재주는 진실로 온 나라에 으뜸이라. 상공이 바둑과 옥저 부는 데 적수를 만나지 못하여 근심하더니, 어느 날 어떤 사람이 낡은 옷과 해진 관을 쓴 초라한 모습으로 사랑 앞에 찾아와 유숙하기를 청하거늘, 자세히 보니 비록 의관은 남루하나 위인이 범인과 다른지라. 상공의 밝은 눈으로 이 같은 도인을 알아보지 못하리오. 또한 속으로 생각하되, 저 사람이 본래 천한 사람이라면 어찌 감히 마루에 오를 수 있으리오, 분명 범인이 아니라 하고 말하기를

“어떠한 귀한 손님이신지 모르겠거니와 누추한 곳에 왕림하셨나이까.”

하며 마루에 오르기를 청하니, 그 사람이 마루에 올라 자리를 정한 후에 서로 성명을 통할새 그 사람이 이르되

“저는 가진 것 없는 나그네로 명산대찰을 찾아다니며 미륵을 벗 삼아 세월을 보내더니, 이제는 나이가 많아 강산을 두루 유람하다가 한갓 금강산에 머물러 죽기만 바라고 있사오며, 성은 박이요 세상 사람들이 처사라 부르나이다.”

하거늘 상공이 그 언어가 정직함을 듣고 과연 선인인 줄 알고, 그제야 옷깃을 바로 하고 단정히 앉아 공손히 대답하기를

“저러하신 귀한 분이 어찌하여 이 누추한 곳에 왕림하셨나이까.”

처사 대답하기를

“나는 산중에 처하여 바둑 두기와 옥저 불기만 좋아하더니, 바람결에 들으니 상공께서도 저와 같이 바둑과 옥저를 좋아하신다 하기에 구경하고자 하여 왔나이다.”

하니 상공이 들으매 적수를 만나지 못해 한탄하던 차에 반가움을 이기지 못하더라.

“옥저 부는 것이야 어찌 선인의 곡조를 따라 화답하오리까. 그러나 변변찮은 퉁소라도 존객의 가르침을 바랄까 하와 주인이 먼저 부나이다.” 하고 한 곡조를 부니, 맑고 고운 소리 구름 밖으로 솟아나는 듯한지라. 그 소리 그치매 창 앞의 모란꽃 송이가 줄줄이 떨어져 화단 위에 가득하거늘, 처사 그 거동을 보고 칭찬하다가 이르되

“주인의 맑고 고운 곡조만 듣고 객이 어찌 화답하지 아니하오면 인사가 아니로소이다.”

하고 그 옥저를 불어 화답하니, 그 소리 가장 맑고 청아하여 푸른 하늘을 나는 듯, 청학 백학이 그 소리 듣고 춤도 추며 선동도 내려와 앞에서 노니는 듯하더니, 그 소리 그치매 창 앞에 떨어졌던 모란꽃 송이가 다시 피어 난만하더라. 상공이 그 거동을 보고 크게 칭찬하여 이르기를

“저 같은 변변찮은 재주라도 세상 사람들이 보고 칭찬 아니하는 이 없으며, 제 퉁소는 불어서 꽃 송이만 떨어지더니 선인의 퉁소 소리는 봉황이 날아들고 낙화가 다시 만발하니, 옛날 장자방의 곡조라도 이에 비하지 못하겠나이다.” 하고 이로부터 서로 주인과 손님이 되어 바둑과 퉁소로 화답하며 소일하더니, 어느 날 처사 상공께 청하여 이르기를

“들으니 상공께서 귀한 아드님을 두었다 하니 뵙기를 청하나이다.”

상공이 시백을 부르시니 명을 받들고 나오거늘, 처사 자세히 보니 만고의 영웅이요 일대 호걸이라. 또한 조선의 앞날을 생각하니 후에 출장하여 입신하고 일국 재상이 될 기상이라. 마음속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상공께 청하여 이르기를

“저가 상공께 찾아온 것은 다름이 아니오라, 한 말씀을 부탁하고자 함이나이다.”

공이 대답하기를

“무슨 말씀을 부탁하고자 하시나이까.”

처사 대답하기를

“저에게 딸아이 하나가 있사오나 나이 열여섯이 되도록 가연을 정하지 못하였기에, 사방을 떠돌며 구하던 중 다행히 존문에 이르러 귀한 아드님을 보오니 마음에 합당한지라. 딸아이는 변변하지 못하오나 존문에서 받아주실 만하오니, 외람하오나 혼인을 정하심이 어떠하오이까.”

상공이 생각하니, 처사의 도덕이 저러할진대 그 자식이야 어찌 민첩하지 아니하리오 하고 대답하기를

“객은 선인이요 나는 세속 간에 있는 인물이라, 선인과 어찌 혼인하리오.”

하니 처사 대답하기를

“상공은 일국 일품이요 나는 미천한 인물이라. 귀댁에 의혼함이 극히 불가하오나, 버리지 아니하신다면 한이 없을 듯하나이다.”

상공이 대하여 즉시 혼인을 허락하니, 처사 또한 기뻐하며 즉시 혼인 날을 가리니 삼월 보름 무렵이라. 혼사를 완정한 후에 주찬을 내어 서로 권하며, 맑은 바람 부는 누각에서 바둑을 두고 밝은 달 아래 옥저를 불며 소일하더니, 어느 날 처사 작별을 고하며 이별을 아뢰거늘 못내 섭섭하나 부득이 서로 헤어지고 처사는 산중으로 돌아갔더라.

이때에 상공이 일족을 모아 박처사의 딸과 혼인을 정한 말씀을 이야기하시니, 부인과 일족이 의심하여 이르기를, 혼인은 인간대사요 인륜지중한지라 어찌 재상가에서 그 사람의 근본도 모르고 경솔히 허락하셨나이까. 상공이 웃으며 이르기를, 내 박처사의 딸이 재덕이 금세에 유명함을 알고 허락하였으니 일족은 부질없이 시비하지 말라 하더라.

이때에 혼인날이 당하매 혼구를 차려 노복 등을 거느리고 길을 떠날새, 상공은 후객이 되어 시백을 데리고 시백은 금안준마에 조복을 갖추어 길을 떠나 금강산을 찾아가는 거동은, 청춘호걸의 풍채도 좋거니와 행장도 찬란하다. 이 같은 경사에 일족이 비웃으며 조정의 의논이 분분하더라.

여러 날 만에 산에 들어가니 풍경도 좋거니와 때도 마침 봄이라, 좌우 산천을 돌아보니 각색 화초 만발한데 나비는 펄펄 날아들어 꽃을 보고 춤도 추며, 버들가지 늘어진 곳에 황금 같은 꾀꼬리 소리 더욱 좋다. 풍경을 구경하며 점점 들어가니 인적은 고요하고 갈 길을 알 수 없더라. 하릴없이 주막을 찾아 자고 이튿날 다시 출발하여 산골로 들어가니 인적이 없는지라. 깎아지른 절벽은 중천에 솟아 있고 맑은 물은 이 골 저 골로 흘러 있고, 뻐꾸기는 슬피 울어 허랑한 사람을 비웃는 듯 두견새는 슬피 울어 마음 있는 사람을 더욱 괴롭히는지라. 상공이 자신의 일을 생각하니 도리어 허탄하여 후회막급이로다. 또한 날이 저물어 산중에 방황하더니 새들은 숲으로 들고 달이 동쪽 고개에 떠오르는지라. 하릴없이 또 주막을 찾아 자고, 그 이튿날 산골로 들어가니 깊은 산 구석진 골짜기에 길은 끊어지고 사방에 인기척 없더라. 기진맥진하고 배고프고 목마르기까지 하는지라. 바위 위에 자리를 정하고 늙은 소나무를 의지하여 탄식하기를, 내 일을 생각하니 남양 초당 풍설 속의 와룡선생을 찾아온 듯, 수양산 깊은 곳에 백이숙제를 찾아온 듯 허탄하기 짝이 없다 하더니, 홀연 산골에서 소리 나며 나무꾼 수십 인이 내려오거늘 상공이 반겨 이르기를

“저기 가는 저 아이야, 내 말을 잠깐 들어보소. 이곳이 어느 곳이며 주막은 어디 있는가. 길 잃은 나그네의 아득한 마음을 인도함이 어떠하냐.”

나무꾼이 대답하기를

“이 산은 금강산이요. 이 길은 박처사 살던 골로 통하는 길이옵고, 우리는 지금 박처사 살던 골에서 오는 이들이나이다.”

공이 묻기를

“지금 처사가 댁에 계시던가.”

나무꾼이 대답하기를

“박처사 있다는 말은 옛 노인이 일러 계시기를, 수백 년 전에 어떤 사람이 나무를 심어 보금자리를 만들고자 씨를 심으며 별호를 박처사라 하더이다.”

하고 다시 대답하기를

“어디로 가셨는지 알지 못하거니와, 지금 살고 계신다는 말은 금시초문이로소이다.”

또 묻기를

“처사가 그곳에 사신 지가 지금 몇 해나 되었느냐.”

나무꾼이 미소하며 대답하기를

“게서 사신 지가 사백 년이라 하더이다.”

하며 다시는 물어도 대답하지 아니하고 가거늘, 상공이 이 말을 듣고 더욱 막막하여 하늘을 우러러 크게 웃으며 탄식하기를

“세상에 허탄한 일도 많도다.”

탄식을 마지 아니하며 이르기를

“이제는 어찌할 도리가 없구나.”

하릴없어 노복을 데리고 주막으로 돌아와 머물 새, 시백이 또한 부친을 위로하여 이르기를

“옛날에 한무제도 신선을 구하다가 끝내 구하지 못하고 봄바람에 후회막급하였사오니, 아무리 하여도 소용없사오니 도리어 돌아감만 같지 못하나이다.”

하니 상공이 웃으며 이르기를

“이왕지사라 그냥 돌아가도 남의 웃음을 면치 못할 것이요, 내일은 전안일이니 부득이 내일만 더 찾아보리라.”

하고 이튿날 노복을 데리고 다시 길을 재촉하여 반나절이 되도록 산중을 왕래하며 찾더니, 그날 사시 말 오시 초에 한 사람이 갈건야복으로 죽장을 짚고 짚신을 신고 흰 부채를 들고 산골에서 나오는 모습이 진실로 정직한 도인이로다. 눈을 씻고 다시 보니 박처사가 분명하다. 처사 상공을 보고 반겨 이르기를

“저 같은 사람 때문에 여러 날 깊은 산중에서 심신을 고생하셨으니 극히 무안하나이다.”

상공이 웃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박처사와 함께 산중으로 들어가니, 이때는 마침 봄 삼월이라 각색 화초 만발한데 꽃향기 사방에 가득하고 나비는 펄펄 날아 꽃을 보고 반기는 듯, 늙은 소나무는 늘어지고 버들은 봄빛을 띠었는데 황금 같은 꾀꼬리는 버들을 찬탄하는 듯 오락가락 소리 지어 허탄한 사람을 조롱하는구나. 상공이 생각하되 세속을 떠나 선경에 오른 것 같은지라.

처사 상공을 대하여 이르기를

“저는 본래 가난하여 정갈한 객실이 없사오니 잠깐 바위 위에 앉으시옵소서.” 하고 낙락장송 밑에 바위를 깨끗이 쓸고 자리를 마련하여 주거늘, 상공이 바위 위에 앉아 수십 일 서로 만나지 못하여 신고하던 일을 이야기하며 서로 담화하더니 처사 말씀하되

“이같이 궁벽한 산중에 예절을 다 갖출 수 없사오니 황공하기 그지없거니와, 전안 예식을 간략히 하나이다.” 하고 예식을 차릴새, 상공은 시백을 데리고 절하는 자리에 나와 두 사람이 전안을 마친 후에 처사 두 사람을 인도하여 내당으로 들어가고, 상공은 바위 위로 나와 앉더니 이윽고 처사 나와 솔꽃 술을 내오며 이르되, 산중에 별미가 없사오니 허물치 마옵소서. 두세 잔을 권한 후에 노복들에게도 차례로 먹이고 상공께 다시 권하니 술이 독하여 좋더니, 한 시간쯤 후에 깨어 보니 날이 이미 밝은지라. 처사를 청하여, 어젯밤에 마신 술이 진실로 인간 술이 아니요 과연 선인의 술이로다.

처사 웃으며 이르기를

“솔꽃 술 한 잔에 그대 취하여 계셨나이까.”

상공이 대답하기를

“선인의 아름다운 술 한 잔에 진실로 과하나이다.”

하며 서로 담화하다가 이날 출발하기를 청하니 처사 이르되

“이 산중은 길이 험하오니 이번 길에 딸아이를 아주 데리고 가소서.” 하거늘 상공이 흔쾌히

“그리하겠나이다.”

하고 길을 차릴새, 신부의 얼굴을 나삼으로 가려 온몸을 덮어 보지 못하게 하고 상공에게 이르기를

“데리고 가신 후에 다시 만나사이다.”

하거늘 상공이 작별하고 신부를 데리고 동구를 나오니 해가 서산에 지거늘, 주막을 찾아 들어가니 상공과 신부와 시백, 셋이 한방에 드는데 신부의 얼굴을 가렸던 나삼을 벗기거늘, 그제야 비로소 상공과 시백이 신부의 얼굴을 보니, 모양은 고사하고 얼굴이 검고 추한 데다 때는 줄줄이 맺히고, 눈은 달팽이 눈 같고 코는 깊은 산 험한 바위 같고 이마는 너무 벗겨져 남극노인 같고, 귀는 여덟 치나 되고 한 팔은 늘어지고 한 다리는 짧아 뒤뚱거리니, 차마 보지 못할레라.

상공과 시백이 한 번 보매 정신이 아찔하여 대면할 마음이 없어, 그렁저렁 밤을 새워 길을 재촉하여 경성에 도착하여 본가에 들어가니 시댁 어른과 일가 부인들이 신부 구경하러 모여드는지라. 신부 절하는 자리에서 내려 협방으로 들어가 얼굴 가린 나삼을 벗어 놓으니 일대 장관 귀물이라. 여러 부인이 보고 이런 구경은 처음이라 하며 서로 얼굴을 맞대고 비아냥거림이 무수하더라.

이날 경사는 고사하고 도리어 걱정을 당한 집 같더라. 일가가 다 경황한 중에 공의 부인이 상공을 원망하여 이르기를

“경성에도 좋은 가문의 얌전한 아가씨가 많건만 구태여 산중까지 들어가서 저토록 흉하고 험한 것을 데려다가 남의 웃음거리가 되게 하시나이까.”

상공이 대답하여 이르기를 “아무리 절세가인을 골라 며느리를 삼아도 덕행이 없으면 패가망신하여 가문을 보전치 못할 것이요, 비록 추한 인물이라도 덕행이 있으면 가문이 흥하여 복록을 누리나니, 부인은 무슨 말씀을 그토록 경솔히 하시나오. 며느리의 얼굴이 비록 추하오나 임사에 덕행이 있으리다. 천우신조하여 저러한 며느리를 얻었거늘 부인은 사람 볼 줄 모르는 말씀을 하시나이까. 다시는 말씀을 내지 마옵소서.” 부인이 오히려 부끄러움을 머금고 대답하기를

“자식의 배필 여부는 우리 집 흥망에 달린지라, 무엇을 근심하리오.”

상공이 또 이르되

“그럴사 부인은 조심하여 박대하지 마옵소서. 부인이 더욱 싫어하면 자식이 어찌 화락하오리까.” 경계를 마지 아니하더라.

시백이 박씨의 추한 인물을 보고 일절 미워하니 비복들도 같이 박대하더라. 박씨는 한갓 협방에 있어 잠자기만 일삼으니 시백이 더욱 증오하여 쫓아 보내고자 하되 부친을 두려워 마음대로 못하더니, 상공이 그 낌새를 알고 시백을 불러 꾸짖어 이르기를

“사람의 덕행을 모르고 미색만 취하면 필경 패가망신이 되리라. 내 들으니 내외간 화락하지 못한다 하니 어찌 수신제가를 하잔 말가. 옛날 제갈량의 아내 황부인은 비록 인물이 추하나 재덕이 겸비하기로 공명이 그 부인을 박색이라 버렸던들 풍운변화를 누구에게 배워 영웅호걸이 되었으리오. 네 아내도 비록 추하나 재덕이 있고 설월 같은 절행과 비범한 재주 있을 것이니, 부대 만홀히 알지 말며, 부모가 사랑하는 사람을 박대하면 이는 부모를 모르는 것이니 부대 각별 조심하여 예법을 어기지 말라.” 하신대 시백이 듣기를 마친 후에 머리를 숙이고 사죄하여 이르기를

“소자 사람을 모르고 인륜을 손상하였사오니 죄가 만사무석이로소이다. 다시야 어찌 교훈을 저버리리이까.” 하니 상공이 이르기를

“네가 그리 안다면 오늘부터 동방화락을 이루게 하라.”

하시니 시백이 명을 받들고 따를 길이 없어, 없던 정도 있는 체하고 마음을 억지로 다잡아 내당에 들어가 박씨를 대면하니, 부친의 훈계는 마음에 넘어서기 어렵고 미운 마음은 솟구치는지라. 등잔 뒤에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밤을 걱정으로 지내더니 이윽고 새벽닭이 울거늘 즉시 나와 부모 전에 문안하니, 상공이야 어찌 이런 줄 알리오.

상공이 또한 비복들을 꾸짖어 이르기를

“내 들으니 너희들이 어찌 상전을 몰라보고 멸시한다 하니, 만일 다시 그런 말이 들리면 너희들을 각별 중하게 처벌할 것이니 알아 거행하라.” 하시니 비복들이 황공히 사죄하더라.

이때에 부인이 박씨를 미워하여 계화를 불러 이르기를

“가운이 불행하여 허다한 사람 중에 저런 것을 며느리로 삼겨서, 저런 중에 게으르고 잠만 자고 여공재질은 아무것도 없는지라. 밥만 배가 터지도록 먹고 하는 일이 무슨 일이 있느냐. 매사가 저러하니 어디에 쓰리오. 조석에 밥도 조금씩 주라.”

하며 무수한 험담을 잡아내어 구박이 자심하니, 상하 친척도 다 화목하지 못하더라.

박씨 여러 사람의 구박을 냉소하고 있더니, 어느 날 시비 계화를 불러 이르기를

“대감께 여쭐 말씀이 있으니 외당에 나아가 연유를 여쭈어라.”

하니 계화 명을 받들고 즉시 나아가 그 말씀을 상공께 고하니

상공이 바로 들어가시니 박씨 흔연히 영접한 후에 한숨을 지으며 상공께 여쭙기를

“박복한 인물이 얼굴과 모양이 추하여 부모님 전에 혼정신성을 남과 같이 못하오니 불효 막대하옵거니와, 금슬의 즐거움도 없고 가권과 화목하지 못하오니 가위 쓸모없는 몸이라. 없는 자식으로 아시고 후원에 초당 두어 칸을 지어 주시면 홀로 거처하여 심회를 달랠까 하나이다.”

말을 마치며 서글피 눈물 흘리니 상공이 그 경상을 보고 어찌 가엾지 아니하리오.

박씨를 대하여 눈물 머금고 이르기를

“자식이 불초하여 내 교훈을 듣지 아니하고 이같이 박대하니, 이는 다 내가 부덕한 탓이로다. 그러나 다시 경계할 것이니 안심하라.”

하신대 박씨 그 말씀을 듣고 감격하여 여쭙기를

“대감의 말씀은 황공무지하오나 이는 도시 소부의 용모가 추하고 덕행이 없는 탓이오니 뉘를 원망하오리까. 과도히 염려 마옵시고 소원대로 후원에 초옥 두어 칸을 지어 주실까 바라나이다.”

상공이 이르되

“내 좇아 하리라.”

하시고 외당에 나와 시백을 불러 꾸짖어 이르기를

“네 일찍 선인인 줄 모르고 끝내 내 말을 거역하니, 그러하면 어디에 쓰이며 효도를 모르고 충성이 어찌 나겠느냐. 이리 하고 수신제가를 어찌 하리오. 부명을 거역하고 그 마음을 고치지 아니하면 며느리와의 불효는 고사하고 아내가 어찌 원한을 품지 아니하리오. 여자는 편한 성품이라 후일을 모를 뿐더러 필부의 원한에 오월에도 서리가 내린다 하였으니, 그러하고 어찌 공명을 바라며 독수공방에 홀로 있어 한이 지극하면 목숨을 어찌할지 세상사를 헤아리지 못할지라. 만일 불행한 날이면 첫째는 조정에 용납지 못하고 둘째는 가문에 큰 재앙이니 어찌 근심이 없으리오. 너는 어떠한 사람으로 미색만 생각하고 덕행을 모르느냐.”

시백이 엎드려 사죄하여 이르기를

“소자 불효하여 부친의 명령을 거역하고 내외간 금슬지락을 끊었사오니 죄사무석이로소이다. 차후야 어찌 또 거역하오리까.”

하고 나와 생각하되, 다시는 마음을 다잡아 부친의 명령을 순종하리라 하고 이날 박씨 방에 들어가니 눈이 절로 감기고 얼굴을 보면 기절할레라. 아무리 마음을 고치자 한들 그 얼굴을 보면 심장이 온전하리오. 겨우 새벽닭 울기를 기다려 나오는지라. 어느 날 상공이 하릴없어 후원에 초당을 짓고 시비 계화로 하여금 함께 거처하게 하니, 박씨의 가련한 경상은 차마 보지 못할레라.

이때에 전하께옵서 상공의 총명함을 사랑하사 일품 벼슬을 더하여 전교하시되, 내일로 입시하라 하시니 상공이 근심하여 이르기를

“조복이 낡은 것은 빛이 바래고 새것은 아직 준비하지 못하였는데 내일로 입시하라 하시니, 어찌 하룻밤 안에 조복을 준비하리오.”

하시며 걱정을 마지 아니하시니 부인이 이르되

“사세가 급하오니 바느질 잘하는 사람을 구하여 아무쪼록 지어보사이다.”

하며 의논이 분분하더니, 이때 시비 계화 이 말을 듣고 초당에 들어가 박씨께 상공의 벼슬이 높아진 말과 조복으로 걱정하여 의논이 분분하던 말을 고하니 박씨 듣고 계화에게 이르기를

“일이 급하거든 조복 지을 감을 가져오라.”

하니 계화 이 말을 듣고 더욱 신기하게 여겨 박씨의 얼굴을 다시 바라보고 나와 상공께 여쭈니, 상공이 듣고 크게 기뻐하여 이르기를

“내 며느리는 선인의 여자라 필연 소원할 재주 있으리라.”

하고 조복감을 급히 가져다 주라 하시니, 상공의 부인과 여러 부인이 냉소하여 이르기를

“제 모양이 그러하고 무슨 재주 있으리오. 감만 버릴 것이니 보내지 말음이 옳다.”

하고 공론이 분분하거늘 상공이 대답하여 이르기를

“속담에 이르되 형산백옥이 진흙 속에 묻혀도 안목이 없으면 알아보는 이 없다 하였으니, 부인은 남의 속마음을 그토록 명백히 알고 경솔히 말하시나이까. 박씨는 본래 녹록한 여자가 아니니 급히 보내소서.”

하거늘 부인이 대감의 말씀을 거역하지 못하여 들여 보내고 주야 걱정으로 지내더니, 이때에 옷감을 가지고 들어가 박씨께 드리니 박씨 이르기를

“이 옷은 혼자 지을 옷이 아니니 도울 사람을 청하여오라.”

하니 계화 이 말씀을 또 상공께 고하니 상공이 즉시 들여 보내더라.

박씨 등촉을 밝히고 조복을 지을새, 월궁항아 계화를 가리는 듯 열 사람이 할 일을 혼자 하룻밤 안에 하였으되, 앞에는 봉황이요 뒤에는 청학을 수로 놓았는데 봉황은 춤을 추고 청학은 나는 듯하되, 함께 바느질하던 사람들이 박씨의 솜씨를 보고 탄복하여 이르기를

“우리는 따르지 못하겠도다.” 하더라. 박씨 즉시 계화를 명하여 조복을 상공께 올리니 상공이 칭찬하기를

“이는 선인의 솜씨요 인간 사람의 재주는 아니라.” 하시니 그제야 부인도 보고 크게 탄복하더라.

이튿날 상공이 조복을 입고 궐내에 들어가 숙배하니, 임금께서 공의 조복을 한참 바라보시고 가까이 청하여 물으시기를

“경의 조복을 누가 지었느냐.”

공이 아뢰기를

“신의 며느리가 지었나이다.”

상이 또 이르시되

“그러하면 저러한 며느리를 두고 굶주리게 하며 독수공방하게 함은 무슨 일인고.”

공이 크게 놀라 엎드려 아뢰기를

“황공하오나 전하께옵서 이토록 밝게 아시나이까.”

상이 이르시되

“경의 조복을 보니 뒤에 붙인 봉황은 짝을 잃고 우는 형상이 분명하기로 짐작하고 묻노라.” 하신대 공이 사례하며 이르기를

“신이 부덕한 탓이로소이다.”

상이 그 실상을 자세히 물으시니 공이 아뢰기를

“신의 며느리 얼굴이 추하기로 불초한 자식이 아비 교훈을 듣지 아니하고 서로 화락하지 못함이로소이다.”

상이 또 물으시기를

“독수공방은 그러하거니와 매일 굶주려 눈물로 세월을 보내기는 무슨 일이오.”

하시니 공이 황공하기 그지없어 식은땀 흘리며 주저하다가 아뢰기를

“신이 외당에 거처하매 내정 일은 자세히 알지 못하오나 신이 부덕한 탓이오니 황공무지로소이다.”

상이 또 이르시되

“경의 며느리가 얼굴은 곱지 못하나 영웅의 재주가 있는가 싶으니 부대 박대하지 말라.” 하시며 전교하시되

“매일 백미 서 말씩 줄 것이니 지금부터 한 때에 한 말씩 밥을 지어 먹이며, 경의 가인들도 박대하지 못하게 각별 단속하고 천대하지 못하게 하라.” 하시니 공이 명을 받들고 집에 돌아와 가인을 모아 황상 전교를 낱낱이 전하신 후에 시백을 대하여 꾸짖어 이르기를

“부모의 마음을 편케 하기는 자식의 효성이요, 임금을 도와 나라가 태평하기는 신하의 충성이라. 너 같은 자식은 아비 교훈을 듣지 아니하고 네 마음대로 하다가 아비에게 황송한 처분을 받게 하고 동료에게 책망을 당하게 하니 이는 네 불효함이라. 너는 어떠한 놈으로 부모에게 효행은 못한들 교훈을 이같이 거역하느냐. 그런 불효 어디 또 있으리오.”

하시며 고성대질 하시니 시백이 엎드려 대답하기를

“부친의 교훈을 거역하여 이 지경을 당하와 이같이 노하게 하시니 더욱 황공무지하나이다.”

공이 분기를 이기지 못하여 묵묵부답하다가 한참 후에 이르기를

“네 내 영을 거역하면 첫째는 나라에 불충이요, 둘째는 부모에게 불효 막대함이니 각별 조심하라.”

하시니 그 후로는 시백과 가인들이 박씨의 영을 한 치도 거역하지 못하더라.

박씨에게 매일 서 말씩 밥을 지어 주니 능히 다 먹어 없애매, 보는 사람들이 여장군이라 하더라. 어느 날 박씨 계화로 하여금 대감께 여쭐 말씀을 고하니 공이 즉시 들어와 박씨에게 이르기를

“무슨 말이 있느냐.”

박씨 단정히 앉아 여쭙기를

“가산이 여유롭지 못하여 극히 미안하옵거니와 소부의 말대로 하여 주실까 바라나이다. 종로에 하인을 보내면 여러 사람이 말을 팔려고 모였을 것이니, 열여 마리 중에 작은 망아지 하나가 있어 비리고 패리하여 모양은 볼 수 없으나 그렇다 말고 삼백 냥을 주고 사오라 하옵소서.”

하거늘 상공이 들으매 그 말이 황당하나 박씨는 범인이 아닌고로 외당에 나와 노복을 불러 분부하되

“종로에 나가면 말장사들이 말을 팔려고 있을 것이니 그 중에 비리고 패리한 말을 사오라.” 하고 돈 삼백 냥을 주시니, 노복들이 명을 받들고 나와 서로 이르되, “대감께서 무슨 연고로 비리고 패리한 말을 삼백 냥이나 주고 사오라 하시니 진실로 이상하다.” 하고 삼백 냥 돈을 가지고 종로에 나아가 보니, 과연 말장사들이 여러 필 좋은 말을 가졌는데 그 중에 비리고 여윈 망아지를 보고 임자를 찾아 이르되

“이 말값이 얼마나 되느냐.”

임자 대답하되

“값은 오백 냥이거니와 이 중에 천리준총이 무수하거늘 이같이 변변찮은 망아지를 사다 무엇 하려느냐.”

하며 좋은 말을 가져가라 하니 노복들이 대답하기를

“우리 대감의 분부 이러하시기로 이 망아지를 사고자 하노라.”

말장사 이르되

“그러하면 엽전 닷 냥만 주고 사가라.” 하니 노복들이 이르되

“우리 대감 분부에 삼백 냥을 다 주고 사오라 하시기로 왔으니 삼백 냥을 받고 망아지를 달라.”

말장사 대답하기를

“이 망아지 본값이 닷 냥이니 어찌 과한 값을 받으리오. 진실로 연고를 알지 못하노라.”

노복들이 이르되

“우리 대감 분부대로 주는 것이니 염려 말고 받으라.”

주거늘 말장사 그 연고를 알지 못하여 굳이 사양하고 받지 아니하거늘, 비복들이 다투다 못하여 억지로 백 냥만 주고 이백 냥은 숨겨서 나누어 가지고 말을 끌고 돌아와 상공께 고하니 보시고 망아지 사온 말을 박씨께 고하고 말을 보이니, 박씨 말을 한참 바라보다가 상공께 여쭙기를

“이 말값이 삼백 냥이 본값이니 제값을 주어야 쓸 텐데, 무지한 노복들이 백 냥만 주고 이백 냥은 서로 나누어 가지고 말장사에게 주지 아니하였사오니 쓸데없는지라. 도로 가져다 말장사에게 주라 하옵소서.”

상공이 이 말을 듣고 박씨의 신명함을 탄복하고 나와 노복들을 불러 크게 꾸짖어 이르기를

“너희들이 말값 삼백 냥 내에 이백 냥은 숨기고 일백 냥만 주었으니, 상전 기망한 죄는 훗날 당하려니와 숨긴 이백 냥을 가지고 가서 말장사를 찾아 주고 오라.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들은 목숨을 보전치 못할 것이니 빨리 찾아 주고 오라.”

하니 노복들이 상공에게 사죄하여 이르기를

“이같이 밝게 아시니 어찌 기망하오리까. 과연 대감 분부대로 삼백 냥을 주었더니 말 본값이 닷 냥이라 하고 끝내 받지 아니하고 사양하기로 이백 냥은 숨겼사더니 이같이 신명하시니 소인들의 죄는 만사무석이로소이다.”

하고 즉시 이백 냥을 가지고 가서 말장사를 불러 이르되

“없다이 못된 사람이 주는 돈을 마다하고 받지 아니하여 우리 상전에게 중죄를 당하게 되었으니 어찌 통분하지 아니하리오.”

억지로 이백 냥을 주고 돌아와 다시 여쭙기를

“말 임자를 찾아 주고 왔나이다.”

상공이 즉시 들어가 박씨께 말씀을 전하니 박씨 여쭙기를

“이 말을 먹이되 하루 한 때에 보리 서 되와 깨 서 되씩 죽을 쑤어 삼 년을 정성껏 먹이소서.”

하니 상공이 허락하고 노복들에게 분부하더라.

각설하고 이때 시백이 부친의 영을 거역하지 못하여 내외간 동침하려 하고 초당에 들어갈새, 얼굴과 추한 형상을 보면 마음이 자연 불평하더라. 후원 초당을 지었는데 당호를 피화당이라 하고, 매일 계화와 더불어 나무를 심되 동쪽에는 청기를 응하여 흙을 돋우고, 남쪽에는 적기를 응하여 붉은 흙으로 돋우고, 서쪽에는 백기를 응하여 흰 흙으로 돋우고, 북쪽에는 흑기를 응하여 검은 흙으로 돋우고, 중앙에는 황기를 응하여 황토로

돋우고 오색 가지로 심어 놓고 계화로 하여금 때를 맞추어 물을 주게 하니, 그 나무 날로 달로 자라 모양이 엄숙하고 신기한지라. 무수한 풍운조화와 위엄이 엄숙한 가운데 나뭇가지는 용이 서린 듯 범이 호령하는 듯, 갖은 새와 바람이 번득하면 변화 무궁하니, 그 신기한 일은 귀신도 헤아리지 못할진대 무식한 사람이야 어찌 알리오.

이때에 상공이 계화를 불러 묻기를

“요즈음 부인이 무엇으로 일을 삼던가.”

계화 대답하기를

“부인께옵서 후원에 각색 나무를 심으시되 날마다 하옵고, 소녀로 하여금 물을 길어다 주라 하더이다.”

공이 듣고 크게 기뻐하여 계화를 데리고 구경하러 후원에 들어가 좌우를 살펴보니, 각색 나무 사면에 무성하여 엄숙한 기운이 바로 보기 어려운지라. 상공이 놀라 겨우 정신을 진정하여 자세히 살펴보니, 나무는 용과 범이 변화를 부리고 가지는 무수한 뱀이 서린 듯하여 변화 무궁한지라. 상공이 크게 탄식하여 이르기를

“이 사람은 과연 신인이라. 여자로서 영웅대략을 갈마 쓰니 신묘한 재주는 헤아리지 못하리로다.”

하고 박씨에게 묻기를

“저 나무는 무슨 일로 심었으며 이 집 당호는 피화당이라 하였으니, 알지 못겠구나 어찌한 연고냐.”

하신대 박씨 여쭙기를

“길흉화복은 인간의 상사오니, 후에 혹 어려운 때 일이 있사와도 이 나무로 방비할 터이오니 그러하와 사면에 심었나이다.”

공이 그 말을 듣고 놀라 그 연고를 물으니 박씨 여쭙기를

“이도 천수이온이 어찌 천수를 누설하오리까. 후에 자연 아르리다.” 하거늘 상공이 탄식하여 이르기를

“너는 진실로 나 같은 사람의 며느리 되기 아깝고 팔자 기박하여 이러한 인물을 내 자식이 몰라보고 부부간에 화락하지 못하여 허송세월하니, 가히 절통하고 분하도다.”

박씨 여쭙기를

“소부의 용모와 신상이 남과 같지 못하여 부부간 금슬지락이 없사오니 이는 다 소부의 죄라 뉘를 원망하오리까. 소부의 다만 소원은 가군이 집에 있어 부모에게 효도를 극진히 하옵고 입신양명하거든 나라를 충성으로 섬기고 타문에 취처하여 자손을 두와 만세무강하오면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을까 하나이다.”

하거늘 공이 그 말을 들으매 그 애연한 마음에 더욱 불쌍하여 눈물을 흘리시니, 박씨 그 거동을 보고 위로하여 이르기를

“존중하신 귀체를 보중하옵소서. 아무 때라도 화락할 때가 없사오리까. 과이 근심하지 마옵소서. 상공께서 싫어하옵시면 가군의 허물이 드러나 향당 사람이 불효한다 할 것이오니, 소부의 허물로 가군에게 나쁜 이름을 돌아보낼까 저어하나이다.”

상공이 들으시고 도량이 넉넉하고 효성이 극진함을 더욱 크게 칭찬하시더라.

각설하고 이때 망아지 먹인 지 이미 삼 년이라. 말은 준총이요 걸음은 나는 범 같은지라. 박씨 상공께 여쭙기를

“계유년 섣달 이십삼 일 오시에 대국에서 칙사가 나올 것이니, 이 말을 가지고 가서 칙사 오는 길가에 매어두면 칙사 보고 사기를 청할 것이니 삼만 냥으로 값을 정하여 팔아 오라 하옵소서.”

상공이 칭찬하시고 그날을 기다리더니 과연 그날에 칙사 나온다 하거늘, 노복을 명하여 말을 끌고 가서 칙사 오는 길가에 매어두니 칙사 오다가 과연 그 말을 보고 묻기를

“이 말이 팔 말이며 값은 얼마나 되느냐.”

대답하기를

“말은 팔 말이옵고 값은 삼만 냥이로소이다.”

칙사 크게 기뻐하여 삼만 냥을 과하다 아니하고 곧 내어 주고 사거늘, 노복이 돌아와 그 사연을 고하니 공이 삼만 냥을 순식간에 얻으니 가산이 자연 넉넉한지라. 기뻐하여 박씨에게 묻기를

“그 말값은 받았으나 그 신묘한 일은 알지 못하노라.”

박씨 공손히 답하기를

“그 말은 곧 천 리를 달리는 준총이라. 조선은 소국인고로 알아볼 사람 없을 뿐더러 지방이 협소하와 쓸 데 없고, 대국은 지방이 광활하니 곧 말의 능력을 발휘할지라. 칙사는 준마를 알아보는 고로 삼만 금을 아끼지 아니하고 사갔으나 조선이야 누가 값을 알며 준총을 알아보리까.”

상공이 그 말씀을 듣고 탄복하여 이르기를

“비록 여자나 앉아서 천 리 밖을 내다보니 진실로 아깝도다. 만일 남자였던들 귀히 될 것을 이미 여자 몸이라 어찌 한심하지 아니하리오.”

하더라.

각설하고 이때 나라가 태평하고 시절이 좋매 인재를 뽑으려 대과를 베풀 새, 시백이 듣고 과거를 보려 장중에 들어가려 하더니, 그날 밤에 박씨 한 꿈을 얻으매 후원 연못 가운데 화초 만발하고 나비가 날아드는데, 그 가운데 청룡이 굼실굼실 놀다가 여의주를 입에 물고 채운을 헤치고 옥경에 올라 보이거늘, 박씨 잠을 깨어 생각하니 한바탕 대몽이라. 이로 인하여 잠을 이루지 못하고 전전반측 신세를 생각하니 여자의 몸이 가련하고, 또 몽사를 생각하니 연당의 연적이 여의주가 분명하다. 이럭저럭 동방이 밝거늘 꿈속에 보이던 백옥연적을 보니 과연 한 연적이 있는지라. 반가이 주워다 놓고 즉시 계화로 하여금 시백께 전갈하기를 사랑에 나가서 방에 들어오시기 전에 여쭈어 잠깐 들어오시라 하거늘, 계화 명을 받아 외당에 나아가 그 사연을 고하니 시백이 듣고 정색하여 이르기를

“무슨 말이 있관대 대장부 과거 길에 지체되게 하느냐.” 계화 무색하여 들어와 그대로 고하니 박씨 다시 계화로 하여금 전갈하되

“잠깐 들어오시면 드릴 것이 있으니 한번 수고를 아끼지 마옵소서.”

시백이 대로하여 이르기를

“요망한 계집이 장부의 길을 막으니 이런 당돌한 일이 어디 있으리오.”

자리에 앉지도 못하며 계화를 잡아내어 큰 매로 십여 도를 중하게 치니, 계화 죄를 당하고 울며 들어가 고하니 박씨 눈물 흘리고 슬피 울다가 이르기를

“내 죄로 네가 중죄를 당하였으니 이같이 분한 일이 어디 있으리오.”

슬피 탄식하고 연적을 계화에게 주며 전갈하여 이르기를

“이 연적의 물을 넣어 장중에 들거든 그 물로 먹을 갈아 글을 지어 바치면 장원급제 할 것이니, 입신양명하거든 부모 전에 영화되게 하옵고 가문을 빛낸 후에 나 같은 인물은 생각지 마르시고 다른 가문의 얌전한 숙녀를 취하여 평생을 즐겁게 사옵소서.”

하니 시백이 듣기를 마친 후에 연적을 받아보니 천하의 귀한 보배라. 도리어 뉘우치고 자책하여 이르기를

“이왕사는 물론이라 다 잊어버리시고 안심하여 지내시면 사과하는 날이 있사오리다.”

하고 바로 장중에 들어가 연적의 물로 먹을 갈아 일필휘지하니 문장이 더할 나위 없는지라. 일천에 바치고 나와 방목을 기다리더니 한참 후에 방목을 걸거늘 바라보니 장원에 “한성부 이시백”이라 하고, 춘당대 높이 앉아 시험관 부르는 소리 장안이 진동하거늘, 시백이 국은을 축사하고 즉시 궐내에 들어가니 대상에서 무수히 진퇴를 재촉하다가 사은숙배하니 임금이 칭찬을 마지 아니하시며 진충보국하기를 당부하시거늘, 시백이 다시 황공재배하고 집에 돌아올새 머리에는 어사화요 몸에는 금포옥대로 금안준마에 당당히 앉았으니, 표연한 풍채 찬란한지라. 꽃 피는 봄날 큰길 위에 구경하는 사람이 누가 아니 사랑하며 칭찬하리오.

집에 돌아와 의기양양 기뻐할 제 박씨는 참예도 못하고 적막한 초당에 홀로 앉았으니 어찌 아니 한심하며, 박씨의 광활한 도량이 아니면 어찌 경사를 보리오. 계화 박씨의 경상을 차마 보지 못하여 부인 전에 여쭙기를

“이같은 경사에 상하 친척이 모여 즐기는데 박씨부인은 홀로 초당에 있어 눈물로 세월을 보내오니, 소비의 마음도 어찌 측은하지 아니하리까.”

박씨 태연히 대답하기를

“사람의 길흉영욕은 하늘에 달렸으니 차역 천수라 수원수구하리오.”

계화 듣고 마음속에 박씨의 광활한 마음을 못내 탄복하더라.

각설하고 박씨 집에서 떠나온 지 이미 삼 년이라. 어느 날 상공께 여쭙기를

“소부 출가한 지 이미 삼 년이오매 소식이 적막하오니 잠깐 다녀오고자 하나이다.” 하니 상공이 듣고 크게 놀라 이르기를

“이곳에서 금강산이 수백 리라. 길이 험하여 남자라도 출입이 불편하거든 하물며 여자로 어찌 왕래를 마음대로 하리오.”

박씨 다시 여쭙기를

“소부도 험한 길이 어려운 줄은 아나 부득불 다녀올 일이 있사오니 염려 마옵소서.”

상공이 이르되

“네가 부득이 간다 하니 말리지 못하거니와 행장은 내일 차려 줄 것이니 속히 다녀오라.”

하시니 박씨 다시 여쭙기를

“근친 행장은 염려 마옵소서. 왕래 간에 사흘이 될 것이니 근심 마옵소서.”

상공이 본래 박씨의 재주를 아는지라 부득이 허락은 하나, 분명한 곡절을 알지 못하여 마음속으로 근심이 되어 침식이 자연 불안하더라. 박씨 초당에 돌아와 계화를 불러 이르기를

“내 친가에 잠깐 다녀올 것이니 너만 알고 번설하지 말라.”

하고 이날 삼경에 단신으로 길을 떠나더라. 계화 하직하고 있더니 사흘 만에 과연 다녀오거늘 상공이 보시고 크게 놀라며 크게 기뻐하여 이르기를

“네 신기한 묘술은 귀신도 헤아리지 못하리로다. 그러하나 네 부친께서 알고 계시던가.”

박씨 대답하기를

“아직 평안하옵고 아무 달 아무 날에 오시마 하시더이다.” 하니 상공이 기뻐하며 처사 오기를 기다리더니, 어느 날 처사 오마는 날이 당하매 공이 홀로 앉아 기다리니, 오색구름이 집 안에 영롱하며 맑고 청아한 옥저 소리 구름 밖에서 들리더니, 문득 한 선관이 백학을 타고 구름 가운데로 내려오거늘 자세히 보니 이는 곧 박처사라. 상공이 의관을 정제하고 내려가 영접하여 예를 마치고 자리를 정한 후에 그간 쌓인 회포를 이야기하며 주찬을 내어 서로 취하도록 먹고 즐기더니, 공이 처사께 사례하여 이르기를

“존객을 뵈오니 반가운 마음은 예사요, 미안한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겠나이다.”

처사 이르기를

“무슨 말씀이온지 도리어 미안하나이다.”

공이 공경하여 대답하기를

“내 자식이 불초하여 연분을 몰라보고 부부간 화락하지 못하기로 매일 경계하여도 부명을 끝내 거역하오니 어찌 불안하지 아니하오리까.”

처사 사례하여 이르기를

“상공의 너그러운 덕으로 내 자식을 추하다 아니하시고 슬하에 두고 사랑하옵시니 감격무지하거니와, 사람의 영욕은 하늘이 정한 것이요 사람이 마음대로 할 것이 아니오니 어찌 그것으로 근심하시나이까.”

공이 듣고 부끄러이 여기더라.

공이 처사와 더불어 날마다 바둑 두기와 옥저 불기로 소일하더니, 어느 날 처사 피화당에 들어가 조용히 박씨에게 일러 이르기를

“네 액운이 다하였으니 누추한 허물을 벗어라.”

하시고 탈갑 변화하는 술법을 가르치며 다시 이르되

“탈갑하거든 누추한 허물을 버리지 말고 상공께 여쭈어 옥함을 잠가 달라 하여 그 속에 넣어두고 간수하라.”

은근한 정담을 한참 나누다가 소매를 떨치고 나와 상공께 작별을 고하니, 공이 듣고 못내 섭섭하여 만류하되 처사 듣지 아니하고 가는지라. 공이 하릴없어 한 잔 술로 작별할 새, 처사 공에게 이르기를

“지금 작별하면 다시 만나기 어려우니 내내 무량하옵소서.” 하거늘 공이 듣고 대답하기를

“어인 말씀이오이까.”

처사 이르기를

“나도 섭섭하나 이번 입산하오면 출산하기 막연하와 진실로 상봉하기 어렵사이다.” 공이 하릴없어 애연히 작별하니 처사 학을 타고 공중에 올라 채운을 헤치고 가더니 구름이 걷히며 간 곳 없거늘, 상공이 탄복하기를 마지 아니하더라.

차설하고 이날 밤에 박씨 목욕재계하고 탈갑하여 허물을 벗었는지라. 날이 밝으매 계화를 부르니 계화 들어가니, 이전에 없던 절대가인이 방 안에 앉거늘 자세히 보니 아름다운 얼굴과 단정한 태도는 한 번 보매 정신이 아찔하여 바라보기 어려운지라. 박씨 붉은 입술을 반쯤 열어 계화에게 이르되

“나는 전일 박씨부인으로 지금 탈갑하여 변신하였으니 급히 외당에 나아가 소란 피우지 말고 대감께 여쭈어 옥함을 얻어오게 하라.”

하니 계화 명을 받들고 외당에 나아가매 기색이 얼굴에 가득하거늘 상공이 이상히 여겨 빨리 물으되

“무슨 좋은 일이 있느냐.”

계화 대답하기를

“피화당에 신기한 일이 있으니 급히 행차하사이다.”

상공이 급히 들어가 방문을 열고 보니, 전에 없던 가인이 단정히 앉았는데 요조한 태도는 사람의 정신을 놀라게 하고 방 안에 향내 가득한지라. 정신을 진정하여 자세히 보니 전일 추하던 박씨 금일에 선녀와 방불하다. 상공을 보고 오히려 부끄러워하는 빛을 두는지라. 공이 마음에 이상하고 신기함을 탄복하여 말을 못하시니 계화 여쭙기를

“부인이 어젯밤에 탈갑하옵고 대감께 옥함을 구하게 여쭈라 하시더이다.”

공이 듣고 기뻐 그제야 가까이 가서 물어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오늘 절대가인이 되었느냐.”

박씨 고개를 숙이고 붉은 입술을 반쯤 열어 여쭙기를

“소부 이제야 액운이 다하옵기로 누추한 허물을 벗었사오니 옥함을 얻어 주시면 그 허물을 간수할까 하나이다.”

하거늘 공이 신기함을 탄복하고 즉시 나와 옥장인을 불러 옥함을 시각에 만들어오라 하고, 즉시 시백을 불러 이르기를

“빨리 들어가서 네 아내의 얼굴을 보라.”

하시니 시백이 듣고 돌아서며 얼굴을 찡그리고 생각하되, 이같이 추한 인물을 무슨 연고로 보라 하시는고. 부모의 명을 거역하지 못하여 들어갈 새 무수히 주저하거늘, 계화 빨리 나와 영접하니 시백이 계화에게 묻기를

“피화당에 무슨 연고 있관대 네 얼굴에 기색이 가득하냐.”

계화 여쭙기를

“방에 들어가시면 자연 알 일이 있나이다.”

하거늘 시백이 의혹하여 급히 방문을 열고 보니, 추하던 박씨는 어디 가고 꽃 같고 달 같은 요조숙녀 앉아 있는 거동은 천상 선녀 하강한 듯 화용월태 사람이 아닌 듯하더라. 마음이 따로 송구하여 말을 건네기는 고사하고 방에 들어가도 못하고 도로 나와 계화에게 묻기를

“흉악하던 인물은 어디 가고 만고절색이 앉았으니 무슨 연고냐.”

계화 대답하기를

“전일 박씨 일색이 금야에 되었나이다.”

그제야 시백이 사람 볼 줄 모름을 절절이 후회하여, 수삼 년 박대한 일을 생각하니 도리어 부끄러워 외당에 나와 주저하다가 대감께 뵈니 공이 이르되

“네 아내 안색이 지금은 어떠하더냐.”

시백이 엎드려 대답하기를

“소자 무식한 죄를 알겠나이다.”

하더라. 상공이 다시 묻기를

“사람의 영욕과 화복이 하늘에 있는지라. 이왕사를 생각하면 무슨 염치로 네 아내를 대면하리오. 어찌하여 지각이 그러하고 대사를 이같이 하면 낭패가 아니 되느냐.”

시백이 더욱 황공하여 묵묵부답하더라.

날이 이미 저물매 시백이 박씨 방에 들어가니 박씨 등촉을 밝히고 단정히 앉아 있거늘, 시백이 감히 말을 붙이지 못하고 박씨가 먼저 말하기만 기다리나 끝내 함구무언이거늘 시백이 홀로 자책하여 이르기를

“부인이 이같이 하기는 수년 박대한 탓이로다.” 한탄을 마지 아니하되 박씨는 보아도 못 본 체 들어도 못 들은 체하여 끝내 대답이 없는지라. 시백이 할 수 없어 촛불 아래 앉았다가 새벽닭이 울매 외당에 나와 양친 전에 문안한 후에 종일토록 마음을 진정할 길이 없어 그렁저렁 날이 저물매, 박씨 방에 들어가니 박씨의 엄숙함이 갈수록 더한지라. 시백이 죄지은 사람같이 앉아서 부인 말하기만 기다리더니 어언간 날이 새는지라. 생각다 못하여 다시 나와 후회할 따름일레라.

이때에 박씨 이같이 한 지 여러 날이라. 시백이 자연 병이 되어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매 홀로 앉아 생각하되, 아내라 하는 것이 요물이라 평생소원을 가슴속에 갈무리해 두다가 지금은 미색이 되었으니, 언어상통 못하면 골수에 병이 될지라. 첫째는 사람 볼 줄 모른 탓이요 둘째는 신세가 가련하다 하고, 정신을 진정하고 마음을 가다듬어 다시 들어가 말이나마 통해 보리라 하고, 피화당에 들어가 죄를 무수히 사례하고 이르기를

“부인 침소에 여러 번 들어왔으나 끝내 마음을 풀지 아니하시니 이는 내 허물이라 뉘를 원망하리오. 부인으로 하여금 죽을 지경에 이르렀으니 죽기는 두렵지 아니하나, 양친 슬하에 있어 효도는 고사하고 청춘에 죽사오면 불효 막대하고 또 저세상에 들어간들 무슨 면목으로 선영을 뵈오리까.”

하며 애연히 눈물 흘리니 박씨 그 말을 들으매 일찍 측은한지라.

그제야 붉은 입술을 반쯤 열어 심책하여 이르기를

“우리 조선은 예의지국이라. 사람이 오륜을 모르면 예의를 어찌 알리오. 그대 아내가 박색이라 하여 삼 년을 천대하였으니 부부유별이 어디 있느냐. 옛사람의 말에 조강지처는 내쫓지 않는다 하였으니, 미색만 생각하고 부부지의가 진중한 줄 몰라보니 어찌 장부의 행색이라 하며 덕이 있다 하리오. 차후에는 효도로 부모를 섬기고 충성으로 나라를 도우소서. 만일 그렇지 아니하면 내 비록 여자나 그대 같은 장부는 상대하지 아니하노라.”

하며 언어 정직하니 시백이 들으매 대답할 말이 없는지라.

염치를 돌아보지 않고 누누이 애걸할 뿐이요 달리 대답하지 못하거늘, 박씨 이윽히 바라보다가 측은지심이 감동하여 그제야 돌아 앉으며 공경하여 대답하기를

“내 본형을 감추고 추하게 하기는 그대를 미혹되게 하지 않아 일신 정기를 온전케 함이요, 수일 접대 아니하기는 성심을 보려 함이요, 지금 본형을 가졌으나 한평생 마음을 풀지 말자 하였더니 여자 마음이 유약하니, 지금부터는 전사를 버리시고 부대 다시는 사람을 알아보소서.”

하니 시백이 크게 기뻐하여 이르기를

“나는 인간의 무식한 사람이요 부인은 선인의 골격이라. 지략이 광활하여 범인과 다른고로 천 리 밖을 내다보거늘, 저 같은 사람은 변변찮은 인물인고로 식견이 부족하와 착한 부인을 박대하였으니 죄사무석이나, 지극히 현명한 사람이라도 반드시 한 가지 허물은 있다 하거늘 하물며 저 같은 한 개 필부야 이를 것이 무엇이리오. 부인은 삼 년 맺힌 마음을 풀어 버리시고 평생을 화락하사이다.”

박씨 미소하여 이르기를

“지난 시비간의 전사는 풀어 버렸으니 안심하옵소서.”

밤이 이미 삼경이라. 전사를 다 풀어버린 후에 금침을 내어 놓고 원앙의 즐거움을 이루니 정이 비할 데 없더라. 그 후로부터 상공이며 부인과 노복들이 전에 박씨를 천대함을 이제야 깨달아 뉘우치고 자책하더라. 박씨의 신묘함과 상공의 지략을 탄복 아니하는 이 없고 가중 상하 없이 화평하게 지내더라.

각설하고 이때 박씨 변용한 소식이 장안에 낭자하니, 여러 재상가 부인들이 그 신묘한 일을 구경하고자 하여 편지를 전하고 그 사연에 이르되, 때는 마침 봄이라 날씨도 좋고 초목 군생 지물이 다 변화하오니 이같이 좋은 때에 한번 화류 구경으로 상봉하자 하였더라. 박씨 허락하고 답서하여 보내고, 그날이 당하매 채색 의복을 단장하고 화교를 타고 계화를 데리고 기약한 곳을 찾아가니 여러 부인들이 모였거늘, 화교에서 내려 예를 마친 후에 자리를 정하고 좌우를 살펴보니 여러 부인들이 붉은 치마와 화려한 옷으로 치레를 능란히 하였더라.

여러 부인들이 박씨를 멀리서 처음 보는 차에 박씨를 바라보니, 옥 같은 얼굴에 구름 같은 머리칼은 동정호 밝은 달 같고 의복 치레는 꽃빛이 무색하더라. 여러 부인의 고운 태도 박씨에게 비하면 오히려 무색하니 누가 아니 탄복하리오. 주찬을 내어 서로 권할 새, 박부인이 재주를 보이려 하고 술잔을 받다가 짐짓 술잔을 나삼에 내리치니 술이 엎질러져 치마에 졌는지라. 박부인이 치마를 벗어 계화에게 주며 이르기를

“불꽃 가운데 소화하라.”

하니 계화 명을 받아 치마를 불 가운데 던지니 그 치마는 여전하고 빛이 가장 윤기 있더라. 계화 치마를 가져다가 박부인께 드리니 여러 부인이 그 거동을 보고 다 놀라 그 연고를 물으니 대답하기를

“이 비단 이름은 오화단이라 하옵고, 혹 얼룩이 지면 물로 빠는 것이 아니라 소화를 시켜 때를 없애나이다.”

여러 부인이 이같은 신묘함을 보고 못내 탄복하며 또 묻기를

“그 비단은 어디서 나오나이까.”

박부인이 대답하기를

“인간에는 없고 월궁 소생이로소이다.”

모든 부인이 또 묻기를

“입으신 저고리는 무슨 비단이오이까.”

대답하기를

“이 비단 이름은 명월단이오나, 그는 내 친정 부친께서 동해 용궁에 가셨을 때에 얻어오신 것이니 용궁 소생이로소이다. 이 비단은 물에 넣어도 젖지 아니하고 불에 넣어도 타지 아니하나이다.”

하거늘 여러 부인들이 듣고 신기히 여겨 칭찬 아니하는 이 없더라. 서로 시비로 하여금 박부인께 술 권하기를 마지 아니하매, 술잔을 받아 가지고 금봉채를 베어 술잔 가운데를 그어 마시니 술이 한쪽은 없고 한쪽은 칼로 벤 듯한지라. 여러 부인이 그 술을 보고 더욱 신기함을 칭찬하여 이르기를

“부인은 선관의 딸이라 하더니 과연 그 말이 옳도다. 진시황과 한무제도 구하지 못한 신선을 우리 오늘날 만났으니 이 아니 신기하며 기쁘지 아니하리오.”

서로 봄 흥취를 이기지 못하여 시를 지어 화답할 새, 이때 계화 곁에 있다가 여쭙기를

“이렇듯 좋은 봄 경치에 흥도 못 돋우고 백화만발하여 봄빛을 자랑하오니, 소비도 이때를 당하여 청가 일곡으로 모든 부인을 위로할까 하나이다.”

모든 부인이 그 말을 듣고 더욱 기특히 여겨 그리하라 하니 계화 붉은 입술을 반쯤 열어 청가 일곡을 부니, 그 소리 가장 청아하여 산호채로 옥반을 깨치는 듯한지라. 그 곡조에 이르되

천지는 만물의 역려요 광음은 백대의 과객이라. (천지는 만물이 깃드는 여관이요 세월은 백 대를 지나는 나그네라.)

부평초 같은 세상에 잠깐 살아가니, 봄바람 가는 세월에 이 아니 놀고 어이 하리.

옛일을 생각하고 지금 세상 살펴보니, 백 대의 홍안은 봄바람에 난만이라.

한때 번화함은 장 위의 나비라.

청산 두견화는 촉나라 원혼이요, 화단의 봄새 소리는 왕소군의 눈물이라.

세상을 생각하니 이 세상이 뜻없도다.

구십 춘광 좋은 때 아니 놀고 무엇 하리.

어화 세상 사람들아.

창해로 술을 빚어 만세 독락하여 보자.

하였더라. 모든 부인이 듣기를 마하매 정신이 쇄락하여 계화를 돌아보며 무수히 칭찬하더라. 이미 석양은 산에 지고 인형은 어지러운데 산새는 펄펄 날아들고 달이 동녘 고개에 떠오르니, 계화 파연곡을 타니 여러 부인이 잔치를 파하고 각각 돌아가더라.

각설하고 상공이 연로하매 벼슬을 갈고 시백으로 승품하여 부르시니, 시백이 입시한 후에 나라를 충성으로 섬기어 명망이 조정에 떨치매 황상이 더욱 사랑하사 시백으로 평안감사를 제수하시니, 시백이 국은을 축사하고 궐내에 들어가 숙배하직하온 후에 본가로 돌아와 부모께 뵈니, 상공이 국은을 못내 칭송하고 시백은 급히 행장을 차릴 새, 공장인을 불러 쌍교를 꾸미라 하니 박씨 묻기를

“쌍교는 무엇 하려 하시나이까.”

감사 대답하기를

“저 같은 사람으로 평안감사를 제수하시니 국은이 망극한지라. 이번 길에 부인을 데려가고자 하나이다.”

부인이 크게 놀라 이르기를

“대장부 출세하면 나라 섬길 날은 많고 부모 섬길 날은 적다 하오니, 국사에 골몰하면 안여자를 돌아보지 아니하는지라. 첩이 함께 가면 부모를 누가 봉양하오리까. 첩은 집에 있어 부모를 봉양할 것이니 군자는 충성을 다하여 이름을 빛나게 하소서.”

감사 이 말을 들으매 사리가 당연하고 언어 정직한지라. 도리어 탄복하여 이르기를

“저 같은 사람은 불효 불충이 이렇다 하오니 천지 간에 용납지 못할 사람이로소이다. 노친 양위를 생각지 못하고 망녕되이 말씀하였사오니 허물치 생각 마르시고, 부모 양위를 극진히 봉양하여 남의 웃음을 면하게 하옵소서.”

하고 사당에 들어가 사배하직하고 부모 전에 하직한 후에 길을 떠날 새, 박씨와 더불어 은근히 이별하고 떠나더라.

감사 여러 날 만에 감영에 도착하니, 각읍 수령이 폐단이 무수하여 양민이 도탄 중에 들어 민심이 곳곳에 소요하거늘, 감사 도임한 후에 그 폐단을 일일이 염탐하여 불치 수령은 내쫓기도 하며 선치 수령은 포양도 하고, 백성을 인의로 다스리니 일 년 안에 도내 각 고을이 잘 다스려져 백성이 길거리에서 노래하여 이르되

“좋을시고 이제는 살겠도다. 요순 적 시절인가. 나라가 태평하니 좋을시고. 신농씨 내신 땅에 이제야 써 보세. 역산에 밭을 갈아 농사를 지어보세. 부모 형제 한데 모아 배불리 먹어보세. 얼널널 상사되요. 예전 사또 다스릴 적에 무식한 백성들이 인의예지 어이 알며 효제충신 어이 알리오. 불효불제 일삼아 골육상쟁하고 천지간 분주하며 효자가 불효 되고 양민이 도적 되어 죽기만 바라더니, 새 사또 도임 후에 충효 겸전하여 인의로 공사하시고 덕화가 사방에 펴였으니 백성들이 살겠도다. 불효한 놈이 효자 되고 도적이 양민 되어 산에 도적 없고 길에 물건 버리지 않는 세상이니 부지런히 농사지어 재물 모아 부귀 되어 보세. 얼널널 상사되야. 선정비를 세워보세. 얼널널 상사되야. 우리 사또 착할시고 비석 세워 송덕하여 보세.”

길거리에 선정비를 세워 놓고 격양을 일삼더라. 이럭저럭 감사의 어진 소문이 원근에 자자하고 조정에 미치매 황상이 들으시고 칭찬 그치지 아니하시며 품직을 다시 높여 병판으로 부르시니, 감사 교지를 받자와 북향 사배하고 성은을 축사하온 후에 즉시 행장을 차려 경성으로 올라갈 새, 각읍 수령이며 사방 백성이 무수히 칭송하더라.

여러 날 만에 경성에 도착하여 궐내에 들어가 사은하오니 임금이 크게 칭찬하더라. 당일에 본가에 돌아와 사당에 현알한 후에 부모 전에 문안하고 수일 지낸 후에 원근 친척을 모아 잔치를 베설하고 서로 즐기더라.

각설하고 이때는 갑자년 가을 팔월이라. 남경이 요란하다 하거늘 임금이 시백으로 장수를 제수하시니, 어명을 받자와 남경으로 들어갈 새, 이때 임경업이 총명하고 영특하여 변화지술을 가졌는데 마침 철마산 중군을 제수하였더라. 시백이 주달하여 경업으로 장사군관을 삼아 함께 남경에 들어가니, 천자 조선 사신이 온다는 말을 듣고 원접사를 보내어 맞아가게 하였더라. 이때에 북방 호국이 총마가달의 난을 만나 패망 지경에 이르러 대국에 청병하였으매 상장을 어찌 못하였더니, 원접사 황재명이 여쭙기를

“조선 사자의 군관을 보오니 비록 소국 인물이나 만고 흥망과 천지조화를 품었으니 어찌 기특하지 아니 하오리까. 원컨대 이 사람으로 청병장을 정함이 마땅할까 하나이다.”

천자 들으시고 즉시 시백과 경업을 패초하여 보시고 칭찬하시며, 경업으로 청병대장을 삼아 호국을 구하라 하신대 경업이 명을 받들고 즉시 호국에 들어가 총마가달을 한 번 싸움에 물리치고 승전고를 울리고 대국으로 돌아와 황제께 뵈니, 황제 크게 칭찬하사 상급을 후히 하시고 글월을 주어 조선으로 보내니라.

시백과 경업이 황제께 하직하고 주야로 조선에 도착하여 궐내에 입시하오니, 임금이 보시고 칭찬하여 이르기를, 소국 인물로 대국 도원수가 되어 호국을 구하고 가달국까지 위엄을 떨쳤으니 만고 없는 일이라. 두 사람을 승직하여 시백으로 우상을 제수하시고 경업으로 부원수를 하라 하더니, 이때 호국이 강성하여 도리어 조선을 엿보는지라. 임금이 크게 근심하사 부원수 임경업으로 의주부윤을 제수하여 자주 침노하는 북적을 쳐 물리치라 하시니, 경업이 하직 숙배하고 의주로 도임하여 주야로 연습하니 호적이 남쪽을 두려워하여 자주 침범하지 못하더라.

각설하고 흥하면 기우는 것은 사람의 상사라. 대감의 춘추가 이미 팔십이라. 졸연히 병들어 백약이 무효하고 점점 위중하매 시백과 박씨를 불러 앉히고 못내 슬퍼하시다가 세상을 이별하시니, 백일 내에 부모 양위 구몰하시는지라. 어찌 망극하지 아니 하리오.

초종 범절을 예로써 하고 애통을 마지 아니하더라.

각설하고 호적이 강성하여 자주 침범하매 경업이 백전백승하여 물리치고 북방을 굳게 지키더니, 호왕이 제신을 모아 이르기를

“우리나라 지방이 광활하나 조선 임경업을 제어할 신하가 하나도 없으니 어찌 가련하지 아니 하리오.”

하니 제신이 묵묵부답하더니, 이때 호왕의 중전비는 비록 여자나 만고에 없는 영웅이라. 천문을 통하고 지리를 살피고 앉아서 천 리 밖의 일을 알고 서서 말 밖의 일을 아는지라. 이러함으로 왕비 호왕께 여쭙기를

“첩이 근자에 천기를 살펴보니 조선에 신인이 있는가 싶으니, 만일 신인이 있을진대 설사 경업을 제어하여도 조선을 도모하기 어려울 듯하나이다.”

호왕이 크게 놀라 이르기를

“내 평생 경업을 두려워하기를 팔 년 풍진에 역발산하던 초패왕과 삼국시절의 조자룡보다 더 두려워하였더니 또 그 위에 뛰어나는 신인이 있을진대 어찌 다시야 엿볼 뜻을 두리오.”

탄식을 마지 아니하거늘 왕비 다시 여쭙기를

“이제 천기를 보니 조선 운수가 다 다하였는지라. 그러나 백만대병을 보내어도 그 신인 없애기 전에는 조선을 도모하기 어려우니, 첩이 한 묘계를 생각한지라. 자객을 구하여 먼저 조선에 보내어 그 신인을 없앤 후에 조선을 도모함만 같지 못하나이다.”

호왕이 이르되

“그러하오면 어떠한 사람을 보내고자 하시느냐.”

왕비 대답하기를

“조선은 재물을 탐하고 미색을 좋아하오니, 이제 계집을 구하되 인물은 추월 같고 문장은 이백이요 필법은 왕희지요 언어 구비함은 육국 종횡 시에 소진장의를 겸하고 칼 쓰기는 조자룡 관운장을 냉소하고 의량은 제갈공명 같은 계집을 보내면 성사할 듯하나이다.”

하니 호왕이 듣고 이르되

“그 꾀가 가장 기묘하다.” 하고 즉시 제신과 의논하여 사방으로 구하더니, 마침 육국신녀 중에 길홍대라 하는 계집이 있으되 인물은 당명황의 양귀비 같고 언어는 소진장의를 냉소하고 금술은 염파이목을 비웃고 용맹은 용호 같은지라. 왕비 호왕에게 여쭙기를

“길홍대는 금술과 의량과 문필이 초월하고 겸하여 인물이 절색이요 또 만부부당의 용력을 가졌으니 사람을 보내면 성사할 듯하나이다.”

하니 호왕이 크게 기뻐하여 길홍대를 불러 보고 이르되

“네가 나아가 조선을 엿보고 대공을 이루어 이름을 세워라.”

하니 길홍대 아뢰기를

“소녀 재주 없사오나 국은이 망극하오니 어찌 수화 중인들 피하오리까.”

호왕이 이르되

“네 말이 가장 기특하도다. 조선에 나아가 신인의 머리를 베어올진대 천금 상에 만호후를 봉할 것이요 이름을 죽백에 올려 만세에 유전하게 하리라.”

길홍대 아뢰기를

“소녀 재주 없사오나 한번 조선에 나아가 영웅과 요술지인을 한 칼에 베어 대왕의 근심을 덜리이다.”

왕이 백반 당부하되

“조선에 나아가면 언어가 다를 것이니 자세히 알고 가라.”

언어 상통과 조선 풍속을 가르친 후에 다시 일러 이르기를

“조선에 나아가거든 먼저 장안에 들어가 우의정 집을 찾아가면 신인이 있을 것이니 문답은 여차여차하고 부대 재주를 보이지 말고 신인을 유인하여 머리를 베어 가지고, 오는 길에 의주에 들어가 임경업을 베어 가지고 돌아오되 부대 조심하여 대사를 그르치게 말라.” 하니 길홍대 하직하고 나와 행장을 차려 바로 동해를 향하여 장안에 도달하였더라.

각설하고 이때 박씨부인이 천문을 살펴보고 우상을 청하여 이르기를

“아무 달 아무 날에 어떠한 여자 문하에 와서 문안 후에 수작이 황홀할 것이니 부대 조심하여 친근히 대접하지 말고 피화당으로 인도하여 보내소서.”

우상이 대답하기를

“어떠한 여자관대 날을 찾아 오나이까.”

부인이 이르기를

“그는 나중에 알 것이어니와 수다히 번설하지 마옵고 내 말대로 하여 낭패되게 마옵소서. 그 계집이 오면 사랑에서 유하기를 청할 것이니 부대 조심하여 그 간계에 속지 마옵소서. 그 여인의 얼굴이 기묘하고 백태 구비할 뿐더러 문필이 넉넉하니 그 기묘한 것을 사랑하여 만일 동침하다가는 큰 화를 당할 것이니 부대 그 간계에 속지 말고 피화당으로 보내옵소서. 그새에 술을 빚되 한 그릇은 쌀 두 말 열 되를 조합하여 빚고 또 한 그릇은 순주로 빚어두고 안주를 많이 준비하였다가 그날이 당하거든 첩의 말대로 여차여차하소서.”

우상이 듣고 한편 이상히 여겨 허락하고 주안을 많이 장만하더라. 이때 길홍대 불칙한 마음으로 조선에 도달하여 승상 댁을 찾는지라. 그날이 당하매 과연 여자 치레를 능란히 하고 승상 전에 문안하거늘 승상이 묻기를

“너는 어떠한 여인이냐.”

길홍대 대답하기를

“소연은 지방 여기저기에 사옵는 시골 기생으로 장안 구경 왔사옵다가, 노비도 부족하고 묵을 곳이 마땅치 못하와 두루 방황하다가 외람되이 대감 문전에 이르렀나이다.”

승상이 이르기를

“그러하면 근본 어디 살며 성명은 무엇이라 하느냐.”

길홍대 공손히 답하기를

“소녀 사오기는 강원도 회양에 사옵고, 일찍 부모를 잃고 유리걸식하다가 그 고을 관비로 정속하매 이름을 설중매라 하나이다.”

언어 유순하고 태도 비범하거늘 승상이 그 거동을 살펴보니 예사 계집과 다른지라, 마음속에 의심하여 자리를 주어 앉힌 후에 이윽히 살피며 수작을 난만히 할 새, 문필이 넉넉하고 말하는 거동은 청산유수 같고 의량은 창해 같고 문답이 능란한지라. 승상이 크게 칭찬하여 이르기를, 장안에도 문장재사 허다하나 이에 미치지 못할지라. 극히 사랑하시며 박씨 하던 말을 생각하니 의혹이 만한지라. 다시 일러 이르기를

“지금 석양이 산에 지고 날이 부족하니 후원 피화당으로 들어가 편히 유하라.” 하시니 그 여인이 대답하기를

“소인은 몸이 하방 천기로 외람되이 대감 전에 범하였사오니 오늘 밤에 대감을 모시고 아득한 마음을 명백히 깨칠까 하나이다.”

승상이 이르기를

“나도 너와 함께 동고할 마음이 간절하나 금야에 호번할 일이 있어 너와 동침을 못하고 후기를 두나니 섭섭히 생각지 말고 내당에 들어가 편히 유하라.” 하니 그 여인이 답하여 이르기를

“소녀 같이 미천한 몸이 생심인들 어찌 존귀한 부인을 모시옵고 하루 저녁이라도 지내오리까. 극히 불가하나이다.”

승상이 이르되

“네 말이 사세 당연하나 부인과 너는 피차 여인이라 무슨 허물하리오.”

하시며 즉시 시비 계화를 불러 분부하여 이르기를

“이 여인을 데려다가 피화당에 편히 유하게 하라.”

하시니 계화 명을 받들고 즉시 그 여인을 인도하여 피화당으로 들어가, 박씨께 대감의 분부하시던 말씀을 여쭈니 박씨 듣고 그 여인을 청하니 그 여인이 들어와 서로 예를 마친 후에 자리를 정하니 박씨 묻기를

“그대는 어떠한 사람이관대 내 집을 찾아왔느냐.”

그 여인이 이르되

“소녀는 지방 천기이옵더니 경성에 구경 왔사옵다가 길을 잃고 외람되이 댁을 찾아왔사오니 황공하기 그지없나이다.”

박씨 이르기를

“그대 행색을 보니 범인과 다른지라. 헛되이 먼 길만 허비하고 부질없이 찾아왔도다.” 하고 계화를 불러

“방금 손님이 왔으니 주효를 들이라.” 하니 계화 명을 받아 옥반에 선찬을 갖추어, 술은 두 그릇을 가져다가 문밖에 감추고 계화로 하여금 술을 권할 새, 독주는 그 여인에게 순배하고 순주는 박씨에게 순배하니, 그 여인이 행역에 곤하여 기갈이 심한지라 조금도 사양하지 아니하고 한 동이 술을 두어 순배에 마시니 그 거동이 범인과 다른지라. 박씨 또한 먹는 법이 조금도 취기가 없는지라. 이때 승상과 가인들이 그 행색을 보고 이상히 여겨 뒷문 밖에 숨고 그 거동을 이윽히 보다가 열어 사람이 아니 놀라는 이 없더라. 이때 길홍대 독주를 실컷 먹으매 술이 크게 취하여 박씨에게 청하여 이르기를

“소녀가 행역에 곤한 중에 주시는 술을 많이 먹사와 크게 취하오니 잠깐 눕기를 청하나이다.”

박씨 대답하기를

“술이 있으면 손님을 대접하는 것은 예의의 상사요 인류의 통의라, 어찌 내 집에 오신 손님을 공경하지 아니하리오.”

그 여인이 이르기를

“이같이 정성 들여 대하시니 황공감사하나이다.” 하며 수작이 난만하되 피차 차등이 없는지라. 그 여인이 생각하되, 우리 왕비께 하직할 때에 하시기를 조선에 나가서 우의정 집을 찾아가면 자연 알 일이 있으리라 하시더니, 과연 승상의 상을 보니 다만 어진 재상 뿐이요 다른 조화는 없어 보이기로 염려 없이 여겼더니, 부인의 상을 보니 비록 여자나 미간에 천지조화를 은근히 품었으니 이 사람은 곧 신인이라. 만일 이 사람을 살려두면 우리 왕상이 조선 도모하기 어려울지라. 어찌 근심이 되지 아니하리오. 내 좋은 묘계를 내어 이 사람을 죽이리라 하며 왕상의 근심을 덜고 내 이름을 천추에 유전하리라 하여 마음속에 크게 기뻐하였더니, 호사다마라. 술이 크게 취하거늘 박씨에게 청하여 이르기를

“황공하오나 자기를 청하나이다.”

박씨 허락하고 베개를 주며 이르기를

“행역에 곤할 것이니 자라.”

하거늘 길홍대 베개를 베고 눕더니 잠이 들었는데, 두 눈이 화등잔 같고 불덩이가 굴러나와 방 안에 구르며 자는 숨결에 방문이 열렸다 닫혔다 사람의 정신을 아찔케 하는지라. 비록 여자나 범 같은 장사여늘 어찌 놀랍지 아니하리오. 박씨 또한 자는 체하다가 일어나 그 여인의 행장을 열어보니 칼이 있으되 주홍으로 새기기를 비련도라 하였더라. 박씨 그 칼을 만지려 하니 그 칼이 변하여 나는 제비가 되어 천장으로 솟으며 박씨를 향하여 해코자 하거늘, 박씨 급히 진언을 외며 술법을 부쳐 막으니 그 칼이 감히 범하지 못하고 변화를 못하는지라. 그제야 그 칼을 들고 소리를 벼락같이 지르며 길홍대를 깨니, 길홍대 바야흐로 잠을 깊이 들었다가 벼락 같은 소리에 잠을 깨어 혼미 중에 일어나 앉으니, 박씨 비련도를 비껴 들고 꾸짖어 이르기를

“무지하고 개 같은 연아, 네가 호국 요물 길홍대 아니냐.”

하는 소리 천지가 무너지는 듯하니, 그 여인이 혼불부신하고 정신이 날아가 아무리 할 줄을 모르다가 겨우 정신을 차려 고개를 들어보니, 박씨 칼을 들고 위엄은 홍문 잔치에 번쾌가 항장을 대하여 머리카락이 곤두서고 눈자위가 찢어져 살기 충천한 듯한지라. 길홍대 바로 보지 못하며 말을 못하고 앉았다가 겨우 진정하여 여쭙기를

“부인께옵서 어찌 이같이 아시나이까. 과연 길홍대로소이다. 황공무지하오나 어떠한 연고로 이같이 엄히 문초하시나이까.”

부인이 눈을 부릅뜨고 고성대질하여 이르기를

“너는 일개 자객으로 개 같은 네 왕의 말을 듣고 당당한 우리 예의지국을 해하려 하니 어찌 살기를 바라리오. 나는 여자나 조그만 네 간계에 어찌 속으리오.”

하며 노기등등하여 바로 비련도로 길홍대의 머리를 겨누며 우레 같은 소리를 벼락같이 지르고 꾸짖어 이르기를

“개 같은 오랑캐 연아, 내 말을 들어보라. 우리 대감께옵서 왕명을 받자와 아국 장사 임경업을 데리고 남경 사신으로 들어갔더니, 네 나라에서 총마가달의 난을 만나 패망 지경에 당하여 기진맥진하여 대국에까지 청병하매 남경 천자 네 나라를 지탱치 못할 줄을 알고 가긍히 여기사 아국 장사 임경업으로 청병장을 삼아 네 나라를 구하여 사직을 보전하였으니, 그 은혜를 갚으면 태산이 가벼울 것이어늘 도리어 엿보니 이는 배은망덕이요, 또 너 같은 요물을 보내어 우리나라를 탐지하고자 하여 내게 먼저 와서 나를 해하려 하고 내 재주를 시험하려 하니, 이는 도시 네 나라 왕비의 간계라. 나는 너보다 먼저 알았으니 전후사를 생각하면 너를 죽여도 죄가 남는지라. 하고 우선 네 머리를 베어 내 일시 분을 만분지일이나 씻으리라.” 하니

길홍대 황망 중에 생각하니, “한 명의 영웅을 만났으니 성공은 고사하고 화를 만나 목숨을 보전치 못하리라.”

하고 다시 애걸하여 이르기를

“극히 황공하오나 부인 전에 소녀가 어찌 한 말인들 기망하오리까. 여간 잡술을 배운 과실로 제 국왕의 명을 거역하지 못하여 이 지경에 범죄하였으니 죄사무석이로소이다. 요망한 소녀가 천시를 모르고 나왔사옵다가 부인 같은 영웅을 먼저 만났으니 소녀에게 불행 중 다행이라. 바라건대 잔명을 살려 고국에 돌아가게 하옵소서. 소녀의 국왕에게 이같은 말을 전하와 다시는 생심인들 어찌 외람한 마음을 먹게 하오리까. 소녀가 망상의 죄를 지었사오나 이 지경 되기는 소녀의 죄 아니옵고 왕명을 거역하지 못한 죄오니 부인께옵서 깊이 생각하옵소서. 오늘날 잔명을 살려 주시면 부인의 하늘 같은 은덕을 입사와 고국에 돌아가오면 다시 현심을 먹고 무도한 왕의 마음을 개과케 할 것이니 깊이 생각하옵소서.”

박씨 이르기를

“네 왕은 금수와 같도다. 은덕을 배반하고 조선을 업신여겨 해코자 하니 이는 반드시 양호유환이라. 어찌 분하지 아니하리오. 내 뜻은 너 같은 인생을 해할 마음이 아니나 그러나 어찌 살기를 바라리오.”

하신대 길홍대 머리를 숙이고 사죄하여 이르기를

“너그러운 말씀을 들으니 감격무지하나이다.”

하며 무수히 애걸하니 부인이 칼을 잠깐 감추고 분심을 진정하여 이르기를

“내 통분함은 네 왕의 소위를 생각하면 너를 먼저 베어 분심을 대강이라도 달래고자 하나, 인명살해가 상사가 아니요 또 네 왕은 본래 무도하여 이같은 뜻을 고치지 않을 것 같기로 너 같은 인명을 아직 살려 보내니, 돌아가 네 왕에게 내 하던 말을 자세히 전하며, 우리 조선은 비록 소국이나 인재를 시험하리면 영웅명장은 구산 같고 나 같은 변변찮은 재주는 거기에 두량이라. 네 왕비의 말을 듣고 너를 인재로 택출하여 보냈으나 너 같은 요물이 우리 조선에 나와 영웅을 만나기 전에 나 같은 사람을 만나기에 살아 돌아가니, 돌아가서 네 왕에게 이 말을 전하여 차후에는 천명을 순수하되 만일 교만한 마음이 일향 거역하면 내 비록 여자나 영웅호걸을 모아 군사를 거느리고 네 나라에 들어가 죄 있고 없고 간에 씨도 없이 쳐 없앨 것이니 부대 천명을 거역하지 말고 순수하게 하며, 또 말하되 도시 네 왕비의 허물이 아니라 내 나라 국운이 불행하여 이 지경에 당하였으니 수원수구하리오.”

하시며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더라. 길홍대 일어나 배사하여 이르기를

“신명하신 덕택으로 죽을 목숨이 살았사오니 감격무지하여이다.”

부끄러움을 머금고 마음속에 생각하되, 대사를 경영하고 말이를 지척 삼아 나왔다가 성공은 고사하고 본사이 탈로하였으니, 이제는 어찌 성사하기를 바라리오. 그냥 돌아감만 같지 못하다 하고 즉시 본국으로 들어가더라.

각설하고 승상과 가인들이 그 거동을 보고 크게 두렵게 여기더라. 어느 날 승상이 궐내에 들어가 그 사연을 낱낱이 주달하니, 임금과 만조제신이 듣고 크게 놀라며 낯빛이 하얗게 질려 이르기를

“어찌 근심이 아니 되리오. 즉시 의주로 관자하되, 호국에서 길홍대라 하는 계집을 보내어 여차한 일이 있으니 만일 그런 사람이 내려가거든 부대 그 간계에 속지 말고 명심하라.”

하였더라. 나라에서 박씨의 신명함을 탄복하고 충효를 칭찬하시며 공을 의논하사 정열부인 가자를 내리시고 삼품을 먹게 하시고, 임금이 우상에게 하교하여 이르기를

“경의 부인이 아니면 화를 어찌 면하리오.”

하시며 무도한 북적이 우리나라를 엿보니 어찌 통분하지 아니하리오. 차후에는 도적 오는 기미를 자세히 알아 주달하시더라.

각설하고 길홍대 본국에 들어가 현신하니 호왕이 묻기를

“이번에 조선에 나아가 어찌하고 왔느냐.”

길홍대 답하여 아뢰기를

“소녀 이번에 명을 받들고 대사를 경영하고 말이 타국에 갔사옵다가, 성공은 고사하고 만고에 짝없는 박씨 신인을 만나 목숨을 보전치 못하고 타국 원혼이 될 것을, 누누이 애걸할 뿐더러 어진 덕을 입어 살아왔사오며, 박씨 하는 말이 대왕께옵서 배은망덕한다 하며 금수에 비유하여 심책을 마지 아니하고, 또 이르되 일언이라도 범남한 뜻을 두면 박씨 비록 여자나 영웅을 이루어 본국에 들어와 멸망의 화를 주리라 하옵고, 너의 왕이 무도하여 이같은 뜻을 둔다 하며 언어 정직하고, 이 말을 대왕께 전하라 하더이다.”

호왕이 대로하여 이르기를

“네가 부질없이 나갔다가 공은커녕 대사를 낭패하였으니 어찌 분하지 아니하리오.”

하며 급히 왕비를 청하여 이르기를

“길홍대 조선에 나아가 신인과 명장을 죽이고 오라 하였더니 성사는 고사하고 대사를 그르쳐 치욕을 듣게 하니 어찌 분하지 아니하며 또 조선을 도모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분함을 어디 가 갚으리오.”

왕비 대답하기를

“첩이 한 묘계 있사오니 행하여보사이다.”

왕이 이르되

“무슨 묘계오이까. 듣고자 하나이다.”

하니 왕비 이르기를

“조선에 비록 신인과 명장이 있사오나 간신이 있어 충신의 말을 듣지 아니할 것이니, 이제 대왕께옵서 급히 대군을 거느려 조선을 치되 북으로는 행하지 말고 바로 동으로 행하여 동해를 건너 동대문을 치고 곧 장안을 쳐 없애면 반드시 도성을 도모하리다.”

하니 호왕이 듣고 크게 기뻐하여 즉시 한우와 용골대로 대장을 삼아 정병 삼십만을 조발하여 주며 이르기를

“경들을 택취하여 보내나니 부대 심을 다하여 성공하려니와 북으로 가지 말고 동으로 행하여 동해를 건너 동대문을 깨치고 들어가 장안을 쳐 없애면 대공을 이룰 것이니 삼가 조심하여 성공하고 돌아와 이름을 죽백에 올려라.”

하니 두 장수가 명을 받들고 나오니 왕비 두 장수를 불러 분부하여 이르기를

“그대들은 왕상의 비계를 어기지 말고 지금 군사를 거느리고 가되, 조선 지경에 당하거든 날랜 군사로 하여금 의주와 도성 왕래하는 길 중간에 복병하였다가 도성에서 의주 부윤 임경업에게 소식을 통하지 못하게 하라. 하며 장안을 범하되 우의정 시백의 집 후원은 범하지 말라. 그 집 후원에 피화당이라 하는 초당이 있으되 사면에 신기한 나무 무성하여 있을 것이니 만일 범하면 성공은 고사하고 성명을 보전치 못하고 고국에 돌아오지 못할 것이니 부대 명심하여 성공하고, 바로 십만대병을 거느리고 동으로 행하여 동해를 건너 장안을 쳐라.”

하니 두 장수가 명을 받들고 당일에 정병 십만을 거느리고 주야 배도하여 조선을 향하더라.

각설하고 이때에 박씨 피화당에 있다가 승상을 청하여 이르기를

“지금 북방 호적이 기병하여 조선 지경에 당도하니 급히 탑전에 주달하여 의주 부윤 임경업을 불러 지금 동으로 오는 도적을 방비하옵소서.”

승상이 크게 놀라 이르기를

“내 소견은 도적이 들어온다 하여도 북적인즉 북방으로 와 침범할 것한지라. 의주를 비우고 임경업을 불러올렸다가 호적이 뜻밖에 들어와 북방을 탈취하면 나라가 위태할지니 그것으로 근심하나이다. 부인은 무슨 연고로 북은 염려 아니하시고 동편을 심려하여 막으라 하시나이까.”

“북적은 본래 인의는 없고 간사한 꾀만 한지라 임장군을 두려워하여 북을 감히 범하지 못하고 동해를 건너 바로 동문을 깨치고 들어와 도성을 요란케 할 것이니 어찌 분하지 아니하리오. 부대 내 말을 허투루 알지 마옵고 급히 주달하여 착실히 예비하옵소서.”

하거늘 승상이 듣고 옳이 여겨 급히 탑전에 들어가 부인의 하던 말을 세세히 주달하니, 임금이 들으시고 크게 놀라사 만조제신을 모아 급히 의논할 새, 제신이 창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더니 좌의정 원두표 출반 아뢰기를

“북적이 본래 간특한지라 박씨의 말씀이 가장 옳사오니, 그 말을 좇아 동으로 오는 도적을 막음이 가하옵고 급히 임경업을 불러 올림이 마땅하나이다.”

하니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한 재상이 낯빛을 바꾸어 아뢰기를

“좌의정 원두표의 말이 극히 불가하나이다. 북방 호적이 누차 임경업의 도움을 입었사오니 무슨 마음을 믿고 우리 조선을 엿보며, 설사 기병하여 온대도 반드시 의주로 들어올 것이니, 만일 의주를 비우고 임경업을 불러올려 동방을 지키다가 불의에 도적이 북방으로 들어와 진을 치고 인읍을 탈취하면 북도 강병을 거두어 도성을 향하여 올 것이니 그 형세 가장 위태할지라. 누가 능히 당하리오. 국가 흥망이 조석에 있거든 어찌 요망한 계집의 말을 들으시고 중지에 있는 임경업을 불러올리려 하시나이까. 도적을 막을진대 의주를 굳게 지킴이 옳거늘 동으로 오는 도적을 막으라 하니 이는 나라를 망케 함이 더욱 경황하나이다.”

임금이 이르시되

“박씨는 신명지감이 남달리 과인하여 이미 시험한 일이 있거늘 어찌 요망하다 하느냐. 그 말을 좇아 동으로 오는 도적을 막음이 가할까 하노라.”

그 재상이 또 아뢰되

“때가 시절이 좋고 나라가 태평하와 강구에서 격양가를 일삼거늘, 이같은 태평시절에 조그만 요괴로운 계집의 말을 발설하여 조정을 경동케 하고 민심을 요란케 하니 죄사무석이요 극히 요망한지라. 요망한 말을 들으시고 깊이 근심하옵시어 국정을 밝히지 아니하시니, 원컨대 이 사람으로 국법을 다스리옵소서.”

하며 왕명을 무수히 거역하니 이 사람은 대역무도 김자점이라. 소인은 친근히 하고 충신은 모해하여 국권을 제 마음대로 하는지라. 이같은 불칙한 놈이 끝끝내 나라 망하는 일만 좋아하여 국사를 전폐하고 날로 놀기만 일삼되, 제신은 그 권세를 두려워하여 감히 입을 열지 못하더라.

임금이 또한 크게 노하사 유예미결하시니 우상이 역시 제어하지 못하고 분심을 이기지 못하여 바로 집으로 돌아와 그 사연을 낱낱이 이야기하니, 박씨 듣고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여 이르기를

“슬프다 우리나라가 불행하여 간신이 조정을 잡았구나. 지금 호적이 머지않아 도성에 침범하게 되오나 소인이 국권을 잡아 위태하게 되오니 어찌 분하지 아니하리오. 이제 내 말을 좇아 빨리 임경업을 불러 정병을 조발하여 도적 오는 길에 매복하였다가 도적이 당도하거든 급히 막으면 수만 병이라도 멸할 것이요 사직을 안보하고 염려를 덜 것이어늘, 손을 묶어 도적의 칼을 받으려 하니 어찌 망극하지 아니하리오.”

하며 승상에게 이르기를

“국가에 불의지변이 있사오니 부대 용방비간의 충성을 다하여 사직을 받들게 하옵소서.”

하고 대성통곡하니 승상이 강개지심을 이기지 못하여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고 궐내에 들어가니 이때는 병자년 납월이라.

홀연 동대문으로서 방포일성에 고각함성이 천지 진동하며 무수한 호병이 문을 깨치고 물밀 듯 들어오니, 기치와 창검은 천지를 흔들며 살기 성중에 가득하니 백성이 불의지변을 당하였는지라. 호장이 군사를 호령하여 사면을 에워싸고 충돌하니 죽음이 산 같고 곡성이 성중에 가득하더라. 임금이 창황 망극하여 어찌할 줄을 몰라 이르시되

“이제 도적이 성중에 가득하여 백성을 살해하니 국가사직이 위태함이 시각에 있는지라 어찌할꼬.”

하시며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니 만조제신과 궁중 제인이 다 목 놓아 통곡하더라. 이때에 이승상이 시위하였다가 여쭙기를

“이제 사세 급하오니 남한산성으로 피란하사이다.”

임금이 혼미 중에 그 말을 옳이 여겨 옥교를 타시고 남문을 열고 남한산성으로 행하여 가실 새, 전면에 도적이 내달아 길을 막거늘 우상이 진심갈력하여 적장을 물리치고 남한산성에 들어가니라. 이때 호장 한우와 용골대 십만대병을 거느리고 장안을 침범할 새, 바로 군사를 몰아 궐내에 들어가니 궐내가 비었는지라. 남한산성으로 피란한 줄을 알고 용골대 아우 용울대로 장안을 지키며 물색을 수탐하라 하고, 군사 백여 명을 거느리고 들어가 성을 에워싸고 침범하는지라.

각설하고 이때 박씨 일가친척 부인을 피화당에 모아 병란을 피하더니, 모든 부인이 용골대 장안에 웅거하여 물색을 수탐한다는 말을 듣고 놀라 도망하고자 하거늘 박씨 만류하여 이르기를

“이제 사면에 도적이 지키거든 도망하면 어디로 가리오.

도망하지 말고 있으면 자연 화를 면할 도리 있다.”

하더니 호장 용울대 군사 백여 기를 거느리고 사면을 다니며 물색을 탐지하다가 한 집에 당도하여 바라보니, 정결한 초당이 있으되 전후에 초목이 무성한 가운데 무수한 부인이 피란하거늘, 용울대 살펴보니 나무마다 용과 범이 머리와 꼬리를 마주 하고 가지마다 뱀과 새가 되어 변화 무궁하고 살기 가득한지라. 용울대 박씨의 신기함을 알지 못하고 피화당에 있는 물색을 수탐하고자 하여 급히 들어가니, 순식간에 청명하던 날이 흑운이 일어나며 뇌성벽력이 천지 진동하더니, 사면에 무성한 나무가 변하여 무수한 갑병이 되어 점점 에워싸고 가지와 잎사귀는 기치와 창검이 되어 위엄이 서릿발 같고 살기충천하니, 용울대 그제야 우승상 집인 줄 알고 급히 도망하고자 하더니 피화당 사면으로 칼 같은 바위 있어 하늘에 닿은 듯 겹겹이 둘러 길을 막거늘, 용울대 혼불부신하여 어찌할 줄 모르더니 홀연 어떠한 여자가 칼을 들고 언연히 나와 꾸짖어 이르기를

“너는 어떠한 도적이관대 당돌히 들어와 잔명을 재촉하느냐.”

용울대 합장배례하며 이르기를

“누구 집인지 모르고 외람되이 들어왔거니와 은혜를 베풀어 잔명을 구제하옵소서.”

계화 대답하기를

“나는 이 집 시비 계화이어니와 너는 무슨 연고로 사지에 들어왔느냐. 조그만 심을 믿고 이같이 하느냐. 우리 부인께옵서 네 머리를 베어오라 하시기로 너를 베려 하고 왔으니 빨리 목을 늘여 내 칼을 받아라.”

하니 용울대 그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창을 들어 계화를 치려 하니 창 든 손이 혈맥이 없어지거늘, 울대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여 이르기를

“슬프다 대장부 출세하여 일국 대장이 되어 말이 타국에 나왔다가 대공은 고사하고 조그만 여자 손에 죽게 되니 어찌 통분하지 아니하리오.”

계화 위하여 이르기를

“호국장사 용울대야. 불쌍하고 가련하다. 대장부 명색으로 대공을 경영하고 출전하였다가 대공은 어디 가고 잔명이 허수하다. 잔약한 여자를 당하지 못하여 탄식낙루 웬일인다. 너 같은 소장부야 말해 무엇하리. 내 말을 들어보라. 무도한 네 왕이 천의를 돌아보지 않고 외람되이 생각하여 우리 예의지국을 해코자 하여 너 같은 소장부를 보내어 잔명을 보전치 못하게 되니, 네 왕의 일을 생각하면 우습고 가련하고 또 네 신명을 생각하니 측은하고 가긍하다. 네 목숨이 오늘날 내 손에 달렸으니 아무리 용서하고자 하나 천명을 거역하지 못하여 개 같은 목을 내 옥 같은 손으로 부득이 베니 무지한 필부놈아 날을 원망하지 말라.”

하며 말이 끝나자 칼을 들어 울대를 치니 머리가 투구를 쫓아 번쩍 나가 말에서 떨어지는지라. 계화 즉시 머리를 들고 피화당에 들어가 부인께 올리니, 부인이 울대 머리를 문밖에 내치니 그제야 풍운이 고요하고 날씨 맑아지는지라. 다시 울대 머리를 집어다가 후원 나무에 달아 두고 여러 사람이 보게 하더라.

각설하고 슬프다. 국운이 불행하여 이같은 변을 당하니, 전하께옵서 남한산성으로 가시고 호적은 물밀 듯 쳐들어와 제신을 생금하고 호령이 서릿발 같은지라. 호통일성에 무릎을 호적에게 꿇어 항서를 써 올리니 어찌 분하지 아니하리오. 호적이 바로 들어가 왕비와 세자 대군 삼형제분을 생금하여 호국으로 압송하려 행군하니, 전하께옵서 이 거동을 보시고 통곡하며 기절하시니 만조제신도 하늘을 우러러 통곡하더라. 시백이 전하를 위로하여 옥체를 보중하옵소서. 김자점이 국권을 농락하여 나라를 망케 하였으니 어찌 분하고 절통하지 아니하리오. 장안 백성이 남녀노소 없이 김자점의 고기를 씹고자 하더라.

각설하고 이때 용골대 장안으로 들어오더니 전군이 보하되 용울대가 박부인 시비 계화 손에 죽었다 하거늘, 용골대 듣고 기막혀 대성통곡하니 역시 볼만한지라. 용골대 울음을 그치고 이르되, 우리 이미 조선에 나와 성공은 하였거니와 내 동생을 죽였으니 원수를 갚으리라 하고 빨리 말을 몰아 장안을 향하더니, 어떠한 집 후원에 나무 꼭대기에 울대 머리가 달렸거늘 머리를 보고 대성통곡하며 전군에게 묻기를

“저 집이 우승상 이시백의 집이 아니냐.”

하니 전군이 대답하기를

“그러하오이다.”

용골대 더욱 분을 이기지 못하여 바로 칼을 들고 들어가려 하거늘, 적진 도원수 한우 피화당 사면에 무성한 나무를 보고 크게 놀라 용골대를 만류하여 이르기를

“그대는 내 말을 들어보고 경솔히 가지 말라. 초당 사면에 무성한 나무를 보니 범상하지 아니한지라. 옛날 공명의 팔진도와 사마양저의 금사진을 겸하였으니 어찌 두렵지 아니하리오.

그대 동생은 본래 무재한지라 저러한 험지를 모르고 남을 경솔히 여기고 들어갔다가 신명을 재촉하였으니 어찌 두렵지 아니하리오. 그대는 옛날 삼국시절의 육손의 일을 생각하여 저러한 험지에 들지 말라.”

하니 용골대 더욱 분을 참지 못하여 칼을 들고 땅을 두드리며 이르기를

“그러하오면 우리 동생의 원수를 어찌 갚사오리까. 말이 타국에 형제 함께 나왔다가 대사를 성공한 후에 동생을 우연히 죽이고 원수도 갚지 못하고 어찌 조그만 여자에게 굴복하단 말가. 부끄러운 일은 남에게 알리지 못할 것이요 또 치욕스러운 말을 면하지 못하리라.”

하니 한우 이르기를

“그대 일시 분함을 참지 못하여 용맹만 믿고 저러한 험지를 들어갔다가 복수하기는 고사하고 도리어 신명을 보전치 못할 것이니 아직 잠깐 진정하여 신기한 재주를 살펴보라.

비록 억만대병을 거느리고 들어갈지라도 그 안에는 엿보지 못하고 군사 하나도 살아오지 못할 것이어늘 하물며 단기로 들어가고자 하니 지각이 저러하고 어찌 살기를 바라리오. 이는 스스로 화를 자초함이요 일국 대장이라 할 수 있으리오.”

용골대 이 말을 옳이 여겨 들어가지도 못하고 군사를 호령하여 이르기를, 저 나무를 에워싸고 일시에 불을 놓으라 하니 홀연 광풍이 일어나며 오색구름이 자욱한 가운데 수목이 변하여 무수한 장졸이 되어 천지 진동하며 허다한 비룡과 맹호 서로 연하여 풍운을 이루어 천지 아득하고, 기치창검은 전후에 겹겹이 사이며 공중으로 신장이 내려와 한 무리의 신병을 몰아 쳐 없애니 함성 소리 태산이 무너지는 듯하며 항오를 차리지 못하여 호적이 서로 밟혀 죽는 자 부지기수라. 호장들이 황망 중에 남은 군사를 거두어 물러 퇴진하니 그제야 천지 명랑하고 살벌지성이 그치며 신장이 간 곳 없는지라. 호장들이 보고 더욱 분기를 이기지 못하여 다시 칼을 들고 달려들고자 하니, 청명하던 날이 시각에 또 어두워지며 운무가 크게 일어 지척을 분별하지 못할레라. 용골대 감히 들지 못하고 울대의 머리만 바라보고 하늘을 우러러 탄식할 즈음에 수목 사이로 한 여자가 언연히 나서며 크게 소리 질러 이르기를

“이 무지한 용골대야, 네 동생이 내 칼에 죽었거늘 너조차 죽고자 하여 목숨을 재촉하느냐.”

용골대 이 말을 듣고 더욱 분하여 꾸짖어 이르기를

“너는 어떠한 여자관대 대장부를 모르고 욕설로 희롱하느냐. 내 동생이 불행하여 네 손에 죽었거니와 우리는 네 나라 왕상께 글월을 받았으니 네가 독히 우리를 해하려 하느냐. 이는 과연 나라를 모르는 여자로다. 살아도 쓸데없고 죽음을 재촉하거든 빨리 나와 내 칼을 받아라.” 하니 계화 그 말을 들은 체도 아니하고 울대의 머리만 가리키며 무수히 조롱하되

“나는 박부인의 시비 계화이어니와 너를 생각하니 가련하고 녹녹하도다. 네 동생은 나 같은 잔약한 손에 죽었는데 너도 나를 어찌 못하니 어찌 가긍하지 아니하며 녹녹하지 아니하랴.”

용골대 듣고 분기 대발하여 철궁에 화전을 먹여 쏘니 그 살이 육십 보 안에 떨어지고 감히 맞지 못하는지라. 용골대 더욱 분하여 군사를 호령하여 일시에 활로 쏘라 하니 군사 청령하고 무수히 쏘되 살이 하나도 맞지 못하는지라. 살만 중간에 허비하니 용골대 기가 막혀 어찌할 줄 모르는 중에 그 신기함을 탄복하며 분심을 참지 못하여 서로 이르되, 우리 억만대병이라도 감히 당하지 못할 것이니 본국 군사로 하여금 쳐보리라 하고 김자점을 불러 이르기를

“너도 금일은 우리나라 신하라. 빨리 군사를 조발하여 원수를 갚아라. 우리나라 신하 되어 어찌 내 영을 거역하리오. 만일 위령하면 군법으로 시행하리라.”

분부가 서릿발 같은지라 김자점이 황공하여 대답하되

“어찌 장군의 영을 거역하오리까.”

즉시 방포일성에 군사를 호령하여 팔문금사진을 에워싸라 하니 팔문금사진이 변하여 청청한 솔이 되는지라. 호장이 그 변화를 보고 더욱 분하여 한 꾀를 생각하고 군사를 명하여 팔문금사진 사면에 깊이 파고 화약 염초를 무수히 묻고 소리 질러 이르되

“네가 아무리 천병만마를 가졌다 한들 오늘날이야 네가 어찌 살기를 바라리오. 죽기 아깝거든 빨리 나와 항복하라.”

하고 욕을 무수히 하되 피화당이 고요하여 아무 소리도 없는지라. 호장이 군사를 호령하여 일시에 불을 지르니 화약 폭발하는 소리 천지가 무너지는 듯하고 화광이 충천하며 불이 사방으로 일어나니, 박씨 계화를 명하여 옥병수를 초당 후원에 던지고 왼손에 옥화선을 들고 오른손에 백화선을 들고 오색 실로 부작을 매어 화염 중에 던지니, 일시에 대풍이 일어나며 화약 불이 도로 적군 진중으로 불며 오니, 호병이 화염 중에 들어 천지를 분별하지 못하고 불에서 죽는 자 부지기수라. 용골대 크게 놀라 급히 군사를 물리고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여 이르기를

“기병하여 나온 후에 조선을 호통일성에 도모하고 승전고를 울리고 회정하는 길에 한 여자를 만나 불쌍한 동생을 죽이고 십만대병을 거의 다 죽였으니, 이같은 분한 일을 어디 가서 갚으며 또 무슨 면목으로 황상과 왕비께 뵈오리오.”

통곡을 마지 아니하며 제장과 더불어 의논하여 이르기를

“아무리 하여도 그 여자는 당하지 못하리니 그 여자에게 복수하기는 고사하고 항복도 받을 수가 없으니 급히 행군함만 같지 못하다.”

하고 즉시 장안 물색과 왕대비와 세자 대군 삼형제분을 모시고 행군할 새, 상하 없이 곡성 소리 장안이 진동하거늘, 박씨 분로를 이기지 못하여 계화로 하여금 크게 소리 질러 이르기를

“무지한 오랑캐야. 네 왕은 인의를 모르고 너 같은 구린 놈들을 보내어 우리나라를 침범하니 국운이 불행하여 패망을 당하였거니와, 무슨 연고로 아국 인물을 거두어 가느냐. 그러나 우리 왕대비를 모셔가지 말라.”

하니 호장이 그 말을 듣고 이르기를

“네 말이 녹녹하고 가소롭다. 우리 이미 네 나라에 와서 글월을 받았으니 데려가고 아니 데려가기는 우리 장중에 있으니 부질없는 말을 내지 말라.”

하며 욕설을 무수히 하거늘 계화 또 소리 질러 이르기를

“너희들이 내 말을 일향 거역하면 내 재주를 구경하라.”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무슨 진언을 두어 번 외니 홀연 공중으로 두 줄 무지개 일어나며 급한 소나기 폭포수로 오는 중에 천지 아득하며, 또 혹독한 바람이 일어나며 우박이 담아붓는 듯하여 순식간에 소나기와 우박이 얼음이 되어, 호적의 말굽이 땅에 붙고 떨어지지 아니하여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는지라. 호장이 그제야 깨달아 이르기를

“당초에 기병할 때에 왕비 분부하시되 조선에 가거든 장안에 신인이 있을 것이니 부대 우승상의 집 후원을 범하지 말라 하시더니, 우리 깨닫지 못하고 일시 분을 참지 못하고 왕비 분부를 거역하다가 도리어 앙화를 받아 십만대병을 거의 죽일 뿐더러 울대를 죽였으니, 무슨 면목으로 왕상과 왕비를 뵈오리오. 이제 이미 사세 급하니 바로 박씨에게 비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하고 호장들이 일시에 갑주를 벗어 말안장 위에 걸고 말에서 내려 손목을 묶고 팔문금사진 앞에 나아가 엎드려 애걸하여 이르기를

“소장 등이 기병하여 조선에 나왔으되 무릎을 한 번도 꿇은 바 없더니 이제 박부인의 신명하심으로 비나이다. 부인의 말씀을 좇아 왕비는 아니 모셔가리다.”

하며 무수히 애걸하니 그제야 부인이 주렴을 걷고 나서며 꾸짖어 이르기를

“너희들을 씨도 없이 죽이자 하였더니 십분 안서하여 천명을 순수하거니와, 우리나라가 불행하여 너희에게 글월을 주었으나 무죄한 우리 왕대비와 세자를 부득이 모셔가려 하니 어찌 용서 있으리오마는, 막비운수라 천명을 순수케 하나니 너희 말대로 왕대비는 모셔가지 말고, 부득이 세자 삼형제분을 모셔간다 하니 그도 또한 천의를 거역하지 못하거니와 부대 조심하여 모셔가라. 나는 이곳에 있으되 아는 도리 있으니, 만일 불평케 모셔가면 바로 신장을 보내어 너희들을 씨도 없이 쳐 없앤 후에 내 몸소 네 나라에 들어가 네 왕을 사로잡고 무죄한 백성을 소멸하여 분을 풀 것이니 부대 내 말을 허투루 알지 말라.”

하시니 호장들이 무수히 사례하고 용골대 다시 애걸하여 이르기를

“소장의 동생 머리를 주시면 부인 덕택이 백골난망이로소이다. 깊이 통촉하여 주시면 고국에 돌아가겠사오니 처분하옵소서.”

부인이 이르되

“옛날 조양자는 지백의 머리를 옻칠하여 술잔을 만들어 두고 원수를 갚았으니, 나도 옛사람의 일을 본받아 네 동생의 머리를 옻칠하여 술잔을 만들어 남한산성에 피란하신 분을 위하여 만분지일이나 풀까 하니, 네 경상은 가긍하나 각각 나라 섬기기는 일반이라. 아무리 애걸하여도 그것은 못하겠다.”

하니 용골대 대성통곡할 따름이요 하릴없이 부인께 하직하거늘, 부인이 또 이르되

“너희들이 그 길로 가지 말고 의주로 가다가 임장군을 찾아보라.”

하니 호장들이 그 계교를 알지 못하여 마음속에 헤아리되, 우리가 조선 왕의 글월을 받았으니 서로 떠나기 관계하랴. 다시 하직한 후에 왕대비는 도로 환궁하시고 세자 삼형제분을 모시고 본국으로 돌아갈 새 의주로 행하더라.

이때에 잡혀 가는 사람들이 하늘을 우러러 통곡하며 서로 보고 이르되

“어찌 박부인은 화를 면하고 고국에 안착하여 계시고 우리는 무슨 죄로 말이 타국에 잡혀가는고. 이제 가면 언제나 고국산천을 다시 볼꼬.”

하며 눈물을 금하지 못하거늘 박부인이 계화로 하여금 소리 질러 이르기를

“인간고락은 사람의 상사라. 너무 서러워 말고 안심하여 가옵소서. 십 년 후에 호국에 들어가서 세자 삼형제분을 모셔올 사람이 있을 것이니 부대 먼 길에 평안히 도달하소서.”

하며 만단 위로하더라. 호장들이 조선에 나올 적에 왕비의 말을 들어 북으로 가지 아니하고 동해를 건너, 날랜 군사 삼천을 보내어 의주에서 경성 가는 길 중간에 복병하여 서로 소식을 통하지 못하게 하였더라.

각설하고 이때에 사자가 뜻밖에 의주로 선관하되 중로에서 막는고로, 임경업이 이 기별을 늦게야 듣고 주야로 올라오더니 전면에 복병이 나서 길을 막거늘, 경업이 칼을 들고 한 번 싸움에 물리치고 오더니, 이때 호장들이 의기양양하여 의주로 행하여 오거늘, 경업이 바라보고 분을 이기지 못하여 달려들어 우선 선봉장을 베고 좌충우돌하여 무인지경같이 횡행하여 장졸을 무수히 무찌르니 호장들이 감히 당하지 못하여 죽는 자 부지기수라. 용골대와 한우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며 부인을 원망하며 즉시 글월을 닦아 경업에게 보내게 하더라. 이적에 임장군이 호군을 거의 다 무찌르게 되었더니 사자 왕상의 전교를 올리거늘, 경업이 북향 사배하고 받아보니 이르기를

“오호라 국운이 불행하여 아무 달 아무 날에 호적이 달려들어 성중을 짓밟으니 할 일 없어 남한산성으로 피란하였더니, 십만대병이 그곳으로 달려들어 호통일성에 하릴없이 글월을 하였으니 어찌 슬프지 아니하리오. 막비 천수라. 경의 충성이 이제는 쓸 데 없으니 나가 위유공무득이라 어찌 분하지 아니하며 한심하지 아니하리오. 이왕지사라 호적의 길이나 빌려주어 회정하게 하여라.”

하였거늘 경업이 보기를 마하매 분기를 참지 못하여 칼을 던지고 대성통곡하여 이르기를, 아국의 만고소인이 국권을 마음대로 하여 이같이 되니 명천이 어찌 무심한고 하며 울기를 마지 아니하다가, 분심을 끝내 이기지 못하여 다시 칼을 들고 내달아 호장을 잡아 쓰러뜨리고 고성대질하여 이르기를

“네 나라가 지금까지 지탱하기도 우리 힘인 줄 모르고 무도한 오랑캐 놈들이 우리나라를 침범하니, 분한 마음은 너희 놈을 씨도 없이 죽일 것이로되 너희 목에 다시 칼대기가 들어갈 뿐더러 이미 국운이 불행한지라. 왕명을 거역하지 못하여 즉시 용서하고 너희들을 살려 보내노라.”

하고 군곤 삼십 도에 방송하고 다시 분부하되, 세자 삼형제분을 평안히 모셔가고 착실히 경대하라 하고 일장통곡한 후에 길을 빌려 보내더라.

각설하고 임금이 처음에 박부인의 말을 듣지 못함을 뉘우치고 자책하고, 또 제신이 탄식하여 이르기를

“슬프다 박부인 말대로 하였으면 어찌 이같이 망극한 변을 당하리오.”

하며 임금이 또 탄식하여 이르기를

“박부인이 만일 장부로 났던들 호적을 어찌 두려워하리오. 그러나 여인이 적수단검으로 승전하여 조선을 빛나게 하니 이는 고금에 없는 일이라.”

하시고 이조에 전교하사 박부인으로 충열직첩을 내리시고, 또 궁녀를 보내어 위로하여 이르기를

“오호라 과인이 불명하여 부인의 신명지감과 위국지충을 쓰지 아니하다가 이같이 망극한 변을 당하였으니 차역 천수라 수원수구하리오. 그러나 명천이 감동할지라. 정절과 충심을 다하여 국사를 살피시고 자손을 두어 수복강영하고 만세에 이름을 내내 유전하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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