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심의 소녀 — 3
의심의 소녀 — 3
혹독한 서중(暑中)에 기다리던 추절이 기별 없이 와서 맑고 시원한 바람에 오동잎이 힘없이 떨어지매 년년이 변치 않고 돌아오는 추석명절이 금년에도 돌아왔다. 도(都)에나 비(鄙)에나 성묘 가는 사람이 조조부터 끊일 새 없이 각기 조선(祖先) 부모 부처 자녀의 고혼(故魂)을 위로키 위하여 술이며 음식을 준비하여 남녀노소를 물론하고 북촌 길로 향한다. 새마을 동리의 범네와 옹도 누구의 묘에 가는지 기중에 끼었더라. 어느덧 해는 모란봉 서편에 기울어지고 능라도 변에 연연(涓涓)한 세파(細波)는 금색을 대(帶)하였다.
이슬아침과 주간에 그리 분요(紛擾)하던 성묘인들도 지금은 끊어져 벌써 청류벽 아래 신작로에는 얼근히 취하여 혼자 중얼거리며 돌아오는 사람이 사이사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대동강 건너 새마을 동리를 향하고 바삭바삭 모래를 울리는 노유(老幼) 두 사람의 그림자가 보인다. 심히 피로하여 귀촌하는 옹과 범네라. 범네의 발뒤꿈치에 내려드리운 검은 머리가 제 윤에 번지르하다. 대리석으로 조각한 듯이 흰 양협에 앞이마 털이 한두 올 늘어져 시시로 불어오는 청풍에 빛날 리어 그의 아름다움을 더하였다. 풋남순인 치마에 담황색 겹저고리 입고 분홍신을 신었다. 실로 새마을 동리 소녀들과는 ‘군계중에학’이라. 옹도 무언, 소녀도 무언. 소녀의 어여쁜 얼굴에는 어린 아해에게는 없을 비애에 지친 빛이 보인다. 강안에는 석향을 준비하는 촌부들이 있다. 처음 보는 바가 아니로 대 이날은 더욱이 호기심을 일으켜가며 주목한다. 기중 한 아이
“어드메 살던 아해인지 곱기도 하다.” 또 한 아이
“늘 보아도 늘 곱다. 한 번 실컷 보았으면 좋겠다.” 또 하나는 하하 웃으며
“범네야 어디 갔다 오니?”하고 묻는다. 범네는 촌부들을 향하여 눈만 웃으며 입 다물은 채 옹의 뒤를 따른다. 이때에 대동강 외 우뚝 솟은 난벽(卵壁)의 이층 양옥에서도 이편을 향하여 망원경을 눈에 대이고 바라보는 외국인인지 조선인인지 분별키 어려운 신사가 있다. 신사는 급히 상노를 부른다. 상노는 주인의 명을 받아 문전 녹색 소주(小舟)에 제등을 달고 속히 저어 강안을 향하여 배 대었을 때는 옹과 범네가 새마을에 들어갔을 때이라.
신사는 새마을 가는 길을 두고 다른 동리의 길로 향하였다. 그 신사가 낙심한 안색으로 강안에 돌아왔을 때에는 동천에 둥근 달이 맑은 광선을 늘 이어 암흑한 곳 몇 만민에게 은혜 베푼 때이니 평양 대동강문 외에는 전등빛이 반짝반짝 불야성이오 강 위에는 오늘이 좋은 날이라고 선유하는 소선(小船)이 루비 홍옥 같은 등불을 밝히고 남녀 성을 합하여 수심가를 부르며 오르락내리락한다. 신사는 실심한 듯이 강가에서 바라보고 섰다. 한참 만에 힘없이 배에 올라 도로 저어 저편에서 내리어 조국장의 별장으로 들어갔다.
신사는 그 별장 주인인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