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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제1장. 사발의 입문 제2장. 부지발과 사랑 제3장. 각성 제4장. 감정에서 철학으로제1장.
사발의 입문
카페 리슈를 막 나서면서 장 드 세르비니가 레옹 사발에게 말했다. “자네만 괜찮다면 좀 걸어가세. 이토록 좋은 날씨에 삯마차라니, 아깝지 않은가.”
친구가 대답했다. “나야 그게 더 좋지.”
장이 말을 이었다. “아직 열한 시도 채 안 됐네. 자정 전에는 족히 닿을 테니, 느긋하게 가세.”
대로에는 잠시도 가만있지 못하는 군중이 흘러갔다. 여름밤에만 볼 수 있는 그 인파, 마시고 떠들고 강물처럼 이어지며 안락과 들뜬 기쁨으로 출렁이는 무리였다. 이곳저곳에서 카페의 불빛이 보도 위 작은 탁자들을 환히 밝혔고, 탁자에는 병과 잔이 가득 놓여 서둘러 지나가는 행인의 발걸음을 가로막았다. 차도를 따라 삯마차들이 붉고 푸르고 초록인 등불을 달고 달려갔으며, 희미한 빛 속에서 말의 여윈 그림자와 마부의 치켜세운 옆모습, 마차의 검은 차체가 한순간씩 떠올랐다 사라졌다. 위르벤 마차 회사 마차는 노란 차체가 불빛에 부딪칠 때마다 선명하고 날랜 얼룩을 빚어냈다.
두 친구는 느린 걸음이었다. 입에는 시가를 물고, 연미복 차림에 외투는 팔에 걸친 채, 단추 구멍에 꽃 한 송이를 꽂고, 모자는 조금 비스듬히 얹은 모양새였다. 잘 먹고 바람마저 온화할 때 사내들이 곧잘 그리하듯, 무심하게 쓴 모자였다.
둘은 학창 시절부터 서로에게 가깝고 헌신적이며 단단한 애정으로 묶여 있었다. 장 드 세르비니는 자그마한 체구에 호리호리했고, 이마가 살짝 벗겨졌으며, 어딘가 허약해 보였다. 그러나 풍채에는 기품이 서렸고, 수염은 말끔히 컬을 넣었으며, 눈은 빛나고 입술은 단정했다. 대로에서 나고 자란 사내라 해도 믿을 법한 모습이었다. 나른한 분위기에도 그는 지치는 법이 없었고, 창백한 얼굴과 달리 기운이 넘쳤다. 체조와 검술, 냉수욕과 온수욕이 자그마한 파리지앵들에게 길러주는 그 예민하고도 인위적인 힘을 지닌 부류였다. 그는 자신의 결혼과 더불어 재치며 재산이며 인맥, 또 어떤 부류의 사내들에게만 깃드는 사교성과 상냥함, 귀부인들을 향한 멋들어진 헌신으로 이름을 알려왔다.
덧붙이자면 그는 순도 높은 파리 사람이었다. 가볍고 회의적이며 변덕스럽고 매혹적이며 활기차고 결단력은 모자란 사내, 무엇이든 할 수 있으면서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내였다. 원칙으로는 이기적이되 기분이 내키면 너그러웠다. 수입에 알맞은 선에서 절제하며 살았고, 건강 관리를 오락 삼았다. 무심한 듯 열정적이었고, 마음껏 자신을 풀어놓다가도 다시 거두어들였다. 서로 충돌하는 본능에 끌려다니다 모든 것에 굽혔고, 끝내는 제 안의 영악한 사교계 감각에 복종했다. 바람 방향을 읽어 상황에서 이득을 취할 뿐, 상황을 스스로 만드는 수고는 결코 감수하지 않는 그 풍향계의 논리 말이다.
그의 친구 레옹 사발 또한 재산이 넉넉했다. 여인들이 거리에서 뒤돌아볼 만큼 당당하고 거대한 풍채를 지닌 부류였다. 살롱에 출품되는 조각상처럼, 어느 종족의 전형을 그대로 사람의 형태로 빚어놓은 듯한 인상을 풍겼다. 너무 잘생겼고 너무 컸으며 너무 장대했고 너무 힘이 셌다. 그는 매사에 과잉이라는 죄를 지었으니, 곧 제 장점이 지나쳤다는 죄였다. 지금껏 그의 뒤에는 수없이 많은 연애 사건이 딸려 다녔다.
보드빌 극장 근처에 이르자 사발이 물었다. “그 부인께 나를 데리고 간다고 미리 말씀드렸나?”
세르비니가 웃음을 터뜨렸다. “오바르디 후작부인한테 미리 알리라고? 합승마차 운전수한테 모퉁이에서 올라탈 테니 알아두시오 하고 통보하는 사람이 어디 있나.”
사발은 조금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 “대체 어떤 여인이란 말인가?”
친구가 대답했다. “벼락출세한 여자일세. 매력 있는 난봉 여인이지. 어디서 굴러왔는지 아무도 모르고, 어느 날 불쑥 파리 모험녀들 틈에 나타났는데 그 수법도 역시 아무도 모르네. 제 앞가림 하나는 기막히게 잘 아는 여자라네. 어쨌거나 그게 우리와 무슨 상관이겠나? 사람들 말로는 본명이, 그러니까 처녀 적 이름이 옥타비 바르댕이라더군. 순결만 빼면 여전히 처녀라 불릴 자격을 모조리 갖췄다는 뜻일세. 아무튼 거기서 ‘옥타비’의 머리글자 O를 앞에 붙이고 ‘바르댕’의 끝 자 n을 떼어내, 오바르디라는 이름을 지어낸 걸세.”
“게다가 꽤나 사랑스러운 여자라서, 자네 같은 체격이면 그 집의 정부가 되는 운명을 비켜 갈 수 없지. 헤라클레스가 메살리나의 집에 들어가 가만히 있을 리야 있겠나. 그래도 한마디 미리 일러두지. 시장처럼 드나드는 건 자유지만, 진열된 물건을 꼭 사야 할 의무는 없네. 그 집 차림표에는 사랑과 도박이 올라 있네만, 그중 어떤 것도 집어 들지 않을 자유가 있다는 말일세. 들어오는 게 자유인 만큼 나가는 것도 자유지.”
“삼 년 전쯤 에투알 구역, 그 수상쩍은 동네에 자리를 잡고는, 대륙 각지에서 끓어 넘친 찌꺼기들, 무시무시하고 범죄적인 재주들을 파리에서 써먹어 보려고 몰려든 패거리에게 응접실을 열어주었네.”
“어쩌다가 내가 그 집에 드나들게 되었는지는 나조차 잘 기억나지 않네. 남들이 다 가는 이유로 갔을 뿐이지. 카드판이 있고, 여자들은 순순하고, 사내들은 점잖지 못하니까. 나는 그 사교계의 해적 무리를 좋아하네. 훈장을 주렁주렁 달고 죄다 작위는 있다는데, 정작 자기 나라 대사관에서는 밀정들 말고 아무도 모르는 자들. 걸핏하면 명예 이야기를 끄집어내고, 작은 꼬투리만 잡혀도 조상 명단을 줄줄 읊으며, 기회만 있으면 제 인생 내력을 늘어놓는 허풍쟁이에 거짓말쟁이에 사기꾼들. 카드만큼이나 위험하고 제 이름만큼이나 가짜이며, 그렇게 살 수밖에 없어서 용감한, 제 목숨을 드러내지 않고는 희생양을 털어낼 수 없는 암살자 같은 자들 말일세. 한마디로 매춘굴의 귀족들이지.”
“나는 그자들이 좋네. 속을 헤집고 알아가는 재미가 있고, 듣기에 즐거우며, 여느 프랑스 손님들처럼 평범한 법이 없고 종종 재치가 넘치지. 그들의 여인들은 늘 어여쁘고, 이국풍의 교활함이 살짝 배어 있으며, 지나온 삶의 반쯤은 어쩌면 교도소에서 보냈을 법한 그 신비가 감돌지. 대체로 멋진 눈과 영광스러운 머리칼, 그 일을 타고난 듯한 체격, 사내를 취하게 하는 우아함, 미치게 만드는 유혹의 힘, 병든 듯하면서도 뿌리칠 수 없는 매력! 옛 노상강도처럼 그녀들은 사내를 정복하지. 탐욕스러운 피조물들이야. 진짜 맹금류지. 나는 그녀들도 좋네.”
“오바르디 후작부인도 그 우아한 무뢰한들 가운데 한 사람일세. 과숙하고 어여쁘며 고양잇과의 매력이 있는데, 뼛속까지 악덕으로 채워져 있음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지. 그 집에서는 모두가 즐거워하네. 카드며 춤이며 만찬이며, 사교계의 쾌락이라는 쾌락은 죄다 있으니까.”
“자네가 그 부인의 정부였거나 지금 정부인가?” 레옹 사발이 물었다.
“나는 정부였던 적도 없고, 지금도 아니며, 앞으로도 결코 되지 않을 걸세. 그 집에 가는 건 오로지 그 딸을 보러 가는 걸세.”
“아! 그럼 딸이 있단 말이지?”
“딸이 있네. 놀라운 딸이야, 이 사람아. 오늘날 그 소굴의 제일가는 미끼지. 훤칠하고 화려하며, 이제 막 무르익은 열여덟 살. 어미가 검은 만큼 그 애는 환하네. 늘 명랑하고, 언제든 놀러 나갈 태세이고, 줄곧 웃으며, 미친 듯 춤출 채비가 되어 있지. 그녀를 낚아챌 행운의 사내가 누구일지, 아니 이미 낚아챈 자가 있는지조차 아무도 모른다네. 우리 같은 사내가 열은 그 뒤를 따라다니며 희망을 품고 있지.”
“후작부인 같은 여인의 손아귀에 쥐인 그런 딸이라면, 그야말로 재산이지. 두 사람이 함께 판을 벌이는 걸세, 그 두 매혹의 여인이. 무얼 꾸미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르네. 어쩌면 나보다 나은 흥정 상대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고. 하지만 말해두지, 나는 기회만 오면 흥정을 끝낼 작정이네.”
“게다가 그 이베트라는 계집아이는, 나를 완전히 어리둥절하게 만든단 말일세. 수수께끼야. 내가 지금껏 본 중에 가장 완벽한 영악함과 사악함의 화신이 아니라면, 분명 상상할 수 있는 가장 경이로운 순결의 현상이지. 그 애는 그 치욕의 공기 속에서 차분하고 의기양양한 편안함으로 살아가네. 그 편안함이란 극단적인 방탕이거나, 아니면 꾸밈없는 천진함이거나 둘 중 하나겠지. 모험녀의 기이한 혈통, 그 계층의 더미 위로 던져진 씨앗. 마치 부패 위에 피어난 근사한 풀꽃 같기도 하고, 어느 명문 혈통의 딸이나 어느 위대한 예술가의 딸, 또는 어느 대영주나 왕자, 폐위된 왕의 딸이 어느 저녁 어미의 품에 던져진 듯하기도 하지. 그녀가 무엇이고 무엇을 생각하는지, 아무도 읽어낼 수 없네. 하지만 자네도 곧 보게 될 걸세.”
사발이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자네, 그녀를 사랑하고 있군.”
“아닐세. 나는 명단에 올라 있을 뿐이야. 그건 꼭 같은 얘기가 아니지. 자네에게 가장 만만찮은 경쟁자들을 소개해 주겠네. 그래도 승산은 내 쪽에 있네. 내가 선두이고, 조금이나마 남다른 대접을 받고 있으니.”
“자네, 사랑에 빠졌군.” 사발이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아닐세. 그녀는 나를 불안하게 만들고 꾀어내고 흔들어놓고 끌어당기며, 또 달아나게 하네. 나는 그녀를 덫처럼 경계하면서도 갈증 끝의 셔벗처럼 갈망하지. 그 매력 앞에서 굽히되, 솜씨 좋은 도둑인 줄 뻔히 아는 사내를 대하듯 조심스러운 마음으로만 다가서지. 그녀 곁에 있으면, 어쩌면 실재할지 모를 그녀의 순결을 이치에 닿지 않게 믿고 싶은 충동과, 못지않게 있음 직한 그녀의 교활함을 너무도 이치에 닿게 의심하는 마음이 동시에 솟아오르네. 나는 자연의 법칙 바깥에 선 비정상적 존재, 황홀한 피조물인지 역겨운 피조물인지 분간할 수 없는 누군가와 접촉하고 있는 기분이 들어.”
사발이 세 번째로 말했다. “자네는 사랑에 빠졌어. 시인의 장대한 언사로 그녀를 이야기하며 음유시인의 감정으로 말하고 있네. 자, 가슴을 뒤져보고 고백하게.”
세르비니는 대답 없이 몇 걸음을 걷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럴지도 모르지, 어쨌거나. 어찌 됐든 그녀가 내 머릿속을 거의 끊임없이 채우고 있으니. 그래, 아마도 나는 사랑에 빠진 걸세. 너무 자주 그녀 꿈을 꾸네. 잠들 때도 깨어날 때도 그녀를 생각하니, 이건 분명 심각한 징후지. 그녀의 얼굴이 나를 따라다니고, 끊임없이 나를 동반하며, 늘 내 앞에, 내 주위에, 나와 함께 있네. 이게 사랑인가, 육체적 도취인가? 그녀의 생김새가 어찌나 내 시야에 새겨졌는지, 눈을 감는 순간 그대로 그녀가 보이네. 볼 때마다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 부정하지 않겠네.”
“그러니 나는 그녀를 사랑하네. 다만 기묘한 방식으로 말일세. 그녀를 향한 욕망은 누구보다 강하나, 그녀를 아내로 삼는다는 생각은 어리석음이요 멍청한 짓이며 기괴한 일처럼 느껴지네. 그리고 나는 그녀가 조금 두렵기도 해. 매 한 마리가 머리 위를 맴도는 작은 새가 느낄 법한 두려움 말일세.”
“게다가 나는 그녀를 질투하네. 그 헤아릴 길 없는 가슴속에서 내가 알지 못하는 모든 것을 질투하는 걸세. 늘 자문하지. ‘이 아이는 매혹적인 어린 것인가, 아니면 비참한 탕녀인가?’ 그녀는 군대 전체를 몸서리치게 만들 말을 서슴없이 내뱉지만, 앵무새도 그런 짓은 하니까. 어느 순간에는 너무 경솔하면서도 얌전해서 흠 하나 없는 순결을 믿을 수밖에 없게 만들고, 또 어느 순간에는 믿기지 않을 만큼 천진해서 한 번도 정숙했던 적이 없지 않나 의심하게 되네. 어떤 부류의 여자가 그러듯 나를 유혹하고 자극하다가, 동시에 나무랄 데 없는 처녀처럼 구네. 나를 사랑하는 듯하면서도 놀려대고, 사람들 앞에서는 정부라도 되는 양 굴다가, 단둘이 있을 때는 오라비나 하인처럼 대하지.”
“어떤 때는 그 애가 제 어미만큼 많은 연인을 두었으리라 짐작하고, 또 어떤 때는 그런 삶의 낌새조차 눈치채지 못했으리라 상상하지. 자네도 짐작이 가겠지. 더구나 그녀는 엄청난 소설 독자라네. 나는 지금으로서는, 더 나은 자리를 기다리는 동안, 그녀의 책 공급상 노릇을 하고 있네. 나를 ‘사서’라고 부르지. 매주 신간 서점은 내 주문에 따라 새로 나온 책이란 책은 전부 그녀에게 보내고, 나는 그녀가 닥치는 대로 아무거나 읽는다고 믿네. 그녀의 머릿속은 기이한 잡탕이 되어 있을 걸세.”
“그런 문학의 잡죽이 어쩌면 그 계집아이의 괴이한 면모 몇 가지를 풀어주는지도 모르지. 한 젊은 여자가 일만 오천 권의 소설이라는 매체를 통해 삶을 들여다본다면, 그 삶을 이상한 빛깔로 보게 될 테고, 세상만사에 관해 묘한 관념을 지어내기 마련이니까. 나로서는 기다리고 있네. 어쨌든 분명한 것은, 지금껏 어떤 여인에게도 지금 그녀에게 바치는 만큼의 헌신을 바친 적이 없다는 사실일세. 또 하나 분명한 것은, 결코 그녀와 결혼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이고. 그러니 그 아이가 여럿을 거쳤다면 나는 그 수를 늘려줄 뿐이고, 아무도 거치지 않았다면 나는 첫 번째 승차권을 끊는 셈이지, 마치 합승마차에 올라타듯이.”
“사정이야 아주 단순하지. 당연히 그녀는 결혼하지 못할 걸세. 세상 누가 오바르디 후작부인의 딸, 옥타비 바르댕의 아이와 결혼하려 들겠나? 아무도 없지, 천 가지 이유로. 어디서 신랑을 찾아낼까? 사교계에서? 천만에. 그 어미의 집은 딸을 미끼 삼아 손님이 꾀어 드는 자유의 전당 같은 곳일세. 그런 조건의 처녀들은 혼사를 이루지 못하네.”
“그럼 상인 집안에서 신랑을 찾을까? 그건 더욱 어림없지. 게다가 후작부인은 손해 보는 흥정을 할 여자가 아닐세. 이베트는 지체 높은 자리에 있는 사내에게만 넘기려 할 텐데, 그런 사내를 그녀가 영영 만나지 못할 테니.”
“그럼 서민층에서 구할까? 그건 더더욱 가망이 없지. 해답이 없다는 말일세. 이 아가씨는 사교계에 속하지도, 상인 계층에 속하지도, 서민에 속하지도 않네. 그러니 결혼으로는 어느 계층에도 들어설 수 없지.”
“그 애는 어미로 인해, 출생으로 인해, 교육으로 인해, 또 물려받은 유산과 태도와 습속으로 인해, 파리에서 가장 빠르게 흘러가는 삶의 소용돌이에 속해 있네. 수녀가 되지 않고서는 거기서 빠져나올 길이 없는데, 그 애의 기질과 취향으로 보아 도무지 있음 직하지 않지. 그 애에게 열린 길은 오직 하나, 쾌락의 삶일세. 조만간 그 길에 들어설 걸세. 이미 그 장밋빛 오솔길을 밟기 시작하지 않았다면 말이야. 제 운명은 비켜 갈 수 없는 법. 순진한 처녀에서 저 거부할 수 없는 한 걸음을 내딛게 되겠지, 아주 담담히. 나는 그 변신의 축이 되고 싶은 걸세.”
“나는 기다리고 있네. 연인 후보는 많지. 자네도 그 무리 속에서 보게 될 걸세. 벨비뉴 씨라는 프랑스인, 크라발로프 공작이라는 러시아인, 발레알리 기사라는 이탈리아인. 셋 다 출마를 선언하고는 제 나름의 수완껏 움직이고 있지. 그 외에도 자잘한 해적이 여럿일세. 후작부인은 기다리며 지켜보고 있어. 다만 내 눈에는 나를 눈여겨보고 있는 것 같네. 내가 꽤 부자라는 걸 알고 있고, 다른 자들은 가볍게 보고 있으니까.”
“더구나 그 부인의 응접실은, 이런 전시장 중에 내가 아는 가장 놀라운 곳일세. 우리 같은 점잖은 사내들도 거기서 만난다니까. 여자들로 말하자면, 그녀는 소매치기들의 바구니에서 가장 상등품만 골라낸 솜씨지. 어디서 찾아내는지 아무도 모르네. 보헤미안 패거리와도 다르고, 여타 어느 부류와도 다른 별개의 세계야. 그녀에게는 천재의 영감이라 할 만한 착상이 하나 있네. 자식 — 대개 딸 — 을 데리고 있는 모험녀들만을 골라내는 재주 말일세. 그러니 어리석은 자라면 자기가 존경할 만한 부인들 사이에 있다고 믿을 만도 하지!” 두 사람은 샹젤리제 대로에 이르렀다. 부드러운 산들바람이 나뭇잎을 살랑이며 지나가는 행인들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하늘 어디선가 거대한 부채가 물결치듯 보내주는 입김 같았다. 나무 아래로는 말없는 그림자들이 오갔고, 벤치에 앉은 이들은 어두운 얼룩을 이루었다. 그 그림자들은 아주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서로에게 소중하거나 부끄러운 비밀을 털어놓듯이.
“이 소굴에서 마주치게 될 가짜 작위들의 수집품이 어느 정도인지, 자네는 짐작도 못 할 걸세.” 세르비니가 말했다. “그건 그렇고, 나는 자네를 사발 백작이라는 이름으로 소개할 참이네. 그냥 사발만으로는 영 체면이 서지 않으니까.”
“오, 절대 사양하겠네!” 친구가 외쳤다. “하룻저녁이라도, 그런 자들 사이에서라도, 내가 작위를 빌릴 만한 사내라고 누구에게든 여겨지는 건 원치 않네. 아, 안 돼!”
세르비니가 웃음을 터뜨렸다.
“자네 참 답답한 사람이로군! 그 판에서는 나를 세르비니 공작이라 부르네. 어찌 된 영문인지, 어찌 그리 됐는지도 나는 모르네. 그러나 어찌 됐든 나는 세르비니 공작이고 앞으로도 그럴 테니, 불평도 항의도 하지 않네. 거기에 신경 쓰지 않지. 작위 하나 없이는 그 집에서 발붙일 자리조차 없을 테니까.”
그러나 사발은 수긍하지 않았다.
“그래, 자네는 가문 있는 몸이니 그리 가도 좋겠지. 하지만 나는 안 되네. 그 응접실에서 평민은 나 하나뿐일 걸세. 그래서 더 나쁘거나, 아니면 도리어 더 낫거나. 그게 내 차별성이자 내 우월의 표지가 되겠지.”
세르비니가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
“말하지 않았나, 그건 안 된다니까. 그랬다간 꼴이 거의 괴상해질 걸세. 황제들 모임에 넝마주이가 한 사람 끼어 앉은 격이 되겠지. 나한테 맡겨두게. 자네를 ‘오트미시시피 부왕’으로 소개할 걸세. 그래도 아무도 놀라지 않을 거야. 사내가 일단 위세를 걸치려 들면, 지나치다 싶을 만큼 걸쳐도 과한 법이 없으니까.”
“다시 한번 말하지만, 안 되네. 원하지 않아.”
“좋네, 자네 뜻대로 하게. 자네를 설득하려 드는 내가 바보일세. 누군가가 자네에게 작위를 붙여주지 않고서 그 집에 들어설 순 없을 게라 나는 장담하지. 어떤 가게 입구에서 부인들에게 제비꽃 한 다발씩 쥐여주듯, 거기서는 사람마다 작위를 쥐여주거든.”
두 사람은 오른쪽으로 꺾어 바리 거리로 들어섰고, 아름다운 현대풍 저택의 층계 한 층을 올라, 무릎반바지 차림 하인 네 사람의 손에 외투와 지팡이를 맡겼다. 연회장 특유의 따뜻한 향기, 꽃과 향수와 여인의 내음이 공기를 가득 채웠고, 인근 방들에서는 가라앉은 듯 끊이지 않는 웅성거림이 새어 나왔다. 방마다 사람들로 가득했다.
일종의 집사장(의전관)이 새로 온 손님들에게 다가왔다. 훤칠하고 꼿꼿한 몸에 허리가 두툼했고, 근엄한 얼굴은 흰 구레나룻에 에워싸여 있었다. 짧고도 거만한 목례를 곁들여 그가 물었다. “어느 분이라 아뢸까요?”
“사발 씨일세.” 세르비니가 대답했다.
그러자 문을 열면서 의전관이 큰 소리로 모여 있는 손님들을 향해 외쳤다.
“세르비니 공작 각하.”
“사발 남작 각하.”
첫 번째 응접실은 여인들로 가득 차 있었다. 맨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눈부신 드레스의 물결 위로 드러난 맨어깨의 장관이었다.
여주인은 친구 셋과 담소하고 있다가 몸을 돌려 위엄 있는 걸음으로 다가왔다. 풍채에는 우아함이 흘렀고 입술에는 미소가 어려 있었다. 이마는 좁고 아주 낮았으며, 반질반질한 검은 머리채가 이마를 뒤덮은 채 관자놀이까지 살짝 내려와 있었다.
키가 컸고 조금 풍만하다 싶게 살이 올랐으며, 다소 지나치게 여물어 있었다. 그러나 무겁고 뜨거우며 힘찬 아름다움으로 매우 어여뻤다. 꿈과 미소로 가득 차 그녀를 신비롭고도 매혹적으로 만드는 풍성한 머리채 아래에는 커다란 검은 눈이 자리했다. 코는 조금 가녀렸고, 입은 크고 한없이 유혹적이었다. 말하고 정복하도록 빚어진 입이었다.
그녀의 가장 큰 매력은 목소리에 있었다. 그 목소리는 입에서 샘솟는 물처럼 흘러나왔다. 어찌나 자연스럽고 가벼우며, 어찌나 잘 조율되어 있고 맑은지, 듣고만 있어도 육체적 쾌감이 느껴질 지경이었다. 유연한 말들이 지저귀는 실개천의 우아함으로 흘러나오는 소리는 귀에 기쁨이었고, 살짝 지나치게 붉은 예쁜 입술이 말들을 흘려보내며 벌어지는 모양은 눈에 기쁨이었다.
그녀는 한 손을 세르비니에게 내밀었고, 그는 그 손에 입을 맞추었다. 작은 금빛 사슬에 매달린 부채를 내려놓으며 그녀는 다른 손을 사발에게 건네며 말했다. “어서 오세요, 남작님. 공작의 벗이라면 누구든 이 집에서는 집주인이시지요.”
이어 그녀는 방금 소개받은 거한에게 빛나는 눈길을 못 박았다. 윗입술에는 아주 옅은 솜털이, 콧수염이라도 암시하는 듯한 기미가 있었고, 말을 할 때면 한결 진해 보였다. 그녀에게서는 향긋한 내음이 퍼져 나왔다. 사방으로 번져 사람을 취하게 하는, 아메리카 대륙이나 인도 대륙의 어느 향료 같은 냄새였다. 다른 손님들이 들어섰다. 후작이며 백작이며 왕자들이었다. 그녀는 어머니 같은 다정함으로 세르비니에게 말했다. “따님은 다른 응접실에 있답니다.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신사분들. 이 집은 두 분의 집이에요.”
그녀는 두 사람에게서 멀어져, 뒤늦게 도착한 이들에게로 향했다. 그러면서 사발에게, 여인들이 상대가 제 마음에 들었음을 알릴 때 짓는 그 미소 어린 스쳐 가는 눈길을 던졌다. 세르비니가 친구의 팔을 붙잡았다.
“자네를 안내하지.” 그가 말했다. “지금 우리가 있는 이 응접실엔 여인들이 있네. 육체의 신전이지. 신선하거나 그렇지 않거나. 새것과 다름없는 — 아니, 그보다 나은 — 흥정거리들이 팔리거나 빌려 나가네. 오른쪽은 도박, 돈의 신전일세. 거기야 자네가 잘 알 테고. 끝 쪽은 춤, 순결의 신전, 성소, 젊은 처녀들의 시장이야. 거기선 그녀들을 온갖 조명 아래 전시해 보이지. 합법적인 혼인까지도 용인된다네. 그게 우리 밤의 미래요, 희망이지. 이 도덕적 병증의 박물관에서 가장 기묘한 부분은, 곡예사의 아들로 태어난 작은 광대들의 사지가 그러하듯 영혼이 제자리에서 탈구되어 있는 저 젊은 처녀들일세. 가서 한번 보세.”
그는 좌우로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입에는 칭찬을 담고, 낯익은 노출 드레스 차림의 여인 하나하나를 감식가의 눈길로 훑으면서.
두 번째 응접실 끝에서 악사들이 왈츠를 연주했다. 두 친구는 문가에 멈춰 서서 안을 들여다보았다. 스무 쌍가량이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사내들은 근엄한 얼굴이었고, 여인들은 입술에 고정된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녀들 역시 어깨를 상당히 드러내고 있었다. 어머니들이 그러하듯이. 더러는 몸통 부분이 가느다란 리본 하나로 간신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어서, 이따금 세상에서 보통 드러내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이 드러나곤 했다.
그때 방 저편에서 키 큰 소녀 하나가 쏜살같이 달려 나왔다. 인파를 헤치고 춤추는 이들 사이를 스치듯 지나며, 왼손으로는 긴 드레스 자락을 걷어 쥐었다. 군중 속 여자들이 그러듯 잽싼 잔걸음으로 달려오며 그녀가 외쳤다. “어머! 뮈스카드, 잘 지내셨어요? 안녕하세요, 뮈스카드!”
그녀의 얼굴은 삶의 한창때를 피워내는 표정, 행복에 환히 밝혀진 표정이었다. 흰 살갗이 빛나는 듯했다. 붉은 머리에 어울리는, 황금빛 도는 흰 살갗이었다. 머리 위에 틀어 올린 풍성한 머릿단, 불타오르는 듯한 타래가, 아직 조금은 여윈 편인 유연한 목덜미에 살며시 내려와 있었다.
그녀는 마치 어머니가 말하도록 빚어졌듯 움직이도록 빚어진 사람 같았다. 그만큼 몸짓이 자연스럽고 기품 있고 단순했다. 보는 이는 그녀가 걷고 움직이고 고개를 숙이고 팔을 드는 모습에서 도덕적 기쁨과 육체적 쾌감을 동시에 느꼈다. “어머! 뮈스카드, 안녕하세요, 뮈스카드!” 그녀가 거듭 말했다.
세르비니는 사내의 손을 쥐듯 그녀의 손을 힘차게 맞잡고 말했다. “이베트 아가씨, 내 친구 사발 남작일세.”
“안녕하세요, 남작님. 언제나 그렇게 훤칠하신가요?”
세르비니는 이베트를 대할 때면 늘 쓰는 그 장난스러운 어조로 대답했다. 불신과 불안을 감추기 위함이었다.
“아닐세, 아가씨. 이 친구는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려고 최대치로 늘려놓은 거라네. 자네 어머니는 거한을 좋아하시거든.”
그러자 젊은 처녀가 우스꽝스러운 진지함으로 말했다. “잘 알았어요. 하지만 저를 보러 오실 때는 조금 줄여주세요. 부탁드려요. 저는 중간 키가 더 좋답니다. 뮈스카드는 딱 제가 좋아하는 비례를 갖췄거든요.”
그러고는 새로 온 손님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어 물었다. “춤추시나요, 뮈스카드? 자, 왈츠 한 곡 춰요.” 세르비니는 대답 대신 재빠른 동작으로, 열정에 차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두 사람은 회오리바람처럼 사나운 기세로 사라져 갔다.
두 사람은 누구보다 빠르게 춤을 추었다. 돌고 또 돌며 미친 듯 회전했다. 하나로 보일 만큼 밀착한 채, 상체는 꼿꼿했고 다리는 거의 움직이지 않는 듯했다. 마치 발밑에 숨은 보이지 않는 장치가 둘을 빙글빙글 돌려주는 것 같았다. 지치는 기색이라곤 없었다. 다른 춤꾼들은 이따금씩 멈춰 섰다. 둘만은 계속 춤추었다. 자기들이 어디 있는지,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는 듯했다. 무도회를 멀리 떠나 황홀경 속으로 들어간 사람들처럼. 악사들은 그 광적인 한 쌍에게 시선을 못 박은 채 연주를 이어갔고, 모든 손님이 두 사람을 바라보았으며, 마침내 두 사람이 춤을 멈췄을 때 일제히 박수를 보냈다.
그녀의 얼굴은 살짝 상기되어 있었고, 눈빛은 기이했다. 열띠면서도 수줍은, 조금 전보다는 덜 대담한, 어쩐지 흔들리는 눈빛. 푸른 눈이었는데, 동공이 어찌나 검은지 도무지 자연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세르비니는 현기증이 난 듯, 정신을 차리려 문짝에 기대섰다.
“가엾은 뮈스카드, 당신은 머리가 약하군요. 제가 훨씬 단단하답니다.” 이베트가 세르비니에게 말했다.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삼킬 듯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짐승 같은 본능이 그 눈빛과 입가의 호선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그의 곁에 섰고, 그가 자신을 바라보는 동안 가슴이 가쁘게 오르내렸다.
이윽고 그녀가 나직이 말했다. “정말이지, 어떤 때는 먹이를 덮치려 드는 호랑이 같으세요. 자, 팔을 내주세요. 당신 친구분을 찾으러 가요.”
그는 말없이 팔을 내주었고, 두 사람은 기다란 응접실을 나란히 가로질렀다.
사발은 혼자가 아니었다. 오바르디 후작부인이 다시 그의 곁에 와 있었다. 부인은 일상사며 유행에 관한 이야기를 건네고 있었는데, 그 어조에는 사발을 취하게 하는 유혹의 빛깔이 서려 있었다. 마음의 눈으로 부인을 바라보는 동안 그에게는, 부인의 입술이 실제 발음하는 말과는 전혀 다른 말들을 속으로 읊고 있는 듯 보였다. 세르비니를 본 순간 부인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고, 그를 향해 몸을 돌리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공작, 제가 부지발에 별장 하나를 두 달간 빌려두었답니다. 그곳으로 꼭 들러주실 것이라 믿고 있어요, 친구분도 함께요. 들어보세요. 다음 주 월요일에 들어가기로 했어요. 그다음 토요일 저녁, 두 분 모두 만찬에 오시길 기다리겠어요. 일요일 내내 머물다 가셔야 해요.”
평온하고 고요한 얼굴로 이베트가 미소 지으며, 그가 망설일 틈을 주지 않는 단호함으로 말했다.
“물론 뮈스카드는 토요일 저녁 만찬에 올 거예요. 우리가 부르기만 하면 돼요. 그분이랑 저는 시골에서 온갖 당돌한 짓을 저지를 참이거든요.”
그녀의 미소에서는 어떤 약속의 움틈이 느껴졌고, 그 목소리에서 그는 초대라 여겨지는 무엇을 들었다.
이어 후작부인은 크고 검은 눈길을 사발에게 돌렸다. “남작님도 당연히 오시겠지요?”
의심을 허용치 않는 미소와 함께 그는 부인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말했다.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일 따름입니다, 부인.”
그러자 이베트가 순진한지 음흉한지 알 수 없는 짓궂음으로 속삭이듯 말했다. “우리, 거기서 온 세상을 뒤집어놓기로 해요, 뮈스카드. 내 구애자 연대 전부를 완전히 미치게 만들자고요.” 그러고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는 한 무리의 사내들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세르비니가 그녀에게 말했다. “아가씨가 원하시는 만큼의 당돌한 짓이라면, 얼마든지.”
이베트에게 말을 걸 때, 세르비니는 결코 ‘마드무아젤’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 오랜 친분 때문이었다.
그때 사발이 물었다. “아가씨는 어째서 제 친구 세르비니를 늘 ‘뮈스카드’라고 부르는 겁니까?”
이베트는 아주 솔직한 표정을 짓고 말했다.
“제가 말씀드릴게요. 그분이 늘 제 손에서 빠져나가시기 때문이에요. 이제 막 손에 쥐었다 싶으면, 어느새 빠져나가고 없답니다.”
후작부인은 무언가에 정신이 팔린 채 사발에게 눈을 둔 그대로,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너희들, 참 재미있는 아이들이구나.”
그러나 이베트는 발끈했다. “저는 재미있자고 그런 게 아니에요, 엄마. 저는 그저 솔직한 거예요. 뮈스카드가 제 마음에 드는데, 늘 저를 두고 가버리시니, 그게 속상한 거죠.”
세르비니는 깊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앞으로는 결코 아가씨 곁을 떠나지 않겠소. 낮에도, 밤에도.” 그녀는 질겁하는 시늉을 지었다.
“어머나, 안 돼요, 무슨 말씀이세요? 낮은 괜찮지만, 밤에는 곤란하시겠는걸요.”
세르비니가 뻔뻔한 태도로 물었다. “어째서 말이오?”
이베트는 차분하고도 대담하게 대답했다. “잠옷 차림으로(en déshabillé) 뵈면 그리 보기 좋지 않으실 테니까요.”
후작부인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는 기색으로 말했다. “대화 주제가 참으로 별나구나. 그런 일을 속속들이 안다는 양 들리는구나.”
세르비니가 농담처럼 덧붙였다. “저도 같은 의견입니다, 후작부인.”
이베트는 세르비니에게 눈을 돌렸다. 거만하면서도 상처 입은 어조로 말했다. “당신, 점점 저속해지시네요. 요즘 들어 몇 번이나 그러셨듯이요.” 그러고는 재빨리 몸을 돌려, 곁에 서 있던 한 사람에게 구원을 청했다.
“기사님, 이리 오셔서 저를 모욕에서 지켜주세요.”
호리호리한 체격에 가무잡잡한 얼굴, 몸놀림이 가벼운 사내 하나가 앞으로 나섰다.
“범인이 누구입니까?” 그가 굳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이베트는 턱짓으로 세르비니를 가리켰다.
“저기 저분이에요. 그래도 기사님보다 저분이 더 좋아요. 그쪽이 덜 지루하시거든요.”
발레알리 기사가 고개를 숙였다.
“저야 할 수 있는 바를 다할 뿐이지요, 아가씨. 재주는 모자랄지언정 정성만은 남들 못지않을 것입니다.”
한 신사가 앞으로 나섰다. 훤칠하고 뚱뚱했으며 잿빛 구레나룻을 기른 사내였다. 그가 크게 울리는 목청으로 말했다. “이베트 아가씨, 저는 당신의 가장 충실한 종이올시다.”
이베트가 외쳤다. “어머, 벨비뉴 씨!” 그러고는 사발 쪽으로 몸을 돌려 그를 소개했다.
“제 최근 숭배자예요. 덩치 크고, 통통하고, 부자이고, 멍청하지요. 제가 좋아하는 유형이랍니다. 영락없는 군악대 고수 차림인데, 정식 군대가 아니라 식당 식탁 쪽의 고수지요. 어머, 그런데 보세요, 남작님이 그분보다 더 크시네요. 어떤 별명을 지어드리지요? 옳지! 떠올랐어요. 당신을 ‘로도스의 거상 주니어’ 님이라 부를게요. 그 거상이 틀림없이 당신 아버님이실 테니까요. 아무튼 두 분께서는 저 위, 우리 머리 위 높다란 곳에서 서로에게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나누실 수 있겠네요. 그럼, 안녕히 계세요.”
그러고는 재빨리 두 사람 곁을 떠나, 악단에게 다가가 카드리유를 연주해달라고 청했다.
오바르디 부인은 무언가에 사로잡힌 듯한 기색이었다. 그녀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세르비니에게 말했다.
“공작께서는 늘 그 애를 놀려대시는군요. 그렇게 계속하시면 그 애의 성품이 뒤틀려, 좋지 않은 기질이 드러나고 말 거예요.”
세르비니가 대답했다. “아니, 부인. 따님의 교육은 이미 끝내놓지 않으셨습니까?”
그녀는 알아듣지 못한 척하며 그대로 다정하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러다 근엄한 얼굴에 십자 훈장과 별 모양 훈장을 별자리처럼 주렁주렁 달고 가까이 선 한 사내를 발견하고, 그에게로 달려갔다.
“어머, 공작님, 공작님, 이 무슨 반가운 일이에요!”
세르비니는 사발의 팔을 잡고 그 자리에서 멀어지며 말했다.
“저자가 최근의 진지한 구혼자일세. 크라발로프 공작이지. 부인이 굉장하지 않나?”
“내 눈에는 두 분 모두 굉장하네. 어머니 쪽만 해도 내게는 차고 넘치겠는걸.” 사발이 대답했다.
세르비니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마음대로 하게나, 친구.”
카드리유를 추려고 줄지어 들어서는 춤꾼들이 두 사람을 팔꿈치로 밀어내며 지나갔다.
“자, 이제는 사기꾼들을 구경하러 가세.” 세르비니가 말했다. 두 사람은 도박실로 들어섰다.
탁자마다 사내들이 한 무리씩 둘러서서 판을 지켜보고 있었다. 말이라곤 거의 오가지 않았다. 이따금 초록 천 위로 던져지거나 황급히 거두어지는 금화의 쨍그랑거리는 소리가 웅얼거림에 섞여들었다. 마치 돈이 사람의 목소리 틈에 끼어 한마디 거드는 듯했다.
사내들은 모두 갖가지 훈장과 이상야릇한 리본으로 치장하고 있었다. 한결같이 엄숙한 표정이었으되, 얼굴은 저마다 달랐다. 특히 두드러지는 것은 수염이었다.
편자 모양 콧수염을 기른 뻣뻣한 미국인, 가슴 위로 부채꼴로 펼쳐진 수염을 거만하게 늘어뜨린 영국인, 눈 언저리까지 검은 양털 같은 수염이 올라온 에스파냐인, 이탈리아가 빅토르 에마누엘에게서 본뜬 그 거창한 콧수염을 단 로마인, 구레나룻은 기르되 턱은 면도한 오스트리아인, 입술 위에 꼬아 올린 두 자루 창이 돋아난 듯한 러시아 장군, 거기에 앙증맞은 콧수염을 기른 프랑스인까지, 세상의 온갖 이발사들의 취향이 한자리에 펼쳐져 있었다.
“자네는 판에 끼지 않겠나?” 세르비니가 물었다.
“아니, 자네는?”
“오늘은 아닐세. 자네가 떠날 채비가 됐다면, 좀 더 조용한 날 다시 오세. 오늘은 사람이 너무 많아 무엇 하나 제대로 할 수가 없네.”
“그럼, 나가세.”
두 사람은 문가에 드리워진 휘장을 헤치고 현관으로 나섰다. 거리에 들어서자마자 세르비니가 물었다. “자, 어떻게 보았나?”
“흥미롭기는 했네. 다만 내게는 남자 쪽보다 여자 쪽이 훨씬 당기는군.”
“역시! 우리 같은 사람에게는 그 여인들이 종족 중에서도 최고의 품이지. 그녀들 사이에 있으면 이발사 가게의 향수 냄새처럼 사랑의 냄새를 맡게 되지 않던가?”
“사실, 그런 집이야말로 다니기 좋은 곳이지. 게다가 얼마나 뛰어난 솜씨인지, 이 사람아! 예술가들이라니까! 자네, 동네 빵집 케이크 먹어본 적 있나? 보기는 그럴듯해도 막상 먹어보면 별것 아니지. 빵 굽는 사내는 빵 굽는 법밖에 모르거든. 그런데 말일세, 여느 사교계 여인의 사랑이라는 건 꼭 그 빵집 케이크 따위를 떠올리게 하네. 반면에 오바르디 후작부인의 집 같은 데서 맛보는 사랑이야말로 진짜 단과자지. 아! 그 매혹적인 제과사들은 케이크 굽는 법을 정말 알고 있다네. 다만 말이야, 다른 데서 두 수(sou)면 되는 걸 그녀들의 가게에서는 다섯 수를 치러야 하지.”
“지금 그 집의 주인은 누구인가?” 사발이 물었다.
세르비니는 모르겠다는 뜻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나도 모르겠네. 마지막으로 알려진 이는 영국의 어느 귀족이었는데, 석 달 전에 떠났지. 지금은 잡다한 무리에 기대어 살거나, 어쩌면 도박판과 노름꾼들에 기대어 살겠지. 변덕이 많은 여자니까. 그건 그렇고, 토요일에 부지발에서 함께 저녁을 먹기로 한 것, 맞지? 시골에선 사람이 한결 자유로워지는 법이지. 나는 이베트의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 끝내 알아내고야 말겠네!”
“나로서야 더할 나위 없이 좋지.” 사발이 대답했다. “그날 딱히 할 일도 없네.”
샹젤리제를 지나 계단 아래를 지나치다가, 두 사람은 벤치 위에서 사랑을 나누던 한 쌍을 놀라게 했다. 세르비니가 중얼거렸다. “얼마나 어리석은 짓이면서 또 얼마나 엄중한 일인가! 사랑이란 얼마나 흔해빠졌고 얼마나 즐거운가. 늘 같으면서도 늘 다른 것이고! 사랑하는 이에게 단돈 스무 수를 쥐여주는 거지라 해도, 내가 저 오바르디 부인 같은 여자에게 만 프랑을 치르고 얻는 것과 똑같은 보답을 얻을 걸세. 어쩌면 저 부인이라는 자도 이 무명씨들만큼 젊지도, 미련하지도 않으련만. 참 우스운 일이야!”
그는 잠시 말이 없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도, 이베트의 첫 연인이 된다는 건 꽤 괜찮은 일이지. 오! 그 자리를 위해서라면, 나는 얼마든지….”
그는 무엇을 내놓겠다는지 끝내 말하지 않았고, 두 사람은 루아얄 거리 모퉁이에 이르러 서로에게 밤 인사를 건네었다.
제2장.
부지발과 사랑
식탁은 강이 내려다보이는 베란다에 차려져 있었다. 오바르디 후작부인이 빌린 프랭탕 별장은 언덕 중턱, 센강이 정원 담벼락 앞에서 몸을 틀어 마를리 쪽으로 흘러가는 바로 그 모퉁이에 자리 잡았다.
저택 맞은편에는 크루아시섬이 우뚝한 나무들로 수평선을 이루고, 울창한 녹음이 한 덩어리로 뭉쳐 있었다. 이파리 그늘에 가려진 수상 카페 라 그르누예르에 이르기까지 큰 강의 긴 자락이 한눈에 들어왔다.
저녁이 내렸다. 강가에서만 맛볼 수 있는 고요한 저녁, 빛깔은 짙으나 부드럽고, 쾌감이 저절로 피어오르는 평온한 저녁이었다. 나뭇가지를 흔드는 숨결도, 매끈하고 맑은 센강 수면을 스치는 떨림도 없었다. 덥지도 않고, 순하고 포근하여 살기에 꼭 알맞았다. 강가의 서늘한 기운이 고맙게 올라와 맑은 하늘로 번져 갔다.
해는 다른 땅을 비추러 나무 너머로 져 갔다. 이미 잠들어 가는 대지의 평온을 그대로 들이마시며, 무한한 공간의 숨결 속에서 영원을 삼키는 듯했다.
응접실을 나와 식탁 앞에 앉을 때, 모두의 마음이 들떴다. 부드러운 기쁨이 가슴마다 스며들었고, 이 큰 강과 황혼을 배경 삼아 맑고 향기로운 공기 속에서 시골 한복판에 저녁을 드는 일이 얼마나 즐거울지 저마다 예감하고 있었다.
후작부인은 사발의 팔을, 이베트는 세르비니의 팔을 잡았다. 넷뿐이었다. 두 여인은 파리에서 볼 때와는 딴사람 같았고, 이베트는 특히 그랬다. 말수가 줄고, 어딘지 느른하면서도 무거운 기색을 띠었다.
사발은 그녀를 거의 알아보지 못할 지경이라 물었다. “아가씨, 무슨 일이십니까? 지난주에 뵈었을 때와는 영 다르시네요. 제법 진중한 분이 되셨군요.”
“시골 탓이에요.” 그녀가 답했다. “저도 제가 아니에요. 기분이 이상해요. 게다가 저는 이틀이 같은 법이 없어요. 오늘은 미친 여자 같다가도 내일은 만가라도 부르듯 무거워지죠. 날씨 따라 변해요. 왜 그런지는 저도 몰라요. 그때그때 무슨 짓이든 저지를 수 있는 사람이랄까요. 어떤 날은 사람을 죽이고 싶어져요. 짐승은 아니에요. 짐승은 절대 못 죽여요. 사람은 그래도 죽일 수 있을 것 같아요. 또 어떤 날은 아주 사소한 일에도 눈물이 솟고요. 머릿속을 온갖 생각이 다 지나가요. 아침에 어떻게 일어나느냐에도 꽤 달려 있어요. 매일 아침 눈을 뜨면 그날 저녁에 제가 어떤 사람일지 알아요. 어쩌면 꿈이 그걸 정해 주는 건지도 모르고, 방금 읽은 책에 달려 있는 건지도 몰라요.”
그녀는 흰 플란넬 정장 차림이었고, 부드럽고 흐르는 천의 감촉이 온몸을 고르게 감쌌다. 주름을 넉넉히 잡은 상의는 자유로이 펴진, 단단하고 이미 성숙한 가슴을 조이지도 드러내지도 않으면서 은근히 짐작하게 했다. 풍성한 레이스 거품 위로 솟은 멋진 목은 가벼운 움직임마다 부드럽게 굽었고, 드레스보다도 희어, 그 육신의 기둥 위에 묵직하게 얹힌 금빛 머리칼을 떠받쳤다.
세르비니는 오랫동안 그녀를 바라보았다. “오늘 저녁엔 참으로 매혹적이십니다, 아가씨.” 그가 말했다. “늘 이 모습으로만 뵐 수 있다면 좋겠군요.”
“고백 같은 건 하지 마세요, 뮈스카드. 진짜로 받아들여 버리면 값비싸게 치르셔야 할지도 몰라요.”
후작부인은 행복해 보였다. 퍽 행복해 보였다. 온통 검은 옷, 그 풍만한 곡선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수수한 드레스를 호사스레 차려입고, 상의에는 붉은빛 한 점, 허리에서 사슬처럼 흘러내려 엉덩이 쪽에 여며진 붉은 카네이션 허리띠, 검은 머리에는 붉은 장미 한 송이. 온몸에서 뜨거운 무엇이 배어났다. 그 단순한 옷차림에서, 피를 흘리는 듯한 꽃에서, 그 눈길에서, 느릿한 말투에서, 유별난 몸짓에서.
사발도 진지하게, 무언가에 잠긴 낯이었다. 이따금 앙리 3세풍으로 다듬은 뾰족한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세상에서 가장 심오한 화제를 궁리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몇 분 동안 아무도 말이 없었다. 이윽고 송어 요리가 나오자 세르비니가 말을 꺼냈다.
“침묵도 이따금은 좋은 겁니다. 사람은 말을 주고받을 때보다 말없이 있을 때 오히려 더 가까워지곤 하지요. 안 그렇습니까, 후작부인?”
그녀는 그를 향해 살짝 몸을 돌리며 답했다.
“참으로 그렇습니다. 즐거운 기억을 함께 떠올리는 일이 얼마나 감미로운지요.”
그녀는 뜨거운 눈길을 사발 쪽으로 들어 올렸고, 둘은 몇 초간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식탁 밑에서 잘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움직임이 스쳤다.
세르비니가 다시 말을 이었다. “이베트 아가씨, 그토록 얌전히 구시면, 누군가에게 반하셨구나 하고 믿어 버리고 말겠습니다. 한데 대체 누구시지요? 자, 함께 따져 봅시다. 흔해 빠진 한숨꾼 무리는 젖혀 두고, 주요 인물만 꼽아 보지요. 크라발로프 공작이 아닙니까?”
그 이름에 이베트의 눈이 반짝였다. “가엾은 뮈스카드, 그런 생각을 다 하시다니. 공작은 밀랍 인형 박물관에 서 있는 러시아 사람 같잖아요. 그것도 이발 대회에서 메달을 받은 러시아 사람이요.”
“좋습니다. 공작은 빼지요. 그럼 피에르 드 벨비뉴 자작에게는 눈이 가지 않으시던가요?”
이번엔 그녀가 웃음을 터뜨리며 되물었다. “‘레진(Raisine)’이 제 목에 매달리는 꼴을 상상이나 하실 수 있어요?” 그녀는 그날그날 기분에 따라 그에게 새 별명을 붙였다. 레진, 말부아지,[각주: 졸인 포도와 배. 말부아지는 싸구려 감미 포도주 이름.] 아르장퇴유 따위. 원래 누구에게든 별명을 하나씩 붙여 주는 그녀였다. 그러고는 그의 얼굴에 대고 속삭이곤 했다. “내 귀여운 피에르.” 혹은 “내 성스러운 페드로, 사랑스러운 피에로, 자, 복슬복슬한 강아지 머리를 이 귀여운 꼬마 아가씨한테 좀 대 봐. 입을 맞춰 주게.”
“둘째도 지워 드리지요. 그럼 발레알리 기사가 남는데, 이쪽은 후작부인께서 제법 마음에 두신 듯하던데요.” 세르비니가 말을 이었다.
이베트는 예의 발랄함을 되찾았다. “‘눈물방울’ 말이에요? 어머, 그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처럼 울어 대는걸요. 일류 장례식이란 장례식마다 다 쫓아다닌답니다. 그 사람이 저를 쳐다볼 때마다 저는 제가 죽은 사람이 된 기분이에요.”
“그럼 셋째도 정리됐군요. 벼락은 결국 여기 계신 사발 남작께 떨어지겠습니다.”
“로도스의 거상 주니어 님 말씀이세요? 아뇨. 그분은 너무 거대하세요. 그런 분을 사랑한다면 에투알(개선문 광장)과 사랑에 빠지는 기분이 들 것 같거든요.”
“그렇다면 아가씨, 아가씨께서 사랑하시는 이가 저임이 분명하군요. 아가씨의 숭배자들 가운데 아직 거론되지 않은 사람은 저뿐이니까요. 제 이야기는 겸손하고 신중한 나머지 끝까지 아껴 두었을 따름이지요. 이제 감사의 인사만 올리면 되겠군요.”
그녀는 즐거운 우아함으로 답했다. “제가 뮈스카드를 사랑한다고요? 아! 아니에요. 뮈스카드를 좋아는 해요. 하지만 사랑하는 건 아니랍니다. 잠깐만요, 저는, 뮈스카드를 실망시키고 싶지는 않아요. 아직은 사랑하지 않아요. 하지만 가망이야 있을지도 모르죠. 꾸준히 매달리세요, 뮈스카드. 헌신적으로, 열렬히, 순종하며, 자잘한 배려와 공을 듬뿍 들여서요. 제 아무리 작은 변덕에도 고분고분하고, 저를 기쁘게 해 줄 일이라면 무엇이든 할 각오로 말이에요. 그럼 나중에, 두고 봐요.”
“아가씨, 저로서는 그 모든 것을 전보다는 후에 바치고 싶습니다만. 아가씨께서 괘념치 않으신다면요.”
그녀는 천연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어느 후에요, 뮈스카드?”
“물론 저를 사랑한다고 보여 주신 후에요!”
“그럼 제가 사랑하는 양 굴어 보세요. 그리 믿고 싶으시다면 그대로 믿으셔도 좋아요.”
“하지만 아가씨께서야…”
“쉿, 뮈스카드. 그 얘기는 이제 그만하세요.”
해는 섬 뒤로 가라앉았으나, 온 하늘은 여전히 불길처럼 타올랐고, 고요한 강물은 피처럼 붉게 물들었다. 수평선의 반사광이 집과 물건과 사람을 두루 적셨다. 후작부인의 머리에 꽂힌 진홍 장미는, 구름에서 떨어진 자줏빛 한 방울이 정수리에 내려앉은 듯 보였다.
이베트가 제자리에서 지켜보는 동안, 후작부인이 무심결인 양 맨손을 사발의 손 위에 얹었다. 그러나 어린 딸이 몸을 움찔하는 기색을 보이자, 후작부인은 재빠른 몸짓으로 손을 거두며 상의 주름께를 매만지는 척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세르비니가 말했다.
“아가씨, 괜찮으시다면, 저녁을 마친 뒤 섬을 한 바퀴 거닐어 보시지요.”
“어머, 좋아요! 재미있겠어요. 우리 둘만 가요, 네, 뮈스카드?”
“그럼요, 단둘이 가지요, 아가씨!”
지평선에 깃든 거대한 침묵, 졸음에 겨운 저녁의 고요가 마음과 몸과 목소리를 사로잡았다. 말을 잇기조차 어려워지는, 평화롭고도 선택받은 시간이 있는 법이다.
하인들은 소리 없이 시중을 들었다. 하늘 끝의 큰 불길이 서서히 꺼져 갔고, 부드러운 밤이 대지 위로 그늘을 펼쳤다.
“이곳엔 오래 머무실 생각입니까?” 사발이 물었다.
후작부인은 한 마디 한 마디를 음미하며 답했다. “네, 행복한 동안은요.”
어둠이 짙어져 눈이 가지 않자 등잔을 내왔다. 큰 어둠에 덮인 공간 한가운데, 등잔은 식탁 위로 창백하고 기묘한 빛을 드리웠다. 머지않아 각다귀 떼가 식탁보 위로 우수수 떨어졌다. 유리 등피를 넘다가 날개와 다리를 그을리고 떨어진 작은 각다귀들이, 잿빛의 깡충대는 먼지처럼 식탁 위 리넨과 접시와 잔을 덮어 갔다.
그것들을 포도주와 함께 삼키고, 소스에 섞어 먹었다. 빵 위로 기어 다니는 놈들을 바라보았고, 얼굴과 손을 끊임없이 간질이는 그 작은 무리를 견뎌야 했다. 틈틈이 술을 쏟아 버리고, 접시를 덮고, 음식 한 입을 옮길 때마다 한없이 조심스레 감싸 들어야 했다.
이베트는 그 광경이 재미있었다. 세르비니는 그녀가 입으로 가져가는 음식을 가려 주고, 잔을 지키고, 손수건을 지붕처럼 머리 위로 펼쳐 감싸 주느라 부지런히 손을 움직였다. 그러나 후작부인은 진저리를 치며 점점 신경질을 냈고, 만찬은 서둘러 막을 내렸다. 세르비니의 제안을 잊지 않은 이베트가 그에게 말했다.
“자, 이제 섬으로 가요.”
어머니가 나른한 어조로 딸을 타일렀다. “늦지는 말거라. 부디. 나루까지는 우리가 데려다 주마.”
그리하여 그들은 둘씩 짝을 지어 길을 나섰다. 어린 딸과 그녀의 숭배자가 앞서 강변 길로 걸었고, 뒤에서는 후작부인과 사발이 빠른 목소리로 나지막이 주고받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방은 먹물을 풀어 놓은 듯 새카맸다. 그러나 하늘은 불꽃 같은 알갱이로 가득해, 검은 강물에도 별이 점점이 뿌려진 듯 물결마다 반짝임이 박혔다.
강기슭에서는 개구리들이 단조롭게 울어 대고, 수많은 나이팅게일이 고요한 공기 속으로 낮고 달콤한 노래를 흘려보냈다.
이베트가 문득 말했다. “어머, 뒤따라오지 않으시네요. 두 분은 어디 계시지?” 그러고는 불렀다. “엄마!” 대답이 없었다. 딸이 말을 이었다. “어쨌든 멀리는 못 가셨을 거예요. 조금 전까지도 소리가 들렸거든요.”
세르비니가 속삭였다. “돌아가셨나 봅니다. 어머님께서 한기를 느끼셨을지도 모르지요.” 그러면서 그녀를 끌고 앞으로 나아갔다.
앞쪽에서 불빛 하나가 반짝였다. 식당 주인이자 어부인 마르티네의 선술집이었다. 부르는 소리에 남자가 집 밖으로 나왔고, 그들은 강가 수초 사이에 매인 커다란 나룻배에 올라탔다.
나룻배 사공이 노를 잡았고, 둔중한 배가 앞으로 나아가며 물 위에 잠들어 있던 별을 휘저어 놓았다. 별들은 한바탕 미친 춤을 추다가 배가 지나간 뒤에야 차츰 가라앉았다. 그들은 건너편 기슭에 닿아 큰 나무들 아래로 내렸다. 높고 얽힌 가지 아래에는 축축한 흙의 서늘한 기운이 공기에 배었고, 나뭇잎만큼이나 많은 나이팅게일이 어딘가에서 지저귀었다. 멀리서 피아노 한 대가 유행하는 왈츠를 치기 시작했다.
세르비니는 이베트의 팔을 잡고, 슬그머니 그 손을 허리께로 돌려 가볍게 끌어안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십니까?” 그가 물었다.
“저요? 아무 생각도 안 해요. 그저 무척 행복한걸요!”
“그럼 저를 사랑하지는 않으시는군요?”
“어머, 사랑하죠, 뮈스카드. 아주 많이요. 그러니 좀 가만두세요. 여긴 너무 아름다워서 그런 헛소리로 흘려보내기엔 아까우니까요.”
그는 그녀를 제 쪽으로 끌어당겼고, 그녀는 자잘한 몸짓으로 빠져나가려 했다. 부드러운 플란넬 드레스 너머로 그는 살갗의 온기를 느꼈다. 그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이베트!”
“네, 왜요?”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진심은 아니시잖아요, 뮈스카드.”
“진심입니다. 오래전부터 사랑해 왔어요.”
그녀는 계속 몸을 빼려 했고, 두 몸 사이에 짓눌린 팔을 풀어내려 했다. 그렇게 묶인 두 사람은 걷기가 힘겨워,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비틀 지그재그로 나아갔다.
그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젊은 처녀에게는 여느 여인에게 하듯 말할 수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쩔 줄 몰라 했고, 어찌할지 고심했으며, 이 처녀가 승낙한 것인지 아니면 뜻을 못 알아듣는 것인지 자꾸만 따져 보았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정확하고 부드러우면서도 결정적인 말을 찾으려 애썼다. 그는 연거푸 말했다.
“이베트! 뭐라고 해 주세요! 이베트!”
이윽고 그는 모든 걸 걸고 그녀의 뺨에 입을 맞췄다. 그녀는 살짝 옆으로 몸을 비키며, 언짢다는 투로 말했다.
“어머! 말도 안 돼요. 이젠 좀 가만두실 건가요?”
목소리의 어조는 그녀의 생각도 바람도 내비치지 않았다. 그다지 화난 기색이 아님을 간파한 그는, 금빛 머리칼 바로 아래, 늘 탐내 오던 그 매혹적인 자리, 목덜미가 시작되는 지점에 입술을 갖다 댔다.
그녀는 있는 힘을 다해 벗어나려 했다. 그러나 그는 단단히 붙든 채, 다른 손을 어깨에 얹어 고개를 제 쪽으로 돌린 뒤, 입술 한복판에 정면으로, 다정하고도 격렬한 입맞춤을 퍼부었다.
그녀는 재빠른 몸놀림으로 그의 팔에서 빠져나가, 풀려나자마자 치맛자락을 크게 휘날리며, 날아가는 새의 푸드덕 소리처럼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는 한동안 선 채로 꼼짝하지 못했다. 유연한 몸짓과 갑작스러운 증발에 놀란 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자, 낮은 목소리로 불렀다. “이베트!”
대답이 없었다. 그는 걸음을 옮기며 그림자 사이를 살피고, 관목 어딘가에 있을 그녀 드레스의 흰 점을 찾아 헤맸다. 사방이 어두웠다. 그는 더 크게 외쳤다.
“이베트 아가씨! 이베트 아가씨!”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멈춰 서서 귀를 기울였다. 섬 전체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머리 위로는 나뭇잎 서걱이는 소리조차 거의 없었다. 강기슭에서 개구리들만이 깊은 울음을 이어 갈 뿐이었다. 그는 덤불에서 덤불로 옮겨 다녔고, 기슭이 가파르고 우거진 곳까지 갔다가 송장의 팔처럼 평평하고 벌거벗은 기슭으로 돌아오곤 했다. 부지발을 마주 보는 데까지 걸어갔고, 라 그르누예르의 수상 카페에 이르기까지 나무 덤불을 더듬으며 계속 외쳤다.
“이베트 아가씨, 어디 계십니까? 대답 좀 해 주십시오. 이건 너무 어이가 없군요! 자, 대답 좀 해 주세요! 사람을 이리 찾아 헤매게 하지 마십시오.”
저 멀리서 시계탑이 종을 치기 시작했다. 그는 수를 세었다. 열두 번. 섬을 뒤진 지 두 시간째였다. 문득 그녀가 집으로 돌아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이번에는 다리를 건너 초조한 걸음으로 돌아갔다. 현관에서는 하인 하나가 의자에 기대어 졸며 그를 기다렸다.
세르비니는 그를 깨우고 물었다. “아가씨가 들어오신 지 오래됐나? 나는 들를 데가 있어 대문 앞에서 헤어진 참이었네.”
하인이 답했다. “예, 나리. 아가씨께선 열 시가 되기 전에 들어오셨습니다.”
그는 자기 방으로 올라가 잠자리에 누웠다. 그러나 눈을 붙일 수 없었다. 그 훔친 입맞춤이 영혼까지 뒤흔들어 놓은 탓이다. 그녀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무엇을 알고 있는지 곱씹고 또 곱씹었다. 얼마나 어여쁘고 마음을 끌던가!
지금껏 보내 온 삶에, 줄줄이 스쳐 간 연인들에, 사랑의 왕국에서 벌인 온갖 탐험에 다소 지쳐 있던 그의 욕망이, 이 기묘한 아이 앞에서 새삼 눈을 떴다. 싱싱하고, 사람을 들쑤시며, 도무지 해명이 안 되는 아이 앞에서. 한 시를 치는 소리가 들렸고, 이어 두 시를 알렸다. 잠은 끝내 오지 않았다. 몸이 달아오르고 심장이 뛰며 관자놀이가 욱신거리는 것을 느끼자, 그는 몸을 일으켜 창을 열었다. 신선한 공기 한 모금이 흘러들어 그는 깊이 들이마셨다. 두꺼운 어둠은 말이 없었다. 검고, 움직임이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정원 그늘 저편에서 반짝이는 한 점이 눈에 띄었다. 자그마한 붉은 숯불 한 알 같았다.
“어라, 시가 끝이군!” 그는 혼잣말을 했다. “사발이겠지.” 나직이 불렀다. “레옹!”
“자넨가, 장?”
“맞네. 기다리게. 내려감세.” 그는 옷을 걸치고 나가, 쇠 의자에 다리를 벌려 걸터앉아 담배를 피우는 친구에게 다가가 물었다. “이 시간에 여긴 웬일인가?”
“쉬고 있네.” 사발이 답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세르비니가 그의 손을 꽉 쥐었다. “축하하네, 이 친구야. 나로 말하자면, 꼴이 말이 아닐세.”
“그 얘기는…”
“이베트와 그 어미는 딴판이란 소릴세.”
“무슨 일이 있었나? 말해 보게.”
세르비니는 자신이 시도한 일과 그 실패를 털어놓은 뒤, 다시 말을 이었다.
“그 꼬마가 영 마음에 걸리는군. 잠이 안 와, 상상이 가나? 처녀라는 건 참 이상한 물건일세. 겉으로는 더없이 단순해 보이는데, 정작 무엇 하나 알아낼 도리가 없으니. 살아 본 여자, 사랑해 본 여자, 인생을 아는 여자라면 금세 읽어 낼 수 있지. 그런데 한 번도 열린 적 없는 처녀 앞에서는 아무것도 짐작할 수 없어. 속으로는 이 아이가 날 가지고 노는 게 아닌가 싶어지기 시작한단 말일세.”
사발은 의자를 뒤로 기울이며 아주 느릿하게 말했다. “조심하게. 그 아이가 자넬 결혼으로 몰고 갈지도 모르네. 저 유명한 선례들을 떠올려 보게. 그나마 제대로 된 가문 출신이긴 했던 몽티호 양도 바로 그 수법으로 황후가 되지 않았나. 나폴레옹 흉내는 내지 말게나.”
세르비니가 중얼거렸다. “그건 걱정 말게. 나는 얼간이도 아니고 황제도 아니야. 그런 짓을 저지르려면 둘 중 하나는 되어야지. 그보다, 자넨 잠이 오나?”
“전혀.”
“강변을 좀 걸어 볼 텐가?”
“기꺼이.”
둘은 쇠살문을 열고 마를리 쪽으로 강기슭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새벽을 바로 앞둔 고요한 시간, 깊은 잠의 시간, 완전한 휴식과 깊은 평화의 시간이었다. 밤의 부드러운 소리마저 잦아든 뒤였다. 나이팅게일은 울기를 그쳤고, 개구리들도 소란을 마친 터였으며, 어디선가 짐승 하나가, 새일 듯싶은 무엇이, 약하고 단조롭고 기계처럼 규칙적인, 톱질하는 듯한 소리를 낼 따름이었다. 시적인 순간, 또 철학적인 순간을 가끔 겪는 세르비니가 문득 말했다. “저 아이를 도무지 알 수가 없네. 산수로는 하나에 하나를 더하면 둘이 된다. 사랑에서는 하나에 하나를 더하면 하나가 되어야 할 텐데, 역시 둘이 되고 말지. 자넨 느껴 본 적 있나? 한 여자를 제 안으로 빨아들이고 싶다는, 혹은 그녀 안으로 사라져 버리고 싶다는 그 갈망 말일세. 짐승 같은 포옹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닐세. 한 존재와 오직 하나가 되고 싶은 열망, 그녀에게 마음과 영혼을 모두 열어 보이고 그 생각의 맨 밑바닥까지 꿰뚫어 보고 싶은, 그 정신적이고 영적인 갈망 말일세.”
“그러면서도 결국은, 그녀의 바람과 욕망과 의견이 어떻게 흔들리는지 단 한 줄기도 드러내 보일 수 없다네. 그토록 가까이 있는 영혼, 이쪽을 쳐다보는 두 눈 뒤에 숨은 영혼, 물처럼 맑고 그 밑에는 아무것도 없을 것처럼 투명한 영혼, 사랑스러운 입술로 말을 건네며 내 것처럼 느껴질 만큼 간절히 원하게 만드는 영혼, 말을 빌려 생각을 한 조각씩 던져 주는 영혼은, 그런데도 결국 저 별이 서로에게서 떨어진 거리보다 더 멀고, 더 꿰뚫을 수 없이 남아 있단 말일세. 이상하지 않은가?”
“나는 그렇게까지 따지지는 않네.” 사발이 받았다. “눈 뒤편을 들여다보려 들지 않지. 그 안의 알맹이에는 별 관심이 없고, 그릇에 관심이 있어.” 세르비니가 받았다. “이베트는 참 기묘한 아이야. 내일 아침엔 날 어떻게 맞을까?”
두 사람이 마를리의 공장에 이르렀을 즈음, 하늘이 부옇게 밝아 오는 기미가 보였다. 닭장에서는 수탉들이 울기 시작했다. 왼편 숲에서는 새 한 마리가, 부드럽고 짧은 곡조 하나를 쉼 없이 되풀이하며 지저귀었다.
“이제 돌아갈 시간이군.” 사발이 말했다.
두 사람은 돌아왔고, 세르비니는 방에 들어서며 열린 창문 너머 지평선이 온통 분홍빛으로 물든 것을 보았다.
그는 덧창을 닫고, 두껍고 묵직한 커튼을 친 뒤, 다시 잠자리에 들어 잠이 들었다. 자는 내내 이베트 꿈을 꾸었다. 이상한 소리에 그는 눈을 떴다. 침대 가에 걸터앉아 귀를 기울였지만 더는 들리는 것이 없었다. 그러다 불현듯 우박이 떨어지듯 덧창에 무언가가 타닥타닥 부딪쳐 왔다. 그는 침대에서 뛰쳐나와 창가로 달려가 덧문을 열었고, 오솔길에 선 채 그의 얼굴을 향해 자갈을 한 움큼씩 던지는 이베트를 보았다. 그녀는 분홍색 옷차림에 머스킷총병 깃을 꽂은 챙 넓은 밀짚모자를 쓰고, 장난스러운 웃음을 띠고 있었다.
“어머! 뮈스카드, 주무시고 계세요? 밤새 대체 무얼 하셨기에 이리 늦게 일어나세요? 모험이라도 찾아 헤매셨나요, 가엾은 뮈스카드?”
그는 얼굴 정면으로 쏟아지는 환한 햇빛에 눈이 부셨고, 여전히 피로에 짓눌려 있었으며, 이 어린 처녀의 농담기 어린 태연함에 놀랐다.
“금방 내려가겠습니다, 아가씨.” 그가 답했다. “얼굴에 물 좀 끼얹을 틈만 주십시오.”
“서두르세요.” 그녀가 외쳤다. “벌써 열 시예요. 게다가 뮈스카드한테 펼쳐 보여 드릴 큰 계획이 하나 있답니다. 우리 둘이 꾸밀 음모예요. 아침은 열한 시에 먹는 거 아시죠.”
내려가 보니 그녀는 긴 의자에 앉아 무릎에 책 한 권을, 무슨 소설책인지를 올려놓고 있었다. 지난밤 일 따위는 애초에 없었다는 듯, 거리낌 없고 다정한 태도로 그의 팔짱을 끼며, 솔직하고 명랑한 얼굴로 그를 정원 끝으로 이끌었다.
“제 계획은 이래요.” 그녀가 말했다. “엄마 말씀을 어기고, 뮈스카드가 지금 저를 라 그르누예르 식당에 데려가 주세요. 보고 싶거든요. 엄마는 점잖은 여자들은 거길 가는 법이 없다고 하시지만요. 저한테는 사람들이 갈 수 있든 없든 매한가지예요. 데려다 주실 거죠, 뮈스카드? 가서 뱃사공들과 어울려 신나게 놀아 봐요.”
그녀에게서는 기분 좋은 향기가 풍겼다. 그를 둘러싼 그 가볍고 어렴풋한 냄새가 무엇인지 정확히 짚어 낼 수는 없었다. 어머니가 쓰는 짙은 향수 따위가 아니라, 은은한 입김 같았고, 그 속에는 아이리스 가루 한 자락과 어쩌면 버베나 한 숨결이 섞여 있는 듯도 했다.
그 흐릿한 향기는 대체 어디서 풍기는가. 옷에서인가, 머리칼에서인가, 살갗에서인가. 그는 속으로 이리저리 따져 보았다. 아주 가까이에서 말을 주고받다 보니, 그녀의 싱그러운 숨결이 얼굴에 그대로 닿았다. 그 숨결은 방금의 향기만큼이나 들이마시기에 감미로웠다.
이윽고 그는, 이 짚이지 않는 향기가 실은 그녀의 매혹적인 눈이 불러일으킨 것이며, 그녀의 젊고 홀리는 듯한 우아함이 자아내는 일종의 기만적 분위기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약속하신 거예요, 뮈스카드? 아침 먹고 나면 꽤 더워질 테니, 엄마는 외출을 안 하실 거예요. 엄마는 더위를 몹시 타시거든요. 그때 엄마는 뮈스카드 친구분과 남겨 두고, 뮈스카드가 저를 데리고 가시는 거예요. 다들 우리가 숲으로 간 줄 알 테니까요. 라 그르누예르를 볼 생각만 해도 저는 얼마나 신나는지 몰라요!”
두 사람은 센강을 마주 보는 쇠살문 앞에 이르렀다. 햇살이 홍수처럼 쏟아져, 졸고 있는 듯 번들거리는 강물 위로 부서졌다. 수면 위로 옅은 열기 안개가 피어올라, 증발한 물에서 오른 가벼운 김이 강 위에 엷은 반짝임을 흩뿌리는 듯했다.
이따금 배가 지나갔다. 날렵한 요트도, 육중한 통선도. 짧고 긴 기적 소리가 들렸다. 일요일마다 파리 시민을 근교로 쏟아붓는 기차 소리, 그리고 마를리의 수문을 통과하기에 앞서 도착을 알리는 증기선의 기적 소리였다.
그때 자그마한 종이 울렸다. 아침 식사를 알리는 소리에 그들은 집 안으로 돌아갔다. 식사 자리는 말이 없었다. 묵직한 7월 한낮이 대지를 짓누르고 사람을 괴롭혔다. 더위가 공기를 걸쭉하게 만들어 정신도 몸도 마비시키는 듯했다. 굼뜬 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고, 공기가 무언가를 거스르는 매질로 바뀐 양 모든 움직임이 고단했다. 오직 이베트만이, 말은 적어도 활기에 차서 초조함으로 들떠 있었다. 마지막 요리가 끝나자마자 그녀가 말했다.
“지금 숲에 산책 나가면, 나무 아래는 시원해서 참 좋을 거예요.”
후작부인이 맥 빠진 말투로 중얼거렸다. “얘가 정신이 나갔니. 이런 날씨에 누가 밖에 나간다고.”
어린 딸이 뜻을 이룬 듯 받아쳤다. “그럼 엄마 곁엔 남작님이 남아 계시게 두세요. 뮈스카드하고 저는 언덕에 올라가 풀밭에 앉아 책을 읽을게요.”
그러고는 세르비니 쪽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리해 주실 거죠?”
“아가씨 분부대로입니다.” 그가 답했다.
이베트는 모자를 가지러 달려갔다. 후작부인은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으쓱했다. “저 애는 영 제정신이 아니에요.” 그녀가 말했다.
그러고는 사랑에 젖은 나른한 몸짓으로 그 어여쁜 흰 손을 남작에게 내밀었고, 그는 그 손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이베트와 세르비니는 길을 나섰다. 두 사람은 강변을 따라 걸어 다리를 건너 섬으로 들어선 뒤, 라 그르누예르로 가기에는 아직 이른 시간이라 버드나무 밑 강기슭에 자리 잡고 앉았다.
어린 처녀가 냉큼 주머니에서 책 한 권을 꺼내며 생긋 웃었다. “뮈스카드, 저한테 책을 읽어 주세요.” 그러고는 책을 그에게 건넸다.
그는 짐짓 질겁한 시늉을 했다. “제가요, 아가씨? 저는 글을 못 읽는걸요!”
그녀가 정색하고 답했다. “핑계도 반대도 사양이에요. 뮈스카드는 참 대단한 구혼자시네요. 공짜로 드실 속셈이시죠? 그게 뮈스카드의 좌우명이에요?”
그는 책을 받아 펼쳐 들고는 놀랐다. 곤충학 개론이었다. 영국 저자가 쓴 개미의 역사라는 책. 자기를 놀리는 게 아닌가 싶어 그대로 굳어 있자 그녀가 성을 냈다. “자, 읽으시라니까요!”
“내기입니까, 아니면 그냥 변덕이세요?” 그가 물었다.
“아니에요. 서점에서 그 책이 눈에 띄었거든요. 개미에 관해서라면 이게 최고 권위라기에, 풀밭 위를 뛰어다니는 녀석들을 보면서 그 작은 곤충의 삶을 알아 두면 재미있겠다 싶었어요. 자, 읽어 주세요.”
그녀는 풀밭에 길게 엎드려, 두 팔꿈치로 땅을 괴고 두 손 위에 머리를 얹은 채 땅바닥에 시선을 붙박았다. 그는 이렇게 읽기 시작했다.
“유인원이 해부학적 구조상 인간에 가장 가까운 동물임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개미의 생활 습성, 사회 조직, 거대한 공동체, 그들이 지어 올리는 집과 길, 동물을 길들이는 풍속, 때로는 노예로 부리는 행태까지 살펴본다면, 개미가 지능의 서열상 인간 바로 곁에 자리할 자격이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단조로운 목소리로 읽어 내려가다가 이따금 멈추고 물었다. “이쯤이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그녀는 고개를 저었고, 끊어진 풀잎 끝에 개미 한 마리를 잡아 올려서는, 잎의 한쪽 끝에 이르면 얼른 잎을 기울여 반대편으로 가게 하는 놀이를 즐겼다. 그 가녀린 피조물의 놀라운 생태 이야기를 말없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귀 기울여 들었다. 지하에 지은 집, 진딧물을 붙잡고 가두어 먹이를 주고 그 달콤한 즙을 받아 마시는 방식, 흡사 우리가 외양간에서 소를 치듯 한다는 이야기. 개미굴을 청소해 주는 눈먼 작은 벌레를 길들이는 풍습, 전쟁을 일으켜 노예를 포획하고 승자들을 어찌나 극진히 보살피게 하는지 급기야 승자들이 제 손으로 먹이를 챙기는 버릇마저 잊는다는 이야기까지.
그 작고 영리한 벌레에게 모성 같은 연민이 피어오른 듯, 이베트는 개미를 손가락 위로 기어오르게 하고는 감격 어린 표정으로 들여다보며 입이라도 맞추고 싶어 했다.
세르비니가 개미들이 무리 지어 살며 저희끼리 힘과 기술을 겨루는 유희를 즐긴다는 대목을 읽어 주자, 어린 처녀는 흥분해 그 곤충에게 입을 맞추려 했다. 그러나 개미는 빠져나가 그녀의 얼굴을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녀는 큰일이나 난 듯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미친 손짓으로 얼굴을 털어 냈다. 세르비니는 큰 소리로 웃으며 머리카락 언저리에서 개미를 잡아냈고, 잡아낸 바로 그 자리에 긴 입맞춤을 찍어 놓았다. 이베트는 이마를 거두지 않았다.
이윽고 그녀가 일어서며 외쳤다. “이거, 소설보다 훨씬 낫네. 자, 이제 라 그르누예르로 가요.”
그들은 섬의 한편, 공원처럼 꾸며지고 큰 나무 그늘이 드리워진 구역에 이르렀다. 높이 뻗은 이파리 아래로 쌍쌍이 거니는 이들이 센강을 따라 걸었고, 그 곁으로는 배가 미끄러져 지나갔다.
배는 젊은이들로 가득했다. 공장 아가씨들과 그 연인들이었는데, 사내들은 셔츠 바람에 외투는 팔에 걸치고, 중절모를 뒤로 젖혀 쓴 채 지친 얼굴이었다. 가족 나들이를 나온 상인들도 있었다. 여자들은 나들이옷을 빼입었고, 아이들은 부모 둘레에 병아리 떼처럼 따라붙었다. 멀리서 웅성거리는 소리, 무언가 꾸짖는 듯한 묵직한 소란이 들려와, 뱃사공들이 그토록 사랑해 마지않는 그 명소가 가까워졌음을 알렸다.
이내 그것이 눈에 들어왔다. 지붕을 씌운 거대한 배 한 척이 기슭에 매여 있었다. 안에서는 수많은 남녀가 식탁에 앉아 술을 들이켜거나, 서서 소리치고, 노래하고, 농지거리를 주고받고, 춤추고, 풀쩍거리며 뛰어다녔다. 그 박자를 맞추는 피아노 하나가 음정이 어긋난 채 낡은 양철냄비처럼 덜그럭거리며 신음을 토해 냈다.
키 큰 적갈색 머리의 반쯤 취한 처녀 둘이 붉은 입술로 거친 말을 주고받았다. 또 다른 여자들은 경마 기수 흉내라도 내듯 아마포 바지와 색깔 있는 모자를 쓴, 반나체의 젊은이들과 미친 듯이 춤을 췄다. 사람 냄새와 분가루 냄새가 진하게 코를 찔렀다.
식탁마다 둘러앉은 술꾼들은 희고 붉고 노랗고 초록빛이 도는 액체를 들이켜며 목이 찢어져라 떠들어 댔다. 어떻게든 소리를 내야 한다는, 귓속과 머릿속을 고함으로 가득 채워야 한다는 야만스러운 충동에 사로잡힌 듯했다. 이따금 헤엄치던 자 하나가 지붕 위로 올라섰다가 물속으로 뛰어들어 가까이 앉은 손님들에게 물을 튀기면, 손님들은 야만인처럼 악을 쓰며 고함을 질렀다.
물결 위로는 가벼운 배의 선단이 지나갔다. 길고 날씬한 보트는 맨팔의 노잡이들이 쏜살같이 저어 갔고, 구릿빛 피부 아래로 근육이 출렁였다. 배에 탄 여자들은 푸르거나 붉은 플란넬 치마를 입고, 머리 위로는 붉거나 푸른 양산을 펼쳐 이글거리는 햇빛에 반들거리게 하며, 뱃머리 반대쪽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움직임도 없이, 졸음에 겨운 자세로, 그저 물 위에 떠가는 듯 보였다.
더 묵직한 배들은 사람을 가득 싣고 느릿느릿 나아갔다. 대학생 하나가 멋을 부리느라 다른 배를 가리지 않고 풍차처럼 노를 저어 제쳐 대는 바람에 사방의 뱃사공들에게 욕을 실컷 얻어먹은 뒤, 헤엄치던 두 사람을 거의 물에 빠뜨릴 뻔하고는, 큰 수상 카페에 운집한 군중의 야유를 들으며 허둥지둥 사라졌다.
이베트는 환하게 들뜬 채 세르비니의 팔을 잡고 이 시끌벅적한 무리 한복판으로 들어갔다. 북적임을 즐기는 듯, 그곳 처녀들을 태연하고 상냥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저기 좀 봐요, 뮈스카드.” 그녀가 말했다. “머리칼이 어쩜 저리 예쁘죠! 저렇게 재미있게도 노네요!”
붉은 옷을 입고 커다란 밀짚모자를 쓴 뱃사공 차림의 피아노 연주자가 왈츠를 치기 시작하자, 이베트가 동반자의 팔을 움켜쥐었다. 둘은 어찌나 오래, 어찌나 열광적으로 춤을 추었던지 모두가 그들을 쳐다보았다. 식탁 위에 올라선 손님들은 발로 박자를 맞추었고, 다른 이들은 잔을 집어 던졌다. 연주자는 실성이라도 한 양 상아 건반을 쾅쾅 두들겼고, 온몸을 흔들어 가며 그 큼직한 모자를 뒤집어쓴 머리를 내둘렀다. 그러다 문득 연주를 멈추더니 갑판으로 미끄러져 내려와, 모자를 뒤집어쓴 채 피로에 쓰러진 양 벌렁 드러누웠다. 큰 웃음이 터지고 모두가 박수를 쳤다.
친구 넷이 사고라도 난 듯 달려 나와 쓰러진 동료를 들어 올렸다. 그 큰 모자를 배 위에 조심스레 얹고서, 네 사람이 각자 팔다리를 하나씩 나눠 들었다. 익살꾼 하나가 뒤를 따르며 “데 프로푼디스(De Profundis)”를 읊조렸고, 이윽고 행렬이 꾸려져 섬의 오솔길을 누볐다. 마주치는 손님과 산책객이 하나같이 뒤를 이어 대열에 합류했다.
이베트는 활짝 웃으며 앞장섰고, 온 마음으로 깔깔거리며 아무한테나 말을 걸었다. 움직임과 소음에 홀린 듯했다. 젊은이들은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옆구리로 밀고 들어오며, 눈길로 먹어 삼킬 듯 굴었다. 세르비니는 이 장난이 좋지 않게 끝나지 않을까 슬슬 불안해졌다.
행렬은 여전히 이어졌고, 걸음은 점점 빨라졌다. 넷이 짊어진 가마꾼들은 보폭을 서둘렀고, 뒤에서는 군중이 소리를 지르며 따라붙었다. 그러다 문득 그들은 강기슭 쪽으로 방향을 틀어, 물가에 닿자마자 딱 멈춰 서더니, 동료를 한순간 그네처럼 흔들다가 넷이 한꺼번에 힘을 모아 강 속으로 내던져 버렸다.
환호성이 입마다 터져 나왔고, 가엾은 피아노 연주자는 넋이 나간 채 첨벙거리고, 욕을 해 대고, 기침과 가쁜 숨을 번갈아 뱉었다. 진흙에 빠진 발을 가까스로 뽑아내 뭍으로 기어올랐다. 그의 모자는 물에 떠내려가다가 한 배에 건져졌다. 이베트는 기뻐 춤을 추며, 손뼉을 치며, 되뇌었다. “어머! 뮈스카드, 이리 재미있는 건 처음이에요! 정말 재미있지 않아요!”
세르비니는 지켜보는 사이 점점 진지해졌고, 어딘가 불편해졌으며, 이 천한 자리에서 저토록 태평한 그녀를 바라보며 마음이 조금씩 식어 갔다. 그의 속에서 무언가 본능적인 반발이 일었다. 아무리 자기 자신을 내던질 때라도, 태생이 좋은 남자라면 늘 지켜 오는 본능, 지나치게 천박한 교분과 품위를 깎는 접촉을 피하게 하는 본능이었다. 그는 놀란 듯 혼자 중얼거렸다.
“허, 그러고 보니 아가씨는 여기가 편하신 모양이로군!” 그러면서 그는 그녀에게 스스럼없이 말을 놓고 싶어졌다. 남자가 어떤 부류의 여자를 처음 만났을 때 쓰는 투로 말이다. 한때 그녀를, 스쳐 가는 저 적갈색 머리에 쉰 목소리를 내는 여자들과 구별해 주던 것이 이제는 보이지 않았다. 군중의 말투는 도무지 고상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충격을 받거나 놀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베트조차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는 듯했다.
“뮈스카드, 저 목욕하고 싶어요.” 그녀가 말했다. “둘이 함께 물로 들어가요.”
“분부대로입니다.” 그가 답했다.
두 사람은 수영복을 받으러 탈의실로 갔다. 그녀가 먼저 준비를 마치고 기슭에 나와 서서 그를 기다렸다. 눈길을 보내는 이마다 생긋 웃어 보이면서. 이윽고 둘은 나란히 미지근한 물속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즐거운 듯, 도취된 듯 헤엄쳤다. 물결에 어루만져지고 관능의 쾌감에 부르르 떨며, 한 번 한 번 팔을 저을 때마다 물 밖으로 솟구치듯 몸을 세웠다. 그는 겨우 뒤를 따라가며 숨을 헐떡였고, 이 종목에서는 제 실력이 시원찮다는 사실에 은근히 자존심이 상했다.
그러나 그녀는 속도를 늦추더니, 돌연 몸을 뒤집어 물 위에 드러누웠다. 양팔을 가지런히 포개고, 두 눈을 크게 뜬 채 푸른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는 수면 위로 펼쳐진 그녀 몸의 물결 같은 선, 단단한 목과 어깨, 반쯤 잠긴 허리, 물속에서 어슴푸레 빛나는 벗은 발목, 수면으로 올라온 자그마한 발끝을 지켜보았다.
그녀가 마치 일부러 그러는 듯, 자기를 꾀어내려는 듯, 아니면 또 놀려 먹으려는 듯 그렇게 몸을 드러내 보이는 것을 그는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내 그는 열렬한 갈망과 애를 태우는 조급함에 사로잡혀 그녀를 원하기 시작했다. 돌연 그녀가 몸을 돌려 그를 바라보더니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꼴이 참 잘났네요.” 그녀가 말했다.
이 놀림에 그는 부아가 치밀었고, 한 방 먹은 연인의 분노에 휩싸였다. 마음 한구석에 도사리고 있던 설욕 욕구, 복수하고 상처를 주고 싶다는 충동에 퍼뜩 몸을 맡겨 입을 열었다.
“그래서, 이런 식의 삶이 아가씨 마음에 드십니까?”
그녀가 순진한 얼굴로 되물었다. “무슨 말씀이세요?”
“아니, 시치미 떼지 마시지요.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아시지 않습니까.”
“진정 몰라요. 명예를 걸고 맹세해요.”
“아, 이 희극은 그만합시다! 그렇게 할 겁니까, 말 겁니까?”
“말씀 못 알아듣겠어요.”
“그 정도로 어리석진 않을 텐데요. 게다가 어젯밤에 제가 말씀드렸잖습니까.”
“무슨 말씀을요? 잊어버렸어요!”
“사랑한다고요.”
“뮈스카드가요?”
“그렇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맹세합니다.”
“그럼 증명해 보세요.”
“그것이 제가 바라는 전부입니다.”
“뭐가요?”
“증명 말입니다.”
“그럼 해 보세요.”
“하지만 어젯밤엔 그런 말씀 안 하셨지요.”
“뮈스카드가 아무것도 청하지 않으셨잖아요.”
“무슨 그런 엉뚱한 소리를!”
“게다가 그 제안은 저한테 하실 게 아니고요.”
“그럼 누구한테 합니까?”
“당연히 엄마한테요.”
그는 웃음을 터뜨렸다. “어머님께라고요. 허, 그건 좀 과하지요!”
그녀는 갑자기 몹시 진지해지더니, 똑바로 그의 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들어 보세요, 뮈스카드. 진정 저와 결혼하고 싶을 만큼 저를 사랑하신다면, 먼저 엄마한테 말씀하세요. 그러고 나면 제가 답해 드릴게요.”
그는 여전히 자기를 놀리는 줄 알고 골난 어조로 쏘아붙였다. “아가씨, 사람을 잘못 보신 모양이오.”
그녀는 부드럽고 맑은 눈빛으로 계속 그를 들여다보았다.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저, 무슨 말씀이신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그러자 그는 목소리에 약간 악의를 섞어 재빠르게 답했다.
“자, 이베트 양, 이 어처구니없는 연극은 이쯤에서 그만둡시다. 이미 너무 오래 끌었어요. 순진한 꼬마 아가씨 흉내를 내고 계시는데, 그 배역이 당신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부디 믿어 주세요. 당신이나 저나, 우리 사이에 결혼 이야기가 오갈 수 없다는 사실을 뻔히 아시잖습니까. 오갈 수 있는 건 사랑뿐입니다. 나는 사랑한다고 말했습니다. 사실입니다. 다시 말하지요. 당신을 사랑합니다. 더는 못 알아듣는 시늉 마시고, 나를 바보 취급하지 마십시오.”
두 사람은 제자리에서 물을 밟으며 마주 서 있었다. 물 위에 떠 있으려 손끝만 살짝 움직이면서. 그녀는 잠시 말의 뜻을 가늠하지 못하는 양 꼼짝 않고 있더니, 돌연 머리끝까지 새빨개졌다. 얼굴 전체가 목부터 귀까지 자줏빛으로 물들었고, 귀는 거의 보랏빛이 됐다. 한마디 대꾸도 없이 그녀는 기슭을 향해 도망쳤다. 있는 힘을 다해 다급히 팔을 저어 헤엄쳤고, 그는 따라잡지 못한 채 숨을 헐떡이며 뒤를 쫓았다. 그녀가 물에서 나와 망토를 집어 들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탈의실로 들어가 버리는 것을 그는 지켜보았다.
그는 옷을 갈아입는 데 꽤 오래 걸렸다. 어떻게 해야 할지 참으로 난감했고, 그녀에게 무슨 말을 건네야 할지 머리가 복잡했으며, 사과를 해야 할지 아니면 밀고 나가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준비가 다 끝났을 때 그녀는 이미 혼자 떠난 뒤였다. 그는 불안하고 어수선한 마음으로 천천히 돌아갔다.
후작부인은 사발의 팔짱을 끼고, 잔디밭을 둘러싼 둥근 산책길을 거닐었다. 세르비니를 보자 그녀는 지난밤부터 줄곧 유지해 온 무심한 듯한 태도로 말했다.
“그토록 더운 날에 나가지 말라 했지요. 그런데 이베트가 일사병 직전의 꼴로 돌아왔답니다. 눕고 싶다며 올라갔어요. 가엾은 것이, 개양귀비처럼 새빨개져서는 머리도 지독히 아프다지 뭐예요. 햇볕을 그대로 쐬며 다니셨거나, 뭔가 철없는 일을 벌이셨나 봐요. 당신도 저 애만큼이나 철이 없군요.”
어린 처녀는 저녁 식사 자리에 내려오지 않았다. 무언가 먹을 것을 올려 보내려 하자, 그녀는 문 너머로 배가 고프지 않다고 소리쳤다. 문을 걸어 잠갔으니 제발 혼자 있게 내버려 달라고 간청했다. 두 젊은이는 열 시 기차로 떠나며 다음 목요일에 다시 오겠다고 약속했다. 후작부인은 열어 둔 창가에 앉아 꿈에 잠겼다. 깊고 장엄한 밤의 침묵 속에서, 멀리서 들려오는 뱃사공 무도회 악대의 경쾌한 곡조를 들으며.
그녀는 남들이 말이나 뱃놀이에 빠져 살듯이, 사랑에 흔들리며 살아왔다. 병처럼 슬며시 덮쳐 오는 애정의 발작에 번번이 걸려드는 사람이었다. 그 격정은 돌연 그녀를 덮쳐 존재 전체로 스며들었다가, 그때그때 격렬하거나 극적이거나 감상적인 양상을 띠며 그녀를 미치게 하거나 지치게 하거나 압도해 버렸다.
그녀는 사랑하고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부류의 여자였다. 밑바닥에서 출발해 거침없는 이력을 밟아 올라오며, 타고난 약삭빠름을 앞세워 본능대로 움직였다. 돈과 입맞춤을 가리지 않고 자연스레 받아들였고, 자신의 비범한 재주를 깊이 따져 보지도 않고 부려 먹었다. 그 모든 경험 속에서도 진정한 애정도, 진정한 혐오도 끝내 알지 못했다.
그녀에겐 남자 친구가 여럿 있었다. 먹고살아야 하니 별수 없었다. 여행을 다니다 이 식탁 저 식탁에서 끼니를 때우는 것과 다르지 않은 이치였다. 그러나 이따금 그녀의 심장이 불을 붙여, 정말로 사랑에 빠지는 일이 일어났다. 그 상태는 사정에 따라 몇 주, 혹은 몇 달을 가곤 했다. 그것이야말로 그녀 인생의 감미로운 순간이었다. 그럴 때면 그녀는 영혼을 송두리째 바쳐 사랑했다. 물에 몸을 던져 죽으려는 사람처럼 사랑에 뛰어들었고, 필요하다면 죽어도 좋다는 각오로 흐름에 실려 갔다. 도취된 채로, 제정신이 아닌 채로, 그지없이 행복해하면서. 그럴 때마다 그녀는 이런 애착이 난생처음이라 여겼다. 누군가가 그녀 앞에, 몇 명의 남자를 두고 밤새 별을 바라보며 꿈꿔 왔는지 그 숫자를 일러 주었다면 그녀는 깜짝 놀랐을 것이다.
사발은 그녀의 몸과 마음을 사로잡아 버렸다. 그녀는 그의 얼굴과 기억에 실려 둥실 떠가며, 이루어진 사랑의 고요한 도취 속에서, 지금 이 자리에서 분명히 쥐고 있는 행복 속에서 그를 꿈꾸었다.
등 뒤에서 소리가 나자 그녀는 몸을 돌렸다. 이베트가 막 들어온 참이었다. 낮에 입었던 옷차림 그대로였고, 얼굴은 파리하고, 몹시 지친 뒤에나 볼 수 있는 번뜩이는 눈빛이었다. 그녀는 열린 창 문턱에 몸을 기대고 어머니를 마주 보았다.
“드릴 말씀이 있어요.” 그녀가 말했다.
후작부인이 놀란 눈으로 딸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딸을 이기적인 어머니답게 사랑했다. 재산을 자랑하듯 딸의 미모를 자랑했고, 스스로가 여전히 어여뻐서 질투할 여유는 없었으며, 남들이 자기에게 뒤집어씌우는 음모들을 굳이 꾸며 둘 만큼 공을 들이지도 않았지만, 딸의 값어치를 또렷이 가늠할 정도의 영리함은 있었다.
“들으마, 얘야.” 그녀가 말했다. “무슨 일이지?”
이베트는 어머니의 영혼 깊은 데까지 꿰뚫으려는 듯, 자기 말이 불러일으킬 온갖 반응을 낱낱이 붙잡으려는 듯, 날카로운 눈길을 보냈다.
“저, 방금 이상한 일이 있었어요.”
“어떤 일이?”
“세르비니 씨가 저를 사랑한다고 했어요.”
후작부인은 내심 흔들렸으나 잠시 기다리다가, 이베트가 더 말이 없자 물었다.
“어떻게 그런 말을 했다는 거니? 자세히 좀 말해 봐!”
어린 처녀는 평소 버릇대로 어머니 발치에 어리광 부리듯 앉아 두 손을 맞잡고 덧붙였다.
“저와 결혼하고 싶다고 했어요.”
오바르디 부인은 저도 모르게 멍한 몸짓으로 외쳤다.
“세르비니가! 어머나! 너 정신이 나갔구나!”
이베트는 어머니의 얼굴에서 눈길을 떼지 않은 채, 그 생각과 놀라움을 낱낱이 지켜보았다. 그녀는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제가 정신이 나간 거예요? 세르비니 씨가 저랑 결혼하면 왜 안 되죠?”
후작부인은 당황해 더듬거렸다.
“네가 잘못 들은 거야. 그럴 리가 없다. 잘못 들었거나 못 알아들었거나 둘 중 하나지. 세르비니 씨는 너한테 너무 부자인 데다, 결혼 따위를 할 파리 사람이 아니다.” 이베트가 천천히 일어섰다. 그리고 덧붙였다. “하지만 엄마, 그분이 말씀대로 정말 저를 사랑한다면요?”
어머니가 다소 짜증 난 투로 답했다. “이제는 그런 엉뚱한 생각 따위 하지 않을 만큼 크고 철이 들었다 여겼는데. 세르비니는 파리 한량이고 이기주의자야. 자기와 같은 계급에, 자기만 한 재산을 가진 여자가 아니면 결코 결혼하지 않아. 그이가 너한테 결혼 이야기를 꺼냈다면, 그건 다만 속셈이…”
후작부인은 자기 뜻을 제대로 다 말하지 못하고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덧붙였다. “자, 이제 그만두고 올라가 자거라.”
딸은 알고 싶던 것을 다 알아낸 사람처럼 순한 목소리로 답했다. “네, 엄마.”
딸은 어머니 이마에 입을 맞춘 뒤 차분한 걸음으로 물러났다. 문간에 이르렀을 때 후작부인이 불러 세웠다. “일사병은 어찌 된 거냐?”
“그런 거 없었어요. 바로 그게 오늘 일의 원인이었어요.”
후작부인이 덧붙였다. “다시는 이 이야기 꺼내지 말자. 앞으로 한동안은 그이와 단둘이 있지 말거라. 그가 결코 너와 결혼할 리 없다는 것, 알겠니, 단지 너를, 곤란하게 만들려는 것뿐이라는 걸 명심해라.”
그녀는 제 생각을 드러낼 더 나은 말을 찾아내지 못했다. 이베트는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오바르디 부인은 상념에 잠겼다. 풍족하고 사랑에 젖은 안락 속에서 여러 해를 살아오는 동안, 그녀는 자기를 괴롭히거나 우울하게 할 법한 생각은 죄다 정성껏 밀쳐 두었다. 스스로에게 한 번도 묻고 싶지 않았던 물음이 있었다. 이베트는 장차 어찌 될 것인가. 문제가 닥쳤을 때 고민해도 늦지 않으리라. 제 딸이 부자이면서 훌륭한 집안의 남자와 결혼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것, 도무지 있을 법하지 않은 우연, 벼락같은 사랑으로 모험녀를 왕좌에 올리는 그런 우연이 아니고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그녀는 제 경험으로 익히 알고 있었다.
게다가 그녀는 한 번도 깊이 따져 본 일이 없었다. 자기 자신에만 골몰해 온 터라, 자신과 직접 얽히지 않은 일로는 계획 따위를 세우지 않았던 것이다.
이베트도 제 어미처럼 살아갈 것이다, 틀림없이. 화려한 삶을 누릴 것이다. 안 될 까닭이 있는가? 그러나 후작부인은 그것이 언제 어떻게 올지 감히 물어본 적이 없었다. 그 모든 것은 때가 되면 저절로 자리 잡힐 테니.
그런데 이제 딸이 느닷없이, 예고도 없이, 답할 수 없는 종류의 물음 하나를 던져 버린 것이다. 그리하여 그녀를 어떤 입장에 세웠다. 지극히 미묘하고, 어느 쪽에서 보아도 위험하며, 딸에 관한 일이라면 모든 어머니가 내보이기 마련이라 여겨지는 양심의 영역을 흔들어 놓는, 그런 사건 앞에.
꾸벅꾸벅 조는 듯해도 결코 완전히 잠든 적이 없는 그녀는, 세르비니의 속셈을 한순간이라도 오해할 만큼 모자라지 않았다. 남자를 경험으로 알았고, 특히 그 계급의 남자를 잘 알았다. 이베트가 첫 마디를 꺼내기 무섭게 거의 저도 모르게 외쳤던 것도 그 때문이다. “세르비니가 너와 결혼을 해? 너 정신 나갔구나!”
그토록 닳고 닳은 세상 남자가, 어떻게 그런 해묵은 수법을 쓸 생각을 했단 말인가? 이제 그가 어떻게 나올까? 그리고 저 어린 딸에게는 어떻게 더 명확히 경고하고, 더 단호히 금지해야 할까. 큰 실수를 저지를 수도 있는 일이니까. 저 다 큰 처녀가 이토록 천진하고, 이토록 아무것도 모르고, 이토록 무심할 줄 누가 믿었겠는가. 후작부인은 심란해졌고, 생각만으로도 지쳐 가는 가운데 어떤 해답도 찾지 못한 채, 무엇을 해야 할지 정해 보려 애썼다. 상황이 참으로 난처했던 것이다. 걱정에 지친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저 애들을 좀 더 잘 지켜보자. 사정에 따라 움직이면 된다. 필요하면 세르비니에게는 내가 직접 말하자. 그 사람은 영리하니 한 마디만 던져도 알아들을 테지.”
그에게 뭐라고 말할지, 그가 어찌 답할지, 둘 사이에 어떤 합의가 이루어질 수 있을지는 미처 생각해 두지 않았다. 그러나 결정을 내리지 않고도 이 골칫거리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다시 잘생긴 사발의 꿈에 잠겼다. 그러고는 파리 쪽에서 어른거리는 희뿌연 불빛을 향해 몸을 돌려, 두 손으로 입맞춤을 날려 보냈다. 숫자도 세지 않고 어둠 속으로 연달아 던지는 재빠른 입맞춤을. 이윽고 아주 낮은 목소리로, 마치 지금도 사발과 이야기를 나누는 양 속삭였다.
“사랑해요, 사랑해요!”
제3장.
각성
이베트 역시 잠들지 못했다. 어머니가 그랬듯이 그녀도 열어둔 창턱에 몸을 기댄 채, 평생 처음 맛보는 쓰디쓴 눈물을 흘렸다. 지금껏 그녀는 어떤 근심도 없이, 행복한 청춘 특유의 맑고 태평한 믿음 속에서 자라왔다. 무엇 때문에 꿈꾸고 고민했겠는가? 다른 또래 처녀들과 다를 바 없는 한낱 처녀일 따름인데 무엇이 문제였겠는가? 의심이며 두려움이며 괴로운 의혹이 왜 그녀를 찾아와야 했겠는가?
그녀는 무슨 이야기든 척척 받아넘기는 재주 덕에 어떤 주제에든 통달한 사람처럼 보였다. 주위 사람들의 말투며 몸짓이며 어휘를 그대로 배어들게 둔 까닭이다. 그러나 실상 그녀가 아는 것이라곤 수도원에서 자란 계집아이 수준을 넘지 못했다. 거침없는 말들은 기억에서, 여자라면 누구나 지닌 그 무의식의 모방과 동화 능력에서 나온 것이지, 단련되어 벼려진 지성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사랑을 입에 올리는 방식은, 화가의 아들이나 음악가의 아들이 열 살 남짓에 그림이며 음악을 이야기하는 방식과 다르지 않았다. 그 단어가 어떤 신비를 감추고 있는지 그녀는 알고 있었다. 아니,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면전에서 속삭이던 야릇한 농담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 그 순진함이 그쯤조차 눈치채지 못할 리는 없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에서, 세상의 모든 가정이 자기 집과 같지는 않다는 결론을 어찌 끌어낼 수 있었겠는가?
사람들은 공손한 기색을 꾸며 어머니의 손에 입을 맞추었고, 찾아오는 손님마다 작위를 지녔으며, 하나같이 부자이거나 부자인 체했고, 왕실의 왕자들마저 허물없는 벗처럼 입에 올렸다. 그중 두 왕자는 저녁이면 후작부인의 저택을 몸소 여러 차례 드나들기까지 했다. 그러니 그녀가 어떻게 알 수 있었겠는가?
게다가 그녀는 본래 꾸밈없는 성품이었다. 어머니처럼 사람을 저울질하거나 따져보는 법도 없었다. 삶이 너무도 즐거웠으니, 그보다 차분하고 사려 깊은 사람이라면 수상쩍게 여겼을 법한 일들에도 조금의 근심 없이 태평하게 살아왔다.
그런데 이제 별안간, 세르비니가 내뱉은 몇 마디 말이 ― 뜻은 몰랐어도 그 거친 감촉만은 고스란히 전해지던 말들이 ― 까닭 모를 동요를 그녀 속에 불러일으켰고, 그 동요는 이윽고 속을 태우는 불안으로 자라났다. 그녀는 집으로 달아났다. 상처 입은 짐승처럼. 실은 그 말들에 가장 깊은 곳을 찔린 셈이었고, 그 말을 끝없이 되뇌며 의미와 무게를 온전히 가늠해보려 했다. “자네도 잘 알 것 아닌가, 우리 사이에 혼인이라는 이야기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있다면 오로지 사랑뿐이지.”
그 말이 대체 무슨 뜻이었을까? 그리고 이 모욕은 어째서란 말인가? 그렇다면 자신이 모르고 있는 무언가, 어떤 비밀, 어떤 치욕이 있다는 말인가? 세상에서 그것을 모르는 이가 오직 저 하나뿐이란 말인가? 그러나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그녀는 겁에 질려 소스라쳤다. 숨겨진 치부를 들여다본 사람, 흠모하던 벗의 배신을, 마음을 으스러뜨리는 그런 파국을 마주한 사람이 느끼는 경악이었다.
그녀는 꿈꾸다가 곰곰이 생각하다가 길을 잃고 울음을 터뜨리며 두려움과 의심에 사로잡혔다. 이윽고 젊은 영혼 특유의 쾌활함이 스스로를 달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녀는 한 편의 모험극을 꾸며내기 시작했다. 읽어둔 시적 낭만 소설들의 기억 위에 이상하고도 극적인 상황을 얹어보기 시작한 것이다. 심금을 울리던 재난과 애틋한 사연들을 두루 불러 모아 한데 섞어, 제 나름의 이야기를 지어냈고, 삶을 감싸고 있는 그 반쯤 이해된 비밀에 그것으로 해석을 입혔다.
그녀는 더 이상 주저앉아 있지 않았다. 꿈을 꾸었고, 베일을 들추었고, 있을 법도 않은 복잡한 내막을 떠올렸다. 기이하고 끔찍하되, 바로 그 기이함 때문에 매혹적인 것들을. 혹시 자신이 어느 왕자의 사생아가 아닐까? 가련한 어머니가 배신당하고 버림받은 끝에 어느 왕, 어쩌면 빅토르 에마누엘 왕에게 후작 작위를 받은 뒤, 그 왕가의 노여움을 피해 도피해야 했던 것이 아닐까? 아니면 차라리, 고귀하고 혁혁한 친족에게 버림받은 아이, 은밀한 사랑의 결실이었던 자신을 후작부인이 거두어 양녀로 길러낸 것이 아닐까?
그 밖에도 갖가지 추측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그녀는 기분 따라 그것들을 받아들였다가도 이내 물리쳤다. 자기 처지에 스스로 연민을 느꼈고, 마음 밑바닥은 행복한 듯도 슬픈 듯도 했다. 그리고 책 속의 여주인공이 된 듯한, 자신에게 걸맞은 고결한 태도를 지녀야 할 그런 존재가 된 듯한 묘한 만족을 맛보았다.
제멋대로 그려낸 사건들에 맞추어, 그녀는 자신이 맡아야 할 역할을 미리 꾸려보았다. 스크리브나 조르주 상드의 희곡 속 인물을 연기하듯 그 배역을 어렴풋이 그려냈다. 거기에는 헌신과 자기희생, 드높은 영혼, 다정함과 아름다운 말들이 깃들어야 할 터였다. 그녀의 유연한 천성은 이 새로운 자세를 거의 반기다시피 했다. 그렇게 저녁 가까이 되도록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어떻게 하면 후작부인으로부터 진실을 빼앗아낼지 궁리했다.
이윽고 밤이 찾아오자 ― 비극적 상황에 더없이 어울리는 그 시각에 ― 그녀는 원하는 바를 얻어낼 간단하고도 교묘한 수를 떠올렸다. 다름 아니라, 세르비니가 자신에게 청혼했다는 말을 불쑥 내던지는 것이었다.
그 소식에 뜻밖의 기습을 당한 오바르디 부인은 틀림없이 한 마디 말을 흘릴 터였다. 딸의 머릿속을 비춰줄 외마디 탄성을. 이베트는 그렇게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놀라움의 폭발, 사랑의 분출, 몸짓과 눈물로 가득한 속내의 고백 ― 이베트는 그런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놀라지도 슬퍼하지도 않고 그저 귀찮다는 기색일 뿐이었다. 억지스럽고 불만스러우며 초조한 말투로 대꾸하는 그 어조에서, 갑자기 여자 특유의 영리함과 예민함이 깨어난 그 처녀는, 더 이상 캐물어서는 안 된다는 것, 비밀이란 다른 종류의 것이라는 것, 그것을 알게 되는 날이면 제 몸에 고통이 되리라는 것, 그리하여 홀로 풀어내야 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방으로 돌아왔다. 가슴이 짓눌리고 영혼이 괴로움에 잠긴 채, 이제는 참된 불행의 예감에 사로잡혔다. 다만 이 감정이 어디에서 왜 밀려오는지는 스스로도 정확히 알지 못한 채였다. 그리하여 그녀는 창가에 기대어 울었다.
그녀는 오래도록 울었다. 이제는 아무것도 꿈꾸지 않고 더 알아내려 하지도 않은 채, 피로가 서서히 덮쳐오자 눈을 감았다. 몇 분 동안 깊은 잠에 빠졌다. 지친 나머지 옷을 벗고 자리에 누울 기운조차 없는 사람의 그 잠, 머리가 가슴 쪽으로 꺾여 내려오는 무겁고 꿈에 찢기는 잠이었다.
그녀가 침대에 든 것은 새벽 첫 햇살이 돋아날 무렵이었다. 아침의 찬 기운이 스며들어 창가를 떠날 수밖에 없게 되었을 때였다.
그다음 날에도, 또 그다음 날에도 그녀는 과묵하고 침울한 태도를 고수했다. 머릿속은 분주했다. 살피는 법, 결론을 더듬어보는 법, 따져보는 법을 차츰 익혀가는 중이었다. 아직은 어렴풋한 빛이 주위의 사람과 사물을 전과 다른 방식으로 비추는 듯했다. 그녀는 모든 것에 ― 지금껏 믿어온 모든 것에, 어머니에게까지 ―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이틀 사이 별의별 상상을 다 해보았다. 온갖 가능성을 헤아렸고, 변덕스럽고 거침없는 기질답게 돌연 극단적인 결심에 이르기도 했다. 수요일에는 하나의 계획을, 행동 전반의 일정표와 정탐의 체계를 떠올렸다. 목요일 아침 그녀는 모든 이에 대해 날카로워진 자세로 무장하기로 마음먹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이 두 마디를 자신의 표어로 삼기로까지 했다. “나 홀로.” 그리고 이 두 마디를 가문의 문장(紋章) 둘레에, 편지지 위에 새겨 넣는다면 어떤 효과가 날지 한 시간 남짓 이리저리 배치해보며 궁리했다.
사발과 세르비니가 열 시에 당도했다. 처녀는 거리를 둔 채, 그러나 어색한 기색 없이, 친근하면서도 엄숙한 어조로 손을 내밀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뮈스카드. 잘 지내셨어요?” “안녕하시오, 아가씨. 그럭저럭, 덕분에. 아가씨는?” 그는 그녀를 찬찬히 지켜보고 있었다. ‘이번에는 또 무슨 연극을 내게 보여주려는 걸까.’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후작부인이 사발의 팔을 끼자, 그는 이베트의 팔을 끼었고, 네 사람은 잔디밭을 거닐기 시작했다. 나무 덤불 뒤로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거듭하면서.
이베트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걸었다. 발밑 오솔길의 자갈만 내려다볼 뿐, 동행의 말에는 거의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답하는 일도 드물었다.
그러다가 문득 물었다. “뮈스카드, 당신은 정말로 제 친구인가요?”
“물론이오, 아가씨.”
“하지만 정말로, 참으로요?”
“전적으로 아가씨의 벗이오. 몸과 영혼을 다 바쳐서.”
“그렇다면 단 한 번, 꼭 한 번이라도 제게 거짓말을 하지 않을 만큼요?”
“필요하다면 두 번이라도.”
“제게 꼭 있는 그대로의, 엄정한 진실을 말해주실 만큼요?”
“그렇소, 아가씨.”
“좋아요. 그럼 크라발로프 공작에 대해, 가슴 깊은 곳에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허, 참.”
“보세요, 벌써 거짓말할 준비를 하시잖아요.”
“천만에. 말을, 꼭 맞는 말을 고르고 있을 뿐이오. 원, 크라발로프 공작은 러시아인이오. 러시아어를 쓰고, 러시아에서 태어났으며, 프랑스로 건너올 여권쯤은 지녔을 터, 거기에 거짓이라 할 것은 오직 이름과 작위뿐이외다.”
그녀가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니까 그가 ――?”
“모험가라는 말이오, 아가씨.”
“고맙습니다. 그럼 발레알리 기사도 나을 게 없겠네요?” “맞혔소.”
“벨비뉴 씨는요?”
“그는 좀 다르오. 지방 명사 축에 드는 사내지. 어느 선까지는 떳떳하다 할 만하나, 삶을 너무 빨리 살아버린 탓에 가장자리가 조금 그을려 있을 뿐.”
“당신 자신은요?”
“나는 사람들이 나비라 부르는 축이오. 집안은 그럭저럭 괜찮은 사내지. 재치는 타고났으나 문장 다듬는 데 다 써버렸고, 건강은 타고났으나 방탕으로 깎아먹었고, 어쩌면 무슨 가치를 지녔을 법도 했으나 아무것도 하지 않아 모두 흩뿌려버린 자. 내게 남은 것이라곤 삶에 대한 웬만한 식견, 편견이라곤 일절 없는 머리, 여자를 포함한 인류 전체에 대한 넉넉한 경멸, 내가 한 짓들의 헛됨에 대한 제법 깊은 감회, 그리고 저 군중을 향한 광대한 아량뿐이오.”
“그렇지만 때로는 솔직해질 줄도 알고, 심지어 애정을 품을 줄도 안다오. 아가씨가 원하신다면 그 또한 보게 되실 거요. 이런 결점과 자질을 모두 그러안은 채, 나는 아가씨의 분부 아래 몸과 마음을 내어놓소. 좋으실 대로 부려 쓰시구려.”
그녀는 웃지 않았다. 가만히 듣고 있었다. 그의 말과 그 속뜻을 저울질하고 있었다. 이윽고 다시 물었다.
“라미 백작부인은 어떻게 보시나요?”
그가 선선히 대답했다. “여자들에 대해서만은 내 의견을 내놓지 않는 것을 허락해주시오.”
“단 한 사람도요?”
“단 한 사람도.” “그렇다면 여자 모두에게 나쁜 의견을 품으셨군요. 자, 생각해 보세요. 예외 하나쯤은 두지 않으시겠어요?”
그는 평소 즐겨 걸치던 그 뻔뻔한 기색으로 빈정거리듯 웃었고, 무기 삼아 쓰던 거친 대담함으로 말했다. “자리에 함께한 분은 언제나 예외라오.”
그녀의 볼이 살짝 붉어졌으나, 차분하게 물었다. “그럼 저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말하라고 하시는 거요? 좋소, 기꺼이. 내가 보기에 아가씨는 분별이 있고 실리가 있는, 굳이 고르자면 실용적 분별이 있는 처녀라오. 제 소일을 꾸릴 줄 알고, 사람을 즐겁게 할 줄 알며, 제 속내를 감출 줄 알고, 그물을 칠 줄 알며, 서두르는 법 없이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처녀요.”
“그게 전부인가요?” 그녀가 물었다.
“전부요.”
그러자 그녀는 진지하고 엄숙한 어조로 말했다. “그 의견을 제가 바꿔놓고 말 거예요, 뮈스카드.”
그런 다음 그녀는 어머니 쪽으로 합류했다. 어머니는 고개를 숙인 채 잰걸음으로 걷고 있었다. 은밀하고 달콤한 이야기를 낮게 속삭일 때 사람들이 흔히 짓는 몸가짐이었다. 걸어 나가며 그녀는 양산 끝으로 모래 위에 형상을, 어쩌면 글자를 그리고 있었다. 사발 쪽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길게 나긋하게 그의 팔에 기대어, 그에게 몸을 바짝 붙인 채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었다.
이베트는 문득 어머니에게 눈길을 멈추었다. 의심이 ― 의심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어떤 느낌이 ― 바람에 실린 구름의 그림자가 땅 위를 스쳐가듯 그녀의 마음을 훑고 지나갔다.
아침 식사를 알리는 종이 울렸다. 식탁은 말수가 적어 거의 침울하다시피 했다. 대기에 폭풍우 기운이 감돌았다. 크고 단단한 구름들이 지평선 위에 묵묵히 무겁게, 그러나 뇌우를 가득 품은 채 걸려 있었다. 테라스에서 커피를 마시자마자 후작부인이 물었다.
“얘야, 오늘은 네 친구 세르비니와 산책이라도 다녀오지 않겠니? 나무 그늘 아래서 서늘한 기운을 맛보기 딱 좋은 때 같구나.”
이베트가 어머니에게 재빠른 눈길을 던졌다.
“아뇨, 엄마, 오늘은 나가지 않을래요.”
후작부인은 언짢은 기색이 역력했고 재차 권했다. “아, 나가서 한 바퀴 돌고 오려무나. 얘야, 그러면 아주 개운할 텐데.”
이베트가 또렷하게 말했다. “아뇨, 엄마, 오늘은 집에 있을래요. 왜인지는 엄마도 잘 아시잖아요. 지난 저녁에 말씀드렸으니까요.”
오바르디 부인은 더는 그 말에 신경 쓰지 않았다. 사발과 단둘이 남을 궁리로 머릿속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얼굴은 벌겋게 달아오르고 짜증이 치밀었으며, 자기 일로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자유로운 한두 시간을 어찌 마련해야 할지 몰라 답답했다. 그녀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래. 미처 생각을 못 했구나. 내가 정신을 어디다 두고 있는지.”
그리고 이베트는 스스로 ‘안전판’이라 부르던 자수품을, 무료한 날이면 일 년에 대여섯 번쯤 꺼내들곤 하던 그 자수품을 집어 들고 어머니 곁의 낮은 의자에 앉았다. 그동안 두 청년은 접의자에 걸터앉아 시가를 피웠다.
시간은 나른한 대화 속에서 흘러갔다. 후작부인은 안달하며 딸을 떼어놓을 구실이며 수단을 찾느라 사발 쪽으로 그리운 눈길을 던졌다. 끝내 뜻대로 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깨닫고는 어찌할 바를 몰라 세르비니에게 말했다. “아시겠지요, 친애하는 공작님, 오늘 저녁은 두 분 모두 붙잡아두겠어요. 내일은 샤투의 푸르네즈 식당에서 아침을 들기로 해요.”
그는 그 뜻을 알아채고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분부대로 하지요, 후작부인.”
하루는 폭풍우의 위협 아래 느릿느릿, 무겁게 흘러갔다. 저녁 식사 시간이 조금씩 다가오고 있었다. 무거운 하늘은 굼뜬 먹장구름들로 채워졌다. 바람 한 점 일지 않았다. 저녁 식탁 역시 말이 없었다. 짓누르는 압박과 알 수 없는 거북함, 막연한 두려움이 두 사내와 두 여인의 입을 한꺼번에 틀어막은 듯했다.
식기가 걷힌 뒤에도 그들은 테라스에 한참을 앉아 있었다. 이따금 한 마디씩 말을 주고받을 뿐이었다. 밤이 내렸다. 후덥지근한 밤이었다. 돌연 지평선이 거대한 번갯불 한 줄기에 갈라지며, 어둠에 싸여 있던 네 얼굴을 눈부시고 창백한 빛으로 비추었다. 이어 멀리서 둔중하고 희미한 소리가, 마치 다리 위를 굴러가는 마차 소리 같은 그 소리가 땅 위를 건너갔다. 그러자 대기의 열기가 한층 치솟는 듯했고, 공기는 돌연 더 숨 막혀오며, 저녁의 침묵이 한결 깊어진 듯했다.
이베트가 일어섰다. “저는 자러 갈게요. 폭풍우가 저를 힘들게 하네요.”
그러고는 후작부인에게 이마를 내밀고, 두 청년에게는 손을 내민 뒤 물러났다.
그녀의 방이 바로 테라스 위에 자리했기에, 문 앞에 자란 큼직한 밤나무 잎들이 이내 초록빛으로 어슴푸레 빛났다. 세르비니는 이파리에 스민 그 창백한 빛에 눈길을 고정했다. 이따금 그림자 하나가 스쳐 지나가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불현듯 빛이 꺼졌다. 오바르디 부인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딸아이가 잠자리에 들었나 보네요.” 그녀가 말했다.
세르비니가 일어서며 말했다. “후작부인, 허락하신다면 저도 그리하겠습니다.” 그는 그녀가 내민 손에 입을 맞추고 그 역시 자리를 떴다.
그녀는 어둠 속에 사발과 단둘이 남았다. 어느새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 그러고는, 그가 말리려 했음에도, 그녀는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속삭였다. “번갯불에 비친 당신을 보고 싶어요.”
그러나 이베트는 촛불을 끈 뒤, 맨발로 그림자처럼 미끄러져 발코니로 되돌아가 있었다. 불행과 뒤엉킨 의심에 사로잡혀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녀가 선 자리는 두 사람의 머리 위, 테라스 지붕 쪽이었기에 눈으로 내려다볼 수는 없었다.
그녀에게 들리는 것이라곤 목소리의 웅얼거림뿐이었다. 그런데 제 심장이 너무도 세차게 뛰어, 박동 소리가 귀에 들릴 지경이었다. 위층의 창문 하나가 닫혔다. 그렇다면 세르비니가 방금 제 방으로 올라간 것이다. 어머니는 그 다른 남자와 단둘이 남은 셈이었다.
두 번째 번갯불이 하늘을 찢으며, 그녀가 속속들이 아는 풍경을 섬뜩하고 으스스한 번득임으로 순식간에 밝혀놓았다. 그녀는 커다란 강을 보았다. 녹은 납빛을 띤 강을. 꿈속의 환상 장면에 나올 법한 강이었다.
바로 그 순간 저 아래에서 목소리 하나가 몇 마디를 내뱉었다. “당신을 사랑하오!” 이어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이상한 전율이 그녀의 온몸을 훑고 지나갔고, 영혼이 끔찍한 괴로움에 몸서리쳤다. 무거운, 영원처럼 긴 정적이 세상 위에 내려앉았다. 그녀는 더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알 수 없는 어떤 무시무시한 것이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다. 또 한 줄기 번갯불이 허공을 밝히며 잠시 지평선을 비추더니, 뒤이어 또 다른 번갯불이, 그리고 또 다른 번갯불이 연이어 쳤다. 그리고 앞서 들었던 그 목소리가 더 크게 되풀이했다. “아! 얼마나 사랑하는지! 얼마나 사랑하는지!” 이베트는 그 목소리의 주인을 알아차렸다.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미지근한 빗방울 하나가 그녀의 이마 위로 떨어졌고, 나뭇잎 사이로 알아차릴 듯 말 듯 미세한 떨림이 달렸다. 이제 막 시작되는 빗방울의 잔 떨림이었다. 이윽고 멀리서 한 소리가 건너왔다. 가지 사이에 이는 바람 소리와도 같은 어지러운 소리였다. 대홍수가 땅 위로, 강 위로, 나무들 위로 천을 풀 듯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몇 분 만에 빗물이 그녀를 덮치고 감싸고 흠뻑 적셔 내렸다. 그녀는 움직이지 않았다. 오로지 테라스 아래에서 벌어지는 일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이 일어나 저마다 방으로 향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택 안의 문들이 닫혔다. 그러자 처녀는, 벌어지고 있는 일을 기어이 알아내고야 말겠다는 ― 자신을 미치게 하고 괴롭게 하는 ― 거역할 길 없는 욕구에 굴복하고 말았다. 살며시 아래층으로 미끄러져 내려가 바깥문을 가만히 열고, 성난 빗줄기 아래 잔디밭을 가로질러 달려가서는, 창문을 살피려고 나무 덤불에 몸을 숨겼다.
불이 켜진 창은 오직 하나, 어머니의 창뿐이었다. 그 환한 네모 안에 두 그림자가 돌연 나란히 떠올랐다. 그 순간 넋이 나간 그녀는 아무 생각도 없이,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도 모른 채, 있는 힘껏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 “엄마!” 누군가가 죽음의 위기에 놓인 이를 향해 경고하려 부르짖을 때처럼.
그 절박한 외침은 빗소리에 묻혀 사라졌다. 그러나 그 한 쌍은 떨어지고 흐트러졌다. 그림자 하나가 사라지고, 다른 하나는 정원의 어둠 속을 꿰뚫듯 살피며 무언가를 알아내려 애썼다.
발각될까 봐, 또 하필 그 순간 어머니와 마주칠까 봐 겁이 난 이베트는 서둘러 집 안으로 돌아왔다. 흠뻑 젖은 몸으로 층계를 뛰어 올라가, 방에 들어가 문을 걸어 잠갔다. 누구에게도 열어주지 않으리라 작정한 채.
몸에 달라붙어 물이 뚝뚝 떨어지는 옷을 벗을 생각도 않은 채, 그녀는 두 손을 맞잡고 무릎을 꿇었다. 그 괴로움 속에서 어떤 초자연의 가호를, 하늘의 신비로운 도움을 ― 눈물과 절망의 시간에 사람이 매달리는 그 알 수 없는 의지를 ― 간절히 빌었다.
큼직한 번갯불들이 한순간 방 안으로 납빛의 반영을 던져 넣었고, 그녀는 옷장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보았다. 젖어 헝클어진 머리칼을 드리운, 너무도 낯설어 스스로도 알아보지 못할 모습이었다. 그녀는 그대로 오래도록 거기 머물렀다. 폭풍우가 잦아드는 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한 채. 비가 그치자, 여전히 구름 낀 하늘에 빛이 번져 들었다. 풀과 젖은 잎들에서 풍겨오는 부드럽고 향기로운 서늘함이 열린 창으로 스며들었다.
이베트는 일어섰다.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는 채 젖고 찬 옷을 벗고 침대에 들었다. 굳은 눈으로 밝아오는 날을 바라보았다. 이내 다시 울음이 터졌다. 그리고 생각에 잠겼다.
어머니! 정부(情夫)라니! 이 무슨 수치인가! 그녀는 여자들이 ― 심지어 어머니들까지도 ― 지켜야 할 선을 넘었다가 마지막 페이지에서 체면을 되찾는 소설들을 숱하게 읽었기에, 자신이 그동안 읽어온 이야기와 비슷한 한 편의 드라마에 감싸여 있다는 사실에 그리 놀라지 않았다. 처음에 덮쳐왔던 슬픔의 격렬함도, 경악이라는 그 잔인한 충격도, 비슷한 상황들에 대한 흐릿한 기억 속에서 이미 한풀 꺾여 있었다. 그녀의 정신은 소설가들이 그려낸 온갖 비극적 사건 사이를 떠돌아다녔기에, 이 끔찍한 발견은 차츰 전날 저녁에 시작된 어느 연재소설의 당연한 속편처럼 여겨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속으로 되뇌었다. ‘내가 어머니를 구해드리리라.’ 이 영웅적인 결심에 거의 마음이 놓인 그녀는 당장에라도 헌신과 싸움에 나설 만큼 단단해진 기분을 맛보았다. 써야 할 방법들을 곰곰이 헤아려보았다. 딱 한 가지가 마음에 들었는데, 자신의 낭만적 기질과도 제법 잘 어울렸다. 그래서 후작부인과 치러야 할 그 대면을, 배우가 무대에 올릴 장면을 연습하듯 머릿속에서 거듭 되뇌어보았다.
해가 떠올랐다. 하인들이 집 안을 오가고 있었다. 하녀가 코코아를 들고 올라왔다. 이베트는 쟁반을 탁자에 놓게 하고 말했다.
“어머니께 전해드려라. 몸이 좋지 않으니 손님들이 떠날 때까지 자리에 누워 있겠다고. 간밤에 잠을 못 잤으니 방해받지 않았으면 한다고. 좀 쉬어보려 한다고.”
하녀는 뜻밖이라는 얼굴로, 양탄자 위에 걸레짝처럼 널브러진 젖은 옷을 쳐다보았다.
“아가씨, 외출하셨나 봐요?” 그녀가 물었다.
“그래, 머리를 식히려고 빗속을 잠시 걷다 왔다.”
하녀는 치마와 양말, 젖은 구두를 주워 들었다. 그러고는 꼼꼼한 조심성으로 그 물에 빠진 사람의 옷가지 같은 것들을 팔에 걸치고 나갔다. 이베트는 기다렸다. 어머니가 자신을 찾아오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후작부인이 들어왔다. 하녀의 첫 몇 마디에 침대에서 벌떡 뛰쳐나온 것이었다. 어둠 속에서 들려온 그 외침, “엄마!” ― 그 소리가 있은 뒤로 의심 하나가 그녀의 가슴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 그녀가 말했다.
이베트는 어머니를 바라보며 더듬거렸다. “저― 저는―” 그러다가 돌연 북받쳐 오르는 격한 감정에 눌려 목이 메었다.
후작부인은 놀라서 다시 물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냐?”
그러자 미리 궁리해 둔 계획과 문구를 까맣게 잊어버린 처녀는 두 손에 얼굴을 묻고 더듬거렸다.
“아! 엄마! 아! 엄마!”
오바르디 부인은 침대 곁에 선 채, 온전히 헤아리기엔 너무 흔들려 있었지만, 자신의 힘이 바로 거기에서 나오는 그 섬세한 직감으로 이미 거의 모든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이베트가 눈물에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하자, 지칠 대로 지친 어머니는 무서운 폭로가 다가오고 있음을 느끼고 거칠게 물었다.
“자, 대체 무슨 일인지 말해보려무나.”
이베트는 겨우 말을 내뱉었다. “아! 지난밤― 제가 보았어요― 엄마 방 창을요.”
후작부인은 안색이 몹시 창백해졌다. “그래서? 그게 어쨌다는 것이냐?”
딸은 여전히 흐느끼며 되뇌었다. “아! 엄마! 아! 엄마!”
오바르디 부인은 두려움과 거북함이 분노로 변해, 어깨를 으쓱하고는 돌아서 나가려 했다. “네가 정말 정신이 나간 모양이구나. 이 소동이 가라앉거든 내게 알려다오.”
그러나 처녀는 돌연 얼굴에서 두 손을 떼었다. 뺨으로 눈물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아뇨, 들어주세요. 드릴 말씀이 있어요, 들어주세요. 엄마, 약속해 주셔야 해요. 우리 둘이 함께 멀리, 저 먼 시골로 떠나요. 시골 사람들처럼 살아요. 우리가 어찌 되었는지 아무도 모르게. 그렇게 해주시겠지요, 엄마? 부탁드려요, 간절히 빌게요. 그렇게 해주시겠지요?”
후작부인은 얼이 빠진 채 방 한가운데 서 있었다. 그녀의 핏속에는 서민 특유의 성마른 피가 흘렀다. 수치심과 어머니로서의 염치가 두려움이라는 막연한 감정, 그리고 사랑을 위협받은 정염의 여인이 품을 법한 격노와 뒤섞였다. 그녀는 몸을 떨었다. 용서를 빌 태세가 되었다가도 어느새 난폭함에 제 몸을 내던질 태세가 되어 있었다.
“네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 수가 없구나.” 그녀가 말했다.
이베트가 대답했다.
“저는 보았어요, 엄마, 어젯밤에. 엄마가 어떻게 그러실 수가― 엄마가 아신다면― 우리 둘이 떠나요. 제가 엄마를 너무나 사랑해드릴 테니, 엄마도 잊으실 거예요―”
오바르디 부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들어라, 내 딸아. 네가 아직 모르는 일들이 있단다. 그러니 잊지 말아라― 잊지 말아― 다시는 그 일을 입에 올리지 말라고 내가 네게 금한다는 것을.”
그러나 처녀는 스스로 떠맡은 구원자의 역할을 불쑥 다시 집어 들고 맞섰다.
“아뇨, 엄마, 저는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에요. 저에게도 알 권리가 있어요. 우리 집에 평판 나쁜 자들이, 모험가들이 드나드는 줄은 저도 알아요. 그래서 사람들이 우리를 존중하지 않는다는 것도요. 그뿐이 아니에요. 자, 이제는 더는 안 돼요, 들으세요. 저는 싫어요. 우리는 떠나요. 엄마는 보석을 파실 거고, 필요하다면 우리는 일을 해서 정직한 여자로서 어딘가 아주 먼 곳에서 살 거예요. 그러다 제가 시집갈 수 있게 된다면, 그거야말로 더 바랄 게 없겠지요.”
그녀가 대꾸했다. “네가 미쳤구나. 그만 일어나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아침상에 내려오너라.”
“아뇨, 엄마. 제가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어요. 엄마도 제 뜻을 아실 거예요. 그 사람이 떠나든가, 제가 떠나든가예요. 그 사람과 저 중에 고르셔야 해요.”
그녀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앉은 채 목소리를 높였다. 무대 위 연극배우처럼 말하며, 스스로 꿈꾸어온 그 드라마를 끝내 연기하고 있었다. 자신이 맡은 사명을 해내려는 애씀 속에서 슬픔마저 거의 잊은 듯했다.
후작부인은 얼이 빠져 되뇌었다. “너는 미쳤구나―” 달리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이베트는 연극적인 기세로 대답했다. “아뇨, 엄마. 그 남자가 이 집을 떠나든가, 아니면 제가 떠날 거예요. 저는 굽히지 않을 테니까요.”
“그래, 어디로 갈 것이냐? 무엇을 할 것이냐?”
“몰라요.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저는 엄마가 정직한 여자이기만을 바랄 뿐이에요.”
몇 번이나 되풀이된 이 말은 후작부인 속에서 완연한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그녀가 소리쳤다.
“입 다물어라. 내게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건 용납하지 않겠다. 나는 어느 누구 못지않게 괜찮은 사람이야, 알겠느냐? 내가 어떤 종류의 삶을 살고 있는 건 사실이지. 그러나 나는 그것이 자랑스럽다. ‘정직한 여자들’이라는 이들도 나만 하지는 못해.”
이베트는 놀라 그녀를 바라보며 더듬거렸다. “아! 엄마!”
그러나 흥분에 휩쓸린 후작부인은 계속 이어갔다.
“그래, 나는 어떤 종류의 삶을 살고 있다. 그래서 어쨌다는 거냐? 그렇지 않았다면 너는 지금쯤 한때의 나처럼 부엌데기나 되어 하루 서른 수(sou)를 벌고 있었을 게다. 접시를 닦고 있었을 테고, 네 주인 마님이 너를 장 보러 내보냈겠지. 알겠느냐? 마님은 네가 꾸물거리면 쫓아냈을 테다. 지금 네가 꾸물거리는 것처럼 말이야. 내가― 내가 이런 삶을 살고 있기에 네가 이런 호사를 누리는 거다. 들어라. 사람이 그저 아이 보는 여인, 단돈 오십 프랑을 모아둔 가난한 처녀일 뿐일 때, 굶어 죽지 않으려면 처신할 줄을 알아야 한다. 우리에게 길은 두 갈래가 아니다. 두 갈래가 아니야. 알겠느냐? 하인살이를 하고 있을 때는. 관직으로 재산을 일굴 수도 없고, 주식 장난으로 일굴 수도 없지. 우리에게는 오직 한 길뿐이다. 오직 한 길뿐이야.”
그녀는 고해실의 참회자처럼 제 가슴을 쳤다.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흥분한 채, 침대 쪽으로 다가오며 말을 이어갔다. “오죽하랴. 예쁜 처녀는 살든지 고생하든지 해야 하는 법.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어!” 그러고는 앞서 하던 이야기로 돌아왔다. “네가 이른바 ‘정직한 여자들’이라 부르는 그 여자들이 무얼 그리 대단히 단념했다더냐. 그들이야말로 더 못된 자들이다. 그들을 몰아붙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살아갈 돈도 있고 즐길 돈도 있는데, 자기 발로 타락한 삶을 고르는 것이다. 진짜 나쁜 자들은 그들이란다.”
그녀는 넋이 나간 이베트의 침대 가까이 서 있었다. 이베트는 “살려줘요” 하고 외치며 달아나버리고만 싶었다. 매질 당한 아이처럼 소리 내어 울었다. 후작부인은 입을 다물고 딸을 바라보았다. 절망에 짓눌린 딸의 모습을 보자, 그녀 역시 슬픔과 후회, 애정과 연민의 통증이 한꺼번에 밀려와, 두 팔을 벌려 침대 위로 몸을 던지고는 흐느끼며 더듬거리기 시작했다.
“가엾은 내 딸, 가엾은 내 딸. 네가 알기나 한다면, 네가 얼마나 나를 아프게 하는지.” 두 사람은 한참을 함께 울었다.
이윽고 후작부인은, 슬픔이 오래 머물지 못하는 성품이었던지라, 조용히 일어나 나긋하게 말했다.
“자, 얘야. 어쩔 수 없는 일이란다. 이제 와 어쩌자는 거니? 아무것도 돌이킬 수 없단다. 인생이란 오는 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법이야.”
이베트는 계속해서 울었다. 충격이 너무 거칠고 너무 뜻밖이어서, 단박에 곱씹거나 추스를 수가 없었다.
어머니가 다시 말했다. “자, 일어나서 아침상에 내려오너라.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도록.”
처녀는 “싫어요” 하듯 고개를 저었으나 말은 나오지 않았다. 이윽고 흐느낌이 밴 느린 목소리로 말했다.
“아뇨, 엄마. 제가 드린 말씀 아시잖아요. 저는 결심을 바꾸지 않겠어요. 그 사람들이 떠날 때까지 방에서 나가지 않겠어요. 저는 그 누구의 얼굴도 다시 보고 싶지 않아요. 결단코요. 그 사람들이 다시 돌아온다면, 엄마는 저를 더 이상 보지 못하실 거예요.”
후작부인은 눈물을 훔쳤다. 감정에 지친 나머지 나직이 말했다.
“자, 다시 생각해보려무나. 사리를 차려야지.”
그리고 잠시 침묵 끝에 말했다.
“그래, 오늘 아침은 쉬는 편이 좋겠다. 오후에 다시 보러 오마.” 그러고는 딸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옷을 갈아입으러 자리를 떴다. 이미 마음이 가라앉은 뒤였다.
이베트는 어머니가 사라지기가 무섭게 일어나 문의 빗장을 걸었다. 혼자 있고 싶어서, 오롯이 혼자이고 싶어서였다. 그러고는 생각에 잠겼다. 열한 시쯤 하녀가 문을 두드리고 말했다. “후작부인께서, 아가씨께서 필요하신 것은 없는지, 아침으로는 무엇을 드시겠는지 여쭈라 하셨어요.”
이베트가 답했다. “배고프지 않다. 그저 방해만 받지 않았으면 한다.”
그러고는 병자인 양 자리에 누워 있었다. 세 시쯤 또다시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그녀가 물었다.
“누구세요?”
대답한 것은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나다, 얘야. 몸은 좀 어떤지 보려고 왔단다.”
그녀는 잠시 망설였다. 문을 열고는 이내 다시 자리에 누웠다. 후작부인은 다가와 회복기 환자에게 말을 건네듯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자, 좀 나아졌니? 달걀 하나쯤은 들어보지 않겠니?”
“아니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아요.”
오바르디 부인은 침대 가까이 앉았다. 두 사람은 말 한 마디 없었다. 딸이 이불 위에 두 손을 맥없이 얹어놓은 채 내내 조용히 있자, 이윽고 부인이 물었다.
“일어날 생각은 없는 게냐?”
이베트가 답했다. “일어나야지요, 이내.”
그러고는 엄숙하고 더딘 어조로 말했다. “많이 생각했어요, 엄마. 그래서― 이게 제 결심이에요. 지난 일은 지난 일로 해요. 더는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겠어요. 하지만 앞날은 달라져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저는 제가 해야 할 일을 알고 있어요. 자, 이 이야기는 여기까지예요.”
후작부인은 이야기가 끝났다고 여겼다. 그러나 조금씩 조바심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지나치다 싶었다. 이 어리숙한 계집아이가 이런 일쯤은 진작 알았어야 했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대꾸하지 않고 그저 되물었다.
“일어날 거냐?”
“네, 준비되었어요.”
그러자 어머니가 손수 하녀 노릇을 하여 딸에게 양말이며 코르셋이며 치마를 가져다주었다. 그러고는 딸에게 입을 맞추었다.
“저녁 식사 전에 잠깐 산책이라도 나가볼까?”
“네, 엄마.”
그렇게 두 사람은 강가를 따라 한 바퀴 거닐었다. 그저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만 주고받으면서.
제4장.
감정에서 철학으로
이튿날 아침 일찍, 이베트는 홀로 집을 나서 세르비니가 개미 이야기를 읽어 주던 자리로 걸어갔다. 그녀는 스스로에게 일렀다.
“이 자리를 뜨기 전에 반드시 결심을 세우리라.”
눈앞, 발치에서 강물은 큰 거품을 품고 소리 없이 소용돌이치며 빠르게 흘러갔다. 이미 자기 처지와 벗어날 방도를 두루 따져 본 뒤였다. 어머니가 제가 내건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지금의 생활 방식도, 드나드는 손님들도 죄다 버리고 함께 머나먼 땅으로 숨어 살기를 마다한다면, 어찌할 것인가?
혼자 도피할 수도 있었다. 허나 어디로, 어떻게? 무엇으로 먹고산단 말인가? 일을 해서? 무슨 일을? 일자리를 얻으려면 누구를 찾아가야 한단 말인가? 게다가 민중의 딸들, 일하는 여인들의 둔하고 초라한 삶은 어쩐지 체면 없고 자기답지 않았다. 소설 속 처녀들처럼 가정교사가 되는 꿈을 꾸어 보았다. 그 집안 아들이 저를 사랑하게 되어 마침내 혼례에 이르는 이야기. 허나 그런 결말을 얻으려면 번듯한 가문에서 나야 한다. 그래야 격분한 아비가 아들의 사랑을 훔쳤다고 몰아세울 때, 당당한 목소리로 이리 답할 수 있을 터이니.
“제 이름은 이베트 오바르디입니다.”
그럴 수는 없었다. 게다가 그런 수법이란 이미 닳고 닳아 진부하기 짝이 없었다.
수도원도 별반 나을 것이 없었다. 더구나 신앙의 소명이랄 것이 없었다. 발작처럼 스쳐 가는 신심이 있을 뿐. 지금의 저를 아내로 맞아 구원해 줄 사내도 없지 않은가! 사내에게서는 어떤 도움도 기대할 수 없었다. 빠져나갈 구멍도, 뚜렷한 방편도 없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무언가 기세 좋고 위대하며 강건한 일, 본보기로 남을 만한 일을 해내고 싶었다. 그래서 죽음을 택했다.
그녀는 돌연, 그러나 담담하게 이 길에 마음을 굳혔다. 여행길이라도 떠나듯, 깊이 헤아리지도, 죽음을 똑바로 들여다보지도 않은 채. 그것이 다시 시작 없는 끝이며, 돌아옴 없는 떠남이며, 이 땅과 이 삶에 고하는 영원한 작별임을 깨닫지도 못한 채로.
젊고 들뜬 영혼 특유의 가벼움으로 그녀는 곧바로 이 극단의 방편에 마음을 정하고, 어떤 수단을 쓸지 궁리하기 시작했다. 허나 어느 것이나 고통스럽고 위태로웠으며, 거친 행동을 요구하는지라 그녀를 물러서게 했다.
단도와 권총은 이내 접었다. 잘못하면 상처만 남기거나, 눈을 멀게 하거나, 얼굴을 흉하게 만들 수 있고, 숙련되고 흔들림 없는 손이 필요한 까닭이다. 밧줄도 물리쳤다. 너무 흔한 데다 가난한 자의 자살 방편이요, 우습고 흉하기까지 했으니. 물도 아니었다 — 헤엄을 칠 줄 알았기에. 남은 것은 독 — 그런데 어떤 독? 거의 모든 독이 고통과 구토를 불러온다. 그 어느 쪽도 그녀는 원치 않았다.
그때 클로로포름이 떠올랐다. 언젠가 어느 신문에서 젊은 여인이 이 방법으로 숨을 끊은 사연을 읽은 적이 있었다. 마음을 굳히자마자 이내 일종의 기쁨이, 내면의 자부가, 의연한 감정이 차올랐다. 사람들은 자기가 어떤 사람이며, 어떤 값어치를 지녔는지 보게 되리라.
부지발로 돌아온 그녀는 약제사에게 들러, 이가 아프다며 클로로포름을 조금 청했다. 그녀를 알아보는 그 사내는 마취제가 든 작은 유리병 하나를 내주었다.
이어 걸어서 크루아시로 향했고, 거기서 두 번째 독약 병을 구했다. 샤투에서 세 번째를, 뤼에유에서 네 번째를 얻은 뒤, 늦은 아침 식사 시간에 맞춰 집에 돌아왔다.
긴 산책 뒤라 몹시 시장했던 그녀는, 몸을 실컷 움직인 이의 그 흐뭇한 식욕으로 왕성하게 먹었다.
딸이 그토록 잘 먹는 모습이 기쁘고, 이제는 저도 마음이 놓인 어머니는 식탁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우리 친구들이 모두 일요일을 우리 집에서 보낼 거란다. 공작님과 기사님, 벨비뉴 씨를 초대해 두었어.”
이베트는 얼굴빛이 살짝 창백해졌으나 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곧 집을 나와 기차역에 닿았고, 파리행 표를 끊었다. 오후 내내 약제사를 이 집 저 집 찾아다니며, 가게마다 클로로포름을 몇 방울씩 사들였다. 저녁 무렵, 주머니에 작은 병을 가득 담고 돌아왔다.
이튿날도 같은 방법을 되풀이하다가, 한 번에 사분의 일 리터를 선뜻 내주는 약종상을 우연히 만났다. 토요일에는 외출하지 않았다. 하늘이 낮게 드리우고 후덥지근한 날이었던 터라, 그녀는 하루 내내 테라스의 긴 등나무 안락의자에 몸을 묻고 있었다.
그녀는 거의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마음은 단단하고 평온했다. 이튿날 아침, 제게 썩 잘 어울리는 푸른 옷을 차려입었다. 곱게 보이고 싶었다. 그러다 거울 앞에서 제 모습을 바라보다가 문득 중얼거렸다.
“내일이면 나는 죽어 있으리라.” 기묘한 떨림이 온몸을 스쳤다. “죽는다! 나는 더는 말하지 않고, 더는 생각하지도 않으며, 아무도 나를 보지 않고, 나 또한 다시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리라.”
그녀는 제 얼굴을 처음 보는 듯이 찬찬히 뜯어보았다. 특히 두 눈을 살폈다. 그 안에서 여태 몰랐던 숱한 것들, 용모에 깃든 은밀한 성정을 발견했다. 맞은편에 낯선 이가, 새로 사귄 벗 하나가 서 있기라도 한 듯이, 그녀는 저를 바라보며 놀라워했다.
그녀는 스스로에게 일렀다. “저기 거울 속에 있는 것이 나로구나. 제 모습을 들여다보는 일이 이토록 낯설다니. 허나 거울이 없다면 우리는 결코 우리 자신을 알지 못하리라. 남들만이 우리 생김새를 알고, 정작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는 법.”
그녀는 숱 많은 머리카락을 굵게 땋아 가슴께로 늘어뜨리고, 제 몸짓 하나하나, 자세와 움직임 하나하나를 눈으로 좇았다. ‘참으로 어여쁘구나!’ 그녀는 생각했다. ‘내일이면 저 침대 위에 죽어 누워 있겠지.’ 그러며 침대를 바라보았다. 시트처럼 하얗게, 그 위에 길게 뻗어 누운 제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죽는다! 일주일 뒤면 먼지 한 줌, 흙으로 돌아간 재에 지나지 않으리라! 지독한 괴로움이 가슴을 짓눌렀다. 환한 햇살이 들판 위로 폭포처럼 쏟아지고, 부드러운 아침 공기가 창문으로 밀려들었다.
그녀는 자리에 앉아 그 일을 곰곰 헤아렸다. 죽음이라니! 세상이 저로부터 사라져 버리는 것만 같았다. 허나 아니었다. 세상은 조금도 변치 않을 것을. 그녀의 침실조차도. 그래, 이 방도 꼭 그대로 남으리라. 같은 침대, 같은 의자, 화장대 위 물건이 제자리에 놓인 채, 오직 그녀만이 영영 사라질 뿐이었다. 그리고 아무도 슬퍼하지 않으리라 — 어쩌면 어머니만은 예외겠지만.
사람들은 이리 말하리라. “그 귀여운 것, 이베트 말이야. 참 어여뻤지!” 그뿐일 게다. 그녀는 안락의자 팔걸이에 얹힌 제 팔을 바라보며 다시금 되뇌었다. 재는 재로, 흙은 흙으로. 거대한 전율이 또 한 번 온몸을 휩쓸었다. 들판과 공기와 햇빛과 생명 그 자체의 일부가 된 듯한 지금, 온 땅이 함께 지워지지 않고서 어찌 자기 혼자 사라질 수 있단 말인가.
정원에서는 웃음소리가 터지고, 목소리와 부름이 요란하게 오갔다. 시골 별장 파티 특유의 들뜬 흥이 일었다. 그 가운데서 벨비뉴 씨의 쩌렁쩌렁한 곡조가 들려왔다. 이러한 노래였다.
“그대 창 아래 나 와 있으니 / 부디 얼굴 한번 보여주오.” 미처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을 내다보았다. 모두가 박수를 쳤다. 다섯 사람이 다 와 있었고, 낯선 신사 둘이 끼어 있었다.
그녀는 잔뜩 언짢아져 획 몸을 물렸다. 저 사내들이 어머니 집을 마치 공공장소라도 되는 양 흥청거리러 찾아왔구나 싶었다.
아침 식사를 알리는 종이 울렸다. ‘죽음이 어떤 것인지 저들에게 똑똑히 보여 주리라.’ 그녀는 다짐했다.
그녀는 단단한 걸음으로 층계를 내려갔다. 사자들이 기다리는 원형 경기장으로 들어서던 기독교 순교자의 결의가 그 걸음에 깃들어 있었다.
그녀는 한 사람 한 사람 손을 잡으며, 상냥하면서도 어딘지 도도한 태도로 미소를 지었다. 세르비니가 물었다.
“아가씨, 오늘은 덜 뾰로통하신가?”
그녀는 근엄하고도 기이한 어조로 답했다. “오늘 저는 미친 짓거리를 할 참이에요. 오늘은 파리 기분이거든요. 단단히 조심들 하세요!”
그러고는 벨비뉴 씨를 돌아보며 말했다.
“당신이 저를 호위해 주세요, 귀여운 말부아지 씨. 식사 뒤에는 여러분 모두를 마를리 축제에 데려갈 참이에요.”
과연 마를리에서는 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녀에게 새로 온 손님 둘을 소개했다. 타민 백작과 브리크토 후작이었다.
식사 내내 그녀는 더는 말이 없었다. 오후에는 한층 흥겹게 굴려고 힘을 그러모았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해서, 뒷날 사람들이 더욱 놀라 이리 말하게끔. “이런 일이 있을 줄 누가 알았겠나? 그리도 행복해 보였고, 그리도 만족스러워 보였는데! 그 어린 머릿속에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단 말인가?”
그녀는 저녁, 모두가 테라스에 모여 있을 그 정해진 시각을 생각지 않으려 애썼다. 기운을 북돋우려 견딜 만큼 포도주를 들이켰고, 작은 잔으로 브랜디까지 두 잔 더 들었다. 식탁을 떠날 즈음 얼굴은 발갛게 달아올랐고, 조금 얼떨떨했으며, 몸도 마음도 후끈거렸다. 이제는 제 안이 단단해진 듯,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자, 출발합시다!” 그녀가 외쳤다. 벨비뉴 씨의 팔을 끼고 앞장서며 걸음의 속도를 정해 주었다. “이봐요, 세르비니, 여러분이 내 부대(部隊)랍니다. 당신은 부사관으로 지명하지요. 대열 밖, 오른편에 붙어 가세요. 앞에는 외인부대를 세우고요 — 외국 손님 두 분, 공작님과 기사님 말이에요. 뒤에는 오늘 갓 입대한 신병 두 분. 자, 가요!”
그들은 출발했다. 세르비니는 나팔 소리를 흉내 내기 시작했고, 새로 온 손님 둘은 북 치는 시늉을 했다. 벨비뉴 씨는 조금 난처한 얼굴로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이베트 양, 제발 분별 있게 굴어 주세요. 이러시면 명성에 흠이 갑니다.”
그녀가 답했다. “흠이 가는 쪽은 저를 끼고 다니는 당신이지요, 레진 씨. 저로 말하면 조금도 개의치 않아요. 내일이면 다 지난 일일 테니. 그러니 더욱 딱하신 건 당신. 저 같은 여자아이와는 아예 함께 나다니지 말았어야죠.”
그들은 길 가는 사람들의 어안을 벙벙하게 하며 부지발 거리를 가로질러 갔다. 모두가 고개를 돌렸다. 시민들이 문간으로 나왔고, 뤼에유와 마를리 사이를 오가는 작은 철도의 승객들은 그들을 향해 야유를 퍼부었다. 승강장의 사내들이 소리쳤다.
“저것들, 강물에 처넣어라!”
이베트는 벨비뉴의 팔을 포로라도 끌고 가듯 움켜쥔 채 군인처럼 행진했다. 웃지도 않았다. 얼굴 위에는 창백한 엄숙함이, 불길한 고요가 서려 있었다. 세르비니는 구령을 붙일 때만 잠깐 나팔 소리를 멈추었다. 공작과 기사는 이 모든 것이 퍽 익살스럽고 멋진 놀이라며 신이 났다. 새로 입대한 신병 둘은 줄기차게 북을 두드려 댔다.
그들이 축제 마당에 이르자 한바탕 소동이 일었다. 처녀들은 박수를 쳤고, 젊은이들은 야유를 퍼부었으며, 아내를 팔에 건 덩치 큰 신사 하나는 부럽다는 듯이 내뱉었다. “저 사람들은 흥이 넘쳐 좋겠소이다.”
이베트는 목마 회전대를 보자 벨비뉴에게 제 오른쪽에 오르라 강요했다. 부대원들은 나머지 빙빙 도는 짐승들의 등에 올라탔다. 한 판이 끝나도 그녀는 내리려 하지 않았고, 호위병을 몇 번이고 그 아이들 놀이용 짐승의 등에 다시 태웠다. 구경꾼들은 환호성을 올리며 농지거리를 퍼부었다. 목마에서 내리는 벨비뉴 씨의 얼굴은 파리하게 질려, 그는 어질어질해했다.
이어 그녀는 점포 사이를 누비기 시작했다. 구경꾼들이 빽빽이 모인 가운데 사내들을 모조리 저울 위에 올려 몸무게를 재게 했다. 손에 들고 다녀야 하는 우스꽝스러운 장난감을 사게 시켰다. 공작과 기사는 장난이 도를 넘는다고 여기기 시작했다. 세르비니와 북잡이 둘만이 여전히 기세가 꺾이지 않은 듯했다.
마침내 축제 터의 끝자락에 이르렀다. 그녀는 기이한 눈길로, 수줍으면서도 짓궂은 눈빛으로 제 일행을 훑어보았다. 별난 생각 하나가 머릿속을 스쳤다. 그녀는 그들을 강둑에 세워 늘어놓았다.
“이 중에 저를 가장 사랑하시는 분이 강으로 뛰어드세요.” 그녀가 말했다.
아무도 뛰어들지 않았다. 그들 뒤로 군중이 모여들었다. 흰 앞치마를 두른 아낙들이 넋 나간 얼굴로 지켜보았고, 붉은 승마바지 차림의 기병 둘은 크게 웃어젖혔다.
그녀가 다시 말했다. “이 중에 제가 원하는 대로 강물에 뛰어들 수 있는 분이 한 분도 안 계신가요?”
세르비니가 중얼거렸다. “여기 있소이다.” 그러고는 두 발을 모아 강물에 몸을 던졌다. 그의 도약이 일으킨 물보라가 이베트의 발치까지 튀었다. 군중 사이에서 놀람과 환희의 술렁임이 일었다.
그러자 그녀는 바닥에서 작은 나뭇조각 하나를 주워 물 위로 던지며 외쳤다. “물어 오세요.”
젊은 사내는 헤엄을 치기 시작했다. 떠 가는 나뭇조각을 개처럼 입에 물어 강둑으로 가져왔다. 그러고는 둑으로 기어 올라와, 한쪽 무릎을 꿇고 그것을 그녀에게 바쳤다.
이베트가 그것을 받았다. “잘생기셨군요.” 그러고는 다정한 손길로 그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덩치 큰 한 아낙이 분개해 소리쳤다. “세상에, 이런 일이 다 있는가!”
다른 아낙은 말했다. “저렇게 노는 것이 재미있단 말인가!”
한 사내는 이렇게 내뱉었다. “나는 저따위 여자아이 때문에 강물에 뛰어들지는 않는다.”
그녀는 다시 벨비뉴의 팔을 잡더니 그 얼굴에 대고 외쳤다. “당신은 멍청이예요, 친구. 뭘 놓쳤는지 모르시지요.”
이제 그들은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녀는 오가는 사람들에게 노기 어린 눈길을 던졌다. “어찌 이리도 멍청해 보이는지.” 그녀가 말했다. 그러고는 눈을 들어 동행의 얼굴을 바라보며 덧붙였다. “당신도, 저들과 똑같군요.”
벨비뉴 씨는 고개를 숙였다. 돌아보니 공작과 기사는 이미 자취를 감춘 뒤였다. 낙담하여 흠뻑 젖은 세르비니는 나팔을 멈추고, 북 치기도 그친 지친 두 젊은이 곁에서 어두운 얼굴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메마르게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다들 지긋지긋하신 모양이군요. 그래도 이게 ‘즐겁게 논다’는 게 아니던가요? 바로 그것 때문에 오신 것 아닌가요. 저는 여러분이 치르신 값만큼 몫을 드렸어요.”
그러고는 더는 말없이 걸어갔다. 그러다 문득, 벨비뉴는 그녀가 울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는 어리둥절해져 물었다.
“대체 어찌된 일입니까?”
그녀가 중얼거렸다. “내버려 두세요. 당신과 상관없는 일이에요.”
허나 그는 어리석게도 캐물었다. “오, 아가씨, 어디 말씀해 보세요, 무슨 일이시오? 누가 아가씨를 성나게 했소이까?”
그녀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되풀이했다. “좀 가만 계실 수 없어요?”
그러다 별안간, 가슴을 가득 적시는 절망의 슬픔을 더는 누를 수 없게 되자, 그녀는 너무나 격렬하게 흐느끼기 시작해 더는 걸을 수조차 없었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숨을 헐떡이며, 제 절망의 격렬함에 목이 메었다.
벨비뉴는 그녀 곁에 우두커니 서서 당혹한 얼굴로 되뇌었다. “이게 도무지 무슨 일인지 모르겠네.”
그러자 세르비니가 성큼 다가섰다. “집으로 돌아갑시다, 아가씨. 거리에서 우시는 모습을 남들이 봐서야 되겠소? 어찌 이런 바보짓을 벌이신단 말이오, 결국엔 이리 슬퍼지실 것을.”
그러고는 그녀의 팔을 붙들고 앞장서 이끌었다. 별장 철문에 닿자마자 그녀는 달음박질하기 시작해 정원을 가로지르고 층계를 올라, 제 방에 틀어박혔다. 저녁 식사 시간이 되어서야 비로소 다시 모습을 드러냈는데, 매우 창백하고 엄숙한 얼굴이었다. 세르비니는 시골 가겟방에서 노동자풍 옷차림을 사 입고 — 벨벳 바지에 꽃무늬 조끼, 작업복 상의까지 — 그 고장 사투리를 흉내 내고 있었다. 이베트는 저들이 어서 식사를 끝내기만을 조바심내며 기다렸다. 용기가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진 탓이다. 커피가 나오자마자 그녀는 다시 제 방으로 올라갔다.
창 아래로 흥겨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사는 야릇한 농담, 상스럽고 서투른 외국풍 재담을 늘어놓고 있었다. 그녀는 절망에 잠겨 귀 기울였다. 세르비니는 살짝 취기가 오른 채 천한 일꾼을 흉내 내며 후작부인을 ‘마누라’라고 불러 대고 있었다. 그러다 불쑥 사발에게 말을 건넸다. “어떻소, 대장 양반?” 그 한마디에 좌중이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이베트는 마음을 정했다. 그녀는 먼저 종이 한 장을 집어 이렇게 썼다.
부지발, 일요일 저녁 아홉 시.
저는 첩이 되지 않으려 목숨을 끊습니다.
이베트.
그러고는 추신을 덧붙였다.
사랑하는 어머니, 용서하세요. 안녕히.
그녀는 봉투를 봉하고, 받는 이를 오바르디 후작부인이라 적었다.
그러고는 긴 안락의자를 창가로 끌어당기고, 손 닿는 자리에 작은 탁자를 두었으며, 그 위에 솜뭉치 한 움큼과 나란히 큼직한 클로로포름 병을 올려놓았다.
창문까지 기어오른 커다란 장미 덤불이 꽃을 가득 피운 채, 밤 속으로 부드럽고 은은한 향을 가는 숨결처럼 내뿜고 있었다. 그녀는 선 자리에서 잠시 그 향을 들이마셨다. 초승에서 갓 벗어난 상현달이 어두운 하늘을 떠가고 있었다. 왼편이 조금 이지러져 있었고, 간간이 엷은 안개가 달 위로 너울처럼 걸쳤다.
이베트는 생각했다. ‘이제 나는 죽는다!’ 흐느낌으로 부푼 가슴이 터질 듯해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누군가에게 자비를 청하고 싶은, 누군가의 손에 구원받고 싶은,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싶은 갈망이 그녀 안에 일었다.
세르비니의 목소리가 그녀를 일깨웠다. 그는 외설스러운 이야기를 풀어놓고 있었고, 웃음소리가 번번이 그 이야기를 끊어 놓았다. 누구보다 후작부인이 가장 큰 소리로 웃어 댔다.
“저런 이야기라면 저이만 한 사람이 따로 없지요.”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이베트는 병을 들어 마개를 뽑고, 솜 위에 액체를 조금 부었다. 강하고 달큰한, 기이한 냄새가 피어올랐다. 솜뭉치를 입술로 가져가자 증기가 목구멍으로 스며들어 기침이 터져 나왔다.
그녀는 입을 꼭 다문 채 숨을 들이켜기 시작했다. 이 치명적인 증기를 길게, 길게 들이마셨다. 두 눈을 감고 머릿속의 모든 생각을 애써 눌러 없애면서. 다시는 무엇도 헤아리지 않으려, 다시는 무엇도 알지 않으려.
처음에는 가슴이 넓어지고 점점 부풀어 오르는 듯했다. 슬픔에 짓눌려 무겁기만 하던 영혼이 가벼워지고 또 가벼워져, 그녀를 짓누르던 무게가 들려 올라가 어디론가 실려 가는 것만 같았다. 생기 있고 기분 좋은 무언가가 팔다리 끝까지, 발끝과 손끝까지 스며들어 살 속으로 들어갔다. 몽환적 도취, 부드러운 열병이었다. 그녀는 솜뭉치가 벌써 말라 있음을 알아차리고, 여태 죽지 않았다는 사실에 놀랐다. 감각은 전보다 예민해지고, 섬세해지고, 날카로워진 듯했다. 테라스에서 흘러오는 아주 나직한 속삭임까지 귀에 들어왔다. 크라발로프 공작은 결투에서 오스트리아 장군 하나를 죽인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었다.
이어 저 멀리 들판 쪽에서 밤의 소리가 들려왔다. 이따금 짖어 대는 개, 개구리의 짧은 울음, 거의 알아챌 수 없을 만큼 희미한 나뭇잎의 사각거림까지.
그녀는 다시 병을 들어 작은 솜뭉치를 한 번 더 적셨다. 그리고 다시 그 증기를 들이켜기 시작했다. 처음 몇 순간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다가, 이내 앞서 맛보았던 그 부드럽고 달래는 듯한 편안함이 그녀를 감싸 안았다.
그녀는 솜에 두 번 더 클로로포름을 부었다. 이제는 그 육신과 정신을 아우르는 감각을, 영혼을 아득히 흐트러뜨리는 몽롱한 마비감을 탐하기에 이른 것이다.
어느새 뼈도, 살도, 두 다리도, 두 팔도 없어진 것만 같았다. 약기운이 이 모든 것을 스르르, 그녀가 알아채지 못하는 사이에 거두어 가 버린 것이다. 클로로포름이 육신을 거두고 남긴 것은 오직 정신뿐이었다 — 일찍이 느껴 본 적 없을 만큼 또렷하고 기민하며, 넓고 자유로운 정신.
그녀는 잊고 있던 숱한 일들을 떠올렸다. 어린 시절의 자잘한 장면, 저를 기쁘게 해 주었던 소소한 것들을. 별안간 잠에서 깨어난 듯 민첩해진 그녀의 정신은 수천 가지 생각 사이로 뛰어다니고, 숱한 모험을 가로지르고, 과거를 헤매고, 앞날에 바라는 일들 속에서 길을 잃었다. 그 가볍고 근심 없는 생각 속에는 관능의 매혹이 깃들어 있었다. 그녀는 이렇듯 꿈꾸는 가운데 신성한 쾌락을 맛보았다.
여전히 그녀는 목소리를 듣고 있었으나, 이제는 낱말 하나하나를 알아듣지 못했다. 그 소리들은 전혀 다른 뜻을 지닌 듯이 들렸다. 그녀는 기이하고 변화무쌍한 선경(仙境) 속에 있었다.
그녀는 어느 큰 배 위에 올라 있었다. 배는 온통 꽃으로 뒤덮인 아름다운 나라를 지나 흘러갔다. 물가에는 사람들이 보였고, 그들은 큰 목소리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영문도 모른 채 뭍에 올라 있었고, 공작의 옷차림을 한 세르비니가 그녀를 데리러 와서 투우장으로 이끌었다.
거리는 오가는 사람들로 가득했고, 그들은 이런저런 말을 주고받고 있었다. 그녀는 그 대화를 들으면서도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그 사람들을 원래부터 알아 온 것처럼. 몽환적 도취 너머로, 그녀는 여전히 테라스에서 웃고 떠들고 있는 어머니의 벗들 목소리를 듣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모든 것이 흐릿해졌다. 이윽고 그녀는 달큰하게 저린 몸으로 깨어났다. 방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는 아직 죽지 않았다. 허나 참으로 평온했고, 몸은 이토록 편안함에 잠겨 있어, 서둘러 끝장을 보고 싶지 않았다. 도리어 이 달콤한 나른함이 영원히 이어지기를 바랐다.
그녀는 천천히 숨을 쉬며, 맞은편 나무들 위로 떠 있는 달을 바라보았다. 정신 안에서 무언가가 달라져 있었다. 조금 전까지 품고 있던 생각을 더는 품지 않았다. 몸과 영혼을 잠재운 클로로포름이 그 슬픔을 가라앉히고 죽음을 향한 욕망마저 달래어 잠재워 놓은 것이다.
살면 안 될 것이 무언가? 사랑받으면 안 될 것이 무언가? 행복한 삶을 누리면 안 될 것이 무언가? 이제는 죄다 가능해 보였고, 쉽고도 분명해 보였다. 삶은 달콤했고, 매혹적이었다. 허나 그 꿈을 조금 더 이어 가고 싶어 그녀는 몽환의 액체를 솜 위에 더 부었고, 다시 들이켜기 시작했다 — 지나치게 빨려 들지 않도록, 죽지 않도록, 사이사이 숨을 끊어 가며.
달을 바라보자 그 안에 얼굴 하나가, 여인의 얼굴이 보였다. 약이 지핀 환상의 도취 속에서, 그녀는 바깥 풍경을 가볍게 얕보기 시작했다. 그 얼굴은 하늘에서 흔들거리더니 이윽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귀에 익은 목소리로 사랑의 할렐루야를 읊조리고 있었다.
그것은 들어와 피아노 앞에 앉은 후작부인이었다.
이제 이베트에게 날개가 돋쳤다. 그녀는 맑은 밤 속을, 숲과 시냇물 위를 날고 있었다. 환희에 차 두 날개를 폈다 접었다 하며, 애무처럼 떠받들어 주는 바람에 몸을 맡겼다. 피부에 입 맞추는 공기를 가르며 너무나 빨리, 너무나 빨리 나아갔다. 아래를 내려다볼 겨를조차 없었다. 그러다 어느새 연못가에 앉아, 손에 낚싯줄을 쥐고 있었다. 낚시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언가가 낚싯줄을 잡아당겼다. 끌어올려 보니, 언젠가 갖고 싶어 하던 그 훌륭한 진주 목걸이가 딸려 올라왔다. 그녀는 조금도 놀라지 않은 채, 곁에 와 있는 세르비니를 바라보았다 — 언제 어떻게 왔는지도 모르는 채로. 그 또한 낚시를 하고 있었고, 강에서 나무로 만든 장난감 목마를 건져 올렸다.
그때 그녀는 다시 잠에서 깨어나는 느낌이 들었다. 아래층에서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났다. 어머니가 말했다.
“촛불을 끄렴.” 그러자 세르비니의 목소리가 맑고 장난기 어린 어조로 울려 퍼졌다.
“촛불을 끄세요, 이베트 아가씨.”
그러자 좌중이 일제히 합창으로 받아쳤다. “이베트 아가씨, 촛불을 끄세요!”
그녀는 솜 위에 다시 클로로포름을 부었다. 허나 이제 죽고 싶지 않았던 터라, 얼굴에서 조금 떨어진 자리에 솜을 두고 바깥 공기를 들이마시도록 했다. 그럼에도 방 안은 이미 그 숨 막히는 마취제 냄새로 자욱했다. 누군가 올라올 것임을 짐작한 그녀는, 죽은 이의 자세로 몸을 알맞게 두고 기다렸다.
후작부인이 말했다. “아무래도 불안해요! 저 바보 같은 아이가 탁자 위에 불을 켜 둔 채 잠들어 버렸나 봐요. 클레망스를 보내 불도 끄게 하고, 활짝 열린 발코니 창문도 닫게 해야겠어요.”
이윽고 하녀가 문을 두드리며 불렀다. “아가씨, 아가씨!” 잠시 침묵이 이어진 뒤 하녀는 다시 말을 보탰다. “아가씨, 후작부인께서 촛불을 끄시고 창도 닫으시라 청하십니다.”
클레망스는 잠깐 기다리다가 좀 더 세게 문을 두드리며 외쳤다.
“아가씨, 아가씨!”
이베트가 답이 없자 하녀는 물러나 후작부인에게 고했다.
“아가씨께서 잠이 드신 모양입니다. 문이 안에서 잠겨 있고, 깨워도 일어나시지 않습니다.”
오바르디 부인이 중얼거렸다.
“저대로 두어서는 안 되지요.”
그러자 세르비니의 제안에 따라, 모두가 창 아래로 모여 한목소리로 외치기 시작했다.
“만세! 만세! 이베트 아가씨!”
그 떠들썩한 소리는 달 아래 투명한 공기를 타고, 잠든 들판 위 고요한 밤하늘로 퍼져 올랐다. 이윽고 저 멀리 사라지는 기차 소리처럼, 그들의 외침도 차츰 멀어져 사위어 갔다.
이베트가 여전히 답이 없자 후작부인이 말했다. “아무 일 없기만을 바랄 뿐이에요. 점점 무서워지는군요.”
그러자 세르비니는 벽을 타고 자라 오른 큼직한 장미 덤불에서 붉은 장미와 아직 피지 않은 봉오리를 꺾어, 창 너머 방 안으로 던져 넣기 시작했다.
첫 장미 한 송이가 곁에 떨어지자 이베트는 움찔하여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다른 꽃은 옷자락 위로, 또 다른 꽃은 머리카락 위로 떨어졌다. 어떤 것들은 머리 위를 넘어 침대로 쏟아져, 침대에 꽃의 비를 퍼부었다.
후작부인이 목이 메인 목소리로 외쳤다. “얘, 이베트야, 답해 보렴!”
그러자 세르비니가 단언했다. “아무래도 심상치 않습니다. 제가 발코니를 타고 올라가 보지요.”
그러나 기사가 발끈했다.
“잠깐, 그 일은 제게 맡기시오.” 그가 말했다. “간청이오. 밀회를 청할 더없는 구실이요, 더없는 기회가 아니고 무엇이겠소.”
나머지 일행은 처녀가 장난을 치고 있다고 여겨 외쳤다. “그건 안 되오! 저분이 올라가게 둘 수는 없지요!”
허나 마음이 어지러워진 후작부인이 되풀이했다. “그래도 누군가는 올라가 봐야 해요.”
공작이 과장된 몸짓을 하며 외쳤다.
“아가씨가 공작 편을 드는구나. 우리는 배신당했다!”
“동전을 던져 누가 올라갈지 정합시다.” 기사가 말했다. 그는 주머니에서 5프랑짜리 동전을 꺼내 공작부터 시작했다.
“뒷면.” 그가 말했다. 앞면이었다.
이번에는 공작이 동전을 튕겨 올리며 사발에게 말했다. “부르시오, 선생.”
사발은 “앞면”이라 불렀다. 뒷면이었다.
공작은 나머지 사람들에게도 차례로 기회를 돌렸으나, 모두 졌다.
맞은편에 서 있던 세르비니가 특유의 무례한 어조로 외쳤다. “파르블뢰! 이 사람, 속임수를 쓰고 있네!”
러시아인은 한 손을 가슴에 얹고 금화를 경쟁자 쪽으로 내밀며 말했다. “친애하는 공작, 그대가 직접 던지시지요.”
세르비니가 그것을 받아 들고 공중으로 튕기며 말했다. “앞면.” 뒷면이었다.
그는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고는 발코니 기둥을 가리키며 말했다. “올라가시지요, 공작.” 공작은 곤혹스러운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무얼 찾으시오?” 기사가 물었다.
“음 — 그러니까 — 사다리가 — 하나쯤 — 있었으면 하오만.” 일동이 웃음을 터뜨렸다.
사발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우리가 도와드리지요.”
그는 헤라클레스와도 같은 억센 팔로 공작을 번쩍 들어 올리며 말했다.
“자, 저 발코니로 올라가시오.”
공작은 이내 발코니 난간을 움켜쥐었고, 사발이 손을 놓자 허공에 매달린 채 두 다리를 허우적거리며 흔들렸다.
이때 세르비니는 디딜 곳을 찾아 허우적대는 공작의 두 다리를 보자, 있는 힘껏 아래로 잡아끌었다. 공작의 두 손이 난간을 놓쳤고, 그는 마침 도우러 오던 벨비뉴 씨의 위로 뭉쳐 떨어졌다. “다음은 누구 차례요?” 세르비니가 물었다. 아무도 그 영예를 달라 하지 않았다.
“자, 벨비뉴, 용기를 내보게!”
“고맙네, 친구. 나는 내 뼈다귀를 생각하는 중이라네.”
“그럼, 기사, 담을 넘는 데는 이골이 나셨을 텐데요.”
“친애하는 공작, 그 자리는 그대에게 양보하겠소이다.”
“하, 하, 그 말을 기다렸소이다.”
세르비니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기둥을 겨눴다. 그리고 도약 한 번에 발코니에 매달리더니, 체조 선수처럼 몸을 끌어올려 난간을 타고 넘었다.
이 광경을 우러러보던 구경꾼들이 일제히 박수를 쳤다. 허나 그는 이내 다시 모습을 드러내며 외쳤다.
“빨리, 빨리 오시오! 이베트가 정신을 잃었소.” 후작부인이 크게 비명을 지르며 층계로 달려갔다.
처녀는 눈을 감은 채 죽은 척하고 있었다. 얼이 나간 어머니가 방으로 뛰어 들어와 딸 위로 몸을 내던졌다.
“얘가 어찌된 일인지 말씀해 주세요, 도대체 어찌된 노릇이에요!”
세르비니는 방바닥에 떨어진 클로로포름 병을 주워 들었다.
“약을 썼군요.” 그가 말했다.
그는 그녀의 가슴에 귀를 대보고는 이어 말했다.
“허나 죽지는 않았습니다. 살려낼 수 있어요. 암모니아가 있는지요?”
하녀가 어리둥절한 낯으로 되물었다. “무엇 말씀이십니까, 나리?”
“맡는 소금 말이오.”
“네, 나리.” “지금 곧 가져오시오. 문은 열어 두어 바람이 통하게 하고.”
후작부인은 무릎을 꿇은 채 흐느꼈다. “이베트! 이베트야, 내 딸아, 내 딸아, 들어 보렴, 대답해 다오, 이베트, 내 아가. 오, 하느님! 하느님! 이 아이가 무슨 짓을 한 거예요?”
사내들은 당황한 얼굴로 말없이 오가며 물과 수건과 잔과 식초를 날랐다. 누군가가 말했다. “옷을 벗겨야 합니다.” 정신이 나가 있던 후작부인은 딸의 옷을 벗기려 했으나 제 손이 무얼 하는지도 몰랐다. 손이 덜덜 떨리고 갈피를 못 잡자, 그녀는 신음하듯 말했다.
“못 하겠어 — 못 하겠어 —”
돌아온 하녀가 약병 하나를 가져왔다. 세르비니는 뚜껑을 열고 그 절반을 손수건에 쏟아 부었다. 그것을 이베트의 코에 대자 그녀는 숨이 막혀 켁켁거렸다.
“좋습니다. 숨을 쉬는군요.” 그가 말했다. “별일 아닐 겁니다.”
이어 그는 톡 쏘는 그 액체로 그녀의 관자놀이, 뺨, 목덜미를 적셨다.
그런 다음 그는 하녀에게 눈짓하여 처녀의 코르셋 끈을 풀게 했다. 속치마와 슈미즈만 남자, 그는 그녀를 팔에 안아 침대로 옮겼다. 살갗의 향기와 감촉에 몸이 떨려 왔다. 이윽고 그녀를 침대에 눕힌 뒤, 매우 창백한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정신이 돌아올 겁니다. 별일 아닙니다.” 그가 말했다. 고르고 일정한 숨결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침대에 누운 이베트에게 사내들의 눈길이 한꺼번에 못 박힌 것을 보자, 그는 질투 섞인 짜증에 사로잡혀 그들 쪽으로 다가섰다. “여러분,” 그가 말했다, “이 방에 우리가 너무 많이 있군요. 부디 자리를 비워 주시지요 — 사발 씨와 저, 그리고 후작부인만 남도록 말입니다.”
그의 어조는 단호하고도 위엄에 가득 차 있었다.
오바르디 부인은 정부(情夫)의 팔에 매달려, 그에게로 얼굴을 들어 올리며 외쳤다.
“저 아이를 살려 주세요, 오, 제발 살려 주세요!”
뒤돌아선 세르비니는 탁자 위에 놓인 편지 한 통을 보았다. 재빠른 동작으로 그것을 집어 받는 이의 이름을 읽었다. 상황을 짐작한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걸 후작부인이 모르시는 편이 나으리라.’ 그러고는 봉투를 찢어, 안에 적힌 두 줄을 한눈에 삼켰다.
저는 첩이 되지 않으려 목숨을 끊습니다.
이베트.
사랑하는 어머니, 용서하세요. 안녕히.
‘저런!’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건 따로 궁리 좀 해 봐야겠군.’ 그러고는 편지를 주머니 깊숙이 찔러 넣었다.
이어 그는 침대 곁으로 다가섰다. 순간 한 가지 짐작이 스쳤다. 처녀는 이미 정신이 돌아왔으나 부끄러움과 굴욕감, 캐물음이 두려워 아직 그것을 드러내지 못하는 것이리라. 이제 후작부인은 무릎을 꿇고 침대 발치에 머리를 파묻은 채 흐느끼고 있었다. 그러다 별안간 외쳤다.
“의사를, 의사를 불러야 해요!”
방금 낮은 소리로 사발에게 무어라 건네고 있던 세르비니가 답했다. “아니요, 이제 다 끝났습니다. 자, 잠시만 자리를 비켜 주십시오. 잠시만입니다. 제가 약속드리지요. 돌아오실 때 따님이 당신께 입을 맞출 겁니다.” 남작이 오바르디 부인의 팔을 잡고 방 밖으로 이끌었다.
이윽고 세르비니는 침대 곁에 앉아 이베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아가씨, 내 말을 들어 주시오.”
그녀는 답하지 않았다. 너무나 기분이 좋았고, 침대는 너무나 부드럽고 따스하여, 영영 움직이지도 말하지도 않고 영영 이대로 살고 싶었다. 일찍이 알지 못하던 한없는 편안함이 그녀를 감싸고 있었다.
들창으로 벨벳 같은 숨결처럼 스며드는 부드러운 밤공기가, 알아챌 수 없을 만큼 그윽하게 관자놀이에 닿았다. 그것은 애무와 같았고, 바람의 입맞춤과 같았으며, 온 나뭇잎과 밤의 온갖 그림자, 강에서 피어나는 물안개, 그리고 숱한 꽃으로 지어진 부채가 보내오는 부드럽고 시원한 숨결과도 같았다. 아래에서 방 안으로, 또 침대 위로 던져 들어온 장미와, 발코니를 타고 오른 장미가 저희의 짙은 향기를 저녁 미풍의 싱그러운 내음과 섞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녀는 두 눈을 감고 그 기분 좋은 공기를 들이마셨다. 심장은 약기운의 남은 도취 속에서 고요히 쉬고 있었다. 이제 그녀에게는 죽고자 하는 마음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오직 살고자, 그 어떻게라도 좋으니 행복해지고자, 사랑받고자 하는 강렬하고 도도한 갈망이 있을 뿐. 그래, 사랑받고자 하는.
세르비니가 다시 말했다. “이베트 아가씨, 내 말 좀 들어 주시오.”
그러자 그녀는 마음을 정하고 눈을 떴다.
그녀가 깨어나는 모습을 보며 그는 말을 이었다. “자, 자! 이런 어리석은 짓이 다 무엇이오?”
그녀가 속삭였다. “뮈스카드, 가엾은 내 뮈스카드, 너무 불행했어요.”
그는 그녀의 손을 꼭 쥐었다. “그렇다고 이런 낭패를 보시다니! 자, 다시는 이런 일 없으리라 약속해 주시오.”
그녀는 답하지 않았으나, 아주 희미한 미소와 함께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주머니에서 탁자 위에 있던 그 편지를 꺼냈다.
“이걸 어머님께 보여 드리는 게 좋겠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라고. 그는 이 상황에서 출구가 보이지 않는 듯, 더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리하여 그는 중얼거렸다.
“아가씨, 사람은 누구나 견디기 어려운 것을 안고 사는 법이오. 그대의 슬픔을 내 헤아리고 있소. 그리고 그대에게 약속하지요 —”
그녀가 더듬듯이 말했다. “당신은 좋은 분이에요.”
그들은 말이 없었다. 그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에는 다정함이, 나약함이 서려 있었다. 그러더니 별안간 그녀가 두 팔을 들어, 그를 제게로 끌어당기려는 듯이 내밀었다. 그는 그녀가 자기를 부르고 있음을 느끼며 몸을 숙였다. 두 사람의 입술이 마주 닿았다.
그들은 두 눈을 감은 채, 오랫동안 그렇게 있었다.
허나 이대로 있다가는 제정신을 잃으리라 느껴, 그는 몸을 뗐다. 그녀는 이제 그에게 더없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두 손으로 그의 어깨를 붙잡아 붙들었다.
“어머님을 불러 오리다.” 그가 말했다.
그녀가 속삭였다. “조금만 더요. 저, 이리도 행복한걸요.”
잠시 침묵한 뒤, 그녀는 거의 들릴락 말락 한 목소리로 물었다. “저를 많이 사랑해 주시겠어요? 네, 말씀해 주세요!”
그는 그녀의 침대 곁에 무릎을 꿇고, 그녀가 내어 준 손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당신을 흠모하오.” 그때 문간 가까이 누군가의 발소리가 났다. 그는 벌떡 일어나, 평소의 목소리로 — 허나 어딘지 희미하게 빈정거리는 듯한 어조로 — 소리쳤다. “들어오셔도 좋습니다. 이제 괜찮습니다.”
후작부인은 두 팔을 활짝 벌리고 딸에게 달려들어, 미친 듯이 끌어안으며 그 얼굴을 눈물로 적셨다. 그동안 세르비니는 환희로 빛나는 영혼과 떨리는 몸으로 발코니에 나아가, 밤의 서늘한 바람을 들이켰다. 그러면서 저 옛 풍자가의 한 구절을 속으로 흥얼거렸다.
“여자의 마음은 곧잘 바뀌는 법,
허나 어리석은 사내들은 여전히 여자를 믿는다.”
※ 역주: 중세-르네상스 시대부터 전해 내려오는 풍자 가요의 한 구절. 베르디 오페라 “리골레토”의 ‘여자의 마음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La donna è mobile)’류의 오랜 여성 희화(戱畫) 전통을 잇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