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 of 1

Chapter 1

운명과 사람

아리시마 다케오

運命(운명)은 현상을 지배한다. 마치 물체가 그림자를 지배하듯. 현상을 통해 암시되는 운명의 의도는 “죽음”이다. 모든 현상이 궁극적으로 귀결하는 곳이 소멸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 사물과 사물은 安定(안정)을 얻지 못하고 있다. 그리하여 안정을 얻기 위한 도정에서 사물과 사물은 相剋(상극)한다. 우리가 에너지라 부르는 것은 그 결과로 생겨나는 것이다. 그리하여 에너지가 작동하는 동안 우리 사이에는 생명이 엄연히 존재한다. 그러나 안정을 구하여 안정 쪽으로 나아가는 현상이 마침내 최후의 안정에 이른 때에는, 에너지가 존재한다 해도 더는 작동하지 않게 된다. 마치 한 줄기 바람에 일어난 수면의 물결이 서로 상극하면서 결국 거울같이 잔잔한 수면을 빚어내기에 이르는 것과 같다. 거기에는 돌처럼 침묵한 물덩이가 꼼짝 않고 침전해 있을 뿐이다. 다시 그것을 움직일 힘은 어디서도 오지 않는다. 생기는 그 물에서 완전히 끊겨 버린다.

우리 세계의 현상도 결국에는 이 지점에 안착하고 말 것이다. 거기에는 “생(生)”이 자취를 감추고 다만 하나의 大死(대사)만이 있을 것이다. 그때 비로소 운명의 의도는 성취된다.

이 피할 수 없는 결론을 우리는 어떻게 해도 승인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사람”은 운명의 이 의도를 승인한다. 그럼에도 우리의 본능이――인간으로서의 본능이 우리에게 강요하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그 반대, 삶이다.

인생에는 모순이 많다. 어떤 때는 희극적이고, 어떤 때는 비극적이다. 우리가 걸어가는 도달점이 죽음임을 뻔히 알면서도 여전히 힘껏, 살고 또 살려는 이 모순만큼 기괴하고 두려운 모순은 없다. 나는 그것을 인생에서 가장 비극적인 모순이라 부르겠다.

우리는 현재의 순간순간에 진실로 살고 있다고들 말한다. 한 순간 뒤의 미래는 어찌됐든, 한 순간의 현재는 적어도 삶의 영역이다. 거기에 우리의 존재를 의식하고 있는 이상, 아득한 미래에 닥쳐올 운명의 소행을 미리 염려할 필요는 없다――그렇게 어떤 사람들은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결국 일종의 속임수이고 일종의 관념론이다.

인간은 말할 것도 없고, 생물이 지상에서 살아가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죽음의 위협을 받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다. 우리 사이에서 발효해 온 모든 철학은, 그것이 신앙의 형식을 취하든, 관념의 형식을 취하든, 실증의 형식을 취하든, 모두 인간의 마음이 “죽음”에 대해 일으킨 반응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가 의식하는 것 이상으로 본능의 밑바닥에서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다. 운명이 우리를 데려가려는 곳에, 필사적으로 뒷걸음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이는 육체의 소멸을 두려워한다. 어떤 이는 사업의 소멸을 두려워한다. 어떤 이는 個性(개성)의 소멸을 두려워한다. 그리하여 먹을 것을 구하고, 약을 구하고, 노역하고, 분주히 달리며, 미워하고 또 사랑한다.

인간의 생활이란 결국 물에 빠져 지푸라기 하나에 매달리려는 허무하고 덧없는 몸부림이 아닌가.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여기서 인간 생활 안에서 하나의 기묘한 현상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죽음을 더욱 깊이 두려워하는 사람을, 현명하고 통찰이 예리하며 지혜가 깊은 이들 가운데서 발견한다는 사실이다.

이런 사람들은 운명의 의도를 보통 사람보다 더 잘 이해하는 이들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더 잘 이해하는 이상, 운명에 대해 더 순순히 따라야 마땅할 것이다. 거기에는 냉정하고 스토아적인 체념이 솟아나야 마땅할 것이다. 그리고 이른바 보통 사람이――체념할 만한 이해를 갖지 못한 보통 사람이――가장 강하게 운명에 힘찬 저항을 꾀해야 마땅할 것이다. 삶의 절대적 권리를 주장해야 마땅할 것이다.

그런데 사실은 전혀 반대의 양상을 보인다. 우리 가운데 뛰어난 자일수록――운명의 계획을 꿰뚫어 알고 있다고 여겨지는 터에――죽음을 이겨내려는 일념에 골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주여, 이 죽음의 잔을 내게서 거두어 주소서”라 한 그리스도의 말씀은 모든 뛰어난 사람들의 영혼이 부르짖는 소리를 대표한다. 四苦(사고)를 보고 영생의 길을 향해 발심한 석가는 모든 사려 깊은 사람들의 마음이 분발한 것을 표상한다. 운명의 의도를 가장 밝히 알아야 마땅할 그들의 이 태도를, 우리는 한갓 어리석은 자의 한가한 갈등이라 일소에 부칠 수는 없을 것이다.

죽음에의 체념을 가르치지 않고 삶에의 정진을 가르친 그들의 마음을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 것인가.

여기까지 와서 우리는, 가상(假象)에서 한 겹 더 깊이 들어가 보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죽음에의 체념을 가르치지 않고 삶에의 정진을 가르쳤다고 했다. 그러나 본래 그것은 그렇지 않다. 그들의 최후의 선언은 그 철저한 의미에서 죽음에의 체념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삶에의 체념을 가르친 것이다. 삶에의 정진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죽음에의 정진을 가르친 것이다. 그렇게 나는 말했어야 했던 것이다.

왜 그런가.

그것을 내 나름대로 말해 보겠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너무도 자명한 일이겠지만.

그들은 운명의 마음을 철저히 체험한 자들이다. 운명이 사물과 사물 사이의 안정을 최후의 목적으로 삼았듯이, 그들 또한 마음과 마음 사이의 안정을 최후의 목적으로 삼는 본능에 불타고 있던 사람들이다. 그들의 표현이 어떠하든, 그 본능의 밑바닥을 지배하고 있던 힘은 실로 상극에서 안정으로 나아가는 외길이었다. 그들은 결국 운명과 같은 걸음으로 걷고, 같은 리듬으로 움직인 것이다.

피상의 혼란에서 진상(眞相)의 정연함으로, 가상(假象)의 잡다함에서 실재(實在)의 통일로, 물질생활의 소란에서 정신생활의 간결함으로, 추(醜)에서 미(美)로, 혼돈에서 질서로, 증오에서 사랑으로, 미혹에서 깨달음으로……즉, 상극에서 안정으로.

우리의 역사를 보라. 우리의 선각자들을 보라. 또 우리 자신의 마음을 보라. 모든 선한 것, 선한 생각은 항상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지 않은가. 즉, 상극에서 안정으로……운명의 눈길이 응시하는 그곳을 향해.

그러니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하고 무엇을 꺼릴 것인가. 운명은 결국 친절하다.

그러니 우리는 두려움 없이 살자. 우리가 사는 세계는 불안정의 세계다. 우리의 마음은 불안정한 마음이다. 세계와 우리의 마음은 가까스로 세우기 시작한 안정의 주춧돌에서 자꾸만 미끄러져 떨어진다. 세계와 우리는 온갖 실태를 연출한다. 이 추한 실족은 오랫동안 우리의 생활을 지배할 것이다. 그래도 상관없다. 우리는 그 혼란 속에서 살자. 두려워할 것 없다. 우리에게는 그 혼란 속에서도 통일을 구하는 억누를 수 없는 본능이 잠들어 있어, 결코 꺼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우리는 살자. 우리 주위로 밀려오는 죽음의 여러 양상에 맞서 힘껏 싸우자. 육체를 건강하게 하여 죽음에서 구하기 위해 온갖 위생(衛生)을 실행하자. 사회를 더 건전한 토대 위에 놓기 위해, 생활을 안전하게 하기 위해 모든 개혁을 강구하자. 우리의 영혼을 영구히 하기 위해 모든 죽음의 가시를 없애자.

우리가 이렇듯 힘써 죽음을 이겨낸 때, 그때야말로 어찌 알겠는가――우리가 죽음이 오는 길을 가장 평탄하게 닦은 때인 것이다. 사람은 그때 운명과 굳게 악수한다. 사람은 그때 운명의 한 팔이 되어, 사물과 사물 사이의 상극을 안정으로 이끄는 운명의 일을 돕고 있는 것이다.

운명이 냉혹한 것이라면, 운명을 압도하여 그보다 앞서 나가는 유일한 길은, 사람이 그 본능의 생에 대한 집착을 키워 大死(대사)를 앞당김으로써 운명의 허를 찌르는 것뿐이다. 운명이 친절한 것이라면, 운명과 악수하여 그 애무를 받는 유일한 길은, 사람이 그 본능의 집착을 키워 대사를 앞당김으로써 운명을 기꺼이 기쁘게 하는 것뿐이다. 어느 쪽이든 길은 하나다.

그러므로 휘트먼은 노래했다.

“오라, 사랑스럽고 정다운 죽음이여,

대지의 끝 끝까지, 빠짐없이, 차분한 발걸음으로 가까이, 가까이,

낮에도, 밤에도, 모든 이에게, 저마다에게,

이르든 늦든, 우아한 모습의 죽음이여.

헤아릴 수 없는 우주여, 찬양받을지어다.

그 삶, 그 기쁨, 신기한 여러 모습과 앎,

또 그 사랑, 달콤한 사랑――그러나 더욱더 찬양받을지어다,

저 냉정히 모든 것을 감싸 안는 죽음의 확실한 포옹의 손은.

고요한 발걸음으로 쉬임 없이 다가오는 어두운 어머니여.

진심으로 그대를 위해 환영의 노래를 부른 이가 아직 한 사람도 없다 하는가.

그렇다면 내가 부르리――내가 무엇보다도 그대를 영광스럽게 하리.

그대가 반드시 오는 것이라면, 틀림없이 와 달라고 노래 부르리.

가까이 오라, 힘찬 구원자여!

그것이 운명이라면――그대가 사람들을 끌어안는다면. 나는 기꺼이 그 죽은 이들을 노래하리.

그대의 사랑에 가득 차 흘러 떠도는 큰 바다에 녹아들어,

그대의 법열(法悅)의 홍수에 황홀히 취한 그 죽은 이들을 노래하리. 오, 죽음이여.

나에게서 그대에게 기쁨의 야상곡(夜想曲)을,

또 춤을 인사와 함께 드리리――방의 장식과 향연도 아울러.

혹은 넓디넓은 대지의 풍경, 혹은 높이 펼쳐진 하늘,

혹은 삶, 혹은 들판, 혹은 깊은 상념에 잠긴 큰 밤은 모두 그대에게 어울리리.

혹은 별들이 지키는 고요한 밤,

혹은 바닷가, 내가 귀에 익힌 저 쉰 목소리로 속삭이는 파도.

혹은 내 영혼은 그대에게로 돌아서다. 오, 끝없이 광대하고 면사포 드리운 죽음이여,

그리고 육체는 감사하며 그대의 무릎 위에 둥글게 깃들어 쉬다.

나뭇가지 위에서 나는 노래를 하늘에 띄우노니,

구불구불 움직이는 물결을 넘어――수많은 들판과 황막한 대초원을 넘어,

빽빽이 들어선 모든 도시와, 군중으로 가득한 부두와 거리를 넘어,

나는 이 노래를 기쁨에 넘쳐 하늘에 띄우노니. 오, 죽음이여” (1918년 9월 17일)

Chapter 1 of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