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
두 번 들려준 이야기
집에서 보내는 주일
너새니얼 호손
여름철 안식일 아침이면 나는 커튼을 젖히고, 내 방 창 맞은편에 선 첨탑을 타고 아침 해가 살며시 내려오는 광경을 바라본다. 맨 먼저 풍향계가 반짝이기 시작한다. 이어 한결 은은한 광채가 첨탑 꼭대기를 감싸, 마치 허공에 떠 있는 듯한 자태를 빚어낸다. 다음으로 그 빛은 탑으로 내려앉아, 시계 문자판의 바늘이 금칠한 시각 숫자를 가리키는 자리에서 황금처럼 번쩍이게 한다. 이제 가장 높은 창문이 빛나고, 이어 아래쪽 창문이 빛난다. 정문의 조각된 틀이 또렷이 드러난다. 마침내 하늘에서 내려오는 아침의 영광이 돌계단을 한 층 한 층 밟고 내려오고, 첨탑은 신선한 빛살을 두르고 우뚝 서는데, 그 사이 새벽의 음영은 아직 이웃한 건물들의 구석구석에 몸을 숨기고 있다. 생각건대, 맑은 아침이면 언제나 같은 해가 첨탑을 밝혀주건만, 안식일만은 첨탑이 유달리 빛의 예복을 두르는 듯하다.
교회 가까이 살다 보면 이내 그 건물에 정이 붙는다. 자연히 교회를 사람처럼 여기게 되고, 그 육중한 벽과 어슴푸레한 공간 속에 잔잔하고 명상적이며 어딘가 애수 어린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느끼게 된다. 그러나 마음속에서든 자리 잡은 위치로든, 가장 앞서는 것은 역시 첨탑이다. 첨탑은 거인처럼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 거인은 온 마을의 크고 작은 일을 두루 보살필 만한 포용력과 분별력을 지녔다. 시간마다 첨탑은 사려 깊은 소수에게 교훈을 들려주며, 동시에 분주한 수천 사람에게 저마다의 은밀한 사정을 일깨운다. 뜻밖의 변고가 생겼을 때 다급하고 불규칙한 경종을 온 사방에 흩뿌리는 것도 첨탑이다. 기쁨과 축제의 소식 또한 첨탑의 혀보다 더 나은 전달자를 찾지 못한다. 고인이 제 집으로 천천히 돌아갈 때면, 첨탑은 애도의 목소리로 그를 맞이한다. 이처럼 인간사와 깊이 얽혀 있건만, 평일이 되면 얼마나 깊은 영혼의 외로움이 그 당당한 높이를 감싸고 감도는가. 첨탑은 저 아래 즐비한 집들과 한 핏줄이 아니다. 첨탑은 좁은 한길을 내려다볼 뿐인데, 오히려 그 발치에서 사람들이 팔꿈치를 부딪치며 지나가기에 더욱 외로워 보인다. 교회 본당을 한 번 들여다보면 그 인상은 한층 짙어진다. 안쪽, 멀리 난 창으로 들어온 빛 아래, 굴절된 그림자 사이로 우리는 비어 있는 회중석과 텅 빈 2층석, 침묵하는 오르간, 목소리 없는 설교단, 그리고 고독을 향해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를 알리는 시계를 어렴풋이 바라본다.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의 시간, 그것이 영원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고 보면 교회 안에는, 거룩한 날이 다시 돌아와 그것들을 바깥으로 풀어놓기까지, 한 주 내내 영원에 관한 온갖 생각과 감정이 차곡차곡 쟁여진다고 가정해 볼 수도 있으리라. 그렇다면 교회의 자리는 차라리 마을 변두리, 늙은 나무들이 주위를 흔들며 고요한 풀밭 위로 장엄한 그림자를 드리울 여유가 있는 곳이 더 어울리지 않겠는가? 이 이야기는 뒤에서 다시 하자.
그러나 안식일에는, 나는 가장 이른 햇살을 지켜보며 상상한다. 상업 거래소에는 수군거리는 소리가 없고, 상점에는 거래가 없으며, 어디에도 군중이나 장사가 없고 오직 교회에만 사람이 있을 때, 한결 거룩한 광채가 이 날을 표 내주고 있다고. 그렇게 상상한 사람이 나 하나만은 아니리라. 나로서는, 그 빛이 엉킨 숲 사이로 흩뿌려져 내리든, 들판을 가로질러 넓게 비치든, 벽돌 건물들 사이에 갇혀 있든, 내 방 바닥에 창틀의 모양을 그려 내든, 언제나 안식일의 햇살을 알아본다. 언제까지고 나로 하여금 그 빛을 알아보게 하라. 어떤 환상은, 그리고 이 환상도 그 가운데 하나이거니와, 거대한 진리의 그림자다. 의심이 내 주위를 떠돌거나 사악한 날개를 접고 내려앉는 듯 보일지라도, 안식일에는 땅이 거룩해지고 하늘의 빛이 그 거룩함을 간직한다고 내가 믿는 한, 그 축복받은 햇살이 내 안에 살아 있는 한, 내 영혼은 결코 그 신앙의 본능을 잃지 않으리라. 설령 길을 잃었다 해도, 다시 돌아오고야 말 것이다.
나는 이처럼 흐뭇한 안식일을 아침부터 저녁까지, 활짝 열어 둔 창의 커튼 뒤에서 지내기를 좋아한다. 이렇게 보내면 그릇된 것인가? 첨탑의 둥근 그림자가 한 번이라도 스쳐 가는 자리라면, 교회와 그만큼 가까운 자리라면, 오늘 하루만은 거룩히 성별된 땅으로 여겨져야 마땅하다. 더 강한 진리로 말하자면, 독실한 마음은 도적의 소굴조차 거룩하게 만들 수 있고, 악한 마음은 성전조차 그런 소굴로 바꾸어 놓을 수 있다. 내 마음에는 아마도 그만큼 거룩한 힘도, 부디 그렇게 믿고 싶다, 그만큼 불경한 힘도 없을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족하다. 내 몸은 거기에 없어도 내 속사람은 늘 교회에 다니건만, 몸으로는 늘 앉던 자리를 채우면서 영혼은 집에 두고 온 이들도 숱하다는 것. 더군다나 나는 내 친구인 교회 관리인보다 먼저 거기에 가 있다. 이윽고 그가 온다. 다정하지만 어딘가 어두운 인상에, 짙은 회색 옷을 걸치고, 머리털 또한 그와 같은 잿빛이 섞인, 그 사람이 와서 널찍한 정문에 열쇠를 꽂는다. 이제 내 생각은 먼지 쌓인 회중석 사이를 거닐어도, 설교단 위에 올라도 신성모독이 아니다. 그러나 곧 생각은 다시 나와 종소리를 즐긴다. 얼마나 기쁘면서도 얼마나 엄숙한가. 마을의 모든 첨탑이 햇살 가득한 공중에서 높다랗게 서로 말을 주고받는다. 첨탑 꼭대기들이 일제히 하늘을 가리키며 저희끼리 기뻐한다. 그러는 동안, 아이들이 교회 어딘가에서 열리는 주일학교로 모여든다. 아치형 정문을 바라보다가, 분홍·파랑·노랑·진홍빛 옷을 차려입은 어린 소녀들과 소년들 스무 남짓이, 엄숙한 어둠 속에 갇혀 있다가 돌연 햇살 속으로 쏟아져 나오는 모습에, 나는 이따금 즐거움에 젖곤 했다. 마치 화사한 나비 떼 같았다. 아니면 그 거룩한 자리를 맴도는 어린 천사들이라 불러도 좋으리라.
두 번째 종소리가 울리기 십오 분쯤 전이 되면, 회중 가운데 한둘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가장 먼저 오는 이는 언제나 검은 옷의 노파다. 굽은 몸과 둥글게 처진 어깨에는 무거운 슬픔이 얹혀 있음이 완연하다. 노파는 그 짐을 제단 위에 어서 내려놓고 싶어 조바심을 낸다. 저 서러운 늙은 영혼을 위해서라도, 안식일이 지금의 두 배쯤 자주 왔으면. 제때에 당도하는 한 노신사도 있다. 그이는 탑 모퉁이에 등을 기대고, 첨탑 그림자가 그어 놓은 경계 바로 안쪽에 서서, 눈을 내리깐 채 어두운 이마를 드리우고 있다. 나는 이따금, 저 노파가 이 노신사보다는 그래도 덜 불행한 것 아닌가 생각한다. 그 뒤로는 사람들이 혼자서, 또는 두어 명, 서너 명씩 띄엄띄엄 들어온다. 더러는 문간으로 사라지고, 더러는 그 언저리에 자리를 잡는다. 이윽고, 언제 들어도 뜻밖인 감각과 함께, 머리 위 첨탑 안에서 종이 몸을 뒤집으며 불규칙한 굉음을 쏟아 내고, 탑은 그 진동에 밑뿌리까지 흔들린다. 그 소리에 마법이라도 깃든 듯, 거리 이쪽저쪽 인도에는 곧바로 길게 늘어선 두 줄의 인파가 가득 차, 모두 이리로 몰려들며 교회 안으로 흘러든다. 이따금 저 멀리서 마차 구르는 소리가 가까워 온다. 주위의 정적과 대비되어 더욱 둔중한 천둥소리처럼 들리는 그 소리는, 부유한 예배자들을 정문 앞에, 그들 가운데 가장 미천한 형제들 사이로 내려놓는다. 저 문턱 너머로는, 적어도 원리상으로는, 지상의 신분 구별이 없다. 햇살 아래 한껏 나부끼는 화려한 차림새만 두고 본다면, 이쪽 문 안쪽에서도 신분 구별이 전혀 있지 않은 듯하다. 그런데 저 어여쁜 아가씨들. 왜 하필이면 내 경건한 명상을 흐트러뜨려야 한단 말인가. 한 주의 모든 날 가운데 안식일만큼은, 복된 천사들과 아름다움을 다투어 우리 마음을 천국에서 빼앗지 말고, 오히려 가장 덜 매혹적으로 보이려 애써야 할 터인데, 어찌 외려 이 속세의 사랑스러움을 돋우어 놓는단 말인가. 내가 설령 목사라 한들, 눈길이 저절로 그리로 가지 않을 수 없으리라. 한 아가씨는 허리 위로는 흰 모슬린, 아래로는 구두 끝까지 검은 비단이다. 또 한 아가씨는 정수리부터 구두끈까지 온통 한 가지 진홍빛으로 수줍게 물들어 있다. 또 다른 아가씨는 노랑빛이 온몸에 흘러, 마치 햇살로 옷을 지어 입은 듯 빛난다. 그러나 대부분은 한결 누그러진 화사함을 골랐다. 아가씨들의 베일은, 특히 바람이 살랑 들어 올릴 때면, 전체 인상에 가벼움을 더해, 그녀들이 계단을 훌쩍 올라 어두운 문간으로 사라질 때 마치 가벼운 허깨비처럼 보이게 한다. 거의 모두가, 내가 이런 것까지 안다는 건 어지간히 이상한 일이지만, 흰 스타킹을 신고 있다. 눈처럼 흰 스타킹에, 발목 위로 꽤 올라오도록 검은 리본을 엇갈려 묶은 말쑥한 구두. 흰 스타킹 쪽이 검은 것보다 한없이 효과가 크다.
이제 목사가 온다. 느릿하고 엄숙하게, 엄정한 소박함 속에 걸어온다. 그 직분을 드러내는 데에 검은 비단 예복 따위는 필요치 않다. 그의 풍모는 내 경외를 요구하나, 사랑은 얻지 못한다. 내가 만일 성 베드로가 하늘 문을 굳게 지키며 가련한 청원자들 앞에서 연민보다는 준엄함을 띠고 이맛살을 찌푸리는 모습을 그려야 한다면, 바로 저 얼굴을 표본으로 삼으리라. 중년에 이르거나 혹은 그보다 이르게, 교리는 으레 사람의 마음에 흔적을 새기거나, 반대로 그 마음에 의해 한결 누그러진다. 목사가 교회로 들어서자, 종은 쇠 혀를 거두고, 회중의 낮은 웅성거림도 잦아든다. 잿빛 관리인은 거리 위아래를 한 번 둘러보고, 이어 내 창가 커튼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커튼의 작은 틈새로, 나는 그가 내 눈을 붙잡은 것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반쯤 든다. 이제 어정거리던 이들도 모두 안으로 들어갔고, 거리는 잔잔한 햇살 속에 잠들며, 나에게는 고독감이 밀려오고, 게을리한 특권과 의무를 의식하는 불안도 함께 찾아든다. 아, 나도 교회에 갔어야 했건만. 회중이 자리에서 일어서는 술렁임이 내 귀에까지 닿는다. 그들은 기도를 위해 서 있다. 내가 만일 저 교회에서 기도하는 이들과 마음을 한 가락에 맞추어, 간구의 열정으로, 그러나 또렷한 청원 없이 그것을 하늘로 들어 올릴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안전한 기도가 아니겠는가? “주여, 저를 자비로이 굽어살피소서!” 이 한마디가 내 영혼에서 솟구쳐 나온다면, 나머지는 모두 그분께 맡겨 두어도 되지 않겠는가?
들어 보라. 찬송이다. 이것만큼은 예배의 어느 부분보다 내가 더 잘 누릴 수 있는 대목이다. 벽 안쪽에 앉아 있다면 가득 찬 성가대와 오르간의 육중한 선율이 무게로 나를 짓눌렀으리라. 이 거리에서는, 그 음률이 내 온몸을 스쳐 지나며, 감각과 영혼 양쪽에 기쁨이 되어 내 심금을 울린다. 하늘에 감사할 일이거니와, 나는 음악을 학문으로는 도무지 알지 못한다. 그래서 아무리 정교한 화성이라도, 내 마음에 들면 그것은 유모의 자장가처럼 단순한 방식으로 마음에 든다. 선율은 끝났으나, 내 마음속에서는 상상의 메아리와 더불어 스스로 이어진다. 마침내 나는 몽상에서 화들짝 깨어나, 설교가 이미 시작되었음을 깨닫는다. 인쇄된 설교가 아니고는 좀처럼 제대로 열매를 맺지 못하니, 이것이 내 불행이다. 설교자가 던지는 첫 강렬한 생각이 한 줄기 사색을 낳고, 그것은 나를 한 걸음 한 걸음 이끌어, 그이가 참으로 천둥의 아들이 아닌 바에야, 그 좋은 이의 목소리로부터 아주 멀리 벗어나 버리게 한다. 활짝 연 창가에서 “목사의 설교 가락”을 이따금 한두 구절 주워듣는 나는, 설교단 계단 밑에 앉은 사람 못지않게 좋은 자리에 있는 셈이다. 이 한 편의 설교에서 떨어져 나온 깨어진 조각들은, 장차 수많은 설교의 본문이 될 터인데, 그 설교를 베푸는 것은 내 동료 목사들, 곧 동료이되 흔히 언쟁자이기도 한 내 이성과 감성이다. 이성은 학자인 양 행세하며 교리적 논점을 들어 나를 곤혹스럽게 만들고, 감성은 느낌의 결을 타고 나를 이끈다. 그리고 그 두 설교자도, 다른 여러 설교자들이 그러하듯, 보잘것없는 성과에 제 힘을 다 쏟는다. 나는 그들의 단 한 명뿐인 청중인데도, 그들의 말을 다 알아들을 수가 없다.
몇 시간이 흘렀다 하자. 보라, 나는 아직도 커튼 뒤에 있는데, 때는 오후 예배가 끝나기 바로 전이다. 시계 문자판의 시침은 이미 네 시를 지났다. 기울어 가는 해는 첨탑 뒤에 몸을 감추고, 그 그림자를 거리 너머로 곧장 길게 드리운다. 내 방은 구름이라도 드리운 듯 어둑해진다. 교회 문 언저리는 고적하고, 문턱 너머는 꿰뚫을 수 없는 어둠이다. 술렁임이 들려온다. 회중석이 쿵쿵 접히고, 회중석 문들이 덜컹 열어젖혀지며, 보이지 않는 통로들 위로 수많은 발길이 쿵쿵거린다. 이윽고 회중은 정문으로 와르르 쏟아져 나온다. 맨 앞으로는 어린 소년들의 무리가 우르르 뛰쳐나오고, 그 뒤로는 어른 남자들의 짙고 어두운 대열이 밀집하여 움직이며, 끝으로는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나오는 여인들과, 그 사이 드문드문 섞인 남편 몇몇이 나온다. 고독 속으로 이렇게 별안간 생명이 터져 나오는 이 장면은, 하루 중에서도 내 마음을 가장 사로잡는 광경 가운데 하나다. 어떤 선한 이들은 눈을 비비고 있는데, 이는 그들이 뜨거운 신심에 젖어 말하자면 일종의 거룩한 무아경에 싸여 있었음을 은근히 드러낸다. 한 젊은이도 있다. 삼류 멋쟁이 한량으로, 무엇보다 먼저 챙기는 일은 흰 손수건을 과시하듯 펼쳐, 마치 광택제를 먹인 듯 반들거리는 꽉 끼는 검은 비단 바지의 엉덩이 자리를 훔쳐 내는 것이다. 그 바지는 필경 “영원불멸”이라 부르는 천으로 지은 것이리라. 아니면 『천로역정』의 주인공 크리스천이 입은 옷과 같은 감으로 잘라 낸 것이거나. 이태 전 여름에 걸치기 시작한 것을 아직도 윤 하나 흐트러뜨리지 않고 입고 있으니 말이다. 나는 저 검은 비단 바지에 어지간히 정이 들어 버렸다. 이제 친구들끼리 고갯짓을 주고받으며 인사가 오간다. 부인들은 남편의 팔짱을 끼고 진중하게 집을 향해 걸음을 옮기고, 아가씨들도 마음에 둔 총각들과 해 질 녘 산책 약속을 정한 뒤 훨훨 자리를 떠난다. 안식일 저녁은 사랑의 저녁이다. 이윽고 온 회중이 흩어진다. 아니, 그게 아니다. 여기, 검은 공단처럼 반들거리는 얼굴을 한 흑인 여인 두 사람과 흑인 신사 한 사람이 나온다. 그 바로 뒤에는 목사가 따르며, 준엄한 얼굴을 부드러이 풀고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다정한 말을 건넨다. 가여운 영혼들. 저들에게 천국의 지복을 그린 가장 매혹적인 그림이란 바로 이것이리라 — “그곳에서 우리는 희어지리라!”
다시 고적함뿐이다. 그런데 들어 보라. 끊어질 듯 이어지는 목소리의 떨림이 들려오고, 이제 그 달콤함에 장엄함을 맞추어, 오르간이 당당한 한 가락을 퍼뜨린다. 저 성가대원들은 누구인가? 이 축복받은 아침에 하늘에서 내려와 참으로 선한 이들의 예배에 함께 섞였던 천사들이, 이제 땅에 작별을 연주하고 노래한다고, 그렇게 꿈꾸어 보자. 그 풍성한 가락의 날개에 실려 천사들은 위로 들려 올라갔다.
너그러운 독자여, 이것은 그저 시적 비상에 지나지 않는다. 몇몇 남녀 성가대원이 제 동료들보다 뒤에 남아, 간간이 목소리를 높이고, 오르간 위에 무심한 한 음을 불어 넣었을 뿐이다. 그럼에도 그 소리는 앞서의 어떤 합창보다도 내 영혼을 더 높이 끌어 올렸다. 그들도 떠났다. 음악의 아들딸들이 떠났고, 잿빛 관리인이 이제 막 정문을 닫고 있다. 앞으로 엿새 동안, 회중석에도 통로에도 2층석에도 사람의 얼굴은 보이지 않을 것이고, 설교단에는 목소리가, 성가대석에는 음악이 없을 것이다. 이 육중한 건물을 세운 보람이, 한 주의 한복판에 사막이 되었다가 이레째 날 몇 시간만 북적이기 위함이었던가? 아, 그러나 교회는 종교의 상징이다. 첫 나무가 베어지던 그 날 거룩히 성별된 이 자리가, 평일 세상에 번잡과 허영이 가득할 때에도 고독과 평화의 한 조각 뜰로서, 영원토록 거룩히 지켜지기를. 침묵하는 벽에도 한 편의 교훈이 있고 한 편의 종교가 있다. 부디 첨탑이 언제까지나 하늘을 가리키며, 안식일 아침의 거룩한 햇살로 장식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