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가기
구운몽
Table of Contents
구운몽
김만중
Reading Settings
글꼴 크기
18px
테마
라이트
다크
세피아
눈 보호
줄 간격
읽기 모드
번역 Pagera AI
원문 Public Domain
Chapter 3 of 3

원문

구운몽 하

천자께서 환관을 보내어 상서를 부르셨다. 환관이 정사도 댁에 가서 물으니 상서는 오지 않았다. 환관이 급히 찾아보니, 상서는 마침 정십삼을 데리고 장안의 주루에 가서 술이 거나하게 취해 있었다. 환관이 급히 명패로 부르자, 상서는 취중에 인사를 차리지 못한 채 창기에게 붙들려 조복을 입고 겨우 들어가 황제를 알현하였다. 황제께서 크게 기뻐하며 자리를 내어 주시고, 이어서 역대 제왕의 치란흥망과 만고의 문장명필을 의논하셨다. 상서가 고금 제왕을 낱낱이 의논하고 문장을 차례로 헤아리니, 황제께서 크게 기뻐하며 말씀하셨다.

“짐이 이태백을 보지 못함을 한탄하더니, 경을 얻었으니 어찌 이태백을 부러워하리오. 짐이 글 하는 궁녀 여럿을 골라 여중선을 봉하였으니, 경이 그 궁녀들에게 각각 글을 지어 주면 그 재조를 보고자 하노라.”

말씀을 마치고 즉시 궁녀를 명하여 백옥 서안과 유리 벼루와 금 섬연적을 앞에 놓게 하셨다. 모든 궁녀들이 차례로 늘어서서 혹은 청능지와 백능지를, 혹은 깁 수건이며 글 그린 부채를 들고 다투어 글을 비니, 상서는 취흥이 한창 올라 채필을 한 번 두르치면 구름과 바람이 일어나고 용과 뱀이 뒤틀리는 듯하였다. 순식간에 궁녀들에게 모두 지어 주니, 궁녀들이 그 글을 가지고 차례로 황제께 들였다. 황제께서 다 보시고 극히 아름다이 여겨 궁녀를 명하여 어주를 내리게 하셨다. 궁녀들이 다투어 각각 술을 드리니, 상서는 받는 듯 주는 듯 삼십여 배를 마신 끝에 대취하여 인사를 모르게 되었다.

황제께서 말씀하셨다.

“이 글귀의 값을 따지자면 천금이라. 옛글에 이르기를, ‘목과를 던지거든 경구로써 갚으라.’ 하였으니, 너희는 무엇으로 윤필지자에게 갚겠느냐?”

모든 궁녀들이 금봉차도 빼며, 백옥 금패도 끌르며, 옥지환도 벗어 서로 다투어 상서에게 던지니, 잠깐 사이에 쌓인 것이 여미와 같았다.

황제께서 웃으며 말씀하셨다.

“짐은 무엇으로 상을 내리리오?”

말씀하시고 환관을 시켜 쓰던 필묵과 벼루와 연적과 궁녀들이 드린 보화를 거두어 상서 댁에 들이도록 하셨다. 상서가 머리를 조아려 사은하고 일어나 화원으로 갈 때, 춘운이 내달아 옷을 벗기며 물었다.

“뉘 댁에 가셔서 이다지도 취하셨습니까?”

말을 맺기도 전에 종이 필묵·벼루·연적과 봉차·지환·금패물을 무수히 들여왔다.

상서가 춘운에게 말했다.

“이 보화는 모두 천자께서 춘량으로 상사하신 것이라.”

춘운이 다시 듣고자 하였으나 상서는 벌써 잠이 들어 있었다.

이튿날 상서가 일어나 세수를 하는데, 문지기가 급히 고하였다.

“월왕께서 오셨습니다.”

상서가 크게 놀라 신을 벗고 달려 나가 맞이하여 상좌에 앉히고 물었다.

“전하께서 무슨 일로 누지에 행차하셨습니까?”

월왕이 말했다.

“과인이 황제의 명을 받들어 왔소. 난양공주께서 나이가 찼으되 부마를 정하지 못하였더니, 황제께서 상서의 재덕을 사랑하셔서 혼인을 정하고자 하십니다.”

상서가 크게 놀라 말했다.

“소신이 무슨 재덕이 있겠사옵니까? 황은이 이러하시니 아뢸 말씀이 없사오나, 정사도 여자와 더불어 혼인을 정하여 납폐를 한 지 삼 년이오니, 원컨대 대왕께서는 이 뜻을 황제께 아뢰어 주소서.”

월왕이 말했다.

“내 돌아가 아뢰려니와, 슬프다. 상서가 사랑하던 일이 허사로구나.”

상서가 말했다.

“혼인은 인륜의 대사이오니 소신이 들어가 대죄하리이다.”

월왕이 즉시 하직하고 떠났다.

상서가 들어가 사도를 보고 월왕의 말로 고하니, 집안 모두가 황망하여 어찌할 줄을 몰랐다.

애초에 황태후께서 상서를 보시고 크게 기뻐하며 말씀하셨다.

“이 사람은 난양의 천정배필이니, 어찌 다른 의논이 있으리오?”

하셨다.

천자께서 상서의 글과 글씨를 잊지 못하여 다시 보고자 하시어 태감을 명하여 즉시 거두어 들이라 하셨다. 궁녀들이 이미 깊이 그 글을 간수하였으되, 한 궁녀는 상서가 글 쓴 부채를 들고 자기 침실에 들어가 슬피 울었다. 이 궁녀의 성명은 진채봉이니, 화음 땅 진어사의 딸이었다. 진어사가 죽은 후 궁비로 정속되었더니, 천자께서 보시고 사랑하여 후궁을 봉하고자 하셨다. 황후가 그 재덕을 보고 총애를 빼앗길까 염려하여 말씀하셨다.

“진낭자의 재행이 족히 후궁을 봉할 만하오되, 제 아비를 죽이고 그 딸을 가까이 함이 옳지 않습니다.”

천자께서 말씀하셨다.

“옳다.”

하시고 채봉을 불러 말씀하셨다.

“너를 황태후 궁중에 보내어 난양공주를 모셔 글이나 힘써 하게 하노라.”

보내시니, 공주도 그 재모를 보시고 사랑하여 한시도 곁을 떠나지 못하게 하셨다.

어느 날 황태후를 모시고 봉내전에 가서 양상서의 글을 얻었다. 상서는 진씨를 알지 못하였으되 진씨는 알아보고, 저절로 슬픔을 이기지 못해 눈물을 머금고 남이 알까 두려워 부채만 들고 물러나 상서를 피하는 듯, 한 번 글을 읊으니 눈물이 천 줄기로 흘렀다. 진낭이 옛일을 생각하며 상서의 글에 화답하여 그 부채에 써 두었는데, 홀연 태감이 급히 와서 양상서 글을 다 들이라 하신다고 전하였다. 진씨가 크게 놀라 말했다.

“다시 찾으실 줄을 알지 못하고 그 글에 화답하여 그 부채에 써 두었으니, 황상이 보시면 반드시 죄가 중할 것이니 차라리 자결하리라.”

태감이 말했다.

“황상이 어지시니 반드시 죄 주지 아니하실 것이요, 내 또한 힘써 구원할 것이니 염려 말고 가사이다.”

진씨가 마지못하여 태감을 따라갔다.

태감이 모든 궁녀의 글을 차례로 들이니 황제께서 글마다 보시다가, 진씨 부채에 쓴 글을 보시고 이상히 여겨 물으셨다.

“양상서 글 아래 누가 화답하였느냐?”

태감이 말했다.

“진씨 말씀을 들으니, ‘황상이 다시 찾으실 줄을 모르고 외람되이 화답하여 썼노라.’ 하고 죽으려 하옵거늘, 소신이 못 죽게 하여 데려왔나이다.”

황제께서 다시 진씨의 글을 보시니, 그 글에 이르기를,

깁 부채 둘렀으니 가을 달 같으니,
누 위에서 부끄러워하던 일 생각하리로다.
처음에 지척에서 서로 알지 못하고,
문득 그대로 하여금 자상히 보게 함을 뉘우치노다.

였다.

황제께서 보시고 말씀하셨다.

“진씨에게 반드시 사정이 있도다. 어떤 사람을 보았기에 이 글이 이러한가? 그러나 재주가 아까우니 살리노라.”

하시고 태감을 명하여 진씨를 부르셨다. 진씨가 들어가 섬돌 아래 내려 머리를 두드리며 말했다.

“소첩이 죽을 죄를 지었사오니, 원컨대 속히 죽여 주소서.”

황상이 말씀하셨다.

“속이지 말고 바로 아뢰어라. 어떤 사람과 더불어 사정이 있느냐?”

진씨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황상이 물으시니 어이 속이리이까? 첩의 집이 아직 패하기 전에, 양상서가 과거에 가다가 첩을 보시고 양류사로써 서로 화답하고 결친하기를 언약하였사옵더니, 알아서 봉내전에서 글 지을 때 첩은 상서를 알아보고 상서는 첩을 알지 못하는 고로 슬픈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우연히 화답하였사옵더니, 첩의 죄는 만사무석이로소이다.”

황상이 말씀하셨다.

“네 양류사를 기억하느냐?”

진씨가 즉시 양류사를 써 드리니, 황상이 보시고 말씀하셨다.

“네 죄는 중하나 네 재주가 기특하니 용서하노라. 돌아가 난양을 정성으로 섬기라.”

하시고 부채를 주셨다.

이날 황상이 황태후를 모시고 잔치를 베풀었더니, 월왕이 양상서 댁에서 돌아와 정사도 댁에 납폐한 말을 아뢰니, 황태후가 크게 노하여 말씀하셨다.

“양상서가 조정 체모를 알진대 어찌 나라의 명을 거역하리오?”

이튿날 황상이 양소유를 불러 인견하시고 말씀하셨다.

“짐에게 누이동생이 있는데, 경이 아니면 가히 배필이 될 사람이 없는지라. 월왕으로 하여금 경의 댁에 보냈더니 경이 정사도 댁 말로써 사양한다 하니, 생각지 못한 일이로다. 예부터 부마를 정하면 얻은 아내라도 소박하거든, 상서는 정가 여자와 혼례를 행한 일이 없는지라. 정가 여자는 자연히 갈 곳이 있을 것이니 무슨 해로움이 있으리오?”

상서가 머리를 두드리며 말했다.

“소신은 먼 고향 사람으로 경사에 와 몸을 의탁할 곳이 없어 정사도의 관대함을 입어 사처를 정하옵고 납례를 하여 옹서의 의를 베풀고 부부의 의를 정하였으되, 이제까지 혼례를 행하지 못하옴은 국사가 많아 모친을 데려오지 못하였사옵더니, 이제 소신을 부마로 정하시면 정가 여자는 죽기로써 수절할 것이니, 어찌 국경에 해롭지 않겠나이까?”

황상이 말씀하셨다.

“경의 정상은 그러하나 혼례를 행하지 아니하였으니 정가 여자가 무슨 수절이며, 또 황태후께서 경의 재덕을 사랑하여 부마를 정하고자 하시니 경은 너무 사양하지 말라. 혼인은 대사이니 어찌 세쇄한 사정을 생각하리오. 짐과 바둑이나 두자.”

하시고 종일토록 바둑을 두다가 나오니, 정사도가 상서를 보고 눈물을 백수에 흘리며 말했다.

“오늘 황태후께서 전교하시되 ‘양상서의 납채를 속히 내어 주라. 아니하면 큰 죄가 있으리라.’ 하시는 고로 납채를 화원에 내어 보냈으니, 우리 집 일이 이로써 끝났다. 나는 겨우 버티겠거니와 노처는 병이 나서 인사를 차리지 못하니, 이런 형상이 있겠느냐?”

상서가 실색하여 말을 못 하다가 이윽고 말했다.

“내가 상소하여 힘써 다투면 조정의 공론이 없겠습니까?”

사도가 말했다.

“상서가 이제 상소하면 반드시 중죄를 얻을 것이려니와, 천명을 받든 후에 화원에 있기가 미안하니, 아무리 떠나기 섭섭하나 다른 데 사처함이 마땅하도다.”

상서가 대답하지 않고 화원으로 나가니, 춘운이 눈물을 흘리며 납채를 붙들고 말했다.

“소저의 명으로 와 상서를 모신 지 오래옵더니, 하필이면 일이 이리 되오니, 소저의 혼사는 다시 바랄 것이 없사오니 첩도 이제 영결하나이다.”

상서가 말했다.

“내가 상소하여 힘써 다투려니와, 설사 허락하지 않으신들 춘낭은 이미 내게 허신하였으니 어찌 나를 버리리오.”

춘운이 말했다.

“첩이 비록 민첩하지 못하나 여필종부의 의를 어이 모르리오마는, 첩이 어려서 소저와 더불어 사생영축을 한가지로 하자 맹세하였으니, 오늘날 상서를 모시기도 소저의 명이라. 소저가 종신 수절하오면 첩이 어디 가 있겠습니까?”

상서가 말했다.

“소저는 동서남북 뜻대로 갈 것이려니와, 춘낭은 소저를 좇아 다른 사람을 섬기면 여자의 정절이 있겠느냐?”

춘운이 말했다.

“상공은 우리 소저를 알지 못하시는군요. 소저는 정한 일이 있는지라. 부모 슬하에 있다가 백년이 지난 후에 터럭을 끊고 몸을 재계하여 산문에 몸을 맡겨 일생을 지키고자 하시니, 첩이 홀로 어디로 가겠습니까? 상서가 춘운을 보고자 하시거든 납채를 소저 방으로 보내소서. 그리하지 않으면 죽어 후세나 다시 뵙겠나이다. 바라건대 상공은 만세 안녕하소서.”

하고, 문득 뜰에 내려 두 번 절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상서가 마음이 적막하여 길게 탄식만 하였다.

이날 상서가 상소하니, 그 글에 이르기를,

한림학사 겸 예부상서 양소유는 돈수백배하여 황제 폐하께 아뢰나이다. 대개 인륜은 왕정의 근본이요, 혼인은 인륜의 대사라. 왕정을 잃으면 나라가 그릇되고 혼인을 삼가지 아니하면 가도가 망하나니, 어찌 혼인을 삼가 왕정을 굳게 하지 않으리이까? 소신이 마침 정가 여자로 혼인을 정하여 납채하였더니, 천만의외에 부마를 봉하고자 하셔서 황태후 명으로 이미 받든 납채를 내어 주시니, 예로부터 듣지 못하던 바로소이다. 원컨대 폐하께서는 왕정과 인륜을 살펴 정가의 혼인을 허하소서.

황상이 보시고 태후께 아뢰니, 태후가 크게 노하여 양상서를 전옥에 가두라 하셨다. 조정 백관이 모두 간쟁하였으나 듣지 아니하셨다.

이때 토번이 중국을 얕보아 삼만 병을 거느리고 와 변경을 노략하니, 선봉이 위교에 이르렀다. 황상이 조정 대신을 불러 의논하시니, 모두 아뢰었다.

“양상서가 전일에도 군병을 쓰지 않고 세 진을 평정하였사오니, 지금도 양상서가 아니면 당할 이 없을까 하나이다.”

황상이 말씀하셨다.

“옳다.”

하시고, 즉시 들어가 태후께 아뢰셨다.

“조정에는 양소유 아니면 도적을 당할 이 없다 하오니, 비록 죄가 있사오나 국사를 먼저 하소서.”

태후가 허락하시니, 즉시 사자를 보내어 양상서를 불러 인견하시고 물으셨다.

“도적이 급하니 경이 아니면 제어치 못할지라. 어찌하겠는가?”

상서가 대답하였다.

“신이 비록 재주가 없사오나, 수천 군을 얻어 이 도적을 파하여 죽을 목숨을 구원하신 은덕을 만분의 일이나 갚을까 하나이다.”

황상이 크게 기뻐하며 즉시 대사마 대원수를 봉하시고 삼만 군을 내려 주셨다.

상서가 이날 황상께 하직하고 군병을 거느리고 위교로 나아가니, 선봉장이 달려들어 좌현왕을 살아 잡으니 적세가 대패하였다. 모두 도망하거늘 쫓아가 세 번 싸워 세 번 이기고, 수급 삼만과 선마 팔천을 얻어 승첩을 천자께 보고하니, 황상이 크게 기뻐하며 못내 칭찬하셨다.

상서가 또 궁중에 상소하였다.

“도적을 비록 파하였으나, 적의 땅에 들어가 멸하고 돌아오겠나이다.”

하였다.

황상이 소를 보시고 크게 여겨 병부상서 대원수 벼슬을 하이시고, 통천어대·참마검·백모황월을 주시고, 하북과 농서의 병마를 모두 조서하여 양상서를 도우라 하셨다.

상서가 날을 가려 발행하니, 홍기가 엄숙하고 위의가 씩씩하였다. 수일 사이에 오십여 성을 항복받고 적절산 아래 유진하였더니, 홀연 찬 바람이 일어나며 까치가 진 안으로 들어와 울고 가거늘, 상서가 말 위에서 점을 치니 선흉후길한 괘였다. 상서가 촛불을 밝히고 병서를 보더니 삼경이 되어 촛불이 꺼지며 냉기가 사람을 놀라게 하였다. 문득 한 여자가 공중에서 내려와 상서 앞에 서거늘, 보니 손에 팔 척 비수를 들고 얼굴이 눈빛 같았다. 상서가 자객인 줄을 알고 안색을 변하지 않고 물었다.

“여자는 어떤 사람이기에 밤에 군중에 들어왔느냐?”

대답하였다.

“나는 토번국 찬보의 명으로 상서의 머리를 베러 왔나이다.”

상서가 웃으며 말했다.

“대장부가 어찌 죽기를 두려워하리오.”

안색이 자약하니, 그 여자가 칼을 땅에 던지고 머리를 들어 말했다.

“상서는 염려치 마소서.”

상서가 붙들어 일으키고 물었다.

“그대가 나를 해치지 않음은 어찌인가?”

여자가 대답하였다.

“첩은 본래 양주 사람이라. 부모를 일찍 여의고 한 도사를 따라 검술을 배울 때, 첩의 성명은 심효연이라. 진희월이와 김채홍이와 한가지로 배운 지 삼 년에 바람을 타고 번개를 좇아 천리를 가는지라. 선생이 혹 원수를 갚거나 사나운 사람을 죽이고자 하면 매양 희월과 채홍을 보내고 첩은 보내지 않거늘, 첩이 이상히 여겨 물으니 선생이 말하기를, ‘어찌 네 재주가 부족하리오. 너는 인간의 귀한 사람이라. 대황국 양상서의 배필이 될 것이니 어찌 사람을 살해하리오.’ 첩이 말하기를, ‘그러하면 검술을 배워 무엇 하리오?’ 선생이 말하기를, ‘양상서를 백만 군중에서 만나 연분을 맺을 것이니, 또 토번이 천하 자객을 모아 양상서를 죽이려 하니 네 속히 나가 자객을 물리쳐 양상서를 구원하라.’ 하거늘, 첩이 토번국에 와 모든 자객을 물리치고 왔사오니, 어찌 상공을 해하겠습니까?”

상서가 이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낭자가 죽어가는 목숨을 구원하고 또 몸으로써 허락하니, 이 은혜를 어찌 갚으리오. 낭자와 더불어 백년해로하리라.”

하고 옥장에 들어가 동침하니, 군영 안에 달빛이 뜰에 가득하고 옥문관 밖에 봄빛이 향기로웠다. 그 기쁨을 어찌 헤아리리오.

효연이 문득 하직하며 말했다.

“군중은 여자가 있을 곳이 아니니 돌아가나이다.”

상서가 말했다.

“낭자는 세상 사람이 아니라. 기특한 꾀를 가르쳐 도적을 파하게 할 것이어늘, 어찌 나를 버리고 급히 가느냐?”

효연이 말했다.

“상곡의 용약으로 패한 도적 치기는 손바닥의 침 뱉기 같으니 무슨 염려가 있으리오. 첩이 잠시 돌아가 선생을 모시고 있다가, 상서께서 환군하신 후에 가 모시겠나이다.”

상서가 말했다.

“한 말이나 가르치고 가라.”

효연이 말했다.

“반사곡에 가 물이 없거든 샘을 파 군사를 먹이고 돌아가소서.”

또 무슨 말을 묻고자 하더니 문득 공중으로 올라가 간 데 없었다. 상서가 제장을 불러 효연의 말을 전하니, 모두 이르기를,

“장군이 하도 신통하시기에 천신이 와 도움이로이다.”

하였다.

상서가 군사를 거느리고 돌아올 때, 한 곳에 당하니 길이 좁아 항진을 통하지 못하였다. 겨우 굴러 수백 리를 나와 한 들을 만나 유진하니 군세가 모두 목이 말라 급한지라. 마침 못물을 보고 마시니 일시에 몸이 풀리고 말을 통하지 못하여 죽어가는지라. 상서가 크게 놀라 문득 심효연의 말을 생각하니 ‘필연 반사곡이로다.’ 하고, 즉시 샘을 팠으나 물이 나지 않으니, 상서가 염려하여 진을 옮기고자 하였다. 홀연 북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며 산천이 다 응하니, 대저 적병이 험한 길을 막아 엄습하고자 함이었다.

제장과 군사가 기갈이 심하여 적병을 당적할 뜻이 없으니, 상서가 크게 민망하여 옥장에 앉아 계책을 생각하더니, 홀연 잠이 들어 한 꿈을 꾸었다. 청의 여동이 앞에 와 서거늘 보니 단정한 얼굴이 범인이 아니었다.

상서께 아뢰어 말했다.

“우리 낭자가 한 말씀을 상서께 사뢰고자 하오니, 원컨대 상서께서는 잠시 행차하소서.”

상서가 말했다.

“네 낭자는 어떤 사람이냐?”

대답하였다.

“우리 낭자는 동정 용왕의 작은 딸이시거니와, 잠시 피우하여 여기 와 계십니다.”

상서가 말했다.

“용녀는 수부에 있고 나는 세상 사람이라. 어찌 가리오?”

여동이 말했다.

“말을 진문 밖에 매어 두었사오니, 그 말을 타시면 자연히 가시겠나이다.”

상서가 여동을 따라가니, 이윽고 들어가자 궁궐이며 위의가 찬란하였다. 여동 수인이 나와 상서를 맞이하여 백옥 교위에 앉히거늘, 상서가 사양하지 못하여 앉았더니, 시녀 수십 인이 한 낭자를 모시고 나왔다. 아리따운 태도와 씩씩한 거동은 두고 헤아릴 수 없을 만하였다.

시녀가 상서께 아뢰었다.

“우리 낭자가 상서께 예알하나이다.”

상서가 놀라 피하고자 하였으나 좌우 시녀가 붙잡으니 무가내하였다. 용녀가 배례를 갖춘 후에 상서가 시녀를 명하여,

“전상에 모셔라.”

하니, 용녀가 사양하고 옆에 무릎 꿇어 앉거늘, 상서가 말했다.

“양소유는 인간의 천한 사람이요, 낭자는 용궁의 신녀이니, 어이 이다지도 지나치게 하시는가?”

용녀가 일어나 두 번 절하고 말했다.

“첩은 동정 용왕의 딸이라. 부왕이 옥황상제께 조회하실 때, 장진인을 만나 첩의 팔자를 물으니 진인이 말하기를, ‘이 아이는 천상 선녀라. 죄를 지어 용왕의 딸이 되었으나, 인간 양상서의 첩이 되어 영화를 얻어 백년해로하다가 다시 불가에 돌아가 극락세계에 천만 년을 지내리라.’ 하였사오니, 부왕이 이 말을 듣고 첩을 각별히 사랑하였더이다. 천만 뜻밖에 남해 용왕의 태자가 첩의 자색을 듣고 구혼하니, 우리 동정은 남해 소속이라 부왕이 거절하지 못하여 몸소 가서 장진인의 말로 밝히셨으나, 남해 왕이 믿지 않는다 하고 구혼을 더욱 급히 하거늘, 첩이 생각다 못하여 피하여 이 물에 와 웅거하였사오니, 이 물 이름은 백룡담이라. 물빛과 맛을 변하여 인물을 통하지 못하게 하였더니, 지금 상서를 청하여 이 누지에 오셔서 신세를 부탁하오니, 상서의 근심은 첩의 근심이라. 어찌 구원하지 않겠습니까? 그 물맛을 다시 달게 하겠사오니, 군사가 마시면 자연히 병이 나으리이다.”

상서가 말했다.

“낭자의 말을 들으니 하늘이 정한 연분이라. 낭자와 더불어 동침함이 어떻겠습니까?”

용녀가 말했다.

“첩의 몸을 이미 상서께 허하였으나, 부모께 고하지 않음이 불가하고, 또 남해 태자가 수만 군을 거느리고 첩을 도모하니 그 환이 상서께 미칠 것이요, 첩의 몸에 비늘을 벗지 못하였으니 귀인의 몸을 더럽힘이 불가하나이다.”

상서가 말했다.

“낭자의 말씀이 아름다우나, 낭자 부왕이 나를 기다리니 고하지 않아도 부끄럽지 않고, 몸에 비늘이 있으나 선분이 정하여지면 관계치 않고, 내 백만 군병을 거느렸으니 남해 태자를 어찌 두려워하리오.”

하고 용녀를 이끌어 취침하니, 그 즐거움은 꿈도 아니요 인간보다 백배나 나았다.

날이 새기 전에 북소리가 급히 들려오거늘, 용녀가 잠을 깨어 일어나 앉으니 궁녀가 들어와 급히 아뢰었다.

“지금 남해 태자가 무수한 군병을 거느리고 와 산하에 진을 치고 양상서와 사생을 다투고자 하나이다.”

상서가 크게 웃으며 말했다.

“미친 아이가 나를 어찌하리오.”

하고, 일어나 보니 남해 군병이 백룡담을 여러 겹으로 에워싸고 함성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다.

남해 태자가 외쳐 말했다.

“네 어떤 것이기에 남의 혼사를 짓밟느냐? 너와 더불어 사생을 결단하리라.”

하거늘, 상서가 크게 웃으며 말했다.

“동정 용녀는 나와 삼생의 인연이 있어 하늘과 귀신이 다 아는 일이거늘, 너 같은 벌레가 감히 천명을 거스르느냐?”

하고 기를 들어 백만 군병을 몰아 싸우니, 천만 수족이 모두 패하였다. 원참군·별주부·이제독을 한 칼에 베고 남해 태자를 살아 잡아 죄를 물은 뒤 놓아주었다.

이때 용녀가 군문 앞에서 하례하고, 술 천 석과 말 천 필로 군사를 위로하였다. 양원수가 용녀와 한가지로 앉았더니, 이윽고 동남쪽에서 붉은 옷 입은 사자가 공중에서 내려와 상서께 아뢰어 말했다.

“동정 용왕이 상서의 공적을 치하하고자 하오되, 맡은 일을 떠나지 못하여 지금 응벽전에 잔치를 베풀고 상서를 청하나이다.”

상서가 용녀와 수레 위에 오르니 바람이 수레를 몰아 공중으로 날아가더니, 이윽고 동정 용궁에 이르자 용왕이 멀리 나와 맞이하여 들어가 옹서의 의를 베풀고 잔치하였다. 용왕이 잔을 잡고 상서께 사례하여 말했다.

“과인이 덕이 없어 한 딸을 두고 남에게 곤한 일이 많았더니, 양원수의 위덕으로 근심을 제하오니 어찌 즐겁지 않겠습니까.”

상서가 대답하였다.

“다 대왕의 신령하심이라. 무슨 사례가 필요하겠습니까?”

상서가 술이 취하매 하직하며 말했다.

“군중이 다사하오니 오래 머물지 못할지라. 바라건대 낭자와 더불어 후기를 잊지 마소서.”

하고, 용왕과 한가지로 궁문 밖에 나오더니, 문득 한 산이 있으되 다섯 봉이 높이 구름 속에 들어서되 붉은 안개가 사방에 둘러 있고 층암절벽이 하늘에 이어졌거늘, 상서가 물었다.

“저 산은 무슨 산입니까?”

용왕이 말했다.

“저 산 이름은 남악산이라 하거니와, 산천이 아름답고 경치가 거룩하나이다.”

상서가 말했다.

“어찌하여야 저 산에 올라 구경하겠습니까?”

용왕이 말했다.

“날이 저물지 않았으니, 올라 구경하여도 늦지 않겠나이다.”

상서가 즉시 수레를 타니 벌써 연화봉에 가 있었다. 죽장을 짚고 천봉만학을 차례로 구경하며 말했다.

“슬프다. 이런 승경을 버리고 병진에 골몰하니, 언제야 공을 이루고 몸이 물러나 이런 산천을 찾겠는가?”

하더니, 홀연 경쇠 소리가 들려오거늘 상서가 찾아 올라가니 한 절이 있으되, 법당이 정쇄하고 중들이 모두 신선 같았다. 한 노승이 있으되 눈썹이 길고 뼈가 푸르고 정신이 맑으니, 그 나이는 헤아리지 못할 만하였다. 문득 상서를 보고 모든 제자를 거느리고 당에서 내려와 예하며 말했다.

“깊은 산중에 있는 중이 귀먹어 대원수 행차를 알지 못하여, 산문 밖에 나가 대령하지 못하였으니, 청컨대 상공은 허물하지 마소서. 또 이번은 대원수께서 아주 오신 길이 아니오니, 속히 법당에 올라 예불하고 가소서.”

상서가 즉시 불전에 가 분향 재배하고 섬에서 내려오자, 발이 땅에 닿자마자 잠이 깨니 몸이 옥장 속에 앉아 있었다. 동방이 점점 밝아오거늘, 상서가 제장을 불러 말했다.

“공들도 무슨 꿈이 있느냐?”

제장이 말했다.

“소인들도 다 꿈을 꾸었으니, 장군을 모시고 신병귀졸과 더불어 대전하여 그 장수를 살아 잡아 뵈었으니, 이는 길조인가 하나이다.”

상서도 꿈 일을 낱낱이 말하고, 제장을 데리고 물가에 가 보니 부서진 비늘이 땅에 깔리고 피 흘러 물이 붉었다. 상서가 그 물을 맛보니 과연 달거늘, 군사와 말에게 먹이니 병이 즉효하였다. 적병이 이 말을 듣고 크게 놀라 즉시 항복하거늘, 상서가 영하여 승전 첩서를 올리니 천자께서 크게 기뻐하셨다.

어느 날 천자께서 황태후께 아뢰셨다.

“양상서의 공은 만고에 으뜸이오니, 환군한 후에 즉시 승상을 봉하려니와, 난양의 혼사를 양상서가 회심하여 허락하면 좋겠거니와, 만일 고집하면 공신을 죄 줄 수 없고 혼인을 우력으로 할 수도 없으니 어찌 하리이까? 심히 민망하여이다.”

태후가 말씀하셨다.

“양상서가 돌아오기 전에 정사도의 여자를 다른 혼인을 급히 하게 하면 어떠하뇨?”

황상이 대답하지 않고 나가거늘, 난양공주가 이 말을 듣고 태후께 아뢰었다.

“낭낭은 어찌 이런 말씀을 하시나이까? 정가의 혼사는 제 집 일이오니 어찌 조정에서 권하리이까?”

태후가 말씀하셨다.

“내 벌써 너와 의논하고자 하노라. 양상서는 풍채·문장이 세상의 으뜸뿐이 아니라, 퉁소 한 곡조로 네 연분을 정하였으니, 어찌 이 사람을 버리고 다른 데 구하리오. 양상서가 돌아오면 먼저 네 혼사를 지내고 정사도 여자로 첩을 삼게 하면, 양상서가 사양할 바가 없으려니와, 네 뜻을 알지 못하여 염려하노라.”

공주가 대답하였다.

“소저는 일생 투기를 알지 못하오니, 어찌 정가 여자를 꺼리겠습니까? 다만 양상서가 처음으로 납폐하였다가 다시 첩을 삼으면 예가 아니요, 또 정사도는 누대 재상의 집이라. 그 여자로 남의 희첩이 됨이 어찌 원통하지 않겠습니까?”

태후가 말씀하셨다.

“네 뜻이 그러하면 어찌 하겠는가?”

공주가 말했다.

“들으니 제후는 삼 부인이라 하니, 양상서가 성공하고 돌아오면 후왕을 봉할 것이니, 두 부인을 취함이 어찌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태후가 말씀하셨다.

“불가하다. 사람이 귀천이 없으면 관계치 않겠거니와, 너는 선왕의 귀한 딸이요 금상의 사랑하는 누이라. 어찌 여염 천한 사람과 함께 섬기겠는가?”

공주가 말했다.

“선배가 어질면 만승천자도 벗한다 하오니 관계치 않으며, 또 정가 여자는 자색과 덕행이 아무리 예 사람이라도 미치기 어렵다 하오니, 그러하면 소녀의 다행이라. 아무튼 그 여자를 친히 보아 듣던 말과 같으면 몸을 굽혀 섬김이 가하고, 그렇지 않으면 첩을 삼거나 임의로 하소서.”

태후가 말씀하셨다.

“여자의 투기는 예부터 있거늘, 너는 어찌 이다지도 어질고 인후하다. 내 내일 정가 여자를 부르리라.”

공주가 말했다.

“아무리 낭낭의 명이 있어도 칭병하면 부질없고, 재상가 여자를 어찌 불러들이겠습니까? 소녀가 친히 가 보겠나이다.”

하였다.

이때 정소저가 부모를 위하여 태연한 체하였으나, 형용이 저절로 초췌하였다.

어느 날 한 여동이 비단 족자를 팔러 왔거늘, 춘운이 보니 꽃밭 속에 공작이었다. 춘운이 족자를 가지고 들어가 소저께 아뢰었다.

“이 족자가 어떻습니까?”

소저가 보고 놀라 말했다.

“어떤 사람이 이런 재주가 있는가? 인간 사람이 아니로다.”

하고 춘운을 명하여,

“족자 난 곳을 찾아라.”

하니, 춘운이 그 여동을 불러 물었다.

“이 족자는 어디서 나며, 어떤 사람이냐?”

여동이 말했다.

“우리 소저의 재조이거니와, 우리 소저가 객중에 계셔서 급히 쓸 데 있어 파셨으되, 값의 많고 적음은 보지 않나이다.”

춘운이 말했다.

“너의 소저는 뉘 댁 낭자이며, 무슨 일로 객중에 머무느냐?”

여동이 말했다.

“우리 소저는 이통판의 매씨라. 이통판이 절동 땅에 벼슬로 가실 때, 부인과 소저를 모시고 가더니, 소저가 병들어 가지 못하여 연지촌 사삼낭의 집에 사처하고 계시나이다.”

정소저가 그 족자를 후한 값을 주고 사서 중당에 걸어 두고 춘운에게 말했다.

“이 족자 임자를 시비 보내어 얼굴이나 보고자 하노라.”

하고 즉시 시비를 보냈다.

시비가 돌아와 아뢰었다.

“억만 장안을 다 보아도 우리 소저 같은 이 없더니, 과연 이소저는 우리 소저와 같더이다.”

춘운이 말했다.

“그 족자를 보니 재조는 아름다우나, 어찌 우리 소저 같은 사람이 있으리오? 네가 그릇 보았도다.”

어느 날 사삼낭이 부인과 정소저께 아뢰었다.

“소인 집에 이통판댁 낭자가 사처하셨으되, 소저의 재덕을 듣고 한 번 뵙고자 청하나이다.”

부인이 말했다.

“내 그 낭자를 보고자 하되 청하기 미안하여 못 하였더니, 그대 말을 들으니 어찌 기쁘지 않겠습니까?”

이튿날 이소저가 백옥 교자를 타고 시비를 데리고 오는지라. 정소저가 나와 맞이하여 침실에 들어가 서로 마주하여 앉으니, 월궁에서 항아를 만나고 선계에 참예한 듯, 그 광채를 비할 데가 없었다.

정소저가 말했다.

“마침 시비를 통하여 들으니 저저가 가까이 계신다 하오되, 나는 팔자가 기박하여 인사를 사절하는 고로 가 뵙지 못하였사옵더니, 저저가 이런 더러운 곳에 오시니 극히 감사하여이다.”

이소저가 말했다.

“나는 본래 초야에 묻힌 사람이라. 부친을 일찍 여의고 모친을 의지하여 배운 일은 없사오나, 마침 소저의 명행을 듣사옵고 한 번 뵈어 가르치시는 말씀을 듣고자 하였더니, 더러운 몸을 버리지 않으시니 평생의 원이라 하나이다. 또 들으니 댁에 춘운이 있다 하오니, 볼 수 있겠습니까?”

정소저가 즉시 시비를 명하여 춘운을 부르니, 춘운이 들어와 예알하거늘 이소저가 일어나 맞이하여 앉았다.

이소저가 춘운을 보고 차탄하여 말했다.

‘듣던 말과 같도다. 정소저가 저러하고 춘운이 또 이러하니, 양상서가 어이 부마를 구하리오?’

하였다. 이소저가 일어나 부인과 소저께 하직하며 말했다.

“날이 저무니 물러가겠거니와, 사처가 멀지 않으니 다시 볼 날이 있겠습니까?”

정소저가 섬돌 아래에 내려 아뢰었다.

“나는 면목을 들어 출입하지 못하옵기에 회사하지 못하오니 허물하지 마소서.”

하고 서로 이별하였다.

정소저가 춘운에게 말했다.

“보검이 땅에 묻혔어도 기운이 두우 간에 쏘이고, 노방이 풀 속에 있어도 빛이 수루를 이루나니, 이소저가 한 땅에 있어도 우리가 일찍 듣지 못하였으니 괴이하다.”

춘운이 말했다.

“첩은 의심컨대, 화음 진어사의 딸이 상서와 양류사를 화답하여 혼인 언약을 하였다가 그 집이 환을 만난 후에 진씨가 아무 데 간 줄을 모른다 하더니, 반드시 성명을 변하고 소저를 좇아 연분을 잇고자 함인가 하나이다.”

소저가 말했다.

“나도 진씨 말을 들었거니와, 그 집에 환을 만난 후에 진씨는 궁비로 정속되었다 하니 어찌 오겠는가? 나는 의심컨대 난양공주의 덕행·재색이 만고에 으뜸이라 하니, 그런가 하노라.”

이튿날 또 시비를 보내어 이소저를 청하여 춘운과 함께 앉아 종일토록 문장을 의논하였다.

어느 날 이소저가 와 부인과 소저께 하직하며 말했다.

“내 병이 잠시 나아 내일은 절동으로 가오니 하직하나이다.”

정소저가 말했다.

“더러운 몸을 버리지 않으시고 자주 부르시니 즐거운 마음을 이기지 못할러니, 버리고 돌아가시니 떠나는 정회는 어찌 헤아리겠습니까?”

이소저가 말했다.

“한 말씀을 소저께 아뢰고자 하오되, 좇지 않을까 염려하나이다.”

정소저가 말했다.

“무슨 말씀입니까?”

이소저가 말했다.

“과연 늙은 어미를 위하여 남해 관음화상을 수 놓았사옵더니, 문장 명필을 얻어 제목을 쓰고자 하오니, 원컨대 소저께서는 찬문을 지어 제목을 써 주시면 한편으로 어버이를 위하는 마음을 위로하고, 한편으로 우리 서로 잊지 못할 정표를 하사이다. 소저가 허락하지 않으실까 염려하여 족자를 안 가져왔사오니, 사처가 멀지 않은지라 잠시 행차하소서.”

정소저가 말했다.

“비록 문필은 없사오나 어버이를 위하시는 일을 어이 좇지 않겠습니까? 날이 저물기를 기다려 가사이다.”

이소저가 크게 기뻐하여 일어나 절하고 말했다.

“날이 저물면 글 쓰기 어려울 것이니, 내 탄 교자가 비록 더러우나 우리 둘이 한가지로 가사이다.”

정소저가 허락하니, 이소저가 일어나 부인께 하직하고 춘운의 손을 잡고 이별한 후, 정소저의 시비 수 인이 따라갔다.

정소저가 이소저의 침실에 들어가니 보패와 음식이 모두 수상하였다. 이소저가 족자도 내지 않고 문필도 청하지 않거늘, 정소저가 민망하여 말했다.

“날이 저물어 가오니 관음화상이 어디 있습니까? 전배하고자 하나이다.”

이 말을 맺기도 전에 군마 소리가 진동하며 기치창검이 사면을 에웠다. 정소저가 크게 놀라 피하고자 하니, 이소저가 말했다.

“소저는 놀라지 마소서. 나는 난양공주이니 이름은 소화라. 태후 낭낭의 명으로 소저를 모셔 가려 하나이다.”

정소저가 이 말을 듣고 뜰에 내려 두 번 절하며 말했다.

“여염집 천한 사람이 지식이 없어 귀주를 알지 못하옵고 예모를 그르쳤으니, 죽어도 아깝지 않도소이다.”

난양공주가 말했다.

“그런 말씀은 뒤로 하려니와, 태후 낭낭이 막 난간에 기대어 기다리시니, 원컨대 소저는 한가지로 가사이다.”

정소저가 말했다.

“귀주께서 먼저 들어가시면 첩이 돌아가 부모께 고하고 후에 따라 들어가겠나이다.”

공주가 말했다.

“태후께서 소저를 보고자 하셔서 어명이 있사오니 사양하지 마소서.”

정소저가 말했다.

“첩은 본래 천인이라. 어찌 귀주와 연을 한가지로 타리오.”

공주가 말했다.

“여상은 어부로되 문왕이 한 수레에 태우고, 후영은 문지기로되 신릉군이 곧 고삐를 잡았으니, 소저는 재상가 처녀라. 어찌 사양하리오.”

하고, 손을 이끌어 연을 함께 타고 갔다.

난양공주가 소저를 궐문 밖에 세우고 궁녀를 명하여 시위하고, 공주가 들어가 태후께 입조하고 정소저의 자색과 덕행을 아뢰니,

태후가 탄식하여 말씀하셨다.

“그러하거늘 양상서가 부마를 어찌 사양하지 않으리오.”

하시고, 궁녀를 명하여 말씀하셨다.

“정소저는 대신의 딸이요 양상서의 납채를 받았으니, 일품 조복을 입고 입조하라.”

궁녀가 의복함을 가져와 정소저께 아뢰니, 소저가 말했다.

“첩은 천녀의 몸이오니 어찌 조복하리이까?”

태후가 듣고 더욱 기특히 여겨 불러 들이니, 궁중 사람들이 모두 차탄하여 말했다.

“천하의 일색이 우리 궁중뿐인가 하였더니, 또 이 소저 있는 줄을 어이 알았겠습니까?”

하였다.

소저가 예를 갖추자 태후가 명하여 자리를 내어 주시고 말씀하셨다.

“양상서는 일대의 호걸이요 만고의 영웅이라. 부마를 정하려 하되 너의 집이 납채를 먼저 받았기에 강겁하지 못하여, 난양의 지휘로 너를 데려왔거니와, 내 일찍 두 딸이 있다가 한 딸이 죽은 후에 난양만 두고 고단히 여기더니, 네 자색·덕행이 족히 난양과 형제될지라. 너로 양녀를 정하여 난양이 너를 잊지 못하는 정을 표하노라.”

소저가 말했다.

“첩이 여염 천인으로 어찌 난양과 더불어 형제가 되겠습니까? 손복할까 하나이다.”

태후가 말씀하셨다.

“내 이미 정하였으니 무슨 사양이 있으리오? 또 네 글 재주가 용하다 하니, 글 한 귀를 지어 나를 위로하라. 옛날 조자건은 칠보시를 지었으니, 너도 그리할까? 재조를 보고자 하노라.”

소저가 대답하였다.

“소녀가 글은 잘 못하거니와, 낭낭의 명을 어찌 거스리겠습니까?”

난양이 말했다.

“정씨를 혼자 시키기 미안하오니, 소녀도 한가지로 짓겠나이다.”

태후가 더욱 크게 기뻐하여 필묵을 갖추고 궁녀를 명하여 앞에 세우고 글제를 내셨다. 이때는 춘삼월이라. 벽도화 난만하게 핀 속에 까치가 지저귀거늘, 글로 글제를 내니, 각각 붓을 잡고 써 드리니 궁녀가 겨우 다섯 걸음을 거닐었다.

태후가 다 보시고 칭찬하여 말씀하셨다.

“내 두 딸은 이태백·조자건이라도 미치지 못하리라.”

하셨다.

이때 천자께서 태후께 입조하시니 태후가 말씀하셨다.

“내 난양의 혼사를 위하여 정소저를 데려다가 내 양녀를 삼아 한가지로 양상서를 섬기고자 하니 어떠하뇨?”

황상이 말씀하셨다.

“낭낭의 형덕이 고금에 없도소이다.”

태후가 정소저를 불러,

“황상께 입조하라.”

하시니, 정소저가 즉시 들어와 뵈었다. 황상이 여중서 진채봉을 명하여 비단과 필묵을 가져오라 하여, 친필로 ‘정씨를 영양공주로 봉하노라.’ 하시고 애차를 형으로 하시니, 영양공주가 땅에 엎드려 말했다.

“첩은 본래 미천한 사람이라. 어찌 난양의 형이 되리오?”

난양이 말했다.

“영양은 재덕이 내 위이오니 어찌 사양하리이까?”

하였다.

황상이 태후께 아뢰셨다.

“두 누이의 혼사를 이미 결단하였사오니, 여중서 진채봉은 본래 조관의 자식이라. 제 집이 비록 망하였으나 그 재조와 심덕이 기특하고, 또 양상서와 언약이 있다 하오니, 공주 혼사에 잉첩을 하나이다.”

태후가 즉시 채봉을 불러 말씀하셨다.

“너로 양상서의 첩을 정하니, 두 공주의 희작시를 차운하라.”

진씨가 즉시 글을 지어 드리니, 의사와 필법이 신묘한지라. 태후와 황상이 못내 칭찬하셨다.

어느 날 영양공주가 태후께 아뢰었다.

“소녀가 들어올 때에 부모가 놀라 염려할 것이니, 돌아가 부모를 보고 이런 형덕이나 자랑하고자 하나이다.”

태후가 말씀하셨다.

“아직 사사로이 출입할 수 없는지라. 내 의논할 말도 있으니 최부인을 청하리라.”

하시고 즉시 조서하셨다.

최씨가 들어가 태후께 입조하니, 태후가 말씀하셨다.

“내 부인의 딸을 데려와 양녀를 삼았으니, 부인은 염려 말라.”

최씨가 사례하여 말했다.

“첩의 아들이 없고 한 딸만 있어 금옥같이 사랑하옵더니, 낭낭의 형덕이 이러하오니 이웃 나무에 꽃이 핌이라. 이 은덕을 죽어도 갚을 길이 없나이다.”

영양과 난양이 부인을 보고 서로 반겨함을 헤아릴 수 없었다.

태후가 말씀하셨다.

“부인의 집에 가춘운이 있다 하더니, 왔습니까?”

부인이 즉시 춘운을 불러 입조하니, 태후가 말씀하셨다.

“진실로 절대가인이로다.”

하시고, 두 공주와 진씨가 지은 글을 이르시고,

“차운하라.”

하시니, 춘운이 사양하지 못하여 즉시 지어 드리니, 태후가 보시고 길이 탄복하셨다.

춘운이 물러나 두 공주께 뵙고 앉으니, 공주가 진씨를 가리켜 말했다.

“이는 화음 진가 여자라. 그대와 백년을 함께할 사람이니라.”

춘운이 말했다.

“양류사를 지은 진씨입니까?”

진씨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양류사를 어찌 아십니까?”

춘운이 말했다.

“상서께서 매일 양류사를 읊으며 낭자를 생각하시기에 들었나이다.”

진씨가 말했다.

“상서가 옛일을 잊지 않으셨구나.”

하고, 더욱 슬퍼하였다.

태후가 최부인에게 말씀하셨다.

“양상서를 속일 계책이 있으니, 부인도 나가 소저가 죽었다 하소서.”

두 공주가 부인을 문 밖에 전송하고 춘운에게 말했다.

“네가 죽었다 하고 상서를 속이라.”

춘운이 말했다.

“전에 속인 일도 죄가 많은데, 다시 속이고 무슨 면목으로 상서를 섬기겠습니까?”

공주가 말했다.

“아무리 하여도 태후의 명하신 일이니 마지못하리라.”

춘운이 듣고 떠났다.

한편,

양상서가 돌아오는 쇄문이 경성에 들어오니, 천자께서 친히 위교에 나와 상서의 손을 잡고 말씀하셨다.

“만리 밖에 가서 소정한 공을 어찌 갚으리오?”

하시고, 즉일에 대승상 위국공을 봉하시고 삼만 호를 끌어 주시고 화상을 기린각에 도화하셨다.

승상이 사은숙배하고 물러나 정사도 댁에 가니, 정사도 일가가 모두 외당에 모여 승상을 위로하였다. 양승상이 사도 부처의 안부를 묻자, 정십삼이 말했다.

“매씨가 상사를 만난 후에 항상 눈물로 지내기에 나와 승상을 맞지 못하니, 승상은 들어가 뵈시되 상환 말씀은 마소서.”

승상이 이 말을 듣고 질색하여 말을 못 하다가 이윽고 말했다.

“소저가 죽었단 말입니까?”

하고 눈물을 흘리거늘, 정생이 말했다.

“승상과 혼인을 정하였다가 불행하여 이리 되오니, 어찌 우리 집 문운이 쇠체함이 아니겠습니까? 승상은 슬퍼하지 마소서.”

승상이 눈물을 씻고 정생을 데리고 들어가 사도 부처께 뵈오니, 사도 부처가 별로 서러워하는 빛이 없었다.

승상이 말했다.

“나는 나라 명으로 만리 타국에 가 성공하고 돌아와 전생 연분을 맺을까 하였더니, 하늘이 그릇 여기셔서 소저가 인간을 이별하셨다 하오니, 소자의 불행이로소이다.”

사도가 말했다.

“사람의 생사가 하늘이니 어찌 하리오. 오늘 승상의 즐길 날이니 어찌 슬퍼하리오.”

정생이 승상에게 눈짓하여 일어나 화원에 들어가니, 춘운이 반겨 내달아 뵈거늘, 승상이 춘운을 보고 소저를 생각하여 눈물을 금하지 못하였다.

춘운이 위로하여 말했다.

“승상은 지나치게 슬퍼하지 마시고 첩의 말을 들으소서. 소저는 본래 천상으로 귀양 왔다가 하늘에 올라갈 때, 첩에게 이르되, ‘양상서가 납채를 도로 내어 주었으니 부당한 사람이라. 혹 내 무덤에나 내 제청에나 들어와 조문하면 나를 욕하는 일이니, 아무리 죽은 혼령인들 어찌 노하지 않겠는가?’ 하더이다.”

승상이 말했다.

“또 무슨 말을 하더냐?”

춘운이 말했다.

“또 한 말이 있으되, 차마 내 입으로 못하겠나이다.”

승상이 말했다.

“무슨 말이냐?”

춘운이 말했다.

“상서께 전하여 춘운을 사랑하라 하더이다.”

승상이 말했다,

“소저가 돌아오지 않았다 한들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하더라.

하루는 천자가 승상을 인견하시고 이르셨다,

“승상이 부마 되기를 사양하더니 이제 정소저가 이미 죽었으니 무슨 말로 또 사양하겠소?”

승상이 두 번 절하고 아뢰었다,

“정녀가 죽었사오니 어찌 항거하겠사옵니까만, 소신의 문벌이 미천하고 재덕이 천루하오니 당치 못할까 하나이다.”

천자가 크게 기뻐하여 태사를 불러 길일을 가리니 구월 보름날이라.

황상이 승상에게 이르셨다,

“경의 혼사가 완정하지 못하여 미처 이르지 못하였거니와, 짐에게 과연 두 누이가 있으니 하나는 영양공주요, 하나는 난양공주라. 영양공주는 좌부인을 정하고 난양공주는 우부인을 정하여 하루에 혼사를 행하리라.”

구월 보름날이 당하니 혼례를 궐문 밖에서 행할새, 승상이 금포옥대를 두르고 두 공주와 예를 이루니 그 위의 거동은 이루 헤아리지 못할러라.

이날 밤은 영양공주와 동침하고, 이튿날은 난양공주와 동침하고, 또 이튿날에 진씨 방으로 갈새, 진씨가 승상을 보고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눈물을 흘리거늘 승상이 말했다,

“오늘은 즐길 날이거늘 낭자는 무슨 일로 눈물을 흘리느냐?”

진씨가 말했다,

“승상이 첩을 알아보지 못하시니 분명 잊으셨도다 하여 절로 슬퍼하나이다.”

승상이 자세히 바라보다가 나아가 옥 같은 손을 잡고 말했다,

“낭자는 화음의 진씨인 줄 알겠구려. 낭자가 벌써 죽은 줄만 알았더니 오늘 궁중에서 볼 줄을 어찌 알았으리오? 낭자 집이 참화를 본 일은 차마 입에 올리지 못하겠도다. 객점에서 난리를 만나 이별한 후에 어느 날인들 생각하지 않으리오.”

하며, 두 사람이 서로 마주하여 읊조리니 한편 반갑고 한편 슬프더라.

승상이 말했다,

“내 처음에 배필로 기약하였다가 오늘날 희첩을 삼으니 어찌 부끄럽지 않으리오.”

진씨가 대답했다,

“처음에 유모를 보낼 제 첩 되기를 원하였사오니 무슨 원통함이 있으리까?”

하고, 서로 즐기는 정이 두 날 밤보다 백 배나 하더라.

그 이튿날에 두 공주가 승상에게 술을 권하더니 영양공주가 시비를 불러 진씨를 청할새, 승상이 그 소리를 듣고 마음이 절로 감동하여 홀연 생각하되, ‘내 일찍 정소저와 거문고 한 곡조를 의논할 제 그 소리와 얼굴을 익히 듣고 보았더니, 오늘 영양공주를 보니 얼굴과 말소리가 심히 같도다. 나는 두 공주와 함께 즐기거늘, 슬프다. 정소저의 외로운 혼은 어디에 가 의탁하였는고?’

다시 영양공주를 거듭 쳐다보며 눈물을 머금고 말하지 않거늘, 영양공주가 잔을 내려놓고 물었다,

“승상이 무슨 일로 마음을 슬피 하시나이까?”

승상이 말했다,

“내 일찍 정사도 여자를 보았더니 공주의 얼굴과 소리가 심히 같은지라 절로 감동하여 그러하나이다.”

영양공주가 말을 듣고 안색이 변하여 일어나 안으로 들어가거늘, 승상이 무료하여 난양공주에게 고하되,

“영양은 내 말을 허물로 여기나이까?”

난양이 말했다,

“영양공주는 태후의 따님이요, 천자의 누이라. 뜻이 고만하여 한번 허물로 여기면 마음을 풀지 않나니, 정가 여자가 비록 아름다우나 여항의 처녀요, 또 이미 죽어 백골이 다 진토 되었거늘 어찌 그런 데 비하겠나이까?”

승상이 즉시 진씨를 불러 영양공주에게 사죄하되,

“마음 술을 과히 먹고 망발하였사오니, 원컨대 공주는 허물 마르소서.”

진씨가 즉시 돌아와 승상에게 고하되,

“공주 하시는 말씀이 있되 첩이 차마 아뢰지 못하겠나이다.”

승상이 말했다,

“공주의 말씀이 비록 과하나 진씨의 죄 아니니 이르라.”

진씨가 말했다,

“공주가 바야흐로 진노하여 이르시되, ‘나는 황태후의 딸이요, 정녀는 여항의 천인이라. 제 얼굴만 자랑하고 평생 보지 못하던 상공과 반나절을 함께 거문고를 의논하고 수작하니 행실이 아름답지 못하고, 또 혼인이 차타함을 용심하여 청춘에 죽었으니 복도 좋지 못한 사람이라. 예부터 좋아하는 사람이 봄날 땅에 사는 계집과 희롱할새 그 아내 듣고 이르되, ‘내 아무리 어질지 못하나 나를 생각하면 어찌 상중 유녀와 희롱하리오.’ 하고 물에 빠져 죽었으니, 나인들 무슨 면목으로 상공을 대면하리오. 나를 죽은 정씨에게 비하고 행실 없는 사람을 생각하니 내 그런 사람 섬기기를 원치 않으니, 난양은 성질이 순후하니 승상을 모셔 백년해로하소서.’ 하시더이다.”

승상이 이 말을 듣고 대노하여 말했다,

“천하에 형세만 믿고 가장을 쉽게 여기기는 영양공주 같은 이가 없도다. 예부터 부마 되기 싫어하기는 이러함이로다.”

하고, 난양공주에게 이르되,

“과연 정소저를 보기는 곡절이 있는지라. 영양이 행실 없는 사람으로 책망하니 어찌 애달프지 않으리까?”

난양이 말했다,

“첩이 청컨대 들어가 개유하리이다.”

하고, 즉시 돌아가 날이 저물도록 나오지 않고 시비를 시켜 승상에게 전갈하되,

“백번 개유하되 끝내 듣지 않으니 첩도 영양과 사생고락을 함께할지라. 영양이 깊은 규방에 혼자 늙기를 작정하니 첩도 상공을 모시지 못하오리니, 바라건대 진씨로 더불어 백년을 해로하옵소서.”

승상이 이 말을 듣고 분을 이기지 못하여 빈방에 촛불만 대하고 앉았더니, 진씨가 금로에 향을 피우고 승상에게 고하되,

“들으사오니 첩은 군자를 새벽에 모시지 못하기로 첩도 들어가오니 승상은 평안히 쉬옵소서.”

하고, 나가거늘 승상이 더욱 분하여 잠을 이루지 못하고 생각하되,

‘저희 제 당당한 가장을 이다지도 조롱하니 세상에 이런 괴이한 일이 어디 있으리요. 차라리 정사도 집 화원에서 낮이면 정십삼과 술이나 마시고, 밤이면 춘운과 희롱함만 같지 못하도다. 부마 된 탓에 일 많아 이다지 곤핍하니 어찌 분하지 않으리요?’

하고, 사창을 열치니, 이때에 달빛은 뜰 가득 맑고 은하수 비껴 흐르는지라. 잠시 일어나 신을 신고 배회하더니, 홀연 바라보니 영양공주 방에 등촉이 휘황하고 웃음 소리 자락하거늘 승상이 생각하되,

‘밤이 깊었으니 어디 궁인이 이제껏 아니 자리요? 영양이 나를 노하여 들어오더니 침실에 있는가?’

하여, 가만히 들어가 창 밖에서 엿들으니 두 공주 쌍륙 치는 소리 역력히 들리거늘, 승상이 창틀로 보니 진씨 한 여자와 더불어 두 공주 앞에서 쌍륙 치거늘 자세히 보니 춘운이더라.

대개 춘운이 공주를 위하여 구경하고 궁중에 머물되, 종적을 감추어 뵈지 않는 고로 승상이 알지 못하는지라. 승상이 춘운을 봄에 마음에 고이 여겨 ‘어찌 왔는고?’ 하더니, 문득 진씨가 쌍륙을 고쳐 버리고 이르되,

“춘랑과 내기를 하고자 하노이다.”

춘운이 말했다,

“첩은 본래 가난하여 내기하면 술 한 잔뿐이거니와, 진숙인은 귀주를 모셨으매 명지 비단을 추포같이 여기고 팔진미를 여곽같이 여기니 무엇을 내기하고자 하시나이까?”

진씨가 말했다,

“내가 지면 패물을 풀어 춘랑에게 주고, 춘랑이 지면 내가 청하는 일을 하라.”

춘운이 말했다,

“무슨 일을 청하시나이까?”

진씨가 말했다,

“내가 잠깐 말씀을 들었사오니, 춘랑이 ‘신선도 되고 귀신도 된다.’ 하니 그 말을 자세히 듣고자 하나이다.”

춘운이 쌍륙판을 밀치고 영양공주를 향하여 말했다,

“소저가 평일에 춘운을 사랑하시더니 이런 말씀을 공주께 하셨나이까? 진숙인이 들었으니 궁중에 귀 있는 사람이 누가 아니 들었겠나이까?”

진씨가 말했다,

“춘랑이 어찌 우리 공주더러 소저라 하나이까? 공주는 대승상 위국공 부인이라. 비록 연소하나 작위가 이미 높거늘 어찌 춘랑 자의 소저이리오?”

춘운이 웃으며 말했다,

“십 년 밖에 부르던 입을 고치기 어려운지라. 꽃을 다투어 희롱하던 일이 어제 일처럼 하여이다.”

하고, 서로 웃음 소리 낭랑하더라.

난양공주가 영양공주에게 물었다,

“춘랑의 말을 다 듣지 못하였거니와 승상이 과연 춘랑에게 그다지도 속았나이까?”

영양이 말했다,

“승상이 겁내는 거동을 보고자 하였더니 승상이 명완하여 귀신 꿰뚫을 줄을 알지 못하니, 예부터 색 좋아하는 사람은 색중아귀라 하리니 과연 승상 같은 이를 일컬음이라.”

하고, 만좌가 크게 웃더라.

승상이 비로소 영양공주가 정소저인 줄을 알고 한편 반가워 바로 문을 열고 들어가 급히 보고자 하되, 홀연 생각하되 ‘제가 나를 속이니 나도 또한 속이리라.’ 하고, 가만히 진씨 방으로 돌아와 누웠더니 하늘이 이미 밝는지라.

진씨가 나와 시녀더러 물었다,

“승상이 기침하였느냐?”

시녀가 말했다,

“기침치 않으셨나이다.”

진씨가 창 밖에 서서 기침을 기다리더니, 승상이 신음하는 소리가 때때로 들리거늘 진씨가 들어가 물었다,

“승상이 기체 불평하시나이까?”

승상이 대답하지 않고 눈을 바로 떠 보며 섬어를 무수히 하거늘 진씨가 물었다,

“승상이 무슨 섬어를 하시나이까?”

승상이 두 손을 내어 두르며 말했다,

“너는 어떤 사람인고?”

진씨가 말했다,

“첩을 알아보지 못하시나이까? 첩은 진숙인이로소이다.”

승상이 말했다,

“진숙인은 어떤 사람이뇨?”

진씨가 놀라 나가 머리를 만지니 심히 더운지라.

진씨가 말했다,

“승상 병환이 하룻밤 사이에 어찌 이다지도 중하시나이까?”

승상이 말했다,

“내 꿈에 정씨와 더불어 새도록 말하더니 내 기운이 이러하도다.”

진씨가 다시 물은대 승상이 대답하지 않고 몸을 두로 누우거늘, 진씨가 민망하여 시녀를 명하여 두 공주께 보하되,

“승상 병환이 극히 중하니 수이 나와 보소서.”

영양이 말했다,

“어제 술 마신 사람이 무슨 병이리오. 불과 우리를 나오게 함이로다.”

진씨가 바삐 들어가 태후께 고하되,

“승상 병환이 중하여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니 황상께 사뢰어 의원을 불러 치료하게 하소서.”

태후가 이 말을 듣고 두 공주를 불러 책하여 말씀하셨다,

“너희는 부질없이 승상을 과히 희롱하였도다. 병이 중하다 하면 어찌 수이 나가 보지 않느냐? 급히 나가 병이 중하거든 의원을 불러 치료하게 하라.”

두 공주가 마지못하여 승상 침소에 나와 영양은 밖에 서고 난양과 진씨가 먼저 들어가대, 승상이 난양을 보고 두 손을 내어 두르며 눈을 굴러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며 목 안에서 소리하여 말했다,

“내 명이 다하였는지라. 영양과 더불어 영결하고자 하니 영양은 어디 가고 아니 오는고?”

난양이 말했다,

“승상은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시나이까?”

승상이 말했다,

“오늘 밤에 정씨가 와 나더러 이르되, ‘상공은 어찌 약속을 저버리시나이까?’ 하며 술을 주거늘 먹었더니 이에 말을 못하고 눈을 감으면 내 품에 눕고 눈을 뜨면 내 앞에 서니, 정씨가 나를 원망함이 깊은지라 내 어찌 살리오?”

하고, 벽을 향하여 섬어를 무수히 하고 기절하는 듯하거늘, 난양이 병을 보고 크게 겁하여 나와 영양에게 말했다,

“승상의 병이 저저를 보고자 하여 병이 되었으니 저저 아니면 구하지 못할지라. 저저는 급히 들어가 보소서.”

영양이 오히려 의심한대, 난양이 영양의 손을 잡아 함께 들어가니 승상이 섬어하되 모두 정씨 말이라.

난양이 고성하여 말했다,

“영양이 왔으니 눈을 들어 보소서.”

승상이 잠깐 머리를 들어 손을 내어 일어나고자 하거늘, 진씨가 나아가 몸을 부둥켜 일으켜 앉히니 승상이 두 공주에게 말했다,

“내 두 공주와 백년해로하려 하였더니 시방 나를 잡아가려 하는 사람이 있으니, 나는 세상에 오래 머물지 못하리소이다.”

영양이 말했다,

“상공은 어떤 재상이관대 저런 허탄한 말씀을 하시나이까? 정씨 비록 남은 혼이 있다 한들 궁중이 심수하고 천만 귀신이 수호하니 제 어찌 감히 들어오리오.”

승상이 말했다,

“정씨가 지금 내 앞에 앉았거늘 어찌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시나이까?”

난양이 말했다,

“예 사람이 술잔에 활 그림자를 보고 병이 들어 죽었더니 승상이 또 그러하시도소이다.”

승상이 대답하지 않고 두 손만 내어 두르거늘, 영양이 병세 중함을 보고 다시 속이지 못하여 나아가 앉으며 말했다,

“승상이 죽은 정씨를 저리도 생각하오니 산 정씨를 보면 어떠하리이까? 첩이 과연 정씨로소이다.”

승상이 말했다,

“부인은 어찌 저런 말씀을 하시나이까? 정씨 혼이 시방 내 앞에 앉아 나를 황천에 데려가 전생 연분을 맺자 하고 일시도 머물지 못하게 하오니, 산 정씨 어디 있으리오. 불과 내 병을 위로하고자 하여 산 정씨로라 하거니와 진실로 허탄하도소이다.”

난양이 나아가 앉으며 말했다,

“승상은 의심치 마르소서. 과연 태후 낭낭이 정씨로써 양녀를 삼아 영양공주를 봉하여 첩으로 더불어 함께 상서를 섬기게 하였사오니, 오늘 영양공주는 전일 거문고 희롱하던 정소저라. 그렇지 않으면 어찌 얼굴과 말소리가 심히 같으리까?”

승상이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소리하여 말했다,

“내 정가에 있을 제 정소저 시비 춘운이 있더니, 한 말을 묻고자 하나이다.”

난양이 말했다,

“춘운이 영양께 뵈오려 궁중에 왔다가 승상 기후 불평하심을 보고 밖에 대령하여 있나이다.”

하고, 즉시 춘운을 부른대, 춘운이 들어와 앉으며 말했다,

“승상 기체 어떠하시나이까?”

승상이 말했다,

“춘운이 혼자 있고 다른 이는 다 나가라.”

한대, 두 공주와 진숙인이 나와 난간에 나와 앉았더니, 승상이 즉시 일어나 세수하고 의관을 정제하고 춘운을 시켜 ‘달려오라.’ 하니, 춘운이 웃음을 머금고 또 나와 위할새, 다 들어가니 승상이 화양건을 쓰고 궁금포를 입고 백옥선을 들고 안석에 비겨 앉으니 기상이 봄바람같이 호탕하고 정신이 가을 달같이 맑은지라. 병들었던 바 같지 않더라.

“가까이 앉으라.”

하더라.

영양이 속인 줄을 알고 웃음을 머금으며 머리를 숙이고 앉는지라.

난양이 말했다,

“상공 기체 지금은 어떠하시나이까?”

승상이 정색하고 말했다,

“요새는 풍속이 좋지 못하여 부인이 제 당당하고 가장을 조롱하니, 내 비록 어질지 못하나 대신 시위에 처하여 풍속을 바로잡을 일을 생각하여 병이 들었더니 이제는 낫사오니 염려 마옵소서.”

영양이 말했다,

“그 일은 첩 등이 알지 못하거니와 승상 병환이 쾌치 못하면 태후께 품하여 명의를 불러 치료하고자 하나이다.”

승상이 아무리 웃음을 참고자 하되 실상 ‘정소저가 죽었는가?’ 하였더니, 이날 밤에 소저가 산 줄을 알고 비록 속이는 기류이지만 그 심사를 참지 못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크게 웃으며 말했다,

“이제 부인을 지하에 가 상봉할까 하였더니 오늘 일은 진실로 꿈 속이로소이다.”

하며, 옥 같은 손을 잡고 희롱하니 원앙이 녹수를 만난 듯, 호접이 홍화를 본 듯 그 사랑함을 이로 헤아리지 못할레라.

영양이 일어나 두 번 절하고 말했다,

“이는 태후 낭낭의 어지심이라, 황상 폐하의 성덕과 난양공주의 인후하신 덕이오니 그 은덕은 백골이 진토 되어도 갚지 못할까 하나이다. 입으로 다 사뢰리잇가?”

하고, 전후 사연을 다 베푼대 만고에 듣지 못한 일이로소이다.

난양이 웃으며 말했다,

“영양은 제저의 심덕이 아름다우심으로 하늘이 감동함이니 첩이 무슨 간계하리까?”

하더라.

이때 태후가 이 말을 듣고 크게 웃으며 말씀하셨다,

“나도 또한 속이노라.”

하고, 즉시 불러 인견하실새, 두 공주가 태후를 모시는지라.

태후가 물으셨다,

“승상이 죽은 정씨와 더불어 끊어진 연분을 다시 맺으니 어떠하나이까?”

승상이 땅에 엎드려 아뢰었다,

“성은이 망극하오대 만분지일도 갚지 못할까 하나이다.”

태후가 말씀하셨다,

“내의 희롱함이 무슨 은혜를 하리요?”

하시더라.

이날 황상이 군신 조회를 받으실새, 군신이 아뢰었다,

“요사이에 경성이 편안하고 황하수가 맑고 해가 가운데 머물고 토번이 이미 항복하니 진실로 태평성대라 하나이다.”

황상이 겸양하시더라.

하루는 승상이 대부인을 모시고자 하여 상소를 올릴새, 말씀이 지극히 간절한지라. 황상이 보시고,

“양소유는 지극한 효자라.”

하시고, 황금 일천 냥과 비단 팔백 필과 백옥연을 주시며 말씀하셨다,

“즉시 가 대부인을 위하여 잔치하고 모셔오라.”

하시도다.

승상이 황태후께 하직할새, 태후가 금단당혜를 주시니라. 승상이 물러나와 두 공주와 진씨, 춘랑과 이별하고 길을 떠나 낙양에 다다르니, 계섬월과 적경홍이 벌써 객관에 와 기다리는지라.

승상이 웃으며 말했다,

“내 이 길은 황명이 있은 사행이거늘 두 낭자는 어찌 알고 왔느뇨?”

대답했다,

“대승상 위국공 부마도위 행차를 산 구곡이라도 다 알거든, 첩 등이 아무리 산림에 숨어 있은들 어찌 모르리요. 또한 승상의 부귀가 천하의 으뜸이라 첩 등도 즐겁거니와, 들사오니 두 공주를 취하여 부인을 삼으시다 하오니 알지 못겠나이다. 첩 등을 용납하시리까?”

승상이 말했다,

“하나는 황상 폐하의 매씨요, 또 하나는 정사도의 소저라. 황태후가 양녀를 삼아 영양공주를 봉하였으니 계랑이 전한 바라. 무슨 투기 있으리요. 두 공주 다 유한한 덕이 있으니 두 낭자의 복이로다.”

섬월과 경홍이 크게 기뻐하더라.

승상이 길을 떠나 고향으로 가니라.

이야기를 바꾸어.

승상이 열여섯 살에 모친과 이별하고 과거에 갔다가 삼 년 사이에 대승상 위국공 된 위의를 갖추고 대부인께 들어가 뵈오니, 부인 유씨가 손을 잡고 등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네 진실로 내 아들 양소유냐? 간신히 너를 기를 제 이런 일이 될 줄 어찌 알리요?”

하시고, 반가운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여 손을 잡으시고서 눈물을 흘리더라.

승상이 선영에 소분하고 황상이 상사하신 금백으로 대부인을 위하여 친구 종족을 다 청하여 큰 잔치하고 대부인을 모시고 경성으로 올라갈새, 제도 방백이며 열읍 태수들이 누가 아니 배행하리오?

황성에 이르러 대부인을 승상부에 모시고 들어가 황제와 태후께 입조하니 황제가 인견하시고 금백을 많이 상사하시거늘, 치장하여 어사하신 새 집에 모시고 두 공주와 진숙인, 가유인이 다 예알하고 만조백관을 청하여 삼 일 잔치할새, 궁실 거처의 휘황함과 풍악음식의 찬란함은 세상에 비할 데 없더라.

이윽하여 문지기가 들어와 고하되,

“문 밖에 두 여자가 승상과 대부인께 뵈오려 하나이다.”

승상이 말했다,

“분명 홍월이로다.”

하고, 대부인께 고하고 부르신대, 섬월과 경홍이 머리를 숙여 계하에 뵈니 진실로 절대 가인이라. 만좌 빈객이 다 못내 칭탄하더라. 진숙인이 섬월과 구정이 있는지라 서로 만나 비희를 이기지 못하더라.

영양공주가 섬월을 불러 술 한 잔을 주어 말했다,

“이로써 나를 천거한 공을 사례하노라.”

대부인이 말했다,

“너는 섬월에게만 사례하고 두연사의 공은 생각하지 않느냐?”

승상이 말했다,

“오늘날 이리 즐기는 건 다 두연사의 덕이라.”

하고, 즉시 사람을 자청관에 보내어 청할새 두연사는 촉에 들어간지라.

이로부터 승상부 창기 팔백 인을 동서부를 맡겨, 동부 사백은 섬월이 가르치고 서부 사백 인은 경홍이 가르치니, 기예가 날로 새로워져 비록 이원제자라도 미치지 못할러라.

하루는 공주와 제낭자가 대부인을 모셔 앉았더니, 승상이 한 편지를 들고 들어와 난양에게 주어 말했다,

“이는 월왕의 편지오니 보소서.”

난양이 펴보니 쓰여 있되,

“항례에 국가 다사하여 낙유원 주마호기와 공명강 선유승사를 이제껏 못하였더니, 지금 황상의 형덕과 승상의 공명을 힘입어 천하태평하였사오니, 원컨대 승상과 더불어 봄 구경을 즐기고자 하노라.”

하였더라.

난양이 승상에게 말했다,

“월왕의 뜻을 아시나이까?”

승상이 말했다,

“불과 봄 구경을 희롱하고자 함이잇가?”

난양이 말했다,

“월왕의 뜻이 본래 풍류를 좋아하여 무창 명기 만옥연을 얻어두고, 승상 궁중의 모든 미색과 한번 겨루고자 하나이다.”

승상이 웃으며 말했다,

“과연 그러하도소이다.”

영양공주가 말했다,

“그러하면 아무리 노는 일이라도 어찌 남에게 지리오.”

하고, 홍월에게 눈치를 주어 말했다,

“군병을 십 년 교훈하기는 한번 싸움의 승패를 위함이니, 이날 승부는 다 낭자들에게 있는지라. 부디 힘써 하라.”

섬월이 말했다,

“월궁 풍류는 일국의 으뜸이요, 만옥연은 천하의 절색이라 첩의 얼굴과 음률이 다 부족하오니 위태로울까 하나이다.”

경홍이 이 말을 듣고 큰 소리로 말했다,

“섬랑아, 우리 두 사람이 관동 칠십여 주를 횡행하되 당할 이 없거든 한 만옥연을 두려워하리오?”

섬월이 말했다,

“홍랑은 어찌 말을 이다지도 크게 하느뇨?”

하고, 승상께 고하되,

“‘병교자는 패라.’ 하니 홍랑의 말이 과하오니 견패할까 하나이다. 또 홍랑의 얼굴이 아름다우면 승상이 어찌 남자로 속아 계시겠나이까?”

영양이 말했다,

“홍랑의 얼굴이 부족한 주가 아니라 승상의 눈이 밝지 못함이로다.”

승상이 크게 웃으며 말했다,

“부인도 눈이 있으면 어이 남자인 줄 모르시나이까?”

만좌가 크게 웃더라.

이러구러 월왕과 모이는 날이 당하매, 승상이 의복 안마를 각별히 치례하고 홍월 팔백 창기를 거느려 좌우에 모시니 진실로 봄 삼월 복사꽃 속이러라. 월왕이 또한 풍류를 성히 갖추어 승상을 맞아 서로 좌를 정한 후에, 승상과 월왕이 말도 자랑하고 사법도 시험하여 서로 칭찬하더니 문득 시재가 고하되,

“소황문이 어명을 모셔 왔나이다.”

월왕과 승상이 놀라 일어나 맞을새, 소황문이 어사하신 황봉주를 부어 권하며, 또

“글제를 드려 글 지으라 하더이다.”

월왕과 승상이 머리를 조아리고 두 번 절하고 각각 사운을 지어 보내더라.

이때에 대소 빈객은 차례로 열좌하고 미주가효는 일시에 진정하니, 위의 찬란하고 음식이 난만한지라. 각각 풍류와 온갖 노래는 서왕모 요지연과 한무제 백양대라도 미치지 못하리라.

월왕이 승상에게 말했다,

“승상께 작은 정성을 알리고자 하오니 소첩 등을 불러 가무하여 승상을 즐겁게 하고자 하나이다.”

승상이 말했다,

“소유 감히 대왕의 궁인과 상대하리잇가? 소유 또한 시첩을 시켜 재주를 알려 대왕의 흥을 돕고자 하나이다.”

이에 계섬월과 적경홍과 월궁 사 미인이 나와 뵈오니 승상이 말했다,

“예 현종 황제 궁중에 한 미인이 있되 이름은 부운이요, 얼굴은 일색이라. 이태백이 그 미인을 보고자 황제께 청하되 겨우 말소리 듣고 얼굴은 보지 못하였더니, 소유는 대왕의 사 선녀를 보오니 천상 선인인가 하거니와, 저 미인의 성명은 누구라 하나이까?”

월왕이 말했다,

“저 미인은 금릉의 두윤선이요, 진류의 소채애요, 무창의 만옥연이요, 장안의 호영영이나이다.”

승상이 말했다,

“만옥연의 이름을 들은 지 오래더니, 그 얼굴을 보니 과연 소문과 같도다.”

월왕이 또 섬월의 성명을 듣는지라 물었다,

“이 두 낭자를 어디서 얻었나이까?”

승상이 말했다,

“소유가 과거 보러 오는 날에 마침 낙양 땅에서 섬월이 제 쫓고, 경홍은 연국을 치러 가실 제 한단에서 제 쫓아왔나이다.”

월왕이 손벽 치고 크게 웃으며 말했다,

“적낭자는 승상이 한림을 띠고 황금인을 차고 도적을 쳐 승전하고 돌아오니 적낭자가 알아보기 쉽거니와, 계낭자는 승상이 궁곤할 때에 부귀할 줄을 알았으니 기특하도다.”

하고, 술을 가득 부어 섬월을 상 주니라.

승상과 월왕이 장막 밖에 무사들이 활 쏘고 말 달리는 것을 보더니 월왕이 말했다,

“미인의 궁마 재주를 볼 만하기에 궁녀 수십 인을 가르쳤으니 승상부 중에도 또한 있나이까? 원컨대 함께 사렵하여 한 즐거움을 하여지이다.”

승상이 크게 기뻐하여 즉시 수십 인을 가려 월궁녀와 승부를 겨룰새, 경홍이 아뢰기를,

“비록 활을 잡아 본 적은 없으나 남의 활 쏘는 것을 익히 보았으니 잠깐 시험하고자 하나이다.”

승상이 기뻐하여 즉시 차신 활을 풀어 주니라.

경홍이 제 미인들에게 말했다,

“비록 맞히지 못하여도 웃지 말라.”

하고, 말에 올라 치달리더니 마침 꿩이 날거늘 쏘아 말 아래 내리치니, 승상과 월왕이 다 놀라고 월궁 미인이 다 탄복하여 말했다,

“우리는 헛된 십 년 공부를 하였다.”

하더라.

홍월이 생각하되, 우리 두 사람이 월궁에 양두는 아니하나 고단함을 안타깝게 여기더니, 문득 바라본즉 두 미인이 수레를 타고 장막 밖에 와 고하되,

“양승상 소실이로다.”

하고, 수레에서 내리거늘 보니 하나는 심요연이요, 또 하나는 완연히 꿈속에 보던 동정 농녀러라. 승상께 배알하거늘 승상이 월왕을 가리켜 말했다,

“이는 월왕 전하라.”

한대, 두 사람이 예알하니라.

두 사람이 홍월과 함께 앉았더니 승상이 월왕에게 말했다,

“저 두 사람은 내 선번을 정벌할 때 얻었으되 미처 데려오지 못하였더니, 오늘 이 성회를 듣고 왔로소이다.”

왕이 그 두 사람을 보니 자색이 섬월과 같되 표묘한 태도와 초월한 기운은 더한지라. 왕이 기이히 여기고 월궁 미인이 다 안색이 없더라.

왕이 물었다,

“두 낭자는 어디 사람이며 성명은 누구뇨?”

하나가 말했다,

“첩은 심요연이로이다.”

하고, 또 하나가 말했다,

“백능파라.”

하거늘 왕이 말했다,

“두 낭자가 무슨 재조 있는고?”

요연이 말했다,

“산외 사람이라 사죽 소리를 듣지 못하였사오니 대왕께 즐길 것이 없겠거니와 다만 허랑한 검술을 배워 용진을 아나이다.”

월왕이 크게 기뻐하여 승상에게 말했다,

“현종조에 공손대랑이 금무로 유명하되 후세에 전할 데 없기에 매양 두자미 글을 읊고 쾌히 보지 못함을 한하더니, 낭자가 능히 하면 쾌할 일이로다.”

하고, 승상과 각각 차신 칼을 풀어 주신대, 요연이 한 곡조를 추니 종횡 변화하여 신통 기절한 법이 많은지라, 왕이 놀라 정신을 잃다가 이윽하여 말했다,

“세상 사람이야 어찌 그러하리요. 낭자는 진실로 신선이로다.”

하고, 또 능파에게 물은대 말했다,

“첩은 삼강 가에 살기로 황룡 피파 타는 노래를 때때로 익혔사오나 귀인이 들음직하지 않으리이다.”

왕이 말했다,

“상비의 피파 소리를 고인의 글 귀절이 붙었음이라. 낭자가 능히 하면 쾌할 일이로다.”

하고,

“어서 타라.”

한대, 능파가 한 곡조를 타니 맑고 슬픈 노래와 신통한 술법이 사람 슬프게 하고 조화를 아는 듯하더라.

왕이 기이히 여겨 말했다,

“진실로 인간 곡조가 아니라. 참 선녀로다.”

하더라.

날이 저물어 잔치를 파하니 가무에 상사한 금백이 헤아리지 못할러라. 승상과 월왕이 각각 풍유를 성성히 갖추어 성문에 들어오니 장안 사람이 누가 아니 구경하며, 백 세 노인도 혹 손뼉 치며 말했다,

“현종 황제 화청궁에 행차하실 제 위엄이 이 같더니 오늘 또 다시 보노라.”

이때에 두 공주와 진가 양낭을 데리고 대부인을 모셔 정히 승상 돌아오시기를 주야 기다리더라.

이야기를 바꾸어.

이때 승상이 당에 오르거늘 좌우가 다 놀랄새, 심백 양인을 대부인과 두 공주께 뵈온대 부인이 말했다,

“전일에 승상이 두 낭자의 공로를 칭찬하매 일찍 보고자 하였더니 어찌 늦으요?”

요연과 능파가 말했다,

“첩 등은 먼 곳 천인이라. 비록 승상의 한번 돌아보신 은을 입었사오나 두 부인이 한 자리 땅을 허하지 않으실까 두려워 감히 오지 못하였더니, 경사에 들어와 두 공주 관저교목의 덕이 있음을 듣고 바야흐로 나아와 뵙고자 할 제, 마침 승상이 성히 노심을 들었삽고 외람되이 참예하고 돌아오오니 첩 등의 영행인가 하나이다.”

공주가 웃으며 말했다,

“우리 궁중의 봄빛이 난만함은 다 우리 형제의 공이니 승상이 아시나이까?”

승상이 크게 웃으며 말했다,

“저 두 사람이 새로 오매 공주의 위풍을 두려워 아당하는 말을 공주는 공을 삼고자 하나이까?”

만좌가 크게 웃더라.

진가 두 낭자가 섬월에게 물었다,

“오늘 승부 어떠하뇨?”

경홍이 말했다,

“섬랑이 내 대언을 웃더니 내 일언으로 월궁을 탈기하였으니 섬랑더러 물으면 알리이다.”

섬랑이 말했다,

“홍랑의 궁마 재주 묘하다 이를 것이로되, 다 저 월궁을 탈기하기는 새로 온 두 낭자의 자색과 재조니라.”

하더라.

그 이튿날 승상이 황상께 입조할새, 태후가 승상과 월왕을 부르니 두 공주는 벌써 들어가 모시는지라.

태후가 월왕에게 말씀하셨다,

“어제 승상과 봄 구경을 다투었다 하더니 승부 어떠하뇨?”

월왕이 말했다,

“승상의 복은 사람이 다툴 바가 아니라. 다만 공주도 복이 될리이까? 원컨대 낭낭은 이 말씀으로 승상께 분목하소서.”

승상이 말했다,

“월왕이 신에게 진단 말은 이태백이 최호 시에 겁냄이라. 공주의 복 되고 아니 됨은 공주에게 물으소서.”

공주가 대답했다,

“부부는 일신이라 영욕고락이 어찌 다르리까?”

월왕이 말했다,

“매씨의 말이 비록 좋으나 자고로 부마 누가 승상같이 방탕하리요? 청컨대 승상을 벌하소서.”

태후가 크게 웃으시고 술 한두 잔으로 벌하니라. 승상이 크게 취하여 돌아올새, 두 공주가 또 함께 오는지라.

대부인이 물었다,

“전에 선온의 명이 있되 그다지 취하지 않더니, 어찌 오늘은 과이 취하뇨?”

승상이 말했다,

“공주의 형 월왕이 태후께 알소하여 소자의 죄를 지어내오니 마침 말씀을 잘하여 한 말 술로 벌하였삽거니와, 소자 만일 주량이 없사오면 거의 죽을 번하였사오니, 대저 월왕이 낙원에 설치한 일이거니와 난양도 내 희첩 많음을 시기하여 그 형과 더불어 나를 모해한 일이니, 모친은 한 잔 술로 난양을 벌하여 소자의 설치를 하여 주소서.”

유부인이 크게 웃으며 말했다,

“공주가 비록 술을 마시지 못하나 취객을 위하여 마지못하리라.”

하고, 승상을 속여 사당수 한 잔으로 벌하니라.

이때에 두 부인 육 낭자가 서로 즐기는 뜻이 고기 물에 놀고 새 구름에 나는 것 같아 서로 은정을 잊지 못하니, 비록 두 부인의 현덕에 감화함이나 대개 남악산에 발원한 연고이라.

하루는 두 공주가 서로 의논하여 말했다,

“옛 사람이 자매 형제가 혹 남의 아내도 되고 혹 남의 첩도 되었거늘, 우리 이처육첩은 의리 골육 같고 정이 형제 같으니 어찌 천명이 아니리오. 신성의 함께 아님과 위차의 같지 못함은 족히 구애할 일이 아니라. 마땅히 결의형제하여 일생을 지냄이 어떠하뇨?”

육 낭자가 다 겸사하고 춘운과 섬월이 더욱 응하지 않거늘 정부인이 말했다,

“유관장 삼 인이 군신이로되 형제의 의리 있고, 세존의 처와 등가의 여자 존비 현절하되 함께 제자 되었으니, 당초 미천이 전두 성취하기에 무엇이 관계하리오.”

두 공주가 이에 육 낭자를 데리고 관음화상 앞에 나아가 분향 전배하고 결의형제를 맹서하고 글을 지어 ‘각각 자매로 자처하라.’ 하되, 육 낭자가 오히려 명분을 지켜 언새는 공손하나 정의는 더욱 남달랐더라.

팔 선녀가 각각 자녀를 두되, 두 부인과 춘운, 섬월, 요연, 경홍은 아들을 낳고, 채봉과 능파는 딸을 낳으되 산육의 괴로움이 없더라.

이때에 천하가 승평하여 승상이 낮이면 황상을 모셔 후원에서 사냥하고, 들면 대부인을 모셔 북당에서 잔치하니 이러구러 세월이 흐르는 물 같은지라. 승상이 장상이 되어 권세를 잡은 지 이미 누십 년이라. 유부인이 천수로 별세하시고 승상이 애훼 과도하신대, 황제와 태후가 중사를 보내어 위로하시고 그 왕후의 예로 영장하시고, 정사도 부처 또한 천수로 돌아가시니 승상이 서러워하시기를 정부인과 같이 하시니라.

승상이 육남 이녀가 있으니, 맏아들은 대경이니 정부인의 소생이라 이부상서하고, 둘째는 차경이니 적씨의 소생이라 경조윤을 하고, 셋째는 순경이니 가씨의 소생이라 어사중승을 하고, 넷째는 계경이니 난양의 소생이라 병부시랑을 하고, 다섯째가 오경이니 계씨의 소생이라 한림학사를 하고, 여섯째는 치경이니 심씨의 소생이라 나이 십오에 용역이 절륜하여 금오상장군이 되니라. 맏딸의 이름은 전란이니 진씨의 소생이라 월왕의 자부가 되고, 둘째 딸의 이름은 역락이니 백씨의 소생이라 황태자의 첩예가 되니라.

승상이 일대에 세 번 전쟁을 평하고 태평을 이루어 공명 부귀 곽분양과 같았되, 곽분양은 육십에 장상이 되었더니 승상은 이십에 장상이 되어 위로는 군심을 얻고 아래로는 인망이 있어 부처 향복하기는 천고에 없는 일이러라.

승상이 경명지하에 있기 어렵기로 상소하여 ‘물러가지라.’ 하되, 황상이 수서로 비답하여 고집하여 만류하시니라. 그 후에 또 상소하여 네 번이나 간절하거늘, 황상이 수조로 비답하여 말씀하셨다,

“경의 고절을 이루어 주고자 하되, 황태후 승하하신 후에 어찌 차마 두 공주를 멀리 떠나리오? 성남 사십 리에 별궁이 있으니 이름은 취미궁이라. 이 궁이 유벽하니 경이 퇴거함이 마땅타.”

하시고, 승상을 위국공에 더 봉하시고 오천 호를 더 상사하시고 아울러 승상 인수를 거두시다. 승상이 더욱 황은에 감격하여 즉시 취미궁으로 가니, 이 궁이 종남산 중에 있어 누대의 장려함과 경개 기절함은 진실로 봉래 선경이러라.

승상이 그 정전에 배알하여 나라 조지와 어제 시문을 봉안하고, 그 나문 누각과 대사에는 두 공주와 제 낭자들이 호화로이 거처하는지라.

승상이 두 부인 육 낭자를 데리고 물에 다달아 달을 희롱하고 산에 들어가 매화를 찾아서, 혹 시도 화답하며 거문고도 타니 만년 종용한 복조를 누가 아니 칭찬하리오? 팔월 보름은 승상 생일이매 모든 자녀들이 다 헌수하여 잔치하니, 그 번화한 경색은 비할 데 없더라.

이러구러 구월이 당하니 국화 만발하여 정히 구경할 때라. 취미궁 서편에 한 곳이 있으니 오른즉 팔백 리 진천이 장강같이 보이는지라. 승상이 부인과 낭자를 데리고 올라가 가을 경치를 즐기더니, 이윽고 서양은 기울고 구름은 낮은데 가을 빛이 찬란하여 그림 속 같은지라.

승상이 옥소를 내어 한 곡조를 부니 그 소리 처량하여, 형경이 역수를 건널 제 고점리 격축하고 초패왕 해하 삼경에 우미인과 이별하는 노래 같은지라. 모든 미인이 다 슬픔을 이기지 못하니 두 부인이 물었다,

“승상이 일찍 공명을 이루고 오래 부귀를 누려 오늘날 좋은 풍경을 당하였거늘, 퉁소 소리 처량하여 전일과 다르니 어찌 일이오?”

승상이 옥소를 던지고 난간에 기대어 명월을 가리켜 말했다,

“동으로 바라보니 진시황 아방궁이 풀 속에 홀로 서 있고, 서로 바라보니 한무제 무릉이 가을 풀 중에 소슬하고, 북으로 바라보니 당명황 화청궁에 빈 달빛뿐이로다. 이 세 임금은 천고의 영웅이라 사해로 집을 삼고 억조로 신첩을 삼아 장광을 두루 돌아 천세를 지내고자 하였더니 이제 어디 있는고? 소유는 하동 일 포의로 다행히 황주를 만나 벼슬이 장상에 이르고 또 제 낭자와 더불어 서로 만나 후의와 심정이 늙도록 더욱 주밀하니, 전생 연분이 아니면 어찌 그러하리오? 연분이 있어 모이고 연분이 다하면 흩어지기는 천리의 떳떳한 일이라. 우리 한번 돌아가면 옛 대 곡지와 자연 무사들이 쇠초한연 적막한 중에 초동목애가 지점하여 이르되, ‘양승상이 낭자들과 더불어 놀던 곳이라.’ 하리니 어찌 슬프지 않으리오. 천하에 세 가지 도가 있으니 유도·선도·불도라. 유도는 윤기를 밝히고 사업을 귀히 여겨 이름을 사후에 전할 따름이요, 선도는 허탄하니 족히 구할 것이 아니거니와, 오직 불도는 내 근래에 꿈을 꾸면 매양 포단 위에서 참선하니 불가에 반드시 인연이 있는지라. 내 장차 장자방과 적송자처럼 하여 남해를 건너 관음께 뵙고, 의대에 올라 문수를 예하고 불생불멸의 도를 얻고자 하노니, 다만 그대들과 더불어 반생을 함께하다가 장차 멀리 이별함에 절로 비창한 마음이 퉁소 소리에 나타남이로다.”

제 낭자도 다 남악 선녀로서 진연이 장차 다한 중에 승상의 말씀을 들으니 어찌 감동하지 않으리오?

다들 이르되,

“상공이 번화한 중에 이 마음이 있으시니 분명 하늘의 뜻이라. 첩 등 여덟 사람이 마땅히 조석으로 예불하여 내생에서 상공을 기다리리니, 상공은 밝은 스승을 얻어 큰 도를 깨달은 후에 첩 등을 가르치소서.”

승상이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우리 아홉 사람의 마음이 합당하니 무슨 근심하리오.”

제 낭자가 술을 내와 전별하려 할 제, 문득 지팡막대 끄는 소리 난간 밖에 나거늘 제인이 다 의심하더니, 이윽하여 한 노승이 눈썹은 자나 길고 눈은 물결 같고 얼굴과 거동이 심상한 중이 아니라.

대 위에 올라 승상과 마주 앉으며 말했다,

“산야 사람이 대승상께 뵙나이다.”

승상이 일어나 답례하여 말했다,

“사부가 어디로 오셨나이까?”

노승이 웃으며 말했다,

“승상이 평생 고인을 모르시나이까?”

승상이 이리저리 보다가 깨닫고 제 낭자를 돌아보며 이르되,

“내 토번을 치러 가실 때 꿈에 동정에 갔다가 남악산에 올라 늙은 화상이 제자를 데리고 강론하는 양을 보았더니 사부 계시나이까?”

노승이 박장대소하며 말했다,

“옳다! 옳다! 그러나 승상이 꿈속에 한번 본 것만 기억하고, 십 년 동처한 일은 생각하지 못하시나이까?”

승상이 망연하여 말했다,

“열여섯 살 전은 부모의 곁을 떠나지 않았고, 열여섯 살 후는 벼슬하여 임금을 섬겨 분주 무가하였사오니, 어느 때에 사부를 좇아 십 년을 놀았으리까?”

노승이 웃으며 말했다,

“승상이 오히려 꿈을 깨닫지 못하였도다.”

승상이 말했다,

“사부가 소유를 깨닫게 하리이까?”

노승이 말했다,

“이 어렵지 않다.”

하고, 막대를 들어 난간을 치니, 문득 흰 구름이 일어나 사면을 두루 끼어 지척을 분간하지 못하는지라.

승상이 크게 불러 말했다,

“사부가 정도로 가르치지 않고 환술로 희롱하시나이까?”

말을 마치지 못하여 구름이 걷히며 노승과 두 부인 육 낭자가 간 데 없는지라. 승상이 크게 놀라 자세히 보니 누대 궁궐은 간 데 없고, 몸이 홀로 작은 암자 가운데 앉아 있는지라. 손으로 머리를 만지니 새로 깎은 흔적이 송송하고 백팔 염주가 목에 걸려 있으니 다시 대승상의 위의는 없고 불과 연화 도장의 성진 소화상이라.

다시 생각하되,

‘당초에 한 생각 그릇침을 사부가 경계하려 하여 곧 인간에 나가 부귀영화와 남녀 정욕을 한 꿈 속에 알게 하심이라.’

하고, 즉시 샘에 가 세수하고 장삼을 정히 입고 고깔을 둘러 쓰고 방장에 들어가니 모든 제자가 다 모여 있는지라.

대사가 고성하여 말했다,

“성진아, 인간 재미 어떠하더냐?”

성진이 머리를 땅에 두드리며 눈물을 흘려 말했다,

“이제야 깨달았나이다. 성진이 무상하와 도심이 자리잡지 못하오니 마땅히 괴로운 세계에 있어 길이 앙화를 받을 것을, 사부가 한 꿈을 환기하여 성진의 마음을 깨닫게 하오니, 사부 은덕은 천만 년이라도 갚지 못하리로소이다.”

대사가 말했다,

“네 흥에 띠어 갔다가 흥이 다하매 왔으니 내 무슨 간섭하리요? 또 네가 세상과 꿈을 달리 아니, 네 꿈이 오히려 깨지 못하였도다.”

성진이 두 번 절하며 사죄하고 설법하여 꿈 깨임을 청하니라.

이때에 팔 선녀가 들어와 사뢰었다,

“제자 등이 위부인을 모셔 배운 것이 없어 정욕을 금치 못하여 중견을 입었더니, 사부가 구제하심을 입어 한 꿈을 깨었사오니, 원컨대 제자 되어 길이 함께하심을 바라나이다.”

대사가 크게 웃으며 말했다,

“너희 진실로 꿈을 알았으니 다시는 망념을 생각하지 말라.”

하고, 즉시 대경법을 베풀어 성진과 팔 선녀를 가르치니, 인간 누십 년 변화는 다 꿈 밖의 꿈이요, 일심이 불법의 진척하니 극락세계의 만만세 무궁한 즐거움이로구나.

정미중화(丁未仲花) 완남개간(完南開刊)

구운몽종(九雲夢終)

Chapter 3 of 3
|
광고
읽고 쓰면, 책은 무료입니다
서평단에 선정되면 출판사가 책을 보내 줍니다. 블로그나 인스타그램에 서평을 남기면 포인트로 쌓입니다.
모집 중인 캠페인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