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
옛 저택가의 황폐한 흙담은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다. …… 눈이 사라지고 아직 얼마 되지 않은, 막 마른 자갈투성이 좁은 골목이, 산국(山國)의 일이라, 안개에 휩싸인 채 한 줄기 연기처럼 흐릿하게 저물어간다.
미생(弥生, 음력 3월) 끝자락부터 조금씩 더디고 빠름은 있어도 꽃은 한꺼번에 피기에, 그 한 줄로 늘어선 담장 안쪽에 복숭아, 홍매화, 동백도 벚꽃도, 어떤 것은 만개하고 어떤 것은 풋풋한 꽃잎으로, 색과 향을 한껏 차렸다. 돌담의 풀에는 머위꽃대도 움트고 있을 게다. 굳이 복숭아꽃을 맨 먼저 든 것은, 옛날 이 한 구역이 “모모노쿠미(桃の組, 복숭아 조)”라 일컫던 무사 저택 거리였다고 들어서이다. 그 명목(名木)들도 아직 여기저기 남아 있어 곱게 핀 자태가…… 이렇게 눈에 선하니, 그것이 또한 자못 쓸쓸하다.
두 줄가량 겹쳐, 아름다운 여인이 학대당했다는, 구번(旧藩) 시절 어디서나 흔하던 그 전설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번화한 통로도 아니거니와, 꽃 또한 이 부근에 명소가 따로 있는지라, 일부러 이런 뒷골목을 찾는 이는 없다. 한낮에도 사람의 통행은 거의 없다. 묘령의 처녀라도 모습을 보일 양이면, 백주 대낮이라 한들, 그것은 무너진 흙담에서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라, 사람을 놀라게 할 만하다.
그런데도 묘한 것은, 이 무렵의 해질녘이면, 그 명소의 산으로 끊임없이 꽃놀이며 봄나들이를 가던 이들이, 이 앞길의 정겨운 큰강의 작은 다리를 건너 줄줄이 돌아오는데, 사내들은 윗도리를 벗어 어깨를 드러내고 한쪽 팔을 축 늘어뜨리며, 여인들은 요염한 유젠 옷자락을 걷어올리고 이쑤시개를 문 취객들 사이에 섞여, 들뜨고 들뜬 사람들의 무리가 앞뒤로 갖추어 이 골목을 줄줄이 지나가는 듯이 여겨진다…… 게다가 그 위로, 작은 다리를 건너는 발소리가, 좌우의 흙담에 그곳을 밟듯이 또로또로 울려, 더구나 그것이 손에 잡힐 듯 똑똑히 들리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할 때면, 지금도 나는 그 풍경이 눈앞에 또렷하게 떠오른다.
그런데 방금 말한 옛 골목은 우리 집에서 십여 정(町, 약 1km 남짓)이나 떨어져 있어, 툇마루에서 내다본들, 이층에서 발돋움한들, 게다가…… 시골 일이니 너와지붕 위에 올라간들, 실은 빽빽이 늘어선 번화한 거리에 가로막혀, 그쪽 방향에는 다리는 물론, 강의 흐름조차 보이지 않고, 골목 따위는 설령 보인다 한들 소나무·삼나무 한 그루에라도 가려져 버린다. …… 무엇보다도 보일 만한 위치도 아닌데도, 방금 말한 황혼이 질 무렵이면, 언제나 창에도 툇마루에도 가득히, 강 건너 산뿐 아니라 우리 동네도 대문도 난간도 맹장지도 앉은 다다미도, 아아아 내 그림자조차도, 몽롱하게 보이지 않게 되고, 온 고을 온 동네에 오직 한 줄, 그 복숭아의 옛 골목만이, 만만(漫漫)하게 물결 잔잔한 푸른 바다에 배 자국을 그은 듯이 떠오른다. 그렇게 떠오르는 가운데 흥겨운 듯한 꽃놀이꾼들이 줄줄이 다리를 건너는 발소리가, 약속이라도 한 듯이 도도도도, 두두, 데구르르, 게다가 어지러이 그곳에 울린다. …… 어렴풋이 사람 소리가, 여인의 것인 듯한, 호호호, 하고 들리면 붉은 복숭아꽃이 팟 하고 빛깔에 흐트러지고, 저물녘의 벚꽃도 살랑살랑 흩날린다. ……
하지만 직접 그곳으로 발길을 옮겨 골목 안에 들어서면, 쓸쓸하고 으스스하다 하여 누구도 지나지 않는, 사람 그림자라곤 없는 곳이었다.
기척은 분명 있건만…… 다리를 건너는 소리는 멀어, 들리지 않는다. ……
복숭아도 벚꽃도, 새빨간 동백도, 짙은 안개에 휘감긴, 어슴푸레한 달빛조차 어두울 만큼의 흙담 한 켠에, 돌담을 기어오르듯이 달라붙어, …… 철쭉이며 등꽃에는 아직 이르나, 거친 뜰을 들여다보고 있는, 가스리 통소매를 입은, 머리가 둥글고 몸집 작은 십여 살 남짓의 사내아이가 한 명, 우두커니 보인다.
그 녀석은…… 나다.
정신없이 멍하게 있는 탓에, 어느덧 해가 푹 저물어 담 너머 꽃 끝가지에, 비스듬히 기운 어슴푸레한 달이 목욕한 뒤처럼 엷고 곱게 비치는 것조차도, 그 녀석은 알지 못하는 듯하다.
마침 바람에 쓰러진 덧창 한 짝을 주워다 세워둔 듯한 낡은 사립문이 갈라진 틈으로 가득히 닫혀 있다. 거기를 들여다보고 있는 것인데, 가지 너머 잎새 너머의 달이, 꽃 그늘을 가르며 비춘 흰 종이라도 되는 양 부우연 빛으로 사립문 어깨에 “가시혼(貸本, 책 빌려줌)”이라고 가나로 물들인 글자, 그것이 어렴풋이 읽힌다. 종이가 나무 그늘을 가른 달의 빛이라면, 글씨도 다만 꽃과 봉오리를 단 복숭아의 가지 한 가닥일지도 모를 노릇이다.
그곳으로…… 골목 안쪽의, 숲이 덮어 가린 그 안에서, 잎을 우수수 울리며, 키 크고 살결이 새하얀 큰 몸집의 부인이, 옆 골목의 목욕 다녀오는 길로 보이는, …… 화장 도구와 짜낸 수건을 손에 들고, 봄 날씨가 이러한 데다 머리도 달아오른, …… 살짝 취기가 오른 채로, 비틀비틀 꽃을 둘러보면서 다가왔다.
둥지에서 떨어진 부엉이 새끼 같은 사내아이에 비하면, 한 종류의 큰 화조(化鳥, 요사스러운 새)이다. 키 큰 여인의, 특히 쿠시마키(櫛巻, 빗에 감아 넘긴 머리)로 무심히 묶어 동여맨 검은 머리의 함초롬히 젖은 빛깔과, 살결의 흼은 눈이 부실 정도다.
“아이고 아이고…… 신보(新坊).”
사내아이는 여전히 정신없이 있었다.
“얘, 신보.”
하면서, 수건으로 뺨을 스윽 어루만진다.
“앗.”
하고, 간 떨어질 듯 놀라며,
“아이참, 아주머니.”
울먹울먹 입을 삐죽이며 얼굴을 보고서,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아버지한테는 말씀하지 마세요.”
하고, 가엾게도 사정하며 말했다.
으스스하고 무서운 마(魔)의 골목이라는 곳에, 부인이 혼자서 목욕길의 지름길을 다니다니, 의아해할 일도 못 된다. …… 실은 이 아주머니였기에 다닐 수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을(乙)” 자 모양으로 굽이친 골목의 큰강 어귀에 자리한 작은 이층집에 홀로 살며, 문에 주역(周易) 간판을 내걸고 있는 그 아주머니부터가 이미 마(魔)에 가까웠다. 부인이 점복(卜筮)을 친다 해서 의심스럽다는 게 아니다. 사내아이는, 철이 들기 시작한 네댓 살 무렵부터 부모에게서 들어 알고 있었다. 거구의 여인 아주머니는, 처녀 시절에 한번 죽었다가, 사흗날의 밤샘 한밤중에 다시 살아났다. 그 시절부터 술을 마셨던지라 술기운에 풋잠이라도 들었던 셈이었으리라. 힘은 세고, 관을 우직우직 울려 깼다. 그것이 다카시마다(高島田, 미혼녀의 높이 묶은 머리)였다 하니 더더욱 희한하다. 지옥도 두루 보고 왔다, 극락은 손바닥 보듯, 점복쯤이야 손바닥에 든 셈이다. 게다가 데라코야(寺子屋, 옛 서당) 솜씨로 책을 읽는다. 오경(五経)·문선(文選)을 줄줄, 글씨 또한 좋다. 한번 명도(冥途, 저승길)를 다녀온 뒤로는 불교에 친숙해져 참선까지 했다고 한다. 아주머니는 데라코야 시절부터 사내아이의 부친과는 글씨 동무였고, 그리 자주는 아니나 때때로 왕래한다. 무엇인가 심부름으로 사내아이도 보내져, 전병도 얻어먹고, 아주머니가 점을 치는 칠성을 수놓은 검은 휘장을 친 방도 알고 있었으니, 그 오가는 길에서 문득 이 숨겨진 골목까지도 알아 두게 되었던 것이다.
이 마(魔) 같은 아주머니가 어귀에 자리잡고 있는 까닭에, 야릇하고 무서운 것이 나타난다 해도, 그것이 아주머니의 동무 같은 기분이 들어 어딘가 마음이 놓여, 어느새 어린 것 주제에도 장소를 그리 가리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학교를 빼먹고서 신비한 사립문 너머의 “가시혼(かしほん)” 뜰을 들여다보다가 부친의 동무에게 들킨 것은, 텐구(天狗)와 마주친 만큼이나 무서웠다.
“집으로 들어오너라. …… 자, 함께 가자.”
다정하게 등을 떠밀어 주었지만, 사내아이로서는 멱살을 잡혀 끌려가는 기분이 들어, 손발이 움츠러진 채로 허공을 걷듯이 움직였다.
“살이 쪘대도 목욕물 식은 끝이 차다. 이제 봄이긴 해도, 밤은 아직 추워.”
하면서, 안방에서 히후(被布, 짧은 겉옷)를 입고, 붉은 긴 담뱃대를 한 손에 들고서,
“신보, 그런 데서 혼자 뭘 하고 있었느냐?…… 아주머니가 점을 쳐서 봐주마. 이층으로 올라오너라.”
달과 별을 좌우의 휘장에 두고 제단을 등진 자리에, 시경(詩経)·사기(史記)·이십일사(二十一史)·십삼경주소(十三経注疏) 등이 즐비하게 늘어선 책장을 두고, 글씨 연습 책상을 앞에 둔 채, 묵직하게 가득히 방석에 앉아, 덮개 씌운 화로를 끌어당기고, 얼굴을 들여다보며 도톰한 뺨으로 히죽히죽 웃으면서, 한가로이 담배를 한 대 빨고 난 뒤, 둥근 팔꿈치를 흰 빛깔로 짚고서, 이른바 천안경(天眼鏡)이라는 것을 집어 이마에 딱 갖다 댔을 때는, 사내아이는 오싹하여 부르르 떨었다.
큰강의 여울이 솨아 하고 들리고, 한쪽 곁의 거리, 강가의 소나무 가로수에 바람이 건너갔다.
“…… 가시혼이라. 변변치 못한 것을 익혀서, 이 녀석이. 이런 괴이한 곳까지 헤매고 다닌 걸 보면, 저기, 여기, 동네 책방을 거의 다 들쑤시고 다녔음에 틀림없다. 그러니 너의 아버지가 그토록 걱정하시는 게다. …… 신보, 아주머니 무릎 곁으로.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지. 어허, 그런 뒷골목 흙담의 부서진 사립문에 가시혼 푯말이라니. …… 그런 게 어디 있을 것이냐. 방금도 사실은, 아주머니가 ‘어머, 신보, 뭘 하고 있느냐’ 하고 한참을 가만히 보고 있었는데, 그런 푯말은 기색도 그림자도 없었다. 뭐라고? …… 낮에 와서 보면 아무것도 없어. 해질녘부터 밤에 걸쳐서야 잘 보인다고. 그래, 그래, 그것 보아라, 자, 신보. 네가 서 있던 그 흙담 안쪽은, 이미 집은 무너지고 풀밭뿐이야. 아무도 살지 않는다. 거친 뜰에 낡은 사당(祠, 고분) 하나만이 남아 있을 뿐……”
하다가, 문득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이 녀석, 학교에서 한창 공부할 나이에, 부모가 그르다 하는 것을 듣지 않고 정신이 팔려 너무 빠져들기에, 마(魔)가 들렸구나. 있을 법한 일이야. 가지의 모양, 풀의 그림자만 봐도 가시혼 글자로 보인 게다. 신보야, 무서운 곳이다, 거기는 무서운 곳이야. 들어보아라. 무서워서 돌아갈 수 없거든, 좋다, 좋아, 아주머니가 동네의 비탈까지 이 강둑길을 따라 데려다주마.
구번(旧藩) 시절에 말이다, 그 무사 저택 거리에 충성을 빙자한 사무라이가 살고 있었더란다. 주인 어른의 난병은, 사사사사(巳年·巳月·巳日·巳時, 12지 巳[뱀] 년·월·일·시)가 모두 갖추어진 젊은 여자의 생간으로 낫는다 하여, 흔히 있는 일이지. 어느 쪽이 됐든, 주인 쪽에서 남몰래 비용은 댔겠지만 돈으로 사 들이기로 하고서, 그 시절의 일이니, 인신매매 손길에서 그 년월이 갖추어진 젊은 여자를 손에 넣었다. 그럴 수가 있나, 도마라고 마련되었을 리 없지. 덧창에 그 여인을 알몸으로 쇠못으로 박아 두었다는구나. …… 자자, 들어보거라. 새하얀 배를 푹푹 찔러 갈랐다……. 잠깐 기다리려무나, 저 사립문에 세워둔 문짝이 그 덧창일지도 모를 일이지.”
“우, 우, 우.”
사내아이는 숨을 들이쉬는 것이었다.
“참혹한 이야기를 한다고 여기지 말려무나. 들어보거라. 자, 그래서…… 생간을 도려내 항아리에 담아, 무사 저택 거리의 배신(陪臣, 主家 가신의 가신)은, 행수(行水)며 양치질로 몸을 깨끗이 하고, 아사가미시모(麻上下, 麻 직물 정장)를 차려입고서 주인의 저택으로 가져갔다. 시의(侍醫)가 짐작하여 이르되, 이 정도의 약이니 만일을 위해 생간을 날 것 그대로 보여드리고서야 하지요, 하며 어전에서 항아리를 열었더란다. 핏빛 간이라 여겼던 새빨간 그것이, 누카부쿠로(糠袋, 쌀겨 자루)였구나. 사향 향낭이 들어 있었을 리도 없는 노릇이지. 신보야 모를 일이지만, 여인이 살갗을 목욕물에 닦아내는…… 멋을 부린 것에는 휘파람새 똥이 든다. 그 누카부쿠로가 그래도 갸륵하게, 그럴싸하게도 흠뻑 물컹물컹 젖은 채로 나왔지 뭐냐. 어쨌거나 제멋대로인…… 병 때문에 여인의 생간을 도려내려 하시는 그런 분이시니까……. 도리어 그 자는 돌아와 배 가른 부인의 시신을 살펴볼 새도 없이, ‘얏, 피칠갑이 되어 아직 움직이고 있나이다’ 하고 자기 손발을 바동바동 굴리면서, 어전의 정원 앞에서 베임을 당했다는 게다.
지금의 사당은…… 사실 그 이전부터 있던 것이라고들 하지만, 그 일이 있은 뒤의 저택이지. 물론 몇 번이고 주인은 바뀌었다.
너무한 이야기라 여길지도 모르나, 옛날에만 있던 일이 아니란다. 사실, 아주머니가 이곳으로 재작년 옮겨 와 자리잡은 무렵의 일인데, 여름의 어슴푸레한 새벽녘이었지. 저 흙담 자리에 사람들이 모여 와글와글 떠들기에 가서 보았다. 젊은 사내가 쓰러져 있었어. 강 건너 신지(新地)에서 돌아오던 길로, 아주머니도 잠깐 낯이 익은, 좀 모자랄 듯한 미남자였단다. 그것이…… 의원도 달려와 몸을 살피니, 떡 벌어진 입속 가득히 붉은 비단 누카부쿠로……”
“……………”
“누카부쿠로를 입에 가득 물어, 그것이 목구멍에 박혀, 숨이 막혀 죽은 것이지. 어떻게 손을 써 숨이 돌아오기는 했지만. 나중에 들으니, 달밤에 이 골목으로 들어선 아름다운 아가씨가 목욕길에서 돌아오는 뒷모습을 쫓아가서는, 무리하게 무엇인가, 그, 무엇이라더냐, 무슨 흉내였는지는 모르겠다만, 아가씨의 혀를 말이지.”
하면서, 아주머니는 흰 얼굴로 그 새빨간 혀를 날름.
사내아이는 굵은 흰 뱀에게 머리부터 핥인 듯하였다.
“그 혀라고 여겼던 것이 목에 걸려 기절을 한 것이지. 혀라고 여겼던 게, 누카부쿠로였던 게다.”
하고는 또, 날름하고 보였다.
“싫어요, 아주머니.”
“괜찮다, 내가 함께 있는데 무슨 일이 있을까.”
“그게 아니라요. …… 아주머니, 저도 말이에요, 저기서 예쁜 아가씨한테 책을 빌렸어요.”
“아.”
하면서, 둥근 무릎에, 비비대듯이 손을 가져다 댔다.
“벌써 본 것이로구나. 응, 다카시마다(高島田, 높이 묶은 머리)에 자색 옷을 입은, 아름답고 기품 있는…… 열여덟이나 아홉의…… 아아, 장난을 거는 게구나.”
하고 말했다. 아주머니는, 그 도깨비를, 마(魔)를, 귀(鬼)를, 아아 장난을 거는 게구나, 라고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그때 처음으로 진지한 얼굴이 되었다.
나는 지금도 분명히 기이하게 여긴다. 낮에는 보이지 않는다. 오마가도키(逢魔が時, 마[魔]를 만나는 저물녘)부터는 어슴푸레하지 않게 똑똑히 보인다. 하지만 밤의 뒷사립문은 어린 마음에도 거리껴진다. …… 가시혼 종이만을 사흘 닷새 거푸 보고 서 있노라면, 그 아름다운 아가씨가 어딘가 다녀온 듯이 등 뒤로 와서, 손을 잡고 거칠고 쓸쓸한 뜰로 이끌어, 그 사당의 문을 열고서, 등명(燈明)의 그림자에, 그림으로만 알던 갑옷 궤(鎧櫃, 옛 갑옷 보관함) 같은 한 벌의 함 안에서, 한 권의 구사조시(草双紙, 옛 그림책)를…….
“에토키(絵解)를 해 드릴까요? (註. 구사조시를 어린 자식에게 보여 주며, 어머니나 누나가 풀어 들려주는 것을 ‘에토키’라 일컬었다.) 읽으실 수 있나요, 가나뿐인 글을.”
“네, 읽을 수 있어요.”
“착한 아이로구나.”
여우 격자무늬 창에, 그 반신이, 이윽고 키가 자란 얼굴이 들여다보다가, 배웅하며 사라졌다.
바로 그 구사조시이다. 한 권은, 정신없이 우리 집의 사다리 모양 층계를, 부친께 보이지 않으려 뛰어 올라갈 때, ‘돌아왔느냐’ 하고 부르는 소리에 깜짝 놀라, 품속에서 어찌된 영문인지 잃어버려 보이지 않게 되었다. 다만, 집으로 돌아오기까지를 기다리다 못해, 큰길의 노점 등불 아래에서, 걸어가면서 슬쩍슬쩍 들여다본 그림과 가나로 적힌 대목은, 여기서 아주머니가 들려준 뒤의 일이 아닌, 앞의 ‘사사사사(巳巳巳巳)’ 이야기였다.
나는 지금도 기이하게 여긴다. 그리고 모습도, 자태도, 강도, 황혼 무렵에 기름을 두른 듯 눈에 어른거린다. ……
다이쇼(大正) 어느 해, 어느 달 중순, 큰비 내린 날의 한낮 무렵부터 그 큰강에 홍수가 났다. 물이 부드럽고 깨끗하며, 흐름이 정겹고 여울도 거칠지 않다 하여, 옛사람의 마음이리라, 이름 위에 ‘여(女)’ 자를 붙여 일컫던 강에는 기이한 일이다.
메이지 7년 7월 7일, 큰비가 내린 지 그 이렛날 일곱 밤째에, 동네의 또 하나의 큰강이 무서운 홍수를 일으켰다. 7의 수가 거듭하여, 인명 피해도 막심하였다. 전설 같은 이야기지만 사실이다. 그러나 그때조차도 이 강은, 한여름 꽃에 붉은 입술을 헹구게 하고, 버드나무 그늘은 검은 머리를 풀어헤친 듯하였거늘.
그러고 보니, 이야기 가운데 강둑의 소나무 가로수가 머지않아 버드나무로 이어져 동네 한복판으로 닿는 자리에, 나무로 만든 큰 다리가 있었는데, 이 해에 이르러 돌다리로 다시 놓았다. 공사가 칠 푼쯤 진행된 곳이라, 다리 기둥이 콧구멍처럼 비어 있는 모양이 되어, 그 까닭에 물을 놀라게 한 것일지도 모를 노릇이다.
요행으로 한낮의 출수였기에, 남녀 가운데 죽은 사람은 없다. 이층집은 그대로였고 가까스로 이겨냈으나, 평지에 자리한 단층집은 거의 흙탕물의 여울에 씻겼다.
젊은 시절부터 이곳저곳을 떠돌다가 그 무렵 겨우 자리잡고서, 강가 뒷골목에 이층 셋방을 얻었던, 사내아이의 고모뻘 되는 노인이 한 분 있다.
물이 한창 차오르던 두 시 반 무렵, 뒤편 이층의 팔걸이창을 열고, 서지도 못하고 앉지도 못한 채 ‘저 봉우리로’ 하고 산을 향하여, 무릎을 허공에 띄운 채로 물을 보니, 팔꿈치 아래의 처마지붕 너와는 비늘처럼 떨리고, 북국의 풍습으로, 누름돌로 얹어둔 돌들은 겨우 물 위로 머리를 내민 자갈밭이었다.
바로 눈앞을, 아아, 시마다게(島田髷) 머리가 떠내려간다…… 히카노코(緋鹿子, 붉은 사슴 무늬 천) 조각이 풀려 떠올라, 슬쩍 본 그것은 한 줄기 새빨간 뱀이었다. 손궤 두께만큼 두텁게 겹쳐, 표지에 채색 그림 구사조시를 두루마리처럼 만 것이, 쓰즈미(鼓, 작은 북)가 굴러가듯 흘러가더니, 어느새 붉은 물방울을 튀기며, 그 가로수 소나무의, 그중에서도 산보다 높은, 두세 자 물 위로 솟은 줄기를, 휘날휘날 기어올라, 소리만이 남고서 물에 잠긴 잎새 사이로 숨어 버렸다. 눈 깜짝할 사이였다.
그 어귀, 무사 저택 거리의 황폐하여 무너진 낮은 흙담에는, 무릇 몇백 년 동안에 얼마나 많은 뱀이 깃들어 살아왔던가. 살무사가 많아, 물에 잠긴 처마들에서는 그 해를 입은 자도 적지 않았다.
고지대 직공 가운데 뼈대 좋은 두 사람이 함께, 이튿날 물이 빠질 무렵, 한낮 뜨거운 햇볕 아래 큰강을 따라 구경하러 가서는, 흐름의 끝자락 일 리 남짓, 바다로 나가서 더위에 헤엄을 쳤다는 호걸이 있다.
사나운 바다의 갯바위 끝에서 어깨를 맞대고 한숨 돌리고 있을 때, 숨이 막힐 만큼 무더운데도 사르륵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가 나, 저도 모르게 등줄기에 오싹한 한기가 일었다. …… 돌아보니 흰 모래 가득, 어느덧 마른 김 속에서, 빈틈없이 박은 가는 말뚝인가 싶을 만치, 몇백 줄기인지 헤아릴 수 없는 똑같은 모양의 뱀들이, 똑같은 자세로, 똑같이 가지런히 한 자쯤씩 모래 속에서 낫 모양 머리를 쳐들고서, 일제히 하늘을 우러르고 있는 것이었다. 그 꿈틀거릴 때, 이빨이냐 비늘이냐, 콧, 콧, 콧, 카타카타카타 하고 울려 퍼졌다. 홍수에 휘말려 떠내려가다가 비로소 부드러운 땅을 알고서는, 모래를 뚫고 살아남았으리라.
‘꺅’ 하고 외치는 순간, 섬이 한복판부터 갈라지듯이, 두 사람의 몸은 해변 쪽으로도 돌아가지 않고, 파도치는 가장자리를 다만 자갈처럼 좌우로 튀어나가며, 알몸으로 달아났다.
다이쇼 15년(1926) 1월
●図書カー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