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 of 1

Chapter 1

협객(俠客)이라 한마디로 말해도, 도쿠가와 시대 초기에 일어난 협객과 그 뒤에 나타난 협객은, 이름은 같은 협객이라도 사뭇 모양이 다른 듯하다. 초기의 것은 시중 사람들 가운데 기개 있는 자라든가, 혹은 벼슬길을 단념한 무사 같은 이가, 무사의 발호에 저항하여 이를 응징(膺懲)하거나 또는 맞서려는 생각에서 일어난 듯하나, 그 뒤로, 곧 덴메이(天明, 1781~1789) 무렵부터 덴포(天保, 1830~1844)에 이르기까지의 협객이라는 자들은 대개가 노름꾼 같은 부류이다. 곧 이를 나누어 보면, 도쿠가와 초기의 것은 강한 압박에 대한 강한 저항의 화신이어서, 그 본디의 뜻으로 보자면 강한 자와 맞서야 할 까닭으로 진정으로 강한 자가 됨을 으뜸으로 삼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참으로는 오히려 그저 강함을 허세로 삼고 있는 듯한 경향이 있었던, 다소 허영스럽고 으스대는 것이었던 듯하다. 그러던 것이 덴메이 무렵부터의 노름꾼에 이르러서는, 그 자신이 매우 강하여 지한(鷙悍, 사납고 거칠다)하여 맞설 수 없는 구석이 있었다. 그처럼 또렷한 구별이 의식적으로는 가지 않을지라도, 적어도 두 시대의 협객 사이에는 어느 정도의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난리(亂離)의 세상이라 일컬으면 먼저 아시카가(足利) 말기를 가리키는데, 도박이 이 시대부터 크게 성행하였다. 본디 전쟁 그것이 이미 하나의 큰 도박이라 하기에 그러한 것은 아니겠으나, 효로일척(梟盧一擲, 도박에 모든 것을 거는 한 판 승부)이라는 모험적 사상은, 전쟁에도 도박에도 통하는 같은 뿌리의 사상이다. 이 전국 시대에 일어난 도박은 태평한 세상이 되어서도 잇따라 용맹스럽고 일을 즐기는 무리들 사이에서 성행하였으니, 다만 겐분(元文, 1736~1741, 요시무네(吉宗) 시대)에 이르러 한 번 금제되었던 것이 덴메이 무렵(이에하루(家治) 시대)부터 다시 성행하여, 이른바 협객은 은연히 노름꾼 두목의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 다음, 곧 제3차 협객은, 여러 다이묘 가운데 일이 하나라도 생기면 인부가 필요해지는데, 두 자루 칼을 찬 사무라이(二本指)는 부리고 있다 하더라도 이를 잡역에 쓸 수는 없고, 또 녹봉의 사정으로 보아도 평시 쓸모가 없을 때에 만일을 헤아려 많은 고용인을 두는 일은 할 수 없다. 그래서 임시의 일이 생기면 그때 한 번 쓰는 인부를 들이는데, 오늘날에도 병사 외에 군부(軍夫)가 필요한 것과 마찬가지로, 평시에도 사무라이 신분이 아닌 자에게 사고가 있어 물러나거나 없어지거나 할 때에도 그를 대신할 사람이 필요하니, 그 수요를 채우기 위해 다이묘·무문(武門)과 평민·상인 사이에, 지금의 인부 알선업과 한데 묶을 수는 없으나 이른바 「닌이레(人入れ), 곧 인부 알선업」라는 직업이 있었다. 더욱이 그 닌이레 두목이라는 자는, 직업의 성질상 아무래도 협객 기질의 자가 아니면 안 되었던 까닭에, 이런 부류의 두목은 대개 협객의 이름으로 불렸다. 가령 근세의 큰 협객 아이마사(相政) 같은 이도 또한 도슈(土州) 영주의 닌이레였고, 신몬 다쓰고로(新門辰五郎) 같은 이도 역시 그저 노름꾼은 아니다. 이런 부류는 오히려 앞서 말한 노름꾼 따위와는 사뭇 다른 종류이다. 무릇 협객에는 이 한 부류가 있다. 이로써 세 부류가 있었던 셈이다.

그래서 옛 책에 보이는 초기 협객은 「무야속담(武野俗談)」 따위에 나오나, 정확한 사실은 잘 알 수 없다. 이는 옛 이야기꾼이 흥취 있게 써낸 것으로, 더러 사실이 있었다 한들 정확한 것은 알려져 있지 않다. 사이카쿠(西鶴)도 무사라 하면 무사, 상인이라 하면 상인, 갖가지 계층을 하나하나 묶어서 그 특성과 기질을 참으로 세밀하고 능란하게 그려 보이는 「무도전래기(武道傳來記)」라든가 「세켄 무네산요(世間胸算用)」라든가, 그 밖에도 여러 가지가 있는데, 도무지 협객을 전문으로 묶어 쓴 것은 하나도 없다. 지카마쓰(近松)의 작품에도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으나, 후대 강담사가 풀어 놓는 식의 협객은 그려져 있지 않다. 이는 한편으로 지방의 사정도 있겠으나, 어쨌든 초기 협객의 면모는 알려져 있지 않다. 잡극 따위에 더러 남아 있을 뿐, 오늘에 와서는 정확한 모습을 알기 어렵다.

그러나 덴메이 이후에 나타나는 노름꾼들의 자취에 이르면, 이는 다소나마 또렷해진다. 특히 강석사(講釋師)의 밥벌이 거리가 되고 있는 노름꾼들은 관동에 가장 많이 있고, 관동에서도 고슈(甲州), 조슈(上州, 고즈케), 야슈(野州, 시모쓰케), 조슈(常州, 히타치) 같은 지방은 협객이나 노름꾼의 이름과 더불어 반드시 불려 나오니 사뭇 재미있는 일이다. 이에는 한 가지 까닭이 있어, 노름꾼이 매우 횡행하는 곳에는 반드시 이름 있는 산이 있다. 히타치에는 쓰쿠바산(筑波山), 가즈사(上総)에는 가노잔(鹿野山), 조슈(上州)에는 하루나(榛名)·아카기(赤城), 야슈(野州)에는 닛코(日光), 고슈에는 산이 곳곳에 있다. 더욱이 이런 산 위에는 산신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산에 어울리는 역참(驛場) 같은 거리가 들어서 있어, 그 번화한 곳에는 호객 여자(おじやれ)나 유녀(遊女) 같은 이까지 있다. 이런 곳은 모두가 알맞은 도박장이 열리는 곳이며, 이와 더불어 산 위에는 산신을 모시는 사당이 있는데, 이 산신의 제삿날이 곧 큰 도박장이 열리는 날로, 이날에는 지방 인근의 노름꾼 오야분(親分, 두목)과 고분(子分, 부하)이 모두 모일 뿐만 아니라, 풋내기, 곧 이른바 「객인(客人)」이 큰돈을 말에 실어 가지고 와서 도박을 여기에서 즐기는 것을 낙으로 삼고 있었다. 요컨대 중세 난세 무렵에는 전쟁과 도박이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 후대의 태평한 세상에서는 산의 제전이라는 것과 도박이 커다란 관계를 가지게 되었다. 또 산은 상대(上代)에는 이른바 노래나 우타가키(歌垣, 고대 남녀의 노래 모임)를 통해 젊은 남녀의 인연 맺어 주는 구실을 맡고 있었으나, 후대에는 노름꾼이 사내를 단련하는 싸움터의 구실을 맡게 되었다. 이리하여 도박을 벌이기에 마침맞은 편의가 있는 산은 크게 번창하고 역참도 커졌다. 그래서 만일 산령(山霊)에게 그때 그 산에서 열렸던 큰 도박의 광경이며 여러 오야분의 성품과 행적을 이야기하게 한다면, 강석사가 하리오기(張扇)로 두드려 내는 식의 꾸민 이야기가 아닌, 참으로 흥미로운 협객전(俠客傳)이 얼마나 많이 나오랴. 따라서 오늘날 남아 있는 산 위에 자리한 큰 거리 가운데, 따로 물자 집산의 중심이 된 까닭도 아니고, 또 따로 경치가 빼어난 까닭도 아니며, 신령의 빛이 또렷한 까닭도 아닌데도 여전히 번성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대개 도박을 위해 생겨난 거리라고 짐작이 간다. 고슈도 그러하고, 부슈(武州)도 그러하다. 쓰쿠바도, 닛코도 그러하다. 그것이 오늘날에는 피서나 소요(逍遙)의 땅이 되고 있다 하니, 또한 시세의 변천이란 흥미로운 것이 아니랴.

이렇게 하여 곳곳에 도박이 성행하고 노름꾼이 많아지면, 자연히 다른 고장, 다른 지방의 오야분들이 얼굴을 맞대는 자리도 많아지니, 서로 적개심도 일고 자부심도 솟구치고 지지 않으려는 기개도 일어, 결국 오야분이든 고분이든 서로 사람됨을 갈고닦아 다른 패에게는 비웃음 사지 말자는, 말없이 한뜻으로 모이는 패거리 의식이 생긴다. 요컨대 서로 일종의 체면을 무겁게 여기어 일종의 사내다운 정신을 드러내게 된다. 곳곳의 고분이 또한 그 소문을 듣고 천 리를 멀다 하지 않고 이름난 오야분 아래로 달려와 모이는 그런 모양새다. 도박 자체의 선악은 논외로 하고, 그 오야분이라는 자의 성격에는 참으로 아낄 만한 미점이 있었다. 강석사가 포착한 협객이 곧 이것이다. 이 호흡을 하리오기로 두드려 내어, 청객의 피를 끓게 하고 뼈를 들썩이게 한다. 이와 달리, 닌이레를 전문으로 하는 자는 다소 앞의 부류와 관련이 있다 하더라도 겉으로는 결코 앞 부류처럼 살벌한 거동이 없고, 지극히 온화하다. 다만 그 모든 정신은 책임의 완수, 의무의 부담을 마다하지 않고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는 데에 있다. 구니사다 주지(国定忠次), 이오카 스케고로(飯岡助五郎), 시미즈 지로초(清水次郎長) 같은 이는 앞 부류의 지한한 자들이지만, 아이마사 같은 이는 뒷 부류의 걸출한 자라, 자연히 그 방식도 모습도 다르다. 그러나 일류에 드는 자는 대개 온화하고 사려도 깊으며 차분한 사람으로 이루어져 있다. 지로초 같은 이는, 도박장을 어떤 곳에서 열어 이긴 자가 큰돈을 들고 돌아가는데 도중에 위험이 많으니, 그것을 지로초가 염려하여 조금도 위험이 없도록 고분 가운데 용맹한 자에게 지키게 하고, 두루 살펴 객인에게 갖가지 시중을 들었기에, 이로 인해 협명이 더욱 드높아졌다고 한다. 또 뒤의 부류에 이르면 그런 화려한 면은 없으나, 역시 많은 고분에게 오야분으로 추대되려면 그에 마땅한 역량과 인격이 없어서는 안 된다. 곤야초(紺屋町)의 아이마사 같은 이는 그쪽으로 이름을 떨쳤다. 또 아주 가까운 시기의 이시사다(石定, 닌이레라 일컫지는 않으나) 같은 이도 도리어 이름이 높았으며, 그는 수년 전에 죽었으나 이런 인물이야말로 협객의 마지막이리라. 협객도 한번 강석사의 손에 걸리면 무엇이든 불꽃을 튀기며 싸우기만 하는 모습이 되어 버리지만, 모두가 다 그러하지는 않다. 저마다 시세의 차이, 처지의 차이에 따라 잘하는 방면에서 그 장점을 드러냈으나, 그 가운데 크게 이름을 이룬 자는 반드시 장량(張良)·진평(陳平)에 비길 무리가 많고, 물불을 가리지 않고 칼과 창의 숲에 들어가도 물러서지 않는 자는 오히려 삼류·사류에 드는 번쾌(樊噲)·경포(黥布)의 무리이다. 이로써 보더라도, 만일 협객의 본령이 이 살벌한 점에만 있다고 본다면 그것은 큰 잘못이다. 가령 이시사다 같은 이는 낚시를 몹시 즐겨 곧잘 외쪽 배에 시름을 잊는 즐거움을 누렸는데, 사공들에게마저 그 부드럽고 살가우며 헤아림 깊은 호흡이 참으로 온화한 모습을 그리워할 정도였다. 그러나 본인은 도쿄의 번화가를 대개 그 구역 안으로 두었으니, 그 세력이 대단한 것은 그 장례일에 가부키좌(歌舞伎座)를 빌려 쓴 것에 비추어 보더라도 알 수 있다.

그래서 오늘에 이르러서는 제도도 사회 상태도 두드러진 변화를 가져와, 옛날처럼 산 위에서 도박을 공공연히 여는 일은 할 수 없게 되어, 각지의 도박은 쇠퇴의 기운으로 기울어, 전에 공공연하던 것이 지금은 골방의 일이 되고 있다. 이는 한편으로 경찰 제도와 관련된 일이다. 곧 옛 노름꾼 가운데 어떤 자들은 한편으로 공의(公儀, 곧 막부)의 공무, 특히 경찰의 일까지 보고 있어, 그 풍이 메이지에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근래에는 경찰의 방침이 사뭇 달라져, 그러한 부류의 사람을 사정없이 압박하고 그치지 않으니, 협객은 더욱더 궁지에 몰려 있다. 내 보기에 이렇게 시달리는 끝에 협객이 어떻게 변모할지 우려스럽기도 하다. 그것은 곁의 이야기이거니와, 우선 다이묘와 무사가 없어져 닌이레의 필요도 없어졌으니 그 방면의 협객은 사라지고, 도박을 공공연히 열 수 없게 되어 예전 모습 그대로 이어 갈 수는 없으니 노름꾼 거호(巨豪)들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그러나 강석사가 이를 유일한 거리로 삼아 국민, 적어도 시정의 사람들의 기상과 정신을 북돋우는 일은 당분간 그치지 않으리라. 또 실제에 있어서도 이 협객 기질의 일부는, 그 자취를 토목 노동자나 광산 인부에게 남겨 한동안은 남아 있으리라. 그들 사이, 그 토목업자나 광부 같은 이들 사이에도 두루 있는 예의가 있고 약속이 있어, 이를 어기면 엄중한 제재를 받는다. 하물며 참된 협객 기질의 오야분과 고분의 정의(情誼)는 참으로 두터운 것이라, 또 의기가 통한 오야분을 위해서라면 어떤 일에도 몸을 던지기를 사양하지 않는다. 이십 년 남짓 전이었으리라, 모모카와 엔린(桃川燕林)이 우에노 히로코지(上野広小路)의 후키누키라는 요세(寄席, 만담·강담 공연장)에서 지로초의 일대기를 풀었다. 그러자 날마다처럼 그 고좌(高座) 앞에 얼핏 보아도 무시무시한 얼굴을 한 사내 예닐곱이 와서 듣고 있었다. 이상하여 까닭을 물어 보니, 그것은 지로초의 고분들로, 만일 조금이라도 틀린 말을 하기라도 하면 곧장 고좌로 뛰어올라 엔린을 따져 묻겠다는 마음가짐이었던 듯하나, 엔린의 조사가 빈틈이 없고 별로 틀린 데가 없는 것에 감복하여 돌아갔다는 일이 있었을 정도이다.

물론 협객이 발호한 것이 관동만은 아니다. 교토와 오사카에도 협객은 있다. 또 이른바 그저 노름꾼의 부류로 협객이라 일컫기에는 모자랄지 모르나, 십 년 남짓 전에는 여자 오야분까지 야마가타에 있었을 정도로, 후쿠시마 이북에도 꽤 많은 노름꾼이 있었던 듯하다. 뭐라고 한들 관동이 가장 번성하였다. 오늘날 강담사가 지방을 돌면 걸핏하면 그 고장의 옛 협객 이야기를 청하는데, 만일 이름난 오야분의 이야기를 모르는 자라면 당장 쫓겨날 수도 있다. 그러나 강담사도 직업상 갖가지 이야기를 잘 알기도 하고, 뜻 있는 자는 그 고장 사람에게 물어 이야깃거리를 캐묻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그 강담이라는 것도 사실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만일 여기에 참된 풍속가가 있어 곳곳을 돌며 지금 사이에 협객이나 노름꾼의 역사를 캐고 다닌다면, 사뭇 좋은 거리를 얻을 수 있으리라. 요컨대 만일 도쿠가와의 문학이나 소설에서 협객과 복수를 빼낸다면, 그 나머지는 더없이 적막한 것이 되리라.

그 다음으로, 지나(支那, 곧 중국)에 협객이 있었는가 하는 문제에 이르러서는, 이는 뭐라 말하기 어렵다. 그러나 태사공(太史公)이 쓴 것도 있고, 그 뒤의 것들에도 검협(劍俠) 따위가 등장하고 있으나, 중국의 검협은 일본의 것에 견주자면 아무래도 신선풍이며 또한 초세적(超世的)이고, 게다가 이렇다 할 사상적·사회적 관계가 옅으며 계통이 또렷하지 않다. 그러나 일본의 것은 의용 임협(義勇任俠) 따위의 핏줄이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다. 무사에게 무사도가 있는 것과 같이, 협객에게는 협객도가 의연히 자리하고 있다. 이는 분명히 일본인 사이에 생겨난 한 특성으로, 다른 나라에는 견줄 데 없는 것이라 일러도 좋으리라. 다만 일본의 협객, 적어도 사내다운 기질의 사람에게 「수호전(水滸傳)」이 알게 모르게 감화를 끼친 그 세력의 막대함은 그저 지나칠 수 없다. 「수호전」의 번역은 바킨(馬琴)·란잔(蘭山)을 거쳐서야 크게 퍼진 것이지만, 그 뒤로 연극에도 자주 올랐고, 노지심(魯智深), 사진(史進), 이규(李逵), 낭리백도 장순(浪裡白跳 張順) 같은 이들이 몹시 그들의 이상에 들어맞은 구석이 있었던 듯하여, 등에 그들의 화수(花繡, 화려한 문신) 같은 것을 새기지 않으면 대형(大哥)의 체면을 깎은 듯한 풍이 자리잡았다. 도쿠가와 말기의 시정의 모습을 적은 글들을 보면, 이런 풍속이 성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 「수호전」을 본떠 「덴포 수호전(天保水滸傳)」이며 무슨 무슨 수호전이라는 부류가 잇따라 나왔던 것도 어렴풋이 헤아릴 수 있다. 이는 우연한 일이지만 조금 흥미로운 현상이었다고 생각한다.

(메이지 44년(1911)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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