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
신극계의 오늘과 어제
기시다 구니오(岸田國士)
一
십 년 전――관동대지진(關東大震災) 직후――의 신극계(新劇界)는, 희곡의 측면에서 보나 무대 실제 운동의 측면에서 보나, 분명 화려한 시대였다. 다만 그 시대의 신극(新劇, Shingeki)은 아직 서양 연극에 기대어서만 존재하는 신극이었다. 서양의 새로운 연극적 경향이 잇달아 소개되고, 그 신선함으로 신극계 전반이 어떻게든 명맥을 이어가던 상태였다.
극작가 쪽도 마찬가지였다. 외국에서 들어오는 갖가지 새로운 작품에서 직간접으로 영향과 자극을 받아 그것이 창작 의욕의 토대가 되어 있었음은 틀림없다. 특히 무대 쪽에서는 서양 근대극 운동(近代劇運動)에 이어 일어난 새로운 연출 시도들이 일본의 젊은 연출가들 사이에서 실험되면서, 이른바 “연출가 만능 시대(演出家万能時代)”를 만들어냈다.
그런 상황이었던 까닭에, 당시의 신극은 세간의 이목을 끌 만한 계획이 잇달아 준비되어 있었다. 그것을 실행하기만 하면 관객을 일단 만족시킬 수 있었고, 당사자들도 어깨에 힘을 줄 수 있었다. 한마디로, 당시 쓰키지 소극장(築地小劇場)이 대표했던 일부 연극 운동은, 오늘의 시점에서 보면 바로 그런 상황에서 자라난 것이었다.
그런데 서양에서도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한동안은 연극 분야에서 활기 있는 여러 운동이 일어나고 야심 찬 신진 작가들이 속출했으나, 점차 제자리를 찾으면서 이른바 조용한 시기로 접어들었다. 이것은 한편으로 극단(劇壇)의 침체이기도 하다.
그렇게 되자 일본에서는 더 이상 새로운 씨앗을 들여올 방법도 없어지고, 새 수법으로 사람들의 눈을 끄는 신극의 방식이 통하지 않게 되었다. 한때 프롤레타리아 연극(プロレタリヤ演劇)이라는 특수한 연극이 성행한 시절도 있었으나, 이 역시 내부로도 외부로도 막혀버렸다. 그런 오늘날, 신극 부진을 개탄하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일어나고 기세를 되찾으려는 노력이 조금씩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작 어떻게 해야 오늘의 신극이 다시 융성해질 수 있는가 하는 실제 문제에 부딪히면, 그 인식마저 흐릿하고 확고한 목표를 세워 나아가려는 이도 없다.
나 개인의 생각으로는, 십 년 전 신극의 역할은 이미 끝났다. 그것을 옛 모습 그대로 오늘날 다시 융성하게 만들겠다는 것은 대체로 무의미한 일이다. 신극의 새로운 목표와 사명이 지금 여기서 발견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새로운 사명이자 목표인가. 이미 오늘날 일부 젊은 세대 사이에서 논의되고 있듯이, 연극의 본질 연구가 그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점을 설명하려면 상당히 복잡한 이야기가 따르지만, 한마디로 말하면 이렇다. 일본 연극에는 일본 연극의 전통이 있고, 서양 연극에는 또 그 전통이 있다. 이 두 전통이 일본의 새로운 연극 위에서 어떻게 다루어져야 하는가를 정확하게 연구하고, 그 결과를 무대 위에서도 희곡 창작 위에서도 실천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
실제로 일본의 신극은 일본 연극의 전통을 버리고 서양 연극의 전통을 따른 것이라고 지금껏 생각해온 이도 있었던 것 같으나, 내가 보기에 꼭 그렇지만은 않다. 예컨대 십 년 전까지 발표된 신극의 희곡을 무대에 올릴 때, 배우들이 과연 새로운 연기를 바탕으로 그 희곡을 무대화했는가. 당시 배우들이 낡은 일본적 연기와 어떻게 절연하고 새로운 서양적 연기를 습득했는가. 이렇게 따져보면, 표면적으로야 어떻게든 꾸몄다 하더라도, 본질적으로 일본의 낡은 연극 전통에서 벗어나지 못한 배우의 손으로 버젓이 신극이라는 이름의 무대가 만들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작가 쪽에서도, 서양 희곡에서 여러 가지를 배우면서도, 막상 그것이 무대의 이미지로 구현될 때에는 자연히 그런 배우들의 연기와 결부되는 탓에, 작품 자체는 어디까지나 일본 연극 전통에 뿌리를 둔 무대적 효과 위주의 것이 되어버린다. 이 상태가 십 년이 지난 오늘 뚜렷이 표면으로 드러났다. 오늘날 가장 순수한 입장에서 활동하는 젊은 극작가들은――가장 무대적이기를 바라는 이들조차――기존 배우들의 연기에 더 이상 기대지 않는다. 거기에는 일본 연극 전통 속에서는 찾을 수 없는, 달리 말하면 보다 서양적인 연기의 본질을 추구하는 자세가 있다.
오늘날 신극 배우의 기예 미숙이 두루 거론되고 있으나, 그것은 앞서 말했듯이 지금까지의 신극이 배우의 연기에 보다 근본적인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연극의 본질에 대해 극히 임시방편적인 해석밖에 내리지 않아왔으니, 이런 결과를 낳으리라고는 십 년 전에 나 같은 사람도 예언했을 정도였다.
二
오늘의 신극이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역할을 다한 자는 물러나면 그만이고, 지금까지의 신극은 일단 사라져도 아깝지 않다. 다만 겨우 숨만 이어가며 오늘도 연극계 표면에 부유하고 있는 것은, 일부 열성적인――혹은 달리 할 일도 없는――배우들이 신극 배우로서의 꿈을 이어가며, 막막해 보이는 운명이 언젠가는 트이리라는 기대를 소박한 무대 위에서 품고 있기 때문이다.
문학으로서의 희곡은 어느새 그러한 무대들과도 절연하여 나아가야 할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물론 뛰어난 연극이 없는 나라에서 뛰어난 희곡이 태어날 리 없으므로, 이른바 창작 희곡의 수도 지극히 미미하기는 하다. 그러나 십 년 전에 비하면 그 창작 희곡들은 점점 진짜라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내용적으로 반드시 뛰어나다고는 할 수 없을지 몰라도, 희곡의 본질이라는 점에서 지금까지의 희곡에서는 볼 수 없었던 신선함이 있다. 따라서 기존 배우들이 연기술을 바꾸지 않는 한 무대 위에서 이것을 살려낼 수 없는 요소를 이미 상당히 갖추게 되었다.
오늘의 신극을 진정한 신극으로 육성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런 창작 희곡의 완전한 연출을 꾀하여 일반 관객에게 새로운 연극의 매력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새로운 배우의 연기 훈련이 첫째 급무이며, 나아가 새로운 배우의 출현으로 비로소 새로운 극작가가 나타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져야 한다.
따라서 이 의미에서의 진정한 신극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아직도 하루아침의 노력으로는 어림도 없다.
三
신극이라 해도 그 안에는 여러 경향과 장르가 포함되어 있으므로, 각각의 경향과 장르를 내걸고 갖가지 무대가 펼쳐지는 것은 오히려 바람직하다. 그러나 어떤 경향이든 어떤 장르든, 단순한 오락적 흥행인 경우는 별개로 하고, 적어도 예술 행위라 이름 붙여지는 한, 연극으로서의 본질을 높이 내걸고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역사가 증명하듯, 어떤 연극이든 문학에 등을 돌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뿐만 아니라, 문학 중에서도 특히 극문학(劇文學)이라는 독특한 영역을 곧장 개척해나가는 이가 어느 시대에도 연극의 리더가 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따라서 오늘날 연극의 지도 정신이라는 것도 결국 가장 진지한 극문학가, 재능 있는 극작가에 의해 주창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젊은 세대 속에서 끊임없이 그런 인물들의 출현을 기대하고 있으나, 수많은 연극 잡지를 두루 살펴보아도 시대를 이끌 만한 재능은 좀처럼 발견하기 어렵다.
그러나 적어도 내가 아는 범위 안에서는, “극작(劇作)”의 동인들――가와구치 이치로(川口一郎), 사카나카 마사오(阪中正夫), 고야마 유시(小山祐士), 다나카 지카오(田中千禾夫), 이가야마 세이조(伊賀山精三)――의 장래를 촉망하며, 평론가로서는 쓰지 규이치(辻久一), 스가와라 다쿠(菅原卓)에게 기대를 걸고 있다.
이 여러분은 다행히 한 무리가 되어 새로운 연극의 지도 원리를 찾는 데 힘쓰며 그 실천에 전념하고 있으니, 그 결과가 머지않아 커다란 열매를 맺어주기를 바란다. (구술)(1934년 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