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 of 4

원문

김만중이 남해 유배 시절 어머니 윤씨 부인의 한가함과 근심을 덜어 주기 위하여 지었다고 전해지는 한국 양반 소설의 대표적 작품이다.

구운몽(九雲夢) 상권

천하에 이름난 산이 다섯 있으니, 동쪽에는 동악 태산(泰山)이요, 서쪽에는 서악 화산(華山)이요, 남쪽에는 남악 형산(衡山)이요, 북쪽에는 북악 항산(恒山)이요, 가운데에는 중악 숭산(嵩山)이라. 오악 가운데 오직 형산이 가장 중국 안쪽 깊숙이 자리하여, 구의산(九嶷山)이 그 남쪽에 있고 동정강이 그 북쪽에 있으며 소상강(瀟湘江) 물이 그 세 면을 감아 도니, 참으로 제일 수려한 곳이라. 그 한가운데 축융(祝融), 자개(紫蓋), 천주(天柱), 석름(石廩), 연화(蓮花)의 다섯 봉우리가 가장 높이 솟아 수목이 삼엄하고 운무가 자욱하니, 날이 맑고 밝지 않으면 사람이 그 어렴풋한 모습조차 보지 못하더라.

진나라 때 선녀 위부인(魏夫人)이 옥황상제의 명을 받아 선동(仙童)과 옥녀(玉女)를 거느리고 이 산을 지키니, 신령한 일과 기이한 행적은 이루 헤아릴 수 없더라.

당나라 시절에 한 노승(老僧)이 있어 서역 천축국(天竺國)에서 건너와 연화봉(蓮花峰)의 산수 경치를 사랑하여, 제자 오륙백 인을 거느리고 연화봉 위에 법당을 크게 지으니, 더러는 육여화상(六如和尙)이라 부르고, 더러는 육관대사(六觀大師)라 불렀다.

그 대사가 대승법(大乘法)으로 중생을 가르치고 귀신을 제어하니, 사람들이 모두 공경하여 살아 있는 부처가 세상에 나왔다 일컬었다. 무수한 제자 가운데 성진(性眞)이라 하는 스님이 있어 삼장경문(三藏經文)에 모르는 것이 없고 총명하여 당할 자가 없으니, 대사가 극히 아끼어 입던 옷과 먹던 바리때를 성진에게 전하고자 하더라.

대사가 매일 모든 제자와 더불어 불법을 강론하더니, 동정 용왕(洞庭龍王)이 변화하여 백의노인이 되어 법석(法席)에 참예하여 경문을 듣는지라.

대사가 제자를 불러 말하기를,

“나는 늙고 병들어 산문 밖을 나서지 못한 지 십여 년이니, 너희 제자 중에 누가 나를 위하여 수부(水府)에 들어가 용왕께 회사(回謝)하고 돌아오겠느냐?”

성진이 두 번 절하며 말하기를,

“소제(小弟)가 비록 불민하오나 명을 받들어 다녀오겠나이다.”

대사가 크게 기뻐하며 성진을 보내셨다. 성진은 칠근 가사(袈裟)를 떨쳐 입고 육환장(六環杖)을 둘러 짚은 채 표연히 동정을 향해 떠났다. 이윽고 문을 지키는 도인이 대사께 아뢰기를,

“남악 위부인이 여덟 선녀를 보내어 문밖에 와 있나이다.”

대사가 명하여 부르시니 팔선녀가 차례로 들어와 예를 갖추고 꿇어앉아 부인의 말씀을 사뢰기를,

“대사는 산 서편에 계시고 저희 부인은 산 동편에 계시어 서로 멀지 않건만, 자연 다사하여 한 번도 법석에 나아가 경문을 듣지 못하였으니, 처인(處人)의 도리도 없고 교인(交人)의 의도 없사옵기에, 시비(侍婢)를 보내어 안부를 여쭙고, 겸하여 천화선과(天花仙菓)와 칠보문금(七寶文錦)으로 구구한 정성을 표하나이다.”

하고, 각각 선과(仙菓)와 보패(寶貝)로써 눈 위로 높이 들어 대사께 드리니, 대사가 친히 받아 시자(侍者)를 주어 불전에 공양하고, 또 합장하여 사례하며 말하기를,

“노승이 무슨 공덕이 있기에 이토록 상선(上仙)의 성궤(盛饋)를 받는고.”

하고, 이에 큰 잔치를 베풀어 팔선녀를 대접하여 보내니라.

팔선녀가 대사께 하직하고 산문 밖에 나와 서로 손을 잡고 이르되,

“이 남악의 천 갈래 산 한 줄기 물이 다 우리 부인 집 정계(庭界)였더니, 육관대사 거처하신 후로는 변동이 홍구(鴻溝) 동서로 나뉜 듯 되어, 연화봉의 빼어난 경치를 지척에 두고도 구경하지 못한 지 오래로다. 이제 우리 부인의 명을 받아 이 땅에 왔으니 천재일시(千載一時)라. 또한 봄빛이 아리땁고 산 일이 저물지 아니하였으니, 이 좋은 때를 이용하여 저 높은 곳에 올라 흥을 타며 시를 읊어 다소 풍경을 구경하고 돌아가 궁중에서 자랑함이 어떠하냐?”

하고, 서로 손을 이끌어 천천히 거닐며 올라가 폭포 앞에서 흐름을 바라보고, 물을 따라 내려와 석교(石橋) 위에 쉬니, 이때가 마침 봄 삼월이라. 화초는 만발하고 구름은 자욱한데, 봄새 소리에 봄흥이 호탕하고 물빛이 사람을 만류하는 듯하니, 팔선녀는 저절로 심신이 산란하고 봄 흥취가 일어 차마 떠나지 못하여, 석교에 걸터앉아 좌우 경치를 희롱하니, 맑은 웃음소리는 물소리와 어우러지고, 고운 홍장(紅粧)은 물가에 조요(照耀)하여 의연히 한 폭의 미인도가 손 아래 펼쳐진 듯하더라.

온갖 희롱을 하며 떠날 줄 모르더니, 이때 성진이 동정에 가서 물결을 헤치고 수정궁(水晶宮)에 들어가니, 용왕이 크게 기뻐하여 문무 제신을 거느리고 궁문 밖에 나와 맞아들여 자리를 정한 후에, 성진이 땅에 엎드려 대사의 말씀을 낱낱이 아뢰니 용왕이 공경하며 예를 갖추고 잔치를 크게 베풀어 성진을 대접하니, 선관(仙官)의 음식은 인간 음식과 같지 아니하더라.

용왕이 잔을 들어 성진에게 세 번 권하며 말하기를,

“이 술이 좋지 못하나 인간 술과는 다른지라. 과인이 권하는 정을 생각하라.”

성진이 두 번 절하며 말하기를,

“술은 광약(狂藥)이라, 불가의 큰 경계이오니 감히 먹지 못하겠나이다.”

용왕이 지성으로 권하니 성진이 감히 사양하지 못하여 세 잔 술을 마신 후에, 용왕께 하직하고 수궁에서 출발하여 연화봉을 향해 가더니, 연화산 아래 당도하니 취기가 크게 올라, 홀연 생각하기를,

‘사부께서 만일 내가 취한 모습을 보시면 분명 중죄를 내리시리라.’

하고, 가사를 벗어 모래 위에 놓고 손으로 맑은 강물을 움켜 낯을 씻더니, 문득 기이한 향내가 바람길을 따라 진동하니 마음이 저절로 호탕하여지더라.

성진이 괴이하여 말하기를,

“이 향내는 예사 초목의 향내가 아니로다. 이 산중에 무슨 기이한 것이 있는가?”

하고, 다시 의관을 정제하고 길을 찾아 올라가더니, 이때 팔선녀가 석교 위에 앉아 있는지라. 성진이 육환장을 놓고 합장하여 두 번 절하며 말하기를,

“여러 보살님은 잠깐 소승의 말씀을 들으소서. 천승(賤僧)은 연화봉 주장(住丈) 육관대사의 제자로서 사부의 명을 받들어 용궁에 다녀오는 길인데, 이 조그만 다리 위에 여러 보살님이 앉아 계시니 천승이 갈 길이 없사와 비나이다. 잠깐 옮겨 앉으시어 길을 빌려 주소서.”

팔선녀가 대답하기를,

“첩 등은 남악 위부인의 시녀이옵더니, 부인의 명을 받들어 연화봉 주장 육관대사께 문안하옵고 돌아오는 길에 이 다리 위에서 잠깐 쉬고 있사옵니다. 예문에 하기를 ‘남자는 왼편으로 가고, 여자는 오른편으로 간다.’ 하오니, 첩 등이 먼저 와 앉아 있사오니, 원컨대 화상은 다른 길을 구하옵소서.”

하거늘, 성진이 대답하기를,

“물은 깊고 다른 길이 없사오니 어디로 가라 하시나이까?”

선녀가 대답하기를,

“옛날 달마 존자(達磨尊者)라 하는 대사는 갈대 잎을 타고도 큰 바다를 육지처럼 왕래하였으니, 화상이 진실로 육관대사의 제자이실진대 반드시 신통한 도술이 있을 것이니, 어찌 이 같은 조그마한 물을 건너기를 꺼리시며, 여자들과 더불어 길을 다투시나이까?”

하니, 성진이 웃으며 말하기를,

“여러 낭자의 뜻을 보오니, 이는 반드시 값을 받고 길을 빌려 주고자 하시는 것이니, 본래 가난한 중이라 다른 보화는 없사옵고, 다만 행장에 간직한 백팔 염주가 있사오니, 원컨대 이것으로 값을 드리겠나이다.”

하고, 목의 염주를 벗어 손으로 만지더니 도화(桃花) 한 가지를 던지거늘, 팔선녀가 그 꽃을 구경하더니, 꽃이 변화하여 네 쌍 구슬이 되어 생광(生光)은 대지에 가득 차고 서기(瑞氣)는 반공(半空)에 솟아오르니, 향내가 천지를 진동하더라.

팔선녀가 그제야 기동하며 크게 말하기를,

“과연 육관대사의 제자로다.”

하며, 각각 하나씩 손에 쥐고 성진을 서로 돌아보며 웃으며 바람을 타고 공중을 향해 사라지더라. 성진이 홀로 석교 위에서 눈을 들어 바라보니 팔선녀는 간데없는지라.

이윽고 채운(彩雲)이 흩어지고 향내가 끊어지니, 성진이 마음을 진정하지 못하여 어리둥절하고 취한 듯 돌아와 용왕의 말씀을 대사께 아뢰니, 대사가 말하기를,

“어찌 늦었느냐?”

성진이 대답하기를,

“용왕이 심히 만류하옵기에 차마 뿌리치지 못하여 지체하였나이다.”

대사가 대답하지 아니하고,

“네 방으로 가라.”

하시니, 성진이 돌아와 빈방에 혼자 누우니, 팔선녀의 말소리가 귀에 쟁쟁하고 고운 얼굴빛이 눈에 아른거려 앞에 앉은 듯, 곁에 다가선 듯 마음이 황홀하여 진정하지 못하는지라. 문득 생각하되,

‘사내로 태어나서 어려서는 공명의 글을 읽고, 자라서는 요순(堯舜) 같은 임금을 섬겨, 나가면 백만 대군을 거느려 적진에 횡행하고, 들어서는 백관의 재상이 되어 몸에는 금포(金袍)를 입고, 허리에는 금인(金印)을 차고, 인주(人主)를 보좌하고 백성을 진무하며, 눈으로는 아리따운 미색을 희롱하며, 귀로는 좋은 풍류 소리를 듣고, 영화를 당대에 자랑하고 공명을 후세에 전한다면 진실로 대장부의 일이어늘, 슬프다! 우리 불가는 다만 한 바리때 밥과 한 잔 정화수요, 수삼 권 경문과 백팔과 염주뿐이요, 그 도가 허무하고 그 덕이 적멸하니, 가령 도통을 얻은들 삼혼구백(三魂九魄)이 한 번 불꽃 속에 흩어지면 누가 한낱 성진이라는 사람이 세상에 났던 줄을 알리오.’

이러구러 잠을 이루지 못하여 밤이 이미 깊어지는지라. 눈을 감으면 팔선녀가 앞에 앉아 있고 눈을 떠 보면 문득 간 데 없는지라. 성진이 크게 뉘우쳐 말하기를,

“불법 공부는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이 제일이어늘, 이 사심(私心)이 이토록 하니 어찌 전정(前程)이 있으리오?”

하고, 즉시 염주를 굴리며 염불을 하더니, 홀연 창밖에서 동자가 급히 불러 말하기를,

“사형(師兄)은 주무시나요? 사부께서 부르시나이다.”

성진이 크게 놀라 동자를 따라 바삐 들어가니 대사가 모든 제자로 시위(侍衛)하고 촛불이 낮 같은지라. 대사가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성진아, 네 죄를 아느냐?”

성진이 크게 놀라 신을 벗고 뜰에 내려 땅에 엎드려 말하기를,

“소제가 사부를 섬긴 지 십 년이 넘었으되 조금도 불순불공(不順不恭)한 일이 없사오니, 죄를 알지 못하겠나이다.”

대사가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네가 용궁에 가서 술을 마셨으니 그 죄도 있거니와, 오다가 석교 위에서 팔선녀와 더불어 언어를 희롱하고 꽃을 꺾어 주었으니 그 죄 어떠하며, 돌아온 후 선녀를 그리워하여 불가의 경계는 전혀 잊고 인간의 부귀를 생각하였으니, 그리하고서 공부를 어찌 하려느냐. 네 죄 중하니 이곳에 있지 못할 것이니, 네 가고자 하는 데로 가라.”

성진이 머리를 두드리며 울며 말하기를,

“소제의 죄 있사오니 아뢸 말씀이 없거니와, 용궁에서 술 마신 것은 주인이 강권한 것이요, 석교에서 수작(酬酌)한 것은 길을 빈 일이옵고, 방에 들어가 망념이 생각된 것은 있사오나 즉시 그른 줄을 알아 다시 마음을 바르게 하였사오니, 무슨 죄가 있나이까? 설사 죄가 있사온들 달초(撻楚)나 하여 경계하실 것이어늘, 박절(迫切)하게 내치시니, 소제가 열두 살에 부모를 버리고 친척을 떠나 사부임께 의탁하여 머리를 깎아 중이 되었사오니, 그 의를 이를진대 부자(父子)의 은혜가 깊고 사제(師弟)의 분이 중한지라, 사부를 떠나 연화 도량을 버리고 어디로 가라 하시나이까?”

대사가 말하기를,

“네 마음이 크게 변하였으니 산중에 있어도 공부를 이루지 못할 것이니, 사양하지 말고 가라. 연화봉을 다시 생각할진대 찾을 날이 있으리라.”

하고, 이에 크게 소리하여 황건역사(黃巾力士)를 불러 분부하여 말하기를,

“이 죄인을 영거(領去)하여 풍도(酆都)에 가서 염왕(閻王)께 부치라.”

성진이 이 말씀을 듣고 간장이 떨어지는 듯하는지라. 머리를 두드리며 눈물을 흘리고 사죄하여 말하기를,

“사부, 사부님은 들으소서. 옛날 아난 존자(阿難尊者)는 창가(娼家)에 가 창녀와 동포(同飽)하였으되 석가여래께서 오히려 죄하지 아니하셨으니, 소제가 비록 가벼운 죄가 있사오나 아난 존자에 비할진대 오히려 경하거늘, 어찌 연화봉을 버리고 풍도로 가라 하시나이까?”

대사가 말하기를,

“아난 존자는 비록 창녀와 동포하였으나 그 마음은 변하지 아니하였거니와, 너는 한 번 요색(妖色)을 보고 전혀 본심을 잃었으니, 어찌 아난 존자에 비하리오?”

성진이 눈물을 흘리며 마지못하여 부처와 대사께 하직하고 사형(師兄)과 사제(師弟)를 이별하고, 사자(使者)를 따라 수만 리를 행하여 음혼관(陰魂關) 망향대(望鄕臺)를 지나 풍도에 들어가니, 문을 지키는 군졸이 말하기를,

“이 죄인은 어디 죄인이오?”

황건역사가 대답하기를,

“육관대사의 명으로 이 죄인을 잡아 오노라.”

귀졸(鬼卒)이 대문을 열거늘, 역사(力士)가 성진을 데리고 삼나전(三羅殿)에 들어가 염라대왕께 뵈오니, 대왕이 말하기를,

“화상이 몸은 비록 연화봉에 매어 있었으나 화상의 이름은 지장왕(地藏王) 향안전(香案前)에 있었으니, 신통 도술로 천하 중생을 건질까 하였더니, 이제 무슨 일로 이곳에 왔느냐?”

성진이 크게 부끄러워 아뢰기를,

“소승이 불명(不明)하여 사부께 득죄하고 왔사오니, 원컨대 대왕은 처분하옵소서.”

이윽고 또 황건역사가 여덟 죄인을 거느리고 들어오거늘, 성진이 잠깐 눈을 들어 보니 남악산 팔선녀러라.

염라대왕이 또 팔선녀에게 묻기를,

“남악산의 빼어난 경치가 어떠하기에 버리고 이런 데 왔느냐?”

선녀 등이 부끄러움을 머금고 대답하기를,

“첩 등이 위부인 낭낭의 명을 받들어 육관대사께 문안하옵고 돌아오는 길에 성진 화상을 만나 문답한 말씀이 있더니, 대사가 첩 등으로써 좋은 경계를 더럽혔다 하여 위부인께 이첩(移牒)하시어 첩 등을 잡아 보내셨사오니, 첩 등의 생침고락(生寢苦樂)이 다 대왕의 손에 매였사오니, 원컨대 낙지(落地)를 점지하옵소서.”

염라대왕이 즉시 지장왕께 보장(報狀)하고 사자 아홉 인을 명하여 성진과 팔선녀를 영솔하여 인간으로 보내니라.

이야기를 바꾸어, 성진이 사자를 따라가더니 문득 큰 바람이 일어나 공중에 떠올라 천지를 분간하지 못하다가, 한 곳에 다다르니 바람이 그쳤다. 정신을 수습하고 눈을 떠 보니 비로소 땅 위에 서 있었다.

한 고을이 보이니 청산이 사면을 둘러싸고 녹수는 잔잔한 가운데 마을이 있었다. 사자는 성진을 그 자리에 머물게 하고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 성진이 혼자 서서 들으니 두세 여인이 서로 이야기하기를,

“양처사 부인이 오십이 넘은 후에 잉태하여 임신한 지 오래되었건만 지금껏 해산하지 못하니 참으로 이상한 일이로다.”

하더라.

이윽고 사자가 성진의 손을 잡고 말하기를,

“이 땅은 곧 당나라 회남도 수주 고을이요, 이 집은 양처사의 집이라. 처사는 네 부친이요, 부인 유씨는 네 모친이라. 네 전생의 인연으로 이 집에 자식이 되었으니 때를 잃지 말고 빨리 들어가라.”

하거늘, 성진이 들어가며 보니 처사는 갈건을 쓰고 학창의를 입고 화로를 대하여 약을 달이고 있었다. 부인은 바야흐로 신음하더니 사자가 성진을 재촉하여 뒤에서 밀치거늘, 성진이 땅에 엎드러지니 정신이 아득하여 천지가 뒤바뀌는지라. 급히 소리를 질러 말하기를,

“살려라! 살려라!”

하니 목소리가 목구멍 안에 갇혀 말을 이루지 못하고, 그저 갓난아기 우는 소리가 날 뿐이었다. 부인이 이에 아기를 낳으니 남자아이였다. 성진은 오히려 연화봉에서 노닐던 마음이 역력하더니, 점점 자라 부모를 알아본 후로는 전생의 일을 아득히 생각지 못하였다.

양처사가 아들을 낳은 후에 극진히 사랑하여 말하기를,

“이 아이의 골격이 청수하니, 천상 신선이 귀향 온 것이로다.”

하고 이름을 소유라 하고 자는 천리라 하였다. 양소유가 십여 세에 이르러 얼굴은 옥 같고 눈은 샛별 같아 풍채가 준수하고 지혜가 무궁하니 참으로 대인군자였다.

하루는 처사가 부인에게 말하기를,

“나는 세속 사람이 아니요, 봉래산 선관으로서 부인과 더불어 전생의 인연이 있어 내려왔더니, 이제 아들을 낳으셨으니 나는 봉래산으로 돌아가거니와 부인은 말년의 영화를 보시고 부귀를 누리소서.”

하고 학을 타고 공중으로 올라갔다.

처사가 승천한 후에 양소유가 스물 살이 되어 얼굴은 백옥 같고, 글은 이적선 같고, 글씨는 왕희지 같고, 지혜는 손빈과 오기도 미치지 못할 정도였다.

하루는 양소유가 모친께 아뢰어 말하기를,

“들으오니 과거가 있다 하오니 소자가 모친 슬하를 떠나 황성에 나아가고자 합니다.”

유씨는 그 뜻이 녹록하지 않음을 보고 만 리 밖으로 보내기 민망하였으나, ‘공명을 얻어 문호를 보전하려 함이로다’ 하고 즉시 금붕채를 팔아 행장을 차려 주셨다. 양소유가 모친께 하직하고 나귀 한 필과 서동 셋을 데리고 길을 나섰다.

한 곳에 이르니 수양버들이 늘어진 곳에 작은 누각이 있어 단청이 조요하고 향기가 진동하니 이 땅은 화주 화음현이었다. 양소유가 봄 흥취를 이기지 못하여 버들가지를 비껴 잡고 양류사를 지어 읊으니 그 글에 이르기를,

양류 푸르러 베를 짠 듯하니 楊柳靑如織
긴 가지가 그린 누를 쓸어 내리도다. 長條拂花樓
원컨대 부지런히 심으소서. 願君勸種意
이 버들이 가장 풍류롭도다. 此樹最風流

또 읊기를,

양류야, 어찌 저리 푸르고 푸르냐? 楊柳何靑靑
긴 가지가 비단 들보를 쓸어 내리도다. 長條拂綺極
원컨대 그대는 꺾지 마소서. 願君莫攀折
이 나무가 가장 다정하도다. 此樹最多情

하고 읊으니 그 소리가 청아하여 옥을 깨치는 듯하더라.

이때에 그 누각 위에 옥 같은 처자가 있으니 바야흐로 낮잠을 자다가 그 청아한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깨어 생각하기를,

‘이 소리는 필시 인간의 소리가 아닐세. 반드시 이 소리의 주인을 찾으리라.’

하고 베개를 밀치고 주렴을 걷어 올려 옥난간에 기대어 사방을 두루 볼 즈음에, 홀연 양소유와 눈이 마주쳤다. 그 처자의 눈은 가을 물 같고 얼굴은 빙옥 같으며, 머리채가 구불구불 귀밑까지 드리우고, 옥비녀가 기울어져 옷깃에 걸친 양은 막 낮잠 깬 흔적이라. 그 아름다운 거동을 어이 다 헤아리리오.

이때에 서동이 객점에 가 사처를 잡고 와서 양소유께 아뢰어 말하기를,

“저녁밥이 다 되었사오니 행차하옵소서.”

할 즈음에, 그 처자가 부끄러워 주렴을 내리고 안으로 들어가거늘, 양소유가 홀로 누 아래 서서 덧없이 바라보니 지난날 빈 누각의 향기뿐이로다. 지척이 천 리 같고 약수가 멀어지니 양소유가 어찌할 수 없어 서동을 데리고 객점으로 돌아와 간장만 태우더라.

대개 이 처자는 성이 진씨요 이름은 채봉이니 진어사의 딸이라. 일찍 어머니를 잃고 동생이 없었다. 그 부친이 서울로 올라가 벼슬하는 까닭에 소저가 홀로 종만 데리고 머물더니, 뜻밖에 양소유를 만나 그 풍채와 재주를 보고 심신이 황홀하여 말하기를,

“여자가 장부를 섬기기는 인간의 큰일이요 백 년 고락이라. 옛날 탁문군이 사마상여를 찾아갔으니 처자의 몸으로 배필을 청하기는 마땅치 않거니와, 그 상공의 거처와 성명을 묻지 않았다가 후에 부친께 아뢰어 중매를 보내려 한들 어디 가 찾으리오.”

하고 즉시 편지를 써서 유모에게 주어 말하기를,

“객점에 가서 나귀를 타고 이 누각 아래서 양류사 읊던 상공을 찾아 이 편지를 전하고, 내가 몸을 의탁하고자 하는 뜻을 알게 하라.”

유모가 말하기를,

“이후에 어사또가 노하여 물으시면 어찌하리이까?”

소저가 말하기를,

“그것은 내가 당할 일이니 염려 말라.”

유모가 말하기를,

“그 상공이 이미 배필을 정하였으면 어찌하리이까?”

소저가 한참 생각하다가 말하기를,

“불행히 배필을 정하였으면 이 상공의 소첩이 되어도 부끄럽지 아니하니라. 또 그 상공을 보니 아직 어려 취처치 아니하였을 것이니 의심 말고 가라.”

유모가 객점으로 가더니, 이때에 양소유가 객점 밖에서 두루 거닐며 글을 읊다가 늙은 할멈이 양류사 읊던 나귀를 찾음을 보고 바삐 나가 물어 말하기를,

“양류사는 내가 읊었거니와 무슨 일로 찾는가?”

유모가 말하기를,

“여기서 드릴 말씀이 아니오니 객점으로 드시지요.”

양소유가 유모를 이끌고 객점에 들어가 급히 물으니 유모가 말하기를,

“양류사를 어디서 읊으셨습니까?”

답하기를,

“나는 먼 곳 사람으로 마침 한 누각을 보니 버들의 봄빛이 볼 만하기에 흥에 겨워 한 시를 읊었거니와 어찌 묻는가?”

유모가 말하기를,

“낭군이 그때 상면한 사람이 있으십니까?”

양소유가 말하기를,

“마침 하늘 신선이 누각에 있어 아름다운 거동과 기이한 향내가 이제까지 눈에 선하여 잊지 못하노라.”

유모가 말하기를,

“그 집은 진어사 댁이요, 처자는 우리 소저옵거니와, 소저가 마음이 총명하고 눈이 밝아 사람을 잘 아는지라, 잠깐 상공을 보시고 몸을 의탁하고자 하오나 어사가 바야흐로 경성에 계시니 장래에 아뢰어 중매를 통하고자 한들 상공이 한번 떠난 후에 종적을 찾을 길이 없어 노첩으로 하여금 거처와 성명 그리고 취처 여부를 알고자 하여 왔나이다.”

양소유가 크게 기뻐하여 말하기를,

“내 성은 양씨요, 이름은 소유요, 집은 초나라 수주 고을이요, 나이가 어려 배필을 이루지 못하였고, 노모가 계시니 혼례를 치르기는 반드시 부모께 아뢰어 행하려니와 배필을 정하기는 한마디로 결단하리로다.”

유모가 크게 기뻐하여 봉한 편지를 내어 드리거늘 뜯어 보니 양류사에 화답한 글이었다.

그 글에 이르기를,

누각 앞에 양류를 심기는 樓頭種楊柳
낭군의 말을 매어 두려 함이로다. 擬繫郞馬住
어찌 이 버들을 꺾어 채찍을 만들어 如何折作革便
장대한 길로 가기를 재촉하는고? 催向章臺略

하였더라.

양소유가 이 글을 보고 탄복하여 말하기를,

“옛날의 왕우군, 이학사라도 미치지 못하리로다.”

즉시 채전을 꺼내어 한 수 글을 지어 써서 유모에게 주니 그 글에 이르기를,

양류 천만 실이 楊柳千萬絲
실마다 마음을 맺었도다. 絲絲結心曲
원컨대 달 아래 노끈이 되어 願作月下繩
봄소식을 좋이 맺을고. 好結春消息

유모가 받아 품 안에 넣고 점문 밖으로 나가거늘, 양소유가 다시 불러 말하기를,

“소저는 진나라 사람이요, 나는 초나라 사람이라. 산천이 막히니 소식을 통하기 어려운지라. 하물며 오늘은 증표가 없으니 생각컨대 달빛을 타 서로 상대하여 맹약을 정함이 어떠하오?”

노모가 허락하고 가더니 즉시 들어와 소저의 말씀을 양소유에게 전하여 말하기를,

“성예 전에 서로 만나 보기가 극히 미안하오이다마는, 내 그대에게 의탁하고자 한다면 어찌 말씀을 어기오리이까. 밤에 서로 만나 보면 남의 말도 있을 것이요, 부친이 아시면 반드시 죄를 주실 것이니 원컨대 밝은 날 길 위에서 만나 약속을 정하사이다.”

하더라.

양소유가 이 말을 듣고 자탄하여 말하기를,

“소저의 영민한 마음은 남에게 미칠 바가 아니로다.”

하고, 유모를 사례하여 보내었다.

양소유가 객점에서 자려 하나 잠이 오지 않아 닭 우는 새벽을 기다리더니, 이윽고 날이 채 밝으려 하거늘 소유가 서동을 불러 말을 먹이더니, 홀연 천병만마가 쏟아져 들어오는 소리가 나거늘 문득 바라보니 천지가 진동하였다. 소유가 크게 놀라 옷을 떨쳐 입고 문 밖으로 내달아 보니 피란하는 사람들이 분주히 달아나거늘, 소유가 황망히 연유를 물으니, ‘신채 장군 구사랑이라는 사람이 나라를 배반하여 스스로 황제라 칭하고 군병을 조발하였거늘 천자가 진노하사 신채의 대병을 일합에 쳐 파하니 도적이 패군하여 온다’ 하거늘, 소유가 더욱 크게 놀라 서동을 재촉하여 피란하여 도망할 새, 갈 바를 몰라 남천산으로 들어가 피하고자 하여 아이를 재촉해 들어가며 좌우를 살피며 산수를 구경하더니, 문득 보니 절벽 위에 수간의 초당이 있는데 구름이 가리고 학의 소리가 들리거늘, ‘분명 인가가 있다’ 하고 좁은 석경으로 올라 찾아가니 한 도사가 안석에 기대어 양소유를 보고 일어나 물어 말하기를,

“네 피란하는 사람이니 반드시 회남 양처사의 아들이 아니냐?”

양소유가 나아가 두 번 절하고 눈물을 머금고 대답하기를,

“소생은 양처사의 아들이라. 아비를 이별하고 다만 어미만 의지하여, 재주와 학문이 노둔하오나 망령되이 요행으로 과거를 보려 하고 화음 땅에 이르러 난리를 만나 살기를 도모하여 이곳에 왔사옵더니, 오늘 선생님을 만나 부친 소식을 듣사옵기는 하늘이 명하신 일이로소이다. 이제 대인의 궤장을 모셨사오니 바라건대 부친이 어디 계시오며 기체가 어떠하옵신지요? 원컨대 한 말씀을 아끼지 마옵소서.”

도사가 웃으며 말하기를,

“네 부친이 아까 자각봉에서 나와 바둑 두더니 어디로 갔는지 알리오. 얼굴이 아이 같고 수염이 세지 아니하였으니 그대는 염려하지 말라.”

양소유가 또 울며 청하기를,

“원컨대 선생님을 인하여 부친을 보게 하소서.”

도사가 웃으며 말하기를,

“부자간 지정은 중하나 선범이 다르니 보기 어려우니라. 또 삼산이 막연하고 십주가 묘묘하니 네 부친의 거처를 어디서 찾으리오. 네 부질없이 슬퍼하지 말고 여기 머물러 난리가 평정된 후에 내려가라.”

양소유가 눈물을 씻고 앉았더니, 도사가 홀연 벽 위의 거문고를 가리켜 말하기를,

“네 이것을 아느냐?”

소유가 대답하기를,

“소재가 좋아하는 바 있사오나 선생님을 만나지 못하여 배우지 못하였나이다.”

도사가 동자를 시켜 거문고를 내려 만고에 전하지 못한 곡 네 곡조를 가르치니, 그 소리가 청아하고 유량하여 인간에서 듣지 못하던 소리더라. 도사가 소유에게 타라 하시니 양소유가 도사의 곡조를 본받아 타니, 도사가 기특히 여겨 옥통소 한 곡조를 불며 소유를 가르치니 소유가 또 능히 하는지라.

도사가 크게 기뻐하여 말하기를,

“이제 거문고 하나와 통소 하나를 네게 주니 잃지 말라. 훗날에 쓸 때가 있으리라.”

소유가 배사하여 말하기를,

“소생이 선생님을 만나옵기도 부친이 인도하심이요, 또 선생님은 부친의 고인이시니 어찌 부친과 다르시오리까? 바라건대 선생님을 모시어 제자가 되고자 하나이다.”

도사가 웃으며 말하기를,

“인간 공명이 너를 따르는 것이니 네 아무리 해도 피하지 못할지라. 어찌 나 같은 늙은이를 쫓아 속절없이 늙으리오? 말년에 네 돌아갈 곳이 있으니 우리 우대는 아니니라.”

양소유가 다시 두 번 절하여 말하기를,

“소자가 화음 땅에서 진씨 여자와 더불어 혼사를 의논하였더니, 난리에 분산하였사오니 이 혼사는 이루어지겠나이까?”

도사가 웃으며 말하기를,

“네 혼사는 여러 곳에 있거니와 진씨 혼사는 어두운 밤 같으니 생각지 말라.”

양소유가 도사를 모시고 자더니 문득 동방이 밝는지라.

도사가 소유를 불러 말하기를,

“지금은 난리가 평정되었고 과거는 내년 봄으로 뒤로 물러졌느니라. 대부인이 너를 보내고 주야로 염려하시니 빨리 가라.”

하고 행장을 차려 주셨다. 양소유가 아래로 내려와 두 번 절하고 거문고와 통소를 가지고 동구에 나와 돌아보니 그 집이며 도사가 간 데 없더라.

처음에 양소유가 들어갈 때는 춘삼월이라 꽃이 만발하였더니 나올 때에 국화가 만발하였거늘 이상히 여겨 행인에게 물으니 추팔월이라 하였다. 어찌 도사와 하룻밤 잔 것이 이다지도 오래요. 허망한 것이 세상이로다. 양소유가 나귀를 채쳐 몰아 진어사 집을 찾아오니 버들은 간 데 없고 집이 다 쑥밭이었다. 소유가 속절없이 빈 터에 서서 소저의 양류사를 읊으며 소식을 묻고자 하나 인적이 없으니 어찌할 수 없어 객점으로 가 물어 말하기를,

“저 진어사 가속이 어디 갔소?”

주인이 탄식하여 말하기를,

“상공이 듣지 못하셨도다. 진어사는 역적에 참여한 죄로 죽고 그 소저는 서울로 잡혀가더니 혹 죽었다 하고 혹 궁비가 되었다 하니 자세히는 알지 못하나이다.”

양소유가 이 말을 듣고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말하기를,

“남전산 도사가 이르되 ‘진씨 혼사는 어두운 밤 같다’ 하더니, 진소저가 반드시 죽었도다.”

하고 즉시 길을 재촉하여 수주로 향하였다.

이때에 유씨는 소유를 보낸 후에 경성이 어지러움을 듣고 주야로 염려하더니, 문득 소유를 보고 내달아 붙들고 울며 지하 사람을 다시 본 듯하더라.

이러구러 이듬해 봄이 되어 소유가 과거에 가려 하자, 유씨가 말하기를,

“지난해에 황성에 갔다가 난리 분산 중에 위경을 면하고 살아와 모자가 다시 상면하기도 천행이요, 또 네 나이가 어리니 공명은 급하지 않으나 내 너를 만류하지 않음은 이 땅이 좁고 또 궁벽한지라. 네 나이 열여섯이니 배필을 구할 것이로되 가문과 재주와 얼굴이 너와 같은 사람이 없는지라. 경성 춘명문 밖에 자청관 두연사라 하는 사람은 내 외사촌이라. 지혜가 넉넉하고 위품이 비범하니 명문 귀족을 모를 집이 없을지라. 내 편지 부치면 반드시 너를 위하여 어진 배필을 구하리라.”

하고 편지를 주시거늘 소유가 행장을 차려 하직하고 갔다.

낙양 땅에 이르니 낙양은 제왕의 고도라. 번화한 풍경을 구경코자 하여 천진교에 이르니 낙수 물은 동정호를 거쳐 천 리 밖으로 흐르고, 다리는 황룡이 몸을 편 듯한데, 다리 곁에 한 누각이 있으니 단청이 찬란하고 난간이 층층하였다. 금안을 얹은 준마가 좌우에 매여 있고 누각의 비단 장막은 은은한 가운데 온갖 풍류 소리가 들리거늘, 소유가 누각 아래에 다다라 물어 말하기를,

“이것은 어인 잔치뇨?”

다 이르되,

“모든 선비가 한데 명기를 데리고 잔치하나이다.”

양소유가 이 말을 듣고 취흥을 이기지 못하여 말에서 내려 누각 위에 오르니, 모든 선비가 미인 수십 인을 데리고 서로 금연 위에 앉아 의기가 헌걸차게 담소하다가, 양소유의 거동과 풍채가 쇄락함을 보고 다 일어나 읍하여 맞아 앉히고 성명을 통한 후에, 노생이라 하는 선비가 물어 말하기를,

“내 양 형의 행색을 보니 반드시 과거를 보러 가시는 것이오?”

소유가 말하기를,

“과연 재주가 없사오나 굳이 보러 가거니와, 오늘 잔치는 한갓 술만 먹고 노는 일이 아니라 문장을 다투는 뜻이로소이다. 소제 같은 이는 원방의 천한 사람으로 연치가 이미 어리고 전식이 심히 천루하오니, 용렬한 재주가 제공의 잔치에 참예하기가 극히 외람하나이다.”

모든 선비가 양소유의 나이가 어리고 언어가 손순함을 보고 오히려 쉽게 여겨 말하기를,

“과연 그러하거니와 양 형은 후에 왔으니 글을 짓거나 말거나 하고 술이나 먹고 가소서.”

하고 인하여 순배를 재촉하고 온갖 풍류를 일시에 벌였다.

소유가 눈을 들어 보니 모든 창기가 각각 풍악을 갖추고 즐기되, 한 미인이 홀로 풍류도 하지 않고 말씀도 하지 않고 단정히 앉아 있으니, 아름다운 얼굴과 정정한 태도가 진지하고 국색이라. 한번 보매 심신이 황홀하여 정체없이 흔들렸다. 그 미인도 자주 추파를 보내어 정을 내보내는 듯하더라.

소유가 또 바라보니 그 미인 앞에 백옥서안 위에 글 지은 종이 여러 장이 있거늘, 소유가 제생을 향하여 읍하고 말하기를,

“저 글이 다 모든 형의 글이오이까? 주옥 같은 글을 구경함이 어떠하옵니까?”

제생이 미처 대답하지 못하여서 그 미인이 급히 일어나 그 글을 받들어 양소유 앞에 놓거늘, 양소유가 차례로 보니 그 글이 놀라운 글귀가 없고 평평하더라.

소유가 속으로 생각하기를,

‘낙양은 인재가 많다 하더니 이로 보면 헛말이로다.’

그 글을 미인에게 돌려주고 제생께 읍하여 말하기를,

“아랫고을 천생이 상국의 문장을 구경하오니 어찌 쾌락하지 않으리이까?”

이때에 제생이 모두 취하였는지라 웃으며 말하기를,

“양 형은 다만 글만 좋은 줄 알고 더욱 좋은 일이 있는 줄을 알지 못하는도다.”

양소유가 말하기를,

“소제가 모든 형의 사랑을 입어 함께 취하였거니와 더욱 좋은 일을 어찌 이르지 않으시나이까?”

왕생이라 하는 선비가 웃으며 말하기를,

“낙양은 예부터 인재의 곳간이라. 이번 과거의 방목 차례를 정하고자 하니, 저 미인의 성은 계씨요, 이름은 섬월이라. 한갓 얼굴이 아름답고 가무가 출중할 뿐이 아니라 글에 지감이 신통하여 한번 보면 과거 입락을 정하기에, 우리도 글을 지어 계랑에게 가려 계랑이 취하여 읊는 글은 이번 장원 하고, 그 글 임자는 계랑과 오늘 밤 연분을 정하고자 하니 어찌 더욱 좋은 일이 아니리오. 양 형도 남자라 좋은 흥이 있거든 우리와 함께 글을 지어 우열을 다툼이 어떠하뇨?”

소유가 말하기를,

“제형의 글은 지은 지 오래니 누구의 글을 취하여 읊나이까?”

왕생이 말하기를,

“아직 불만하고 단순호치를 열어 양춘 곡조를 품지 않으니, 반드시 부끄러운 마음이 있어 그러한가 하나이다.”

양소유가 말하기를,

“소제는 글도 잘 못하거니와 하물며 국외 사람이라 제형과 더불어 재주를 다툼이 미안하여이다.”

왕생이 큰 소리로 말하기를,

“양 형의 얼굴이 계집 같은지라 어찌 장부의 기품이 아니리오. 다만 양 형이 글 지을 재주가 없을진대 말려니와 재주가 있을진대 어찌 겸손하리오.”

소유가 처음 계랑을 본 후에 시를 지어 뜻을 시험코자 하되 제생이 시기할까 자제하더니, 이 말을 듣고 즉시 지필을 취하여 단번에 삼장 시를 써 내리니, 바람 타는 돛대가 바다에 달리는 같고 갈한 말이 물을 달음 같은지라. 제형이 시상의 민첩함과 필법의 비등함을 보고 경악하지 않는 이가 없는지라.

양소유가 제생을 향하여 읍하여 말하기를,

“이 글을 먼저 제생께 들임이 마땅하오나, 오늘 자리의 시관은 곧 계랑이라. 글 바칠 시각이 미치지 못하였나이까?”

하고, 즉시 시전을 계랑에게 주니 계랑이 샛별 같은 눈을 뜨며 옥 같은 소리로 높이 읊으니, 그 소리가 외로운 학이 구름 속에 우는 듯, 짝 잃은 봉황이 달밤에 울부짖는 듯, 진나라 쟁과 조나라 거문고도 미치지 못할러라.

그 글에 이르기를,

초객이 서유하여 길이 진에 드니, 楚客西遊路入秦
주루에 와 낙양 봄에 취하였도다. 酒樓來醉洛陽春
월중 단계를 누가 먼저 꺾을고, 月中丹桂誰先折
금대 문장에 스스로 사람이 있도다. 今代文章自有人

글에 이르기를,

초나라 나그네 서쪽으로 노닐다 길이 진에 드니, 楚客西遊路入秦
주루에 와 낙양 봄에 취하였도다. 酒樓來醉洛陽春
달 가운데 단계를 누가 먼저 꺾을고, 月中丹桂誰先折
이 시대 문장에 스스로 사람이 있도다. 今代文章自有人

하였더라.

제생이 처음에 양 형을 쉽게 여겨 글을 지으라 하다가 양 형의 글이 섬월의 눈에 드는 것을 보고 아무 말도 못하더라. 양소유가 그 기색을 보고 홀연 일어나 제생께 하직하고 말하기를,

“소제가 제형의 권권하심을 입어 술이 취하니 감사하거니와 갈 길이 머오니 종일 담화하지 못할지라. 훗날 곡강연에서 다시 뵈오리다.”

하고 내려가니 제생이 만류하지 않더라.

소유가 누에서 내려갈 새 계랑이 바삐 내려와 소유에게 말하기를,

“이 길로 가시다가 길가의 분장 밖에 앵도화 성한 것이 바로 첩의 집이라. 원컨대 상공은 먼저 가 첩을 기다리소서. 첩도 또한 따라 가리이다.”

소유가 머리를 끄덕이며 대답하고 갔다.

섬월이 누에 올라가 제생께 아뢰어 말하기를,

“모든 상공이 첩을 더럽다 아니 여기사 한 곡조 노래로 연분을 정하셨사오니 어찌 하리이까?”

제생이 말하기를,

“양생은 객이라 우리와 약속한 사람이 아니니 어찌 구애하리오?”

섬월이 말하기를,

“사람이 신의가 없으면 어찌 옳다 하리오? 첩이 병이 있어 먼저 가노니, 원컨대 상공은 종일토록 노소서.”

하고 하직하고 천천히 걸어 누에서 내려가니 제생이 앙앙하나, 처음에 이미 언약이 있고 또 그 냉소하는 빛을 보고 감히 한마디도 못하더라.

이때에 소유가 객점에 머물다가 날이 저물거늘 섬월의 집을 찾아가니 섬월이 이미 먼저 와 있는지라. 중당을 쓸고 촛불을 켜고 정히 기다리더니, 소유가 앵도화 나무에 나귀를 매고 문을 두드리며 불러 말하기를,

“계랑이 있느냐?”

섬월이 문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신을 벗고 내달아 손을 이끌어 말하기를,

“상공이 먼저 왔거늘 어찌 이제야 오시나이까?”

소유가 웃으며 말하기를,

“주인이 손을 기다려야 옳으냐, 손이 주인을 기다려야 옳으냐?”

서로 이끌고 중당에 들어가 옥배에 술을 부어 취토록 권한 후에 원앙침을 함께 베우니, 초양대에서 어느 신녀를 만난 듯 낙포에서 왕모 선녀를 만난 듯 그 즐거움을 어이 다 기록하리오.

이러구러 밤이 깊어가는지라. 섬월이 눈물을 머금고 탄식하여 말하기를,

“첩의 몸을 이미 상공께 의탁하였사오니 첩의 정사를 잠깐 아시어 생각하소서. 첩은 본래 조나라 사람이라. 첩의 부친이 이 고을 태수가 되셨더니 불행히 세상을 버리신 후에 가세가 영락하고 관산이 초체하여 천 리 밖에 반장할 길이 없어, 첩의 계모가 첩을 백금을 받고 창가에 팔아 행상하시니 첩이 차마 거스르지 못하여 슬픔을 머금고 몸을 굽혀 이제까지 부지하였삽더니, 천행을 입어 낭군을 만났사오니 일월이 다시 밝은 듯하여이다. 원컨대 낭군은 첩을 비루이 여기지 아니하옵시면 물 긷는 종이나 될까 하나이다.”

양소유가 말하기를,

“나는 본래 간난하니 처첩이 어려우니 어른께 아뢰어 안해를 삼으리라.”

섬월이 좌에서 말하기를,

“낭군은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시나이까? 당금에 천하의 재조를 헤아려 보건대 낭군에 미칠 이가 없는지라. 이번 과거 장원은 하려니와 승상의 인끈과 장군의 절월을 오래지 않아 낭군께 돌아올 것이니 천하 미색이 누가 좇지 않으리오? 어찌 나만 한 사람을 안해 되기를 원하리이까? 낭군은 어진 안해를 구하여 대부인을 모신 후에 첩을 버리기나 마소서.”

소유가 말하기를,

“내 예전에 화음 땅에 지나더니 마침 진씨 여자를 보니 그 얼굴과 재주가 계랑과 방불하더니 불행히 죽었으니 어디 가서 다시 어진 안해를 얻으리오?”

섬월이 말하기를,

“그 처자는 진어사의 딸 채봉이라. 진어사가 낙양 태수로 왔을 때에 첩이 그 낭자와 더불어 친하였지라. 그 낭자의 얼굴과 재주는 과연 얻기 어렵거니와 이제는 속절없으니 생각지 마시고 다른 데 구혼하소서.”

소유가 말하기를,

“예부터 천하 절색이 없다 하니 진낭자와 계낭자가 있으니 또 어디 가 다시 구하리오?”

섬월이 크게 웃으며 말하기를,

“낭군의 말씀이 진실로 정저하도다. 우리 창가로 의논하건대 천하 절색이 셋이 있으니, 강남에 만옥년이요, 하북에 적경홍이요, 낙양에 계섬월이라. 첩은 모처럼 허명을 얻었사오거니와 만옥년과 적경홍은 진지 절색이라. 어찌 천하에 절색이 없다 하리오?”

소유가 말하기를,

“저 두 낭자는 혹시 계랑과 제명이나 한가 하노라.”

섬월이 말하기를,

“옥년은 먼 곳 사람이라 보지 못하였거니와 경홍은 첩으로 정이 형제 같은지라 경홍의 일생 본말을 대강 아뢰리이다. 경홍은 본래 변주 양가녀라. 일찍 부모를 잃고 그 고모에게 의탁하여 열 살부터 절미의 색이 하북에 고명하여 근방 사람이 천금으로 구하는 이가 많아 중매가 구름같이 모이되 경홍이 일병 물리치니 중매가 고모에게 물어 말하기를, ‘여기저기로 마다하니 어떤 가낭을 구하여야 고낭의 뜻에 합당하리오? 대승상의 총첩이 되고자 하느냐, 절도사의 부실이 되고자 하느냐, 명사에게 허하고자 하느냐, 수재에게 보내고자 하느냐?’ 경홍이 크게 대답하기를, ‘진나라 동산에서 쉬던 사안석이 있으면 가히 대승상의 첩이 될 것이요, 삼국 때에 사람으로 하여금 곡조를 가르치던 규공자가 있으면 가히 절도사의 부실이 될 것이요, 현종조의 청평사 노래 듣던 한림학사가 있으면 가히 명사를 따를 것이요, 무제 때에 봉황곡 아뢰던 사마장경이 곧 있으면 수재를 가히 따르리라.’ 하니 모든 중매가 크게 웃고 흩어졌다. 경홍이 첩과 더불어 상국사에 놀다가 경홍이 첩더러 일러 말하기를, ‘우리 두 사람이 진실로 듣건대 군자를 만나거든 서로 천거하여 함께 한 사람을 섬겨 백년을 해로함’을 첩이 또 허락하였사옵더니 첩이 낭군을 만나매 문득 경홍을 생각하오나 경홍이 산동 제후 궁중에 있사오니 이 반드시 좋은 일이 아니로소이다. 후왕의 희첩이 부귀 극하오나 이는 경홍의 원이 아니라.”

인하여 탄식하여 말하기를,

“어찌 한번 경홍을 보고 이 정회를 풀리오?”

양소유가 말하기를,

“창가에 비록 재색이 많으나 사태후 집 규수는 보지 못하니 어찌 알리오?”

섬월이 말하기를,

“내 눈으로 보건대 진낭자만 한 이가 없거니와 장안 사람이 다 정사도의 여자가 요조한 얼굴과 유한한 덕행이 당세에 으뜸이라 하노니 첩이 비록 보지 못하였사오나 ‘이름이 높으면 헛데 없다’ 하오니, 원컨대 낭군은 경성에 가 두루 방문하소서.”

이때에 닭이 울어 날이 새는지라.

섬월이 말하기를,

“이곳까지 오래 머물 곳이 아니오니 상공은 가소서. 이후에 모실 날이 있사오니 여자를 위하여 떠나기를 슬퍼하지 마소서. 하물며 어제 제공자들이 앙앙한 마음이 없사오리이까?”

소유가 오히려 눈물을 뿌리고 떠났다.

이야기를 바꾸어,

양소유가 장안에 들어가 사처를 정한 후에 주인에게 물어 말하기를,

“자청관이 어디 있느뇨?”

주인이 대답하기를,

“저 춘명문 밖에 있나이다.”

소유가 즉시 예단을 갖추어 두연사를 찾아가니 연사는 나이 예순이 넘은지라. 소유가 들어가 두 번 절하고 그 모친 편지를 올린대, 연사가 그 편지를 보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네 자친과 이별한 지 이십여 년이라. 그 후에 낳은 자식이 이러하니 세상 세월이 허망한 것이로다. 나는 세상 번화를 버리고 물외에 와 있거니와, 네 모친 편지를 보니 네 배필을 구하라 하였으되 네 풍채를 보니 진실로 신선이라. 아무리 구하여도 너 같은 이는 얻기 어렵거니와 다시 생각할 것이니 후날 다시 오라.”

소유가 말하기를,

“소자의 자친이 나이 많으신지라. 소질의 나이 열여섯 되오되 배필을 정하지 못하여 효양을 잇지 못하오니, 원컨대 숙모님은 십분 염려하옵소서.”

하직하고 갔다.

이때에 과거 날이 가까웠건만 혼처를 정하지 못하였기에 과거에 뜻이 없어 다시 자청관에 가니 두연사가 웃으며 말하기를,

“한 혼처가 있으되 처자의 얼굴과 재주는 양낭과 배필이로되, 주문이 중중하고 계극을 문 밖에 베푼 데 곧 그 집이라. 문벌이 가장 높으니 육대 공후요 삼대 상국이라. 양낭이 이번 장원 급제하면 그 혼사를 바랄 것이거니와 그 전에는 의논치 못할 것이니 양낭은 나만 보채지 말고 착실히 공부하여 장원 급제를 하라.”

“누구 집이오이까?”

연사가 말하기를,

“춘명문 밖에 정사도 집이라. 사도가 한 딸을 두었으되 신선이요 인간 사람이 아니라.”

소유가 이 말을 듣고 홀연 생각하되, ‘계섬월이 이 말을 하더니 과연 그러한가’ 하여 물어 말하기를,

“정씨 여자를 숙모님이 친히 보셨나이까?”

연사가 말하기를,

“어찌 보지 못하였으리오? 정소저는 진실로 천상 사람이요 범인이 아니라. 어이 다 입으로 헤아리리오?”

소유가 말하기를,

“오활하거니와 이번 과거는 내 장중에 있으니 염려 않으려니와 평생에 정한 뜻이 있사오니 그 처자를 보지 못하면 절단코 구혼하지 않고자 하오니, 원컨대 에엽삐 여겨 그 소저를 보게 하소서.”

연사가 크게 웃어 말하기를,

“재상의 처녀를 어이 보리오? 양낭이 이 노인을 믿지 않는도다.”

소유가 말하기를,

“소자가 어찌 숙모의 말씀을 의심하오리이까마는 사람의 소견이 각각 다르오니 숙모의 소견이 소자와 다를까 염려하나이다.”

연사가 웃으며 말하기를,

“봉황과 기린은 아무리 무식한 여자라도 상서로운 줄을 알아보고, 청천과 백일은 아무리 지천한 향인이라도 높고 밝은 줄을 알거든, 노인의 눈이 아무리 밝지 못한들 사람 알기를 양낭만 못하랴.”

소유가 한참 생각하다가 말하기를,

“아무리 하여도 내 눈으로 보지 못하면 의심이 풀리지 아니하오니 원컨대 숙모는 모친 편지한 뜻을 생각하여 한번 보게 하소서.”

연사가 말하기를,

“죽기는 쉬워도 정소저 보기는 어렵도다. 어이할고?”

하더니 홀연 생각하여 말하기를,

“네 혹 음률을 아느냐?”

소유가 말하기를,

“과연 한 도사를 만나 한 곡조를 배워 아나이다.”

연사가 말하기를,

“재상가 문정이 엄숙하니 낮에는 들어갈 길이 없고, 또 소저가 경서와 예문을 능통하여 동정 출입을 예대로 하기에 문 밖에 나는 일이 없으니 어찌 그림자나 얻어 보리오. 다만 한 가지 일이 있으되 양낭이 듣지 않을까 하노라.”

소유가 이 말을 듣고 일어나 두 번 절하여 말하기를,

“정소저를 보려 한다면 하늘이라도 오를 것이요, 깊은 쇠라도 들어가리니 무슨 일을 듣지 않으리이까?”

연사가 말하기를,

“정사도가 요사이 늙고 병들어 벼슬을 사양하고 원림에 돌아와 풍류만 일삼고, 부인 최씨는 거문고를 좋아하여 금객을 만나면 소저와 더불어 곡조를 의논할 새, 소저가 지음을 잘 하는지라 한번 들으면 청탁고저를 모를 것이 없으니 비록 사광이라도 지나지 못하리라. 양낭이 만일 거문고를 알면 반드시 보기 쉬우려니와, 이월 그믐날은 정사도 생일이라 해마다 시비를 보내어 향촉을 갖추어 수복을 비니, 그때에 양낭이 여도사의 옷을 입고 거문고를 희롱하면 시비가 보고 돌아가 부인께 아뢰면 부인이 반드시 청할 것이니 소저 보기가 반드시 쉬울 듯하니 양낭은 연분만 기다리라.”

소유가 크게 기뻐하여 날을 기다리더니 그러구러 날이 당하니 정사도의 시비가 부인의 명으로 향촉을 가지고 왔거늘, 연사가 받아 삼청전에 가 불전에 공양하고 시비를 보낼 새, 이때에 소유가 여도사의 의관을 하고 별당에 앉아 거문고를 타는지라. 시비가 하직하다가 문득 거문고 소리를 듣고 물어 말하기를,

“내 일찍 부인 앞에서 명금을 많이 들었사오되 이런 소리는 과연 듣지 못하였사오니 알지 못하거니와 어떤 사람이오이까?”

연사가 말하기를,

“엊그제 연소한 여관이 초나라로부터 와 황성을 구경하고 여기서 머무는지라. 때때로 거문고를 희롱하니 그 소리가 심히 사랑스러운지라. 나는 본래 음률에 어두워 곡조를 모르더니 그대 말을 들으니 진실로 잘 하는도다.”

시비가 말하기를,

“부인이 말씀을 들으면 반드시 청하실 것이니 바라건대 사부인이 이 사람을 만류하소서.”

연사가 말하기를,

“그대를 위하여 만류하리라.”

하고 시비를 보내었다.

소유가 이 말을 듣고 부인의 부르심을 기다리더니, 시비가 돌아가 부인께 아뢰어 말하기를,

“자청관에 어떤 여관이 거문고를 타되 그 소리가 진실로 들을 만하더이다.”

부인이 이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여 말하기를,

“내 잠깐 듣고 싶구나.”

하고 즉시 시비를 자청관에 보내어 두연사께 청하여 말하기를,

“연소한 여관이 거문고를 잘 탄다 하니, 원컨대 도인은 권하여 보내소서.”

연사가 시비를 데리고 별당에 가 양소유에게 물어 말하기를,

“최부인께서 부르시니 여관은 나를 위하여 잠깐 가 보심이 어떠하뇨?”

소유가 말하기를,

“하방의 천한 몸이 존전 출입이 어려오나 대사가 권하시니 어찌 감히 사양하리까?”

하고 여도사의 복을 입고 화관을 정히 쓰고 거문고를 안고 나오니 선풍도골은 위서군과 사자안이라도 미치지 못할러라. 교자를 타고 정부에 갈 새 최부인이 중당에 앉아 있으니 위의가 엄숙한지라. 소유가 당하에 나아가 두 번 절하고 서니, 대부인이 시비를 명하여 좌를 주고 말하기를,

“우연히 시비를 인하여 선악 소리를 듣고자 하여 청하였사옵더니 과연 여관을 보니 천상 선녀를 만난 듯하여 세상 마음이 다 없도다.”

소유가 말하기를,

“첩은 본래 초나라 천한 사람이라. 외로운 자취가 구름같이 동서로 다니더니 오늘 부인을 뵈오니 하늘인가 하나이다.”

부인이 소유의 거문고를 취하여 무릎 위에 놓고 손으로 만져 말하기를,

“이 재목이 진실로 묘하도다.”

소유가 말하기를,

“이 재목은 용문산 백 연 된 오동이라 천금으로 사려 하여도 얻지 못하리이다.”

소유가 마음에 생각하되, 이 집에 들어오기는 소저를 보려 함이러니 날이 늦어 가되 소저를 보지 못하니 마음에 의심하여 부인께 아뢰어 말하기를,

“첩이 비록 고조를 타오나 청탁을 알지 못하옵더니 자청관에 와 들으오니 소저가 지음을 잘 하신다 하오니 한 곡조를 아뢰어 소저의 가르치심을 듣고자 하였사옵더니 소저가 안에 계시오니 마음이 섭섭하여이다.”

부인이 즉시 시비로 하여금 소저를 부르시니, 이윽고 소저가 비단 장막을 잠깐 걷고 나와 부인 앞에 앉으니 소유가 일어나 절하고 앉으며 눈을 들어 바라보니, 태양이 처음으로 붉은 안개 속에 비추는 듯, 아름다운 연꽃이 수중에 피어난 듯, 심신이 황홀하여 안정치 못하였다.

소유가 생각하되, 멀리 앉아 소저의 얼굴을 자상히 못 볼까 하여 일어나 다시 아뢰어 말하기를,

“한 곡조를 시험하여 소저의 가르치심을 듣고자 하오나 화당이 멀어 소리가 흩어지면 소저의 귀에 자상히 못 미칠까 하나이다.”

부인이 즉시 시비를 명하여 자리를 옮기었다. 소유가 고쳐 앉으며 거문고를 무릎 위에 놓고 줄을 고른 후에 한 곡조를 타니 소저가 말하기를,

“아름답다, 곡조여! 이 곡조는 예상우의곡이라. 도인의 수법은 신통하나 음난한 곡조니 들을 만하지 않은지라. 다른 곡조를 듣고자 하노라.”

소유가 또 한 곡조를 타니 소저가 말하기를,

“이 곡조는 진후주의 옥수후정화라. 망국조니 들을 만하지 않은지라. 다른 곡조가 있느냐?”

소유가 또 한 곡조를 타니 소저가 말하기를,

“이는 채문희가 오랑캐에게 잡혀가 두 자식을 생각한 곡조라. 절개를 잃었으니 어찌 들을 만하리오.”

소유가 또 한 곡조를 타니 소저가 말하기를,

“이는 왕소군의 출새곡이라. 오랑캐 땅 곡조니 어찌 들을 만하리오?”

또 한 곡조를 타니 소저가 말하기를,

“이 곡조를 듣지 못한 지 오래인지라. 여관은 범사람이 아니로다. 옛날 혜숙야의 광릉산이라 하는 곡조라. 혜숙야가 도적을 쳐 파하고 천하를 맑히고자 하다가 뜻밖에 참소를 만남에 분을 이기지 못하여 이 곡조를 지었거니와 후세에 전할 이가 없었더니 여관이 어디서 배웠느냐?”

소유가 일어나 절하고 사례하여 말하기를,

“소저의 총명은 세상에 없도소이다. 소첩의 스승의 말씀도 또 그러하더이다.”

또 한 곡조를 타니 소저가 말하기를,

“이는 백아의 수선조라. 도인이 천 백 년 후에 백아의 지음이로다.”

또 한 곡조를 타니 옷깃을 여미고 꿇어앉아 말하기를,

“이는 공부자의 의란조라. 외외탕탕하여 어찌 이름하리오. 아름답도다! 이에 지날 것이 없사오니 어찌 다른 곡조를 원하리오?”

소유가 말하기를,

“첩은 듣사오니 아홉 곡조를 이르면 천신이 내린다 하오니 이미 여덟 곡조를 마쳤는지라 또 한 곡조가 있사오니 마저 타나이다.”

줄을 고쳐 다스려 타니 그 소리가 청량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심혼이 방탕해지는지라. 소저가 눈썹을 낮추고 말하지 않더니 소유가 곡조를 더욱 갖추어 소리가 호탕해지는지라.

‘봉이여, 봉이여.’

짝을 구하는 곡조의 소리에 이르러 소저가 눈을 들어 소유를 자주 돌아보며 옥안에 부끄러운 빛을 띠고 즉시 일어나 안으로 들어가거늘, 소유가 마음이 안연하지 못하여 거문고를 밀치고 소저 가는 데만 바라보더니, 부인이 말하기를,

“여관의 아까 탄 곡조는 무슨 곡조뇨?”

소유가 말하기를,

“선생께 배웠사오되 곡조 이름은 알지 못하기에 소저의 가르치심을 듣고자 하였사옵더니 소저가 아니 오시겠나이까?”

부인이 시비를 명하여 소저를 부르시니 시녀가 돌아와 아뢰기를,

“소저가 반일을 촉풍하여 기운이 편치 않으시더이다.”

소유가 이 말을 듣고 소저가 아는가 하여 크게 놀라 ‘오래 머물지 못하리라’ 하고, 즉시 일어나 두 번 절하여 말하기를,

“들으오니 소저 옥체가 불편하시다 하오니 생각컨대 부인이 진맥하시리니 소첩은 물러가나이다.”

부인이 비단을 많이 상사하시니 사양하여 말하기를,

“첩이 천한 재조를 배웠사오나 어찌 값을 받사오리이까?”

하고 갔다.

부인이 즉시 들어가 물으시니 소저가 병이 이미 나은지라.

소저가 침소에 가 시녀들에게 물어 말하기를,

“춘낭의 병이 어떠하뇨?”

시녀가 말하기를,

“오늘은 잠깐 나아 소저 거문고 소리 희롱하심을 듣고 일어나 세수하더이다.”

춘운이 소저를 모시고 주야를 함께 거처하니 비록 주종의 분의는 있으나 정은 형제 같더라.

이날 소저 방에 와 물어 말하기를,

“아침에 어떤 여관이 거문고를 가지고 와 좋은 소리를 탄다 하매 병을 강인하고 왔사옵더니 무슨 연고로 그 여관이 빨리 갔나이까?”

소저가 낯빛이 붉으며 조용히 대답하기를,

“내 몸 가지기를 법으로 하고 말씀을 예로 하여 나이 열여섯 세 되었으되 중문 밖에 나 외인을 대면하지 않았더니 일조에 간사한 사람에게 평생 씻지 못할 욕을 먹으니 무슨 면목으로 너를 대면하리오.”

춘운이 크게 놀라 말하기를,

“무슨 일이관데 이런 말씀을 하시나이까?”

소저가 말하기를,

“아까 왔던 여관이 얼굴이 아름답고 기상이 준수한지라. 처음에 예상우의곡을 타고 나중에 남훈곡을 타거늘 내가 이르되 ‘진선진미하니 그만 하라’ 하였더니, 또 한 곡조를 타니 이는 사마상여가 탁문군을 꾀어내던 봉구황곡이라. 그제야 자상히 보니 그 여관의 얼굴은 아름다우나 기상이 호탕하여 아마도 계집이 아니라. 분명 간사한 사람이 내 허명을 듣고 준색을 구경코자 하여 변복하고 오미니, 다만 춘낭이 병들어 보지 못함이 애달프도다. 춘낭 곳 한번 보았으면 남녀를 구별하였으리라. 춘낭은 생각하라. 내 규중 처녀로서 평생에 보지 못하던 사나이를 데리고 반일을 서로 수작하였으니 천하에 이런 일이 있느냐? 아무리 부모라도 차마 못 사뢰었더니 춘낭에게는 하노라.”

춘운이 웃으며 말하기를,

“소저는 여관의 봉황곡을 듣고 상여의 봉황곡이 아니오니 무슨 과히 생각하시나이까? 옛날에 사람이 잔 가운데 활 그림자 보고 병 든 것과 같도소이다. 또 그 여관이 얼굴이 아름답고 기상이 호방하고 음률을 능통하니 참 사마상여인가 하나이다.”

소저가 말하기를,

“비록 사마상여라도 나는 탁문군이 되지 아니하리라.”

하더라.

하루는 소저가 부인을 모시고 중당에 앉았더니 사도가 과거 방목을 가지고 희색이 진진하여 들어오며 부인에게 말하기를,

“내 아이의 혼사를 정하지 못하여 주야로 염려하더니 오늘 어진 사위를 얻겠나이다.”

부인이 말하기를,

“어떤 사람이오이까?”

사도가 말하기를,

“지금 장원한 사람의 성은 양씨요, 이름은 소유요, 나이는 열여섯 세요, 회남 땅 사람이라. 그 풍채는 두목지요, 그 재주는 조자건이니 진실로 이 사람을 얻으면 어찌 즐겁지 않으리오.”

부인이 말하기를,

“열 번 들은 것이 한번 보기만 못하다 하니 친히 본 후에 정하사이다.”

소저가 이 말을 듣고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여 즉시 일어나 침소에 가 춘운에게 말하기를,

“그전에 거문고 타던 여관이 초나라 땅 사람이라 하더니 회남은 초나라 땅이라. 양장원이 반드시 부친께 뵈오러 올 것이니 춘랑은 자상히 보고 나에게 이르라.”

춘운이 웃으며 말하기를,

“나는 여관을 보지 못하였사오니 양장원을 본들 어찌 알리이까. 소저가 주렴 사이로 잠깐 보시면 어떠하리이까?”

소저가 말하기를,

“한번 욕을 먹은 후에 다시 볼 뜻이 있으리오.”

이때에 양장원이 회시 장원하고 연하여 급제 장원하여 한림학사를 하니 이름이 천하에 가득한지라. 명문 귀족에 딸 둔 집이 중매를 보내어 구혼하는 집이 구름 모이듯 하는지라.

소유가 정사도 혼사를 생각하여 다 물리치더니 하루는 한림이 정사도를 뵈오러 가 통자하니 사도가 즉시 화당을 수쇄하고 맞을 새, 한림이 머리에 계화를 꽂고 홍패와 한림 유지를 들이고 화동과 공인이 각색 풍류를 울리며 사도께 뵈오니, 풍채가 아름답고 예모가 거룩한지라 사도가 기쁨을 이기지 못하더라.

춘운이 시비 등을 불러 말하기를,

“아래 거문고 타던 여관이 아름답다 하더니 양한림과 어떠하뇨?”

다 이르되,

“그 여관의 얼굴이 심히 같도소이다.”

춘운이 들어가 소저의 눈이 밝은 줄을 일렀더라.

사도가 한림에게 말하기를,

“나는 팔자가 기구하여 아들이 없고 다만 딸자식이 있으되 혼처를 정하지 못하였으니 한림이 내 사위 됨이 어떠하뇨?”

한림이 일어나 절하고 말하기를,

“소자가 경성에 들어와 소저의 요조한 얼굴과 유한한 재덕은 들었사옵거니와 문벌이 하늘과 땅 같사옵고 인품이 봉황과 오작 같사오니 어찌 바라오리이까마는 버리지 않으시면 천덕인가 하나이다.”

사도가 크게 기뻐하여 주찬을 들어 대접하니라.

이윽고 부인이 소저를 불러 말하기를,

“신방 장원 양한림은 만인의 칭찬하는 바라. 네 부친이 이미 허혼하셨으니 우리 부처는 몸을 탁신할 곳을 얻은지라. 무슨 근심이 있으리오.”

소저가 말하기를,

“시비의 말씀을 들으오니 양한림이 전에 거문고 타던 여관과 같다 하오니 그러하나이까?”

부인이 말하기를,

“그러하다. 내 그 여관을 사랑하여 다시 보고자 하되 자연 다사하여 못하였더니, 오늘 양한림을 보니 그 여관을 다시 본 듯하여 즐거운 마음을 어찌 금하리오.”

“소저가 양한림이 비록 아름다우나 소저는 혐의가 있사오니 더불어 절친함이 마땅치 않으나이다.”

부인이 크게 놀라 말하기를,

“너는 재상가 규중 처녀요, 양한림은 회남 땅 사람이라. 무슨 혐의가 있으리오?”

소저가 말하기를,

“소녀의 말씀이 부끄러운 고로 모친께 사뢰지 못하였거니와, 오늘 양한림은 아래서 탄금하던 여관이라. 간사한 사람의 꾀에 빠져 종일 수작하였사오니 어찌 혐의가 없사오리오.”

부인이 미처 대답하지 못하여 사도가 한림을 보내고 바삐 들어와 소저를 불러 말하기를,

“경패야, 오늘 용을 타고 하늘에 올라가는 경사를 보았으니 어찌 기쁘지 않으리오.”

부인이 소저의 혐의하는 말씀을 사뢴대, 사도가 크게 웃어 말하기를,

“양낭은 진실로 만고 풍류 남자로다. 옛날 왕유도 악생이 되어 태평공주의 집에 들어가 비파를 타고 돌아와 장원 급제하매 만고에 칭찬이 유전하였으니, 이제 한림이 또 기이한 일이로다. 또 너는 여관을 보고 한림을 보지 않았으니 무슨 혐의가 있으리오?”

소저가 말하기를,

“소녀 욕 먹기는 부끄럽지 않으오나 내 어질지 못하여 남에게 소근 것이 한이로소이다.”

사도가 웃으며 말하기를,

“그것은 노부의 알 바 아니라. 훗날 양한림에게 물으라.”

사도가 부인에게 말하기를,

“나중에 한림의 대부인을 모셔온 후에 혼례는 행하려니와 납채는 먼저 받으리라. 즉시 택일하여 납례를 받고 한림을 데려와 화원 별당에 두고 사후례로 대접하리라.”

하루는 부인이 한림의 저녁 반찬을 장만하더니 소저가 보고 말하기를,

“한림이 화원에 오신 후로 의복과 음식을 친히 염려하시니 소저가 그 괴로움을 당하고자 하오되 미안하여 못하겠사오거니와 춘운이 이미 장성하여 넉넉히 백사를 당할지라 화원에 보내어 한림을 섬기게 하여 노친의 수고를 덜까 하나이다.”

부인이 말하기를,

“춘운의 얼굴과 재주가 무슨 일을 못 당하리오마는 춘운의 얼굴과 재주가 너와 진일이 없으니, 먼저 한림을 섬기면 반드시 권을 빼앗을까 염려하노라.”

소저가 말하기를,

“춘운의 뜻을 보오니 소저와 더불어 한 사람을 섬기고자 하오니 좇지 않을 바 없을 것이요, 또 춘운을 먼저 보내면 탈권할까 염려하시거니와 한림이 연소 서생으로 재상가 도장에 들어와 처녀를 희롱하니 그 기상이 어찌 한 안해만 지켜 늙으리오. 타일에 승상부 만풍지록을 먹을 때에 춘운 같은 자색이 몇이나 될 줄을 알리이까?”

부인이 사도께 아뢰니, 사도가 말하기를,

“어찌 연소 남자로 빈 방 촛불만 벗삼게 하리오.”

하더라.

이날 소저가 춘운에게 일러 말하기를,

“춘랑아, 내 너와 어려서부터 함께 지내더니 나는 이미 한림의 납채를 받았거니와 주랑도 나이 자랐으니 백 년 신세를 염려할지라. 어떤 사람을 섬기고자 하느냐.”

춘운이 말하기를,

“소저는 어찌 이런 말씀을 하시나이까? 첩은 소저를 따라 한 사람을 섬기고자 하오니 원컨대 소저는 버리지 마소서.”

소저가 말하기를,

“내 본래 춘랑의 뜻을 아는지라. 의논하고자 하는 일이 있으니 어떠하뇨? 한림이 거문고 한 곡조로 규중 처녀를 희롱하였으니 그 욕이 중한지라. 우리 춘랑 곳 아니면 누가 나를 위하여 설치할고. 종남산 자각봉은 산이 깊고 경개 좋은지라. 춘랑을 위하여 별구를 지어 춘랑의 화촉을 베풀고 또 종형 십삼랑으로 더불어 기특한 꾀를 하면 내 부끄럼을 씻으리라. 춘랑은 한번 수고를 사양하지 말라.”

춘운이 말하기를,

“소저의 말씀을 어찌 사양하리이까마는 타일에 무슨 면목으로 한림을 보리이까?”

소저가 말하기를,

“군중은 장군의 영을 듣는다 하니 춘랑은 한림만 두려워하는도다.”

춘랑이 웃으며 말하기를,

“죽기도 피하지 못하려든 소저의 말씀을 어이 좇지 않으리이까?”

하더라.

이야기를 바꾸어,

한림이 한가한 날이면 주루에 가 술도 마시며 꽃놀이도 즐기더니, 어느 날은 정십삼이 찾아와 한림에게 말했다.

“종남산 자각봉은 산천이 아름답고 경치가 좋다 하니, 한번 구경함이 어떠하오?”

한림이 말했다.

“바로 내 뜻이오.”

그리하여 술과 안주를 챙겨 함께 길을 나섰다.

한 곳에 이르니 향기로운 풀이 넘실거리고 흰 꽃과 작약이 만발한데, 문득 시냇물에 꽃잎이 떠내려오거늘, 한림이 말했다.

“이 위에 반드시 무릉도원이 있구나.”

정생이 말했다.

“이 물이 자각봉에서 흘러내리는데, 일찍이 듣기로는 꽃 피고 달 밝은 때면 신선의 풍류 소리가 들려 그것을 들은 이가 많다 하였소. 나는 선분이 없어 한 번도 구경하지 못하였으니, 오늘 형과 함께 옷을 떨쳐 입고 올라가 신선의 자취를 찾아보고 싶소.”

그리 하려던 차에 문득 정생의 하인이 급히 달려와 아뢰었다.

“낭자께서 병환이 몹시 위중하오니 상공께서 어서 오시라 하나이다.”

정생이 탄식하며 말했다.

“과연 선분이 없구나. 그러하니 이만 돌아가거니와, 낭형은 신선을 찾아보고 오게나.”

정생이 돌아가자, 한림은 흥을 이기지 못하고 혼자 올라가더니, 물 위에 나뭇잎이 떠내려오거늘 건져 보니 글씨가 적혀 있었다. ‘선방은 구름 밖에 닫혀 있으니, 때는 바야흐로 양낭이 올 때로다. 신선의 개가 구름 밖에서 짖으니, 알건대 양낭이 오는구나.’ 한림이 크게 놀라 말했다.

“이는 필연코 신선의 글이로다.”

그리하여 층암절벽을 타고 올라가더니, 이때 날이 저물고 달이 밝은지라 길은 험하고 의탁할 곳이 없어 배회하더니, 홀연 청의 동자가 시냇가에서 길을 쓸다가 한림을 보고 안으로 들어가며 외쳤다.

“낭군께서 오시나이다.”

한림이 더욱 놀라 동녀를 따라가더니, 층암절벽 위에 정자 하나가 있는데 온갖 화초가 만발한 가운데 앵무와 공작이 울고 두견새 소리 낭자하니 진정 선경이더라.

한림이 마음이 황홀하여 들어가니, 비단 장막에 공작 병풍을 둘러치고 촛불을 밝게 밝힌 채 서 있다가 한림에게 나아와 예를 갖춘 뒤 말했다.

“낭군께서 어찌 이리 늦게 오시나이까?”

한림이 답례하며 말했다.

“소생은 인간 사람이라, 달 아래 연분이 없거늘 어찌 더디다 하시나이까?”

선녀가 말했다.

“한림은 의심치 마르소서.”

그리고는 여동을 불러 말했다.

“낭군이 멀리서 오셨으니 급히 차를 드려라.”

여동이 즉시 백옥 쟁반에 선과를 가득 차리고 유리잔에 자하주를 따라 권하거늘, 그 술이 인간 술과 사뭇 달랐다.

한림이 말했다.

“선녀께서는 무슨 까닭으로 요지의 무한한 경개를 버리고 이 산중에 홀로 머무시나이까?”

선녀가 탄식하며 말했다.

“지난 일이 꿈 같아 생각하면 슬프나이다. 첩은 서왕모의 시녀로서 광한궁 잔치 자리에서 낭군이 첩을 보고 희롱하였다 하여, 상제께서 진노하사 낭군은 중죄를 받아 인간으로 귀양 가시고 첩은 가벼운 죄로 이 산중에 와 있사옵더니, 낭군께서 세상 음식을 드신 까닭에 전생 일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나이다. 상제께서 첩의 죄를 사하시어 곧 승천하라 하셨으나, 낭군을 만나 전생의 회포를 풀고자 아직 머물렀사오니 한림은 의심치 마옵소서.”

한림이 이 말을 듣고 선녀의 손을 이끌어 침소로 들어가니, 그리워하던 회포를 다 풀기도 전에 어느덧 날이 밝았다.

선녀가 한림에게 말했다.

“오늘은 첩이 승천할 기약이라 모든 선관이 첩을 데리러 올 것이니, 낭군은 오래 머물 수 없나이다.”

그리고 어서 가기를 재촉하며 말했다.

“낭군이 첩을 잊지 않으신다면 다시 만나 뵐 날이 있을 것이나이다.”

수건에 이별시를 써서 한림에게 주거늘, 한림도 옷소매를 떼어 그 글에 화답하였다.

선녀가 글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서산에 달이 지고 두견이 슬피 우니, 한번 이별하면 구만 장천 구름 밖에 이 글귀뿐이로다.”

글을 받아 품에 품고 거듭 재촉하는 말이,

“때가 점점 늦어지니 낭군 어서 가옵소서.”

한림이 선녀의 손을 잡고 눈물로 이별하니, 그 애연한 정은 차마 보지 못할 듯하더라.

한림이 집으로 돌아오니, 자각봉의 만한 화초가 두 눈에 삼삼하고 선녀의 말소리는 두 귀에 쟁쟁하니, 마치 한바탕 꿈을 깬 듯하여 탄식하며 말했다.

“거기서 잠시 몸을 숨겨 선녀의 떠나는 모습을 못 본 것이 한이로다.”

이처럼 망연해하던 차에, 정생이 돌아와 한림에게 말했다.

“어젯날 가인의 병 때문에 형과 함께 선경을 구경하지 못하니 한이 되거니와, 다시 또 한번 형과 놀아봄이 어떠하뇨?”

한림이 내심 선녀가 있던 곳을 다시 보고 싶어 술과 안주를 챙겨 성 밖으로 나가 보니, 녹음방초 승화시더라.

한림과 정생이 술을 나누어 마시더니, 길가에 퇴락한 무덤이 있거늘 한림이 잔을 들고 탄식하며 말했다.

“슬프다, 사람이 죽으면 다 저러하리로다.”

정생이 말했다.

“형이 저 무덤을 알지 못하리라. 옛 장여랑의 무덤이라오. 장여랑의 얼굴과 재덕이 만고에 으뜸이더니 나이 이십 세에 죽으매, 후세 사람들이 가이 여겨 그 무덤 앞에 화초를 심어 망혼을 위로하는 것이오. 우리도 마침 이곳에 왔으니 한 잔 술로 위함이 어떠하뇨?”

한림은 본디 단정한 사람이라,

“형의 말씀이 옳도다. 한 잔 술을 아낄쏘냐?”

하고, 각각 제문을 지어 한 잔 술로 위하였다.

이때 정생이 무덤 주위를 돌아다니더니, 문득 깁적삼 소매에 쓰인 글을 얻어 들고 읊조리며 말했다.

“어떤 이가 이 글을 지어 무덤 구멍에 넣어두었는고?”

한림이 자세히 살펴보니, 자각봉에서 선녀와 이별하던 글이었다.

크게 놀라 말했다.

“그 미인이 선녀가 아니라 장여랑의 혼이었구나!”

이에 땀이 등을 적시고 머리털이 곤두서더라. 정생이 없는 틈을 타 다시 한 잔 술을 부어 가만히 빌며 말했다.

“비록 저승과 이승은 다르나 정의는 같은지라, 혼령이여 다시 보게 하라.”

그리하고 정생을 데리고 돌아왔다.

이날 밤 한림이 화원 별당에 앉았더니, 과연 창밖에 발자국 소리가 나거늘, 문을 열어 보니 자각봉의 선녀였다. 한편으론 반갑고 한편으론 놀라 달려 나가 옥 같은 손을 이끌자, 미인이 말했다.

“첩의 근본을 낭군이 아시는지라, 더러운 몸이 어찌 가까이하겠나이까? 처음에 낭군을 속인 것은 놀라실까 염려하여 선녀라 하고 하룻밤을 모셨더니, 오늘 첩의 무덤을 찾아와 제사를 지내고 술을 부어주시니 즐겁거니와, 또 제문을 지어 위로하시니 임자 없는 그 혼을 이같이 위로하여 주시니 어찌 감격하지 않겠나이까? 은공을 잊지 못하여 회사하러 왔거니와, 더러운 몸으로 다시 상공을 모시지 못하리로소이다.”

한림이 다시 소매를 잡고 말했다.

“사람이 죽으면 귀신이 되고 환생하면 사람이 되나니, 그 근본은 한가지라. 저승과 이승은 달라도 깊은 인연을 잊겠는가?”

그리하여 허리를 안고 들어가니, 간곡한 정이 전일보다 백배나 더하더라.

이윽고 새벽이 밝아 날이 돋는지라,

미인이 말했다.

“첩은 날이 밝으면 출입을 못하나이다.”

한림이 말했다.

“그러하면 밤으로 기약하노라.”

미인이 대답 없이 꽃밭 속으로 들어갔다.

그 뒤로 밤마다 왕래하더라.

어느 날 정생이 두진인이라는 사람을 데리고 화원에 들어가니, 한림이 일어나 예를 갖춘 뒤에 정생이 말했다.

“진인께서 한림의 상을 보아 주소서.”

진인이 말했다.

“한림의 상은 두 눈썹이 번듯하여 눈초리가 귀밑까지 뻗었으니 정승이 될 상이요, 귀밑이 분 바른 듯하고 귓밥이 구슬을 드린 듯하니 어진 이름이 천하에 진동할 것이요, 정골이 얼굴에 가득하니 병권을 잡아 국경 밖에서 봉후할 상이나, 한 가지 흠이 있는지라.”

한림이 말했다.

“사람의 길흉화복이 다 정한 바라.”

진인이 물었다.

“상공께서 가까이하는 비첩이 있으시나이까?”

한림이 말했다.

“없소이다.”

진인이 물었다.

“혹시 오래된 무덤을 지나다 이상한 일이 있었나이까?”

“없소이다.”

진인이 물었다.

“꿈속에서 여인을 가까이하신 일이 있나이까?”

“없소이다.”

정생이 말했다.

“두 선생의 말씀이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으니, 낭형은 자세히 생각하게나.”

한림이 대답하지 않자, 진인이 말했다.

“임자 없는 여귀신이 한림의 몸에 붙어 있으니, 여러 날이 지나지 않아 병이 골수에 들 것이라 구완하기 어려울까 하나이다.”

한림이 말했다.

“진인의 말씀이 그러하거니와, 장여랑이 나와 정회가 심히 깊으니 어찌 나를 해하리오? 옛날 초왕도 무산 선녀를 만나 하룻밤을 함께 하였고, 유춘이라는 사람도 귀신과 정을 통하여 자식을 낳았다 하니, 어찌 의심하리오? 또 사람의 수명이란 다 하늘이 정한 것이라, 내 상이 부귀공후할 상이면 장여랑의 혼인들 어찌하리오?”

진인이 말했다.

“한림은 마음대로 하소서.”

하고 가니라.

한림이 술에 취하여 누웠더니, 밤이 깊어 일어나 앉아 향을 피우고 장여랑 오기를 기다리더니, 홀연 창밖에서 슬피 말하는 소리가 있거늘 가만히 들어 보니 장여랑의 목소리였다.

울며 말하는 것이,

“고이한 도사의 말을 듣고 첩을 오지 못하게 하시니 어찌 박절하나이까?”

한림이 크게 놀라 문을 열고 말했다.

“어찌 들어오지 못하리오?”

여랑이 말했다.

“나를 오게 하시려면 어찌 부적을 머리에 붙이셨나이까?”

한림이 머리를 더듬어 보니 과연 축귀 부적이었다. 크게 화가 나 부적을 찢어 내던지고 달려 나가 여랑을 잡으려 하자, 여랑이 말했다.

“나는 이제 영결하오니 낭군은 옥체를 안보하옵소서.”

울며 담 너머로 가니 붙잡을 수가 없었다.

텅 빈 방에 홀로 누워 잠도 이루지 못하고 음식도 먹지 못하니, 절로 병이 들어 형용이 초췌해지더라.

어느 날 사도 부부가 큰 잔치를 베풀고 한림을 청하여 즐기더니, 사도 물었다.

“낭군의 얼굴이 어찌 저토록 초췌하뇨?”

한림이 말했다.

“정형과 술을 과히 마신 탓에 술병인가 하나이다.”

사도 말했다.

“종의 말을 들으니 어떤 여인과 함께 잔다 하니 그러한가?”

한림이 말했다.

“화원이 깊숙하오니 누가 들어오겠나이까?”

정생이 말했다.

“형이 어찌 여자처럼 부끄러워하는가? 형이 두진인의 말을 가볍게 여기거늘, 축귀 부적을 형의 상투 밑에 넣고 그날 밤 꽃밭 속에 앉아 보니, 어떤 여인이 울며 창밖에 와 하직하고 가더이다. 두진인의 말이 틀리지 않았구나.”

한림이 숨기지 못하고 말했다.

“소제 과연 괴이한 일이 있었나이다.”

그리하여 전후 자초지종을 아뢰자, 사도 웃으며 말했다.

“나도 젊었을 때 부적으로 귀신을 낮에 불러오게 하더니, 낭군을 위하여 그 미인을 불러 그리워하는 마음을 위로해 주리라.”

한림이 말했다.

“악장께서 비록 도술이 높으시나 귀신을 어찌 낮에 부르겠나이까? 소제를 희롱하시는 것이로소이다.”

사도 팔채로 병풍을 치며 말했다.

“장여랑 있느냐?”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 미인이 웃음을 머금고 병풍 뒤에서 나오거늘, 한림이 눈을 들어 보니 과연 장여랑이었다. 마음이 황홀하여 사도께 아뢰었다.

“저 미인이 귀신이나이까, 사람이나이까? 귀신이면 어찌 백주에 나오리이까?”

사도 말했다.

“저 미인의 성은 가씨요, 이름은 춘운이라. 한림이 적적한 빈방에 외로이 있음을 민망하여 춘운을 보내어 위로함이니라.”

한림이 말했다.

“위로가 아니라 희롱이로소이다.”

정생이 말했다.

“낭형은 자취지화니 지난 허물을 생각하게나.”

한림이 말했다.

“나는 지난 죄가 없으니 무슨 허물이뇨?”

정생이 말했다.

“사내가 여자처럼 삼척 거문고로 규중 처녀를 희롱하였으니, 사람이 신선이 되고 귀신이 됨이 괴이할 것이 없느니라.”

한림이 고향으로 돌아가 대부인을 모셔 와 혼례를 치르고자 하던 차에, 토번이란 오랑캐가 변방을 쳐들어와 하북을 어지럽혀 연나라·위나라·조나라가 소란하니, 천자가 진노하여 조정 대신을 불러 의논하자 양소유가 아뢰었다.

“옛날 한무제께서는 조서를 내려 남월왕의 항복을 받아내셨사오니, 원컨대 폐하께서는 급히 조서를 내리시어 천자의 위엄을 보이소서.”

천자가 말했다.

“옳도다.”

즉시 한림에게 명하여 조서를 만들어 세 나라에 보내니, 조왕과 위왕은 즉시 항복하고 말 천 필과 비단 천 필을 바쳤다. 오직 연왕만은 땅이 멀고 군사가 강한 까닭으로 항복하지 않는지라,

천자가 한림을 불러 말했다.

“선왕도 십만 군사로 항복받지 못한 나라를, 한림은 조그마한 글 한 장으로 두 나라의 항복을 받고 천자의 위엄을 만리 밖에 빛내니 어찌 아름답지 않으리오?”

비단 천 필과 말 오십 필을 상으로 내리시자, 한림이 배사하며 말했다.

“다 황상의 덕이오니 소신이 무슨 공이 있나이까? 연왕이 항복하지 않음은 나라의 수치이오니, 청컨대 한 칼을 쥐고 연나라에 가 연왕을 달래어, 듣지 않거든 연왕의 머리를 베어 오겠나이다.”

천자가 장하게 여겨 허락하시고 병부(兵符)를 주시자, 한림이 사은숙배하고 나와 정사도에게 작별을 고하고 떠나려 하니, 사도 말했다.

“슬프다. 양낭이 열여섯 어린 나이로 만리 밖에 가니 노부의 불행이로다. 내 늙고 병들어 조정 의논에 참예하지 못하나, 상소하여 다투고자 하노라.”

한림이 말했다.

“악장은 과히 염려치 마르소서. 연나라는 솥 안에 든 고기요, 그물 안에 든 새끼양이라, 무슨 염려하리이까?”

부인이 말했다.

“현서를 얻은 후로 늙은이의 희로를 위로하더니, 이제 험지로 가시니 어찌 슬프지 않으리오? 바라건대 빨리 성공하고 돌아오소서.”

한림이 화원에 들어가 행장을 다스려 출발하려 할 때, 춘운이 소매를 잡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상공이 한림원에 계실 때도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셨거늘, 이제 만리 밖으로 가시니 무사하실지 염려되어 웁니다.”

한림이 웃으며 말했다.

“대장부가 나라를 위해 나설 때는 사생을 돌아보지 않는 법이니, 어찌 사정을 생각하리오? 춘랑은 쓸데없이 슬퍼하여 꽃 같은 얼굴을 상하지 말고, 소저를 편히 모시며 내 공을 기리고 말 같은 인재를 찾아 돌아오기를 기다리라.”

그리하고 길을 떠났다.

한림이 낙양 땅을 지날 새, 열여섯 어린 나이로 옥절(玉節)을 지니고 병부를 차고 금의를 입으니 위의가 늠름하였다. 낙양 태수와 하남 부윤이 모두 앞서거니 뒤서거니 영접하니, 그 빛남이 비할 데 없었다.

한림이 하인을 보내어 계섬월을 찾으니, 섬월이 거짓으로 병을 칭하고 산중에 들어간 지 오래인지라, 한림이 섭섭한 마음을 금하지 못하여 객관에 들어가 촛불만 벗 삼아 앉아 있다가, 날이 새거늘 글을 지어 벽에 써 붙이고 떠났다.

연나라에 이르니, 그 땅 사람들이 한 모퉁이에 처하여 천자의 위엄을 보지 못하였다가 한림의 행차를 보고 황겁하여 음식을 많이 장만하여 군사를 먹이고 사례하더라.

한림이 연왕을 만나 천자의 위엄을 베푸니, 연왕이 즉시 엎드려 항복하고 황금 일만 냥과 명마 백 필을 바치거늘, 한림이 받지 않고 돌아오더니, 한단 땅에 이르러 보니 한 젊은 서생이 필마단기로 행차를 피하여 길가에 서 있거늘, 한림이 자세히 보니 얼굴이 반악(潘岳)같고 풍채와 거동이 비범하였다. 한림이 객관에 머물러 소년을 청하여 말했다.

“내 천하를 두루 다니며 보되 그대 같은 이를 보지 못하였으니, 성명이 누구뇨?”

대답하기를,

“소생은 하북 사람이라. 성은 적씨요, 이름은 생이라 하나이다.”

한림이 말했다.

“내 어진 선배를 얻지 못하여 세상사를 의논하지 못하더니, 그대를 만나니 어찌 즐겁지 않으리오?”

적생이 말했다.

“저는 초야에 묻혀 견문이 없사오나, 상공이 버리지 않으신다면 평생의 원이라 하나이다.”

한림이 적생을 데리고 산수 풍경을 구경하며 오더니 낙양 객관에 다다르니, 계섬월이 높은 누각 위에 올라 한림의 행차를 기다리다가 한림에게 나아가 절하고 앉으니, 한편으론 슬프고 한편으론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첩이 상공과 이별한 후 깊은 산중에 들어가 자취를 감추었사옵더니, 상공이 급제하여 한림 벼슬하셨다는 기별만 들었사옵거니와, 그때 옥절을 지니고 이리 지나실 줄을 모르고 산중에 있었나이다. 연나라를 항복받아 화개를 앞세우고 돌아오시매, 천지만물과 산천초목이 다 환영하오니 첩이 어찌 모르리이까. 알지 못하오나, 부인은 정하여 계시나이까?”

한림이 말했다.

“정사도 여자와 혼사를 정하였으나 아직 혼례를 치르지 못하였노라.”

말을 마친 뒤 날이 저물자, 하인이 아뢰었다.

“한림께서 적생을 어진 선배라 하셨더니, 밤 사이에 섬낭의 손을 잡고 희롱하나이다.”

한림이 말했다.

“적생은 본디 어진 사람이라 일정 그러하지 않을 것이요, 섬월도 내게 정성이 지극하니 어찌 다른 뜻이 있으리오? 네가 잘못 본 것이다.”

하인이 무안하여 물러갔더니, 이윽하여 다시 와 아뢰었다.

“상공이 제 말을 요망하다 하시매 다시 드릴 말씀이 없사옵더니, 원컨대 상공은 잠시 보소서.”

한림이 난간에 숨어 거동을 살피더니, 과연 적생이 섬월의 손을 잡고 희롱하거늘, 한림이 한마디를 들으려고 다가가더니, 적생이 홀연 한림을 보고 크게 놀라 달아나고, 섬월도 부끄러워 말을 못하거늘 한림이 말했다.

“섬낭아, 네 적생과 친하더냐?”

섬월이 말했다.

“첩이 과연 적생의 누이와 결의형제하여 그 정이 동기 같았사옵더니, 적생을 만나매 반가워 안부를 물었사옵거니와, 상공이 보시고 의심하시니 첩의 죄는 만사무석이로소이다.”

한림이 말했다.

“내 어찌 섬낭을 의심하리오? 어진 사람을 잃으니 그릇침이로다.”

그리하여 섬월과 함께 자더니, 닭이 울어 날이 새는지라. 섬월이 먼저 일어나 촛불을 돋우고 단장하더니, 한림이 눈을 들어 보니 밝은 눈과 고운 태도가 섬월이로다 — 하지만 자세히 보면 아닌지라. 한림이 놀라 물었다.

“미인은 어떤 사람인가?”

대답하기를,

“첩은 본디 하북 사람이라. 이름은 적경홍이옵더니, 섬낭과 결의형제 하였사옵더니, 오늘 밤에 섬낭이 마침 병이 있노라 하고 저더러 상공을 모시라 하거늘, 첩이 마지못하여 모셨나이다.”

말을 마치기도 전에 섬월이 문을 열고 말했다.

“상공이 오늘 밤에 새 사람을 얻으셨으니 하례하나이다. 첩이 일찍이 하북 적경홍을 상공께 천거하였더니, 과연 어떠하나이까?”

한림이 말했다.

“듣던 것보다 훨씬 낫도다. 어제 말하던 적생의 누이가 있다 하더니 그러하냐? 얼굴이 심히 닮았구나.”

경홍이 말했다.

“첩은 본디 동생이 없는지라. 첩이 과연 적생이로소이다.”

한림이 오히려 의심하여 말했다.

“홍낭은 어찌 남복을 하고 나를 속이뇨?”

경홍이 말했다.

“첩은 본디 연왕의 궁인이라. 재주와 얼굴이 남만 못하오나, 평생에 대인군자를 섬기고자 원하였더니, 접대 때에 연왕이 상공을 맞아 잔치를 베풀 새, 첩이 벽 틈으로 상공의 기상을 잠깐 뵈온 후 신혼이 호탕하여 금의옥식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상공을 따라 좇고자 하오되, 구중궁궐을 어찌 나오며 천리 만리를 어찌 따르리이까? 죽음을 각오하고 연왕의 천리마를 훔쳐 타고 남장하여 상공을 따랐사오니, 부디 상공을 속인 것이 아니거니와 엎드려 죄를 빕니다.”

한림이 섬월을 시켜 위로하였다.

이날 한림이 출발하려 할 새, 섬월과 경홍이 말했다.

“상공이 부인을 얻으신 후에 첩 등이 모실 날이 있을 것이니, 상공은 평안히 행차 하소서.”

이때에 연왕의 항복을 받은 문서와 조공한 보화를 모두 경성으로 올리니, 황제가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양한림이 승첩하여 온다.”

백관을 보내어 맞아들이고 상을 내리시며 예부상서를 배하셨다. 한림이 사은숙배하고 물러나와 정사도 댁에 뵈오니, 사도 반가움을 이기지 못하여 말했다.

“만리 타국에 가 성공하고 벼슬이 올랐으니 우리 집의 복이로다.”

하더라.

한림이 화원에 나와 춘운과 함께 소저의 안부를 물으며, 귀한 정을 헤아리지 못할지라.

어느 날 한림원에서 난간에 기대어 지어 붙인 글귀를 읊조리며 달을 구경하더니, 홀연 바람결에 퉁소 소리가 들려오거늘 하인을 불러 말했다.

“이 소리가 어디서 나느냐?”

하인이 말했다.

“알지 못하오나, 달이 밝고 바람이 순할 때면 때때로 들려오나이다.”

한림이 장 안에서 백옥 퉁소를 꺼내어 한 곡조를 부니, 맑은 소리가 청천에 사무쳐 오색 구름이 사면에 일어나고, 청학·백학이 공중에서 날아 내려와 뜰에서 춤을 추는지라. 보는 사람이 기이하게 여겨 말했다.

“옛날 왕자 진이라도 미치지 못하리라.”

하더라.

이때에 황태후에게 두 아들과 한 딸이 있었는데, 맏아들은 천자요, 또 하나는 월왕으로 봉하고, 딸은 난양공주였다. 공주가 태어날 때에 한 선녀가 명주를 가져와 팔에 걸더니, 이윽하여 공주를 낳으니 옥 같은 얼굴과 난초 같은 태도는 인간 사람이 아니요, 민첩한 재주와 늠름한 풍채는 천상 신선이더라.

태후가 가장 사랑하더니, 서역국에서 백옥 퉁소를 진상하였거늘 악공을 불러 불게 하되 소리를 내지 못하더니, 공주가 밤에 한 꿈을 꾸니 한 선녀가 한 곡조를 가르쳐 주거늘, 공주가 꿈을 깨어 그 퉁소를 불어 보니 소리가 청아하여 세상에서 듣지 못하던 곡조였다. 황제와 태후가 사랑하여 매양 달 밝은 밤이면 불게 하니, 청학이 날아와 춤을 추는지라.

태후와 황제가 매일 말하기를,

“난양이 자라면 신선 같은 사람을 얻어 부마를 삼으리라.”

하더니, 이날 밤 공주의 퉁소 소리에 춤추던 학이 한림원에 가 춤을 추는지라. 그 후에 궁인이 이 말을 퍼뜨리니, 황제가 들으시고 기특하게 여겨 말했다.

“양소유는 진정 난양의 배필이로다.”

그리하여 태후에게 들어가 아뢰었다.

“예부상서 양소유의 나이가 난양과 서로 맞고, 재주와 얼굴이 모든 신하 중의 으뜸이오니, 부마로 정할까 하나이다.”

태후가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소화의 혼사를 정하지 못하여 밤낮으로 염려하더니, 양소유는 진정 소화의 천정배필이로다. 내 양상서를 보고 청하고자 하노라.”

황제가 말했다.

“어렵지 않으니, 양상서를 불러 별전에 앉히고 문장을 의논할 때에, 태후 낭낭께서는 주렴 안에서 보시면 아시리이다.”

태후가 크게 기뻐하시더라.

난양의 이름은 소화니, 그 퉁소에 새겨져 있거늘 이를 따라 이름 지었더라.

임술맹추(壬戌孟秋) 완산개판(完山開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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