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 of 1

Chapter 1

“이봐, 미도리 씨, 뭘 그렇게 멍하니 있어. 이리 와서 자네도 한잔 같이 하지 그래.”

살색 타이즈 위에, 자주색 공단에 금실로 테두리를 두른 짧은 반바지를 걸친 사내가, 마개를 뽑은 술통 앞에 떡 버티고 서서 묘하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투에 어딘가 묘한 속내가 비쳤기에, 술에 정신이 팔려 있던 좌중의 남녀가 일제히 미도리 씨 쪽을 돌아보았다.

무대 한 귀퉁이의 통나무 기둥에 기대어, 멀찍이서 동료들의 술자리를 바라보고 있던 일촌법사 미도리 씨는, 그 말을 듣자 여느 때처럼 사람 좋은 얼굴로, 큰 입을 비틀어 능글맞게 웃었다.

“난 술은 안 된다니까.”

그 말에, 어지간히 취기가 돈 곡예사들이 재미있다는 듯 소리 내어 웃었다. 사내들의 걸쭉한 목소리와 살집 두둑한 여자들의 새된 목소리가 너른 천막 안에 메아리쳤다.

“자네가 술을 못 마시는 건 말 안 해도 다 안다. 하지만 오늘은 좀 특별하지 않나. 대성황 자축이야. 아무리 불구자라도, 그렇게 사람 사이를 마다하는 법이 어디 있어.”

자주색 공단 사나이가 다시 한번 부드럽게 되풀이했다. 살갗이 거뭇하고 입술이 두툼한, 마흔쯤 되어 보이는 우락부락한 사내였다.

“난 술은 안 된다니까.”

여전히 능글맞게 웃으며 일촌법사가 대답했다. 열한두 살짜리 어린아이의 몸뚱이에 서른 줄 사내의 얼굴을 갖다 붙여 놓은 듯한 괴물이었다. 정수리가 후쿠스케 인형마냥 옆으로 벌어졌고, 염교를 닮은 얼굴에는 거미가 다리를 펼친 듯한 깊은 주름, 또랑또랑하게 불거진 큰 눈, 둥근 코, 웃을 때면 귀밑까지 찢어질 것만 같은 큰 입, 그리고 코밑의 거뭇한 까칠한 수염이 제각각 부조화하게 달라붙어 있었다. 창백한 얼굴에 입술만이 묘하게 새빨갰다.

“미도리 씨, 내가 따라 주는 술이라면 받아 줄 거지?”

미인 공볼 곡예사 오하나가, 술기운에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에 미소를 띠며 자신만만한 투로 끼어들었다. 마을에서 평판이 자자한 이 오하나의 이름은 나도 익히 알고 있었다.

오하나가 정면으로 응시하자 일촌법사는 잠시 주춤했다. 그의 얼굴에 한순간 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저것이 괴물의 부끄러움이라는 것일까. 하지만 한참을 머뭇거린 끝에, 그는 또다시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난 술은 안 된다니까.”

얼굴은 변함없이 웃고 있었지만, 목구멍에 걸린 듯한 낮은 목소리였다.

“그러지 말고 한잔 받아 보라니까.”

자주색 공단 사나이는 뚜벅뚜벅 걸어가더니 일촌법사의 손을 잡았다.

“자, 이래 놨으니 이제는 도망 못 가지.”

그는 그렇게 말하며 힘껏 잡아당겼다.

능숙한 어릿광대답지 않게, 마메조(땅콩광대) 미도리 씨는 열여덟 처녀처럼, 그러나 어딘가 으스스한 수줍음을 내보이며, 그 자리의 기둥을 붙든 채 꼼짝하려 들지 않았다.

“그만해, 그만하라고.”

그것을 자주색 공단이 무리하게 끌어당겼기에, 그때마다 매달려 있는 기둥이 휘어, 천막 가설 무대 전체가 큰바람이 분 듯이 흔들렸고, 아세틸렌 가스의 매달린 등이 그네처럼 출렁거렸다.

나는 어쩐지 께름칙했다. 끈질기게 통나무 기둥에 매달리는 일촌법사와, 그것을 또 옹고집으로 떼어 놓으려는 자주색 공단. 그 광경에 어딘가 으스스한 전조가 느껴졌다.

“오하나야, 마메조 같은 건 내버려 두고, 자아 한 곡 뽑아 보라고. 응? 반주꾼 아주머니!”

정신을 차려 보니, 내 바로 옆에서, 팔자수염을 기르고도 묘하게 능청스럽게 입을 놀리는 마술사 사내가 자꾸만 오하나에게 권하고 있었다. 새로 들어온 듯한 반주꾼 아주머니도 어지간히 취해서, 음란하게 웃으며 장단을 맞추었다.

“오하나, 노래 한 곡 어때. 한바탕 놀아 보자고. 오늘 밤은 실컷 놀아 보자니까.”

“좋지, 내가 풍악 도구를 가져오마.”

젊은 곡예사 하나가, 그 역시 살색 타이즈 한 장만 걸친 채로 벌떡 일어서더니, 아직도 옥신각신하고 있는 일촌법사와 자주색 공단 사나이의 곁을 지나, 통나무를 짜 올려 만든 이층 분장실로 달려갔다.

그 악기가 도착하기도 전에, 팔자수염 마술사는 술통 가장자리를 두드리며 우렁찬 목청을 돋우어 삼곡 만자이를 부르기 시작했다. 공볼 곡예 처자 두셋이 들뜬 목소리로 거기에 화답했다. 그런 자리에서 늘 도마 위에 오르는 건 일촌법사 미도리 씨였다. 그를 비웃어 엮어 넣은 만담 가락이 잇따라 흘러나왔다.

제각기 떠들고 깐죽거리던 패거리들이 차츰 그 노랫가락에 휘말려 들더니, 마침내 전원의 합창이 되었다. 어느 틈엔가, 아까 그 젊은 곡예사가 가져왔을 샤미센, 작은북, 꽹과리, 박자목 따위의 반주가 어우러져 들어와 있었다. 귀를 멀게 할 듯한 기묘한 일대 교향악이 천막을 뒤흔들었다. 가사가 끊기는 대목마다 무시무시한 고함과 박수갈채가 터졌다. 사내도 여자도 술기운이 오를수록 점점 미친 듯이 들썩거렸다.

그 와중에도 일촌법사와 자주색 공단은 여전히 옥신각신하고 있었다. 미도리 씨는 어느새 통나무를 놓고는 헤헤 웃으면서 새끼 원숭이처럼 도망쳐 다니고 있었다. 그렇게 되니 그는 제법 잽쌌다. 덩치 큰 자주색 공단은 모자라 보이는 일촌법사에게 우롱당하자 슬슬 부아가 치미는 모양이었다.

“이 마메조 놈, 이따 두고 봐라, 우는 꼴을 보일 거다.”

그는 그런 위협의 말을 내지르며 뒤를 쫓았다.

“미안, 미안.”

서른 줄 사내 얼굴의 일촌법사는 초등학생처럼 진지하게 도망 다니고 있었다. 자주색 공단 사나이에게 붙들려 술통 안에 머리를 처박히는 것이, 그에게는 얼마나 무서운 일이었으랴.

그 광경은 이상하게도 내게 카르멘의 살해 장면을 떠올리게 했다. 투우장에서 들려오는 광포한 음악과 함성에 맞춰 쫓고 쫓기는 호세와 카르멘. 어쩐 까닭인지, 아마도 의상 때문이었으리라, 나는 그것을 연상했다. 일촌법사는 새빨간 어릿광대 의상을 걸치고 있었다. 그것을 살색 타이즈 차림의 자주색 공단이 뒤쫓는 것이다. 샤미센과 꽹과리와 작은북과 박자목이, 그리고 자포자기한 듯한 삼곡 만자이가, 그것을 부추겨 댔다.

“자, 이제 잡았다, 이놈의 자식.”

마침내 자주색 공단이 함성을 질렀다. 가엾은 미도리 씨는 그의 우람한 두 손아귀에서 새파랗게 질려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비켜라, 비켜.”

그는 발버둥 치는 일촌법사를 머리 위로 번쩍 치켜들고 이쪽으로 다가왔다. 모두 노래를 그치고 그쪽을 쳐다보았다. 두 사람의 거친 콧김 소리가 들려왔다.

앗 하는 사이에, 거꾸로 매달려 들려 올린 일촌법사의 머리가 첨벙 술통 속에 처박혔다. 미도리 씨의 짧은 두 팔이 허공을 허우적댔다. 찰박찰박 술방울이 사방으로 튀었다.

붉고 흰 줄무늬 살색 타이즈, 살빛 그대로의 살색 타이즈, 혹은 반라의 남녀가 서로 손을 맞잡고 무릎을 마주 댄 채 깔깔거리며 구경하고 있었다. 누구도 이 잔혹한 놀이를 말리려 하지 않았다.

실컷 술을 들이켜게 된 일촌법사는, 이윽고 옆으로 내동댕이쳐졌다. 그는 둥글게 몸을 웅크린 채 백일해처럼 콜록거렸다. 입에서, 코에서, 귀에서, 누런 액체가 줄줄 쏟아졌다. 그의 고통을 부추기듯, 또다시 삼곡 만자이의 합창이 시작되었다. 차마 들어 줄 수 없는 욕설과 비방이 거듭되었다.

한차례 콜록거리고 나서, 늘어진 송장처럼 옆으로 누워 있는 일촌법사 위에서, 살색 타이즈 차림의 오하나가 빙그르르 춤을 추었다. 살집 좋은 그녀의 다리가 자꾸자꾸 그의 머리 위를 타 넘었다.

박수와 함성과 박자목 소리가 귀를 먹먹하게 만들 만큼 끊임없이 이어졌다. 이제 그 자리에 제정신인 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 누구나 미친 사람처럼 고래고래 소리쳤다. 오하나는 빠른 가락의 만담 노래에 맞춰 광포한 집시 춤을 줄곧 추어 댔다.

일촌법사 미도리 씨는 가까스로 눈을 뜰 수 있었다. 으스스한 얼굴이 성성이처럼 새빨개져 있었다. 어깨로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비틀비틀 일어서려 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춤추다 지친 공볼 곡예 처자의 큼지막한 엉덩이가 그의 눈앞으로 흔들흔들 다가왔다. 그러더니, 일부러였는지 우연이었는지, 그녀는 일촌법사의 얼굴 위에 그대로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하늘을 보고 짓눌린 미도리 씨는 괴로운 신음을 흘리며 오하나의 엉덩이 밑에서 허우적거렸다. 거나하게 취한 오하나는 미도리 씨의 머리 위에 올라앉아 말 타기 흉내를 냈다. 샤미센 가락에 맞춰 “하이, 하이” 추임새를 넣으면서, 손바닥으로 짝짝 미도리 씨의 뺨을 후려쳤다. 좌중의 입에서 어이없는 폭소가 터져 나왔다. 요란한 박수가 일었다. 하지만 그때 미도리 씨는 커다란 살덩이에 깔려, 숨도 쉬지 못한 채 반죽음의 고통을 맛보고 있었던 것이다.

한참 만에 겨우 풀려난 일촌법사는 여전히 능글맞게, 얼빠진 듯한 웃음을 띠며 상반신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농담 같은 어조로,

“너무하네.”

하고 중얼거렸을 뿐이었다.

“야, 공받기 놀이나 한판 하지 그래?”

갑자기, 철봉 솜씨가 좋은 청년이 일어서며 외쳤다. 모두 ‘공받기 놀이’의 의미를 익히 알고 있는 눈치였다.

“좋지.”

한 곡예사가 응수했다.

“그만들 둬, 그만둬, 너무 가엾잖아.”

팔자수염 마술사가 차마 못 보겠다는 듯 끼어들었다. 그 사람만은 면 플란넬 양복에 빨간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자, 공받기다, 공받기.”

마술사의 말 따위는 들은 척도 않고, 그 청년은 일촌법사 쪽으로 다가갔다.

“이봐, 미도리 씨, 시작한다.”

그렇게 말하기가 무섭게, 청년은 불구자를 끌어 일으켜서 그의 미간을 손바닥으로 퍽 하고 갈겼다. 일촌법사는 떠밀린 기세로, 마치 공처럼 빙글빙글 돌면서 뒤로 휘청 물러갔다. 그러자 그쪽에는 또 한 청년이 있어서 그를 받아 멈춰 세우더니, 불구자의 어깨를 움켜쥐고 자기 쪽으로 돌려세우고는 또 퍽 하고 이마를 갈겼다. 가엾은 미도리 씨는 다시 빙글빙글 돌면서 앞쪽 청년에게 되돌아왔다. 그러고서 이 기괴하고 잔인한 캐치볼이 끝없이 거듭되었다.

어느새 합창은 이즈모겐 가락으로 바뀌어 있었다. 박자목과 샤미센이 마구 울렸다. 휘청휘청 비틀거리는 불구자는 집요한 미소를 머금은 채 그 기묘한 역할을 계속하고 있었다.

“이제 그런 시시한 짓거리는 그만두지. 다 같이 재주놀음이나 한바탕 해 보자고.”

불구자 학대에 싫증이 난 누군가가 외쳤다.

의미 없는 고함과 미친 듯한 박수가 그에 화답했다.

“본 종목으론 안 돼. 다들 숨겨 둔 재주를 내놓는 거야. 알겠나?”

자주색 공단 사나이가 명령조로 호통쳤다.

“그럼 첫 타자는 미도리 씨부터다.”

누군가가 짓궂게 거기에 맞장구쳤다. 와아 박수가 일었다. 기진맥진해 그 자리에 쓰러져 있던 미도리 씨는, 이 막무가내인 제안마저 속을 알 수 없는 웃는 낯으로 받아들였다. 그의 으스스한 얼굴은 울어야 마땅한 때에도 웃었다.

“그럼 좋은 생각이 있어!” 새빨갛게 취한 미인 공볼 곡예사 오하나가 비틀비틀 일어서며 외쳤다.

“마메 짱, 너 말이야. 수염 아저씨가 하는 그 대마술을 한번 해 보지 그래. 한 치 시험 다섯 푼 시험, 미인 효수 마술 있잖아, 응, 좋잖아. 한번 해 봐.”

“에헤헤헤헤헤.” 불구자는 오하나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며 웃었다. 억지로 마신 술 탓에, 그의 눈은 묘하게 게슴츠레해져 있었다.

“그래, 마메 짱은 나한테 반했지? 그러니까 내 부탁이라면 뭐든 들어줄 거잖아. 내가 그 상자 안에 들어가 줄게. 그래도 싫어?”

“야야, 일촌법사 호색남이로구나!”

또다시 찢어질 듯한 박수와 웃음소리.

마메조와 오하나, 미인 효수 대마술. 이 기묘한 짝패가 술취한 무리를 흥분시켰다. 여럿이 흐트러진 걸음으로 대마술의 무대 장치를 차리기 시작했다. 무대 정면과 좌우에 검은 막이 내려졌다. 바닥에는 검은 깔개가 깔렸다. 그러고서 그 앞에 관처럼 생긴 나무 상자와 탁자 하나가 들려 나왔다.

“자, 시작이다, 시작이오.”

샤미센과 꽹과리와 박자목이 정해진 전주를 시작했다. 그 가락에 떠밀려, 오하나와 그녀에게 이끌려 나온 불구자가 정면에 모습을 드러냈다. 오하나는 몸에 착 달라붙는 살빛 셔츠 한 장만 걸친 차림이었다. 미도리 씨는 헐렁헐렁한 빨간 광대 옷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그쪽은 변함없이, 큰 입으로 능글능글 웃고 있었다.

“소갯말을 늘어놔 봐라, 소갯말을!”

누군가가 호통쳤다.

“곤란한데, 곤란해 죽겠는데.”

일촌법사는 투덜투덜 그런 말을 늘어놓으면서도, 어쨌든 무어라고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에에, 자아 여기 여러분께 선보일 것은, 신묘하고 불가사의한 대마술, 미인 효수라 하옵는데, 여기 이 소녀를 곁의 상자 속에 넣고, 열네 자루 일본도를 가지고서, 한 치 시험, 다섯 푼 시험, 사방팔방에서 꼬치 꿰듯 찔러 대는 것이올시다. 에에, 헌데, 그것만으로는 흥이 좀 덜한 듯하옵니다. 이리 칼질당한 소녀의 목을, 푹, 잘라 내, 여기 이 탁자 위에, 효수해 보이오리다아. 핫!”

“기막히다, 기막혀!” “감쪽같다!” 칭찬인지 야유인지 모를 외침이 자포자기한 박수에 섞여 들려왔다.

백치처럼 보이는 일촌법사이건만, 과연 본업이라 그런지 무대에서 늘어놓는 입담만은 일품이었다. 평소 팔자수염 마술사가 하는 것과 어조도 문구도 한 치도 다르지 않았다.

이윽고 미인 공볼 곡예사 오하나는 요염하게 한 번 인사를 하고, 나긋한 몸을 그 관처럼 생긴 상자 속에 감추었다. 일촌법사는 거기에 뚜껑을 덮고 커다란 자물쇠를 채웠다.

한 다발의 일본도가 그 자리에 던져져 있었다. 미도리 씨는 한 자루씩 그것을 집어 들고, 한 번씩 바닥에 내리꽂아 가짜가 아님을 보인 다음, 상자의 앞뒤 좌우에 뚫린 작은 구멍으로 꿰어 넣어 갔다. 한 칼이 들어갈 때마다 상자 안에서 끔찍한 비명이 — 매일같이 구경꾼들을 전율시키던 그 비명이 — 새어 나왔다.

“꺄아악, 살려 줘, 살려 줘, 살려 줘, 아악, 이놈, 이놈, 이 자식 진짜로 날 죽일 작정이야. 아악, 살려 줘, 살려 줘, 살려 줘……”

“와하하하하하하.” “기막히다, 기막혀!” “감쪽같다!” 구경꾼들은 신이 나서 제각기 고함을 치고 손뼉을 쳐 댔다.

한 자루, 두 자루, 세 자루, 칼의 수가 점점 늘어 갔다.

“이제야 알겠느냐, 이 잡것아.” 일촌법사는 연극조로 시작했다. “잘도, 잘도 이 몸을 우롱했겠다. 불구자의 한이 어떤 것인지 알겠느냐, 알겠느냐, 알겠느냐.”

“아악, 아악, 살려 줘, 살려 줘, 살려 줘 ——”

그러자 사방으로 꿰뚫린 상자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덜그럭덜그럭 흔들렸다.

구경꾼들은 이 박진감 넘치는 연출에 정신을 잃었다. 우레 같은 박수가 이어졌다.

마침내 열네 번째 칼이 꽂혔다. 오하나의 비명은 빈사 상태의 부상자 같은 신음으로 변해 갔다. 이미 말이 되지 못하는 끄응 끄응 하는 소리뿐이었다. 이윽고 그 소리마저 까무라지듯 사라져 버리자, 지금까지 흔들리던 상자가 뚝 하고 정지했다.

일촌법사는 색색거리며 어깨로 숨을 몰아쉬면서 그 상자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이마는 물에 잠긴 듯이 땀으로 흥건했다.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그렇게 선 채로 꼼짝하지 않았다.

구경꾼들도 묘하게 입을 다물었다. 죽은 듯한 침묵을 깨뜨리는 것은, 술기운으로 거칠어진 모두의 숨소리뿐이었다.

한참 뒤, 미도리 씨는 슬그머니 슬그머니, 준비된 날검을 집어 들었다. 청룡도처럼 톱니가 들쭉날쭉한 폭 넓은 칼이었다. 그는 그것을 다시 한번 바닥에 내리꽂아 잘 드는 칼임을 보인 뒤, 자물쇠를 풀고 상자 뚜껑을 열었다. 그러고는 그 안에 그 청룡도를 쑤셔 넣더니, 정말로 사람 목이라도 자르는 듯이 사각사각 하는 소리를 냈다.

다 잘랐다는 시늉으로 날검을 내던지고, 무엇인가를 소매로 가린 채 곁의 탁자 쪽으로 가서, 쿵 하는 소리와 함께 그것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가 소매를 치우자, 오하나의 새파랗게 질린 잘린 머리가 나타났다. 잘린 단면에서는 새빨간 생생한 핏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것이 잇꽃 물감 따위라고는 누구도 생각할 수 없었다.

얼음처럼 차가운 것이 내 등줄기를 타고 스르르 정수리까지 치달았다. 나는 그 탁자 밑에 두 장의 거울이 직각으로 맞붙여져 있고, 그 뒤편에 마룻바닥 아래 빠져나오는 길로 기어 나온 오하나의 몸뚱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 정도는 그리 진귀할 것도 없는 마술이었다. 그런데도 이 무서운 예감은 어찌 된 일일까. 평소의 부드러운 마술사와는 달리 그 불구자의 으스스한 용모 탓이었을까.

시커먼 배경 가운데, 진홍빛 옷을 닮은 새빨간 광대 옷을 걸친 일촌법사가, 두 다리 떡 벌리고 우뚝 서 있었다. 그 발치에는 핏자국이 묻은 날검이 굴러 있었다. 그는 구경꾼들 쪽을 향해, 소리 없이 얼굴 가득한 웃음을 웃고 있었다…… 그런데, 저 희미한 소리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혹시, 하얗게 드러낸 불구자의 이와 이가 맞부딪치는 소리는 아닐까.

구경꾼들은 여전히 숨을 죽이고 있었다. 서로의 얼굴을 흘끔거리며 훔쳐보았다. 마치 무서운 것이라도 보는 양. 이윽고 그 자주색 공단 사나이가 우뚝 일어섰다. 그러고는 탁자를 향해 성큼성큼 두세 걸음을 내디뎠다. 과연 그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호호호호호호호호.”

돌연 명랑한 여자의 웃음소리가 일었다.

“마메 짱, 솜씨 좋네. 호호호호호호호.”

두말할 것 없이 오하나의 목소리였다. 그녀의 새파랗게 질린 머리가 탁자 위에서 웃었던 것이다.

그 머리를 일촌법사는 다짜고짜 다시 소매로 가렸다. 그러고는 성큼성큼 검은 막 뒤편으로 들어가 버렸다. 뒤에는 장치 달린 탁자만이 남아 있었다.

구경꾼들은, 너무도 멋들어진 불구자의 연기에, 한동안은 한숨만 내쉴 따름이었다. 정작 마술사조차 눈을 휘둥그레 뜨고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러더니 이윽고 와아 하는 함성이 천막을 뒤흔들었다.

“헹가레다, 헹가레!”

누군가가 그렇게 외치자, 그들은 한 무리가 되어 검은 막 뒤편으로 돌진했다. 만취한 자들은 그 통에 발이 엉켜 우당탕 겹쳐 쓰러졌다. 그중 어떤 자는 일어나서 또 비틀비틀 달려갔다. 텅 빈 술통 둘레에는 이미 곯아떨어져 버린 자들이, 어시장의 다랑어처럼 나동그라져 있었다.

“어어이, 미도리 씨이.”

검은 막 뒤편에서 누군가의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미도리 씨, 숨어 있을 거 없어. 나오라고.”

또 누군가가 외쳤다.

“오하나 언니이.”

여자 목소리가 불렀다.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나는 말로 다할 수 없는 공포에 떨었다. 아까 그것은, 정말로 오하나의 웃음소리였던 것일까. 혹여, 속을 알 수 없는 그 불구자가 마룻바닥의 장치를 막아 버리고 진짜로 그녀를 찔러 죽여 효수해 놓은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 목소리는, 그것은 죽은 자의 목소리가 아니었던가. 우매한 곡예사들은, 그가 팔인예(八人芸)라 일컫는 마술을 모르는 것일까. 입을 다문 채 뱃속에서 소리를 내어 죽은 것에게 말을 시키는, 그 팔인예라는 기괴한 술법을. 그것을, 그 괴물이 익히지 않았다고 어떻게 단정할 수 있단 말인가.

문득 정신을 차려 보니, 천막 안에 옅은 연기가 자욱했다. 곡예사들의 담배 연기치고는 어딘가 이상했다. 흠칫한 나는 단숨에 객석 한쪽 구석으로 달려갔다.

아니나 다를까, 천막 자락을 검붉은 화염이 너울너울 핥고 있었다. 불은 이미 천막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가까스로 타들어 가는 천을 빠져나와 바깥의 너른 빈터로 나섰다. 드넓은 풀밭에는 새하얀 달빛이 빈틈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발걸음 닿는 대로 가까운 인가를 향해 달렸다.

돌아보니 천막은 어느새 삼분의 일까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물론 통나무 발판이며 객석의 판자에도 불이 옮겨붙어 있었다.

“와하하하하하하하하하.”

무엇이 그리 우스운지, 그 화염 속에서 곤드레만드레 취한 곡예사들이 미친 듯이 웃어 대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누구일까, 천막 가까운 언덕 위에서, 어린아이 같은 사람 그림자가 달을 등진 채 춤추고 있었다. 그는 수박을 닮은 둥근 것을 등롱처럼 늘어뜨려 들고서, 미친 듯이 춤을 추고 있었다.

나는 엄청난 공포에 그 자리에 못 박힌 채 그 기이한 검은 그림자를 응시했다.

사내는 늘어뜨리고 있던 둥근 것을 두 손으로 자기 입가로 가져갔다. 그러고는 발을 동동 구르면서 그 수박 같은 것을 덥석 베어 물었다. 떼었다 베어 물고, 떼었다 베어 물고, 더없이 즐거운 듯 춤을 이어갔다.

물 같은 달빛이, 그 변화무쌍한 춤사위의 그림자를 새카맣게 도드라지게 하고 있었다. 사내의 손에 들린 둥근 것에서, 그리고 그 자신의 입술에서, 짙고 검은 액체가 뚝뚝 떨어지고 있는 것까지도 또렷하게 분간되었다.

●도서 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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