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 of 1

Chapter 1

에고이즘 소론

사카구치 안고

스미토모 구니코 유괴 사건은 각 방면에 반향을 일으켰는데, 동화작가 T 씨는 사회 전반의 도의가 퇴폐했기에 이런 종류의 악이 자라는 온상이 된 것이라 말하고, 아이들이 집단 소개(疎開) 탓에 세상 물정에 닳은 것도 한 원인이라 말한다. 아사히 신문 투서란에서는, 아버지인 기치에몬 씨가 신슈의 온천에서 놀고 있다가 내가 돌아간들 딸이 돌아오는 것도 아니라며 큰소리치고 도쿄로 돌아오지 않은 일 따위가 그 자체로 이 사건의 진상을 말해 주며, 스미토모 구니코는 스미토모 가의 딸로 태어나기보다 차라리 유괴범의 누이동생으로 태어나는 편이 행복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런 것들은 모두 유괴라는 표면의 사건을 그대로 받아들인 비판일 뿐, 이 사건의 참된 성격을 이해하고 있지는 못한 듯하다. 사회에서 일어나는 온갖 잡다한 사건이 늘 이런 종류의 안이하고 저속한 비판으로 의미가 매겨지고, 인성이나 인간 자식 된 자의 숙명의 근저에서부터 고찰되는 일이 결여되어 있는 것은, 패전 그 자체의 비극보다도 한층 심각한 비극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도의 퇴폐 따위 진부한 문구로 정리해 버리는 것은 문학자의 경우에 특히 죄악에 가까운 안이함일 것이다.

이 사건의 범인은 그가 유괴한 모든 소녀에게 사랑받고 있다. 한결같이 「다정한 오빠」라고 말한다. 그리고 왜 사랑받고 있느냐 하면, 이 범인은 본디 돈을 원했던 것이 아닌지라, 오로지 소녀를 사랑하고 보살피며, 그 때문에 자신을 희생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는 먹지 않고 소녀에게는 먹게 해 주고, 한뎃잠 자는 밤에는 소녀를 위해 밤새 모기를 쫓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이 사건의 특이한 성격이 자리하고 있어서, 범행 그 자체는 이기적인 것일지라도, 소녀에 대한 범인의 입장은 자기 희생으로 일관되어 있고, 소녀의 기쁨과 만족이 그 자신의 기쁨과 만족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반년을 함께 산 기요코에게는 집에 돌아가고 싶으면 돌려보내 주마 했다는데, 이미 소녀가 돌아가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미리 헤아린 자신감에서였다 해도, 진심에서 우러난 보살핌도 분명 있었으리라. 그는 강제하지 않았다. 기요코는 밥을 짓고 주먹밥을 만들어 주었지만, 구니코는 부엌일을 몰랐다. 그런 차이에 대해서도, 자기 편의를 위해 구니코에게 기요코와 같은 노릇을 강요하지는 않고, 소녀의 개성에 맞춰 자기 쪽을 순응시키며, 자기를 희생하고도 개의치 않는 본래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런 범인 앞에서는, 기요코나 구니코의 머리가 나쁘다거나, 세상 물정 모른다거나 하는 것으로 설명하는 일은 의미를 이루지 못한다. 어떤 소녀라도 유괴되면 오히려 충족되어, 범인을 사모하고 그리워할 것이 분명하다.

가정은 부모의 애정과 희생으로 구성된 결속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인습적이고 형식적인 것이라, 부모의 자식에 대한 헌신 따위는 부모가 망상처럼 확신하고 있을 뿐, 도리어 자식에게 복종과 희생을 요구하는 일이 많은 것이다. 보통 어머니란 자식의 개성조차 존중하지 않고, A의 장점으로 B를 다그치고 있는 법이라, 맹목적으로 자식에 대한 헌신과 애정을 확신하고 있을 뿐 더더욱 손쓸 수 없는 독재자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무슨 일에서든, 진실로 에고이스트가 아니라는 것은, 궁극에 있어서의 승리이기는 해도, 이 현세에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들의 자기 희생은 현세의 쾌락을 부정하고 있는 것이기는 하나, 그런 의미에서는 스스로 충족되어 있고, 현세의 고통이 반드시 그들의 고통은 아닌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세상 질서로부터 박해를 받는다. 그리스도가 그러했다. 석가도 그렇다. 그들의 길은 가시밭과 고통으로 가득 차 있지만, 궁극에 있어 그들은 「이기는 성격」에 있다. 고흐도 고갱도 바쇼도 그렇다. 예술을 위해 그들이 현세에서 짊어진 것은 헌신과 희생이었다.

위대한 천재들, 승리자들은 모두 에고이스트는 아니었다, 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범부의 길, 일반 세간 사람의 길은 정반대로, 사회 질서나 공동생활의 이념은 에고이스트가 아닌 것이나 자기 희생 같은 것을 근간으로 삼고 있지 않으며,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범위에서 자신의 욕망의 만족, 현세의 즐거움을 채우는 것을 기본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교도란 그리스도의 고통을 스스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희생에 기대어 그들의 현세의 행복이 약속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최고의 인격임을 알고 있다. 그렇다고는 해도,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와 같은 인격이어야 하며, 우리의 일상생활에 그리스도와 같은 자기 희생이 요구된다면, 우리는 비명을 지르는 데 그치지 않고, 반항하고 혁명을 일으킬 것이 분명하다. 최고의 인격이나 도덕은 우리의 질서에 있어서는 이상한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는 죄악과 다를 바가 없다. 우리의 질서는 에고이즘을 기본으로 만들어져 있으며, 우리는 에고이스트인 것이다.

나는 십수 년 전에 한 여자를 알고 있었다. 유부녀였지만 천 명의 남자를 알고 싶다는 생각을 품고 있어서, 대학생 따위와 잠자리를 옮겨 다니던 여자로, 그러던 중 이혼당하고 화류병에 걸려 갈 곳이 막막해진 끝에 우리 아파트의 한 방으로 굴러 들어왔는데, 자기 욕망 외에는 남의 일 따위 생각하는 일 없는 여자였던지라, 남자에게도 여자에게도 친구가 없어 갈 곳이 없었던 것이다. 우리 아파트라는 곳은 도쿄가 아니라, 어느 지방 도시였고, 나는 악연으로 얽힌 여자와 그런 곳으로 흘러 들어와 사람은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 것인가 하고 생각하며, 그 허무함과 처연함에 고민하고 있었다. 나는 매일 도서관에 가서, 어쩔 도리 없이 책을 읽고 있었다. 나 자신을 미덥지 않게 여겨, 책 속에 나 자신의 생각거리가 적혀 있지나 않을까 했지만, 나는 책을 펼쳐 멍하니 있을 뿐 책을 읽을 힘조차 없었던 것이다. 굴러 들어온 여자는 화류병 의사에게 다니고 있었는데, 그 의사를 꾀어 보다 실패했다나 어쨌다나, 댄스홀에 매일 남자를 찾으러 가서, 매일 허탕만 치고 돌아와 혼자 잠자리에 기어 들어간다. 그 차디찬 잠자리에 기어 들어가는 모습이 마치 노파처럼 색기라곤 티끌만큼도 없어서, 나는 어두운 마음이 되곤 했다.

나는 그때 생각했다. 남녀의 육체의 자리에서조차, 이 여자처럼 자기 쾌락만을 좇는다는 것은 글러먹은 것이라고. 마농 레스코나 『위험한 관계』의 후작부인과 같은 천성의 창부는, 미를 좇아 남자를 홀리고자 온갖 기술을 쓰고, 남자에게 주는 도취의 대가로 당연한 보수를 요구하고 있을 뿐인 천성의 기예자이며, 그 때문에 자신을 희생하고, 단식은 물론이거니와 자신의 육욕의 쾌락마저도 희생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육욕의 자리에서조차, 창부형의 위대한 자는 에고이스트가 아닌 것이다. 에고이스트는 반드시 진다. 가정이 이런 천성의 창부에게 패배해 무너지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다.

예술의 세계 또한 그렇다, 에고이스트여서는 안 된다. 나는 그 무렵부터, 에고이스트라는 것에 지금도 여전히 사로잡혀 있는데, 지금도 여전히 나에게는 도무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무상의 행위라는 것을 줄곧 생각해 왔을 뿐이며, 지금도 여전히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생각하는 세계가 아니라, 행하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도의 퇴폐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그들이 옳다고 여기는 질서란 대체 무엇인가. 갈 곳 없는 나그네를 재워 대접해 주었으니 미담이라고 한다. 이 나그네가 고다이라 같은 사내라서, 친절히 재워 준 탓에 목 졸려 죽는다면 어쩔 셈인가. 프랑스 동화에 있지 않은가. 빨간 모자라는 귀엽고 친절한 소녀가 숲속의 할머니를 문병하러 갔다가, 할머니로 둔갑한 늑대에게 잡아먹히고 마는 이야기가. 그러므로 친절히 굴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친절히 굴려거든 고다이라나 늑대에게 죽임당할 각오로 하라, 라는 것이다. 친절히 베풀어 주었는데 배신당했으니 이제 친절은 그만두겠다고 한다. 그런 친절은 처음부터 베풀지 말 일이다. 친절에는 배신도 보수도 없다. 고다이라나 늑대의 존재가 미리 헤아려져, 친절을 베푼 덕에 죽임당해도 어쩔 도리 없다는 자각 위에 성립해 있는 절대의 세계인 것이다.

한번 배신당하면 무너져 버리고 마는 친절을 미담이라 말하고, 도의 퇴폐를 한탄해야 마땅하다고 말하는 것, 그것 자체가 얄팍한 에고이즘이지 않은가. 어둠의 여자는 자유와 방자를 혼동하고 있는 곤란한 존재라고 하지만, 가정을 저주하고 자유를 좇아 뛰쳐나가는 것은 어둠의 여자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다. 출가 둔세도 같은 것이 아닌가. 어둠의 여자가 되려면 승려가 되는 것보다 더 괴로운 한 선을 뛰어넘을 필요가 있다. 출가 둔세는 칭송해 주는 사람이 있지만, 어둠의 여자는 세상의 손가락질을 받을 뿐이다. 그대들은 죄를 알고 있는가. 죄란 무엇인가. 정조를 잃은 여자는 영혼의 순결도 잃는다, 라고. 과연 그러하다. 가정에 안주하며 정숙하면서도 잇속의 귀신과도 같은 악역(惡逆)이면서 선량한 마님을 보라. 영혼의 순결 따위는 없다. 영혼의 문제 자체가 없는 것이다.

라스콜니코프는 매춘부에게 무릎을 꿇는다, 그녀는 오욕에 더럽혀져 있지만 그 영혼은 한 방울의 음탕한 피에도 더럽혀지지 않았다, 라고. 그리고 위대한 죄에 무릎을 꿇는 것이라고. 나는 그런 달콤한 소리는 생각하고 있지 않다. 내가 아는 소냐나 마리야는 다들 음탕한 피에 젖어 있고, 그러면서도 희희낙락하고 있는 것이다. 나의 소냐는 짓밟히거나 학대받은 적은 없고, 노라처럼 뛰쳐나와, 그러나 오욕을 향해 스스로 뛰어든 것이다. 분명 자유와 방자를 혼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진실로 자유로운 것도, 진실로 방자한 것도 존재하고 있지 않다. 자유라는 것이 얼마나 고통으로 가득 차 있는지, 우리 예술에 종사하는 자들은 뼈저리게 알고 있다. 예술의 세계에서는 온갖 자유가 허용되어 있어서, 아니, 가능한 모든 새로운 것, 아직 알지 못하는 것을 발견하고 만들어 내는 일을 그 본분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재능에는 어떠한 속박도 없다. 그렇지만 자기 재능에 있어서 자유로울 수 있었던 예술가 따위는 존재하지 않으며, 진실로 자유가 허용되고, 자유를 강요받았을 때 (예술은 자유를 강요한다) 인간은 자유를 발견하는 대신 속박과 한정을 발견하는 것이다.

내가 전시 중에 촉탁으로 일하고 있던 어느 영화 회사에서는, 연출가들이 조합 제도인지 순번 제도인지 그런 식의 것을 만들어, 각자의 재능의 빈곤을 그것으로 구제하는 듯한 조직을 만들고 있었던 모양인데, 순번 제도 같은 것으로 재능의 분배가 이루어지게 된다면, 과연 편하기는 할 것이다. 질서란 만사가 이런 식의 것이며, 재능의 자유 경쟁은 조합 위반이라며 걸리는 것이다. 예술의 세계에서는 이런 질서의 어이없음이 보이지만, 일반 사회에서는 그것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방자라 해도 마찬가지다. 남을 배신하는 자는 자기 자신도 또한 배신당한다. 권모술수, 가능한 모든 악책 귀략에 자기가 다치고, 배신하기에 배신당하며, 전국 시대의 호걸들도 비호 아래 묶이는 한이 있어도 안면(安眠)을 누리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다. 어떤 비열한 수단을 쓰더라도 이기기만 하면 된다는 미야모토 무사시의 검법이 쇠퇴하고, 형식주의의 야규류가 구가되기에 이른 것도, 호걸들이 검도 본래의 격렬함을 견디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허위의 정의는 탄생한다.

총파업이 다른 이에게 폐를 끼침으로 인해 반감을 산다. 그러나 요구의 정당한 권리는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에고이즘은 에고이즘에 의해 거역당하고 보복당하는 것이다. 도의 퇴폐를 한탄하는 것의 에고이즘도 마찬가지여서, 아무리 한탄해 본들 그대 자신의 도의라는 것의 에고이즘을 깨닫지 않는 한 웃음거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어둠의 여자도 출가 둔세도 단지 에고이스트에 지나지 않지만, 요컨대 에고이즘은 에고이즘에 의해 거역당하는 것이다. 어쩔 도리 없는 일이지 않은가. 가정이나 질서의 영원한 평화 따위라는 것이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술은 어떤 시대에도 영원한 것, 절대적인 것, 진선미를 위해 싸워 온 영혼의 발자취이지만, 결코 이런 질서의 경솔한 편이 아니었다.

일본의 부흥에는 도의, 질서의 회복이 급선무라고 한다. 그러나 본래 에고이즘의 도의에는 쓸데없는 군말이 필요 없는 법이라, 전차의 수가 늘어나면 누구도 밀고 밀릴 까닭이 없고, 물자가 풀리면 암거래상은 사라진다. 물질의 부흥이 급선무인 것이다. 만약 그것이 전차 안에서 노약자나 부녀자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따위의 일이 도의의 부흥이라 한다면, 전차 좌석은 양보할 수 있어도 인생의 좌석은 양보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돌아볼 것. 시답잖은 친절은 부질없는 것이다. 남에게 친절을 베풀려거든 고다이라나 늑대에게 죽임당할 것을 자각한 위에 친절을 다할 것. 나는 전차 좌석을 양보하며 선인인 척하고, 도의 퇴폐를 한탄하는 사람보다, 유괴범 히구치 쪽을 훨씬 사랑한다. 내가 도쿄로 돌아간들 딸은 돌아오지 않는다는 기치에몬 씨의 말 쪽이 거듭 백번 지당한 것이라, 정말이지 말씀대로이며, 도의 퇴폐 따위 한탄하기보다 먼저 너희의 마음에 비추어 돌아볼지어다. 남에 대한 오지랖은 뒤로 미루고, 제 일을 생각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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