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 of 1

Chapter 1

메이지 32년(1899) 12월, 화인(和人) 미우라 이치타로라는 자가 추장(酋長) 가와무라 모노쿠테와 부추장(副酋長) 무라야마 요모사쿠 두 사람을 미우라의 집으로 불러들였다. 미우라가 이르기를, 도쿄에서 나리(관리)가 찾아와 말하기를, 아사히카와에 제7사단이 창설되고 아사히카와 마치도 생겨 아이누의 토지가 줄어들었으니, 앞으로 아이누 자손이 불어나면 토지가 부족해질 것이라 관에서 이를 우려하여, 이 치카부미 땅 외에 그대들이 원하는 땅을 주고 돈도 주겠다는데 어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가와무라 모노쿠테 에카시(エカシ, 아이누어로 장로·우두머리를 뜻하는 경칭)와 무라야마 요모사쿠 에카시 두 사람이, 치카부미 땅 외에 준다 하니 테시오의 데네메무 땅을 받고 싶다고 답하였다. 그러자 내일 나리가 도쿄로 돌아가니 오늘 중으로 치카부미 전체의 도장을 청원서에 찍으라 하며, 무라야마 요모사쿠 에카시와 미우라 이치타로의 아들 두 사람이 사십 호 이상의 각 가정을 돌아다니며 그 뜻을 알리고 모두가 청원서에 날인하도록 하였다. 하나 치카부미 땅 외에 토지를 준다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당시 장관(長官) 소노다 야스타카, 육군대신(陸軍大臣) 가쓰라 타로, 오쿠라 기하치로 등이 공모한 악책으로, 치카부미 아이누 땅을 오쿠라 기하치로 명의로 하부(下附)받고 치카부미 아이누 모두를 테시오 산중으로 이전시키기로 결정해 두었던 것이다. 메이지 33년(1900) 5월 말까지 퇴거하라는 명령이 장관으로부터 내려졌으며, 이전 비용은 6,800엔이었는데 그 가운데 2,400엔은 미우라 이치타로의 보수금이고 나머지 4,400엔과 아이누 한 가구당 총 한 자루씩을 지급하여 이전시키기로 되었다. 가와무라 모노쿠테 에카시 이하 일동이 그제야 미우라에게 속은 것을 알고 모두 경악하였다. 설령 죽는 한이 있더라도 조상 대대로 내려온 땅이니 이전하지 않겠다는 것이 일동의 뜻이었다. 아사히카와 마치의 오쿠라에게 아이누 땅을 빼앗기면 그 땅이 큰 시가지가 되어 현재의 아사히카와 마치는 쓸모가 없어진다는 소란이 일자, 아사히카와 마치에서는 아이누 편을 들었다. 현재 아사히카와 시에 거주하는 도모다 분지로 씨의 집에서 추장 가와무라 모노쿠테 에카시, 무라야마 요모사쿠 에카시, 가와카미 코누사 아이누 이하 일동이 삿포로의 아사야마 변호사에게 의뢰하여 미우라 이치타로를 삿포로 지방재판소 검사국에 고소하였다. 증인 조사로서 메이지 33년(1900) 3월 12일까지 삿포로 검사국에 출두하라는 소환이 가와무라 에카시와 무라야마 에카시에게 내려졌다. 가와무라 에카시, 무라야마 에카시, 가와카미 코누사 아이누 세 사람이 도와달라는 등기 서면을 보내왔고, 메이지 33년 3월 8일에는 이시카리 오이부미무라 도요카와 도미사쿠 댁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즉시 오라는 전보까지 왔다. 나도 같은 동족의 일이라 3월 10일 하마마스를 출발하여 도요카와 댁에서 가와카미 에카시를 만나고, 11일 삿포로로 출발하여 삿포로 오도리 인(因) 여관에서 가와무라 에카시와 무라야마 에카시를 만났다. 그날 아사야마 변호사 댁에 모여 나는 두 에카시의 통변(通弁, 통역)을 맡는다는 것을 재판소에 신고해 두었다. 3월 12일 가와무라 에카시와 함께 검사국에 가서 검사의 조사를 받았고, 13일은 일요일이었다. 3월 14일에는 무라야마 에카시와 함께 검사국에 가서 조사를 받고 인 여관에 돌아와 보니 하마마스 자택에서 전보가 와 있었다. 뜯어 보니 “아내 죽었음. 속히 귀가하라.”고 하였다. 나는 그리 생각하였다. 행정관으로서 국민 보호를 담당해야 할 장관 소노다 야스타카의 악책으로 인해 부재중에 처가 사망하였으니, 이는 모두 장관의 악책 때문이라고. 하마마스 친족에게 전보로 “괜찮으니 장례 부탁함.”이라 통보하고, 가와무라 에카시와 함께 차를 타고 아사히카와로 출발하여 가와무라 에카시 댁에서 일동이 모여 상의한 끝에 상경하기로 결정하였다. 가와무라 모노쿠테 에카시를 데리고 상경할 생각이었으나, 가와무라 에카시는 덴포(天保) 연간 태생의 노인이신지라 상경하여 토지를 되찾으면 좋겠지만 그러지 못할 때는 니주바시(二重橋, 황거 앞 다리)에서 죽겠다고 결심하셨다. 그리 되면 중대한 문제가 되어 어떻게든 해결될 것이라는 각오셨다. 가와무라 에카시를 걱정하여 가와카미 코누사 아이누를 동행시키고, 메이지 33년(1900) 4월 12일 아사히카와역에서 아오야기·이타쿠라와 넷이 상경하였다. 중앙 정부에 호소하여 당시 내무대신(内務大臣) 사이고 각하, 오쿠마 시게노부 각하를 만났다. 나는 오타루 료토쿠 소학교(小樽量徳小学校) 재학 시절 세 차례 각하 앞에서 글씨를 쓰고 책을 읽어 특별한 은혜를 입은 바 있었다. 그 인연으로 각하 댁에 나 혼자 불려가 여러 가지 말씀을 들었고, 장관의 불법을 고하였다. 소노다 장관이 내무성에 소환되어 메이지 33년(1900) 5월 4일 내무성에서 협의가 이루어진 결과, 오쿠라 등에게 내린 지령을 취소하고 종전대로 아이누에게 토지를 반환하기로 결정되었다. 그런데 그때 소노다 장관이 이르기를, 아이누에게 토지를 하부하더라도 개간할 수 있겠느냐고 묻기에, 내가 책임지고 개간하겠다고 답하였다. 만약 개간하지 않으면 국유미개지처분법(国有未開地処分法)으로 몰수하겠다 하여, 치카부미로 돌아와 일동과 상의하였다. 개간하지 않으면 토지가 몰수된다. 다행히 나의 지인인 삿포로의 가와타라는 분이 아이누 땅을 개간하지 않으면 몰수되는 것은 참으로 딱한 일이라 하며 개간 자금을 빌려주겠다 하였다. 이에 가와무라 모노쿠테 에카시, 무라야마 에카시, 가와카미 코누사 아이누와 나 넷이 삿포로에 가서 가와타 씨로부터 20엔을 빌렸다. 그 돈은 가와카미가 가지고 치카부미로 돌아가 가와카미 코누사 아이누 댁을 사무소로 삼아, 그 돈으로 치카부미 미개지 전부를 개간한 것이었다.

그 후 도청(道庁)을 찾아가 소노다 장관을 만나 치카부미 아이누가 전부 개간하였으니 아이누에게 토지 지령(指令)을 내려 달라고 청하였으나, 말을 이리저리 돌리며 지령도 내리지 않았다. 메이지 37년(1904) 5월, 같은 동족인 구리야마 쿠니시로에게 고소를 당하였다. 그 이유는 이러하였다. 치카부미 아이누 땅은 아이누 스스로 전부 개간한 것이지 가와타에게 빌린 돈으로 개간한 것이 아니며, 가와타에게 빌린 돈은 아마카와가 치카부미 아이누의 이름을 사칭하여 빌려 혼자 사사로이 썼다는 것이었다. 구리야마 쿠니시로는 후카가와무라의 아이누로, 치카부미 사건 이래 어떤 노력을 기울였던가. 그 사이 한 번도 치카부미에 얼굴을 비치지 않더니, 메이지 37년 5월 갑자기 앞서 말한 이유로 나를 고소하였다. 그 후 그의 행적을 알아보니, 당시 아사히카와 마치 정장(町長) 오쿠다 지하루, 전년까지의 시장 오쿠다에게 청탁하여 나를 무고(誣告)한 것이었다. 메이지 37년(1904) 9월 삿포로 검사국으로 송치되어 미결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메이지 38년(1905) 5월 삿포로 지방재판소 예심판사장(豫審判事長) 하루타 판사의 도움으로 예심면소(豫審免訴)가 되어 결백한 몸으로 출옥하였다. 신문을 보니 아사히카와 마치 정장 오쿠다 지하루가 치카부미 아이누 땅을 횡령하였다는 기사가 실려 있었다. 나는 삿포로의 어느 변호사에게 구리야마를 무고죄(誣告罪)로 고소하는 방안을 의뢰하였더니, 변호사가 이르기를, 아마카와가 동족을 위해 헌신한 것은 누구나 아는 일이니 구리야마 쿠니시로 같은 자를 무고죄로 고소하기보다는, 아사히카와 마치 정장 오쿠다 지하루의 불법을 다시 한 번 따지러 아사히카와 치카부미에 가서 추장 가와무라 모노쿠테 이하 일동을 만나 오쿠다를 상대로 토지 반환 소송을 제기하라 하였다. 나도 그 뜻에 결심하고, 메이지 38년(1905) 5월 출옥하는 길로 치카부미에 가서 가와무라 에카시에게 이야기하니 에카시도 몹시 놀라며, 이는 모두 가와카미 코누사 아이누와 구리야마 쿠니시로의 악책이요 오쿠다 지하루의 수하가 되어 갖은 나쁜 짓을 저지른 것이라 하였다. 다시 한 번 가와무라 에카시를 대신하여 오쿠다에게서 토지를 되찾아 달라는 부탁이었다. 메이지 38년(1905) 6월 가와무라 모노쿠테를 대리하여 아사히카와 구재판소(区裁判所)에 오쿠다 지하루를 고소하였다. 정장 오쿠다의 대리인 이리야마 변호사가 재판소에 출두하자 판사가 이르기를, “지식 없는 아이누를 속여 토지를 횡령하려 하다니 심히 옳지 않도다. 아이누에게 토지를 반환하라. 반환하지 않으면 두 번째 오쿠라 사건이 될 것이로다.”라 하며 이리야마 변호사를 꾸짖고 판결을 내렸다. 그 후 이리야마 변호사가 내게 이르기를, 오쿠다는 아사히카와 마치의 대규모 건설을 구상하였기 때문이었다 하였다. 나는 답하였다. 오쿠다가 아사히카와 대건설을 꾀한다 하더라도 같은 아사히카와 마치 주민인 아이누의 토지를 횡령하는 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고. 화해를 원한다면 응하겠으되, 앞으로 아사히카와 마치 사무소(町役場)에서 치카부미 아이누를 보호하고, 손으로 일부 개간된 토지도 마치 사무소에서 도청에 청원하여 아이누에게 토지 지령을 내려 주면 화해하겠다고 하였다. 이리야마도 기뻐하며 그렇다면 이제 아사히카와 마치 사무소에 가서 오쿠다 마치 정장을 만나 이야기하겠다 하여, 이리야마와 함께 마치 사무소에 가서 오쿠다를 만났다. 이리야마가 나의 뜻을 전하니 오쿠다도 기뻐하며, 당 사무소에 맡겨 주시면 아이누에게 토지 지령도 도청으로부터 받아드리겠다고 명언하였다. 그러나 지금까지 아이누에게 지령은커녕 학교 부지까지 아이누 땅을 빼앗았으며, 구리야마 쿠니시로는 당시 아이누의 인장을 위조하여 도청에 이전 청원서를 제출하였다고 도청의 어느 분에게서 들어 알고 있습니다. 가와카미 코누사 아이누와 구리야마 쿠니시로 등의 두목이었던 오쿠다가 물러났으니, 가와카미와 구리야마는 아마도 힘이 빠져 있겠지요.

메이지 33년(1900) 이래의 사건이 틀림없음을 기록함. 소화 8년(1933) 1월 23일 하마마스군 하마마스촌 실전(実田) 아마카와 게이자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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