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
즈시에서
이즈미 교카
배계(拜啓), 아우 편에 전해 주신 말씀 삼가 받자왔사옵니다. 다음 달 신소설에, 본초(凡兆) [역주: 에도 시대 하이쿠 시인. 마쓰오 바쇼의 문하생으로 활약했음]의, 涼しさや朝草門に荷ひ込む [역주: ‘서늘함이여, 이른 아침 풀 짊어 문 안으로’ — 본초의 하이쿠 한 구(句)]와 같은, 아담한 기획이 있으니, 소생도 한 편 써 주시오 하는 말씀, 시골살이 하는 저희에게야 참으로 어울리는 분부이온지라, 삼가 받들겠나이다.
자, 어디서부터 말씀 드려야 좋을지요. 저희 이 숲속 초가며, 실개천의 갈대며, 바다는 물론이요, 암벽 끝이며, 소나무 그늘이며, 나팔꽃이며, 박꽃이며, 반딧불이며, 로쿠다이 고젠 [역주: 헤이케(平家) 멸문 후 살아남은 귀족 소년으로, 비극적 말로를 맞은 인물. 그 무덤이 가마쿠라 인근에 있음]의 무덤은 처연하도록 서늘하고, 겐부지의 용담꽃은 그윽이 서늘하고, 호박잎의 이슬은 어쩐지 서늘하여 절로 웃음 짓게 되고, 어물전 함지 위의 농어는……사실 썩 싸지 않아 오히려 서늘하고, 무엇 하나 서늘하지 아니한 것 없사옵니다. 그 중에서도 요즈음은, 첩첩 산봉우리의 초록 사이로 흰 백합의 모습이야말로 그리움처럼 서늘하오며.
그 가운데서도, 존귀하고 뼈에 사무쳐 살갗이 서늘할 지경으로 마음 시원하옵는 곳은, 다코에무라 쿠노야 [역주: 현재의 즈시시(逗子市) 구키(久木) 일대. 이와도노지가 자리한 행정 구역]에 있는, 이와도노지(岩殿寺) 일대이옵니다. 그 고장 사람들은 그저 이와도노라 부르고, 돌계단이 높이 이어져 푸른 잎 우거진 산 위에, 관세음보살의 법당이 자리하고 있사옵니다.
정거장에서, 길을 하야마 쪽으로 잡지 않고, 가마쿠라로 이어지는 새 길로 접어들어, 쓰루가오카까지 터널을 두 개 지나, 1리 8정쯤 되는 방향으로 나아가오면, 왼편으로 고쓰보의 바위 언저리에 흰 물결 부서지는 경계를 삼아 논과 연초록 바다를 바라보고, 오른편으로 에조국화며, 공작초며, 우라시마소 [역주: 천남성과의 여름 식물. 긴 수염 같은 부속체가 특징]며, 꽃잔디의 짙은 다홍이며, 분꽃이며, 한껏 차려 낸 열일고여덟 채 농가들이 이어진 끝에, 정거장의 전체 모습을 작게 바라보면서, 이윽고 건널목을 넘어 2정쯤 더 가면, 논두렁에 푯말이 세워져, 반도 삼십삼관음 영장 [역주: 관동 지방 33개 관음 순례지로 구성된 반도 관음 영장(坂東三十三観音霊場)의 제2번 성지] 가운데 제2번 영장이라 있사옵니다.
이미 멀리서도, 소리 맑아 메아리에 울려 퍼지는 여름 휘파람새의, 산 저편을 바라보면, 구름 아름다운 잎 그늘에, 법당 지붕이 우러러 뵈옵니다.
가마쿠라 가도에서 벗어나, 길을 지나치는 이의 눈에는 가시하라 산자락에 가려지고, 사람 오가는 빈번한 하야마 길과는 방위가 달라, 많은 이들이 이 경치 좋은 영지를 알지 못하오며, 소생도 오래도록 무심히 지나쳐 왔사옵니다.
물론, 바다로 갈 적에, 신주쿠(즈시) [역주: 도쿄의 신주쿠가 아니라, 즈시 내 해수욕장 부근의 지명] 소나무 숲 속에서도, 멀리 그 지붕이 보이는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사오나, 깃발도 도리이도 있거니 하면, 작은 초가집이려니, 그저 산 위의 외딴집으로만 허투루 넘겨보기 쉬운 법이오니, 하물며 해수욕 모자가 오가며 흰 정강이와 붉은 옷자락이 비단 짜듯 어우러지는 판에야, 구도심 있는 줄로 아시는 이 소생조차, 때로 후지산 눈 덮인 정상도 정면에서 놓쳐 가며, 유카타 입은 사람들에게 눈을 빼앗기곤 하였사옵니다.
아즈마카가미『東鑑』 [역주: 가마쿠라 막부의 공식 역사서(1180~1266년 기록). 제13권에 이와도노지의 연기(緣起)가 수록됨] 제13권에 자세한 연기가 실려 있사옵니다. 옛적에는 칠당가람이 구름에 치솟았다 하오나, 지금은 오직 기슭의 작은 집 두세 채뿐이옵니다.
올봄에 처음으로 참배하였을 때에는, 돌계단도 흙에 묻혀 이끼에 걸려 넘어질 듯 걷기 힘들었사오나, 뜻있는 분이 계셔, 요즘은 훌륭하게 수복이 이루어졌사옵니다.
기슭의 마을길에서 그 돌계단에 이르기까지, 발끝을 세우며 오르는 2정 남짓한 길에, 뒤뜰의 꽃이며 지붕의 풀이 어우러지고, 가지의 저녁 노을이며, 오이 사이를 지나는 바람이며, 맑은 물이 쏴아 흘러, 군데군데 물 고인 구석에 긴 자루 달린 나무 국자를 기대어 놓은 것도, 한층 정취가 있사옵니다. 이곳을 반딧불이 명소라 하는데, 닭의장풀 잎 사이로 훤히 비치는 모습을 눈앞에 떠올리면서도, 아직 게으름 부려 찾아가 보지 못하였습니다.
밤이라면 더욱 그러할 것이오이다.
마침 그렇게 말씀 전하러 놀러 온 아우를 데리고, 오봉 전 죄업 소멸을 위해 [역주: 오봉(お盆, 음력 7월 15일) 전에 절에 참배하여 죄업을 씻는 관습] 잠깐 참배하였습니다. 돌계단은 세 단(段)으로 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두 번째 단이 가파르고 높아서, 어느 분과 어느 분이 시주하시어 손 잡는 쇠줄이 쳐져 있사오며, 붙잡으려고 부채의 대나무 끝이 스치자, 랑랑하게 방울벌레의 맑은 가락이 들려왔나이다.
아, 묘음과 해조음의 바다 빛도 여기서 맑아지고, 우러러 올려다본 산 품속에, 한 무더기 무성한 초록 풀밭에 반딧불이 빛도 깃들 듯, 적신 듯 보이는 어둠 속에서, 산마루를 가르는 달인가 싶었더니 — 대륜의 백합 오직 하나, 새하얀 것이 홀연 흔들리며 향기를 내뿜었으니, 이 고요함에 친 박수가 산봉우리에라도 울려 퍼졌던 것일까요.
법당 당우의 문을 밀치고 들어서면, 관음님의 모습도 낯설지 않사옵니다. 구름인가, 아니로다. 연기인가, 아니로다. 아름다운 초록과 다홍과 황색과 흰색과 보랏빛, 오색 비단실이 주홍 기둥에 소복이 쌓이고, 천장 그림의 꽃 사이를 가늘게 나부끼는 것은, 관음님 손의 실 [역주: 관음상의 손에서 늘어뜨린 오색 비단실로, 이를 잡으면 관음과 인연이 맺어진다고 전함]이라 하오니, 관음상의 어여쁘신 소매에 걸쳐진 그 비단이 아름답고도 황공하옵니다.
具一切功徳 慈眼視衆生
[일체의 공덕 두루 갖추시고, 자비로운 눈으로 중생을 굽어보시니,]
福寿海無量 是故応頂礼
[복덕과 수명이 바다처럼 한량없사옵기에, 이에 마땅히 이마를 조아리나이다.]
이리하여, 안개라도 피어오르면, 달이라도 비치면, 자연스레 옷깃을 여미게 되옵니다.
그때 솔바람 소리만 들려오고, 방장에는 아무도 없어, 좁은 돗자리 한쪽 구석에 매화심역(梅花心易) [역주: 송나라 소강절(邵康節)의 역학 점서(占書). 꽃잎이나 숫자로 괘(卦)를 뽑아 점치는 방식] 한 권이 놓여 있었는데, 아우가 무심코 손을 뻗어 펼쳐 보려 하더니, 공연히 허황된 미인의 이름을 점치느니 뒷산에 가서 백합이나 꺾어 오자 하며, 여름 풀을 헤치고 향기를 좇아, 잠깐 사이에 열 송이 남짓, 가지도 휘어질 만큼 달린 것을 넌실넌실 어깨에 걸쳐 내려오는, 그 풍채와 그 얼굴빛은, 아시는 분들께는 아마도 민망하게 보이실 것이오며, 모르는 분께는 이상하게 여겨지실 것이옵니다.
앞서 두 손을 모아 물을 받아 씻었던, 푸른 참억새 무성한 속의 산 우물의 물을 길어, 두레박 물을 백합 잎 위에 부어 주었으니, 이것이 그나마 색정극 장인(濡事師)의 흉내이옵니다 [역주: 가부키의 정사(情事) 연기 전문 배우이나, 여기서는 ‘물(濡)을 다루는 자’로 비튼 교카 특유의 자조적 말장난].
山の井に棹さす百合の雫かな
[산 우물에 장대처럼 드리운 백합, 그 이슬이여]
이윽고 하산하자, 기슭 시냇가에 사는 것들이야 이슬도 물도 새삼스럽지 않으련만, 꽃의 이슬을 그리워함인지, 붉은 민물게가 사각사각 갈대를 헤치며, 서너 마리가 아니라 길가에 마중 나왔나이다. 아우는 싸리 가는 지팡이에 그 백합꽃을 얹어 들고, ‘풍정하구나, 거미여’ 하며 사냥옷(가리기누) [역주: 헤이안 시대 귀족이 착용하던 사냥 예복. 이 복장을 연상케 하는 모양새라는 뜻] 차림 흉내를 내더니, 형이라고 체면이 있는 소생은 ‘게 녀석, 나란히 걸으려 들다니’ 하며, 짚신으로 밟으면서, 쉿쉿 저물녘에 — 이야, 소생 스스로도 마부(마고)나 다름없다 싶었습니다.
반딧불이 보기엔 아직 덜 저문 채로 돌아왔사오나, 즈시의 바람이 한 줄기라도 귀처에 닿사오면, 낮잠 드실 때 부채로 써 주시기 바라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