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 of 1

Chapter 1

지나(支那)*의 명기(明器)

會津八一

이름과 실제가 이토록 맞지 않는 수집가도 달리 없을 것이다. 제법 훌륭한 것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는 소문이 무성하지만, 실은 내세울 만한 물건이 하나도 없다.

고이시카와에 살던 시절에(지금으로부터 십수 년 전 일이다) 전국 각지의 향토 완구를 모은 적이 있었다. 육백 종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세간의 완구 통가들이 하듯이 온갖 희귀한 것들을 수집하여 자랑하려는 뜻이 아니라, 그 무렵 내가 골몰하고 있던 원시 신앙 연구의 자료로 삼으려는 것이었다. 불행히도 이 완구들의 대부분은 출판부 창고 안에서 홍수를 만나 전멸하고 말았다.

다음으로, 현재 내가 손에 가지고 있어 그나마 이야깃거리가 될 만한 것은 지나(支那)의 명기(明器), 곧 고분에서 발굴되는 토제 인형과 기물 따위로, 내가 소장한 것이 백삼사십 점에 이른다. 지나에서는 삼대(三代) 옛적부터 사람이 죽으면 묘 안에 인형을 넣어 시종을 들게 하는 풍습이 있었다. 이른바 용(俑)이다. 인형 외에도 닭·개·돼지·말·소 같은 동물이나 기물, 때로는 건물까지 함께 넣는 관습이 한대(漢代) 이후 점차 성행하다가 당대(唐代)에 이르러 절정을 이루었다. 나무로 만들어 옷을 입힌 것도 있었겠지만, 나무는 세월이 지나면서 모두 썩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마는지라, 오늘날 전해지는 것은 옥제(玉製)가 극히 드물게 있을 뿐이고 대부분은 토제이다. 토제라 해도 기와처럼 구워낸 다음 호분(胡粉)을 바르고 그 위에 먹이나 안료로 채색한 것도 있고, 당대(唐代)에 이르면 삼채(三彩)라 하여 황·갈·녹색 혹은 남색 유약을 입힌 도제도 있다. 이 명기(明器)가 지나(支那)에서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어서, 경한철도(京漢鐵道) 부설 공사 때 고분을 발굴한 서양인 기사들이 처음 발견한 것이 계기가 되어 그 뒤로 점차 베이징의 골동품점에 등장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거의 시세도 없는 물건이었다. 그것을 저명한 고고학자 나진옥(羅振玉) 씨가 사들여 훗날 《고명기도록(古明器圖錄)》을 편찬하였다. 그 무렵부터 세계의 학자와 감상가들의 주목을 끌었고, 오늘날에는 세계 어느 박물관에나 다수 소장되어 있으며, 구미인의 손으로 편집된 도록도 많이 나와 있고, 연구도 널리 이루어지고 있다. 일본에서도 도쿄 제실박물관과 동서 양경(兩京)의 제국대학, 도쿄미술학교, 개인으로는 호소카와 후작과 교우인 소리마치 시게요시 씨 등이 모두 우수한 것들을 다수 소장하고 있다. 요코가와 박사의 수집품은 근년에 궁내성에 헌납되었다. 미술적으로 정교하게 제작되어 색채가 제작 당시 그대로이고 형태마저 드문 것이라면 수백 엔에서 천 엔 이상 하는 것도 드물지 않다. 반면 상하이 변두리 도구상의 가게 앞에 내걸린 하품에는 일 엔에 두세 개씩 주는 것도 있다. 요컨대 명기의 가격은 천차만별이다.

그렇다면 왜 세계 곳곳에서 갑자기 이 명기를 그토록 진중히 여기게 되었는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지나의 골동품으로는 오래전부터 고동기(古銅器), 곧 종정(鐘鼎)의 류가 매우 존중되어 왔고, 당송(唐宋) 이후로는 지나 특유의 회화도 차차 발달하여 그 유품이 오늘날 풍부하게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당대(唐代) 이전의 미술 조각이라 하면, 지금까지는 한대(漢代)의 화상석(畫像石)이나 육조(六朝) 시대의 불상, 혹은 그 부속물로서의 승려상과 사자상 정도에 불과하였다. 그런데 이 명기의 류가 속속 출토됨에 따라, 한대에는 화상석처럼 선각(線刻)이 아닌 환조(丸彫)의 인형과 동물이, 특히 반가운 것은 육조 이후 당대에 이르는 시기의 장군·문관·미인·노비·가축 등 풍속적 생활이 우리 눈앞에 펼쳐지게 되었다. 천지를 제사하는 제기(祭器)로서의 동기(銅器)와 장신구로서의 옥기(玉器), 불교 우상만이 있던 지나 미술의 밭에, 참으로 인간다운, 부드러운 감촉의, 스스럼없는 인간 생활의 조각이 나타난 것이다. 미술의 측면에서도, 고고학의 측면에서도, 혹은 순전한 호기심에서도 구미인들이 크게 들썩이는 것은 전혀 무리가 아니다. 묘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언제까지나 꺼림칙하게 여기는 사람도 있지만, 천 년에서 이천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그런 것을 개의친다면 학문에도 예술에도 인연이 없는 부류라 할 수밖에 없다. 또 무턱대고 모조품을 두려워하는 사람도 있다. 겨우 토제 인형이 몇십 엔 몇백 엔에 팔린다는 것을 알게 되면, 무덤을 파지 않아도 위조품을 만들어 돈을 버는 방법을 모를 지나인이 아닌지라, 실제로 모조품이 꽤 많다. 지나의 어떤 지방에서는 마을 전체가 이 모조품 제조를 업으로 삼는 곳도 있어서, 공들이기로는 일단 만들어 채색까지 마친 것을 일부러 땅에 묻고, 그 위에 더러운 물을 끼얹어 이삼 년 후에 파내어 어중간하게 흙을 털어 시장에 내놓는 방식도 있다. 또 진품에서 형틀을 떠내어 그 틀로 모조품을 만들거나, 진품이라도 초벌구이에 나중에 유약을 입히는 번거로운 수법도 있다. 지나 시장에 어마어마하게 많고도 분간하기 어려운 모조품이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현지를 여행하다가 그런 현장을 목격하고 돌아온 사람의 여행담을 듣고 겁을 먹는 사람이 있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만, 모조품이 많다는 것은 명기에 국한된 일도 아니고, 지나에 국한된 일도 아니다. 어느 나라에서나 오래된 것은 모조품이 진품보다 많다. 그러므로 명기 수집도 속임수를 꽤나 경계해야 하는 일이지만, 경계만 한다고 해서 알 수 없는 사람은 역시 알 수 없다. 베이징이나 상하이나 어디에 다녀왔다 해서 그것만으로 알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지나인이라도 모르는 사람은 역시 모른다. 아는 사람이 보면 어렵지 않게 바로 가려낼 수 있다. 모조품이 두렵다며 뒷걸음치는 사람은 자신이 미술을 모른다고 자백하는 것이나 다름없으니, 그런 사람은 손을 대지 않는 편이 좋을 것이다.

모조품은 지나제만이 아니다. 독일풍 응용화학으로 교묘하게 삼채(三彩)를 흉내 낸 것도 있고, 일본제도 있다. 혹은 멀리 도쿄까지 온 뒤 호분을 다시 바르거나 눈썹을 다시 그리거나 옷을 다시 물들이는 것도 있다. 또 전혀 위조라는 의식 없이, 일종의 상고취미(尚古趣味)에서 교토의 상당한 도공이 자신의 솜씨를 보이려는 진심으로 만든 것도 있다. 그것들도 눈 있는 사람이 보면 아무 수고 없이 가려낼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런데 나는 누구나 아는 가난뱅이이면서, 오늘날까지 적지 않은 수를 모으는 데 상당히 고생했다. 내 처지로서 한 점에 백 엔 전후 하는 것을 여러 개 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월급으로 모자랄 때는 궁여지책으로 내가 쓴 서화에 값을 매겨 전람회를 열고, 그 수입으로 겨우 상인에게 지불을 마친 일도 있다. 그런 전람회를 지금까지 도쿄 긴자에서 한 번, 고향에서 세 번 열었다. 이런 방식으로 모은 것들이니 수집으로서 남에게 자랑할 만한 것은 하나도 없다. 온통 저가품뿐이다. 그야말로 조잡품 진열이다. 그러나 나는 어쨌든 와세다대학에서 동양미술사라는, 나로서는 다소 분에 넘치는 강의를 맡고 있는 처지이니,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모른다고 할 수는 없다 싶어서 미력의 한계까지, 오히려 그 이상을 다한 것이다. 어느 관리에게도, 어느 부호에게도, 수집이 빈약함을 부끄러워할 필요는 조금도 없다고 생각한다. 명기에 관한 이야기는 나로서는 강의실에서 다루어야 할 일의 하나이므로, 여기서는 우선 이 정도에서 그치기로 한다.

나는 최근 조선의 어느 곳에서 옛 신라 시대의 고와(古瓦)를 파편 섞인 채로 사백 개 남짓 구입하였다. 지금까지 내 손에 있던 일본과 지나의 고와 이백 개를 합치면 육백 개가 된다. 이것도 나로서는 동양미술사 연구의 표본이지, 결코 도락 삼매로 하는 것이 아니지만, 어쨌든 이것도 하나의 수집이라 하면 수집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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