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
칸게쓰 씨는 올해 일흔 살을 일기로 2월 23일에 영면하셨다. 혼마 히사오(本間久雄) 씨로부터 내가 아는 만큼의 칸게쓰 씨를 전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기에, 그야말로 내가 알고 있는 만큼의 칸게쓰 씨를, 있는 그대로 떠오르는 그대로 적기로 한다. 내가 모르는 다른 면의 칸게쓰 씨도 분명 적지 않을 테지만, 그에 관한 어림짐작이며 전해 들은 이야기 따위는 다 빼고 적는다. 사람의 일을 적으면서 어림짐작이나 꾸밈을 섞어 그럴싸하게 지어내는 짓은, 내가 좋아하지 않는 일이다. 그러므로 이하에 적는 것은, 내가 직접 본 일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내가 칸게쓰 씨에게 직접 들은 일이다.
씨가 아주 젊었을 때의 일이야 물론 내가 알지 못한다. 그러나 칸게쓰 씨에게 들은 바로는, 씨는 아주 젊은 시절 당시 이른바 문명개화(文明開化) 풍조의 숭배자였고, 지금 말로 하자면 대단한 하이칼라(ハイカラ)였다고 한다. 무엇이든 서양식이라면 좋아하셨다는 것이다. 씨의 부친 친가쿠(椿岳) 씨는 아직 서양 악기가 변변히 들어오지도 않던 시절, 양악 곡을 연주하는 일본인 따위 전혀 없던 그때에, 피아노였는지 오르간이었는지 어쨌거나 서양 음악 악기를 거의 첫 번째로 요코하마(横濱)에서 사들였고, 또 서양식 들여다보는 안경(覗き眼鏡)을 사 와서 아사쿠사 공원(淺草公園)에서 사람들에게 보여주신 일도 있었다. 그런 사실들을 견주어 보면, 과연 문명개화의 신봉자셨겠거니 싶기도 하다.
그러나 내가 칸게쓰 씨를 알게 된 무렵에는, 씨는 이미 일본 취미의 사람이 되어 있었다. 지금이야 엔세키 잣슈(燕石十種)도 간행본이 나와 있지만, 그 무렵에는 사본뿐이었고, 60책에 이르는 완본은 매우 진귀한 물건이었다. 그래서 씨는 그것을 도서관에서 매일같이 차분히 즐기시며 영사(影寫, 받쳐 베껴 그리기)하고 계셨다. 매일 빌려 보시는 책이 정해져 있었으니, 도서관 출납계의 입장에서 보자면 참으로 손이 가지 않는 좋은 열람인이라, 어느새 엔세키 잣슈 선생이라는 별명까지 얻으셨다. 우리 같은 졸독난독(卒讀亂讀)하는 부류, 출납계에 한없이 손이 많이 가는 성가신 사람들과는 처지가 달라, 도서관 사람들과도 자연히 친히 지내고 계셨다.
그림은 친가쿠 씨에게서 배우셨는지 어쩌셨는지 알지 못한다. 다만 후년에 이르러서는 자연히 어딘가 친가쿠 씨와 혈맥이 통하는 데가 있는 그림을 그리시게 된 데 비해, 이른 시기의 작품들은 진지하고 솜씨가 깔끔한 쪽의 그림이었다.
독서는 딱딱한 쪽의 책에는 손을 대지 않으셨으나, 미술·문학·수필·잡서 방면으로는 두루 폭넓게 섭렵하셨다. 문학은 도쿠가와기, 미술은 나라 시대 어림까지 거슬러 올라가셨고, 특히 미술 쪽은 서적 연구만이 아니라 실물 연구에도 오랜 세월을 보내셨기에, 그 감식안(鑑識眼)은 실기상의 지식이 안에서 받쳐주는 힘과 더불어 직각적으로뿐 아니라 비교적으로뿐 아니라 정수에서 출발해 꿰뚫어 보는 데가 자못 만만치 않았다. 세속적 욕심이 왕성해서 서화 골동(書畫骨董)이라도 다루셨더라면, 학문도 글재주도 상당하시고 애교도 있으며 총명영리(聰明怜悧)한 분이셨으니 가히 거만(巨萬)의 부를 얻기에 족하셨겠으나, 그러면서도 그런 일로 이득을 보는 사람을 차가운 눈으로 보시는 경향이 있어, 그런 일을 굳이 하지 않으셨다. 한편으로는 생활의 어려움이 없으셨던 까닭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 씨의 흥미로운 기풍이 그러하셨다. 오만한 기색이 조금도 없지는 않으셨던 요다 갓카이(依田學海) 씨 같은 분이 씨를 마음 편한 좋은 벗으로 삼으신 까닭이기도 했다. 문학에서도 역시 그런 경향이 있어, 깊이 손을 담그셨더라면 다수는 아닐지언정 반드시 한두 편은 이분 아니고서는 쓸 수 없는 것을 남기셨을 텐데, 사이카쿠풍의 『백미인(百美人)』이니 뭐니 하는 것을 잠깐 쓰신 정도로 그치고 마신 것은, 도리어 그 한평생이 행복했던 증거여서 경사스럽다 할 만하나, 한편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든다. 하이쿠 같은 것도, 바쇼 이후의 따분하리만치 처진 풍은 싫어하셔서, 소인풍(宗因風)의 이른바 단린(檀林) 풍의 것을 자기 식으로 그저 흘려 읊으시는 정도에 그치셨다. 그래서 에이키(永機) 같은 이와 사귀고 계셨음에도 하이쿠 또한 장난감 삼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짐짓 으스대며 “내 하이쿠는 진심으로 짓는 것일세” 하고 떠벌리면서도 좋은 구절은 짓지 못하고 심미안조차 변변히 열리지 않은 사람들과는 도무지 가는 길이 달라, 마음대로 노시는 식이셨으니, 구절도
行水は其日の湯くわん哉
(여름 행수는 그날의 한바탕 입욕이런가)
같은 것이 많다. 사실 묘사 구절이 되면 더더욱 내던지듯 한 풍을 좋아하셔서,
見おろすや音羽の瀧に三人ならぶ
(굽어보니 오토와 폭포(音羽の瀧) 아래 세 사람 나란하구나)
는 어떻소, 하고 스스로 웃으시는 식이었다. 일찍이 렌쿠(聯句)를 시도하신 일도 있었는데, 모두 그 풍이었기에 무엇 하나 거리낄 것이 없으셨고, 그 자유자재함이며 흥미로움이라 할 것 같으면 비길 데가 없었다. 그 대신 이른바 종장(宗匠)에게 보이면, 종장은 쓰디쓴 떫은 표정을 짓는 법인데, 그 또한 종장의 떨떠름한 얼굴을 도리어 재미있어하셨다.
선(禪)에도 한 시기 발을 들이셨는데, 참선이라는 것을 시작하기 전부터 이미 칸게쓰 류의 일가를 이룬 깨달음을 가지고 계셨고, 또 무서운 선사(禪師)와 만나는 인연도 없으셨기에, 곁에서 보면 선사 쪽이야 훌륭한 사가(師家)이셨겠지만 칸게쓰 씨 쪽이 자못 멋스러웠다. 혼조(本所)의 오백나한사(五百羅漢寺)에서 어느 날 문답(問答)을 하신 자리를, 마침 권유에 이끌려 곁에서 지켜본 일이 있는데, 떠올리기만 해도 눈물이 날 만큼 우스웠다. 선사가 시자(侍者)를 거느리고 위엄 있게 의자에 앉아 계시면, 승속(僧俗)이 번갈아 나와 무어라 말하고, 응수가 잘도 오가는 식이다. 이윽고 칸게쓰 씨가 나오시더니 무슨 말씀을 하실까 싶었는데, “어떠한가, 이것이 라이운인가” 하고,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방향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으셨다. 나로서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라이운’이라니 무슨 말인지 누구라도 알지 못했으리라. 그러자 선사는 “이미 다 일러두었노라” 하고 답했다. 과연 침착한 솜씨다. 칸게쓰 씨는 거기서 능숙하게 예를 갖추시고 그러고는 물러나신 것이었다. 그 자리는 그것으로 끝나고 말았는데, 나로서도 ‘라이운’이라는 말이 도무지 뜬금없어 알 수가 없었다. 어쩐지 선록(禪錄)에서도 ‘라이운’이라는 것은 짚이지 않아, 나중에 “그 ‘라이운’이라는 게 무엇이오” 하고 여쭈었더니, “라이운은 오는 구름(來雲)이라네. 구름이 어슬렁어슬렁 오는 그 뜻이 무엇이냐고 물어본 것이지” 하고 말씀하시기에, 나는 견딜 수 없어 웃음을 터뜨렸고, 칸게쓰 씨도 함께 재미있어하시며 웃고 계셨다. 후년에 기독교 외국인 선교사가 고우메(小梅) 부근에 와 살고 있던 터라, 칸게쓰 씨도 그 가르침을 들으신 일이 있었기에, 선교사의 부인이 칸게쓰 씨 댁을 방문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와 보니 방 안 가득히 갖가지 물건이 빼곡하고, 그 가운데에는 옛 불상 따위가 두셋이 아니게 장식되어 있었던지라, 외국 부인이라 눈을 둥그렇게 뜨고 놀랐다. 칸게쓰 씨는 그러한 모양을 보시고는, 그 우상들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All is my toys.(이 모두가 나의 장난감이오.)”라고 말씀하셨다. 그날이었던가 그 다음 날이었던가, 그 이야기를 듣고 나는 ‘라이운’을 떠올리며 재미있다 여겼다.
인류학을 연구한다든가 하는 거창한 뜻은 아니셨던 모양이지만, 원시인의 토기(原人土器) 채집이며 비교 따위에도 흥미를 가지셔서 여러 곳 근처로 출타도 하셨다. 나는 토기 만지작거리기를 좋아하지 않았기에 그다지 알지는 못한다. 그러나 어느 날, 토기 파편을 칸게쓰 씨가 모조하고 계신 것을 보고는, 그 풍류로운 호사(好事)에 참으로 놀랐다. 수천 년 전 토기의 파편을 모조해 놓고 그것을 즐기고 있는 사람이 또 어디에 있을 것인가. 무릇 이런 풍으로 스스로 흥취하고 계신 것, 그것이 곧 칸게쓰 씨의 면목이었다.
씨의 한평생을 통틀어, 씨는 남아돌 만큼의 총명을 지니고 계시면서도 그것을 함부로 쓰지 않으시고 조용히 몸가짐을 지키셨다. 남의 일에도 그다지 들지 않으시는 대신 남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시고 남도 번거롭게 하지 않으시며, 오면 막지 않고 가면 좇지 않는다는 식으로, 지극히 온화하게, 명리를 구하지 않으시고, 다만 자신의 흥취에 살며 즐거이 장수하신 분이었다. 만년의 칸게쓰 씨에 관해서는, 내가 빈곤과 다망함으로 마음 놓고 한가로이 노닐 틈이 적어진 탓에 어느새 찾아뵙고 한담을 나눌 기회가 줄었고, 또 사시는 곳도 멀어졌기에, 전해 듣기로 평안하시다는 정도로만 알고 지냈을 뿐이라 잘은 알지 못한다. 다만 늘 그러하시던 대로 조용하고도 흥미롭게 세월을 보내고 계셨으리라 생각한다. 중년 무렵의 씨가 장서가 풍부하셨고, 그것을 우리 같은 무리에게 빌려 주시는 일을 아끼지 않으시며, 천진하면서도 흥취 어린 담화를 나누는 일을 마다하지 않으셨던 것은, 지금도 그리움이 그치지 않는다.
(다이쇼 15년(1926년) 4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