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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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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가 바쁜 지 여러 날이나 상구를 만날 수 없다. 눈앞에 면대하지 않으니 겁도 차차 으스러지고 도리어 마음은 허랑하게만 든다.
실상은 다음날로라도 곧 가려 하였으나 겸연쩍은 마음에 그럴 수도 없어 며칠은 번겼다. 그날 부랴부랴 그곳을 나오느라고 만갑이 가게에 물건을 잊어 둔 것이다. 물건도 물건 공칙히 손에 걸치는 옷가지인 까닭에 안 찾을 수도 없고 밤이 이슥하기를 기다려 분녀는 조심스러이 거리로 나갔다.
행길에는 사람들이 듬성듬성하다. 전과는 달라 한결 조물거리는 마음에 사방을 엿보며 가게로 들어가자 기다리고 있던 듯이 만갑이는 성큼 뛰어나온다.
"올 사람도 없을 듯하군."
밀창을 드르렁드르렁 밀고 휘장을 치고 가게를 닫는 것이다.
"곧 갈 텐데."
"눈어림만 했더니 맞을까."
골방문을 냉큼 열더니 만갑이는 상자를 집어낸다. 덮개를 여니 뾰족한 구두. 새까만 광채에 분녀는 눈이 어립다.
팔을 나꾸어 쪽마루로 이끈다.
반갑기보다도 무섭다.
'그까짓 구두쯤.'
불 하나를 끄니 가게 안은 어둑스레하다.
만갑이는 마루에 걸터앉자 강잉히 팔을 잡아 끈다. 뿌리치고 빼다가 전봇대 모서리에서 붙들렸다.
"손가락 겨냥 좀 해볼까."
우격으로 끌리운다.
마루에 이르기 전에 만갑이는 날쌔게 남은 등불을 마저 죽여 버렸다.
어두운 속에서 분녀는 씨름꾼같이 왈칵 쓰러졌다. 더운 날숨이 목덜미를 엄습한다. 굵은 바로 얽어매인 것같이 몸이 가쁘다.
'미친것.'
즐겨서 들어온 것은 아니나 굳이 거역할 것이 없는 것은 몸이 떨리기는 하나 거듭하는 동안에 마음이 한결 유하여진 것이다. 무엇보다도 어둠에는 눈이 없는 까닭에 부끄러운 생각이 덜하다.
별안간 밀창을 흔드는 인기척에 달팽이같이 몸이 움츠러들었다. 시침을 떼려던 만갑이는 요란한 소리에 잠자코 있을 수 없어 소리를 친다.
"천수냐."
하는 수 없이 문을 여니 천수가,
"야단났어요."
어느결엔지 들어와서,
"병환이 더해서 댁에서 곧 들어오시라구요."
"더하다니."
"풍이 나서 사람을 몰라봐요."
"곧 갈게, 어서 들어가."
천수가 약빠르게 불을 켜는 바람에 분녀는 별수없이 어지러운 꼴을 등불 아래 드러냈다. 움츠러들며 외면하였으나 천수의 눈이 등에 와 붙은 것 같다.
"녀석 방정맞게."
만갑이의 호통에보다도 천수는 분녀의 꼴에 더 놀랐다.
이튿날 상구가 왔다.
임시 시험이라고는 칭탈하나 오월도 잡아들지 않았는데 모를 소리였다. 어떻든 그를 만나기는 퍽도 오래간만이다. 거의 하루 건너로 찾아오던 것이 문득 끊어지더니 마침 두 장도막을 넘긴 것이다. 하기는 전 모양 그 모양 지닌 책보도 전의 것대로였다. 다만 얼굴이 좀 그을었고 눈망울이 그 무슨 먼 생각에 멀뚱하다. 필연코 곡절이 있으련만―---그것을 꼬싯꼬싯 묻기에 분녀는 심고를 하며 상구의 말과 눈치가 될 수 있는 대로 자기의 일신의 변화 위에 떨어지지 않도록 발뺌을 하느라고 애를 썼다. 속으로는 상구한테서 정이 벌써 이렇게도 떴나 하고 궁리 다른 제 심정을 아프고 민망하게도 여겼다. 거짓없는 상구의 입을 쳐다보기도 죄만 스럽다.
"시골학교 재미 적다. 서울로나 갈까 생각하는 중이다."
새삼스런 소리에 분녀는 의아한 생각이 나서,
"아무 델 가면 시험 없나? 뚱딴지같이 다따가 서울은 왜."
"조사가 심해서 책도 맘대로 읽을 수 없어. 책권이나 뺏겼다. 서울 가면 책도 소원대로 읽을 거, 동무도 흔할 거."
"책 책 하니 학교책이나 보면 됐지 밤낮 무슨 책이야."
책보를 끌러 활짝 헤치니 교과서 아닌 몇 권의 책이 굴러 나왔다. 영어책도 아니요 수학책도 아니요 그렇다고 소설책도 아닌 불그칙칙한 껍질의 두터운 책들이다. 분녀는 전부터도 약간은 상구가 그러스름한 책을 읽고 있는 것과 그것이 무슨 속인가를 짐작하여 행여나 하는 의심을 품고 오기는 왔다.
"집에 두면 귀찮겠기에 몇 권 추려 가져왔다. 소용될 때까지 간직했다 주렴."
"주제넘게 엉큼한 수작 하다 망할 장본인야. 까딱하다 건수, 윤패 꼴 되려구."
"함부로 지껄이지 말아. 쥐뿔도 모르거든."
상구는 눈을 부르댔다.
"너 요새 수상하더라. 태도가 틀렸지."
소리를 치며 책을 鎗큼 들어 분녀의 볼을 갈긴다.
"어떻게 알고 그런 주제넘은 대꾸야."
돌리는 얼굴을 또 한번 갈기다가 문득 고름 끝에 옭아매인 반지를 보았다.
"웬 것야."
잡아채이니 고름이 떨어진다. 상구는 금시에 눈이 찢어져 올라가며 불이라도 토할 듯 무섭게 외친다.
"어느 놈팽이를 웃어 붙였니. 개차반. 천보."
머리채가 휘어잡혔다. 볼이 얼얼하고 이빨이 솟는 듯하나 분녀는 아무 대답 없다. 모처럼의 기회에 차라리 죽지가 꺾이게 실컷 맞고 싶다. 미안한 심사가 약간이라도 풀려질 것 같다.
"숫제 그 손으로 죽여 주었으면."
실토였다. 눈물이 솟는다.
"큰 것 죽이지 네까짓 것 죽이러 생겨났겐."
결착을 내려는 듯이 몸째 차 박지르고 상구는 훌쩍 나가 버렸다.
어쩐지 마지막 일만 같아 분녀는 불현듯이 설워지며 공연히 그를 설굿친 것을 뉘우쳤다.
저녁때 밭에서 돌아오기가 바쁘게 어머니는 황당하게 설렌다.
"들었니. 상구 말이다."
분녀의 얼굴에는 아직도 눈물 자국이 부숙부숙한 채로다.
"요새 더러 만나 봤니. 이상한 눈치 보이지 않든―--- 들어갔단다."
"네, 언제요."
분녀는 눈이 번쩍 뜨인다.
"망간 거리에서 소문 듣고 오는 길이다. 윤패, 건수 들과 한 줄에 달릴 모양이다. 사람 일 모르겠다."
"낮쯤 와서 책까지 두고 갔는데요."
"낌새 채고 하직차로 왔었나 보다. 멀건 소소리패들과 휩쓸려 지내더니 아마도 그간 음특한 짓을 꾸민 게야."
"눈치가 이상은 하였으나 그렇게까지 되다니요."
사실 분녀는 거기까지는 어림하지 못하였다. 아까 상구와 끝내 말다툼까지 하다 그의 심사를 설굿치게 된 것도 실상은 그의 말이 전과는 달라 수상하게 나온 까닭이었다.
"녀석들의 언결 입었거나 그렇지 않으면 철모르고 덤볐거나 한 게야. 사람은 겉볼 안이 아니구먼. 이 일을 어쩌노."
어머니로서는 공연한 걱정이었다.
"웃학교는 아시당초 틀렸지. 초라니 같은 것. 사람 잘못 가렸어."
슬그머니 딸을 바라본다. 분녀의 얼굴은 안온한 것도 같고 아득한 것도 같다.
"사람과 생각이 다른 거야 하는 수 없지요."
"넌 어떻게 생각하느냐 말이다. 분하지 않으냐."
"분하긴요."
먼숙한 얼굴을 은연중 바라보며 어머니는 은근한 목소리로,
"너희들 그간 아무 일 없었니."
분녀는 부끄러운 뜻에 화끈 얼굴이 달며 착살스런 어머니의 눈초리에서 외면하여 버렸다.
"있었다면 탈이다."
수삽스러운 생각에 어머니가 자리를 뜬 것이 얼마나 시원한지 알 수 없다. 어머니에게 대하여서보다도 애매한 상구에게 대하여 더 부끄럽다. 일신이 별안간 더럽고 께끔하다.
어쩐지 어심아하여 밤이 늦었을 때 분녀는 골목을 나갔다. 남문거리에 가서 한 모퉁이에 서기만 하면 웬만한 그날 소식은 거의 귀에 들려 온다. 행길 복판 게시판 옆에 두런두런 모여서들 지껄지껄하는 속에서 분녀는 영락없이 상구의 소문을 가달가달 훔쳐 낼 수 있었다.
건수가 괴수였다. 모여서 글 읽는 패를 모으려다가 들킨 것이다. 학교에서는 상구 외에도 두 사람, 거리에서는 건수와 윤패네 세 사람. 상구는 건수에게서 책을 빌렸을 뿐이나 집을 속속들이도 수색당하고 학교에서는 나오는 대로 퇴학을 맞을 것이다.
상구도 이제는 앞길이 글렀구나 생각하면서 분녀는 발을 돌렸다. 이렇게 될 것을 예료하고 그를 숨기고 허랑하게 처신을 하여 온 것 같아 면목 없고 언짢다.
집에 돌아오니 상구의 두고 간 책이 유난스럽게 눈에 띈다. 그립기보다도 도리어 책망하는 원혼같이 보여서 쓸어 들고 아궁 앞으로 내려갔다.
'차라리 태워 버리는 것이 글거리가 남잖아 피차에 낫지.'
불을 그어 대니 속장부터 부싯부싯 타기 시작한다. 먹과 종이 냄새가 나며 두터운 책이 삽시간에 불덩이가 된다. 어두운 부엌 안이 불길에 환하다. 상구와는 영영 작별 같다. 악착한 것 같아 분녀는 눈앞이 어질어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