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 of 2

(늦가을의, 저녁 무렵이다. 남이 책상에 기대어 글을 쓰고 있다. 여가 입구로 들어온다. ―방이 어질러져 있다)

여 안녕하세요. 말 없이 와 버렸어요. 남 아, 안녕하세요. 여 뭔가 쓰고 계시네, 그럼 방해되는 거 아니에요? ―하긴 당신이 글을 쓰는 건 늘 있는 일이니까. 남 딱히 방해는 아니에요. 여 제가 일전에 치워 드리고 간 게 아직 사흘 남짓밖에 안 되었을 텐데, 어머나 또 어질러졌네요. 남 (주위를 둘러보듯이) 하하하하. 여 그렇지만 저, 그때 다녀가서 이렇게 생각했어요. 소설가 같은 사람의 방을 정신없이 치워 버리는 건 도리어 안 좋은 일이라고. 남 저는 소설가가 아니에요. 여 그래요? 정말로요? ―또 저런 말씀을! ―아아 제가 방해하고 있었네, 신경 쓰지 마시고 쓰셔요. 남 그럼 서너 줄만 더 쓰면 이 한 단락이 끝나니까요. (쓰기 시작한다) 여 어머 글씨를 참 곱게 쓰시네요. 그렇게 고운 필체로 편지를 받은 여자가, 이 세상에 몇 명이나 있을까? ―어머 저, 또 방해하고 있었네. 이젠 그만, 그만. 남 자 끝났다! (펜을 내려놓고 돌아앉는다) 여 마침 잘됐네요. (사이. 밖에서 바람이 스쳐 가는 소리) 어휴 추워. 밖은 벌써 추워요. 이제부터는 이렇게 방에 틀어박혀 난로 곁에 있는 게 제일 좋아요, 당신은 행복하시네요. 저도 이제부터는 가끔가끔 와서―당신은 쓰셔요, 저는 여기서 조용히 불 쬐고 있을게요. 그리고 코코아라도 사 와서 끓여 드릴게요. 남 고맙군요. (문득 떠올랐다는 듯이 펜을 들고 슥슥 쓴다. 여 들여다보듯이 보고 있다. 곧 펜을 놓는다) 여 있죠, 인물 이름을 고치셨네요. 당신은 어떤 식으로 이름 같은 걸 생각해 내세요? 제가 좀 아는 사람은요, 남자라면 자기 학교 친구 같은 데서, 여자라면 애인이나 애인의 친구 이름을 이리저리 비틀어 만든다고 하던데요. 남 좀 안다는 게 어떤 남자예요? 여 시시한 사람이에요. 남 흐음. 여 (살짝 목소리를 낮추며) 있죠, 거기 휴지 같은 거라도 좋으니까, 당신이 지금까지 사귄 애인 이름을 한번 써 보지 않으실래요…………? 남 왜요. 여 왜냐면 저, 어쩐지 보고 싶은 기분이 들어서요. 남 (여의 말투를 흉내 내어) 시시한 사람이에요. 여 그럼 당신은, 얼굴로 말한다면 어떤 게 좋으세요? 남 글쎄요. (여의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놀리는 듯한 눈빛이 된다) 코카서스형이면서, 콧날만은 독일 여자처럼 어딘가 야무진 데가 있는 얼굴, 이라고 하면 좋을까요. 여 코카서스형이라니, 그럼 어떤 거예요? 남 당신 같은 거지요. 여 아하하하하하하하………… 거짓말. 남 (따라 웃으며) 정말이에요. (사이) 여 (남의 책상 위를 보면서) 그 수첩 당신 일기네요―“권태자의 수첩”이라고 쓰여 있잖아요? (그것을 손에 든다) 일기지만, 저라면 읽어도 되겠죠? (읽는다) “우물을 길으며 여자가, 젊을 때는 두 번 오지 않는다고 했다―나는 그것을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듣고 있었다.” ―“좋은 거처 좋은 술, 향기로운 담배·홍차.” ―어머나, 그럼 저 코코아가 좋긴 한데 이번에 올 때는 홍차 쪽을 사 올게요. 남 점점 더 고맙군요. 여 (이어서 읽는다) “‘노동 가운데서도 그것만큼 싫은 것은 없네’ 하고, 산책하고 있을 때 친구는 나를 재촉하는 듯이 말했다. ―사람은 권태로워지면 남의 일을 보지 않게 된다.” ―있죠, 제 일도요? 남 하하하, 그렇게 정중히 물으면, 아무 말도 못 하게 되지요. 여 그래요? (읽는다) “욕조 안에서는 어떤 사람이라도, 자기를 잊고 있지 않다. 아니, 내가 그나마 기분 전환이라고, 싫은 욕조 안조차 그리워해 왔으니까 드는 생각인지도 모른다.” ―(조금 빠른 말투가 된다) “나는 내가 저쪽으로 걷고 있는 것인지, 내가 저쪽에서 창백한 얼굴로 걸어오고 있는 것인지 모를 때가 있다―네거리에서, 모두의 활기찬 얼굴, 특히 마주쳐 서로 반가운 듯한 인사를 나누고 있는 사람들을 볼 때.” ―“위산을 마시고 비로소 알았다, 내가 위장병 환자였음을. ‘그럼 어떻게 그것을 마시려 했지요?’ 하고 물은 사람이 있다. ‘그런 의문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내 얼굴은 창백해지고, 손가락은 이대로, 쥔 모래의 절반은 사르르 까닭 없이 떨어질 듯한 정도입니다.’” ―“일찍이 나는, 다리 위를 지나갈 때, 다리 위에서는 사람이, 모두 니힐리스틱(ニヒリスチック)해진다고 여겼다, 생각했다.” ―어머, 당신은 권태로운 분이시네요! ―아내를 어서 두시는 게 좋겠어요. 그리고 댄싱홀에라도 좀 드나들어 보시면 좋을 거예요. 소셜 댄스라면 저라도 전수―전수해 드릴게요. 남 사교 댄스 같은 건, 돈을 받는다 해도 질색이지만, 아내는 둬 볼까요, 어디선가 찾아내서 말이지. 여 그러게요, ………그런데 우선 댄스 쪽이 낫지 않을까요. 남 하하하, 다 농담이에요. 여 농담이라고요…………? 남 아니야, 당신을 아내로 삼아 볼까. 여 그렇지만요…………저 “안주인”이라든가, “아내”라든가, “신부”라든가 하는 말이 싫은걸요. 남 과연. 그럼 “여동생”. 그거라면 괜찮을 테지요. 여 “아내”라든가 “신부”라든가 하는 건 살림에 찌든 느낌인걸요…………. 남 어차피 살림에 찌들 텐데. 여 참 저, 소설가에게는 도저히 못 당해요. (사이) 여 …………결국 저, 털어놓고 말았네요. 그래도요…………당신 소설의 재료가 되는 게 제 결말 아닐까요. 남 괜찮아요. (사이) 저는 장래가 없는 남자예요. 여 거짓말이에요, 훌륭해지실 거예요, 정말 훌륭해지실 테니까, 제가 분명히 알고 있어요. 저는 날씨도 거의 틀리지 않게 맞추는걸요, 다들 예언자라고 해요. 그래도 소설가 앞에서 그런 말을 하면 비웃음을 사겠죠. 남 그래도 소설가 곁에 있는다는 건, 의외로 수고로운 일이에요. 여 아직도 그런 말씀을. ―어머 지금 옆 창문에서, 젊은 남자가 이쪽을 보며 웃고 있었어요, 우리 이야기를 듣지나 않았을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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