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
성서
이쿠타 슌게쓰
오늘 들러 보니, K 선생 책상 위에 한 번도 본 적 없는 갈색의 때 묻은 36판 크기쯤 되는 두툼한 책이 놓여 있었다.
“선생님, 저게 뭡니까?” 하고 물으니,
“한번 봐봐” 하면서, 와일드의 『데 프로푼디스』며 K 선생이 무척 좋아하는 스윈번이며 아서 사이먼스의 시집 아래에서 꺼내어 내 손에 건네주었다. 보아하니 고색창연한 물건이다. 전면이 두꺼운 가죽으로 된 제본은 몹시 견고하다. 가죽은 군데군데 벗겨지거나 닳아 있다. 가장자리도 그을려 있다. 왠지 어부 마을 처녀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다. 의외로 가볍다.
무심코 펼쳐 보니, 이건 성서였다. 작은 글자가 빽빽하게 박혀 있다. 어부 마을과 전혀 관계없는 것도 아니겠다 싶어서,
“성서군요” 하며 K 선생을 바라보니, K 선생의 그 귀족적이고 하타모토 혈통을 이어받은 듯한 단정한 얼굴이 미소로 풀리면서, 다소 의기양양한 기색이 역력했다.
“횡재야. 빅토리아 시대 것이 아니라, 아무래도 백 년 전 것이야.”
“허” 하고 새삼 감탄해 보인다.
“야시장 노점에서 샀거든. 처음엔 10전이라 했는데, 이런 걸 살 사람이 어디 있냐, 5전으로 깎아달라고 해서 결국 5전에 사왔지. 그런데 참, 그런 데 어쩌다 있었던 걸까.”
“허, 5전에……야시장 노점에서” 하고 나는 놀란 듯한 목소리를 냈다. 이 귀족적인 시인이 5전에 성서를 사는 광경을 눈앞에 그려내니, 뭐라 말할 수 없이 재미있는 기분이 들었다. 바로 그 뒤에 내가 매일 시키시마를 두 개씩 피운다는 게 떠올라서,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이 아까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아깝다는 기분이 든다.
마구 이리저리 만져 보았다. 무언가 오래되고 귀한 향기가 난다. ―문득 정신을 차려 보니, K 선생의 이야기는 어느새 거침없이 입센으로 넘어가 있었다. 입센과 성서, 입센은 늘 성서만큼은 곁에서 떼놓지 않았다 하니, 이것도 전혀 관계없는 것은 아닌 셈이다.
K 선생이 일어나 초인종을 누르자, 통통통통, 신이 난 듯 박자 좋게 계단을 밟으며 하녀가 나타났다. 내가 은근히 좋아하는 하녀였는데, 볼이 통통하고 눈이 인형처럼 또렷하며, 동작이 활발하고 리드미컬하다. 역시 시인의 집 하녀답다고 올 때마다 감탄했다.
나는 성서를 책상 위에 놓고, 눈앞에 있던 엽궐련을 한 개비 집어들었다. “자, 엽궐련은 어때요” 하고 두 번쯤 권유받았는데도, 이미 한참 전에 격식이 사라진 사이인데도 여전히 사양하고 있었던 그 엽궐련이었다. 하녀는 묘하게 피식 웃으며 내가 집어드는 꼴을 바라보더니, 그다음엔 도련님 쪽을 바라보며,
“저, 무슨 일이십니까?”
“저 말이야, 안쪽 거실 벽장에 말이야, 위스키랑 퀴라소 병이 있을 텐데, 그걸 가져다줘.”
하녀가 커다란 위스키 병과 이상야릇한 모양의 퀴라소 병을 쟁반에 올려 가져왔을 때, K 선생은 안락의자에 깊숙이 기대어 실내화를 신은 한 발을 무릎 위에 얹고, 팔꿈치를 들어 반쯤 재가 된 엽궐련을 지탱하면서, 벽에 걸린 로세티의 수태고지 그림 쪽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나 역시 마침 그 흉내를 내듯이, 똑같이 의자에 몸을 뒤로 젖히고, 한 발을 무릎 위에 얹는 데까지는 좋았는데, 부끄럽게도 새까만 버선 바닥을 드러내고서, 역시 엽궐련을 치켜들고, 고개를 살짝 입구 쪽으로 돌려 로세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자못 명상적인 풍경 속으로 하녀의 붉게 달아오른 볼이 아까처럼 계단 발소리를 앞세우며 들어왔다 싶더니, 갑자기 픽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이게 어찌 된 거야?” 하고 K 선생이 명상에서 깨어나 말했다.
나는 하녀의 얼굴을 보았더니, 몹시 멋쩍어하며 통통한 볼을 한층 더 빨갛게 물들이고는 눈을 내리깔아 버렸다. 틀림없이 내게 어딘가 우스운 구석이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하니 나도 완전히 쑥스러워져서, 문득 손의 엽궐련을 보니 불이 꺼져 있었다. 급히 재떨이에 쑤셔박고서, 나는 다시 그 성서를 집어들었다. 새까만 버선 바닥을 황급히 아래로 내리면서.
아무래도 내 꼴은 기껏해야 이 성서 정도로 초라한 게 분명하다. 그것이 훌륭한 하타모토 가문 출신으로, 지금은 회사 중역의 차남인 주인과 똑같이 귀족적인 태도로 뻐기고 있었던 것이라 생각하니, 얼굴이 새빨개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하녀가 웃음을 터뜨린 것은, 그저 그 자리의 분위기가 그렇게 만든 것이겠지, 젊은 여자는 젓가락이 굴러도 웃는다고 하지 않는가, 적어도 그건 나에 대한 비웃음은 아닐 것이다, 그건 그녀의 눈이 잘 증명하고 있다, 같은 생각을 나는 혼자서 연신 따져보았다. 더 나아가서는, 이 집 주인이 백동 한 닢으로 손에 넣은 고서에서 무한한 가치를 발견하고 감상하듯이, 이 귀여운 하녀도 내 초라한 모습 속에서 어떤 가치를 찾아내 주고 있을지 모른다는 식으로, 시인다운 자뻑에 흠뻑 빠져들고 있으려니,
“자, 오늘은 술이나 마시면서 천천히 얘기하자” 하고 말하며, K 선생은 두 잔에 위스키를 넘치도록 따랐다.
나는 금방 취해 버렸다. K 선생의 평소엔 어렴풋이 안개가 낀 듯 부드러운 얼굴이 윤곽이 선명해지면서, 묘하게 날카로워졌다. K 선생이 취하면 늘 이렇다. 둘의 이야기는 더욱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기세를 타고 상징시를 욕하기 시작했다.
“저는 시단을 그르치는 것이 지금의 상징시라고 생각합니다. 상징시는 사람을 죽입니다, 애당초 지금의 상징시 따위를 쓰는 데는 굳이 한 명의 인간일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예쁜 말을 잔뜩 알고서 그것을 적당히 되는대로 늘어놓으면 그만입니다. 그러면서 시인의 진정한 인간다운 외침을 ‘설명’이라느니 뭐니 깎아내리는 건 주제넘은 짓 아닙니까. 셸리의 『종달새에게』 같은 걸 갖다가, 의미심장한 단어들을 꿰맞춰서, 새로 만들어낸 자기 상징시를 변호하겠다는 건 우스운 일 아닙니까. 상징시 같은 건, 요컨대 알맹이 없는 시장이에게 더없이 좋은 은신처로, 그 안에서 문자 곡예를 하는 것뿐입니다.”
입이 피로해져서 그쯤 했다. K 선생은 가끔 “흠, 흠” 하고 맞장구를 치면서 온화한 미소를 띠고 듣고 있더니, “뭐 그렇게 분개하지 않아도 돼. 하잘것없는 가짜는 시간의 심판 앞에 사라지게 마련이니까. 쉽게 말해서, 그리스도는 아무리 십자가에 못 박혀도” 하고 성서를 집어들어, “그 정신은 오늘날 이 안에 살아 있지 않은가. 아무리 탄압받고 외면당해도 괜찮으니, 진짜 시를 써야지” 하고 말하고서 다시 내려놓았다. 나는 이 선배의 응원에 완전히 기분이 좋아져서, 그 성서를 다시 집어들고 연신 이리저리 넘기면서, 평소와 달리 맹렬하게 기염을 토했다.
돌아갈 때, 내가 하도 열심히 그 성서를 만지작거렸던지라,
“그럼 가져가도 돼” 하고 K 선생이 말해주었지만, 나는,
“아니요, 괜찮습니다” 하고 일어서면서 말했다. 대접받은 것도 아니었으니, K 선생은 “사양하지 말게” 하고까지 권하지는 않았다. 아래로 내려가니, 안쪽에서 흥겨운 여자들 웃음소리가 들렸다. 문을 나가려다 옆을 보니 부엌 창가에서, 아까 그 하녀가 이쪽을 내다보고 있었다. 나는 현관에 서 있는 주인에게 말하는 체하며, “안녕히 계십시오” 하고, 슬쩍 그녀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왠지 그녀가 방긋 웃은 것 같았다. 나는 몹시 유쾌하고 들뜬 기분이 되어, “K 선생은 희한한 것을 찾아냈군” 하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그 성서 이야기를 하는 줄 알았는데 어느새 하녀 이야기를 하면서, 아까 픽 하고 웃음을 터뜨린 것은 어찌 된 영문인가, 하며 온갖 상상을 부풀리면서, 혼고 삼정목까지 터벅터벅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