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조 칙궁(자기 몸을 닦음) — 넷째 단: 행차의 검소·독서·시와 바둑의 경계·순리
제1조 칙궁(자기 몸을 닦음) — 넷째 단: 행차의 검소·독서·시와 바둑의 경계·순리
수행하는 무리를 간소히 하고 그 얼굴빛을 따뜻이 하여 묻고 살피면 백성이 기뻐하지 않음이 없다.
고려의 서침(徐忱)은 울진현령(蔚珍縣令)이 되어 선정을 많이 베풀었다. 일찍이 소를 타고 농사를 권하였다. 박세량(朴世樑)이 신창현감(新昌縣監)이 되었을 때, 모든 일을 간소하게 하여 관아에 앉을 때도 북과 피리를 두지 않고 문을 나설 때도 조례(皁隷)를 거느리지 않았으며, 병이 아니면 두 가지 반찬을 차리지 않고 큰 더위가 아니면 일산(日傘)을 펴지 않았다. 농사철이 되면 아전과 군졸들에게 모두 농토로 돌아가게 하여 관아를 지키는 자가 겨우 두어 명이었다. 필요한 땔감과 짚은 동복(童僕)에게 가져오게 하였다. 휴가가 주어지면 짧은 두건에 평상복으로 지팡이를 짚고 한가로이 거닐었는데, 때로는 백성들이 그가 수령(守令)인 줄 알아보지 못하였다 한다. 유의(柳誼)가 홍주목사(洪州牧使)가 되어 의장(儀仗)을 물리치고 늘 야복(野服) 차림으로 마을을 드나들며 백성의 고통을 물었다.
정당(政堂)에 글 읽는 소리가 있다면 이를 일러 청사(淸士, 맑은 선비)라 할 수 있다.
임금은 만 가지 기무(機務)가 지극히 번거롭되 오히려 날마다 경연(經筵)에 임하려 하는 까닭은, 진실로 성현(聖賢)의 격언(格言)을 폐부(肺腑)에 적시어 정사로 펴 내면 그 유익이 절로 넓고 큼이 있기 때문이다. 공무에 여가가 있거든 마땅히 《상서(尙書)》·《노론(魯論, 논어)》·《중용》·《대학》 및 《송명신록(宋名臣錄)》·《자경편(自警編)》 따위의 책을 가져다 늘 외워 읽어야 한다. 유중영(柳仲郢)은 예(禮)로써 몸을 다스려 단정히 앉아 두 손을 모으고 있었으며, 세 번이나 큰 진(鎭)을 다스렸으되 마구간에 좋은 말이 없고 옷에 향(香)을 쐬지 않았다. 공무를 마치고 물러나면 반드시 책을 읽어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완평부원군 이상공 원익(完平李相公元翼)은 젊을 적에 일찍이 산사(山寺)에서 글을 읽었고, 뒤에 안주목사(安州牧使)가 나가서도 공무를 마치고 물러나면 반드시 《소학(小學)》을 읽었다.
만약 시(詩)나 읊고 바둑이나 두면서 정사(政事)를 아전에게 맡기는 것은 크게 옳지 못하다.
성종(成宗) 때 유미계(兪㵢溪)인 호인(好仁)이 부모 봉양을 위해 청하여 산음현감(山陰縣監)이 되었다. 영남방백(嶺南方伯)이 임금에게 하직할 적에 임금이 인견(引見)하여 말씀하시기를, 「내 친구 유호인이 산음(山陰)에 재임 중이니, 경(卿)은 그를 두돈(斗頓, 떠받쳐 도움)하라」 하셨다. 방백은 마침내 민은(民隱)을 돌보지 않고 시(詩)나 읊기를 그치지 않다가 파출(罷黜)되었다. 김남창(金南牕) 현성(玄成)이 여러 차례 주군(州郡)을 다스리되 손을 깨끗이 하여 직(職)을 받들고 청렴한 명성을 세상에 떨쳤으나, 성품이 매우 소탈하고 우아하여 아전의 일에 익숙하지 않고 매질을 일삼지 않았다. 영재(鈴齋)에 담담히 앉아 종일토록 시를 읊으니, 호사가(好事家)들이 「김 아무개는 벼슬을 맡으매 종일토록 시만 읊는다」 하였다. 주자(朱子)께서 일찍이 「벼슬을 맡아 글 읽기를 좋아함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정사(政事)에도 마음을 두지 않을 수 없다」 하셨다.
전례(前例)를 따라 일을 줄이고 대체(大體)를 지키는 데 힘쓰는 것도 한 가지 방도이다. 다만 시절이 맑고 풍속이 순후하며 지위가 높고 명망이 중한 자라야 비로소 그렇게 할 수 있다.
육가(陸賈)는 말하기를, 「군자(君子)가 정사를 함에 있어서는 혼연(渾然)히 일이 없고 적연(寂然)히 소리가 없어, 관부(官府)가 사람이 없는 듯하고 정락(亭落)이 아전이 없는 듯하다. 우(郵)에는 밤길 가는 졸병이 없고, 향(鄕)에는 밤에 부르는 징발(徵發)이 없으며, 노인은 당(堂)에서 단맛을 즐기고 장정 사내는 들에서 밭을 간다」 하였다. 살피건대, 한(漢)이 처음에 진(秦)의 가혹함을 이어 백성과 더불어 쉬게 하려고 하였으므로 그 논(論)이 대체로 이러하다. 평범한 사람이 이를 흠모하여 두 손을 모으고 잠잠히 있으면 만사가 무너지고 만다. 급암(汲黯)이 동해(東海) 태수가 되어 백성을 다스리되 청정(淸淨)함을 좋아하여, 승사(丞史)를 가려 그에게 일을 맡기고 자기는 큰 줄기만 책임지고 작은 일에는 가혹하지 않았다. 한 해 만에 동해가 크게 다스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