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조 칙궁(자기 몸을 닦음) — 셋째 단: 술과 색·놀이의 끊음, 다스림 이룬 뒤의 풍류
제1조 칙궁(자기 몸을 닦음) — 셋째 단: 술과 색·놀이의 끊음, 다스림 이룬 뒤의 풍류
술을 끊고 색(色)을 멀리하며, 음악과 풍악을 물리치고, 가지런하고 단정하며 엄숙하기를 큰 제사를 받들듯이 하라. 감히 한가로이 놀거나 거칠고 게으르게 굴어서는 안 된다.
정선(鄭瑄)이 말하기를, 「총명에는 한도가 있고 일의 기미는 끝이 없다. 한 정신을 다하여 뭇 간사함을 막는 것도 이미 쉽지 않은 일인데, 술잔을 머금어 즐기고 마음대로 색을 탐하며 시를 짓고 바둑을 두느라 마침내 옥송(獄訟)이 해를 넘기고 시비(是非)가 자리를 바꾸며 송사가 더욱 많아지고 일의 기미가 더욱 어수선해지니, 어찌 슬프지 않은가. 닭이 우는 새벽에 정사를 듣고 집안 일은 다 물리치되, 술과 색으로 스스로 곤(困)하게 하지 말고, 거친 즐거움으로 스스로 해치지 말 것이다. 어떤 일을 결단할 것인지, 어떤 첩문을 보고할 것인지, 어떤 부세(賦稅)를 분별할 것인지, 가두어 둔 누구를 풀어 줄 것인지를 때때로 살펴 부지런히 행하라」 하였다. 살피건대 술과 색의 해(害)는 옛날이나 이제나 같은 폐단이다. 그러나 색의 해는 술보다 더 심하다. 대저 술 취함은 하루만 지나면 깨지만, 색에 빠짐은 평생토록 곤한 데서 벗어나지 못한다. 목민관이 되어 한 번 창기(娼妓)에 발을 들이고 한 번 시골 부녀를 범하면 평생의 명절(名節)이 이미 떨어지고 만사가 다 무너진다. 비록 겉으로는 오히려 위엄으로 누른다 해도 안으로 사정(私情)이 이미 통하면 송사 한 마디에 기백(氣魄)이 단번에 꺾이고 만다. 어찌 슬프지 않은가. 비록 그러나 옛날에 귀한 관리에게는 모두 첩잉(妾媵)이 있었으니 또한 예에 어긋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미 읍재(邑宰)가 되면 그 자체가 뭇 원성의 표적이 됨이 적지 않다. 또 색(色) 하나를 더하면 어떻게 그것을 감당하겠는가. 성악(聲樂)은 옛날에 백성을 다스리는 데 쓰는 그릇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풍류는 오로지 잔치와 놀이를 일로 삼아 북과 피리가 시끄럽고 가기(歌伎)가 자리에 가득하여 백성의 기름을 허비하기를 끝이 없으니, 성현(聖賢)의 도(道)에서 한참 어긋난다. 그러므로 지금의 목민관이 된 자는 일체 성악을 물리쳐야 옳다. 다만 아침의 정참(廷參)에 북과 나발은 예에 따라 거행하되, 나머지 잔치는 일체 물리쳐도 무방하다. 만일 상사(上司)의 행차가 오거나 큰 손님이 이르면 약간의 예로써 받들 것이요, 또한 화려하고 사치해서는 안 된다. 주박(朱博)이 기주(冀州) 자사가 되어 이르는 주현(州縣)마다 모두 성악을 물리쳤다.
잔치와 놀이의 즐김은 백성이 기뻐할 바가 아니니, 단정하게 거처하며 움직이지 않는 것만 못하다.
주박(朱博)은 앞뒤로 세 현(縣)을 다스렸으되 청렴하고 검소하여 술과 색·노는 잔치를 즐기지 않았다. 미천한 데서 부귀에 이르도록 음식에 두 가지 맛을 차리지 않았고, 상 위에 술잔이 세 잔을 넘지 않았으니 곧 「세 그릇을 넘지 않는다」는 뜻이다. 밤에는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 아내가 그 얼굴을 보는 일이 드물었다. 이급(李及)이 항주(杭州)를 다스릴 때 성품이 청렴하고 강직하여 전당(錢塘)의 사치한 풍속을 미워하여 잔치를 일삼지 않았다. 당의 전휘(錢徽)가 강주(江州) 자사가 되었을 때 주에 「우전전(牛田錢, 농우 사들이는 돈)」 백만이 있어 자사들이 잔치와 손님 접대에 쓰곤 하였는데, 전휘는 「이는 농사 지을 채비이니 어찌 다른 곳에 쓸 수 있겠는가」 하고 그것을 두루 가난한 백성에게 나누어 주게 하였다.
다스림이 이미 이루어지고 뭇 사람의 마음이 이미 즐거워진 뒤에야 풍류로 단장하고 백성과 더불어 함께 즐기는 것도 또한 앞 시대 어진 사람들의 성대한 일이었다.
동파(東坡, 소식)는 여항(餘杭)을 다스릴 때 서호(西湖)에 노닐 적마다, 흔히 정기(旌旗)와 따르는 무리를 시켜 전당문(錢塘門)을 나가게 하되, 자기는 용금문(湧金門)으로부터 두어 명 늙은 군병만을 데리고 배를 띄워 호수를 가로질러 건너왔다. 보안원(普安院)에서 밥을 먹고 영은사(靈隱寺)와 천축사(天竺寺) 사이를 한가로이 거닐 적에 아전의 문서를 가지고 다녔다. 냉천정(冷泉亭)에 이르러서는 책상에 기대어 결단을 내리며 붓을 내림이 비바람 같았고, 다투는 송사를 갈라 처결하기를 담소(談笑) 속에 마쳤다. 그러고는 동료들과 더불어 통쾌하게 마시고 늦은 저녁에 말을 타고 돌아오는데 길 양옆 등불 사이로 백성들이 태수(太守)를 마음껏 구경하였다. 어느 늙은 중이 그것을 읊어 「강산이 비록 좋아도 풍류는 여전히 있구나」 하였다. 살피건대 이것이 어찌 태평성대(昇平)의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반드시 다스림이 이미 이루어진 뒤에야 비로소 행할 수 있다. 다스림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먼저 잔치와 놀이를 일삼으면 백성의 한탄과 원망이 날로 더해 간다. 사마온공(司馬溫公)이 낙주(洛州)를 다스릴 때 휴가일(休暇日)이면 곧 한두 명 가동(家僮)에게 술 한 병을 메게 하여 산림에 노닐며 조용히 잔을 기울였다. 이것이 모두 군자(君子)의 일이다. 소동파가 서주(徐州)를 지킬 때 강물이 갑자기 불어 성이 무너지려 하자 동파가 지팡이를 잡고 노역을 독려하며 밤낮으로 쉬지 않았다. 일이 이루어진 뒤에야 비로소 백성과 더불어 시를 짓고 술을 마시며 그것을 경하(慶賀)하였다. 이것이 또한 「백성과 더불어 즐긴다(與民同樂)」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