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 of 1

Chapter 1

메이지 회고

우에무라 쇼엔

제가 그림을 처음 배우기 시작하던 무렵을 떠올리면, 참으로 거리낌 없고 그리운 일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그 시절(메이지 21년경, 1888년 무렵) 교토에는 스즈키 햐쿠넨(鈴木百年), 쇼넨(松年), 고노 바이레이(幸野楳嶺), 기시 지쿠도(岸竹堂), 이마오 게이넨(今尾景年), 모리 간사이(森寛斎), 모리카와 소분(森川曾文) 같은 여러 선생님들의 샤추(社中)가 있었지요만, 여기서는 스즈키 쇼넨 샤추를 예로 들어 말씀드릴까 합니다.

오늘날 화숙(画塾)의 연구회에 해당하는 모임이 매달 십오일 마루야마(円山)의 보탄바타케(牡丹畑, 모란밭)에서 열렸답니다. 그 무렵의 마루야마 공원은, 기온 신사 바로 북쪽이 울창한 숲이었고 좁은 길이 나 있어, 그 이름난 칠엽수 가까이에 모란밭이 있었으며 거기에 료테이(料亭, 일본 고급 요릿집)가 있어서 보탄바타케라 불렀던 것이지요. 모임은 그곳에서 열렸는데, 료테이 입구에는 「스즈키 샤추 화회(鈴木社中画会)」라고 큼직하게 써 붙여 두었고, 이 층에는 쇼넨 선생님을 비롯한 샤추 분들의 그달 작품이, 대개는 지본(紙本, 종이 바탕)이었습니다만 가권(仮巻, 임시 두루마리)에 발라 진열되어 있었으며, 일 층에서는 석상화(席上画, 그 자리에서 그려 주는 그림)가 행해졌답니다. 봄철 같은 때면 마루야마는 인파로 붐비는데, 이 스즈키 샤추 화회의 간판을 보고 들어오는 분도 꽤 많았지요. 이 층의 진열화를 보고 일 층으로 내려오면, 거기에 부채며 당지(唐紙) 같은 것을 팔고 있어, 그것을 사 들고 와 석상화를 부탁하는 식이었으니, 어디 사는 누구신지도 모르는 분이 부채를 내미시면 그 자리에서 그림을 그려 드린 것이었답니다.

그런데 이 연구회인 화회에서는 작품 비평 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샤추 분들은 출품하기에 앞서 선생님께 본을 빌려 와서, 그것을 보고 그린 다음에 봐 주십사 청하는 것이었지요. 그 본 이야기입니다만, 쇼넨 선생님은 밤에 손님과 이야기를 나누시면서도 곧잘 그림을 그리고 계셨습니다. 낮은 큰 책상에 당지의 렌오치(連落ち, 두 폭짜리 종이)를 펴 놓고, 야키즈미(焼墨, 그을음 먹)도 제대로 갈지 않으신 채 산수화를 그리시곤 했는데, 삼분의 일쯤 그리시면 먹이 마르지 않으니, 당지의 파지를 위에 얹고 둘둘 말아 두신 다음 다음 폭을 그리시는 식으로, 이렇게 며칠이 지나면 몇 폭의 그림이 완성되는 것이었답니다. 그것이 화실 한구석에 차곡차곡 쌓여 있어, 저희들이 「본을 좀」 하고 청하면, 「거기 쌓아 둔 것 중에서 골라가게」라 이르시지요. 저희들은 그중에서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내어 본으로 삼는 것이었답니다.

물론 본에만 의지한 것은 아닙니다. 날씨 좋은 날 같은 때면 갑자기 선생님께서 「지금부터 가모(賀茂) 쪽으로 사생하러 가세」 하시며, 샤추의 몇 사람이 선생님을 모시고 따라간 것이었답니다. 도중에 가시와모치(かしわ餅, 떡갈나무잎 떡)를 잔뜩 사 두었다가 사생이 끝나면 다 같이 둘러앉아 먹지요. 이런 것도 그리운 추억의 하나일 테지요.

봄가을 두 차례, 스즈키파(햐쿠넨, 쇼넨)의 합동 화회가 같은 모란밭에서 열렸습니다. 이때는 견본(絹本, 비단 바탕)에 그리기도 하였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월차회(月次会)에는 대개 지본이었습니다만, 이 큰 모임에는 견본으로 특별히 공을 들였는데, 비단이라 해도 오늘날처럼 테두리를 두른 것이 아니라 역시 가권에 바른 것이었지요.

이상은 한 샤추의 한 해 행사 한 예입니다만, 메이지 29년(1896) 무렵까지 조운샤(如雲社)라는 모임이 있어 매달 십일일에 화회가 열렸답니다. 여기에는 일을 보아 주는 분이 계셔서, 참고품을 다이토쿠지(大徳寺)나 묘신지(妙心寺) 같은 여러 곳에서 옛 명화를 빌려다 진열하였지요. 꽤나 좋은 작품들이 진열되곤 했답니다. 그래서 이날에는 바이레이, 뎃사이(鉄斎), 게이넨, 그리고 우쓰미 기치도(内海吉堂), 모치즈키 교쿠센(望月玉泉) 같은 노대가들과, 그 무렵 아직 젊었던 세이호(栖鳳), 슌쿄(春挙) 같은 분들이 모여 이 참고품을 감상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방 한가운데 화로가 놓이고 그 둘레에 노소 여러 대가가 자리를 잡으시면, 뭐라던가 하는 다인이 격불하여 내어 주는 맛차(抹茶)를 마시면서 이런저런 이야기가 무르익습니다. 여행 이야기가 나오는가 싶으면, 이쪽에서는 새 이야기가 나오고 있지요. 옛 그림 이야기 등 화제는 사방에 걸쳐 있어, 저희들은 진열된 명화를 임모(臨模)하면서 살아 있는 학문을 한 셈이었답니다. 이날은 교토 화인의 좌담회 같은 것이어서, 모두 시간 가는 줄 모르다가 어느새 해가 저물어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나는, 참으로 화기애애한 풍경이었답니다.

그 무렵 전람회로는 도쿄에 미술협회전이 있었습니다만, 여기에는 심사 같은 것이 없어 출품하면 그대로 진열되는 것이었지요. 하기야 각 샤추에서 선생님이 골라 출품하신 것이긴 했습니다만, 교토의 미술협회도 마찬가지로 심사 같은 것 없이 진열되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제가 출품하여 심사를 받은 것은 제4회 내국권업박람회가 처음이었던가 합니다. 그러한 분위기여서, 메이지 30년(1897) 이전의 화인들에게는 어딘지 유유자적한 데가 있었고, 따라서 이른바 「가전 기예」를 지키고 있던 화인은 시대와 더불어 잊히고, 이 무렵에 꾸준히 연찬을 거듭한 분이 훗날 이름을 이루신 것입니다. 세이호 선생님도 그중 한 분입니다만, 제가 세이호 선생님 문하에 들어갔을 무렵 선생님은 아직 젊으셔서, 문하 분들과 자주 사생을 나가시곤 했답니다. 그때를 떠올려도 그리운 정이 솟습니다.

사생을 나간다 해도 오늘날처럼 탈것이 없으니, 새벽 어둑할 때 선생님 댁에 모이는 것이었지요. 간세쓰(関雪) 씨, 지쿠쿄(竹喬) 씨 같은 남자분들은 양복 차림에 짚신을 신고, 저희 여자들은 조리(草履) 끈을 뒤꿈치에 단단히 매고서, 하루에 구 리(약 36킬로미터) 정도의 노정은 예사로 여겼습니다. 라쿠호쿠(洛北, 교토 북부)의 골짜기를 두루 걸어, 산골 마을 숙소에 묵은 적도 있답니다. 어쨌거나 스무 명 남짓한 손님이 갑작스레 묵게 되니, 숙소에서는 마을 처녀들을 불러 모아 시중을 들게 했는데, 혈기 왕성한 젊은이들 일색이라, 마을 처녀도 「어이, 밥!」 하고 여기저기서 큰 소리로 불려 다녀, 정신없이 바쁜 일을 겪었답니다. 이러한 사생 여행은 한 달에 한 번씩 있어, 고된 추억과 즐거운 회상이 다하지를 않습니다.

지금 대동아전쟁 하의 국민은 온갖 고난을 견디고 있습니다. 절전은 거리를 어둡게 하고, 교통기관도 헛된 여행을 삼가게 하고 있지요. 어딘지 저희들의 수행 시절, 메이지 연간을 떠올리게 하는 데가 있습니다만, 그 시절의 젊은 화인들은 명랑하고 활기 가득한 모습이었답니다.

(쇼와 18년, 194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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