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
이즘의 공과(功過)
나쓰메 소세키
이즘(主義)이라 불리는 것들은 대개, 무수한 사실을 꼼꼼한 사람이 묶음으로 정리하여 머릿속 서랍에 집어넣기 좋게 만들어 준 것이다. 깔끔히 정돈된 대신, 꺼내기가 귀찮아지거나 푸는 데 손이 많이 가거나 하는 탓에, 정작 필요한 순간에는 쓸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이즘이란 이 점에서, 실생활의 행위를 직접 인도하기 위해 만들어진 지남차(指南車, 방위를 가리키는 수레)라기보다는, 지식욕을 채우기 위한 통일함(統一函)이다. 살아 있는 문장이 아니라 사전(辭典)인 것이다.
동시에 많은 이즘은, 흩어져 있던 유사 사례들이 비교적 치밀한 두뇌에 걸러져 응결할 때 취하는 일종의 형태다. 형태라기보다 윤곽(輪廓)이라 해야 옳다. 내용 없는 껍데기다. 내용을 버리고 윤곽만 접어 담는 것은, 덴포 엽전(天保錢, 에도 후기의 묵직한 동전)을 등에 짊어지는 대신 지폐를 품에 넣는 것과 마찬가지로, 작은 인간으로서 편리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즘은 회사의 결산 보고서에 비견할 만하다. 나아가 학생의 학년 성적표에도 견줄 만하다. 단 한 줄의 숫자 이면에, 겨우 두 자릿수 점수의 뒤편에, 거의 있는 그대로는 재현하기 어려운 많은 시간과 사건과 인간, 그 인간의 노력과 희비와 성패가 잠들어 있다.
따라서 이즘은 이미 경과한 사실을 토대로 성립한다. 과거를 통틀어 묶은 것이요, 경험의 역사를 간략히 요약한 것이다. 주어진 사실의 윤곽이며, 틀(型)이다. 이 틀을 들고 미래에 임한다는 것은, 하늘이 펼쳐 보이는 미래의 내용을 인간의 머리로 빚어낸 그릇에 모두 담아 버리겠다고 미리 기다리고 앉은 것과 다름없다. 기계적인 자연계의 현상 가운데 가장 단조로운 반복을 마다하지 않는 것에야, 곧장 이 틀을 적용하여 실생활의 편의를 꾀할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과학자의 연구가 미래에 반사된다는 것은 그래서다. 그러나 인간 정신의 삶에서, 우리가 하나의 이즘에 지배되려 할 때, 우리는 즉각 주어진 윤곽을 위해 살아야 하는 고통을 느끼게 된다. 주어진 윤곽의 편의를 위해 살아간다는 것은 형해(形骸)를 위해 기계 구실을 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급기야 우리 정신의 발전이 자기 본연의 법칙에 따라 스스로에게 진실한 윤곽을 스스로 부여하지 못하는 굴욕을, 분개하기에까지 이른다.
정신이 그 굴욕을 느낄 때, 우리는 이를 과거의 윤곽이 이제 막 허물어지려는 전조로 본다. 미래로 끌어 연장하기 어려운 것을 억지로, 아니 맹목적으로 이용하려 한 죄과(罪過)로 본다.
과거가 이러한 이즘들에 의해 지배되어 왔으니 앞으로도 반드시 이 이즘에 지배되어야 한다고 속단하여, 한때의 과정에서 얻은 윤곽을 가슴에 품고 모든 것을 재단하려는 자는, 되(升)로 높이를 재고 자(尺)로 길이를 측량하려는 것과 같은 폭거를 저지르는 것이다.
자연주의(自然主義)라는 것이 일어난 지 이미 5~6년이 된다. 이를 입에 올리는 사람은 저마다 나름의 근거가 있어서 하는 말이라 생각한다. 내가 아는 한에서는, 또 내가 이해할 수 있는 한에서는―이해할 수 없는 논의는 잠시 접어 두고―반드시 비난해야 할 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자연주의 역시 하나의 이즘이다. 인생에서도 예술에서도, 어떤 인과에 의해 서양에서 발전한 역사의 단면을 윤곽으로 만들어 배에 실어 온 수입품이다. 우리가 이 윤곽의 내용을 채우기 위해 살고 있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우리 활력의 전개가 자연스럽게 이 윤곽을 그려냈을 때, 비로소 자연주의에 의미가 생긴다.
일반 세간은 자연주의를 꺼린다. 자연주의자들은 이를 영원한 진리인 양 내세우며 우리 삶의 전면에 걸쳐 강요하려 하고 있다. 그들이 지금보다 더 완강하게, 더 끈질기게 맹진(猛進)한다면, 스스로 무너질 미래를 앞당기고 있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을 것이다. 인생의 전 국면을 뒤덮는 큰 윤곽을 그려 미래를 그 안으로 몰아넣으려 하기보다는, 막연한 윤곽 중의 한 작은 부분을 굳건히 붙잡아 거기서 자연주의의 항구성을 인정받는 편이, 그들에게는 더 현명한 방책이 아니겠는가.
――메이지 43년(1910) 7월 23일 《도쿄 아사히 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