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
돌리버 로맨스와 그 밖의 소품집
이야기와 스케치
너새니얼 호손 지음
시간의 초상
1838년 1월 1일, 『세일럼 가제트』 구독자 여러분께 올리는 배달 소년의 인사말.
인사말.
친애하는 구독자님들께. 저희 신문 배달 소년들은 시간 어른의 심부름 소년들이랍니다. 한 해 내내 그 어른은 저희를 여러분 댁 문에서 또 다른 댁 문으로 보내시어, 당신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고 무슨 일을 하고 계신지 알려 드리게 하시지요. 저희는 참으로 별난 개구쟁이 떼라서, 설날 아침이면 어김없이 하나같이 운문병(韻文病) 발작을 일으키며 그토록 끔찍한 가락을 쏟아내니, 갓 태어난 아기 새해가 문지방에 발을 막 디딜 참에 저희가 울려 대는 불협화음에 놀라 달아나 버린대도 하등 이상할 게 없답니다. 이런 때면 더없이 후하신 구독자님들께서는 저희에게 인심을 한 자락씩 베풀어 주시기를 잊지 않으시는데, 이게 저희 시구에 대한 보상인지, 아니면 더는 시달리지 않게 해 달라는 면죄부 값인지는, 존경하옵는 귀하들께서 가장 잘 아시겠지요. 더욱이 앞서 말씀드린 대로 시간 어른의 심부름 소년들인 저희는 매해 첫날이면 지난 열두 달 동안 우리 주인께서 세상을 어떻게 주무르셨는지 그 내막을 간추려 올려야 한다고 여긴답니다. 그런데 여태 들어본 적 없는 불운이 닥쳐, 지금 이렇게 여러분 앞에 선 이 청원자는 시신(詩神) 뮤즈에게 그만 까맣게 잊히고 말았어요. 제 생각들을 여섯 걸음 운율의 시구에 맞춰 엮고 그 꼬리마다 운(韻)을 붙이리라 당연히 기대했건만, 이 복된 아침에 제 자신을 들여다보니 어제나 마찬가지인, 그리고 내일도 그러할 성싶은, 그저 그런 산문쟁이 그대로가 아니겠어요. 게다가 더 딱한 노릇은, 저 같은 겸손한 꼬마 죄인으로서는 형제들처럼 예의 지혜로운 말로 귀하들께 아뢰며, 시간 어른이 무엇을 잘했는지 무엇을 그르쳤는지, 앞으로 잘하려는 일은 무엇이고 그릇되이 저지르려는 일은 무엇인지 현자처럼 단정하여 올릴 재주가 영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가엾은 처지인지라, 적잖이 낯부끄러운 얼굴로 감히 여러분 댁 문 앞에 나서는 바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모습을 드러내지 못한 탓에 제 주머니를 채워 주시려는 여러분의 후한 뜻이 허사가 된다면, 그야말로 애석한 일이겠지요. 그리하여 제가 문득 떠올린 생각은 이것입니다. 시간 어른의 심부름 소년으로서 제 또래 어떤 소년보다도 그 어른과 허물없이 지내 온 몸이니, 시간 어른이라는 분의 됨됨이와 일상에 관해 몇 가지 소소한 이야기를 올려 드리면 존경하옵는 여러분의 마음에 드실지도 모른다는 것이었어요.
여러 해 전부터 『농부 연감』 표지에는 시간 어른의 초상이라 자처하는 목판화 한 점이 실려 왔답니다. 그 그림은 이 점잖은 양반을 거의 알몸으로 그려 놓고, 이마에 머리카락 한 타래만 남긴 채 어깨에 날개를 달아 주고, 큰 낫과 모래시계로 무장시킨 모습이에요. 이 마지막 두 상징물은 그 노인네가 풀 베는 철에 시간제로 일하신다는 뜻인 듯합니다. 하지만 제가 기억하는 한, 시간 어른은 큰 낫과 모래시계를 든 적도, 날개를 달고 다니신 적도, 연감이 우리더러 믿으라 하는 그 반라(半裸)의 몰골로 모습을 보이신 적도 없답니다. 요즘 그이는 이 동네에서 제일 세련되게 차려입는 사나이시지요. 제가 보기에 그이 천성은, 아무리 연로하시다 한들 하루가 다르고 시(時)가 다른 최신 유행을 죄다 따르는 데 있는 듯해요. 바로 요즈음 그이를 만나 보시면, 모피 깃 프록코트를 걸치고, 앞코 좁은 부츠 밑으로 끈을 팽팽히 당겨 고정한 판탈롱 바지를 입으셨답니다. 머리에는 앞머리 한 타래 대신 맵시 있는 적갈색 가발을 쓰고, 같은 빛깔의 무성한 구레나룻을 기르고, 그 위에 독일제 광택 모자를 얹으셨지요. 모래시계는 금제 레버식 회중시계로 바꾸어 조끼 주머니에 넣어 다니시고, 큰 낫은 아예 내다 버리셨거나, 그 자루를 승마용 채찍보다 조금 굵은 지팡이로 개조하셨답니다. 정면으로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면 잔주름 몇 가닥쯤은 눈에 띌지도 모르지만, 스치듯 흘끗 보아서는 에덴동산에 계실 적만큼이나 싱싱한, 인생의 전성기를 구가하는 분이라 하셔도 믿으실 겁니다. 시간 어른의 지금 모습은 이러합니다만, 이 묘사가 한 달 뒤에도, 아니 내일 이맘때에도 그이에게 들어맞으리라고는 도저히 장담드리지 못하겠어요.
또 하나 흔히 저지르는 오해가 있으니, 시간 어른이 옛 폐허를 떠돌고 허물어져 가는 성벽이며 이끼 낀 돌 위에 앉아, 다른 이들은 다 잊어버린 일들을 곰곰이 되새기며 지낸다는 생각입니다. 어떤 분들은 아마 그이를 브로드 스트리트의 묘지에서 찾으실지도 모르겠네요. 히긴슨가, 하손(Hathorne)가 — “호손(Hawthorne)”이 아니라고요, 이 집안의 지금 한 사람이 멀쩡한 옛 성씨를 멋대로 뒤틀어 놓은 건 논외로 하고요 — 홀리요크가, 브라운가, 올리버가, 픽먼가, 피커링가, 그 밖에 그이가 옛날에 허물없이 지내던 여러 명문가의 무덤, 그 반쯤 지워진 묘비명 위로 몸을 숙이고 계시지는 않나 하고요. 또 어떤 분들은 갤로스 힐 능선에서 그이를 찾으실지도 모르겠고요. 그이가 가장 어두운 기분에 잠겨 코튼 매더와 함께 마녀들을 목매달던 바로 그 자리 말입니다. 하지만 거기서 찾으실 일은 아니에요. 시간 어른은 누구보다 먼저 자기가 한 일, 자기의 역사, 자기 옛 동무들을 잊어버리는 분이거든요. 그이 자리는 세상에서 가장 시끌벅적한 한복판에 있답니다. 시간 어른과 얼굴을 맞대고 만나 보고 싶으시다면, 정오에서 한 시 사이에 에식스 스트리트를 한 바퀴 거니시기만 하면 되어요. 거기 멋쟁이 청년들과 아가씨들 사이에서 한량 중의 한량인 듯한 늙은 시간 어른의 모습을 보시게 될 테니까요. 그이는 젊은이들과 팔을 걸고 어깨를 나란히 한 채, 무도회며 극장이며 오후의 말몰이며 자정의 유흥거리를 입에 올리고, 저 재단사가 좋다느니 이 재단사가 낫다느니 떠들며, 반년만 묵어도 그 옷을 비웃지요. 그러다 헤어지기 전에는 친구들을 불러 샴페인 한 잔을 권하는데 — 거품이 이내 꺼지는 술이라 시간 어른이 유난히 좋아하시는 것이랍니다. 시간 어른은 어여쁜 아가씨들 곁에서는 발걸음도 사뿐히, 그녀들의 귀에 속삭이지요 — 그 늙은 사기꾼이 말이에요! — 여태 만나 본 중 가장 어여쁜 천사들이시라고요. 하는 일이라고는 춤추고 노래하며 머리에 장미를 꽂고 연인들을 줄줄이 거느리는 것밖에 없다고, 세상은 언제까지나 불 밝힌 무도회장 같으리라고요. 또 시간 어른은 상업 뉴스실에 들르고, 보험 사무소들을 찾아가고, 에식스 스트리트와 세인트피터스 스트리트 모퉁이에 서서 상인들과 담소를 나누신답니다.
하기야 시간 어른이 그 상인의 이름을 입에 올릴 일이 거의 없으니, 철자를 어떻게 쓰고 어떻게 발음하든 큰 문제는 아니지요. 시간 어른이 상인들과 나누시는 이야기는 대개 선박들의 입항 소식, 주가의 등락, 면화와 곡물류 시세, 포경업과 대구 어업의 전망, 그리고 그 밖에 그날그날의 온갖 새 소식들이랍니다. 그리고 젊은 신사들이며 어여쁜 아가씨들이며 상인들이며, 그이와 안면을 트는 이들은 모두들 시간 어른 같은 분이 세상에 또 없으며, 시간 어른이야말로 전부의 전부라고 여기기 십상이랍니다.
그러나 시간 어른은 그 사람들이 여기는 것만큼 그리 좋은 분이 못 됩니다. 늘 짓궂은 장난거리를 노리고 있다가, 이따금 얄궂은 틈을 타 중년 신사 어느 분의 어깨에 지팡이를 후려치시는데, 이럴 수가! 그 딱한 양반은 허리가 꾸부정해지고 머리가 희끗해지고 얼굴은 쪼그라든 사과꼴이 되어 버리지요. 이것이 바로 “세월에 얻어맞았다”는 말이 가리키는 바예요. 시간 어른 성품에서 가장 고약한 구석은, 언제나 가장 오랜 벗들에게 가장 혹독한 해를 끼친다는 점이랍니다. 그런데도 그토록 험한 대접을 받은 벗들조차 그이와의 교분을 끊을 뜻은 보이지 않고, 마지막 이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좀체 견뎌내지 못하지요.
또 한 가지 널리 퍼진 생각이 있어요. 시간 어른이 난롯가에 앉아 청교도들이며 마녀 박해자들이며 프렌치 인디언 전쟁과 독립전쟁의 영웅들 이야기를 두런두런 늘어놓기를 좋아하고, 초대 애덤스 대통령 시절보다 최근 일은 통 기억하지 못한다는 얘기 말이에요. 이 또한 큰 착각입니다. 시간 어른은 새로운 얘깃거리에 워낙 눈독을 들이시는지라, 내일 당장 자기 말을 주워 담아야 할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그날의 가장 믿기 힘든 소문까지 널리 퍼뜨리길 마다하지 않는답니다. 나라의 선거철이 한창인 동안 이런 성향을 숱하게 보여 주시지요. 한 달 전만 해도 그이 입에는 휘그당이 선거에서 거둔 놀라운 승리 이야기가 가득했어요. 그리고 공평하게 말씀드리자면, 이번만큼은 참말을 하신 것 같기도 합니다. 같은 이야기가 내년에도 유효할지는 시간 어른 본인이 보여 주시겠지요. 요즈음 그이는 캐나다의 반란 움직임을 두고 할 말이 많고, 북동부 국경 문제를 두고는 허풍을 약간 떠시며, 플로리다 전쟁에서 우리 지휘관들의 굼뜸에 몹시 답답해하시고, 노예제 폐지론이 화두에 오를 때마다 상당히 흥분하시지요. 하기야 어느 편에 설지 그이 스스로 아직 마음을 정하지 못한 듯하니, 그러실 만도 합니다. 그런 경우가 생기면 — 이런 일은 자주 있는 일이지만 — 시간 어른은 온 우주를 갈기갈기 찢어 놓을 듯한 노기에 사로잡히는데, 그래도 그이가 정말로 그런 무서운 극단으로까지 나아가시는 걸 저는 여태 본 적이 없어요. 지난 예닐곱 달 사이 그이는 통화(通貨) 얘기가 조금만 나와도 견디지 못할 뾰로통함에 빠지셨답니다. 시간 어른이 무엇보다 질색하는 건 즉석 현금 지급을 거절당하는 일이니까요. 이런 것들이 시간 어른이 요사이 즐겨 입에 올리시는 굵직굵직한 화제랍니다. 그보다 사사로운 수다 쪽으로 가자면, 새로 성사된 혼담, 깨어진 옛 혼담 소식에 이따금 악의 없는 험담 한 자락씩을 끼워 넣고, 때로는 설교 한 대목이나 라이시엄 강연, 글리 클럽 공연을 비평하시기까지 하지요. 짧게 말씀드리자면, 오늘의 잡담과 덧없는 의견, 그 휘발성 알맹이를 붙잡기만 하시면 그것이 곧 시간 어른의 수다, 한 마디 한 마디 고스란히입니다. 덧붙여 말씀드릴 것은, 그이가 러셀 씨의 성악 실력에 크게 감탄하시며 다음 공연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리를 지키실 작정이라는 점이에요. 저녁 내내 목소리와 악기로 시간 어른을 붙들어 둘 — 다시 말해 시간과 박자를 맞출 — 성악가는 흔치 않지요. 그럼 여러분은 이렇게 물으실지도 모르겠네요. “시간 어른의 문학 취향은 어떠한가?”라고요. 여기서도 또 한 번 흔한 오해가 있답니다. 많은 분들이 생각하시기를, 시간 어른이 한가한 시간을 애서니엄에서 보내며, 고(故) 올리버 박사가 타계하신 뒤로는 아무도 건드리지 않은 좀먹은 대형 이절판(二折版) 고서들의 곰팡내 나는 책장을 뒤적이신다고요. 하지만 그건 전혀 사실이 아니에요. 시간 어른이 가장 깊이 탐독하시는 책은 아이브스 앤 주잇 대출도서관에서 빌려 온 신간 소설들입니다. 그이는 당일 정기 간행물의 가벼운 기사들을 훑어보고, 신문들을 흘끗 들여다본 뒤, 한두 세기 뒤에 즐길 재미를 위해 따로 철해 두는 『세일럼 가제트』만 제외하고는 모조리 영영 내팽개쳐 버리신답니다.
이제 사업가로서의 시간 어른을 살펴보도록 하지요. 이 방면에서 우리 시민들은 전혀 이유 없다고만 할 수도 없는 불평을 입에 달고 삽니다. 시간 어른이 굼뜨고 둔하다는 불평 말이에요. 이따금 더비 부두 끝에서 기둥에 몸을 기댄 채, 혹은 쇠 대포 엉덩이에 걸터앉은 채, 삭구를 풀어 둔 동인도 무역선을 넋 놓고 바라보시는 그이를 볼 수 있답니다. 아니면 유니언 해상보험 사무소의 창문 너머로 엿보시면, 풍상에 단련된 늙은 선장들 — 예전에 시간 어른이 사뭇 다른 양반이던 시절을 기억하는 이들 — 그 틈에서 신문 위에 고개를 꾸벅이며 조시는 그이의 모습이 힐끗 보이실지도 몰라요. 에식스 스트리트 포목점 아무 곳에나 들어가 보시면, 팔꿈치를 계산대에 괸 채 1야드짜리 천 끈 한 자락이며 시침핀 한 봉지 값을 흥정하고 계신 그이를 만나기 십상이지요. 가장 한가한 기분에 젖은 그이를 붙잡으시려면 젊은 변호사 사무실을 찾아가 보셔야 한답니다. 그래도 시간 어른은 우리 사이에서 그럭저럭 일을 좀 꾸려 가시니, 그 공을 부정해서는 안 되겠지요. 지난 계절 그이는 철도 공사장에서 꽤 부지런히 일하셨고, 다음 여름 중순께에는 열차를 달리게 해 주시겠노라 약속하셨어요. 그리 되면 우리는 에식스 스트리트에서 스테이트 스트리트까지 날듯이 달려갔다가 시간 어른이 눈치채시기 전에 되돌아올 수 있을 겁니다. 우리 고매한 시장님과 손을 잡고 — 이분의 선조이신 런던 시장과는 시간 어른이 200년도 더 전에 퍽 친히 지내셨답니다 — 새 시청의 머릿돌도 놓으셨으니, 그 화강암 정면은 벌써 코트 스트리트의 자랑거리가 되었지요. 그러나 이런 공적인 일 외에도 시간 어른은 사사로이도 바쁘게 움직이신답니다. 바로 지금 이 철이면 그이는 청구서 수금에 열심이어서, 거의 시시각각 거리에서 거리로 옮겨 다니며 이 동네 절반가량의 대문을 두드리시는 모습을 보실 수 있는데, 한 움큼이 넘는 그 지긋지긋한 서류 뭉치를 끼고 다니시지요. 그런 심부름에 나서실 때 그이는 키가 작달막한 통통한 노신사의 모습을 하고 나타나시는데, 머리가 희끗하고 얼굴이 불그레 투박하며 목소리가 우렁차서, 많은 이들이 그이를 우편 배달부로 착각하곤 한답니다.
혼례가 치러질 때마다 하객들 틈에는 어김없이 시간 어른의 모습이 있답니다. 결혼이야말로 시간 어른이 다른 어떤 일보다도 유독 관심을 기울이시는 일이니까요. 그이는 으레 신부를 신랑 앞으로 이끌어 넘겨 주고, 신랑의 손을 잡아 신방(新房) 문지방 앞까지 데려다 주시지요. 이런 자리에서 시간 어른은 무척 흥겨운 척하시지만, 가만 지켜보면 한숨 한 자락을 흘리시는 모습이 눈에 띌 때가 적지 않답니다. 이 고단한 세상에 아기 하나가 태어날 때마다 시간 어른은 곁을 지키시며, 울음보를 터뜨린 갓난아이를 두 팔에 안으시지요. 그러면 가엾은 아기는 그이의 품에 안겨 본능적으로 몸서리치며, 여린 울음을 가냘프게 터뜨린답니다.
그러고 나면 그이는 산실(産室)에서 또 다른 옛 지인의 곁으로 서둘러 달려가셔야 합니다. 시간 어른과의 거래는 이제 영영 끝났건만, 훗날 치러야 할 장부만은 남겨 둔 그런 지인의 머리맡으로요. 어떤 때는 차마 보기 딱한 광경이 펼쳐지지요. 그 백발의 사기꾼을 대신해 줄 또 다른 벗을 끝내 얻지 못한 가엾은 영혼들이 시간 어른에게 작별을 고할 때 내비치는 그 머뭇거림, 그 몸서리치는 고통이라니요. 어쩌면 그리도 시간 어른에게 매달리며, 낯익은 그이의 모습을 한 번 또 한 번 곁눈질하는지요! 그러나 시간 어른, 이 매정한 노인네는 그런 장면들을 더없이 태연히 지나쳐 가시고, 눈앞에서 사라지는 순간 제일 가까운 벗마저 기억에서 놓아 버리신답니다. 한편 시간 어른과 지나치게 허물없이 지내지 않았던 이들 — 그이가 위험한 위인이며 제 동무들을 곧잘 파멸시키는 이임을 알고 있던 이들 — 은 기뻐하며 그이와 작별하고, 얼굴에 승리의 빛을 띤 채 세상을 떠나가지요. 저들은 압니다. 그이의 온갖 달콤한 약속에도 불구하고 그이는 저들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없었으며, 이제야말로 저들이 행복해지리라는 것을. 그것도 시간 어른이 죽어 땅에 묻힌 뒤로도 아주 오래오래 말이지요.
시간 어른은 불멸하는 존재가 아니랍니다. 시간 어른도 죽어야 하며, 영원이라는 깊은 무덤에 묻히셔야 해요. 그래요, 죽게 내버려 두십시다. 에덴의 문을 나서신 그 시각부터 바로 이 순간까지, 그이는 두 손을 피로 물들이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죄를 지으며, 자기 자신에게도 온 인류에게도 비참을 안기며, 땅 위를 이리저리 쏘다니셨지요. 어떤 때는 이교도였다가, 또 어떤 때는 박해자였어요. 어떤 때는 읽지도 쓰지도 못하는 암흑 속에서 여러 세기를 허송하셨고요. 그 세월을 일컬어 암흑시대라 한답니다. 나라와 나라 사이에 싸움을 부추기지 않고 지난 해는 거의 없었답니다. 어떤 때는, 지금으로부터 채 오십 년도 되지 않은 프랑스에서 그러하셨듯, 광란의 발작에 사로잡혀 한낮에 수천 명 무고한 이들을 살육하셨지요. 이제 와 그이는 더 슬기로워지고 더 나아졌노라 잡아떼신답니다. 믿을 이는 믿으시지요. 저로서는 시간 어른이 영원히 살지는 아니하리라는 사실이 기쁘답니다. 그이에게는 정해진 소임이 있으니, 그 일을 마치고 죽게 하십시다. 스스로 아무리 싱싱하고 젊어 보이려 한들, 그이는 이미 세월로 백발이 성성하시지요. 이 동네를 누비며 걸치고 다니시는 바로 그 옷가지들도 수천 년 전에 지어 입으신 뒤로 지금 유행에 맞추어 기워 대고 덧대어 놓으신 것뿐이랍니다. 그이 안에도, 그이 둘레에도 새로운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어요. 제가 이 말을 하고 있는 사이에 그이가 숨을 거두신대도, 우리는 그것을 때아닌 죽음이라 부를 수 없을 겁니다. 제 생각하옵건대, 그이 역시 그 무거운 마음과 지친 머리로 스스로 기꺼이 죽고자 하실 듯해요.
그 사이, 다정한 구독자님들, 시간 어른이 또 한 번의 새해를 모시고 오셨으니, 부디 이 가엾은 청원자를 잊지 말아 주십시오. 이만큼 작은 녀석치고는 제가 제법 말을 잘하는 편이라고 여러분도 인정해 주실 테지요. 시간 어른이 여러분 주머니에 남겨 두신 잔돈 몇 푼쯤은 이미 넉넉히 벌어 둔 셈입니다. 저에게 후하게 베풀어 주세요. 그리하면 시간 어른도 여러분께 후하시리라고 저는 든든한 희망을 품고 있답니다. 그이에 관해 모진 말씀들을 잔뜩 올리기는 했지만, 정말이지 시간 어른은 — 그러니까 그이를 그 값어치만큼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게 대접하고, 함부로 쓰지 않고 제대로 쓴다면 — 실로 꽤나 참을 만한 노인네이시며, 우리가 잠깐 동안 그이와 벗하여 지내기로 한 그 얼마간은 넉넉히 견뎌 낼 만하답니다. 부디 후한 인심을 베풀어 주세요, 어진 구독자님들, 시간 어른의 심부름 소년에게. 그리하여 시간 어른이 상인에게는 동인도에서 배를 무사히 모셔다 주시고, 변호사의 책상 위에는 새 소송거리를 푸짐히 쌓아 주시며, 의사의 진료실로는 지갑 두둑한 소화불량 환자들을 떼 지어 보내 주시기를. 농부에게 황금빛 수확과 선뜻한 판로를, 기계공에게 꾸준한 일자리와 흡족한 품삯을, 한량 신사에게는 정직한 일거리 한 가지쯤을 안겨 주시기를. 부자에게는 따뜻한 마음과 넉넉한 손길을 심어 주시고, 가난한 이에게는 훈훈한 난롯가와 넉넉한 먹을거리, 인내하는 기개와 더 나은 내일의 희망을 건네 주시기를. 우리 나라에는 정화 태환의 재개를, 그리고 어여쁜 아가씨 그대에게는 어젯밤 그대의 꿈속으로 스며들었던 그 젊은이를 데려다 주시기를! 그리고 다음 설날에도 (그 사이 더 나은 소일거리를 찾지 못하거든) 시간 어른이 여러분 댁 문간으로 여러분의 살뜰한 꼬마 친구를 다시 한번 데려다 주시기를,
— 배달 소년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