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 of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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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아니, 아이가 없다고? 2. 내가 못 할쏘냐? 3. 우리 애일 리 없소. 4. 아이는 어디 갔느냐? 5. 어쩌면 좋단 말인가? 6. 웃음이 너무 많구나. 7. 형이상학자를 부릅시다. 8. 물 한 방울 써 봅시다. 9. 다시 넣어 주세요. 10. 달을 보시오. 11. 쉭! 12. 왕자는 어디에? 13. 제가 여기 있습니다. 14. 참 고마운 일이로군요. 15. 저 비를 보세요!



1. 아니, 아이가 없다고?

옛날 옛적, 내가 도무지 날짜를 기억하지 못할 만큼 아주 먼 옛날에, 아이가 없는 왕과 왕비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왕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내가 아는 왕비들은 하나같이 자식을 두었다. 어떤 이는 셋, 어떤 이는 일곱, 어떤 이는 열둘이나 된다는데, 내 왕비에게는 단 하나도 없구나. 이것 참 부당한 일이로다.” 그리하여 왕은 이 일로 왕비에게 심술을 부리기로 작정했다. 그러나 왕비는 착하고 참을성 많은 사람답게 모두 묵묵히 견뎌 냈다. 그러자 왕은 한층 더 심술이 늘었다. 그런데도 왕비는 이 모든 걸 농담으로 받아넘기는 척했고, 심지어 꽤 재미난 농담인 양 굴었다.

“어찌하여 딸 하나를 두지 못한단 말이오?” 왕이 말했다. “아들을 바라는 건 아니오. 그건 너무 큰 욕심일 테니.”

“정말이지 송구하옵니다, 폐하.” 왕비가 대답했다.

“그래야 마땅하오.” 왕이 되받았다. “설마 그걸 자랑으로 삼을 셈은 아닐 테지요.”

그러나 왕은 본래 심보가 고약한 사람은 아니었고, 덜 중요한 일이었다면 기꺼이 왕비의 뜻대로 해 주었을 것이다. 다만 이 일만큼은 나라의 중대사였다.

왕비는 미소 지었다.

“폐하, 부인께는 인내심을 가지셔야 한답니다.” 왕비가 말했다.

과연 왕비는 더없이 다정한 사람이었고, 당장 왕의 소원을 들어주지 못하는 것을 진심으로 안타까워했다.




2. 내가 못 할쏘냐?

왕은 인내하려 애썼으나 별로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니 마침내 왕비가 딸을 안겨 주었을 때, 그것은 왕이 받을 자격 이상으로 과분한 일이었다. 지금껏 울어 본 그 어떤 공주보다도 사랑스러운 어린 공주였다.

아기에게 세례를 주어야 할 날이 다가왔다. 왕은 초대장을 한 장 한 장 제 손으로 썼다. 물론 누군가는 빠졌다. 대개는 누구 한 사람쯤 빼먹어도 별 탈이 없지만, 누구를 빼먹느냐가 문제다. 공교롭게도 왕은 잊을 생각이 조금도 없었건만 그만 잊고 말았는데, 하필 그 대상이 메이큄노이트 공주였으니 참으로 난처한 일이었다. 이 공주는 왕의 친여동생이요, 빠뜨려서는 안 될 사람이었다. 다만 그 여동생은 선왕 아버지에게 어찌나 밉살스럽게 굴었던지, 아버지가 유언장을 쓸 때 그 이름을 잊었을 정도였다. 그러니 오라비가 초대장을 쓰면서 그 이름을 빠뜨린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게다가 가난한 친척이란 제 존재를 떠올리게 할 만한 아무 짓도 하지 않는 법 아닌가. 어째서 그러지 않는 걸까? 왕이 그 여동생이 사는 다락방 안을 들여다볼 수야 없지 않은가?

이 여동생은 시큼하고 심술궂은 인간이었다. 경멸의 주름이 짜증의 주름 위에 엇갈려, 얼굴이 마치 버터 한 덩어리만큼이나 주름투성이였다. 왕이 누군가를 잊어 마땅한 경우가 있었다면, 이 왕은 제 여동생을 잊어 마땅했으니, 세례식에서조차 그러했다. 외모 또한 어지간히 기이했다. 이마가 얼굴의 나머지 전부만큼이나 커서 절벽처럼 앞쪽으로 돌출해 있었다. 화가 나면 그 작은 눈이 파랗게 번쩍였다. 누군가를 증오할 때면 눈은 노랗고 초록빛으로 빛났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 그 눈이 어떤 빛을 내는지는 나도 알지 못한다. 제 자신 말고 다른 누군가를 사랑했다는 얘기는 들어 본 적이 없고, 그조차도 어찌어찌 자기 자신에게 익숙해지지 못했더라면 해내지 못했을 성싶으니까. 그런데 왕이 이 여동생을 잊어버린 것이 더없이 경솔했던 까닭은, 그녀가 무서울 만큼 영리했다는 점이다. 사실은 마녀였다. 그녀에게 마법을 걸린 자는 곧 질리도록 고생했다. 못된 요정들은 못됨으로, 영리한 요정들은 영리함으로 모조리 이겼으니까. 그녀는 역사책에 실리는바, 노여움을 산 요정이나 마녀들이 복수하는 어떤 방식도 하찮게 여겼다. 그리하여 헛되이 초대장을 기다리고 또 기다리다가 마침내 마음을 굳혔다. 초대 없이 쳐들어가 온 집안을 비참하게 만들어 주리라, 공주쯤 되는 몸이 내가 못 할쏘냐, 하는 각오였다.

그리하여 그녀는 가장 좋은 가운을 걸치고 궁전으로 향했다. 행복에 겨운 왕은 제가 여동생을 잊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린 채 그녀를 반겨 맞았고, 그녀는 궁정 예배당으로 향하는 행렬에서 제자리를 차지했다. 모두가 세례반 주위에 모였을 때, 그녀는 슬쩍 바로 옆으로 다가서서 물속에 무언가를 던져 넣었다. 그런 뒤 아주 공손한 태도로 가만히 서 있다가, 물이 아기의 얼굴에 뿌려지는 바로 그 순간, 제자리에서 세 번 빙글 돌며 다음 주문을 곁에 선 사람들이 들릴 만한 소리로 중얼거렸다—

“영이 가볍도록, 내 주문으로,
몸이 가볍도록, 샅샅이,
사람의 팔을 지치게 하지 말고—
부모의 가슴만 짓누르게 하라!”


모두들 그녀가 정신이 나가서 실없는 동요를 읊조린다고 여겼다. 그래도 전신에 오싹한 기운이 스쳐 지나갔다. 반대로 아기는 깔깔대고 까르르 웃기 시작했다. 한편 유모는 흠칫 놀라 꺽 숨을 들이켰는데, 제 몸이 마비된 줄 알았기 때문이다. 팔에 안긴 아기의 무게가 도무지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도 유모는 아기를 꼭 끌어안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화는 이미 저질러진 뒤였다.




3. 우리 애일 리 없소.

저 잔혹한 이모가 아이에게서 중력을 모조리 앗아 가 버린 것이다. 어떻게 그런 일을 해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답하겠다. “세상에서 가장 쉬운 방식으로. 그저 중력 작용 자체를 없애 버리기만 하면 된다.” 이 공주는 철학자였고, 자기 부츠 끈 속을 속속들이 알듯이 중력 법칙의 속속들이까지 꿰고 있었다. 게다가 마녀이기도 했으므로, 그 법칙들을 한순간에 폐기하거나, 적어도 법칙의 바퀴를 꽉 틀어막고 베어링을 녹슬게 해 도무지 굴러가지 못하도록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일이 어떻게 벌어졌는가보다 그다음에 벌어진 일이 우리에겐 더 중요하다.

이 안타까운 결핍이 빚어낸 첫 번째 난처한 일은 이러했다. 유모가 아기를 위아래로 흔들어 어른 순간, 아기가 유모의 팔을 벗어나 천장을 향해 날아올랐다. 다행히 공기의 저항 덕에 아기는 천장에서 삼십 센티쯤 못 미쳐 멎었다. 아기는 유모의 팔에서 떠났을 때 그대로, 수평으로 누운 채 발을 버둥대며 어찌나 신나게 웃어 대는지. 기겁한 유모는 종을 치러 달려가 응답하는 시종에게 지금 당장 사다리를 가져오라고 빌었다. 사지를 덜덜 떨며 사다리를 기어올라, 그 꼭대기에 올라서서 팔을 한껏 뻗어 공중에 둥둥 떠 있는 아기의 긴 옷자락을 가까스로 붙잡았다.

이 기이한 사실이 알려지자 궁전 안이 발칵 뒤집혔다. 왕이 알게 된 경위도 자연히 유모와 다르지 않았다. 아기를 팔에 안았는데 아무 무게도 느껴지지 않자, 깜짝 놀란 왕은 이번엔 아래가 아니라 위로 아기를 흔들어 보았다. 그러자 아기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천천히 천장까지 떠올라, 거기서 더없이 편안하고 만족스러운 얼굴로 둥둥 떠 있었다. 조그만 웃음소리를 또록또록 터뜨리는 것이 그 증거였다. 왕은 말문이 막힌 채 위를 멍하니 올려다보며, 바람에 흔들리는 풀처럼 수염을 덜덜 떨었다. 마침내 저만큼이나 얼이 빠진 왕비를 돌아보며, 가쁜 숨을 몰아쉬고 눈을 휘둥그레 뜬 채 더듬더듬 말했다—

“우리 애일 리 없소, 왕비!”

그런데 왕비는 왕보다 훨씬 영리했으니, 이미 ‘이 결함 있는 결과에는 원인이 있으렷다’ 하고 눈치채던 중이었다.

“분명 우리 애가 맞습니다.” 왕비가 대답했다. “다만 세례식 때 우리가 아이를 더 잘 살폈어야 했지요. 초대받지 못한 이가 그 자리에 와서는 안 될 일이었습니다.”

“오호!” 왕이 검지로 제 이마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이제 알겠소. 내가 알아냈소. 왕비, 보이지 않소? 메이큄노이트 공주가 아이에게 마법을 건 것이오.” “바로 그 말씀이었습니다.” 왕비가 대답했다.

“미안하오, 여보, 제대로 못 들었소이다.—존! 내가 왕좌에 오를 때 쓰는 사다리를 가져오게.”

이 왕은 여느 많은 왕들이 그러하듯 몸집은 작은데 왕좌는 거대했던 것이다.

왕좌 사다리가 당도해 만찬 탁자 위에 놓였고, 존이 그 꼭대기에 올라섰다. 그러나 어린 공주에게까지 손이 닿지 않았다. 공주는 아기 웃음의 구름처럼 공중에 누워 끊임없이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집게를 들어라, 존.” 폐하께서 이르시고는 탁자 위로 올라가 집게를 직접 건네주었다.

이제 존은 아기에게 손이 닿았고, 어린 공주는 집게에 집혀 내려왔다.




4. 아이는 어디 갔느냐?

이 첫 소동이 있은 지 한 달 뒤, 어느 화창한 여름날, 그동안 극진히 돌보아 온 공주는 왕비의 침실 침대에 누워 깊이 잠들어 있었다. 정오였고, 날이 어찌나 무더웠는지 어린아이는 잠이라는 가장 얇디얇은 옷 한 벌만 걸친 채였다. 창문 하나는 열려 있었다. 왕비가 방에 들어와서는 아기가 침대에 있는 줄도 모르고 다른 창문마저 열어젖혔다. 그러자 장난기 많은 요정 바람이 짓궂은 일거리를 찾다가 한쪽 창으로 쏜살같이 들이닥쳐, 아기가 누운 침대 위를 휙 스치며 아기를 낚아챘다. 이어 솜털 한 뭉치나 민들레 씨처럼 아기를 굴리고 둥실거리게 하며 맞은편 창 너머로 싣고 달아나 버렸다. 왕비는 제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자초한 실수도 모른 채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유모가 돌아와 보니 아기가 없어, 왕비께서 데려가신 모양이라 짐작하고, 꾸지람이 두려워 묻기를 뒤로 미루었다. 그러나 아무 기척도 들리지 않자 점점 불안해져, 마침내 왕비의 내실로 올라가 보니 왕비가 거기 있었다.

“저, 왕비 마마, 아기를 이제 제가 받아 볼까요?” 유모가 말했다.

“아기는 어디 있느냐?” 왕비가 물었다.

“용서하여 주십시오. 제가 잘못하였습니다.”

“무슨 말이냐?” 왕비가 얼굴을 굳히며 물었다.

“아이고, 왕비 마마, 저를 겁주지 마소서!” 유모가 두 손을 맞잡으며 외쳤다.

왕비는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알아채고 그 자리에서 까무러쳐 쓰러졌다. 유모는 “내 아가! 내 아가!” 외치며 궁전을 이리저리 내달렸다.

모두가 왕비의 방으로 몰려왔다. 그러나 왕비는 아무 명도 내리지 못했다. 그래도 이내 공주가 없어졌다는 사실이 알려졌고, 궁전은 순식간에 정원의 벌집처럼 웅성거렸다. 한 순간 뒤, 큰 함성과 박수 소리에 왕비가 정신을 차렸다. 사람들이 장미 덤불 아래 새근새근 잠든 공주를 찾아낸 것이다. 요정 같은 그 작은 바람이 공주를 거기까지 실어다 놓고는, 심통의 마무리로 하얀 어린 공주 위에 붉은 장미 꽃잎을 소나기처럼 흩뿌려 둔 뒤였다. 하인들이 내는 소리에 잠을 깬 공주는 신이 나서 펄쩍펄쩍 뛰며 장미 꽃잎을 사방으로 뿌려 날렸다. 노을 녘에 퍼지는 물보라 같았다.

그 후로 공주를 한결 조심스레 지킨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래도 이 어린 공주의 별난 성질에서 비롯된 희한한 사건을 다 이야기하자면 끝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집안, 아니 궁궐에서라도 이 아기만큼 온 식구를 늘 즐겁게 해 준 아이는 일찍이 없었다. 적어도 아래층에서는 그랬다. 유모들이 공주를 붙잡아 두기 쉽지는 않았으나, 공주가 유모들의 팔을 아프게 하거나 가슴을 아리게 한 적은 없었다. 그리고 공주와 공놀이를 할 때의 재미라니! 떨어뜨릴 위험은 아예 없었다. 바닥에 집어던질 수도, 쳐서 굴릴 수도, 밀어 내려놓을 수도 있었으나, 떨어뜨릴 수는 없었다. 물론 벽난로나 석탄 광, 창밖으로 날려 보낼 수는 있었지만, 그런 사고는 여태껏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어디선가 깔깔대는 웃음소리가 와르르 쏟아져 나오면, 그 까닭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만했다. 부엌이나 하인방에 내려가 보면 제인과 토머스, 로버트와 수전이 다 함께 공주를 공 삼아 놀이를 벌이고 있을 것이었다. 공주가 곧 공이었고, 그렇다고 재미가 조금이라도 덜한 것은 아니었다. 공주는 이 사람 품에서 저 사람 품으로 날아다니며 자지러지게 웃어 댔다. 하인들은 놀이 자체보다 그 공을 더 사랑했다. 다만 공주를 어느 방향으로 던지느냐에는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위로 향하는 힘을 받으면, 누가 다시 내려 주지 않고서는 결코 내려오지 않았으므로.




5. 어쩌면 좋단 말인가?

그러나 위층의 사정은 달랐다. 가령 어느 날 아침을 들고 난 뒤, 왕은 금고실로 들어가 제 돈을 세었다. 그 일은 조금도 흥이 나지 않았다.

“생각해 보라.” 왕은 혼잣말을 했다. “이 금화 하나하나는 사분의 일 온스씩이나 나가는데, 내 진짜 살아 숨 쉬는 피와 살로 된 공주는 무게라곤 한 톨도 안 나간다니!”

그러자 왕은 누런 얼굴에 자만의 미소를 활짝 걸친 채 늘어서 있는 제 금화들이 미워졌다.

왕비는 응접실에서 빵과 꿀을 들고 있었다. 그러나 두 입째에 울음을 터뜨리고는 삼키지도 못했다.

왕은 왕비가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다. 누구든 상대로 티격태격할 수 있다는 게 반가웠고, 더구나 그 상대가 왕비라니 더욱 반가웠다. 왕은 금화를 금고에 땡그랑 집어넣고, 왕관을 머리에 탁 얹은 뒤, 응접실로 쿵쾅대며 들어섰다.

“이게 다 무슨 소란이오?” 왕이 소리쳤다. “왕비, 어찌하여 우시오?”

“먹을 수가 없답니다.” 왕비가 꿀단지를 처량히 바라보며 말했다.

“그럴 만도 하오!” 왕이 되받았다. “방금 아침을 자셨지 않소. 칠면조 알 두 개에 멸치 세 마리까지.”

“아니, 그런 게 아닙니다!” 왕비가 흐느꼈다. “제 아이, 제 아이 때문입니다!”

“허, 그 아이가 어쨌다는 거요? 굴뚝에 올라간 것도, 우물에 빠진 것도 아니지 않소. 저기 웃는 소리가 들리질 않소.”

그러면서도 왕은 절로 새어 나오는 한숨을 기침인 척 넘기려 애쓰며 말했다—

“마음이 가벼운 것이야 좋은 일이로다, 그 아이가 우리 자식이든 아니든.”

“머리가 가벼운 것은 나쁜 일이랍니다.” 왕비가 예지의 눈으로 아득히 먼 훗날을 내다보며 대답했다.

“손이 가벼운 것은 좋은 일이로다.” 왕이 말했다.

“손재주가 가벼운 것은 나쁜 일이랍니다.” 왕비가 대답했다.

“발이 가벼운 것은 좋은 일이로다.” 왕이 말했다.

“가벼운 것이란 나쁜—” 왕비가 입을 떼었으나, 왕이 가로막았다.

“결국 말이오.” 왕이 허구의 반대자들과 논쟁을 벌여 승리를 거둔 사람의 어조로 말했다. “결국, 몸이 가벼운 것이야말로 좋은 일이로다.”

“그러나 마음이 경박한 것은 아주 나쁜 일이랍니다.” 왕비가 슬슬 성을 내기 시작하며 되받았다.

이 마지막 대답이 폐하를 꽤나 당혹스럽게 했다. 왕은 몸을 홱 돌려 다시 금고실로 향했다. 그러나 절반도 채 가기 전에 왕비의 목소리가 뒤를 따라붙었다.

“게다가 머리숱이 가벼운 것도 나쁜 일이랍니다!” 왕비가 소리쳤다. 기세가 오른 김에 마지막 말은 꼭 제가 해야겠다는 심산이었다.

왕비의 머리칼은 밤처럼 검었고, 왕의 머리는 한때 그러했으며, 지금 공주의 머리는 아침처럼 금빛이었다. 다만 왕을 붙들어 세운 건 머리칼을 두고 한 비꼼이 아니라, ‘가볍다’라는 말의 이중 사용이었다. 왕은 본디 온갖 재담을, 그중에서도 말장난을 몹시 싫어했다. 게다가 왕비가 꼬집은 것이 ‘머리숱 가벼운’인지 ‘후사 가벼운’인지 도무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1 제 스스로 울컥한 판에, 그 이중의미를 양쪽으로 마음껏 굴리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왕은 반대쪽 발꿈치로 몸을 돌려 왕비에게 되돌아갔다. 왕비는 여전히 화난 얼굴이었는데, 자기가 잘못했다는 것을 스스로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말하자면 ‘다름 아닌 그가’ 그렇게 여긴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보 왕비.” 왕이 말했다. “어떤 종류의 이중성이라도 부부 사이에, 더구나 왕과 왕비 사이에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오. 그중에서도 가장 못마땅한 이중성은 바로 말장난이오.”

“저것 보세요!” 왕비가 말했다. “제가 농담 한 번을 짓는다 하면 꼭 그렇게 도로 깨뜨려 버리시니. 저는 세상에서 가장 불운한 여자랍니다!”

왕비의 표정이 어찌나 처량했던지 왕은 왕비를 품에 안았고,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 의논에 들어갔다.

“이걸 견딜 수 있겠소?” 왕이 말했다.

“아니, 견딜 수 없습니다.” 왕비가 말했다.

“그럼 어찌하면 좋겠소?” 왕이 말했다.

“저도 정말 모르겠습니다.” 왕비가 말했다. “그래도 한번 사과를 해 보시면 어떨까요?”

“늙은 내 여동생에게 말이오?” 왕이 말했다.

“네.” 왕비가 말했다.

“뭐, 못 할 것도 없지.” 왕이 말했다.

그리하여 이튿날 아침 왕은 메이큄노이트 공주의 집으로 가서 한껏 공손히 사과하고, 저주를 풀어 달라 빌었다. 그러나 공주는 근엄한 얼굴로 그 일이라면 아는 바가 없다고 잘라 말했다. 다만 그 눈만은 분홍빛으로 반짝였는데, 그건 그녀가 속으로 기뻐하고 있다는 표였다. 공주는 왕과 왕비에게 인내심을 가지고 행실이나 바로잡으라 일렀다. 왕은 맥이 풀려 돌아왔다. 왕비가 왕을 위로하려 애썼다.

“아이가 좀 더 자랄 때까지 기다려 봅시다. 그때쯤이면 자기가 직접 뭐라도 일러 줄지 모릅니다. 적어도 제 기분이 어떤지는 알 테고, 우리에게 설명도 해 줄 수 있겠지요.”

“그런데 아이가 시집이라도 가면 어찌하오?” 왕이 불현듯 그 생각에 질겁하여 소리쳤다.

“그게 어쨌다는 말씀이오?” 왕비가 되받았다. “생각해 보세요! 그 아이가 아이라도 낳는다면요! 앞으로 백 년쯤 지나면 하늘에 둥둥 떠다니는 아이들이 가을날 거미줄만큼이나 가득할지도 모를 일이지요.”

“그건 우리와 상관없는 일이랍니다.” 왕비가 이어서 말했다. “그때쯤이면 그 아이들도 제 몸은 알아서 간수하는 법을 익혀 두었을 테니까요.”

왕의 대답이란 그저 한숨뿐이었다.

왕은 궁정 의사들에게 상의해 볼까도 했으나, 저들이 공주를 가지고 실험이나 벌일까 봐 겁이 났다.




6. 웃음이 너무 많구나.

그 사이, 거북한 사건들이 숱하고 부모의 속을 태우는 슬픔도 적지 않았으나, 어린 공주는 깔깔대며 자랐다—살이 찐 건 아니고, 통통하고 훤칠하게 컸다. 공주가 열일곱이 되기까지 겪은 가장 큰 사고라야 굴뚝에 끼인 일 정도였고, 거기서 공주를 구해 낸 건 새 둥지나 뒤지러 다니던 조무래기 사내아이였으니, 그 아이는 명성과 함께 시커먼 얼굴을 얻었다. 공주는 생각이 없기는 해도 눈앞을 스치는 누구에게나 무슨 일에나 웃음을 터뜨리는 것 말고는 더 나쁜 짓을 저지른 적이 없었다. 시험 삼아 클랜런포트 장군이 전 병력과 함께 갈기갈기 찢겼다고 일러 주자, 공주는 웃었다. 적군이 아빠의 수도를 포위하러 온다는 소식에는 어찌나 크게 웃던지. 그러나 온 도시가 적군 손에 내맡겨지고 말 것이라는 말을 듣자—어머나, 그때는 그야말로 허리가 꺾이도록 웃었다. 공주에게 무슨 일의 진지한 면을 보이게 할 도리가 없었다. 어머니가 울면 공주는 이렇게 말했다—

“엄마, 얼굴이 왜 그렇게 요상해! 두 볼에서 물을 짜내고 있네? 웃긴 엄마!”

아빠가 호통을 치면, 공주는 웃으며 그 주위를 빙글빙글 돌고, 손뼉을 치며 외쳤다—

“또 해 줘, 아빠. 또! 진~짜 재밌어! 귀여운 아빠, 웃긴 아빠!”

아빠가 붙잡으려 들면 공주는 순식간에 스르르 미끄러져 달아났는데, 잡히지 않는 것조차 놀이의 한 대목으로 여길 뿐 조금도 겁먹지 않았다. 발 한 번 쓱 밀면 공주는 아빠의 머리 위 허공에 두둥실 떠 있거나, 커다란 나비처럼 앞뒤로 옆으로 춤추며 날아다녔다. 왕과 왕비가 공주 문제를 단둘이 의논하다가 머리 위에서 참다 터져 나온 웃음소리에 말이 끊긴 일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분하여 올려다보면, 공주가 제 몸을 쭉 펴고 두 사람 위에 둥둥 뜬 채 더없이 익살맞은 만족감을 담아 그 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느 날 난감한 사고가 하나 일어났다. 공주가 시녀 한 명의 손을 잡고 잔디밭으로 나왔다. 잔디밭 건너편에 아빠가 있는 걸 발견하고, 공주는 시녀의 손을 홱 뿌리치더니 그쪽으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공주가 혼자 달리고 싶을 때면 두 손에 돌을 하나씩 집어 드는 것이 버릇이었는데, 그래야 한 번 뛰어오른 뒤 다시 땅으로 내려올 수 있었다. 몸에 걸친 것은 이 점에서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금붙이라도 일단 몸의 일부가 되어 버리면 그 순간만큼은 무게를 모두 잃었다. 하지만 손에 든 것은 아래로 떨어지는 성질을 그대로 간직했다. 이번에는 집어 들 만한 것이 잔디밭을 가로질러 기어가고 있는 커다란 두꺼비 한 마리뿐이었는데, 그 녀석은 백 년쯤 걸려 건너갈 작정인 듯 느릿느릿했다. 남다른 성정 중 하나로 역겨움이라는 감정을 모르던 공주는, 그 두꺼비를 냉큼 움켜쥐고 폴짝 뛰어올랐다. 공주는 아빠 코앞까지 다다랐고, 아빠는 두 팔을 벌려 공주를 받으며, 장미 꽃봉오리 위 나비처럼 공주 입술 위에 맴도는 입맞춤을 받으려 하고 있었다—그때 바람 한 줄기가 휙 불어와 공주를 옆으로 떠밀었고, 공주는 마침 폐하께 전갈을 받던 젊은 시동의 품속으로 떠밀려 들어갔다. 공주가 일단 움직이기 시작하면 스스로 멈추는 데는 늘 시간과 애가 드는 것도 그리 유별난 일은 아니었다. 이번에는 멈출 시간이 없었다. 어쨌든 누군가와 입을 맞춰야만 했던 것이다—그리하여 공주는 시동에게 입을 맞추었다. 공주는 그리 개의치 않았다. 수줍음이란 게 애초에 없는 성정이었고, 게다가 달리 어쩔 도리가 없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공주는 음악 상자처럼 까르르 웃기만 했다. 제일 고약한 꼴을 당한 건 가련한 시동이었다. 공주는 엉뚱하게 가는 입맞춤을 바로잡겠답시고 손을 내밀어 시동을 밀쳐 내려 했는데, 바람에 입맞춤과 더불어 시동은 반대쪽 뺨에 그 커다랗고 검은 두꺼비로 철썩 얻어맞았고, 그 바람에 두꺼비가 시동의 눈알에 정통으로 박혔다. 시동도 덩달아 웃으려 했지만, 그 시도는 낯빛의 기묘한 일그러짐으로 이어졌을 뿐이어서, 이 입맞춤을 자랑삼아 뽐낼 염려는 조금도 없어 보였다. 왕으로 말하자면, 위신에 크게 금이 간 터라, 한 달 내내 시동에게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았다.

여기서 한마디 하자면, 공주가 달리는 꼴은 꽤나 볼만한 구경거리였다—그 전진 방식을 달리기라고 불러도 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먼저 공주는 한 번 폴짝 뛴다. 그러고는 착지하여 몇 걸음 달리고, 또 폴짝 뛴다. 때로는 제가 땅에 닿았다고 지레 여기는 바람에, 실제로는 아직 닿지도 않았는데, 발이 앞뒤로 바삐 움직이며 허공을 마구 달렸다—등이 뒤집힌 병아리의 다리처럼. 그러고는 웃음의 화신이라도 된 듯 깔깔대는데, 다만 그 웃음에는 빠져 있는 무엇이 있었다. 그게 무언지 나는 도무지 말로 옮길 수가 없다. 아마도 그것은 슬픔의 가능성에 기대는 어떤 음조—이를테면 모르비데차2라 해 둘 수 있을 것이었다. 공주는 미소 짓는 법이 없었다.




7. 형이상학자를 부릅시다.

오랜 세월 이 괴로운 주제를 피해 오던 왕과 왕비는, 마침내 셋이 모여 회의를 열기로 작정하고 공주를 불러들였다. 공주는 가구와 가구 사이를 미끄러지듯, 너울너울, 훨훨 스며들며 방에 들어와, 이윽고 안락의자 하나에 앉는 시늉으로 몸을 얹었다. 의자에서 아무런 지탱도 받지 않는 품을 보아 과연 ‘앉았다’고 할 수 있을지, 그것은 내가 감히 단언하지 못하겠다.

“사랑하는 아가야.” 왕이 말했다. “너도 이제쯤은 네가 다른 사람들과 영 같지 않다는 걸 알고 있겠지.”

“어머, 귀엽고 웃긴 아빠! 저한테는 코가 하나, 눈이 두 개, 나머지도 다 있는걸요. 아빠도 그렇죠. 엄마도 그렇고요.”

“얘야, 이번 한 번만이라도 진지하게 굴어 주겠니.” 왕비가 말했다.

“아뇨, 고맙지만 사양할래요, 엄마. 내키지 않거든요.”

“너도 다른 사람들처럼 걷고 싶지 않느냐?” 왕이 말했다.

“아, 천만에요. 그럴 리가요. 아빠 엄마는 그냥 기어다니는 거잖아요. 어찌나 굼뜨신지!”

“얘야, 기분은 좀 어떠하냐?” 왕이 당황의 침묵 끝에 다시 입을 열었다.

“아주 좋아요, 고마워요.”

“그게 아니라, 어떠한 느낌이 드느냐 말이다.”

“아무 느낌도 안 나는데요, 제가 알기로는요.”

“무엇 같은 느낌이든 들어야 하지 않느냐.”

“음, 이런 웃긴 아빠와, 이렇게 귀여운 엄마 왕비님을 둔 공주 같은 느낌이 드네요!”

“아니 얘야, 정말이지!” 왕비가 말을 꺼내려는데, 공주가 말을 가로챘다.

“아 참,” 공주가 덧붙였다. “생각났어요. 가끔은 이상한 느낌이 들어요—온 세상에서 제정신인 사람은 나 혼자뿐인 것 같은, 그런 느낌이요.”

여태 점잖게 굴어 보려 애쓰던 공주는 이 대목에서 발작하듯 웃음을 터뜨리더니, 의자 너머로 벌렁 자빠져 황홀한 기쁨 속에 방바닥을 데굴데굴 굴러다녔다. 왕은 오리털 이불 한 채를 드는 것보다도 수월하게 공주를 집어 올려, 의자와 맺고 있던 아까의 관계로 되돌려 놓았다. 이 관계를 정확히 나타낼 전치사가 무엇인지, 공교롭게도 나도 알지 못한다.

“바라는 것이 아무것도 없느냐?” 이쯤 되자 공주에게 화를 내 봐야 소용없다는 걸 깨달은 왕이 다시 물었다.

“어머나, 귀여운 아빠!—있어요.” 공주가 대답했다.

“그게 무어냐, 내 귀염둥이?”

“얼마나 오랫동안 바랐는데요—아, 정말 오래도—어젯밤부터요.” “그게 무엇인지 말해 보렴.”

“들어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실래요?”

왕은 ‘그러마’ 소리가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한결 지혜로운 왕비가 고갯짓 한 번으로 이를 가로막았다. “먼저 무엇인지부터 말하렴.” 왕이 말했다.

“아니요, 아니요. 먼저 약속부터요.”

“감히 약속은 못 하겠구나. 그게 무엇이냐?”

“그럼요, 아빠가 약속하신 걸로 알겠어요.—그건 바로—긴 실 끝에, 그러니까 아주 아주 긴 실 끝에 매여서, 연처럼 하늘에 날려지는 거예요. 아, 정말 재밌겠다! 저는 장미수를 비처럼 뿌리고, 사탕을 우박처럼 쏟고, 휘핑크림을 눈처럼 흩뿌릴 거예요, 그리고—그리고—그리고—”

웃음의 발작이 공주의 말을 가로막았고, 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때맞춰 붙잡지 않았더라면 공주는 또다시 방바닥을 데굴데굴 굴렀을 것이다. 공주에게서는 말 말고는 아무것도 끌어낼 수 없다는 걸 깨달은 왕은, 종을 울려 시녀 두 명과 함께 공주를 내보냈다.

“자 이제, 부인,” 왕이 왕비 쪽으로 돌아서며 말했다. “어떻게 해야 하오?”

“이제 남은 길은 하나뿐이옵니다.” 왕비가 대답했다. “형이상학자 대학에 자문을 구하시지요.”

“옳거니!” 왕이 소리쳤다. “그리 하겠소.”

그런데 이 대학의 수장은 중국인 현자 둘이었다—이름하여 험드럼과 코피케크. 왕은 이들을 불러들였고, 두 사람은 곧장 입궐했다. 왕은 긴 연설로, 이들이 이미 훤히 알고 있는 사실—하긴 누군들 모르겠는가—곧 제 따님이 딛고 선 이 지구와 맺고 있는 특이한 관계를 알렸다. 그러고는 저 ‘병약함’3의 원인과 있음 직한 치료법을 의논해 달라 청하였다. 왕은 그 단어에 유난히 힘을 주었으나, 정작 제 언어유희는 스스로 알아채지 못했다. 왕비는 웃음을 터뜨렸지만, 험드럼과 코피케크는 공손히 경청하고는 말없이 물러났다.

두 사람의 회의란 것은, 각자 자신이 아끼는 이론들을 천 번째로 거듭 꺼내 놓고 서로 지지하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공주의 처지는, 사유의 분화에서 비롯되는 온갖 문제—사실상 중국 제국 형이상학 전반—를 논하기에 더없이 신명 나는 판을 깔아 준 셈이었으니까. 그래도 두 사람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실무적 문제 논의를 아예 제쳐 두지는 않았음은 공정하게 밝혀 두어야겠다.

험드럼은 유물론자요, 코피케크는 영성론자였다. 전자는 느리고 진중하였으며, 후자는 빠르고 들떠 있었다. 대개 후자가 먼저 말문을 열었고, 마지막 말은 전자의 몫이었다.

“나는 내 앞서 주장한 바를 다시 한번 주장하는 바이네.” 코피케크가 단숨에 뛰어들며 입을 열었다. “공주님에게는 흠이랄 게 없네, 몸에도 영혼에도. 다만 그 둘이 잘못 맞춰졌을 따름이지. 자, 이제 내 말 좀 들어 보게, 험드럼. 내 짧게 생각한 바를 일러 줌세. 말하지 말게. 내게 대꾸하지 말게. 내 말이 끝날 때까지는 자네 말을 듣지 않겠네.—바로 저 결정적 순간, 영혼들이 제게 배정된 거처를 찾아 나설 때, 성급한 영혼 둘이 서로 마주쳐 부딪치고 튕겨 나가, 길을 잃고는 제각기 엉뚱한 자리에 당도해 버렸다 이 말이지. 공주님의 영혼이 바로 그중 하나였고, 그리하여 공주님은 한참을 헤매어 버린 걸세. 공주님은 본디 이 세상에 속한 분이 아니라 다른 행성—아마도 수성—에 속한 분이야. 마땅히 자신의 영역으로 끌리려는 그 성향이, 이 천체가 공주님의 육신에 행사했어야 할 온갖 자연스러운 영향력을 모조리 무너뜨리고 있는 걸세. 공주님은 여기 있는 어떤 것에도 관심이 없으시지. 공주님과 이 세상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게야.”

“그러니 공주님을 가르쳐야 하네, 더없이 엄중한 강제로써, 지구 그 자체로서 지구에 관심을 두시도록 말이야. 공주님은 지구 역사의 모든 분야를 공부하셔야 하네—동물의 역사, 식물의 역사, 광물의 역사, 사회의 역사, 도덕의 역사, 정치의 역사, 과학의 역사, 문학의 역사, 음악의 역사, 예술의 역사, 그중에도 무엇보다, 형이상학의 역사를 말이야. 중국 왕조에서 시작해 일본에서 끝내야 하네. 그러나 무엇보다 먼저 지질학을 공부하시고, 특히 멸종한 동물들의 역사를 공부하셔야 하네—그들의 본성, 그들의 습성, 그들의 사랑, 그들의 증오, 그들의 복수를 말일세. 공주님은 반드시—”

“거, 그만—그-마-안!” 험드럼이 우렁차게 외쳤다. “이제는 분명 내 차례일세. 뿌리 깊고 흔들림 없는 내 확신은, 공주님의 상태에서 뚜렷이 드러나는 이 이상 증상들의 원인이 엄밀하고도 오로지 물리적이라는 것일세. 허나 그것은 이상 증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 지나지 않아. 내 의견을 들어 보게나.—무언가 원인으로 인하여—그 원인이 무엇이든 우리 논의에는 중요하지 않으니 일단 덮어 두고—공주님의 심장 박동 방향이 뒤집혀 있단 말일세. 흡입 펌프와 압출 펌프의 저 놀라운 결합이 거꾸로 작동하고 있는 거지—이 가련한 공주님의 경우에 한해서 말이네. 밀어내야 할 자리에서 빨아들이고, 빨아들여야 할 자리에서 밀어내고 있는 걸세. 심방과 심실의 직분이 뒤바뀐 셈이지. 피는 정맥으로 내보내지고 동맥을 타고 되돌아오네. 그 결과 피가 공주님의 온 몸뚱이를—폐까지 포함하여—거꾸로 흐르고 있는 셈일세. 사정이 이러한데, 중력에 관한 저 또 다른 특이 사항에서도 공주님이 보통 사람과 다르다 한들 그리 신비할 일이겠는가? 내 치료 방안은 이러하네—”

“안전의 마지막 한 지점까지 사혈(瀉血)하시게. 필요하다면 온탕 속에서 시행하시게. 공주님이 완전한 가사(假死) 상태에 이르시거든, 왼쪽 발목에 지혈대를 대어 뼈가 견디는 한도까지 바짝 조이시게. 동시에 오른쪽 손목에도 같은 세기의 것을 하나 더 두르시게. 그 목적을 위해 만든 판을 써서, 나머지 한쪽 발과 한쪽 손을 공기 펌프 두 대의 수기(受器) 아래에 놓으시게. 수기의 공기를 다 뽑으시게. 프랑스 브랜디 한 파인트를 드시게 하시고, 결과를 기다리시게.”

“그 결과는 머지않아 냉엄한 죽음의 모습으로 당도할 걸세.” 코피케크가 말했다.

“설령 그리 된다 해도, 그분은 우리의 의무를 다하는 가운데 돌아가시는 것일세.” 험드럼이 되받았다.

그러나 두 폐하께서는 당신들의 변덕스러운 혈육을 사랑하는 마음이 너무도 깊어, 똑같이 무자비한 두 철학자의 어느 방안에도 딸을 맡기지 아니하셨다. 실은 자연의 법칙을 아무리 완벽히 꿰고 있다 한들 공주의 경우에는 쓸모가 없었을 것이다. 공주는 도무지 분류할 수 없는 존재였으니까. 다섯째 무게 없는 물체, 곧 무게 나가는 여타 모든 성질은 두루 지니고 있는 그런 존재였다.




8. 물 한 방울 써 봅시다.

공주에게 가장 좋은 것은 아마 사랑에 빠지는 일이었으리라. 그러나 중력 없는 공주가 어찌 무언가에 빠진다는 말인가—이것이 난제였다—어쩌면 ‘바로 그’ 난제였다.

이 문제를 두고 공주 자신이 어떠했느냐 하면, 공주는 제가 빠져들 만한 그런 꿀과 침의 벌집이 이 세상에 있다는 것조차 알지 못했다. 다만 이 대목에서 공주에 관한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밝혀 두어야겠다.

궁전은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호수 기슭에 세워져 있었는데, 공주는 이 호수를 아버지보다도 어머니보다도 더 사랑했다. 공주 자신은 그런 줄도 모르고 있었으나, 이 유별난 편애의 뿌리는 바로—호수에 몸을 담그는 순간 공주가 그토록 심술궂게 빼앗겼던 타고난 권리, 곧 중력을 되찾는다는 데 있었음에 틀림없다. 이것이 애초에 그 해코지의 수단으로 물이 쓰였기 때문인지 아닌지는 나는 모른다. 다만 확실한 것은, 공주가 늙은 유모가 이르던 대로 오리처럼 헤엄치고 자맥질할 줄 알았다는 점이다. 이 불행을 덜어 주는 힘이 어떻게 발견되었는지는 다음과 같다.

어느 여름 저녁, 이 나라 축제가 한창일 무렵, 공주는 왕실 바지선에 올라 왕과 왕비와 함께 호수로 나갔다. 그 뒤로 수많은 궁정인들이 작은 배들의 선단을 이루어 따랐다. 호수 한가운데 이르렀을 때 공주는 대법관의 바지선으로 옮겨 타고 싶어 했는데, 공주가 가장 아끼는 또래 친구인 대법관의 딸이 그 배에 아버지와 함께 타고 있었기 때문이다. 늙은 왕은 본디 제 딸의 불행을 가볍게 여기는 법이 좀처럼 없었으나, 마침 그날따라 기분이 각별히 좋았던지라, 바지선 두 척이 가까워지자 공주를 번쩍 들어 대법관의 바지선으로 건네주려 했다. 그런데 그만 몸의 균형을 잃어 바지선 바닥으로 쿵 떨어지면서 딸을 놓치고 말았다—다만 놓치기 전에 아래로 향하는 제 몸의 성질을 공주에게도 옮겨 두기는 했으니, 방향이 조금 달랐을 뿐이었다. 왕은 배 안으로 떨어졌고, 공주는 물속으로 떨어진 것이다. 기뻐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와 함께 공주는 호수 속으로 사라졌다. 뱃전마다 놀란 외침이 터져 나왔다. 공주가 아래로 떨어지는 꼴은 이제껏 아무도 본 적이 없었다. 사내란 사내는 죄다 순식간에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하나둘 숨이 가빠 수면으로 올라오던 바로 그때—딸랑, 딸랑, 첨벙, 그리고 콸콸! 저 멀리서 공주의 웃음소리가 물 위로 건너왔다. 공주는 거기서 백조처럼 헤엄치고 있었다. 왕이 부르건 왕비가 부르건, 대법관이 부르건 그 딸이 부르건, 도무지 나오려 들지 않았다. 그야말로 고집불통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때만큼은 공주가 평소보다 좀 차분해 보였다. 아마도 큰 기쁨은 웃음을 달래는 법이기 때문이리라. 여하간 이 일 이후로 공주의 삶의 열정은 물에 들어가는 일이 되었고, 물을 더 많이 마실수록 공주는 행실이 한결 얌전해지고 모습도 한결 고와졌다. 여름이든 겨울이든 마찬가지였다—다만 얼음을 깨 공주를 들여보내야 하는 때에는 물속에 오래 머물지 못했을 뿐이다. 여름 한낮이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공주를 찾아볼 수 있었으니, 푸른 물 위 한 줄기 흰 자국처럼 구름 그림자마냥 가만히 누워 있기도 하고, 돌고래처럼 쏘아 가다가 사라졌다가, 누구도 예상치 못한 저 멀리서 다시 솟아오르기도 했다. 제 뜻대로 할 수만 있었다면 공주는 밤에도 호수에 들어갔을 것이다. 공주 방 발코니가 호수의 깊은 웅덩이 위로 드리워져 있었고, 갈대 우거진 얕은 수로를 지나면 너른 물길로 헤엄쳐 나갈 수 있었으니 아무도 영문을 모를 일이었으리라. 실제로 달밤에 눈을 뜨는 일이 있으면, 그 유혹을 좀처럼 뿌리치지 못했다. 다만 물까지 가는 일이 딱하고 어려운 문제였다. 어떤 아이들이 물을 무서워하듯, 공주는 공기를 그만큼이나 무서워했다. 한 줄기 바람만 불어도 공주는 날려 가 버릴 터이고, 가장 고요한 순간에도 바람은 불쑥 일 수 있었으니까. 만약 공주가 물을 향해 제 몸을 한 번 밀어 보았다가 살짝 못 미쳐 떨어지기라도 하면, 바람 문제를 빼고라도 그 처지는 끔찍하게 난감해질 것이었다. 잘해야 거기 잠옷 바람으로 매달린 채, 누가 창문에서 보고 낚시하듯 낚아 올려 주기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을 테니까.

‘아, 내게 중력이 있다면,’ 물을 바라보며 공주는 생각했다. ‘나는 이 발코니에서 길쭉한 흰 바닷새처럼 번쩍, 어둠 속 저 사랑스러운 젖은 물속으로 곧장 뛰어들 텐데. 하아—!’

이것이야말로 공주가 다른 사람들처럼 되었으면 하고 바라게 만든 단 하나의 이유였다.

공주가 물을 사랑한 또 하나의 이유는, 물속에서만 얼마간의 자유를 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공주는 수행단 없이는 바깥출입을 할 수 없었고, 그 수행단에는 바람이 공주에게 함부로 굴까 걱정하여 딸린 경기병 부대도 한 무리 포함되었다. 왕은 해가 갈수록 걱정이 늘어, 나중에는 공주가 밖을 걷게 할 때 반드시 스무 가닥의 비단끈을 옷 이곳저곳에 매어 스무 명의 귀족이 붙잡게 해야 했다. 말을 타는 일이야 말할 나위도 없이 논외였다. 그러나 물에 들어가기만 하면 공주는 이런 격식 일체에 작별을 고하곤 했다.

물이 공주에게 미치는 영향이 어찌나 놀라웠는지, 특히 물이 그 순간만큼은 공주를 보통 인간의 중력으로 돌려놓는다는 점 때문에, 험드럼과 코피케크는 의견을 모아 왕에게 공주를 삼 년 동안 산 채로 묻어 두시라 권유하기에 이르렀다. 물이 그리 이로웠으니 흙은 한층 더 이로우리라는 기대에서였다. 그러나 왕에게는 이 시험을 두고 어느 정도 속된 편견이 있었던 탓에, 동의해 주지 않았다. 이 방안이 좌절되자 두 사람은 또 한 가지 권고에 합의를 보았다. 한 사람은 중국에서, 다른 한 사람은 티베트에서 의견을 들여온 터라 그 합의란 참으로 진기한 일이었다. 두 사람은 이렇게 논했다—바깥에서 가져다 쓰는 물이 그리도 효험이 있다면, 더 깊은 원천에서 솟아나는 물은 온전한 치유를 이뤄 낼지 모른다고. 요컨대, 가련하고 병든 공주를 어떻게든 울게만 할 수 있다면 공주가 잃어버린 중력을 되찾을 수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일을 대체 어떻게 이룬단 말인가? 바로 그 대목에 온갖 어려움이 걸려 있었고, 이를 감당하기에는 철학자들의 지혜도 역부족이었다. 공주를 울리는 일은 공주의 몸무게를 재는 일만큼이나 불가능했다. 두 사람은 직업 거지 하나를 불러들여, 가장 눈물겨운 신세타령을 준비하라 명하고, 분장하는 데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 궁정 분장 상자에서 꺼내 쓰게 하고, 성공할 시에는 큰 상을 내리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모두 허사였다. 공주는 동냥 예인(藝人)의 사연을 듣고, 그 기막힌 분장을 바라보다가 더는 몸을 가누지 못한 채, 풀어 놓을 길 없는 웃음으로 가장 꼴사나운 몸부림을 치며, 꺅꺅, 그야말로 비명을 지르듯 웃어 젖혔다.

간신히 제 몸을 추스르자, 공주는 시종들에게 그자를 쫓아내라 명하면서 동전 한 닢도 주지 말라 일렀다. 그러자 그 사내의 낙심천만한 표정이 그 자체로 공주의 벌이자 그의 복수가 되어, 공주는 또다시 거센 히스테리 발작에 빠져들었고, 거기서 빠져나오는 일조차 쉽지 않았다.

그러나 왕은 어떻게든 이 제안을 한 번은 제대로 시험해 보고 싶었던지라, 어느 날 짐짓 역정이 난 체하며 공주의 방으로 쳐들어가 호되게 매질을 가했다. 그러나 눈물은 한 방울도 흐르지 않았다. 공주의 얼굴은 심각해졌고, 웃음소리가 여느 때와 달리 비명 소리와 어지간히 닮아 있었다—그뿐이었다. 그 착한 늙은 폭군이 보시려고 제일 좋은 금테 안경까지 쓰셨건만, 공주의 푸르고 맑은 두 눈에서는 티끌만 한 먹구름 한 점도 찾아내지 못하셨다.




9. 다시 넣어 주세요.

라고벨에서 천 리 떨어진 곳에 사는 한 왕의 아들이 어느 왕비의 딸을 찾아 나선 것은 이 무렵의 일이었다. 왕자는 먼 데 가까운 데 가리지 않고 떠돌았으나, 공주를 찾기만 하면 어김없이 흠을 하나씩 발견했다. 물론 아무리 아름답다 해도 그저 여자 따위와는 결혼할 수 없었고, 자신에게 어울리는 공주는 어디에도 없었다. 왕자가 완벽함에 그토록 가까워서 완벽함 그 자체를 요구할 자격이 있었는지는 내가 감히 말할 수 없다. 내가 아는 것이라곤, 그가 모든 왕자가 그러하듯 훤칠하고 잘생기고 용감하고 너그럽고 예의 바르고 품행 반듯한 젊은이였다는 사실뿐이다.

왕자는 떠돌다가 우리 공주에 관한 소문을 여럿 주워들었다. 그러나 모두들 공주에게 마법이 걸렸다고 하니, 그 공주가 자기에게 마법을 걸 수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다. 중력을 잃은 공주를 어느 왕자가 어찌하겠는가? 다음에는 또 무엇을 잃을지 누가 알겠는가? 보이는 성질도, 만져지는 성질도 잃을 수 있지 않겠는가. 한마디로 오감에 닿는 힘 자체를 잃어버려, 그녀가 죽었는지 살았는지조차 분간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왕자는 더는 이 공주를 두고 묻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왕자는 큰 숲에서 시종들을 놓치고 말았다. 이런 숲이란 겨를 걸러 내는 체처럼 왕자들을 궁정인들로부터 떼어 놓는 데 요긴하다. 그렇게 왕자들은 제 운명을 따라 빠져나온다. 이 점에서 왕자는 공주보다 유리하다. 공주는 놀아 볼 겨를도 없이 시집부터 가야 하지 않는가. 우리 공주들도 가끔은 숲에서 길을 잃어 보았으면 좋겠다.

여러 날을 헤맨 끝에 어느 사랑스러운 저녁, 왕자는 자신이 숲 가장자리에 다다랐음을 알아챘다. 나무들이 성글어져 그 사이로 노을이 보였고, 머지않아 일종의 황야가 나타났다. 곧이어 사람 사는 기척이 눈에 띄었다. 그러나 이때쯤 해가 기울어, 길을 알려 줄 사람은 들판에 아무도 없었다.

한 시간을 더 걸은 끝에, 오랜 수고와 굶주림에 지친 왕자의 말이 쓰러져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그래서 왕자는 걸어서 여정을 이었다. 한참 뒤 그는 또 다른 숲으로 들어섰다. 거친 숲이 아니라 잘 다듬어진 숲이었고, 그 사이로 난 오솔길을 따라가자 호수 기슭이 나타났다. 왕자는 어둠이 짙어 오는 그 길을 따라 걸었다. 문득 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물 건너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실은 공주의 웃음소리였다. 앞서 넌지시 일렀듯, 공주의 웃음에는 어딘가 기묘한 구석이 있다. 참으로 우러나는 호탕한 웃음이 여물려면 중력이 어느 만큼은 필요한 법인데, 공주에게는 그것이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왕자는 그 웃음을 비명으로 오해했다. 호수 너머를 살피던 그는 물 위에 허연 무엇이 떠 있는 것을 보았다. 순식간에 튜닉을 벗어 던지고 샌들을 차 내며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이내 그 흰 것에 닿아 보니 한 여인이었다. 공주인지까지 알아볼 만큼 밝지는 않았으나, 숙녀라는 것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그런 것을 알아보는 데는 빛이 그리 많이 필요하지 않다.

어찌 된 영문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공주가 빠진 체했는지, 왕자가 놀래 주었는지, 아니면 붙잡는 바람에 당황시켰는지. 어쨌든 왕자는 수영하는 자에게 참으로 면목 없는 꼴로 공주를 물가로 데려왔고, 공주는 태어나서 겪은 중 가장 죽을 뻔한 꼴을 당하고 말았다. 말을 해 보려 입을 열 때마다 물이 목구멍으로 밀려들었기 때문이다.

왕자가 공주를 데려간 자리는 둔덕이 수면에서 한두 자밖에 높지 않았다. 그래서 왕자는 공주를 힘껏 들어 올려 둔덕 위에 눕혔다. 그러나 물을 벗어나자마자 중력이 사라진 공주는, 꾸짖고 비명을 지르면서 하늘로 떠올라 버렸다.

“이 못되고, 못되고, 못돼 먹은, 정말 못돼 먹은 사내!” 공주가 소리쳤다.

이제껏 공주를 이만큼 화나게 한 자는 아무도 없었다. 왕자는 공주가 떠오르는 것을 보고, 제가 마법에 홀려 커다란 백조를 숙녀로 착각한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공주는 어느 높다란 전나무의 꼭대기 솔방울을 붙잡았다. 솔방울이 떨어졌다. 공주는 또 다른 솔방울을 잡았고, 줄기째 빠지는 솔방울들을 하나씩 떨어뜨리며 그렇게 제 몸을 멈춰 세웠다. 그동안 왕자는 물속에 선 채로 멀뚱히 쳐다보면서 빠져나올 생각도 잊고 있었다. 그러다 공주의 모습이 사라지자 그는 허둥지둥 물가로 기어올라 나무 쪽으로 걸어갔다. 그곳에서 그는 공주가 가지 하나를 타고 몸통을 향해 내려오는 광경을 보았다. 하지만 숲이 워낙 어두워 왕자는 이 기이한 현상이 대체 무엇인지 여전히 어리둥절해했다. 그러다 공주가 땅에 내려와 그가 서 있는 모습을 보자, 공주가 그의 팔을 덥석 붙들고 말했다.

“아빠한테 다 이를 거야.”

“아니, 그러지 마시오!” 왕자가 대꾸했다.

“그럴 거야.” 공주가 우겼다. “무슨 권리로 날 물에서 끌어내 하늘 바닥으로 내던진 거야? 난 아무 짓도 안 했는데.”

“용서하시오. 다치게 할 뜻은 없었소.”

“당신 머리가 없는 것 같군. 중력 없는 것보다 훨씬 한심한 손실이야. 불쌍해라.”

왕자는 이제야 자신이 마법에 걸린 공주를 만난 것이며, 이미 그녀의 심기를 건드렸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공주가 화를 내며 발을 쾅 굴렀다. 왕자의 팔을 붙잡고 있지 않았더라면 그 발구름에 다시 공중으로 떠올랐을 것이었다.

“당장 날 올려 줘.”

“어디로 올려 드리면 되겠소, 아름다운 분이여?” 왕자가 물었다.

왕자는 이미 공주에게 거의 반해 버린 참이었다. 화난 모습이 여태껏 누가 본 어느 때보다 더 매혹적이었고, 그가 보기에는—물론 어둑해서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지만—공주에겐 흠이랄 게 없었다. 굳이 꼽자면 중력이 없다는 것 정도였다. 그렇더라도 왕자쯤 되는 이가 공주를 무게로 잴 까닭이 있겠는가. 고운 발이 진흙에 남기는 자국의 깊이로 그 발의 사랑스러움을 가늠할 사람은 없는 법이다.

“어디로 올려 드리면 되겠소, 아름다운 분이여?” 왕자가 물었다.

“물속으로, 이 멍청이야!” 공주가 답했다.

“그럼 갑시다.” 왕자가 말했다.

젖은 옷이 걸음걸이를 더 성가시게 한 탓에 공주는 왕자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공주가 퍼붓는 선율 같은 욕지거리에도, 왕자는 자기가 달콤한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닐까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서두르지 않았고, 두 사람은 호수의 아주 다른 쪽 기슭에 이르렀다. 그곳 둔덕은 적어도 스물다섯 자 높이였다. 가장자리에 이르자 왕자가 공주에게 몸을 돌리고 물었다.

“그럼 어떻게 넣어 드리면 되겠소?” “그건 당신이 알아서 할 일이지.” 공주가 톡 쏘듯 답했다. “당신이 꺼냈으니—다시 넣어.”

“좋소.” 왕자는 이렇게 말하고 공주를 두 팔로 번쩍 안아 바위에서 함께 몸을 던졌다. 공주는 수면이 덮이기 전에 기쁨에 찬 비명 섞인 웃음 한 자락을 터뜨릴 겨를밖에 없었다. 두 사람이 수면으로 올라왔을 때, 공주는 잠시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어찌나 세게 내리꽂혔던지 숨을 고르기도 힘들었던 것이다. 수면에 닿자마자 —

“빠지는 기분이 어떠시오?” 왕자가 말했다.

한참 만에 숨을 헐떡이며 공주가 말했다.

“이게 당신이 말한 빠진다는 거야?”

“그렇소.” 왕자가 답했다. “꽤 그럴듯한 본보기라 하겠소.”

“나한텐 올라가는 것 같았는데.” 공주가 받아쳤다.

“내 기분도 분명 붕 떠올랐다 하겠소.” 왕자가 인정했다.

공주는 왕자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듯, 같은 질문을 되돌려 던졌다.

당신은 빠지는 기분이 어떤데?” 공주가 물었다.

“더할 나위 없소.” 왕자가 답했다. “이제껏 본 중에 가장 완벽한 이에게 빠졌으니 말이오.”

“그만. 지겨워.” 공주가 말했다.

아마 공주도 아버지처럼 말장난을 싫어하는 모양이었다.

“그럼 빠지는 게 싫소?” 왕자가 물었다.

“내 평생 이보다 신나는 재미는 없었어.” 공주가 답했다. “난 여태 떨어진 적이 한 번도 없었거든. 배울 수만 있다면 좋겠어. 세상에, 아빠 왕국에서 떨어질 줄 모르는 사람이 나뿐이라니!”

여기서 가엾은 공주는 자못 슬퍼 보였다.

“원하실 때면 언제든 공주님과 함께 빠져 드리겠소.” 왕자가 정성껏 말했다.

“고마워. 글쎄, 잘 모르겠네. 어쩌면 점잖은 일은 아닐지도 몰라. 하지만 상관없어. 어쨌든 이왕 빠진 김에, 같이 수영이나 하자.”

“진심으로 그러겠소.” 왕자가 답했다.

두 사람은 헤엄치고 자맥질하고 떠다녔다. 그러다 마침내 물가에서 사람들의 외침이 들려오고 사방에서 불빛이 어른거리는 것이 보였다. 밤은 이미 깊었고 달은 없었다.

“돌아가야겠네.” 공주가 말했다. “참 아쉬워. 이렇게 즐거운데.”

“나도 그렇소.” 왕자가 답했다. “그래도 돌아갈 집이 없어 다행이오—적어도 어디인지 정확히는 모르니 말이오.”

“나도 없었으면 좋겠어.” 공주가 받았다. “집이란 정말 따분하다니까! 아예 저들을 한번 골려 줄까.” 그녀가 이어 말했다. “왜 날 가만 내버려 두질 않지? 호수에서 하룻밤도 못 있게 한다니까! 저기 초록 불 보이지? 저게 내 방 창문이야. 나랑 아주 조용히 저쪽으로 헤엄쳐 가서, 발코니 바로 아래에 이르면—아까처럼 날 위로—당신은 그걸 ‘올린다’고 했지—확 밀어 올려 줘. 그럼 발코니를 붙잡고 창으로 들어갈 수 있어. 그러면 저 사람들 내일 아침까지 날 찾아 헤매겠지!”

“기쁨보다는 의무로 따르겠소.” 왕자가 정중히 답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아주 살살 헤엄쳐 갔다.

“내일 밤에도 호수에 계시겠소?” 왕자가 조심스레 물었다.

“물론이지. 아닐지도. 어쩌면.” 공주의 대답이 꽤 이상했다.

그러나 왕자는 더 캐묻지 않을 만큼 눈치 빠른 사람이었다. 그래서 작별의 밀어 올림을 주면서 속삭였다.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시오.”

공주의 대답은 짓궂은 눈짓 하나뿐이었다. 벌써 왕자의 머리 위로 한 자나 떠올라 있었다. 그 눈짓은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염려 놓아. 이건 그런 식으로 망치기엔 너무 재미있단 말이야.’

공주가 물속에서는 다른 사람들과 꼭 같았기에, 왕자는 공주가 천천히 떠올라 발코니를 붙잡고 창문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보고도 여전히 눈을 의심했다. 그는 공주가 아직 제 곁에 있을까 싶어 거의 돌아볼 뻔했다. 그러나 물속에 홀로였다. 왕자는 조용히 헤엄쳐 물러났고, 공주가 무사히 침실로 들어간 뒤에도 몇 시간 동안이나 물가를 오가는 불빛을 지켜보았다. 불빛이 모두 사라지자 그는 상륙해서 튜닉과 검을 찾았고, 한참 헤맨 끝에 간신히 그것들을 되찾았다. 그런 다음 호수를 빙 돌아 건너편으로 갔다. 그곳의 숲은 더 거칠었고, 물가는 더 가팔라, 호수를 사방에서 둘러싸며 아침부터 밤까지—그리고 밤새도록—은빛 개울이라는 전갈을 계속 보내 주는 산들을 향해 곧바로 치솟아 있었다. 왕자는 곧 공주의 방 초록 불이 보이는 자리를 찾아냈다. 그곳은 환한 대낮에도 건너편에서 발각될 염려가 없는 바위 속 일종의 동굴이었다. 그는 시든 나뭇잎으로 잠자리를 마련하고 누웠다. 너무 지친 나머지 굶주림조차 잠을 방해하지 못했다. 밤새도록 그는 공주와 함께 헤엄치는 꿈을 꾸었다.




10. 달을 보시오.

이튿날 이른 아침, 왕자는 먹을 것을 찾아 나섰고 이내 숲지기의 오두막에서 요기를 구했다. 그 뒤로 여러 날을 그 집에서, 용감한 왕자가 필요로 할 만한 것은 무엇이든 대접받았다. 당분간 버틸 만큼은 있었으니, 아직 오지 않은 궁핍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근심이 찾아들 때면 이 왕자는 누구보다 왕자답게 그것을 털어 보내곤 했다. 아침을 먹고 망보기 동굴로 돌아오자, 호수에는 이미 공주가 떠 있었다. 곁에는 관으로 알아볼 수 있는 왕과 왕비, 그리고 무지개 빛깔 차양을 드리운 사랑스러운 작은 배들에 탄 한 무리가 함께였다. 배에는 깃발과 기드림이 갖은 빛깔로 휘날렸다. 햇살 눈부신 날이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더위에 달아오른 왕자는 차가운 물과 서늘한 공주를 그리워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황혼까지는 참아야 했다. 배마다 음식이 실려 있었고, 해가 진 뒤에야 비로소 그 흥겨운 일행이 흩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배들은 왕과 왕비의 배를 따라 하나씩 물가로 물러났다. 마지막까지 남은 것은 공주의 배 한 척뿐인 듯했다. 그러나 공주는 아직도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왕자가 보기에는 공주가 자기 배만 먼저 물가로 보내는 것 같았다. 어쨌든 배는 노를 저어 떠나갔고, 이제 그 눈부셨던 일행 중에는 하얀 점 하나만이 남았다. 그때 왕자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런 노래였다.

“어여쁜 여인이여,
백조처럼 흰 이여,
그대 눈을 드시오,
밤을 몰아내시오
그대 두 눈의
그 힘으로.

눈 같은 두 팔이여,
눈 같은 노여,
그대를 이리로 저어 오오,
나직이 찰랑이며.
부드럽고 느리게,
그대를 이리로 저어 오오.

그대 뒤로 흐르라,
호수 위로,
눈부신 흰빛이여!
그대 자취를
따르고 또 따르며, 그대를 위하여.
눈부신 흰빛이여!

그대를 감싸라,
푸른 물이여.
그대에게서 떨어지지 말고,
다시 또 다시,
차갑고 참된
입맞춤을 둘러 주오.

나를 감싸 다오,
슬픈 물이여,
그녀를 떠나 온 물이여.
나를 기쁘게 해 다오,
너희는 떠나기 전에
그녀에게 입 맞추었으니.”

왕자가 노래를 마치기도 전에, 공주는 왕자가 앉은 바로 그 아래에 이르러 그를 찾으려 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귀가 공주를 제대로 이끈 셈이다.

“떨어져 보시겠소, 공주님?” 왕자가 내려다보며 말했다.

“아! 거기 있었구나! 좋아, 그래 줘, 왕자님.” 공주가 올려다보며 말했다.

“내가 왕자인 줄은 어찌 아시오, 공주님?” 왕자가 물었다.

“아주 근사한 청년이니까, 왕자님.” 공주가 말했다.

“그러면 올라오시오, 공주님.”

“데려가 줘, 왕자님.”

왕자는 스카프를 풀고, 검대를 풀고, 튜닉까지 벗어서는 모두 하나로 이어 내려뜨렸다. 그러나 줄은 한참 짧았다. 그는 터번을 풀어 보태자 얼추 길이가 맞았고, 마지막에 돈지갑까지 매달자 비로소 넉넉했다. 공주는 가까스로 금화 매듭을 붙잡았고, 순식간에 왕자 곁에 있었다. 이 바위는 지난번보다 훨씬 높아서, 물보라도 자맥질도 어마어마했다. 공주는 환희에 들떴고, 둘의 수영은 황홀했다.

밤이면 밤마다 둘은 만나 어둡고 맑은 호수에서 헤엄쳤다. 왕자의 기쁨이 어찌나 컸던지(공주의 세상 보는 방식에 물이 들었는지, 아니면 제 머리가 덩달아 가벼워졌는지), 자신이 호수가 아니라 하늘에서 헤엄치고 있다는 착각이 들 때가 많았다. 그러나 천국에 있는 것 같다는 말을 꺼낼라치면 공주는 지독하게 그를 비웃곤 했다.

달이 뜨자 새로운 즐거움이 찾아들었다. 달빛 아래 모든 것이 낯설고 새로워 보였다. 오래되고 시들었으면서도 바래지 않는 새로움이었다. 보름에 가까워지면, 둘이 무엇보다 좋아한 놀이가 있었다. 물속 깊이 잠수해서 몸을 돌려 바로 위에서 일렁이고 떨고 흔들리며 퍼졌다 오므라드는 커다란 빛 얼룩을 올려다보는 일이었다. 녹아 사라지는 듯하다가 다시 단단해지는 그 빛을. 그러다 그 얼룩을 뚫고 솟구치면, 자, 저기—공주의 말마따나, 그들의 것보다 깊고 푸른 호수 바닥에, 아득히 멀고 맑고 한결같고 차갑고 더없이 사랑스러운 달이 떠 있었다.

왕자는 물속의 공주가 여느 사람과 거의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금세 알아챘다. 게다가 공주는 물속에서는 물 밖에서처럼 앞서 캐묻거나 되바라지게 답하지 않았다. 웃는 일도 그만큼 잦지 않았고, 웃더라도 한결 부드러웠다. 물속에서 공주는 물 밖에 있을 때보다 훨씬 수줍고 처녀다워 보였다.

그러나 호수에 빠지면서 정말로 사랑에 빠진 왕자가 사랑 이야기를 꺼낼라치면, 공주는 늘 고개를 돌리고 웃어 버렸다. 얼마 뒤 공주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왕자의 말뜻을 이해해 보려 애쓰지만 못 하는 듯한—그래도 뭔가 뜻하는 바가 있음은 어렴풋이 아는 듯한 기색이었다. 그러나 호수를 벗어나는 순간, 공주가 어찌나 달라지는지, 왕자는 혼잣말을 했다. “내가 이 공주와 결혼한다면, 달리 방도가 없겠구나. 우리 둘 다 인어 남자와 인어 여자가 되어 당장 바다로 나가야 하겠지.”




11. 쉭!

공주의 호수 사랑은 이제 걷잡을 수 없는 열정이 되어, 한 시간도 물 밖에 있기 힘들 지경이었다. 그러니 어느 밤 왕자와 함께 자맥질하다가 문득 호수가 예전만큼 깊지 않다는 의심이 든 순간, 그녀가 얼마나 놀랐을지는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다. 왕자는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었다. 공주는 곧장 수면으로 솟구쳐 올라 한마디 없이 호수의 높은 쪽 기슭을 향해 전속력으로 헤엄쳐 갔다. 왕자가 뒤따르며 어디 아픈지, 무슨 일인지 말해 달라고 애원했다. 공주는 돌아보지도 않았고, 그의 물음에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물가에 이르자 공주는 바위를 끼고 돌며 꼼꼼히 살폈다. 그러나 결론을 내릴 수는 없었다. 달이 너무 작아 잘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공주는 돌아서서 집 쪽으로 헤엄쳐 갔다. 제 행동을 한마디도 해명하지 않은 채, 이제는 왕자의 존재조차 의식하지 않는 듯했다. 왕자는 크나큰 당혹과 애태움을 안고 제 동굴로 물러났다.

다음 날 공주는 여러 가지를 살펴보았고, 아! 두려움은 더욱 짙어졌다. 물가가 너무 말라 있었다. 기슭의 풀과 바위를 따라 기어오른 덩굴식물들이 시들어 가고 있었다. 공주는 호수 가장자리에 표식을 세우게 하고, 바람이 어느 쪽에서 불어오든 날마다 그것을 살폈다. 그러다 마침내 끔찍한 의심은 확실한 사실이 되었다—호수의 수면이 천천히 가라앉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가엾은 공주는 얼마 안 되는 제정신마저 잃다시피 했다. 살아 있는 그 무엇보다 사랑하는 호수가 눈앞에서 죽어 가는 꼴을 지켜본다는 것은 참담한 일이었다. 호수는 조금씩 스며 사라졌다. 이제껏 모습을 드러낸 적 없던 바위 꼭대기들이 맑은 물 깊은 곳에서 하나둘 솟아올랐다. 머지않아 그 바위들은 햇볕에 말라붙었다. 이제 그 자리에 진흙이 널브러져 햇볕에 구워지고 썩어 갈 일을 생각하면 두려웠다. 그 안에서 사랑스러운 것들이 죽어 가고 흉측한 것들이 생겨나겠지, 마치 세상이 창조의 순서를 거꾸로 풀려 나가듯이. 호수도 없이 해는 얼마나 뜨거워질까! 공주는 더 이상 호수에서 헤엄칠 수 없어 시름시름 시들어 갔다. 생명이 호수에 매여 있는 듯했다. 호수가 가라앉는 만큼 공주도 야위어 갔다. 사람들은 호수가 다 마르고 나면 공주가 한 시간도 더 버티지 못할 거라고 수군거렸다.

그러나 공주는 결코 울지 않았다.

전국에 포고령이 내렸다. 호수가 줄어드는 원인을 밝혀내는 자에게는 왕자다운 방식으로 후히 상을 내리겠다는 것이었다. 험드럼과 코피케크는 각자의 물리학과 형이상학에 머리를 싸맸으나 허사였다. 그 두 사람조차 원인을 대지 못했다.

실은 이 모든 화근의 뿌리에 그 늙은 공주, 마녀 이모가 있었다. 조카딸이 물속에서 그 누구보다 큰 기쁨을 누린다는 이야기를 듣자, 마녀는 분노로 펄펄 뛰며 진작 그것을 내다보지 못한 자신을 저주했다.

“하지만,” 마녀가 말했다. “내 곧 바로잡으리라. 내 복수를 잃느니, 왕과 백성이 갈증에 말라 죽고 저들의 뇌가 해골 속에서 끓어 지글지글 타는 꼴을 보고 말리라.”

그러고는 사나운 웃음을 터뜨리니, 검은 고양이의 등털이 공포에 곤두섰다.

이어 마녀는 방 안의 낡은 궤짝으로 가서 뚜껑을 열고, 마른 해초처럼 보이는 것을 꺼냈다. 그것을 물 한 통에 던져 넣었다. 가루를 뿌리고 맨팔로 저으며, 소리부터 흉측하고 뜻은 더 흉측한 말들을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통을 한쪽에 치워 두고, 궤짝에서 녹슨 열쇠 백 개가 주렁주렁 달린 커다란 꾸러미를 꺼냈다. 떨리는 손에서 열쇠들이 딸각딸각 부딪쳤다. 마녀는 자리에 앉아 그것을 하나씩 기름칠하기 시작했다. 그 일이 끝나기도 전, 저은 손을 멈춘 뒤에도 계속 느리게 일렁이던 통 속에서 거대한 회색 뱀의 머리와 몸 절반이 솟아올랐다. 그러나 마녀는 돌아보지 않았다. 뱀은 통에서 기어 나와 몸을 앞뒤로 느릿느릿 수평으로 흔들더니, 공주에게 다가가 그 어깨에 머리를 얹고는 귀에 대고 낮게 쉭 소리를 냈다. 공주는 움찔했다—그러나 기쁨으로였다. 어깨에 얹힌 머리를 내려다보고는 끌어당겨 입을 맞추었다. 그런 뒤 뱀을 통에서 완전히 꺼내 제 몸에 감았다. 그것은 거의 누구도 본 적 없는 무서운 생물 가운데 하나—어둠의 흰 뱀이었다.

이어 마녀는 열쇠들을 들고 지하실로 내려갔다. 문을 열면서 그녀는 혼잣말했다.

“이만하면 살 보람 있지 않은가!”

등 뒤로 문을 잠근 뒤 마녀는 지하실 계단을 몇 칸 내려갔다. 지하실을 가로질러 또 다른 문을 열자 어둡고 좁은 통로가 나왔다. 이 문도 등 뒤로 잠그고 계단을 몇 칸 더 내려갔다. 누가 그 마녀 공주를 뒤따랐다면 문 정확히 백 개를 여는 소리를, 그리고 문 하나를 열 때마다 계단 몇 칸씩 내려가는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마지막 문을 열자 어마어마한 동굴이 나타났다. 동굴 천장은 저절로 솟은 거대한 바위 기둥들이 떠받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천장이 바로 호수 바닥의 뒷면이었다.

마녀는 제 몸에서 뱀을 풀어, 꼬리를 잡고 높이 치켜들었다. 흉측한 생물은 동굴 천장을 향해 머리를 뻗었고, 간신히 천장에 닿을 만했다. 이윽고 뱀은 천천히 좌우로 머리를 흔들며 무엇인가를 찾는 듯했다. 그와 동시에 마녀는 동굴을 빙빙 돌기 시작했다. 한 바퀴 돌 때마다 중심에 조금씩 가까워졌다. 뱀의 머리는 그녀가 바닥 위에 그리는 것과 같은 자취를 천장 위에 그려 나갔다. 그녀가 계속 치켜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뱀은 여전히 느릿느릿 좌우로 흔들렸다. 두 존재는 동굴을 돌고 또 돌았다. 원은 점점 좁아졌고, 마침내 뱀이 갑자기 돌진하듯 천장을 향해 튀어 올라 입으로 꽉 물고 매달렸다.

“그래, 옳지, 내 귀여운 것아!” 마녀가 외쳤다. “싹 빨아 말려 버려라.”

마녀는 뱀을 놓아주고, 매달린 채 두었다. 그러고는 커다란 돌 위에 앉았다. 동굴을 도는 내내 그녀를 따라다니던 검은 고양이가 곁에 있었다. 마녀는 뜨개질을 하며 무시무시한 말을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뱀은 거대한 거머리처럼 매달려 돌을 빨았고, 고양이는 등을 궁글리고 꼬리를 밧줄 토막처럼 세운 채 뱀을 올려다보았다. 늙은 여인은 앉아 뜨개질을 하며 중얼거렸다. 이레 낮과 이레 밤을 그들은 그렇게 있었다. 그러다 문득 뱀이 기진맥진한 듯 천장에서 떨어지더니 오그라들어 다시 마른 해초 한 조각이 되었다. 마녀는 벌떡 일어나 그것을 집어 주머니에 넣고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뱀이 빨던 자리에 물 한 방울이 떨고 있었다. 그것을 보자마자 마녀는 돌아서서 달아났고, 고양이가 뒤따랐다. 허둥지둥 문을 닫고 잠그고, 끔찍한 말들을 중얼거리고는 다음 문으로 달려갔다. 다음 문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백 개의 문을 모두 거쳐 마침내 제 지하실에 도착했다. 거기서 마녀는 바닥에 주저앉아 까무러칠 지경이었으나, 백 개의 문을 뚫고 또렷이 들려오는 물 쏟아지는 소리를 고약한 쾌감 속에 귀 기울여 들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다. 한번 복수의 맛을 본 뒤, 마녀는 참을성을 잃어버렸다. 이대로 두면 호수가 마르기까지 너무 오래 걸릴 터였다. 그래서 이튿날 밤, 죽어 가는 늙은 달의 마지막 조각이 떠오르자, 뱀을 되살렸던 그 물을 조금 병에 담고 고양이와 함께 길을 나섰다. 새벽이 오기 전에 마녀는 호수를 한 바퀴 돌면서, 건너는 개울마다 무서운 말을 중얼거리고 병의 물을 조금씩 흘려 넣었다. 한 바퀴를 다 돌고 나서도 다시 한 번 중얼거리고, 달을 향해 물 한 줌을 뿌렸다. 그러자 온 나라의 샘이란 샘은 모두 맥박과 솟구침을 그치고—죽어 가는 사람의 맥박처럼—잦아들었다. 이튿날 호수 기슭을 따라 물 떨어지는 소리는 어디에도 없었다. 물길들마저 바싹 말라 있었다. 산들도 어두운 옆구리에 은빛 줄기 하나 내보이지 않았다. 어머니 대지의 샘들만 흐름을 멈춘 것이 아니었다. 온 나라의 아기들이 끔찍하게 울어 댔다—다만 눈물 한 방울 없이.




12. 왕자는 어디에?

공주가 그토록 갑작스럽게 자리를 뜬 그 밤 이후로, 왕자는 단 한 번도 공주와 마주하지 못했다. 호수에서 한두 번 본 적은 있었지만, 알아낸 바로는 공주가 밤에 더 이상 호수에 들지 않았다. 왕자는 앉아서 노래를 부르며 네레이드를 헛되이 기다렸고, 공주는 영락없는 네레이드처럼 호수와 함께 시들어 갔다. 호수가 줄어드는 만큼 공주도 가라앉았고, 호수가 마르는 만큼 공주도 여위었다. 마침내 왕자가 수위의 변화를 알아차렸을 때, 그는 크게 놀라고 당혹스러워했다. 공주가 떠나서 호수가 죽어 가는 것인지, 호수가 말라 가니 공주가 오지 않는 것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그러나 적어도 그것만은 알아내리라 결심했다.

왕자는 변장을 하고 궁전으로 가서 시종장을 만나게 해 달라 청했다. 차림새 덕분에 청은 대번에 받아들여졌고, 제법 눈썰미가 있는 시종장은 왕자의 간청에 귀에 들리는 것 이상의 사연이 있음을 알아차렸다. 또한 지금의 난국을 풀 실마리가 어디서 나타날지 누구도 모른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하여 시종장은 공주의 구두닦이로 써 달라는 왕자의 청을 들어주었다. 공주가 여느 공주들처럼 구두를 많이 더럽힐 리 없으니, 이런 편한 자리를 고른 것은 왕자치고도 제법 꾀바른 일이었다.

왕자는 공주에 관해 들을 수 있는 것은 죄다 들었고, 거의 제정신이 아닐 지경이었다. 며칠이고 호수를 돌아다니며 남은 웅덩이마다 들어가 잠수해 보았으나, 끝내 왕자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찾는 이 하나 없는 앙증맞은 부츠 한 켤레에 광을 한 번 더 내는 것뿐이었다.

공주는 죽어 가는 호수를 내다보지 않으려 휘장을 친 채 방에 틀어박혀 있었다. 그러나 마음속에서만큼은 한순간도 호수를 몰아낼 수가 없었다. 호수가 상상 속을 떠나지 않아, 공주는 마치 호수가 제 영혼이라도 되어 그 영혼이 안에서부터 말라붙다가 먼저 진흙이, 이윽고 광기와 죽음이 되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렇게 끔찍한 변화 하나하나를 곱씹다 보니 공주는 거의 미칠 지경이 되었다. 왕자에 관해서는 이미 잊은 지 오래였다. 물속에서 아무리 함께 즐거웠다 한들, 물이 없으면 왕자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아니, 아버지와 어머니마저 잊은 듯했다. 호수는 계속 줄어들었다. 자잘한 진흙 얼룩이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그 얼룩은 물의 어른거리는 빛 사이에서 변함없이 번들거렸다. 얼룩은 자라서 넓은 진흙탕이 되었고, 여기저기 바위가 드러나며 퍼드덕거리는 물고기와 꿈틀대는 장어가 바글바글했다. 사람들은 사방을 누비며 그것들을 잡았고, 왕실 배에서 떨어진 물건도 혹시 있을까 하여 뒤졌다.

이윽고 호수는 거의 자취를 감추었고, 가장 깊은 몇몇 웅덩이만이 마르지 않은 채 남았다.

어느 날 한 무리의 아이들이 호수 한가운데 있는 그런 웅덩이 언저리에 모이게 되었다. 제법 깊은 바위 분지였다. 들여다보니 바닥에 무언가 햇빛에 노랗게 빛나는 것이 보였다. 꼬마 하나가 뛰어들어 건져 올렸다. 글씨가 새겨진 황금판이었다. 아이들은 그것을 왕에게 가져갔다. 한쪽 면에는 이런 말이 새겨져 있었다—

“죽음만이 죽음에서 구할 수 있나니.
사랑은 죽음이요, 또한 용기이니—
사랑은 가장 깊은 무덤도 메우나니.
사랑은 물결 아래에서도 사랑하나니.”


이 말은 왕과 궁정인들에게는 자못 수수께끼 같았다. 그러나 판의 뒷면이 그 뜻을 조금 풀어 주었다. 거기 새겨진 글은 대략 이러했다—

“호수가 사라질 지경에 이르거든, 물이 빠져나가는 구멍을 찾아내야 한다. 다만 여느 방도로 막으려 해 봐야 소용이 없다. 듣는 방도는 오직 하나뿐. 살아 있는 사람의 몸만이 그 흐름을 멎게 하리라. 그 사람은 스스로 원하여 자기 몸을 바쳐야 하며, 호수는 차오르면서 그 목숨을 거두어야 한다. 그렇지 아니하면 제물은 소용이 없다. 만일 나라가 그런 영웅 하나를 찾아내지 못한다면, 이 나라는 망해도 할 말이 없으리라.”




13. 제가 여기 있습니다.

이는 왕에게 대단히 낙담스러운 계시였다—신하 하나를 제물로 바치기가 꺼려져서가 아니라, 스스로 목숨을 내놓겠다는 자를 찾을 가망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체할 틈이 없었다. 공주는 침대에 꼼짝 않고 누운 채, 이제는 영 깨끗지도 않은 호수 물 말고는 아무것도 받아먹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왕은 황금판의 내용을 온 나라에 공표하게 했다.

그러나 나서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한편 왕자는 라고벨로 오던 길에 마주쳤던 숲속 은자에게 자문을 구하려 며칠이고 숲 안쪽으로 여행을 떠나 있었던 터라, 돌아오고 나서야 신탁을 들었다.

자초지종을 모두 알고 난 왕자는 자리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내가 하지 않으면 공주는 죽을 것이요, 공주가 없다면 내게 삶이 무슨 뜻이 있겠나. 그러니 내가 한다 해서 잃을 것은 없다. 공주의 삶은 전과 다름없이 즐거울 터이니 곧 나를 잊으리라. 그리고 세상에는 그만큼 아름다움과 행복이 더해질 테지!—하기야 내가 그것을 보지는 못할 테지만.” (여기서 가엾은 왕자는 한숨을 내쉬었다.) “달빛 아래 호수는 얼마나 사랑스러울까, 그 눈부신 이가 야생의 여신처럼 그 안에서 뛰노는 모습은!—그래도 조금씩 조금씩 물에 잠겨 죽는다는 건 영 호락호락한 일이 아니지. 어디 보자—내 키가 칠십 인치쯤 되니 그만큼은 잠겨야 할 텐데.” (여기서 웃어 보려 했으나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오래 걸릴수록 좋지 않은가.” 왕자는 말을 이었다. “공주가 내내 내 곁에 있도록 흥정해 볼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러면 한 번 더 보고, 어쩌면 입을 맞추고—누가 알겠는가—공주의 눈을 들여다보며 죽을 수도 있겠지. 그건 죽음이 아닐 것이다. 적어도 죽음이라 느끼지는 않으리라. 그리고 호수가 다시 아름답게 차오르는 것을 보다니!—좋다! 준비되었다.”

왕자는 공주의 부츠에 입을 맞추고 내려놓은 뒤 왕의 거처로 서둘러 갔다. 가는 길에 감상적으로 굴면 영 꼴사나우리라는 생각이 들어, 왕자는 이 모든 일을 무심한 태도로 밀고 나가기로 했다. 그리하여 감히 들어갔다간 목이 달아날 수도 있는 왕의 금고실 문을 두드렸다.

왕은 노크 소리를 듣자 벌떡 일어나 잔뜩 노한 얼굴로 문을 열었다. 눈앞에 보이는 것이 한낱 구두닦이뿐임을 보고는 칼을 뽑아 들었다. 유감스럽게도 이는 왕이 제 위엄이 손상될 성싶을 때마다 왕권을 내보이던 평소의 방식이었다. 그러나 왕자는 조금도 겁먹지 않았다.

“황공하오나 폐하, 소인이 폐하의 집사이옵니다.” 왕자가 말했다.

“내 집사라고! 이 거짓말쟁이 같은 놈!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

“폐하의 그 큰 병에 마개를 꽂아 드리겠다는 뜻이옵니다.”

“이놈이 미쳤나?” 왕은 호통치며 칼끝을 치켜들었다.

“폐하의 새는 호수에 마개를—막음쇠를—그 뭐라 부르시는 것을 꽂아 드리겠다는 뜻이옵니다, 위대하신 군주시여.” 왕자가 말을 이었다.

왕은 분이 어찌나 치솟았던지, 입을 떼기도 전에 그새 열이 가라앉으며, 지금의 위급한 사태에 기꺼이 쓸모가 되겠다는 단 하나의 사내를 죽여 버리는 것은 크나큰 낭비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저 방자한 놈이야 왕이 손수 목을 친 것과 진배없이 결국엔 죽을 몸이 아닌가. “오!” 왕은 마침내 입을 열며, 칼이 하도 긴 탓에 겨우 집어넣고 이렇게 덧붙였다. “신세를 지게 되었구나, 이 젊은 바보 놈아! 포도주 한 잔 어떠냐?”

“아니요, 사양하겠나이다.” 왕자가 답했다.

“좋다.” 왕이 말했다. “그럼 그 실험인지 뭔지를 하기 전에 부모라도 뵙고 오고 싶으냐?”

“아니요, 사양하겠나이다.” 왕자가 답했다.

“그럼 곧장 구멍을 찾으러 가자꾸나.” 왕은 이렇게 말하고 시종들을 불러 모으기 시작했다.

“잠시만, 폐하. 한 가지 조건이 있사옵니다.” 왕자가 끼어들었다.

“뭐라고!” 왕이 외쳤다. “조건이라고! 그것도 짐에게! 어찌 감히?”

“좋으실 대로 하시지요.” 왕자가 태연히 답했다. “그럼 폐하께 평안하신 아침 드시라 여쭙고 물러가겠나이다.”

“이 괘씸한 놈! 자루에 담아 구멍에 처넣어 버리리라.”

“그리하시지요, 폐하.” 왕자는 살짝 공손한 태도로 돌아가 답했다. 왕의 노여움 때문에 공주를 위해 죽는 즐거움마저 빼앗길까 염려되었기 때문이다. “하오나 그리하시면 폐하께 무슨 득이 있겠나이까? 신탁에는 제물이 스스로 나서야 한다 이르지 않았사옵니까.”

“그래, 너는 스스로 나섰지 않았느냐.” 왕이 되받았다.

“예, 다만 한 가지 조건하에서 그러하옵니다.”

“또 조건이냐!” 왕이 다시 칼을 뽑으며 으르렁거렸다. “물러가라! 그 영예를 기꺼이 네 어깨에서 덜어 갈 자가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폐하께서도 아시지 않사옵니까, 저를 대신할 자를 찾기 쉽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래, 네 조건이 뭐냐?” 왕자의 말이 옳다는 것을 느끼며 왕이 투덜거렸다.

“다만 이것뿐이옵니다.” 왕자가 답했다. “제 생각에 제대로 물에 잠기기 전에 죽어서는 아니 될 터이고, 그 기다림이 자못 지루할 것이옵니다. 하오니 따님이신 공주님께서 저와 함께 자리하시어, 친히 먹여 주시고 이따금 바라보시며 위로해 주시기를 바라옵니다. 그 일이 제법 고된 일임은 폐하께서도 인정하시지 않겠나이까. 물이 제 눈 높이까지 차오르거든 공주님께서는 떠나셔서 행복하시고, 가엾은 구두닦이는 잊으셔도 좋사옵니다.”

여기서 왕자의 목소리가 떨리더니, 그렇게 다잡은 결심에도 하마터면 감상에 젖을 뻔했다.

“그런 조건이면 진작 말할 것이지! 별것도 아닌 일로 왜 이리 소란이냐!” 왕이 외쳤다.

“허락하시는 것이옵니까?” 왕자가 거듭 물었다. “물론이다, 허락한다.” 왕이 답했다.

“좋사옵니다. 준비되었나이다.”

“그럼 가서 저녁이라도 들고 있거라. 그동안 짐이 사람을 시켜 그 자리를 찾아 두마.”

왕은 호위병을 불러내어 장교들에게 즉시 호수의 구멍을 찾으라 명했다. 그리하여 호수 바닥을 구획으로 나누어 샅샅이 뒤진 끝에, 한 시간쯤 지나 구멍이 나왔다. 구멍은 호수 한가운데 가까운 돌 한복판에 뚫려 있었다. 황금판이 나온 바로 그 웅덩이 안이었다. 그리 크지 않은 세모꼴 구멍이었다. 돌 주위에는 물이 그득했으나, 구멍으로 빠져나가는 양은 얼마 되지 않았다.




14. 참 고마운 일이로군요.

왕자는 이번 일을 위해 복식을 갖추러 갔다. 왕자답게 죽으리라 다짐했던 까닭이다.

자기 대신 죽겠다 나선 자가 있다는 말을 듣자, 공주는 어찌나 기뻤는지, 그토록 쇠약한 몸으로도 침대에서 벌떡 뛰어내려 방 안을 빙빙 돌며 춤을 추었다. 그자가 누구인지는 공주에게 아무 상관도 없었다. 구멍만 틀어막히면 그만이요, 사람 하나면 된다니 어쨌든 하나 가져다 쓰라지. 한두 시간 안에 모든 채비가 끝났다. 시녀가 서둘러 옷을 입히자, 사람들이 공주를 호숫가로 들고 갔다. 호수를 본 공주는 비명을 지르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사람들은 공주를 들쳐 안고, 미리 작은 배를 띄워 둔 그 돌까지 건너갔다.

물이 아직은 배를 띄울 만큼 깊지 않았으나, 머지않아 그리되리라 바랐다. 사람들은 공주를 방석 위에 눕히고, 포도주와 과일과 온갖 맛난 것을 배에 실었으며, 그 위로 차양을 드리웠다.

잠시 뒤 왕자가 나타났다. 공주는 한눈에 그를 알아보았으나, 굳이 아는 체할 것까지는 없다고 여겼다.

“제가 여기 있습니다.” 왕자가 말했다. “저를 넣어 주십시오.”

“구두닦이라고 들었는데요.” 공주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왕자가 말했다. “하루 세 번씩 공주님의 작은 부츠를 닦았지요. 제가 공주님에 관해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곤 그뿐이었으니까요. 자, 저를 넣어 주십시오.”

궁정인들은 왕자의 퉁명스러운 말투에 딱히 기분 상하지 않았다. 그저 저희끼리 ‘저자가 무례함으로라도 분풀이를 하는군’ 정도로 수군댔을 뿐이다.

그런데 왕자를 어떻게 넣는단 말인가? 황금판은 그 점에 관해 아무런 지침도 주지 않았다. 왕자는 구멍을 들여다보고 방법은 하나뿐임을 알았다. 돌 위에 걸터앉아 두 다리를 구멍에 집어넣고, 몸을 앞으로 숙여 남은 모서리를 두 손으로 막았다. 이 불편한 자세 그대로 운명을 맞이하리라 결심한 왕자는 사람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제 그만 물러가시오.”

왕은 이미 저녁을 먹으러 집으로 돌아간 뒤였다.

“이제 그만 물러가오.” 공주가 앵무새처럼 왕자의 말을 따라 되뇌었다.

사람들은 공주의 말에 따라 물러갔다.

곧이어 자잘한 물결 하나가 돌 위를 흘러와 왕자의 한쪽 무릎을 적셨다. 그러나 왕자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런 노래였다—

“샘 하나 없는 세상과 같이,
숲속 골짜기에서 솟아 반짝이는 샘 없이;
아래로 흘러내리는 시냇물의
반짝임 없는 세상과 같이;
드넓은 너른 바다의
눈부신 눈짓 없는 세상과 같이;
햇살 가득한 들판 위로 빗방울이
반짝여 본 적 없는 세상과 같이—
내 마음이여, 그대의 세상도 그와 같으리라,
그대 안에 사랑이 흐르지 않는다면.

땅속을 흐르는
실개천의 소리도 없고,
어둠을 벗어나 방랑하는
샘물의 보글거림도 없이;
내리닫는 강물의
우렁찬 물살과 흐름도 없이;
너른 너도밤나무 꼭대기에 떨어지는
음악 같은 빗방울도 없이;
높이 치솟은 물결이 환호할 때
들려오는 바다의 장엄한 목소리도 없이—
내 영혼이여, 그대의 세상도 그와 같으리라,
그대 안에 사랑이 노래하지 않는다면.

여인이여, 그대의 세상이 기쁨을 잃지 않기를;
그대 눈앞에 물을 간직하시기를.
사랑이 나를 굳세게 하여 가게 하나니,
그대를 위해, 저 아래 왕국으로,
물의 빛도 물의 노래도
어둠을 뚫고 이르지 못하는 곳으로;
바라건대, 나를 떠올리는 한 조각 생각이
그대 안에 작은 샘이 되어 솟기를;
사랑 없는 그대 영혼이
메마르고 목마른 땅처럼 되지 않도록.”


“또 불러 봐요, 왕자님. 그러면 덜 지루하니까.” 공주가 말했다.

그러나 왕자는 너무도 벅차 더는 노래하지 못했고, 긴 침묵이 이어졌다.

“참 고마운 일이로군요, 왕자님.” 마침내 공주가 말했다. 눈을 감은 채 배 안에 누워서, 자못 태연한 말투였다.

‘고맙다 돌려드리지 못해 유감이오.’ 왕자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래도 그대는 죽을 만한 값어치가 있는 분이오.’

다시 잔물결이 하나, 또 하나, 또 하나 돌 위로 흘러와 왕자의 두 무릎을 적셨다. 그러나 왕자는 말도 하지 않고 움직이지도 않았다. 두 시간, 세 시간, 네 시간이 그렇게 흘렀다. 공주는 잠든 듯했고, 왕자는 잘 참고 있었다. 다만 이 처지를 두고 제법 실망이 컸으니, 기대했던 위안이라곤 하나도 얻지 못한 탓이었다.

마침내 왕자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공주님!” 왕자가 불렀다.

그러나 그 순간 공주가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떴다! 배가 떴어!”

그러면서 작은 배가 돌에 쿵 부딪혔다.

“공주님!” 왕자가 거듭 불렀다. 공주가 말똥말똥 깨어 물을 반갑게 바라보는 모습에 용기를 얻은 것이다.

“왜요?” 공주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답했다.

“아버님께서 약속하시지 않았습니까, 공주님이 저를 바라봐 주시겠다고. 한 번도 저를 보지 않으셨잖소.”

“그랬던가요? 그럼 봐야 하겠네요. 그런데 어찌나 졸린지!”

“주무세요, 그럼. 나는 마음 쓰지 마시고요.” 가엾은 왕자가 말했다.

“정말 착하시네요.” 공주가 답했다. “다시 자야겠어요.”

“먼저 포도주 한 잔과 비스킷 하나만 주시지요.” 왕자가 자못 겸손히 청했다.

“기꺼이.” 공주가 말하며 하품을 했다.

그래도 공주는 포도주와 비스킷을 집어 들고, 왕자 쪽으로 뱃전 너머로 몸을 기울였다가, 어쩔 수 없이 왕자의 얼굴을 보게 되었다.

“어머, 왕자님.” 공주가 말했다. “안색이 안 좋으시네요! 괜찮으세요, 정말?” “조금도 힘들지 않소.” 왕자가 답했다. 실은 몹시 아득한 참이었다. “다만 무언가 좀 먹지 않으면, 공주님께 도움이 되기 전에 먼저 숨이 끊어질 것 같군요.”

“그럼 여기요.” 공주가 왕자에게 포도주를 내밀며 말했다.

“아! 먹여 주셔야 합니다. 손을 움직여서는 안 되지요. 물이 당장 빠져나갈 테니까요.”

“어머나!” 공주는 이렇게 말하고는 바로 비스킷 조각과 포도주 한 모금씩을 왕자에게 먹이기 시작했다.

먹여 주는 동안 왕자는 이따금 공주의 손가락 끝에 입을 맞추려 재주를 부렸다. 공주는 좋든 싫든 크게 개의치 않는 듯했다. 그래도 왕자는 한결 기운이 났다.

“이제 공주님을 위해서 말인데요.” 왕자가 말했다. “주무시게 둘 수가 없군요. 앉아서 저를 봐 주셔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제가 버티지 못할 것 같소.”

“좋아요, 기꺼이 해드리죠.” 공주는 짐짓 거들먹거리며 답하고는, 자리에 앉아 왕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사정을 감안하면 놀랄 만큼 한결같은 눈길로 계속 왕자를 바라보았다.

해가 지고 달이 떠올랐다. 그리고 왈칵, 또 왈칵, 물은 왕자의 몸을 타고 차올랐다. 이제 허리까지 물이 차 있었다.

“우리, 헤엄치러 가면 안 될까요?” 공주가 말했다. “이 근처에는 물이 충분해 보이는데요.”

“다시는 헤엄치지 못할 것입니다.” 왕자가 말했다.

“아, 깜빡했어요.” 공주는 이렇게 말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하여 물은 차오르고 또 차올라, 왕자의 몸 위로 점점 더 높이 올라왔다. 공주는 앉아서 왕자를 바라보았다. 이따금 먹여 주었다. 밤이 깊어 갔다. 물이 오르고 또 올랐다. 달도 덩달아 점점 더 높이 떠올라, 죽어 가는 왕자의 얼굴을 가득 비추었다. 물이 목까지 차올랐다.

“공주님, 입을 맞춰 주시겠소?” 왕자가 힘없이 물었다.

이제 태연함 같은 것은 어디에도 남지 않았다.

“그래요, 해드릴게요.” 공주는 이렇게 답하고, 길고, 달콤하고, 차가운 입맞춤을 해주었다.

“이제.” 왕자는 만족스러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행복하게 죽을 수 있소.”

왕자는 다시 입을 열지 않았다. 공주는 마지막으로 포도주를 조금 먹여 주었다. 왕자는 더는 먹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런 뒤 공주는 다시 자리에 앉아 왕자를 바라보았다. 물은 차오르고 또 차올랐다. 턱에 닿았다. 아랫입술에 닿았다. 입술 사이로 스며들었다. 왕자는 물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입을 꽉 다물었다. 공주는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물이 윗입술에 닿았다. 왕자는 콧구멍으로 숨을 쉬었다. 공주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물이 콧구멍까지 덮었다. 공주의 눈은 겁에 질린 채 달빛 아래 이상하게 반짝였다. 왕자의 머리가 뒤로 툭 떨어졌다. 물이 그 위를 덮었고, 왕자의 마지막 숨이 물을 뚫고 방울방울 떠올랐다. 공주는 비명을 지르며 호수로 뛰어들었다.

공주는 먼저 한쪽 다리를 붙들고 잡아당기고 끌어 보았지만 꼼짝도 하지 않았다. 다른 쪽 다리도 마찬가지였다. 숨을 고르려 멈추는데, 그러다 문득 왕자는 숨 한 모금 쉴 수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공주는 미칠 듯 다급해졌다. 왕자를 붙들고 물 위로 머리를 받쳐 올렸다. 이제 왕자의 손이 구멍을 막고 있지 않았으니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미 소용이 없었다. 왕자는 숨이 끊긴 뒤였다.

사랑과 물이 공주의 힘을 모두 되돌려 주었다. 공주는 물속으로 들어가 온 힘을 다해 잡아당기고 또 잡아당긴 끝에 마침내 한쪽 다리를 빼냈다. 나머지 다리는 어렵지 않게 따라 나왔다. 왕자를 어떻게 배 위에 올렸는지는 공주 자신도 두고두고 알 수 없었다. 다만 올리고 나서는 그만 기절하고 말았다. 정신이 돌아오자 공주는 노를 붙잡고, 할 수 있는 한 몸을 바로잡은 뒤, 한 번도 저어 본 적 없는 노를 저어 나갔다. 바위를 에돌고 여울을 건너고 진흙을 헤치며 마침내 궁전의 뱃전 계단에 다다랐다. 그때쯤엔 사람들이 이미 물가에 나와 있었으니, 공주의 비명을 들었기 때문이다. 공주는 왕자를 자기 방으로 옮기고, 자기 침대에 눕히고, 불을 피우고, 의사를 부르라고 명했다.

“하오나, 공주님, 호수는 어찌하옵니까!” 소동에 놀라 잠옷에 모자만 쓰고 뛰쳐나온 시종장이 말했다.

“거기 가서 빠져 죽으시든가!” 공주가 말했다.

이는 공주가 평생 저지른 마지막 무례였다. 그리고 시종장에게 화를 낼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음은 누구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설령 왕 자신이었어도 나을 것이 없었으리라. 그러나 왕도 왕비도 깊이 잠들어 있었다. 시종장은 제 침상으로 돌아갔다. 어찌 된 영문인지 의사들은 끝내 오지 않았다. 그리하여 공주와 늙은 유모만이 왕자 곁에 남았다. 하지만 늙은 유모는 지혜로운 할멈이라 무엇을 해야 할지 알고 있었다.

둘은 오랫동안 온갖 수를 다 써 보았으나 소용이 없었다. 공주는 희망과 두려움 사이에서 거의 정신을 놓을 지경이었으나, 이 방법 저 방법을 끈덕지게 이어 가며 하나하나를 몇 번이고 거듭 시도했다.

마침내 거의 포기하려던 찰나, 해가 떠오를 무렵, 왕자가 눈을 떴다.




15. 저 비를 보세요!

공주는 왈칵 울음을 터뜨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그 자리에 한 시간이나 누워 있으면서도 눈물은 멎을 줄 몰랐다. 평생 참아 온 모든 울음이 그제야 쏟아졌다. 그리고 그 나라에서 일찍이 본 적 없는 비가 내렸다. 해는 내내 빛났고, 땅을 향해 곧장 떨어지는 큰 빗방울들도 함께 반짝였다. 궁전은 무지개 한복판에 잠겼다. 그것은 루비와 사파이어와 에메랄드와 토파즈의 비였다. 산에서 쏟아진 급류는 녹아 흐르는 황금 같았고, 지하로 빠지는 물길이 아니었다면 호수가 넘쳐 나라를 잠기게 했을 것이다. 호수는 기슭에서 기슭까지 가득 찼다.

그러나 공주는 호수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바닥에 엎드려 울기만 했다. 방 안에서 내리는 이 비는 방 밖에서 내리는 비보다 훨씬 더 놀라운 것이었다.

눈물이 조금 잦아들어 공주가 일어서려 하는데, 놀랍게도 일어설 수가 없었다. 여러 번 애쓴 끝에 겨우 발을 딛고 섰으나, 곧장 다시 쓰러졌다. 유모는 그 넘어지는 소리를 듣고 기쁨의 탄성을 지르며 달려와 외쳤다—

“아이고, 우리 아기! 중력을 되찾으셨구먼요!”4

“오, 그게 그거군요!” 공주가 어깨와 무릎을 번갈아 문지르며 말했다. “참 달갑지 않은 물건이네요. 몸이 산산이 짓눌리는 것만 같아요.”

“만세!” 왕자가 침대에서 외쳤다. “공주님이 정신을 차리셨다면, 나도 차렸소. 호수는 어떻소?”

“찰랑찰랑 가득하답니다.” 유모가 답했다.

“그럼 우리 모두 행복하구려.”

“정말 그래요!” 공주가 흐느끼며 답했다.

그리고 그 비 내리는 날, 온 나라가 기쁨으로 들끓었다. 아기들조차 지난 괴로움을 잊고 깜짝 놀랄 만큼 춤추고 재잘거렸다. 왕은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왕비는 귀 기울여 들었다. 왕은 상자에 든 돈을, 왕비는 단지에 든 꿀을 아이들에게 모두 나눠 주었다. 그리하여 그때껏 들어 본 적 없는 환호가 울려 퍼졌다.

물론 왕자와 공주는 곧장 약혼했다. 그러나 혼례다운 혼례를 올리려면 공주는 먼저 걷는 법을 배워야 했다. 그 나이에 이르러서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공주는 갓난아기보다도 걷지 못했기 때문이다. 걸핏하면 넘어지고 어딘가를 다치곤 했다.

“이게 그동안 그리 대단하다던 중력인가요?” 어느 날 왕자가 공주를 바닥에서 일으켜 세울 때 공주가 물었다. “저로 말하자면, 이게 없을 때가 훨씬 편안했는데요.”

“아니, 아니오. 그건 중력이 아니라오. 이게 중력이지요.” 왕자는 그렇게 답하고는, 공주를 아기처럼 번쩍 안아 올려 방 안을 빙빙 돌며 내내 입을 맞추었다. “이게 중력이오.”

“그 편이 낫네요.” 공주가 말했다. “그런 중력이라면 저도 그리 싫지 않아요.”

그러고는 왕자의 얼굴을 향해 더없이 달콤하고 사랑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왕자가 쏟아 부은 수많은 입맞춤에 답하여 공주도 작은 입맞춤 하나를 돌려주었는데, 왕자는 그 하나로 넘치도록 보답받았다 여겼으니, 기쁨에 정신이 아득할 지경이었다. 유감스럽게도 이 뒤로도 공주는 중력을 두고 한두 번쯤은 투덜거리곤 했다.

걷는 법에 익숙해지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그 배움의 고통은 두 가지 일로 넉넉히 덜어졌으니, 그 어느 한쪽만으로도 위로가 되고 남았을 일이었다. 첫째는 왕자가 친히 스승이었다는 것, 둘째는 공주가 원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호수에 뛰어들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공주는 왕자와 함께 뛰어들기를 더 좋아했고, 예전에 둘이 일으키던 물보라는 이제 둘이 일으키는 물보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호수는 두 번 다시 줄어들지 않았다. 세월이 흐르면서 동굴의 천장이 아예 닳아 뚫리더니, 호수는 예전의 두 배로 깊어졌다.

공주가 이모에게 한 복수라곤, 다음에 만났을 때 통풍 든 발가락을 꽤 세게 밟아 준 것뿐이었다. 그러나 공주는 바로 다음 날 그 일을 후회했다. 물이 이모의 집 아래를 파고들어 밤사이에 집이 무너졌고, 이모가 그 폐허에 깔렸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감히 그 시신을 파내려 나선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모는 오늘날까지 거기 누워 있다.

그리하여 왕자와 공주는 더불어 살며 행복했다. 황금 왕관과 옷감 옷과 가죽 신발을 가졌고, 사내아이와 여자아이 자식들을 두었는데, 그 누구도 가장 아슬아슬한 순간에조차 제 몫의 중력을 단 한 톨도 잃어버렸다는 말은 끝내 들리지 않았다.





옮긴이 주

  1. 원문은 light-haired(머리숱이 적은)와 light-heired(후사가 변변치 못한)의 동음 말장난. 우리말에는 이 대응이 없어 ‘머리숱 가벼운’과 ‘후사 가벼운’을 나란히 두었다.
  2. 모르비데차(morbidezza). 이탈리아 미술 용어로, 부드럽고 여린 육체의 질감을 이른다. 여기서는 웃음에 슬며시 배어드는 서글픔의 기운을 가리킨다.
  3. 원문은 INFIRMITY. ‘굳세지 못함(in-firm)’이라는 뜻이 속에 숨어 있어, 가벼운 공주에게는 더없이 들어맞는 말장난이다. 왕만 그 점을 놓쳤다.
  4. 원문 gravity는 ‘중력’과 ‘진중함’의 이중의미를 동시에 품는다. MacDonald는 이 한 단어로 작품 전체를 꿰뚫는데, 이 마지막 대목에서 유모는 물리적 무게와 마음의 무게를 나란히 되찾았음을 한꺼번에 기뻐한다.
Chapter 1 of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