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
지드 전집도 이제 앞으로 세 권만 남기고 완결된다. 참으로 잘 읽혀 왔고 잘 평해져 왔다. 이제 와서 나 따위가 지드에 관해 쓸 차례도 아닐 것이다. 지드에 관해 쓰라고 주어진 지면이긴 하지만, 그런 사정으로 오늘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기로 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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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에서 지드까지, 아니 그보다 더 이전부터 지드까지일지도 모른다, 겨우 칠십 년 사이에 한차례 통독해 낸 우리 일본의 힘이라는 것은, 세상에도 두려운 힘이다. 그러나 또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 안에 어지간한 소화불량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한데 일본의 힘이 위대하다는 점에 대해서는, 누구도 이론(異論)이 있을 리 없으니, 그 이야기는 그것대로 두고 오늘은 그 소화불량 쪽을 논해 보고자 한다.
보시다시피 겨우 칠십 년 사이에 소크라테스에서 지드까지 통독해 낼 수 있었다는 것은, 본디 지지 않으려는 근성에서 비롯된 일이지만, 주의해야 할 것은, 그 분발 정신이라기보다도, 우리가 소박(粗朴)했기 때문이다. 어째서인고 하니, 우리가 좀 더 소박하지 않았더라면, 이토록 방대한 문헌 앞에 돌연 몸을 들이게 된 우리로서, 그 한 권 한 권에 손을 대기 전에, 이토록 방대한 문헌 앞에 별안간 끌려 나오게 된 우리의 운명에 관해 우선 생각하려 했을 것이다. 즉, 문헌을 보기 전에, 문헌의 존재라는 것에 마음을 기울였을 것이라는 말이다. 어차피 짧은 인간 일생 앞에는, 그날까지 전혀 보지도 알지도 못하던 서구 이천 년의 문헌이, 너무도 기이하고 또 방대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것을 어쨌든 손에 잡히는 대로 손을 댔다는 것은, 우리 동포가, 소박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물론 그것은 바람직한 일이기도 하지만, 그 이면에는 또한 다소 슬픈 사정도 없지 않았다.
즉, 통일이니 전체성이니 하고 불리는 것이, 그 자리에 결핍되어 있었다. 바꿔 말하면, 그 서구 이천 년 문헌의 이런저런이, 누군가의 입에 의해 조금이라도 일컬어지기만 하면, 사람들은 그쪽으로 우르르 몰려가, 그것을 한차례 훑어볼 즈음에는 이미 싫증나 있었던 것이다. 거기에는, “자기”라는 것이 심히 희박하고, 일종의 유행이 있었을 따름이라 해도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니다.
이러한 사정은, 메이지·다이쇼라는, 볼 만한 비평 정신도 없고, 사람들이 그저 섭렵에 분주하던 시기에 그러했고, 비평이 한창인 오늘날에 와서도 여전히 그러하다.
한데, 오늘날 비평이 한창인 까닭이라는 것은, 메이지·다이쇼의 소화불량에 대한 반동이라고도 생각된다. 사람들은 안달하고 또 안달해, 더 더 하고 섭렵을 거듭한 끝에, 점점 소화불량이 심해지고 점점 신경이 곤두서, 그 소화불량이라도 풀어 보고자, 점점 더 섭렵을 일삼지만, 아무래도 소화불량은 풀릴 기색이 없다 하여 갑자기 중조(重曹)를 복용하듯, 비평서로 향하는 것은 아닐까.
이렇게 해서는 “통일”의 요구는 깡그리 잊히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옛날의 소박함조차도, 이제는 “얼이 빠진 소박함”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이 형편이라면, 앞으로 오십 년 뒤의 우리 문학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꺼림칙한 것이 되지 않겠는가.
화로에 불을 일으키고만 있으면 참으로 좋은 사내인 어떤 한 사내가, “근대”니 “불안”이니 하는 말 때문에 정신을 빼앗긴 듯 보이고, 게다가 그것이 어지간히 무리도 아닌 일로 보인다고 하면, 어쩐지 뒤가 서늘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 한번 시험 삼아, 한 번쯤 서구고 뭐고 깡그리 잊어 보면 어떨까. 목욕탕에라도 느긋이 들어가, 손톱이라도 깎아 보면 어떨까. 아침에는 일찍 일어나, 사카키(榊, 신도 신목)를 올리고 가시와데(柏子, 신도 박수)를 치며, 나무 향기 풍기는 툇마루에서 양지 쪼이기라도 해 보면 어떨까. 즉, 우리가 우리인 까닭의 자리로 되돌아가, 거기서 다시금 천천히 손발을 움직이기 시작하면 어떻겠는가.
라고 한다고 해서, 따로 다도(茶道)를 배우라는 것도 아니고, 일본 고래의 문학에 매달리라는 것도 아니다. 다만 이미 자기 입에 무엇이 맞는지조차 알 수 없게 되어 있을 만큼, 이것저것 더 먹으려고는 하지 않는 편이 좋다는 말이다.
자기다운 감성을 떠나서는, 이제 문학이고 뭐고 없을 것이다. 자기가 좋아하는 작품을 애독하는 것도 아니고, “이것도 한 번쯤 읽어 두어야 한다” 식의 공부는, 적어도 창조적 분위기를 가져다주는 것은 못 된다.
이렇게 말하다 보면, 심히 뻔한 말을 하고 있는 데 지나지 않는다고 보일 수도 있겠으나, 이렇게 말해야 할 만한 실정을 떠올려 보면, 뻔한 말일 뿐이라고 잘라 치울 수도 없을 것이다.
자네가 좋아하는 게 뭔가. 말 못 하겠나. 그럼, 자네가 지금 필요로 하는 게 뭔가. 말 못 하겠나. 그럼 우선 잠을 자게. 푹 자게. 이윽고 눈을 떴을 때, 들리는 소리는 신선할 것이다. 거기에, 창조의 인자(因子)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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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데 우리네 생활이라는 것을 살펴보면,
영화로 할까, 요세(寄席, 만담 극장)로 할까, 술이냐 여자냐 당구냐, 트럼프냐, 장기·바둑이냐, 어느 쪽이 좋을거나…… 방 안에 가만히 들어앉아 이야기나 하면 좋으련만, 그것도 영 신통치 않고 말이지…… 독서나 할까, 그건 별로 흥미도 없지만, 그렇다고 빈둥대고 있을 수만도 없는 노릇이고…… 곤란하군그래.
어차피 인간이 하는 일이란, 수가 빤한 것이다. 인간 행사의 카탈로그를 펴 들고, 이것이냐 저것이냐 망설이는 모습만큼 어리석은 꼴도 없다. 좋아하는 일이 하나 있고, 끊임없이 거기에 마음이 쏠릴 때 비로소, 인생의 변화도 느껴지는 법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지금 우리에겐 “집단”의 목소리가 너무도 귀에 가까이 울려, 각자 각양의 한가(閑暇) 같은 건 좀처럼 있을 리도 없다. 그것은 깊숙한 안방에 있건 길거리에 있건 매한가지다.
이리하여 우리네의 의미 없는 잡담이 태어난다. 무릇 어린애 같은 치우(痴愚, 어리석음)가 펼쳐진다. 의미 없는 쪽이 의미 있는 쪽보다 의미 있어 보이는 일조차도, 요즈음 결코 드물지 않다. 가십이 모든 것이다. 결벽이 자랑인 어떤 분은, 고물상에서 사 온 유화를 수세미로 박박 문지르셨다. 사람들 앞에서 코딱지를 환약처럼 빚는 만화를 그리신 아무개 분은, 그 후로는 그럴 필요도 없을 때까지 환약을, 이번에는 떳떳이 빚으신다. 세상은 온통 성격 파산. 유쾌하구만, 도 못 된다.
아아, 돌아가고 싶다, 돌아가고 싶다, 응애 하고 태어난 내 집!
교제를 좁혔다고 해서 마음이 가라앉는 것도 아니고, 교제를 넓혔다고 해서 마음이 가라앉는 것도 아니다. 에잇, 되는 대로 가자고, 배짱을 정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본회(本懐, 본분)인 것이다. “인간 하나하나의 불행이란, 그가 자기 방 안에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라 함은 파스칼의 지언(至言)이다. 그 말이 맞다고 누구나 생각한다. 그러나 참으로 이 한마디를 면할 인간 하나하나의 불행이라는 것은 없다. (기근 같은 불행도 있긴 하지만, 그것은 어느 한 지방이라 할까 한 나라라 할까, 어쨌든 인간 하나하나의 불행은 아니므로 따로 떼어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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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당초 산문예술에 마음을 빼앗기기 전에, 너무 안달하거나 야심에 차거나 하지만 않았더라면, 시예술은 좀 더 느긋이 길러져 왔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은, 우리 문학에도 우리 생활에도, 좋은 일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시 쪽이, 소설보다도 사람을 산뜻한 기분으로 만드는 데에는 적합하다. 게다가 인간에게 인상이 있고 관념이 없는 일은 있어도, 실제로 말해 관념이 있고 인상이 없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임에 비추어, 시가 소설보다 관념 쪽이라기보다 도리어 인상 쪽의 일임을 보아, 시가 좀 더 잘 개척된 뒤에 소설이 관심을 받기에 이르는 것이 사물의 순서이기도 했을 것이다. 시가 도중에 소설에 자리를 내어 준다는 것은, 늘 너무도 실리적인 심정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은, 인상이라는 것이, 충분히 끝까지 다듬어지고 처리된 뒤가 아니면, 관념이니 이지(理智)니 하는 활동은 충분히는 되지 않으며, 된다 한들 그것은, 종종 예술로서가 아니라 이루어지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고 해서, 그러면 소설을 그만두고 시로 옮겨 가시오, 라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루어진 사정은 이루어진 사정이다. 그러나 앞서 말한 “얼이 빠진 소박함”이, 앞으로 잘 추슬러 자리를 잡아 간다 치면, 아마도 시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는 일도 되리라 생각된다. 다만 시라 한들, 시단의 현 상태로는 안 된다. 시단은 공부가 부족하다. 그것은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산문보다도 시를 손쉽다고 여기는 세간의 상식이 화근이 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요즈음 시가 손쉽지 않다는 점이, 시단이며 비평단이며에서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지만, 일반적으로 시인은 여전히 공부가 부족하다. 시인 쪽이 소설가보다, 자칫 기분에 좌우되기 쉽다거나, 마음이 너무 무르다거나, 소설보다도 시 책은 적다거나, 번역도 소설 것에 비하면 불완전한 것이 많다거나 하는, 자못 그럴 만한 갖가지 이유도 있겠으나, 시인은 모름지기 각고면려해야 마땅하리라. 견실한 시 책이, 차츰차츰 나오는 일이라도 된다 치면, 문단은 좀 더 살 만한 곳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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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서점에 잡지를 가져가면, 우선 대체로 한 권씩의 값을 합한 값을 매긴다. 그런데 질 나쁜 고물상에 잡지를 내놓으면, 다짜고짜 끈으로 묶어 저울에 단다. 오늘날 저널리즘은, 시고(詩稿)에 대해서 이 고물상과 닮아 있다. 소설 원고료에 준해, 시 원고료를 정하는 것이다. 이것도, 시가 충분히 발전하지 못하는 먼 원인의 하나다. “시로는 먹고살 수 없다”라는 말은, 동서고금에 있는 말이긴 하지만, 일본의 오늘날처럼, 담뱃값도 안 나온다는 형국은 동서고금에 없다. 게다가 또, 시로는 먹고살 수 없다는 것은, 시로 먹고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왜냐 하면, 마치 “시로는 먹고살 수 없다”라고 말할 때, “시로 먹고살아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듯한 낯빛을 이따금 보게 되니 말이다. 으레 “뜬세상은 고달프다”라는 것은 자주 “뜬세상은 고달파야만 한다”라는 식으로 발음되는 것이다. 어림도 없는 일이다. 뜬세상이라 한들, 고달프지 않게 살 수 있다면 고달프지 않은 편이 좋다. 뻔한 말을 두 번 하게 만들지 마라, 아아 운명이로다 하고는 아무것도 안 하면서 꾸물대는 인간은 우글우글하다.
어쨌든, 한 번에 고쳐지지는 않을지언정, 가급적이면 나은 쪽으로, 시고의 일도 조금은 헤아림에 넣지 않으면, 안 될 일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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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서의 목록에 관하여.
우리 번역계는, 매우 한쪽으로 치우쳐 있다. 셰익스피어가 아니면, 그렇잖으면 시류 편승작이냐 하는 식이다. 저 친근한 느낌이 드는, 그 나라의 처녀도 읽고, 아버지도 점원 아이도 읽으며 게다가 걸작이기도 한 그러한 것은, 거의 번역되는 일이 없다. 이것이 얼마나 슬퍼해야 할 일인지는, 아는 사람은 안다, 너무도 슬퍼서 지금 여기서 간단히 그 증명을 할 수는 없다. 요컨대 우리 번역계는, 야위고 뾰족하게 솟아 있는 것이다.
어느 쪽이든, 메이지 이래 우리 문화는 소화불량인 것이며, 어머니가 만든 오믈렛처럼 맛있다 맛없다, 하여간에 납득이 가는 요리라는 것은 먹어 본 적이 없는 문화이다. 조금도 안목이라는 것이 없으니, 어린아이에게 “커서 뭐가 되겠냐” 묻자 “대장”이라 답하듯, “아, 이게 대장인가” 싶어 A라는 책을 읽고, “이것이야말로 대장이다” 싶어 B라는 책을 읽는다. 세이요켄(精養軒, 우에노 양식당)은 맛있는 곳이고, 어머니의 오믈렛은 맛없다는 건가?
하지만, 어느 나라에건 어머니의 오믈렛처럼, 그것이 괴테나 단테처럼 빛나지는 않을지언정, 납득이 가는 시인이라는 것은 있는 법이다. 그것을 음미해 보지도 않고, 일 년 내내 괴테와 단테로는, 사실 무슨 말인지 알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 일은 언젠가 또 구체적으로 자세히 쓰려고 하는데, 이러한 번역계의 편파(偏頗)도, 앞으로 차차 고쳐져 간다 치면, 다음에는 어머니의 오믈렛 차례가 될 것이라 생각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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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소화불량의 복잡함이라면, 차라리 어수룩한 박눌(朴訥) 쪽이 그래도 낫다 싶으니, 잠시나마 산뜻해지는 것만으로도 그나마 다행이다.
(1934, 1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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