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
아사쿠사 공원 이야기도 너무 오래된 일은 대개 잊어버렸으니 여기서 다 풀어놓을 수는 없다. 료운카쿠(凌雲閣, 12층 전망탑)가 처음 세워졌을 때도, 6구(六區)에 미국 남북전쟁 파노라마가 들어섰을 때도, 보러 갔던 일은 기억하지만 정확한 연도가 떠오르지 않으니 잠시 보류해 두기로 하자. 내가 스무 살이 된 무렵부터(즉 메이지 30년(1897) 무렵부터)의 일이라면 그럭저럭 기억나는 듯하다. 가장 끄트머리에 있던 에가와 극장은 공놀이 곡예나 마술 흥행으로 사람들에게 이름이 났던 곳이었다. 지금 요시모토 그랜드 영화극장 자리에 무엇이 있었는지는 이제 와서는 알 수가 없다. 그 옆 지금 롯쿠자가 있는 자리는 전쟁으로 헐릴 때까지는 반세이자라는 극장으로, 검극과 고이치로(五一郎) 일좌의 가벼운 연극을 올렸다. 그 이전에는 반세이안이라는 메밀국수집이었다. 전쟁 중까지 오페라칸이 있던 자리는 분명 미야코자라 하여 겐지부시(源氏節)와 온나 시바이(女芝居, 여인 연극)를 걸었던 듯하다. 도키와자는 예전부터 지금 자리에 있던 연극장(芝居小屋)으로, 메이지 30년대에는 신파(新派) 배우들이 무대에 올랐다. 야마구치 사다오 일좌, 그 뒤 사토 도시조 일좌가 올라온 일만 기억한다. 지금의 영화여배우 야마다 이스즈의 아버지 야마다 구스오(여형)도 출연했었던 듯하다. 잘못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무렵 영화관은 아직 한 곳도 없었다. 도키와자 맞은편은 루나 파크였고, 그 이전에는 인공 후지산이 서 있었다. 흥행가의 너른 길은 그쯤에서 막다른 길이 되고, 거기서 좁은 골목 같은 옆길을 빠져나가면 큰길의 고서점 아사쿠라야 부근으로 나서게 된다. 메이지 40년(1907) 무렵에는 영화관은 이미 한창이었다. 야스기부시 춤이나 도조 스쿠이(미꾸라지 잡기 춤)가 유행하기 시작한 것은 다이쇼에 들어선 뒤일 것이다. 자세한 것은 모른다. 그 무렵 지금의 쇼치쿠자는 미쿠니자라는 연극장으로, 사와무라 돗시 일좌가 걸려 있었다. 다이쇼 10년(1921) 무렵 자체 화재로 타버린 뒤 새로 지어 쇼치쿠자가 된 것이다. 쇼치쿠 소녀가극이 처음 흥행에 들어간 곳도 쇼치쿠자다. 공원 극장이었는지 관음 극장이었는지 분명히 기억나지는 않으나, 다이쇼 시대에 지금의 다이쇼칸 뒤편 어디쯤에도 극장이 있어서 한때 나카무라 마타고로가 메이지자의 사단지 일좌에서 갈라져 나와 자기 일좌를 꾸렸던 적도 있었다. 공원 뒤편의 미야토자는 메이지 30년 무렵 새로 들어선 연극장으로, 처음에는 이이 요호 일좌가 걸려 있었던 듯하다. 다이쇼 초엽에는 구파(舊派)가 들어서서 겐노스케·간고로·오니마루·슈초 같은 배우들이 무대에 올랐다. 활동사진과 연극을 한데 엮은 연쇄극이라는 것도 걸려 있었다.
공원 안팎의 요릿집과 음식점은 다이쇼 12년(1923)의 (간토) 대지진까지는 수도 많고 장사도 잘되었다. 요릿집 가운데 하나야시키 부근의 마쓰시마는 회석다실(會席茶屋)로 이름이 알려져 있었다. 잇초쿠도 하나야시키 뒤편에 있던 연회 다실이었다. 그러나 그 무렵 가장 번창했던 곳은 공원 뒤편의 닭요릿집 다이킨이었을 것이다. 게이샤를 부르는 자리도 있었고 기분 좋은 목욕탕도 갖추어져 있었다. 대지진 전 도로를 넓힐 무렵에 문을 닫은 듯하다. 센조쿠초 큰길에 있던 히라노라는 닭요릿집도 다이킨에 못지않은 집으로, 마당도 객실(座敷)도 어디 하나 나무랄 데 없었다. 대지진 후에도 잘 나갔다. 요시와라에서 돌아온 손님이 (요시와라 안의) 나카노초의 게이샤와 다이코모치(幇間)를 이끌고 와서, 이른 아침부터 욕탕이 데워져 있었다. 공원 안팎의 요릿집 가운데 격이 높은 집들은 모두 옛적부터 나카노초와 인연이 닿아 있었다. 닛폰즈쓰미에 히라마쓰. 유곽 안에 가네코라는 요릿집이 있었다. 어느 곳이나 산야의 야오젠이며 주바코라는 장어집과 함께 이름이 거론되던 자리로, 주머니가 가벼운 사람들이 드나드는 곳은 아니었다. 그 무렵의 노는 법이란 시류와 더불어 이제는 아득한 옛이야기가 되어버렸다. 닛폰즈쓰미의 히라마쓰는 메이지 35~6년 무렵에는 쇠고기집 도키와로 바뀌었고, 유곽 안의 가네코는 메이지 40년대에 이미 폐업했던 듯하다.
이야기는 다시 공원으로 돌아간다. 벤텐야마 종루 가까이에 스가노라는 닭요릿집이 있었다. 처음에는 가벼운 마음으로 들어가기 좋은 집이었으나, 다이쇼에 접어들고 나서는 게이샤라도 부르지 않으면 안 될 만큼 시끌벅적한 집이 되어버렸다. 덴포인 뒷문 앞의 튀김집 나카세이도 처음에는 식사를 본위로 삼은 집이었지만, 이 또한 대지진 무렵에는 여종업원(女中)이 오메시 기모노에 짙은 화장을 하고 술을 따르러 나오게 되어 손님의 종류가 영판 달라져버렸다. 나카세이 가까이에 낡은 벽돌로 지은 뭐라더라 하는 양식당이 있었다. 공원 안에서 양식당다운 양식을 내놓던 집은 이 한 집뿐이었으나, 대지진으로 불타버린 채 폐업한 듯하다. 공원 뒤편에 오사카야라는 양식당이 있는데 여기도 요리는 나쁘지 않았다. 전화(戰禍) 후에도 그대로 장사를 잇고 있다고 한다. 긴류칸 옆 번화한 상점가에는 전화 전 하나야, 미야코, 요네사쿠가 있었다. 그리고 약탕(藥湯) 옆에 조개 요리와 가마솥밥을 내놓는 가게가 있었다. 그중에서도 요네사쿠라는 집의 요리는 꽤나 솜씨가 좋아서, 늘 에도 앞바다(에도마에)의 신선한 생선을 갖추어 두고 있었다. 그러나 전화 후에는 요네사쿠도 가마솥밥집도 자취를 감추었다. 나카미세 뒤편의 오카다, 마루토메, 그 옆의 우지노사토는 옛적부터 도쿄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집이었으나 이쪽 또한 전화 후에는 아직 다시 문을 열지 못한 모양이다. 나카미세에서 우마미치로 빠지는 길에 있던 가네타라는 닭전골집은 게이샤를 동반한 손님도, 살림하는 가족 손님도 자주 드나들던 가게였는데 지금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지금 음식점 가운데 사람들 눈에 띄는 곳은 돈가스집과 중화소바집(라멘)이다. 대지진 전 공원의 명물이었던 야부소바는 관음당 뒤편에서 대지진 후 센조쿠초의 화류계 쪽으로 옮겨갔는데, 이름난 단팥죽집 마쓰무라는 전후 공원 안 옛 자리 가까이에 가게를 냈다는 소문이다. 우메조노라는 단팥죽집도 요즈음 옛 자리에 간판을 걸고 있다. 에도 시대에는 우메조노인(梅園院)이라는 절이 있던 자리라는 이야기다. 규나베집(쇠고기 전골집)은 전쟁 전까지 이마한, 친야, 도키와 세 집이 잘되었다. 나카미세의 도키와는 주인이 바뀌어 다이마스가 되었는데, 그것은 대지진 후의 일이었던 듯하다. 센조쿠초에 밤새 영업하던 아즈마라는 쇠고기집은 값이 저렴해서 이름이 났던 집이었다. 전화 후에는 보이지 않는 듯하다.
(쇼와 25년(1950) 3월 9일 도쿄니치니치신문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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