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
“아름다운 많은 사람의, 아름다운 많은 꿈을……” 수염 난 사내가 두세 번 가만히 읊조리다가, 뒤를 잇지 못하고 골똘한 표정이다. 등불이 비추는 도코바시라에 기대선 곧은 등이 이때 살짝 앞으로 굽으며, 두 손으로 끌어안은 무릎머리에 험한 산이 솟는다. 좋은 구절을 얻고도 그다음 좋은 구절을 잇지 못하는 것이 분한지, 검고 느슨하게 그어진 눈썹 아래로 편치 않은 눈빛이 빛난다.
“그려도 이루어지지 않으니, 그려도 이루어지지 않으니” 툇마루에 걸터앉아 천하태평으로 책상다리를 한 사내가 받아 읊는다. 진작 익혀둔 선어(禪語)이니 즉흥인 양 둘러댈 셈인가. 빳빳한 머리를 오 부로 쳐올린, 수염을 기르지 않은 둥근 얼굴을 갸웃하며 “그려도, 그려도, 꿈이거니, 그려도, 이룰 길 없네” 하고 우렁차게 읊고는, 까르르 웃으며 방 안의 여인을 돌아본다.
대바구니 안에 뜨거운 빛을 가둬두고, 가만히 켜진 램프를 사이에 두고서, 오른편으로는 지가이다나, 앞으로는 짙푸른 정원을 마주한 자리에 여인이 있다.
“화가시라면 그림으로 그리시지요. 여인이라면 비단을 틀에 펴서, 수를 놓을 일이지요.” 그렇게 말하며 흰 바탕의 유카타 자락을 한쪽으로 슬며시 흩뜨리니, 팥빛 방석 위로 흰 발등이 미끄러지며, 요염하다고는 할 수 없으나 어딘가 정취가 도는 자세가 된다.
“아름다운 많은 사람의, 아름다운 많은 꿈을……” 무릎을 끌어안은 사내가 다시 읊는 뒤를 받아 “수를 놓아본들. 놓은들 누구에게 보내리. 보낼 이가 누구이며” 하고 여인은 짐짓 꾸미지 않은 듯하면서도 살짝 웃는다. 이윽고 붉은 칠을 한 부채 자루로, 흐트러져 볼에 드리운 검은 머리를 성가신 듯 쓸어 넘기니, 자루 끝에 매달린 자줏빛 술이 물결을 치며, 짙푸른 향유 향기 속으로 뛰어 들어간다.
“내게 보내라” 수염 없는 사내가 곧바로 받아치고는 또 까르르 웃는다. 여인의 볼에는 젖빛 살결 안쪽에서 종잡을 수 없는 웃음의 소용돌이가 떠오르고, 눈꺼풀에는 살풋 옅은 홍조가 풀린다.
“수를 놓는다면 무슨 색으로?” 수염 난 사내가 진지하게 묻는다.
“비단을 사면 흰 비단, 실을 사면 은실, 금실, 사라질 듯한 무지개 실, 밤과 낮의 경계인 어스름 실, 사랑의 빛깔, 한의 빛깔도 물론 있을 테지요.” 여인은 눈을 들어 도코바시라 쪽을 바라본다. 시름을 풀어 정성껏 다듬어낸 구슬이, 거센 불에는 견디지 못할 만큼 서늘하다. 시름의 빛깔은 예부터 검은빛이다.
옆집으로 통하는 골목길을 경계로 심어둔 네댓 그루의 노송나무에 구름이 모여, 방금 그쳤던 장맛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한다. 둥근 얼굴의 사내는 어느새 방석을 버리고 툇마루로부터 두 다리를 늘어뜨리고 있다. “저 나뭇가지는 가지 친 적이 한 번도 없는 듯한데. 장마도 어지간히 이어졌어. 그치지도 않고 잘도 내리는군.”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다, 문득 생각난 듯 자기 무릎머리를 손바닥 옆날을 세워 또각또각 두드린다. “각기인가, 각기인가.”
남은 두 사람은 꿈의 시인지, 시의 꿈인지, 좀처럼 갈피 잡기 어려운 이야기의 실마리를 엮어간다.
“여자의 꿈은 사내의 꿈보다 아름답겠지” 사내가 그러자 “꿈에서나마 아름다운 나라로 가지 않으면” 하고 이 세상이 더러워졌다는 듯한 얼굴이다. “세상이 낡아져, 더러워졌다는 말인가” 묻자 “더러워졌고말고요” 하며 부채로 가볍게 옥 같은 살결에 바람을 보낸다. “낡은 항아리에는 묵은 술이 들어 있는 법, 맛보시지” 사내도 거위 깃을 접은, 자단 자루를 단 깃 부채로 무릎 언저리를 가만히 부친다. “옛 세상에 취할 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여인은 어디까지나 토라진 기색이다.
이때 “각기인가, 각기인가” 하며 줄곧 자기 다리를 매만지던 사내가, 갑자기 무릎머리를 치던 손을 들어 두 사람을 쉿 하고 제지한다. 세 사람의 목소리가 한꺼번에 끊긴 사이로, 쿠쿠— 하고 날카로운 새 한 마리가 노송 가지 위를 스치며 뒤편 선사(禪寺) 쪽으로 빠져 나간다. 쿠쿠—.
“저 소리가 두견인가” 깃 부채를 내려놓고 이 사람도 툇마루로 기어 나온다. 올려다보는 처마 끝으로 비스듬히 검은 비가 얼굴에 와닿는다. 각기를 신경 쓰는 사내가 손가락을 세워 곤(坤) 방향을 가리키며 “저쪽이야” 한다. 데쓰규지 본당 위쯤에서 쿠쿠—, 쿠쿠—.
“한 마디에 두견인 줄을 알았네. 두 마디에 좋은 소리라고 여겼고” 다시 도코바시라에 기대며 즐거운 듯 말한다. 이 수염 난 사내는 두견을 태어나 처음 들어본 모양이다. “한눈에 보고 곧 반하는 것도, 그런 식일까요” 여인이 묻는다. 별로 부끄러워하는 기색도 보이지 않는다. 오 부 깎이가 몸을 돌리며 “저 소리는 가슴이 후련해지는 것 같지만, 반하면 가슴은 답답해지겠지. 반하지 말 것. 반하지 말 것……. 아무래도 각기인 듯해” 엄지로 정강이에 옴팡 자국을 내본다. “구인(九仞)의 산에 한 삼태기를 더하는 격. 더하지 않으면 모자라고, 더하면 위태롭지. 보고 싶은 사람은 만나지 않는 편이 낫겠어” 깃 부채가 다시 움직인다. “그렇지만 쇳조각이 자석을 만난다면?” “처음 만나도 인사쯤은 없을 테지” 엄지로 낸 자국을 거꾸로 쓸며 시치미를 뗀다.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데, 이게 그것이로구나 알아채는 게 신기해” 그렇게 말하며 짐짓 수염을 비비 꼰다. “나는 우타마로가 그린 미인을 알아본 셈인데, 그림을 살아 움직이게 할 묘안은 없을까” 다시 여인 쪽으로 돌아앉는다. “저로서는…… 알아채신 그분이 아니고서는요.” 부채 술을 가는 손가락에 감으며 답한다. “꿈으로 만들면, 그 자리에서 살아나지” 예의 수염 난 사내가 무심히 답한다. “어떻게요?” “내 것은 이렇다네” 막 풀어놓으려는 찰나, 모깃불이 꺼지고, 어둠 속에 숨어 있던 모기가 불쑥 나타나 목덜미께를 따끔 찌른다.
“재가 눅눅해진 모양이네요” 여인이 모기 향통을 끌어당겨 뚜껑을 여니, 붉은 비단실로 묶어둔 모깃불 재가 사르르 흔들리며 연기를 피운다. 동쪽 옆집에서 거문고와 퉁소를 맞추는 소리가 수국 덤불을 비집고 손에 잡힐 듯이 들려오기 시작한다. 살펴보니 활짝 열어둔 좌식 방의 등불마저 어른어른 보인다. “어떤가” 하나가 말하자 “그저 그런 솜씨야” 하나가 답한다. 여인 혼자 잠자코 있다.
“내 것은 이렇다네” 이야기가 다시 본디 자리로 돌아온다. 다시 불을 댕긴 모기 향의 연기가 통에 뚫린 세 구멍을 빠져나와 세 줄기 연기가 된다. “이번엔 붙었네요” 여인이 말한다. 세 줄기 연기가 뚜껑 위에서 한데 뭉쳐 갈색 구슬을 이루나 싶었는데, 비를 머금은 바람이 휙 불어와 흩어 놓는다. 뭉치기 전에 흩뜨려질 때에는 세 줄기 연기가 세 개의 고리를 그리며, 검은 칠에 마키에를 뿌려둔 통 둘레를 빙빙 돌아간다. 어느 것은 느리게, 어느 것은 빠르게 돈다. 또 어느 때에는 고리를 그릴 틈도 없이 흐트러진다. “다비(茶毘)다, 다비다” 둥근 얼굴의 사내가 갑자기 화장터의 광경을 떠올린다. “모기의 세상도 편하지만은 않겠지” 여인은 인간을 모기에 빗댄다. 본래 자리로 돌아가던 이야기도 모깃불과 함께 흩어져버렸다. 이야기를 꺼낸 사내는 굳이 이어가려 하지도 않는다. 세상은 죄다 이런 식임을 일찌감치 알고 있다.
“꿈 이야기는요” 한참 만에 여인이 묻는다. 사내는 옆에 놓아둔 양피 표지에 주서(朱書)로 책 이름을 박아 넣은 시집을 집어 무릎 위에 둔다. 읽다 만 자리에 상아를 얇게 깎아 만든 종이칼이 끼워져 있다. 책 두께를 넘쳐 길게 비어져 나온 부분만은 가는 땀을 흘리고 있다. 손끝으로 만지면 미끈하니 야릇한 글자 자국이 남는다. “이렇게 눅눅해서야 견디기 어렵군” 미간을 찌푸린다. 여인도 “축축해서요” 한 손으로 소맷자락 끝을 쥐어보며 “향이라도 사를까요” 일어선다. 꿈 이야기는 또 미뤄진다.
선덕(宣徳) 향로에 자단 뚜껑이 있고, 자단 뚜껑 한가운데에는 원숭이를 새긴 청옥(靑玉) 손잡이가 달려 있다. 여인의 손이 그 뚜껑에 닿았을 때 “어머, 거미가” 하는 소리에 긴 소맷자락이 옆으로 휘날린다. 두 사내가 함께 도코노마 쪽을 본다. 향로 곁의 백자 병에는 연꽃이 꽂혀 있다. 어제의 비를 도롱이 두르고 꺾어 온 사람의 정을 도코노마에서 바라보는 봉오리는 하나, 말려 있는 잎은 둘. 그 잎으로부터 세 치쯤 위, 천장에서 하얀 백금실을 길게 늘어뜨리고 거미 한 마리가 매달려 있다. 자못 운치 있다.
“연잎에 거미 내려앉으니 향을 사르네” 그렇게 읊으며 여인은 한꺼번에 꽃잎 몇 장을 움켜쥐어 향로 뒤편으로 던져 넣는다. “거미 매달려 흔들리지 아니하고, 전향(篆煙) 죽량(竹梁)을 감도네” 한 구절을 읊으며 수염 난 사내도, 보고만 있을 뿐 떨어내려 들지 않는다. 거미도 움직이지 않는다. 그저 바람이 불 때마다 살짝 흔들릴 뿐이다.
“꿈 이야기를 거미도 들으러 온 모양이지” 둥근 얼굴 사내가 웃자, “그래, 꿈에 그림을 살려놓는 이야기야. 듣고 싶거든 거미도 듣게나” 무릎 위의 시집을 읽을 마음 없이 펼친다. 눈은 글자 위에 떨어졌으되, 눈동자에 비치는 것은 시(詩)의 나라인지. 꿈의 나라인지.
“백이십 칸 회랑이 있고, 백이십 개의 등롱을 단다. 백이십 칸 회랑에 봄 조수가 밀려들고, 백이십 개의 등롱이 봄바람에 깜빡인다. 어스름 속, 바다 속에는 커다란 도리이가 떠오르지 못하는 거인의 도깨비처럼 서 있어…….”
바로 그때 거센 초인종 소리가 울리며 누군가 문간을 열어젖힌다. 이야기하던 이가 뚝 말을 멈춘다. 나머지 사람도 잠깐 자세를 바로 한다. 누가 들어온 기색은 없다. “옆집이로군” 수염 없는 사내가 말한다. 이윽고 검은빛 우산을 펼치는 소리가 나더니 “그럼 또 내일 저녁에” 하는 젊은 여인의 목소리가 난다. “꼭” 하고 답하는 것은 사내 같다. 세 사람은 말없이 얼굴을 마주보며 살짝 웃는다. “저건 그림이 아니야, 살아 있어.” “저것을 평면으로 줄이면 결국 그림이지.” “그렇지만 저 목소리는?” “여자는 자줏빛.” “사내는?” “글쎄”라며 가늠하기 어려운 듯 수염이 여인 쪽을 본다. 여인은 “주홍빛”이라고 짐짓 깔보듯 답한다.
“백이십 칸 회랑에 이백서른다섯 폭의 액자가 걸려 있고, 그 이백서른두 번째 액자에 그려진 미인의…….”
“목소리는 누런색입니까, 갈색입니까” 여인이 묻는다.
“그런 단조로운 색이 아니야. 색으로는 옮길 수 없는 목소리지. 굳이 말한다면, 글쎄, 그대 같은 목소리랄까.”
“고맙군요” 하고 답하는 여인의 눈에는 시름을 머금은 채 웃음의 빛이 가득 찬다.
이때 어디에서인가 개미 두 마리가 기어 나와, 한 마리는 여인의 무릎 위로 기어오른다. 아마도 길을 잃은 모양이다. 끝까지 올라간 위에는 먹이도 없고 내려갈 길마저 잃었다. 여인은 놀란 기색도 없이, 우왕좌왕하는 검은 것을 가만히 흰 손가락으로 가볍게 털어 떨어뜨린다. 떨어진 즈음 다른 한 마리와 고려연 위에서 마주친다. 한참은 머리를 맞대고 무언가 속삭이는 듯하더니, 이번에는 여인 쪽으로 향하지 않고, 고이마리 과자 접시를 끄트머리까지 동행하다가, 거기에서 좌우로 갈라진다. 세 사람의 눈은 약속이라도 한 듯 두 마리 개미 위로 떨어진다. 수염 없는 사내가 이윽고 말한다.
“여덟 첩 좌식 방이 있고, 세 손님이 앉는다. 한 여인의 무릎으로 한 마리 개미가 오른다. 한 마리 개미가 오른 미인의 손은…….”
“희다, 개미는 검다” 수염이 받는다. 셋이 나란히 웃는다. 한 마리 개미는 재떨이를 끝까지 기어올라 정수리에서 골똘히 무언가 궁리하고 있다. 남은 한 마리는 운 좋게 과자 그릇 안에서 구즈모찌(葛餅)와 마주쳤다가, 기쁨에 겨운 나머지인지 갈팡질팡하는 모양새다.
“그 그림 속의 미인이?” 여인이 다시 이야기를 되돌린다.
“파도조차 소리 없는 어스름 달밤에, 문득 그림자가 졌다 싶더니 어느새 움직이기 시작한다. 길게 잇닿은 회랑을 나는 것도 아니고, 밟는 것도 아니고, 그저 그림자인 채로 움직인다.”
“얼굴은요” 수염 없는 사내가 묻는 사이, 다시 동쪽 옆집의 합주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한 곡은 진작 끝났고 새로운 한 곡을 시작한 모양이다. 그리 솜씨가 좋지는 않다.
“꿀을 머금고 바늘을 뱉는 격이로군” 한 사람이 평하자
“비프스테이크 화석을 먹일 셈이로군” 한 사람이 말한다.
“조화(造花)라면 난향과 사향이라도 깊이 배게 하지 않고서는 별수 없겠지요” 이건 여인의 한마디다. 셋이 세 가지로 다르게 풀이했지만, 셋 다 자못 풀이하기 어렵다.
“산호 가지는 바다 밑, 약을 마시고 독을 뱉는 경박한 무리” 그렇게 운을 떼다 제정신으로 돌아온 수염이 “그래그래. 합주보다는 꿈의 뒷이야기가 핵심이지. 그림에서 빠져나온 여인의 얼굴은……” 하고는 더는 못 잇고 머뭇댄다.
“그려도 이루어지지 않으니, 그려도 이루어지지 않으니” 둥근 얼굴 사내가 박자를 잡으며 은 그릇을 가볍게 두드린다. 구즈모찌를 만난 개미는 이 울림에 정신을 잃고 과자 그릇 안을 좌우로 내달린다.
“개미의 꿈이 깼네요” 여인이 꿈을 풀어내던 사내에게 말을 건넨다.
“개미의 꿈은 구즈모찌인가” 상대는 높지 않게 웃는다.
“못 빠져나오는가, 못 빠져나오는가” 자꾸만 과자 그릇을 두드리는 것은 둥근 얼굴 사내다.
“그림에서 여인이 빠져나오기보다, 당신이 그림이 되시는 편이, 한결 수월하시지요” 여인이 또 수염에게 묻는다.
“그건 미처 생각지 못했군. 다음번엔 이쪽이 그림이 되리다” 사내는 태연히 답한다.
“개미도 구즈모찌만 되면, 이렇게 허둥대지 않아도 될 것을” 둥근 얼굴 사내는 그릇 두드리기를 그치고, 어느 틈에 시가를 큼직하게 빨고 있다.
장맛비에 넉 자나 자라난 여죽(女竹)이, 손 씻는 돌그릇 위로 겹겹이 드리우고, 남은 한두 줄기는 처마에 닿도록 솟구쳐, 바람이 부추길 때마다 빈지문을 쓸며 툇마루 위로도 가리지 않고 푸른빛을 후두두 떨군다. “저기 그림이 있군” 시가 연기를 푸 하고 그쪽으로 내뿜는다.
도코바시라에 걸어둔 불자(拂子)의 끝에는 다 타지 못한 향 연기가 배어들고, 족자는 자쿠추의 노안(蘆雁)으로 보인다. 기러기 수는 일흔셋, 갈대는 본디 헤아리기 어렵다. 바구니 등불의 빛을 살짝 받아, 깊이 석 자의 도코노마이니, 옛 그림과 분간하기 어려운 점에서 드러나지 않는 운치가 있다. “여기에도 그림이 생기네” 도코바시라에 기댄 사내가 돌아보며 바라본다.
여인은 막 감은 검은 머리를 어깨에 늘어뜨리고, 둥글게 펼친 비단 부채를 가만히 흔들면, 이따금 살쩍 언저리에 살랑이며 흐트러지는 구름의 그림자, 잦아들면 옅은 눈썹이 평소보다 한층 맑아 보인다. 벚꽃을 빻아 짜 넣은 듯한 볼빛에, 봄밤의 별을 머금은 눈동자를 서늘히 크게 뜨고는 “저도 그림이 될까요” 한다. 또렷이 알 수 없으나 흰 바탕에 칡잎을 한가득 흩뜨려 무늬로 박아낸 유카타의 깃을 여기다 싶게 바로잡으니, 따스한 대리석으로 깎아낸 듯한 목덜미가 도드라져 사내의 마음을 끈다.
“그대로, 그대로, 그대로가 명화일세” 한 사람이 말하자
“움직이면 그림이 흐트러집니다” 한 사람이 일러둔다.
“그림이 되는 일도 역시 수고가 따르네요” 여인은 두 사람의 눈을 즐겁게 해주려 들지도 않고, 무릎에 얹고 있던 오른손을 곧장 뒤로 돌려, 몸을 비스듬히 푹 젖힌다. 길게 늘어진 검은 머리가 반짝 등불을 받아, 사르르 푸른 다다미에 닿는 소리마저 들린다.
“나무삼! 좋은 일에는 마(魔)가 많구나” 수염 난 사내가 가볍게 무릎머리를 친다. “찰나에 천금을 아끼지 않노라” 수염 없는 사내가 빨다 만 시가 꽁초를 뜰 앞으로 던진다. 옆집의 합주는 어느새 그쳤고, 처마의 빗물 소리만이 높이 울린다. 모깃불은 어느새 꺼졌다.
“밤도 어지간히 깊었군”
“두견도 울지 않고”
“잘까요”
꿈 이야기는 결국 도중에 흐지부지되었다. 세 사람은 저마다의 자리로 들어 잠자리에 든다.
삼십 분 뒤 그들은 아름다운 많은 사람의…… 라는 구절도 잊었다. 쿠쿠— 하던 소리도 잊었다. 꿀을 머금고 바늘을 뱉는다던 옆집의 합주도 잊었고, 개미가 재떨이를 기어오른 일도, 연잎에 내려앉은 거미의 일도 잊었다. 그들은 점차 태평(太平)에 든다.
모든 것을 다 잊은 다음, 여인은 자신이 아름다운 눈과 아름다운 머리의 임자라는 사실을 잊었다. 한 사내는 수염이 있다는 것을 잊었다. 또 한 사내는 수염이 없다는 것을 잊었다. 그들은 한층 더 태평하다.
옛적 아수라(阿修羅)가 제석천(帝釋天)과 싸워 패하였을 때는, 팔만 사천의 권속을 거느리고 연뿌리 줄기 구멍 속으로 들어가 숨었다고 한다. 유마(維摩)가 방장(方丈) 한 칸의 방에서 법을 들려준 대중은 천이었던가 만이었던가 그 수를 잊었다. 호두 속에 숨어, 자신을 온 대천세계의 왕으로 여기겠노라 한 것은 햄릿의 술회로 기억한다. 좁쌀 한 알, 겨자 한 톨 안에도 푸른 하늘이 있고, 너른 땅이 있다. 언젠가 어떤 이가 스승에게 묻기를, 분자(分子)는 젓가락으로 집을 수 있느냐고 했다. 분자야 잠시 접어두자. 천하는 젓가락 끝에 걸릴 뿐 아니라, 한번 걸리기만 하면, 언제든 위(胃) 속에 들어앉을 수 있는 것이다.
또 생각건대 백 년은 한 해 같고, 한 해는 한 시각 같다. 한 시각을 알면 비로소 인생을 안다. 해는 동에서 떠 반드시 서로 진다. 달은 차면 또 기운다. 부질없이 손가락을 꼽아 백발에 이르는 자는, 부질없이 망망한 시간 속에 몸과 마음을 가두는 일을 한할 따름이다. 해와 달은 사람을 속일지언정, 자기를 속이는 자는 지자(智者)라 일컬을 수 없으리라. 한 시각에 한 시각을 더하면 두 시각으로 늘어날 따름이다. 촉천(蜀川)의 열 가지 비단에, 꽃을 더한들, 그 빛깔이 얼마나 변하리.
여덟 첩 좌식 방에 수염 난 사내와, 수염 없는 사내와, 서늘한 눈매의 여인이 한자리에 모여, 이렇듯 어느 하룻밤을 보냈다. 그들의 하룻밤을 그린 것은 곧 그들의 일생을 그린 것이다.
왜 세 사람이 만났는가? 그것은 알 수 없다. 세 사람은 어떠한 신분과 내력과 성격을 지녔는가? 그것 역시 모른다. 세 사람의 말과 몸짓을 통해 일관된 사건이 전개되지 않는가? 인생을 그린 것이지 소설을 그린 것이 아니므로 어쩔 도리가 없다. 왜 세 사람이 한꺼번에 잠자리에 들었는가? 세 사람이 한꺼번에 졸려졌기 때문이다.
(메이지 38년 7월 2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