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 of 1

Chapter 1

『청공』에 관한 이야기

가지이 모토지로

문예부에서 가쿠스이카이(嶽水會) 잡지 제100호 기념호에 실을 원고를 청해 왔지만, 병중이라 짜임새 있는 글에 펜을 들 기력도 없는지라, 두서없는 『청공』에 관한 이야기로 내게 부과된 책무를 메우기로 한다.

『청공』이라는 잡지는 다이쇼 14년(1925) 1월부터 쇼와 2년(1927) 중반까지 발행되었다. 우리 산코(三高) 졸업생들이 거점으로 삼았던 동인지였다. 모두가 산코를 나와 도쿄로 가서 펴낸 것이니, 그 추억이라 하면 무대는 도쿄가 되겠지만, 나는 그것이 길러진 산코 시절의 추억으로 이 이야기를 한정하고 싶다. 산코 시절 우리는 극연구회라는 모임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이 『청공』의 전신이었다. 거기서는 연극 쪽으로 본독(本讀み), 연출 따위를 했지만, 명목 그대로의 연극 연구가 있었다기보다 오히려 광범한 문예에 대한 우리의 끝없는 아스피레이션(aspiration·열망)이 결집해 있었던 것이다. 극작은 떠올려 보아도 도노무라 시게루(外村茂)의 몇 편 정도가 고작이고, 연출 이야기는… 이 연출에 관해 말하려면 실로 많은 기술이 필요하다. 우리가 하기로 되어 있던 시연회는 교장의 금지로, 공연 전날에 이르러 단념해야만 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지금이야 그 일을 이렇게 담담히 적을 수 있지만, 당시 그 타격은 우리의 생활을 그야말로 짓이겨 버렸다. 교장으로부터는 그 보상이라는 명목은 아니었겠지만 어쨌든 약간의 돈이 나왔는데, 그것은 분명 신문에 낼 중지 광고비로도 부족했다. 게다가 대도구·소도구에 든 돈, 연습장·회장에 든 돈, 프로그램·티켓에 든 돈, 그것들은 회원들이 몇 달이나 들여 모아 둔 준비금으로는 도저히 메울 수 있는 액수가 아니었다. 중지에 풀이 죽은 면면이 다시 마음을 추스르고 아무런 희망도 없는 경제적이고도 노동적인 뒷정리를 묵묵히 시작하던 그때의 심정은 지금 떠올려도 눈물이 흐른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는 차츰 나중에 귀에 들어온 일이지만, 우리 공연을 도왔던 프로인다인(Freundin·여성 친구)에 관해 저열한 억측이, 학교 당국에서는 어떠했는지 모르나 학생들 사이에서 떠돌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건 가슴이 부글부글 끓도록 분했다. 수치를 알아라! 수치를 알아라! 이런 저열한 자들에게! 거기에는 모든 것을 걸고 더럽혀지길 두려워한 우리의 혼이 있었던 것이다. 그자들에게는 그런 것이 보이지 않는다. 이건 실로 분한 일이었다. 그로부터 몇 해가 흐른 뒤였지만, 어떤 제삼자가 문득 그 일을 건드렸다. 장소도 기억한다. 그것은 대학 연못가였다. 그 순간, 오랫동안 잊고 있던 그 굴욕의 기억이 불쑥 가슴에 차올라 내 안색이 순식간에 변하는 바람에, 아무것도 모르는 그 사람을 놀라게 한 적이 있었다. 이런 굴욕은 오래도록 씻기지 않는 법이다.

기왕이니 그때의 상연 작품을 떠올려 보자.

체호프의 “곰”      1막

싱(Synge)의 “땜장이의 결혼” 1막

야마모토 유조(山本有三)의 “우미히코야마히코(海彦山彦)” 1막

“곰”의 늙은 하인 역은 뒤에 『청공』의 동인이 된 고바야시 가오루(小林馨)가 맡았다. 고바야시는 도호쿠 출신이라 도호쿠 사투리가 그 역을 실로 잘 살렸다. 빚쟁이 역은 뒷날 『한낮(眞晝)』을 만든 나라모토 메이오(楢本盟夫)가 맡았는데, 나라모토는 부글부글 화를 내는 사내라 그 성마른 대사가 또 안성맞춤이라, 지금 떠올려도 절로 웃음이 나올 만큼 재미있었다. 싱의 “땜장이의 결혼”은 이 셋 가운데 연극으로서는 가장 좋은 작품이라고 지금도 여기지만, 그것은 연습을 거듭하는 동안 자연스레 가슴에 와닿은 것이며, 단지 그것만으로도 우리의 노력이 손짐작으로 알게 해 준 셈이라고 생각하면 얼마나 즐거웠는지 모른다. 여기에는 『청공』의 나카타니 다카오(中谷孝雄)가 시골 늙은 목사로 나왔다. 『한낮』의 아사미 아쓰시(淺見篤)도 한 역을 맡고 있었다. 나카타니의 늙은 목사는 자루인지 뭔지를 뒤집어쓰고 두들겨 맞기도 하는데 이게 또 우스웠다. 대본은 마쓰무라 미네코(松村みね子) 씨의 번역본을 따랐는데, 이 정평 있는 번역도 원본과 맞춰 읽어 보면 의미를 통하지 않게 만들어 둔 대사나 잘못된 지문(ト書) 따위가 있어서, 그런 발견은 자못 우쭐할 만한 것이었다. 영국의 민요가 나온다. 그것은 엘더 선생에게 Fisher Women의 악보를 빌려 연습했다. “우미히코야마히코”는 『청공』의 도노무라 시게루(外村茂)와 아사누마 키미(淺沼喜實)가 했다. 여기에는 주먹다짐하는 형제 싸움이 있는데, 그것을 열심인 도노무라가 하다 보니 진짜 싸움 같아서, 매일 그 장면이 시작될 때면 연습실 맞은편 생선가게에서 사람이 나와 구경했다. 아직도 이런 이야기를 적자면 끝이 없다. 어쨌든 우리가 몇 달이나 걸려 계획하고 노력한, 아마도 산코 첫 시연회라 할 만한 것은 막이 오르기 전날에, 학생으로서의 마지막 처분으로 위협받음으로써 중지되고 말았다.

극연구회로서 이 시연만큼 큰 사업은 없었지만, 우리가 이 모임의 명목 그대로 연극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나나 나카타니 같은 이는 따로 희곡을 짓지 않고 오히려 소설을 쓰고 있었다. 그리고 『청공』을 내게 되고부터는 누구도 희곡을 쓰는 이가 없어졌다. 당시 우리가 가지고 있던 잡지는 회람 잡지로 『마소키(眞素木)』라는, 원고를 그저 제본만 한 것이었다. 이건 세 권쯤밖에 나오지 못한 듯하다. 여기에 쓴 글이, 가쿠스이카이 잡지에 원고가 모이지 않아 내 것이나 나카타니의 것이 전재된 적이 있었다. 이 『마소키』라는 이름은 뒷날 『청공』의 수필란 이름이 되었다.

우리는 이렇듯 작긴 했지만 매우 굳건한 문학적 단체를 이루고 있었다. 행선지는 도쿄의 문과였고, 도쿄로 나가면 반드시 우리끼리 잡지를 만들자는 마음이 말없이 빚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흔히 그런 일은 미루어지기 마련이라, 도쿄로 나가자마자라고 여겼던 발행이 반년 남짓 늦어져 첫 호는 이듬해 1월에야 겨우 나오게 되었다. 동인은 그 극연구회의 나카타니, 도노무라, 고바야시, 그리고 나, 거기에 나카타니가 독문과의 구쓰나 기치노스케(忽那吉之助)를 데려와 다섯 명, 한 사람 더 그것도 나카타니의 친구로 지금은 쟁쟁한 신진 가인인 이나모리 소타로(稻森宗太郎)가 와세다에서 합류했다. 당시 동인지는 아직 실로 적었다. 도쿄대에서는 오가타 마타호시(小方又星), 이부키 다케히코(伊吹武彦), 아사노 아키라(淺野晃), 이이지마 다다시(飯島正), 오야 소이치(大宅壯一), 거기에 일고(一高) 패가 하던 『신시초(新思潮)』가 막 나오기 시작할 무렵이고, 게이오에서는 『청동시대(青銅時代)』, 『포도원(葡萄園)』… 『쓰지바샤(辻馬車)』나 와세다의 『슈초(主潮)』 따위는 내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청공』보다 늦었다. 지금의 『신시초』는 당시의 『신시초』가 폐간된 뒤 나온 것이니 물론 『청공』보다 뒤다. 생각해 보면 그 무렵이 동인지 범람의 시작이었다.

그 뒤 얼마 안 되어 우리에게는, 우리 다음으로 산코에서 극연구회를 유지하던 요도노 류조(淀野隆三), 아사누마 키미(淺沼喜實), 기타가미 다다시(北神正) 세 사람이 도쿄로 나오면서 합류하고, 이어 이이지마 다다시(飯島正)와 미요시 다쓰지(三好達治), 기타가와 후유히코(北川冬彦) 두 시인이 참가하고, 3년째에는 역시 극연구회 출신 다쓰무라 켄(龍村謙)이 와서, 『청공』은 해를 거듭할수록 더욱더 사람을 늘려 갔다. 드물게 예외는 있었지만 모두 산코에서, 그것도 극연구회에서 들어온 이들이었다. 이 밖에도 동인을 들지 않으면 『청공』 전체를 말할 수 없겠지만, 따로 『청공』 이야기를 쓸 작정도 아니고, 번거로운 사항은 줄인다. 어쨌든 『청공』은 작년 7월 동인 다수가 졸업논문으로 바빠져 편집을 그만둘 때까지 매달 끊임없이 발행되었다. 따로 화려하게 세상의 이목을 사로잡았다거나, 유행하는 신인을 배출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이 지닌 잠재력은 당시 사람들도 알고 우리도 자부하고 있었다. 그리고 동인 다수가 입영이나 졸업으로 흩어져 버린 지금도, 여전히 나는 그것을 믿는다. 『청공』은 유희 기분이 없는, 융통이 안 될 만큼 진지한 무엇을 지닌 이들의 모임이었다. 세상에 폭넓게 나가 보면서, 우리는 우리가 지녔던 거친 듯 소박한 열의에 돌이켜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청공』에서 신인회(新人會)로, 문학에서 해방 운동으로 나아간 우리 가운데 하나는 그 뒤로도 이렇게 말하곤 했다. “정말이지 청공에서 쾅쾅 부딪힌 게 좋았다.” 그렇다. 『청공』은 무엇보다 우리의 배짱을 길러 주었다.

무로 사이세이(室生犀星) 씨는 일찍이 우리 나카타니 다카오의 작품을 평하여, 그분 특유의 표현으로 “일류의 몰입 방식”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 평은 정곡을 찌른 것이다. 도노무라 시게루는 『청공』 안에서도 그 괴롭다 싶을 만큼 정의감 넘치는 작풍으로 사람들의 주목과 외경을 모았다. 이런 이들의 앞으로의 활동은, 잠심(潛心)을 끝낸 요도노 류조의 활동과 더불어 매우 우리를 기대하게 하는 바이다. 기타가와 후유히코, 미요시 다쓰지는 둘 다 명성을 이룬 시인이다. 『청공』도 생각해 보면 꽤 좋은 이들을 가지고 있었다.

이 글은 극연구회의 추억으로서도, 『청공』의 기록으로서도 그 십분의 일도 온전치 못하다. 적어 두어야 할 사람의 이름도 사연도 그 번거로움을 견디지 못해 쓰는 것을 그만두었다. 게다가 회원·동인 여러분이 함께 나누어 가진 추억을 나 혼자 사사로이 한 듯한 마음이 들어 견딜 수 없다. 그 점만 양해를 구해 둔다.

교토를 떠올리고, 산코를 떠올릴 때마다, 상현관(尚賢館)의 북실이며, 불교청년회관이며, 마루야마(丸山)의 새벽이 떠오른다. 우리가 모여 늦도록 본독을 하고 이야기를 나눈 것도, 프랑스에서 돌아오신 오리타케(折竹) 선생님을 모시고 코포(Copeau) 이야기를 들은 것도, 그런 방 안에서 둘러앉은 우리의 단란 속에서였다. 그리고 그 기억은 언제나 도쿄의 그것보다 즐겁다. 도쿄의 추억은 늘 갈바람에 시달리고 있는 듯한 느낌이 있다. 교토에서는 언제나 무언가 따뜻하고 즐거운 것이 우리를 감싸 주었다. 따뜻하고 즐겁기만 한 것이 아니다. 나는 그 안에서 자신을 북돋워 주는 무언가를 늘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쇼와 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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