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
별이 빛나는 깃발
글쓴이
존 A. 카펜터(John A. Carpenter)
1814년 8월 18일, 서인도 제도에서 함대를 이끌고 돌아온 코번 제독(Admiral Cockburn)은 워싱턴의 먼로 국무장관에게 다음과 같은 협박 서한을 보냈다.
귀하께. 본관은 캐나다 총독 각하로부터 어퍼 캐나다에서 귀국 군대가 자행한 무도한 파괴 행위에 대하여 합중국 주민을 상대로 한 보복 조치의 실행에 협조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는바, 총독 각하의 요청에 응하여 본관 휘하 해군 병력에 대해 연안에서 공격 가능하다고 판단되는 도시와 지역을 파괴하고 초토화하라는 명령을 하달함이 본관의 엄정한 의무가 되었음을 통보하는 바이다.
당시 그의 함대는 체서피크만(Chesapeake Bay)으로 흘러드는 패툭센트강(Patuxent River)에 정박해 있었다.
따라서 즉각 “공격 가능한” 도시들이란 볼티모어(Baltimore), 워싱턴, 그리고 아나폴리스(Annapolis)였다.
패툭센트강 연안의 베네딕트(Benedict)에 상륙한 영국 육군은 오랜 항해로 기력이 빠진 상태로, 첫날은 노팅엄(Nottingham)까지, 둘째 날은 어퍼 말버러(Upper Marlborough)까지 행군했다. 어퍼 말버러는 제법 규모 있는 도시였는데, 이곳에서 몇몇 영국군 장교들이 빈스 박사(Dr. Beanes)의 접대를 받았다. 빈스 박사는 인근에서 가장 이름난 의사였고 메릴랜드 남부 전역에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다. 접대 자리는 그의 뜻과 무관하게 마련된 것이었으나, 의사로서의 진료는 그가 자진해서 베풀었고, 훗날 포로가 된 그가 관대한 처우를 호소할 수 있었던 주된 근거도 바로 이 진료였다.
영국군이 어퍼 말버러에 당도할 무렵, 윈더 장군(General Winder)은 블레이든즈버그(Bladensburg)에 병력을 집결시키고 있었다. 전장에 속속 도착하는 연대를 저마다의 위치로 배치하는 임무는 프랜시스 스콧 키(Francis Scott Key)가 맡았다. 스미스 장군(General Smith) 휘하의 젊은 부관이었다. 키는 워싱턴에서 개업한 변호사였으나 군인의 길에도 애정을 품고 있었다. 그는 저 무덥고 먼지 자욱한 날들을 내내 복무했고, 그 날들은 결국 미군의 패전으로 끝났다. 이후 조지타운(Georgetown)의 자택에서는 워싱턴의 공공건물들이 불타오르는 불빛만으로도 신문을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무시무시한 폭풍의 밤이 지난 뒤, 퇴각하던 영국군이 무질서한 강행군으로 35마일(약 56킬로미터)을 소리 없이 내달려 어퍼 말버러로 떠난 뒤 남긴 폐허 사이를, 그는 분노에 찬 가슴을 안고 지나갔다. 그때 그는 영국군의 “더러운 발자국의 오욕”이 닿는 곳이 된다면 어느 도시라도 어떤 운명을 맞게 될지를 알게 되었다.
영국군의 초라한 행색을 보고 말버러 사람들은 그들이 패퇴한 것으로 여겼다. 이튿날 오후 빈스 박사와 그의 벗들은 있지도 않은 승전을 자축했다. 만일 이 자리가 박사가 사는 말버러 근처의 고풍스러운 저택 안에만 머물러 있었더라면, 훌륭하되 성마른 그 의사에게 “별이 빛나는 깃발”은 끝내 지어지지 않았으리라. 그러나 따사로운 9월 오후의 온화한 기운에 이끌린 일행은 집 근처 샘터로 자리를 옮겼다. 흑인 하인이 적당한 도구들을 내어 왔고, 차가운 샘물에 궁합 좋은 재료들을 섞어 지금도 유혹적인 그 음료, 메릴랜드 펀치(Maryland punch)를 만들었다. 이 술은 마음을 뜨겁게 덥히지만, 지나치게 들이켜면 사람을 성마르고 시비조이며 호전적으로 만든다. 그리하여 애국적인 흥취가 무르익던 그 자리에, 퇴각하는 본대를 따라가던 영국군 병사 셋이 뒤처진 채 먼지투성이에 갈증까지 얹어 샘터에 나타났다. 그들의 호언장담은 믿기 어렵다는 반박을 불러왔고, 이내 그들은 닭 도둑이자 공공의 적으로 약식 체포되기에 이르렀다. 허술한 말버러 감옥에 갇혔던 이들 가운데 하나가 서둘러 탈출해 영국 기병 정찰대에 닿았고, 정찰대는 코번의 명령을 받아 어퍼 말버러로 되돌아와 한밤중에 빈스 박사를 침상에서 끌어내 베네딕트의 영국 함정으로 끌고 갔다.
절친한 벗 가운데 하나인 빈스 박사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키는 휴전 백기의 보호 아래 패툭센트강 어귀의 영국 함대를 향해 서둘러 달려가 박사의 석방을 교섭하려 했다. 당시 포로 교환 담당관이었던 볼티모어의 존 S. 스키너(John S. Skinner)가 교환선을 이끌고 그와 동행했다.
키와 스키너가 영국 함대에 이르렀을 때, 함대는 이미 볼티모어 공격을 위해 체서피크만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함대의 목적지가 너무나 명백했기에, 코번은 키를 돌려보내 경보를 울리게 할 수 없었다. 제독은 더없이 냉랭한 말투로, 위협한 대로 빈스 박사를 활대 끝에 매달지는 않겠으나 석방을 허락할 만한 일정한 상황이 조성될 때까지 배에 탄 사람 모두를 엄중히 가두어 둘 수밖에 없다고 알렸다. 함대가 목적지에 이르면 몇 시간 안에 풀려날 것이라고 제독은 장담했다.
제독의 기함 서프라이즈 호(the Surprise)에 억류되어 있던 키는 로스 장군(General Ross) 휘하 영국군 최정예 병력이 볼티모어 남동쪽 노스포인트(North Point)에 상륙하는 모습을 갑판에서 지켜보았다. 이윽고 1814년 9월 13일 화요일 아침, 함대는 드넓은 패탑스코(Patapsco) 강을 건너 이동해, 볼티모어로 이어지는 그쪽 수로를 지키는 작고 나지막한 벽돌과 흙의 요새로부터 2.5마일 떨어진 지점에 반원형으로 포진했다. 요새는 돌출된 땅 위에 낮게 엎드려 있었다.
도시 함락은 “몇 시간이면 될 일”이라던 코번의 호언이 터무니없어 보이지는 않았다. 요새는 아미스테드 장군(General Armistead) 휘하 소수의 정규군과 니컬슨 판사(Judge Nicholson)가 지휘하는 의용 포병대의 지원으로 수비되고 있었다. 42파운드 포와 그보다 구경이 작은 포 몇 문으로 무장했으나, 영국 함대가 자리 잡은 위치까지 닿기에는 모두 완전히 역부족이었다. 한편 라자레토(Lazaretto)의 작은 토루 포대는, 뒤에서 보듯이 요긴한 역할을 하게 되는데, 패탑스코 북쪽 지류를 통한 도시 접근로를 지켰고, 코번트리 요새(Fort Coventry)는 남쪽 지류를 막았다. 이 포대들에는 18파운드 포와 24파운드 포만이 배치되어 있었다.
화요일 아침 7시부터 수요일 자정이 지날 때까지 함대는 먼 거리에서 맥헨리 요새(Fort McHenry)를 포격했다. 이따금 요새 안의 포병들이 함대를 향해 닿지 않을 포탄을 한 발씩 쏘았을 뿐이다. 그러나 자정에 이르러 코번에게 전갈이 들어왔다. 도시 동쪽 노스포인트 가도에서 벌어진 육상 공격이 실패했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서쪽의 맥헨리 요새를 함대가 점령하지 못한다면 퇴각은 피할 수 없었다.
어둠을 틈타 자정을 조금 지난 시각, 영국 호위함 열여섯 척이 폭격 범선과 바지선을 거느리고 가까운 거리까지 바짝 다가왔다. 새벽 한 시, 그들은 요새를 향해 돌연 엄청나고도 파괴적인 포화를 퍼부었다. 성벽 안쪽에 떨어진 폭탄만 오백 발, 그 위에서 터진 것은 그보다 훨씬 많았다.
전투의 고비는 어둠 속에서 로켓 공격함 한 척과 바지선 다섯 척이 북쪽 수로를 타고 도시로 거슬러 오르려 했을 때 찾아왔다. 영국군은 자신들이 안전히 빠져나갔고 술책이 성공했다고 여기며, 방금 지나친 요새의 포들을 향해 조롱 섞인 함성을 질렀다. 바로 그 소리로 비로소 미군에게 존재가 드러났다. 그러나 맥헨리 요새를 피해 간 대가로, 그들은 수로 건너편 라자레토 요새의 포 앞에 자신을 드러낸 셈이 되었다. 이 요새가 사격을 개시하자 그 대담한 함선들은 크게 파손되어, 일부는 다급한 퇴각길에 예인되어야 할 지경이 되었다.
자정부터 아침까지 키는 전투의 향방을 알 길이 없었다. 이처럼 가까운 거리에서는 짙은 연기가 함대와 요새를 동시에 뒤덮었고, 밤의 어둠은 한층 더 캄캄해졌다.
패탑스코 북쪽 지류를 거슬러 오르려던 시도가 실패한 뒤로 포성은 잦아들었다. 이따금씩 어느 영국 함선의 측면에서 음울하고 악에 받친 포가 불길을 뿜어낼 뿐이었다. 교환선으로 옮겨진 키는 그 갑판을 서성이며 이 잦아든 포격의 까닭을 가늠할 수 없었다. 포성이 뜸해진 것은 육상 공격이 성공했다는 뜻일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이제는 요새에 더 많은 화약을 낭비할 필요가 없을 것이었다. 아니면 그 지옥 같은 포탄의 비가 이미 작은 요새 자체를 무너뜨렸고, 적은 동이 트기를 기다리며 요새를 접수할 때까지 경계 차원의 사격만 이어 가고 있는지도 몰랐다.
길고 긴 시간은 거의 견디기 힘들었다. 키는 워싱턴의 운명을 이미 보았고,
이제 볼티모어의 운명을 마음속에 그리고 있었다.
일곱 시가 되어도 긴장은 누그러지지 않았다. 함대의 포격이 멎었다. 거대한 함선들은 안개 속에서 희미하고 조용히 솟아 있었다. 서쪽으로는 고요한 요새가 있었고, 그 위로 하얀 수증기가 두텁게 드리워 있었다. 키는 간절한 눈빛으로 먼 해안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요새 위 안개의 갈라진 틈 사이로, 여전히 당당하게 펄럭이는 깃발이 아스라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그 절정의 순간에 “별이 빛나는 깃발”이 지어졌다.
영국 함대는 서서히 노스포인트로 물러났다. 빈스 박사는 어퍼 말버러의 집으로 돌아갔고, 서프라이즈 호의 활대 끝이 시야에서 서서히 사라지는 것을 보며 짐을 벗은 듯 깊이 안도했다.
수많은 나라의 국가 가운데 이만큼 순수한 애국심을 담은 곡은 없다. 영국, 러시아, 오스트리아의 국가는 이 농본적이고 실용적인 시대가 이미 오래전에 벗어나 버린 정서적 충성심에 기대고 있다. “라 마르세예즈(la Marseillaise)”는 무기를 들라는 드높은 외침이지만, 한 국민의 성격 가운데 가장 저열한 면, 곧 격정적이고 호전적인 면만을 떠받든다. 반면 “별이 빛나는 깃발”은 생동감 있고 애국적이며 굴하지 않으면서도, 움츠리지도 뽐내지도 않는다. 담긴 정신에서 민족적인 만큼이나, 그 정신을 표현하는 데서도 충분히 무르익어 있다. 그러므로 키의 시가 앞으로 이어질 여러 세대 미국인에게 국가(國歌)로 이어져 갈 것임을 믿기에, 원고 초본의 사본을 여기에 싣는다. 이는 에드워드 시펜 여사(Mrs. Edward Shippen)의 호의로 이루어진 것인데, 여사는 시의 첫 필사본을 〈아메리칸(American)〉 신문사로 가져가 열두 살 견습 인쇄공 새뮤얼 샌즈(Samuel Sands)에게 전단지 형태로 조판하게 한 바로 그 니컬슨 판사의 손녀이다. 당시 그 사무실에는 샌즈 혼자뿐이었다. 다른 사내들은 모두 도시 방어에 나섰기 때문이다. 시는 키의 친필로 적혀 있다. 사본을 옮기는 과정에서 가해진 변경은 한눈에 드러난다. 가장 큰 변경은 키가 처음 “They have washed out in blood their foul footsteps’ pollution(그들이 더러운 발자국의 오욕을 피로 씻어 냈다)”이라 쓰기 시작했다가 “Their blood has washed out their foul footsteps’ pollution(그들의 피가 더러운 발자국의 오욕을 씻어 냈다)”으로 고친 대목이다. 또한 두 번째 연에서 “ ’T is the star-spangled banner(그것이 바로 별이 빛나는 깃발이라네)” 뒤에 대시를 둔 덕분에, 통상의 세미콜론보다 호흡이 더 단호해지고 시구는 더 기백을 얻으며 감정의 분출도 한층 격해졌다. 나머지 변경들은 대수롭지 않다. 그중 일부는 1840년에 키가 친구들을 위해 사본 몇 부를 옮겨 적으면서 가해진 것이다.
전단지 형태로 찍힌 이 노래는 이윽고 도시 주변의 모든 진영에서 불리게 되었다. 공격으로 인해 문을 닫았던 볼티모어 극장이 다시 문을 열자, 배우 가운데 하나인 하딩 씨(Mr. Hardinge)가 “메릴랜드의 한 신사가 지은 새 노래”를 부른다고 예고되었다. 〈아메리칸〉에 실린 이 곡의 머리에도 똑같이 겸손한 작자 소개가 붙어 있었다. 볼티모어에서 그 곡조는 남쪽으로 실려 내려가, 뉴올리언스(New Orleans) 전투에서 어느 연대 군악대에 의해 연주되었다.
“아나크레온 찬가(Anacreon in Heaven)”의 곡조가 “외국산”이라는 이유로 시비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사실 이 곡조는 제 주인을 잃은 길 잃은 재물과 같은 것이어서, 키와 미국 국민이 거두어 제 것으로 삼았다. 이제는 어느 학동이나 다 알 만큼 충분히 미국적이다. 버(Burr)보다 먼저 뉴올리언스에 닿았고, 프리몬트(Fremont)보다 먼저 태평양에 이르렀다. 세 차례 전쟁에서 병사들의 영감이 되었고, 알제리(Algiers)에서 아피아 항(Apia Harbor)에 이르기까지 바다에서 적의 위협을 마주한 미국 수병들의 가슴을 북돋워 주었다. 트렌턴 호(the Trenton) 승조원들이 캘리오피 호(the Calliope)를 향해 질렀던 환호가 두 영어권 국민을 한층 더 가까이 묶어 준다면, 이에 결코 못지않게 가슴 떨리는 동반의 장면, 곧 트렌턴 호가 좌초된 밴댈리아 호(the Vandalia)의 거의 확실한 파멸 속으로 밀려 내려갈 때, 기함의 격려하는 환호에 희미하고 불확실하며 절망에 찬 응답이 돌아왔던 그 장면은 잊혀도 좋은 것인가?
마지막 환호가 스러져 가자마자, 바로 이어서 이러한 일이 있었다.
어둠이 함선들을 삼켰다. 해안에 있던 이들이 충돌의 굉음을 기다리고 있을 때, 바다 깊은 곳에서 또 다른 소리가 피어올랐다. 폭풍을 향해 도전하듯 터져 나오는 거친 음악이었다. 트렌턴 호의 군악대가 “별이 빛나는 깃발”을 연주하고 있었다. 해변에 있던 미국인들의 심정은 형언할 수 없었다. 그 끔찍한 하루 종일 동포들을 돕기 위해 온갖 수단을 다 써 온 사내들이, 이제는 더 큰 힘을 불어넣는 영감이라도 받은 듯했다. 그들은 야생의 짐승처럼 파도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그 무엇도 해낼 수 없었다.
아니다. 이제 와서 가사와 곡조를 떼어 놓기에는 너무 늦었다.
노래는 대체로 마땅한 영예를 누려 왔으나, 이를 지은 이는 받아 마땅한 만큼을 받지 못한 채 잊혀 왔다. 가장 아름다운 개인 기념비 가운데 하나로, 오직 태평양 연안만이 조국에 대한 그의 공로를 인정해 주었다.* 그것은 조국이 존재하는 한 끝나지 않을 공로이니, 한 민족에게 그 애창곡을 건네준 이는 후손에게 빼앗길 수 없는 선물을 봉토로 물려준 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키는 잭슨(Jackson), 테이니(Taney, 그의 처남이었다), 로어노크(Roanoke)의 존 랜돌프(John Randolph), 그리고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의 가까운 벗이었다. 아프리카 식민화 협회(African Colonization Society)의 구상을 처음 그려 낸 이도 필시 그였고, 1806년 프레더릭 카운티(Frederick County)의 자기 농장에서 노예를 위한 주일학교를 최초로 연 이도, 자신이 부리던 노예를 해방한 이도 그였다. 그리고 그는 평생에 걸쳐 겸손한 기독교 신사의 그 시대 최고의 전형이었다. 키의 이러한 종교적인 면모는, 모든 개신교 교파의 찬송가집에 실린 저 아름다운 찬송 한 편에서 표현을 얻었다.
주여, 타오르는 마음으로 당신을 찬양하리이다.
*샌프란시스코 골든게이트 공원.
풋(Foote)은 자신의 〈회상록〉에서 우리에게 키의 풍채와 대중 연설가로서의 역량 역시 높이 평가할 만하다고 일러 준다.
프랜시스 스콧 키는 독립전쟁기 장교였던 존 로스 키(John Ross Key)의 아들이다. 그는 1780년 8월 메릴랜드주 프레더릭 카운티에서 태어났다. 법학을 수학한 뒤 프레더릭에서 변호사 자격을 얻었고, 이후 조지타운으로 옮겨 가 세 차례 지방 검사를 지냈다. 잭슨 대통령은 그에게 섬세한 임무를 자주 맡겼다. 1856년에는 그의 시집 한 권이 출간되었다. 그는 1843년에 세상을 떠났으며, 메릴랜드주 프레더릭의 작은 묘지에 잠들어 있다. 고향 주에서는 그의 무덤 위에 기념비를 세우려는 노력이 여러 차례 있었으나 결실을 보지 못했다. 이치로 따지자면, 그러한 기념 탑은 온 미국 국민의 공동 봉헌물이어야 마땅할 것이다.
사정이 그러함에도, 그의 무덤에 바쳐진 진기하고도 명예로운 헌사가 없지는 않다. 전쟁 기간 동안 프레더릭은 내놓고 말하지 않았을 뿐 “반군의 도시”였으나, 그 도시에는 바버라 프리치(Barbara Frietchie) 말고도 훌륭한 애국자가 한 사람 더 있었다. 이 충성스러운 B── 씨는, 북군 소식 가운데 반가운 보도를 접할 때나 애국심이 북받쳐 어찌해 볼 수 없을 때마다 꼬박꼬박 키의 묘로 순례를 떠났고, 묘지 상석에 서서 환희에 차고 경건한 마음으로 키의 노래 전편을 한 소절도 빠뜨리지 않고 불렀다.
매해 현충일(Decoration Day)이면 그의 무덤은 꽃으로 뒤덮이고, 그곳에 늘 펄럭이는 깃발, 곧 1814년 9월 14일 그의 긴장된 눈이 전투의 연기와 수증기 위로 당당히 떠오르는 모습을 보았던 바로 그 별이 빛나는 깃발이 경건하게 새로 걸린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그를 위한 최고의 기념비일지도 모른다.
1814년의 성조기와 1894년의 성조기는 거의 동일하며, 가장 큰 변경이라야 성좌 안의 별들이 더 작아졌다는 것뿐이다. 1777년 6월 14일 채택된 합중국의 깃발은 붉은색과 흰색이 번갈아 놓인 열세 개의 가로 줄무늬와, 푸른 바탕 위에 흰 별 열세 개가 놓인 조합(union)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켄터키와 버몬트가 연방에 가입하면서 줄무늬 두 개와 별 두 개가 더해졌다. 이 깃발은 1818년까지 쓰였는데, 그 사이 다섯 주가 더 편입되자 줄무늬는 본래의 열셋으로 되돌려졌고, 새 주가 늘어날 때마다 별이 하나씩 더해졌으며, 별은 해당 주가 편입된 뒤 맞이하는 독립기념일(7월 4일)에 제자리에 놓이도록 정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