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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방이 군자의 나라요, 예의의 고장이라. 열 집 작은 마을에도 충신이 있고, 일곱 살 어린아이도 효도와 우애를 일삼으니, 무슨 불량한 사람이 있겠느냐마는, 순임금 세상에도 사흉이 있었으며, 요임금 당년에도 도척이 있었으니, 아마도 한 종류 이런 무리는 어찌할 수 없는 것이더라. 충청·전라·경상 삼도 월품에 사는 박가 두 사람이 있었으니, 놀보는 형이요 흥보는 아우인데, 한 아버지 한 어머니의 소생이로되 성정은 아주 달라 바람과 말처럼 서로 상관이 없더라. 사람마다 오장육부로되 놀보는 오장칠부인 것이, 심사부(心思腑) 하나가 왼편 갈비 밑에 병 부주머니를 찬 듯하여, 밖에서 보아도 알기 쉽게 달리어서 심사가 무론 사시절 가리지 않고 일망무제로 나오는데, 똑 이렇게 나오는지라. 본명방에 벌목하고 잠사각에 집짓기와, 오귀방에 이사 권코 삼재 든 데 혼인하기, 동네 주산을 팔아먹고 남의 선산에 투장하기, 길 가는 과객 양반 재울 듯이 붙들었다 해가 지면 내어쫓고, 일 년 고생하여 남의 농사 지어 추수하면 옷을 벗겨 내어쫓기, 초상난 데 노래하고 역신 든 데 개 잡기와, 남의 노적에 불지르고 가뭄 농사 물꼬 베기, 불붙은 데 부채질, 야장할 때 왜장 치기, 혼인날에 바람 넣고 시앗 싸움에 편들기, 길 가운데 허방 놓고 외상 술값 억지 쓰기, 전동다리 딴죽 치고 소경 의복에 똥칠하기, 배앓이 난 놈 살구 주고 잠든 놈에 뜸질하기, 달리는 놈에 발 내치고 곱사등이 잦혀놓기, 맺은 호박 덩굴 끊고 패는 곡식 모가지 뽑기, 술 먹으면 욕질하고 장시간에 억매하기, 좋은 망건 편자 끊고 새 갓 보면 땀대 떼기, 궁핍한 양반 보면 관을 찢고 걸인 보면 자루 찢기, 상인을 잡고 춤추기와 여승 보면 겁탈하기, 새 초빈에 불지르고 소 대상에 제청치기, 애 밴 계집의 배통 차고 우는 아이 똥 먹이기, 원로 행인의 노비 도둑질, 급주군 잡고 실랑이질, 관차사의 전령 도둑질, 진영 교졸 막대 뺏기, 지관을 보면 패철 깨고 의원 보면 침 도둑질, 물 인 계집 입 맞추고 상여 멘 놈 형문 치기, 만만한 놈 뺨 치기와 고단한 놈 험담하기, 채소반에 물똥 싸고 수박밭에 외손질과, 소목장이의 대패 뺏고 초라니패 떨잠 도둑질, 옹기짐의 작대기 차고 장독간에 돌 던지기, 소매치기 도자 속금, 고무도적의 끝돈 먹기와, 다담상에 흙 던지기 계골할 때 뼈 감추기, 어린 애의 불알을 발라 말총으로 호아매고, 약한 노인 엎드러뜨리고 마른 항문 생짜로 하기, 제주병에 개똥 넣고 사주병에 비상 넣기, 곡식밭에 우마 몰고 부형 연갑에 벗질하기, 귀먹은 이더러 욕하기와 소리할 때 잔말하기, 날이 새면 행악질 밤이 들면 도둑질을 평생에 일삼으니, 제 어미 붙을 놈이 삼강을 아느냐 오륜을 아느냐. 굳기가 돌덩이요 욕심이 족제비라, 네모진 소로로 이마를 비비어도 진물 한 점 아니 나고, 대장의 불집게로 불알을 꽉 집어도 눈도 아니 깜짝이더라. 흥보의 마음씨는 저의 형과 아주 달라, 부모에게 효도하고 어른에게 존경하며, 이웃 간에 화목하고 친구에게 신의 있어, 굶어서 죽게 된 사람에게 먹던 밥을 덜어주고, 얼어서 병든 사람 입었던 옷 벗어주기, 늙은이의 짊어진 짐 자청하여 저다 주고, 장마 때 큰 물가에 삯 안 받고 건네주기, 남의 집에 불이 나면 세간 지켜주고, 길에 보물이 빠졌으면 지켜 섰다 임자 주기, 청산에서 백골을 보면 깊이 파고 묻어주며, 수절과부 보쌈하면 쫓아가서 빼어 놓기, 어진 사람 모함하면 대로 나서 발명하고, 애잔한 놈 횡액 보면 달려들어 구원하기, 길 잃은 어린아이 저의 부모를 찾아주고, 주막에서 병든 사람 본가에 기별하기, 계칩엔 살생 않고 방장 자라는 것은 꺾지 않으며, 남의 일만 하느라고 한 푼 돈도 못 버니 놀보가 오죽 미워하랴. 하루는 놀보가 흥보를 불러,
“흥보야, 네 들어라. 사람이라 하는 것이 믿는 데가 있으면 아무 일도 안 된다. 너도 나이 장성하여 계집 자식이 있는 놈이, 사람 살아가는 것이 어려운 줄은 조금도 모르고서, 나 하나만 바라보고 놀며 먹는 거동을 보기 싫어 못 하겠다. 부모의 세간 아무리 많아도 장손의 차지인데, 하물며 이 세간은 내가 혼자 장만하였으니 네게는 부당하다. 네 처자를 데리고서 속거 천리 떠나거라. 만일 지체하여서는 죽임을 당하는 화가 날 것이니, 어서 급히 나가거라.”
가련한 흥보 신세, 지성으로 비는 말이,
“비나이다 비나이다, 형님 전에 비나이다. 형제는 한 몸이라, 한 조각을 베면 둘 다 병신 될 것이니, 외부의 능멸을 어이 막으리이까. 동생 신세 고사하고, 젊은 아내 어린 자식 뉘 집에 의탁하여 무엇 먹여 살리리이까. 장공예는 어떤 사람인가 하니, 구세 동거하였는데, 아우 하나 있는 것을 나가라 하나이까. 할미새는 짐승이나 형제의 의리를 알았고, 상체꽃은 꽃이로되 형제의 정을 품었으니, 형님 어찌 모르시오. 오륜의 의를 생각하여 십분 헤아려 주옵소서.”
놀보가 분이 상투 끝까지 치밀어 그런 야단이 없구나.
“아버지 계실 적에 나는 생판 일만 시키고서, 작은 아들이 사랑스럽다고 글공부만 시키더니, 네가 매우 유식하겠다. 당 태종은 성군이로되 천하를 다투어서 그 동생을 죽였으며, 조비는 영웅이나 재주를 시기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나 같은 초야 농부가 우애의 정을 알겠느냐.”
구박하여 문 밖으로 쫓아내니, 가련하다 흥보 신세, 입도 다시 못 열고서 빈손으로 쫓겨나니, 광대한 이 천지에 갈 곳 없는 신세 되었구나. 불쌍한 흥보 댁이, 부잣집 며느리로 먼 길 걸어 보았겠는가. 어린 자식 업고 안고 울며불며 따라갈 제, 아무리 시장하나 밥 줄 사람 뉘 있으며, 밤이 점점 깊어 간들 잠잘 집이 어디 있나. 저물도록 빳빳이 굶고 풀밭에서 자고 나니, 죽을 밖에 수가 없어 염치가 차차 없어 가네. 이 곳저 곳 빌어먹어 한두 달이 지나가니, 발바닥이 단단하여 부르틀 법 아예 없고, 낯가죽이 두꺼워서 부끄러움 하나 없네. 일 년 이 년 넘어가니 빌어먹기 수가 터져, 흥보는 읍내에 가면 객사에나 사정에나 좌기를 높이 하고, 외촌을 갈 양이면 물방앗간이든지 당산 정자 밑에든지 사처를 정하고서, 어린 것을 옆에 놓고 긴 담뱃대 붙여 물고, 솥솔을 매든지 또아리를 겯든지, 냇가나 방죽이나 가까우면 낚시질을 앉아 할 제, 흥보의 마누라는 어린 것을 등에 붙여 새끼로 꽉 동이고, 바가지엔 밥을 빌고 호박잎에 건건이 얻어, 허위허위 찾아오면, 염치없는 흥보 소견에 가장 태도를 하느라고, 가속이 늦게 왔다고 짚었던 지팡이로 매질도 하여 보고, 입에 맞는 반찬 없다 앉았던 물방앗간에 불도 놓아 보려 하고, 별수를 매양 부려, 하루는 이 식구가 양달 쪽에 늘어앉아 헌 옷에 이 잡으며 흥보가 하는 말이,
“우리 신세 이리되어, 이왕 빌어먹을 테면 전곡이 많은 데로 가볼밖에 수 없으니, 포구나 길가를 찾아가세.” 원산, 강경, 포주, 법성리, 악안, 부원다리, 부안, 줄내 근방을 다 찾아다녀 보니 비린내에 속 뒤집혀 암만해도 할 수 없다. 산중으로 다녀 볼까, 우복동 수인성 청학동 백학동, 두류산 속리산, 순창 복흥 태인 산안, 한다는 좋은 데를 다 찾아다녀 봐도 소금 없어 살 수 없다. 고향 근처로 도로 찾아 한 곳에 당도하니, 촌명은 복덕이요 인심은 순후한데, 빈집 한 칸이 서 있거늘 잠시 의탁하여 살아보니 집 꼴이 말이 아니어, 집 마루에 이슬이 오면 천장에 큰 빗방울이요, 부엌에 불을 때면 방 안은 굴뚝이요, 흙 떨어진 욋대 구멍에 바람은 살 쏜 듯이요, 틀만 남은 헌 문짝에 공석으로 창호하고, 방에 반듯 드러누워 천장을 바라보면 개천도를 붙인 듯이 이십팔 수를 세어 보고, 일하고 곤한 잠에 기지개를 불끈 켜면 상투는 허물없이 앞 토방에 쑥 나가고, 발목은 어느새에 뒷안에 가 놓였구나. 밥을 하도 자주 않으니 아궁이 풀을 뽑았으면 한 마지기 못자리는 넉넉히 할 텐데, 그렁저렁 여러 해에 자식은 더럭더럭 풀풀이 생겨나고, 가난은 버쩍버쩍 나날이 심해 가니, 여러 식구 굶어 내기가 초상난 집 개 같구나. 흥보의 마누라가 견디다 못하여 가난 타령 섧게 울 제,
“가난이야 가난이야, 천만고에 있는 가난, 아무리 헤아려도 내 위에는 다시없네. 담만한 집에 바람과 햇볕을 가리지 못하던 도연명의 가난도 내 집보단 대궐이요, 한 달에 아홉 번 밥 먹고 십 년에 갓 하나이던 정광문의 가난도 내게 대면 부자로세. 어릉중자는 주렸으나 오얏이나 얻어먹고, 소중랑은 굶을 적에 방석 털을 삼켰으니, 오얏을 어디서 보며 방석이 어디 있나. 선산의 해로 이러한가, 파묘나 하자 하되 종손이 말릴 테요, 귀신이 저희한가, 점이나 하자 한들 쌀 한 줌이 없었으니 복채를 낼 수 있나. 애고애고 설운지고, 기한이 이러하니 염치를 돌아보지 못함이 저절로 되네. 여보시오 아기 아범, 형님 댁에 건너가서 전곡간에 얻어다가 굶은 자식을 살려냅세.”
흥보가 걱정하여, “형님 댁에 건너가 애긍히 사정하여 돈이 되나 쌀이 되나 주시면 좋거니와, 어려운 그 성정에 만일 아니 주시고 호령만 하시오면, 근래 같은 세상 인심에 형님이 실덕될 터이니, 안 가는 수가 옳으이.”
“주시고 안 주시기는 하늘에 계시오니, 청하다가 못 되면 한이나 없을 테니, 수인사 대천명으로 길을 두고 산으로 갈까. 되든지 안 되든지 헛사 삼아 가 보시오.”
흥보가 하릴없어 형의 집에 건너갈 제, 의관을 한참 차려, 모자 터진 헌 갓에다 철대를 술로 감아 노갓끈 달아 쓰고, 편자는 좀이 먹고 앞춤에 구멍이 중중, 관자 떨어진 헌 망건을 물렛줄로 얽어 쓰고, 깃만 남은 베 중치막을 열두 도막 이은 술띠로 시장찮게 눌러 매고, 헐고 헌 고의 적삼에 살점이 울긋불긋, 목만 남은 길버선에 짚대님이 별자로다. 구멍 뚫린 나막신을 두 발에 잘잘 끌고, 똑 얻어 올 걸로 큼직한 오쟁이를 평양 가는 어떤 이 모양으로 관뼈 위에 짊어지고 벌벌 떨며 지나갈 제, 저 혼자 탄식하여,
“아무리 생각하나 되리란 말이 아니 난다. 모진 목숨 아니 죽고 이 고생을 하는구나.”
형의 문전에 당도하니 그새 성세가 더 늘어서 가사가 장히 웅장하다. 삼십여 칸 줄행랑을 일자로 지었는데, 한가운데 솟을대문이 표연히 날아갈 듯, 대문 안에 중문이요 중문 안에 벽문이라. 거장한 종놈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쇠털 벙거지 청창 옷에 문문에서 수직타가, 그 중에 늙은 종은 흥보를 아는구나. 깜짝 놀라 절을 하며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서방님 어디 가셔 저 경상이 웬일이요. 수직방에 들어앉아 어한 조금 하옵시다.”
방으로 들어가서 담배를 붙여 주며,
“서방님이 저리 될 제 아씨야 오죽하며, 그새에 아기는 몇 분이나 더 낳으시고, 어찌하여 저 꼴이오. 서방님이 나가실 제 우리들 공론한 말이, 군자 같은 그 심덕에 어디 가면 못 살겠나, 암데 가도 부자 되지, 그럴 줄만 알았더니 세상이 공도 없소.”
끌끌 혀를 차며 화로의 불을 뒤져 가까이 놓아주니, 흥보가 불 쬐고 눈물을 흘리면서 목 맺힌 소리로,
“복 없으면 할 수 없네. 아들은 스물다섯, 아씨야 말할 게 있나. 나 차리고 온 의복은 게다 대면 장갓길. 이 식구 스물일곱 똑 죽게 되었기에, 형님 전에 고간하여 얻어 가지고 왔네마는, 문안 일향하옵시고 성정 조금 풀리셨나?”
“문안이사 그 앞에 가 무슨 병이 얼른하며, 좀체 귀신이 꼼짝할까, 일생 태평하시옵고, 성정 말씀이야 서방님 계실 제와 장리나 더 독하오. 두 말씀 할 것 있소. 이번 제사 때에 음식 장만 아니하고 대전으로 놓았다가 도로 쏟아 내오는데, 지난달 대감 제사에 놓았던 돈 한 푼이 제상 밑에 빠졌던지 몇 사람이 죽을 뻔, 이번은 의사가 또 생겨 싸돈으로 아니 놓고 꿰미채 놓았습죠.”
흥보가 방에 앉아 담배 먹고 불 쬐니 몸이 조금 녹았다가, 이 말을 들어보니 등골이 썬득썬득 찬물을 끼얹은 듯, 가슴이 두근두근 쥐덫이 내려진 듯하고, 머리끝이 꼿꼿하여 하늘로 치솟는 듯, 온 몸을 벌벌 떨면서 하는 말이,
“저기 들어가지 말고 바로 가는 수가 옳지. 이럴 줄 아는 고로 아예 아니 오잖았더니, 아씨에 못 견디어 부득이 왔네그려.”
그 종이 하는 말이,
“이 추위에 저 꼴하고 예까지 왔삽다가, 못 얻으면 그만이지 무슨 탈이 있으리까. 어서 들어가 보시오.”
“전일에 계시던 방에 그저 계신가?”
“아니오. 그 방 옆에 화계를 꾸며 놓고, 화계 앞 굽은 길에 방석이 깔렸으니, 그리 휘돌아 가면 외밀이 쌍창을 열고, 화류틀 완자 영창, 양편 체경 붙인 창에 비스듬히 누워 계시오다.”
“함께 가서 가르치소.”
“아니요, 못 하지요. 이런 위태한 일, 만일 아차 하게 되면 나더러 데려왔다 둘이 다 탈이오니, 혼자 들어가 보시오.”
흥보가 하릴없어 이를 꽉 아드득 물고, 팔짱을 되게 끼고, 죽을 판 살 판으로 가만가만 자주 걸어 초당 앞을 당도하니, 과연 놀보가 영창문을 반쯤 열고, 잘돈피 두루마기 우단은 무겁다고 양색 단의를 하고, 청모관 비껴쓰고, 십상백통 오동수복 부산장인 맞춤대에 팔장생 별각죽을 기장 길게 맞추어서 양초 피워 입에 물고, 안석에 비스듬히 누었구나. 흥보가 아주 죽기로 자처하고 툇마루에 올라서서 곡진히 절을 하고 떨며 문안을 드려,
“떠나온 지 여러 해이니 기체 안녕하옵신지.”
놀보가 한 손으로 안석을 잡고, 배 앓는 말머리 드는 듯 비스듬히 들어본다. 한 어미 배로 나와 함께 커서 장가들고 자식 낳고 함께 살다 쫓아낸 동생이니, 아무리 오래되고 형용이 변했던들 모를 리가 있겠는마는, 우애하는 사람이라 아주 모르는 체하여,
“뉘신지요.”
흥보는 정말 모르고 묻는 줄 알고, 갔던 연조까지 고하여,
“갑술년에 나간 흥보요.”
놀보가 무수히 되씹으며 의심하여,
“흥보 흥보, 일 년 새경 먼저 받고 모 심을 때 도망한 놈, 그 놈은 황보렸다. 쟁기질 보냈더니 소 가지고 도망한 놈, 그 놈은 숭보렸다. 흥보 흥보, 암만 해도 기억치 못하겄다.”
흥보가 의사 있는 사람이면 수작이 이러하니 무슨 일이 되겠느냐, 썩 일어서서 나왔으면 아무 탈이 없을 것을, 저 농판에 숫한 마음에 참 모르고 그러하니 자세히 일러주면 무엇을 줄 줄 알고, 본사를 다 고하여,
“동부동모 친형제로 이름자 항렬하여, 형님 함자 놀보자, 아우 이름 흥보라 하온 줄을 그다지 잊으셨소.”
놀보가 생각하니, 다시 의뭉을 떨자 한들 흥보의 하는 말이 밤송이 까놓듯 하였으니 의뭉집이 없었구나. 맞설 밖에 수 없거든,
“그래서 동부동모나 이부이모나 친형제나 때린 형제나, 어찌 왔는고?”
운판에 미련하기는 흥보 같은 사람 없어, 얻으러 왔단 말을 그 말 끝에 할 것이랴. 엔간한 제 구변에 놀보 감동시킬 줄로, 목소리 섧게 하고 눈물을 훌쩍이며, 고픈 배 틀어쥐고 애긍히 빌어 본다.
“형님 나를 내보낸 건 미워함이 아니오라, 형님 덕에 유의유식하면 사람 될 수 없었으니, 각살이 고생하면 행여나 사람 될까 생각하여 하였으니, 그 뜻 어찌 모르리까.”
놀보가 저 추어주는 말은 장히 좋아하는 사람이라, 그 말은 썩 대답하여,
“아무렴.”
“형님 댁을 떠날 때 부부 손목 서로 잡고 언약을 하옵기를, 밤낮으로 놀지 말고 착실히 품을 팔아 돈 관이나 모으거든, 흰떡 치고 찰떡 치고 연계 삶아 위에 얹어 내 등에 짊어지고, 찹쌀 청주 웃국 질러 병에 넣어 자네가 들고, 형님 댁에 둘이 가서 형님 부처 잡수는 것 기어이 보고 오세.”
놀보가 음식 말을 듣더니 침을 삼키며 추어,
“그렇지.”
“단단 약속하였더니, 어찌 그리 복이 없어 밤낮으로 벌어도 돈 한 푼을 못 모으고, 원찮은 자식들은 아들이 스물다섯.”
놀보가 뒤로 물러앉으며 군소리로,
“박살할 놈, 그 노릇을 해도 밤이면 대고 파니 다른 일 할 틈 있어야지. 계집년 생긴 것이 눈이 벌써 음녀거든.”
“식구가 이러하니 아무런들 할 수 있소. 빌어도 많이 먹으니 다시는 빌 데 없고, 굶은 지도 원 오래니 더 굶으면 죽겠으니, 예 형님 전에 왔사오니, 전곡간에 조금 주면 스물일곱 죽는 못 숨, 여상의 한 그릇 밥이요 학철부어의 한 말 물이니, 적선을 하옵소서.”
두 손을 비비면서 꿇엎디어 섧게 우니, 놀보가 생각하즉 저놈의 쪼된 법이 빌어먹기 투가 나서, 달래서는 안 갈 테요 주어서는 또 올 테니, 죽으면 굶어 죽지 맞아 죽을 생각을 없게 하는 수가 옳다 하고, 부잣집 바람벽에 도적 방비하려 걸어 둔 철퇴 철편 마상도며 단단한 몽둥이를 오죽 많이 걸었겠나. 그 중에 단단하고 손잡이 좋은 몽둥이 하나를 내려 손에 들고, 엎드려 우는 볼기짝을 에후루쳐 딱 때리고, 추상같이 호령한다. “하늘이 사람 낼 제 정한 분복 각기 있어, 잘난 놈은 부자 되고 못난 놈은 가난하니, 내가 이리 잘살기에 네 복을 빼앗느냐. 뉘게다가 떼쓰자고 이 흉년에 전곡 주소, 목 안으로 소리하며 눈물 방울 흩뿌리면 네 잔꾀에 내 속으랴. 조금 지체하다가는 잔뼈 찾지 못할 테니 속속 문 밖으로 어서 가라.”
몽둥이를 또 들메니, 불쌍한 저 흥보가 제 형 성정을 아는구나. 눈물 씻고 절을 하며,
“과연 잘못하였으니 너무 진념 마옵시고 평안히 계십소서. 동생은 가옵니다.”
하직하고 나올 적에, 남들은 놀보 가속이 거렁이에 밥 싸 주네, 밀가루 퍼서 주고 공알 답인다 해도 모두 거짓말. 이년의 마음씨는 놀보보다 더 독하여, 낭자하고 긴 담뱃대를 물고 안 중문에 비껴 서서 시종을 구경하다가, 흥보가 나간 것을 보고 제 서방을 나무라,
“저러한 떼군 놈을 단단히 쳐줘야 다시는 안 올 텐데, 어떻게 때렸길래 여상으로 걸어가네. 계집은 잘 잡죄지. 다리칼 공알주먹 하면서도 동생은 우애하여 사정을 보았구만.”
흥보가 형의 집에 전곡 타러 왔다가 몽둥이만 잔뜩 타고 비틀걸음으로 걸어간다. 이때에 흥보 아내는, 여러 날 굶은 가장을 형의 집에 보내고서, 전곡간에 얻어 오면 굶은 자식 먹일 걸로 마을 어귀에 나서 기다린다. 스물다섯 되는 자식을 다른 사람 자식 낳듯 한 배에 하나 낳아 삼사 세 된 연후에 낳고 낳고 했어야, 사십이 못 다 되어 그리 많이 낳겠느냐. 한 해에 한 배씩 한 배에 두셋씩 대고 낳아 놓았구나. 그래도 아이들은 칠칠 일이 지나면 안기도 하여 보고, 백 일이 지나면 업기도 해보고, 첫돌이 지나면 손 잡고 걸어보고, 삼사 세가 되면 의복 입고 다녔어야 다리에 골이 오르고 몸이 활발할 터인데, 이 집 자식 기르는 법은 덕석을 결 때에 세 줄로 구멍을 내어 한 줄에 열 구멍씩, 첫 구멍은 조그맣고 차차 구멍이 커 간다. 한 배에 낳은 자식 둘이 되나 셋이 되나 앉혀 보아, 앉으면은 첫 구멍에 목을 넣고 하루 몇 때씩을 암죽만 떠 넣으면, 불쌍한 이것들이 울어도 앉아 울고 자도 앉아 자고, 똥오줌이 마려우면 덕석 쓴 채 앉아 누어, 세상에 난 연후에 실오라기 하나라도 몸에 걸쳐 본 일 없고, 한 번도 문턱 밖에 발 디뎌 본 일 없고, 다른 사람 얼굴 보아 소리 들어본 일 없고, 그저 앉아 큰 것이라, 때 묻은 여윈 낯이 터럭이 거칠거칠, 동지섣달 강아지가 아궁에서 자고 난 듯, 덕석 쓴 채 새고 나면 빼빼 마른 몸뚱이가 대강이를 엮어 놓은 듯, 못 먹고 앉아 크니 원 무르게 되어서, 큰 놈들은 스무 살씩 작은 놈들은 열칠팔 세, 남의 자식 같으면 농사하네 나무하네 한창들 벌이를 하련마는, 원 늦되어서 부르는 게 어메 아비 음식 이름, 아는 것이 밥뿐이로구나. 다른 음식 알려 한들, 세상에 난 연후에 먹기는 고사하고 보거나 듣거나 하였어야지. 밥 갖다 줄 때가 조금만 지나면 뭇 놈이 그저 각청으로,
“어메 밥 어메 밥” 하는 소리, 비 오려 할 제 방죽 개구리 소리도 같고, 석양천에 떼매미 소리도 같고, 언제라도 밥 들고 들어가도록,
“어메 밥 어메 밥” 하는구나. 이날도 흥보 댁이 여러 자식놈들의 “어메 밥” 소리에 정신을 못 차려서, 벗은 발에 두 손을 불고 마을 어귀 밖에 나서보니, 흥보가 방장 건너올 제, 지지도 메도 아니하고 빈손 치고 정신없이 비틀비틀 오는 거동, 조창배 격졸로서 일천 석 실은 곡식 풍랑에 파선하고 십차 형신 삼 년 체수의 고생을 겪고 오는 모양, 다섯 바리 고마 마부 관가 봉물을 싣고 갔다 백 냥짜리 말 죽이고 주막 주막 빌어먹어 빈 채 들고 오는 모양, 정색이 말이 아니어, 흥보 댁이 깜짝 놀라 손목을 잡으면서,
“어찌 그리 지체하고 어찌 그리 심란한가. 오죽 시장하며 오죽 춥겠는가.”
자세히 살펴보니, 쑥 들어간 두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간신히 살 가리운 고의 뒤폭 툭 미어져, 빳빳 마른 볼기짝에 몽둥이 맞은 자리 구렁이가 감겼는 듯. 흥보 아내 대경하여,
“애겨, 이게 웬일인가, 저 몹쓸 독한 사람, 굶은 사람을 쳤네 그려.”
가슴 탕탕 발 구르니 흥보가 달래어,
“자네 그게 웬 소린가. 형님 댁에 건너가니 형님이 반기시고 좋은 술 더운 밥을 착실히 먹인 후에 쌀 닷 말 돈 석 냥을 썩 내어 주시기에, 쌀 속에 돈을 넣어 오쟁이에 묶어 지고, 땀 흘리며 오노라니, 이 너머 깊은 골짜기에 설금찬 두 사람이 몽둥이 갈라 쥐고 솔밭에서 왈칵 나와 볼기짝을 때리면서, ‘이놈, 목숨이 크냐 재물이 크냐.’ 한 번 호통에 정신 놓아 졌던 것 벗어 주고 겨우 살아 오느라고 서러워서 울었으니, 형님은 원망 마소.”
흥보 댁이 아니 믿고 손뼉을 딱딱 치며,
“그래도 내가 알고 저래도 내가 아네. 몹쓸래라 몹쓸래라, 시아주비도 몹쓸래라. 하나 있는 그 동생을 못 본 지가 몇 해런고. 오늘같이 추운 아침 형 보자고 간 동생의 관망을 보거드면 오려논에 새 볼 터요, 의복을 보거드면 구럭 속에 황육 든 듯, 얼굴은 부황채색 말소리 기진 함함, 여러 해 굶은 줄과 조금하면 죽을 정색 번연히 알 터인데, 구완하긴 고사하고 저리 몹시 때렸으니 사람이 할 일인가. 애고애고 설운지고. 옛사람의 어우 생각, 구름 보면 낮 졸다 수유꽃 꺾어 꽂고 한숨 쉰다는데, 우리 집 시아주비는 어찌 그리 영독한고. 남의 원망 쓸데 없네, 모두 다 내 죄로세. 나라가 어지러울 때 어진 신하를 생각하고, 집이 가난할 때 어진 처를 생각한다 하였으니, 내 설마 음전하면 불쌍한 우리 가장 못 먹이고 못 입힐까. 가장은 처복 없어 나 까닭에 굶거니와, 철 모르는 자식 정경 더구나 못 보겠네. 짐승은 미물이나 입으로 밥을 물어 자식을 먹여 주며, 추우면 날개 벌려 자식을 덮는 것을, 나는 어찌 사람으로 수다한 자식들을 굶기고 벗기는고. 각결의 아내 같이 밭이나 매어 볼까, 양홍의 아내 같이 물이나 길어 볼까, 직녀성에 걸교하여 침자 품을 팔아 볼까, 탁문군의 본을 받아 술장수를 하여 볼까.”
흥보가 깜짝 놀라,
“자네 그게 웬 소린가. 죽었으면 그저 죽지, 자네 시켜 술 팔겠나. 가사는 임장이니, 내 나서서 품을 팔 터이니, 자네는 집에 있어 채전이나 가꾸고 자식들을 길러 내소.”
흥보가 품을 팔 제, 매우 부지런히 서둘러, 상평하평 김매기, 원산 근산 시초베기, 먹고 닷 돈 받고, 장서두리 십리에 돈 반, 승교 메기, 신산 석어 밤짐 지기, 시 매긴 공사 급주 가기, 방 뜯는 데 조역꾼, 담 쌓는 데 자갈 줍기, 봉산 가서 모내기 품팔기, 대구령에 약태전, 초상난 집 부고 전키, 출상할 제 명정 들기, 공관 되면 상직하기, 대장간에 풀무 불기, 멋있는 기생 아씨 타관 애부 편지 전키, 부잣집 어린 신랑 장가들 제 안부 서기, 들병장수 술짐 지기, 초라니 판에 무투 놓기. 아무리 벌어도 시골서는 할 수 없다. 서울로 올라가서 군치리집 종노릇 하다가 소주 가마 눌려 놓고 뺨 맞고 쫓겨 와서, 매품 팔러 병영에 갔다가는 배교 밀리어서 태장 한 개 못 맞고서 빈손 쥐고 돌아오니, 흥보 아내가 품을 판다. 오뉴월 밭매기와 구시월 김장하기, 한 말 받고 벼 훑기와 입만 먹고 방아 찧기, 삼 삶기 보 막기와 물레질 베짜기와, 머슴의 헌 옷 짓기, 상고에 빨래하기, 혼장가에 진일 하기, 채소밭에 오줌 주기, 소주 고고 장 달이기, 물방아에 쌀 까불기, 밀 맷돌 갈 제 집어넣기, 보리 갈 제 망웃 놓기, 못자리 때 망초 뜯기, 아이 낳고 첫국밥을 제 손으로 해 먹고 운기를 방통하되 절구질로 땀을 내니, 한 때도 쉬지 않고 밤낮으로 벌어도 늘 굶는구나. 흥보 댁이 할 수 없어 죽기로 자처하고, 복을 못 탄 신세 자탄을 진양조로 섧게 울 제, 맘 있는 사람들은 귀에서도 눈물 난다.
“애고 애고 설운지고. 복이라 하는 것을 어쩌면 잘 타는고. 북두칠성님이 마련하시는가, 제왕 산신님이 점지하신가. 생년 생월 생일 생시 팔자에 매였는가. 묘 쓰기에 매였는가, 이목구비 오악으로 생기기에 매였는가. 적선행인 은악앙선 마음씨에 매였는가. 어찌하면 잘사는지, 세상에 난 연후에 불의행사 아니하고 밤낮으로 벌어도 삼순구식 할 수 없고, 일 년 사철 헌 옷이라. 내 몸은 고사하고, 가장은 부황 나고 자식들은 아사지경, 사람 차마 못 보겠네. 차라리 자결하여 이런 꼴 안 보고저. 애고애고 설운지고.”
치마끈으로 목을 매니, 흥보가 울며 말려,
“여보소 아기 어멈, 이것이 웬일인가. 자네가 살았어도 내 신세 이러할 제, 자네가 죽으면 내 신세는 어떠하고 자식들이 어찌 될까. 부인의 백년신세는 가장에게 매였는데, 박복한 나를 얻어 이 고생을 하게 하니 내가 먼저 죽으려네.”
허리띠로 목을 매니 흥보 아내 겁을 내어 가장 손목 붙들고서, 둘이 서로 통곡하니 아주 초상난 집 되었구나. 이때에 중 하나가 촌중으로 지나는데, 행색을 알 수 없어 연년 묵은 헐디 헌 중이라. 풀옷에 기운 자리가 바늘 들어갈 틈 없고, 두 귀가 어깨까지 늘어지고 눈썹이 얼굴을 덮었으며, 다 떨어진 청올치 송낙이 이리총총 저리총총, 헝겊으로 지은 것을 흠뻑 눌러 쓰고, 누덕누덕 헌 베 장삼에 율무 염주를 목에 걸고, 한 손에는 절로 굽은 철쭉장, 한 손에는 다 깨진 목탁을 들고, 동냥을 얻으면 무엇에 받아 갈지 목기짝 바랑 등물 하나도 안 가지고, 개미가 안 밟히게 가만가만 가려 디디며 촌중으로 들어올 제, 개가 쾅쾅 짖고 나면 두 손을 합장하며,
“나무아미타불.”
사람이 말 물으면 허리를 굽히면서, “나무아미타불.”
이집 저집 다 지나고 흥보 문전에 당도하더니, 양구히 주저하여 울음소리 한참 듣다, 목탁을 두드리며 목소리 내어 하는 말이,
“거룩하신 댁 문전에 걸승 하나 왔사오니 동냥 조금 주옵소서.”
목탁을 연해 치니, 흥보가 눈물 씻고 애긍히 대답하되,
“굶은 지 여러 날에 전곡이 없사오니, 아무리 섭섭하나 다른 데나 가보시오.”
그 중이 대답하되,
“주인의 처분이니 그저는 가려니와, 통곡은 웬일이오.”
“자식은 여럿인데 가세가 철빈하여 굶다굶다 못하여서, 가련한 부부가 목숨 먼저 죽기 다투어서 서로 잡고 우나이다.”
저 중이 탄식하여,
“어허, 신세 가련하오. 부귀가 임자 없어 적선하면 오나니, 무지한 중의 말을 만일 듣고 믿을 테면 집터 하나 가르칠게, 소승 뒤를 따르시오.”
흥보가 크게 기뻐하여 천번 만번 치하하며 대사 뒤를 따라가니, 배산임수 개국하고 무성한 숲 대나무 두른 곳에 집터를 재혈할 제, 명당 수법이 완연하다. “감계룡 간좌곤향 탐랑득거문파며, 반월형 일자안에 문필봉 창고사가 좌우에 높았으니, 이 터에 집을 짓고 안빈하고 지내오면, 가세가 속발하여 도주 의돈에 비길 테요, 자손이 영귀하여 만세 유전하오리다.”
정간에 입주 자리 막대기 넷 박아주고 한두 걸음 나가더니 홀연히 사라지는지라. 도승인 줄 짐작하고 있던 집 헐어다가 그 자리에 의지하고 간신히 지낼 적에, 백설한풍 깊은 겨울 벌거벗고 텅 빈 배로 아니 죽고 살아나서, 정월 이월 해빙하니 산수경개 장히 좋다. 버들빛 황금처럼 새롭고 꾀꼬리 노래하고, 이화 흰 눈 같은 향기에 나비가 춤을 춘다. 까치 집 짓는 재주 내 집보다 단단하고, 산 꿩 우는 소리 너는 때를 얻었도다. 집은 방장 새려는데 소쩍새는 비오비오. 쌀 한 줌이 없는 것을 저 새 소리 솥 적다 하고, 뻐꾸기는 운다마는 논이 있어야 농사하지. 오디새야 날지 마라, 누에 쳐야 뽕 따겠다. 배가 저리 고프거든 이것 먹소 쑥국새야, 목이 저리 갈하거든 술을 줄까 제호 새야. 먹을 것이 없으니 계견을 기르겠나, 살해를 아니 하니 노루 사슴이 벗이로다. 삼월 동풍 방춘화시, 날짐승 길짐승 즐길 적에, 강남에서 돌아온 제비가 흥보의 움막에 날아드니, 흥보가 좋아라고 제비 보고 치하한다. “세상 인심 부귀를 쫓아가니 적막한 이 산중에 찾아올 이 없건마는, 제비는 가난한 집 버리지 않는다 하였더니, 주란화각은 다 버리고 말만한 이내 집을 찾아오니 반갑도다.”
저 제비 거동 보소. 그래도 집 지을 뜻이 있는지라, 남남거리며 하례하고, 좋은 진흙 물어다가 처마 안에 집을 짓고, 수컷이 날고 암컷이 따르며 알을 낳아 새끼 까서, 밥 물어다 먹이면서 자모가 구구히 즐기더니, 천만의외에 큰 구렁이가 제비 집에 들었거늘, 흥보가 깜짝 놀라 정설하며 쫓는구나. “무상한 저 구렁이야, 네 먹을 것 많구나. 푸른 풀 우거진 연못에 처처에 개구리요, 봄날 어디서나 온갖 새소리 들리는데, 허다한 것 다 버리고 구태여 내 집에 와서 제비 새끼 잡아먹노. 한 고조 대택을 지날 제 작은 칼로 네 허리를 베고지고, 남악 사당에 원정하여 신병을 몰아다가 네 큰 목을 자르고저.”
급급히 쫓고 보니, 제비 새끼 여섯에서 다섯 먹고 하나 남아, 혈혈히 아니 죽고 날기를 공부하다가 대발 틈에 발이 빠져 거의 죽게 되었거늘, 흥보가 보고 대경하여 제비 새끼를 손에 놓고 무한히 탄식한다. “가긍한 네 목숨, 대망에게 안 죽기에 완명으로 알았더니, 다리 부러지는 환이 웬일이냐. 전생의 죄악이냐, 잠시의 횡액이냐. 삼백 날짐승 많은 중에 죄 없는 게 제비로다. 네 알이 아니던들 은나라가 없으렸다. 네 턱이 아니면은 만리봉후를 어찌 하리. 백곡에 해가 없고 사람을 잘 따르니, 빈 대들보에 떨어진 제비 진흙은 문장의 수단이요, 제비 소리 저문 날에는 그리운 이의 수심이라. 네 경색이 가긍하니 기어이 살리리라.”
칠산 조기 껍질 벗겨 두 다리를 돌돌 말고 오색 당사로 찬찬 감아 제 집에 넣었더니, 십여 일 지난 후에 양각이 완고하여 비거비래 노는 거동 보기가 장히 좋다. 구만 리 장공에 높이높이 날아 보고, 일대 장천 맑은 물을 배로 스쳐 보고, 평판한 넓은 뜰에 아장아장 걸어 보고, 길게 맨 빨랫줄에 한들한들 앉아 보고, 바람에 떨어진 꽃 또기또기 차도 보고, 세우에 젖은 날개 슬근슬근 다듬으며, 아로새긴 들보 위에 고운 말로 하례하고, 해당화 그늘 속에 오락가락 놀아 보니, 흥보가 좋아라고 집 안에 있을 제는 제비하고 소일하고, 나갔다 돌아오면 제비 집을 보아 다정히 지내더니, 칠월에 불꽃자리 서쪽으로 기울고 팔월에 갈대 무성하여, 이슬이 서리 되고 금풍이 삽삽하여 수의 구월 되어 오니, 동방에 귀뚜라미 울어 깊은 수심을 자아내고, 장공에 기러기 소리는 먼 데 소식 띄워 온다. 용산에서 술 마시고 망향대에 손 보낼 제, 섭섭하다 우리 제비, 고향 강남에 가려 하고 하직을 하는구나. 흥보가 탄식하여,
“사랑스럽다 우리 제비, 날 버리고 가려느냐. 강남이 멀다 하니 며칠이면 당도할꼬. 명춘에 돌아오거든 부디 내 집 찾아 오라.”
제비도 못 잊어서 나갔다 돌아와서 아리따운 말소리로 이별을 아끼는 듯. 흥보는 본래 서러운 사람이라, 눈물 보씩이나 흘리고 이별을 하였구나. 십이제국에 갔던 제비, 구월 그믐에 돌아와서 시월 초하룻날 제 장수에게 현신하고, 새끼 수를 점고하여 문서 치부하는구나. 노나라에 갔던 제비 첫째로 들어가고, 조선에 왔던 제비 둘째로 들어갈 제, 흥보의 제비가 현신하니, 장수가 묻는 말이,
“어찌 새끼 하나 까고 두 다리가 봉퉁하냐?” 제비가 여짜오되,
“새끼 여섯을 깠삽는데 대망이가 다 먹삽고, 다만 하나 남은 것이 대발 틈에 발이 빠져 거의 죽게 되었더니, 주인 흥보의 힘을 입어 간신히 살렸으니, 흥보의 어진 덕은 백골난망이 되나이다.”
제비 장수 분부하되,
“장령을 어기면 번번이 탈이 있느니라. 금춘 이월 나갈 적에 그날이 을사일, 뱀날은 멀리 가지 않는 날이니 가지 마라 만류해도 고집으로 나가더니, 뱀날 떠났기로 뱀 환을 만났구나. 흥보 한 일 생각하니 금세의 군자로다. 보배 하나 갖다 주어 그 은혜를 갚아라. 명춘에 나갈 적에 내게 다시 고하여라.”
삼동을 다 지내고 이월 초에 출발할 제, 흥보가 살린 제비 장수 전에 하직하니, 보물 하나를 내어 주며,
“이것을 물어다가 흥보에게 드려라.”
제비가 받아 물고 조선으로 나올 적에, 무인지경 누만 리에 인가를 볼 수 있나. 봄 제비 숲속 나무에 깃들어 밤이면 나무에서 자고 날이 새면 다시 날아, 삼월 삼일 원정일에 흥보 집 찾아드니. 이때에 주인 흥보, 제비를 보내고서 일념으로 못 잊어서 왕왕 생각하다가, 삼삼일이 돌아오니 그 제비가 다시 올까, 품팔러도 아니 가고 기다리고 앉았더니. 반갑다 저 제비, 처마 안에 날아들 제 봉퉁하진 두 다리가 옛 모습이 완연하구나. “아지주지.” 고운 소리로 그린 회포 말하는 듯, 흥보가 좋아라고 무한히 정설한다. “너 왔느냐 너 왔느냐, 내 제비 너 왔느냐. 강남 수천 리 갔다가 너 왔느냐. 강남은 아름다운 땅이라 어찌하여 내버리고, 누추한 이내 집을 허위허위 찾아왔나. 인심은 간사하여 한 번 가면 잊건마는, 너는 어찌 신이 있어 옛 주인을 찾아왔나.” 한참 이리 반길 적에 제비 입에 물었던 것을 흥보 앞에 떨어치니, 흥보가 집어 들고 제 아내를 급히 불러,
“여보소 아기 어멈, 어서 와서 이것 보소. 제비가 물어 왔네.”
흥보 댁이 들고 보며,
“애겨, 이게 무슨 씨 아닌가.”
여인네 소견이라 당찮게 대어 보아,
“그것 아마 외씨지.”
“아닐세. 옛날에 소평이가 벼슬이 무섭다고 외 심어서 팔았으나 그 땅이 관중이라 강남은 부당하고, 외씨가 이렇게 크겠는가.”
“그러면 여지씨인가.”
“아닐세. 양귀비의 고운 얼굴 회색을 내려고 여지만 먹었으나 서촉에서 공 바치니 강남 소산 아니었고, 여지씨는 우툴두툴 벌레 먹은 형상이니. 옳아 그것이로구나. 약방에서는 백편두라 한다던가.”
“그것 강낭콩 아닌가.”
“아닐세. 강낭콩은 훨씬 넓고 가에 흰 테 둘렀나니.”
“애겨, 무슨 글자 있네.”
“일 주소 어디 보세. 갚을 보(報), 은혜 은(恩), 박 포(匏). 보은포, 보은포. 보은은 충청도 땅 옥천 옆에, 그러니까 이 제비가 올 적에 공주로 노성으로 은진으로 온 것이 아니라 보은으로 옥천으로 연산으로 왔나. 여러 고을 지나오면 어찌 똑 보은 박씨를 무엇 하러 물어 왔나. 보은 대추 좋다 하되 박 좋단 말 못 들었지. 그러나저러나 강남 것이든지 보은 것이든지, 저 먹을 것 아닌 것을 물어오기 괴이하고 내 앞에다 떨치기 더욱 괴이하니, 아무튼 심어 보세.”
을불재종 날을 보아 대장군 안선방을 둥그렇게 깊이 파고, 오줌독에 담근 신짝 여러 죽을 쟁이고서 흙과 재를 잘 버무려 단단히 심었더니, 싹이 트는 것을 보니 박은 정녕 박이어든, 순이 차차 뻗어 나니 산나무 가지 찍어 드문드문 손을 주어 지붕 위로 올렸더니, 화풍감우 호시절에 밤낮으로 무성하여, 삿갓 같은 넓은 잎이 온 집을 덮었으니 비가 와도 걱정 없고, 닻줄 같은 큰 넌출이 온 집을 얽었으니 바람 불어도 걱정 없어, 흥보가 벌써부터 박의 힘을 입는구나. 마디마디 핀 꽃이 노인의 기상처럼 조촐하다. 박 세 통이 열었는데, 처음엔 까마귀 머리만, 종자만 보아 만, 화로만, 장단 북통만, 폐문 북통만 하더니 밤낮으로 차차 크니, 약한 집이 무너질까 흥보가 걱정하여, 단단한 장목으로 박통 놓인 데마다 천장을 괴었더니, 그렁저렁 상풍 팔월 단호절이 당도하니, 흥보가 저의 처와 의논을 하는구나.
“여보소 아이 어멈, 이 아니 좋은 땐가. 우리 동네 사람들은 오려 잡아 서릿쌀 풋돔부 풋콩 까서 밥을 짓네 송편 하네, 창 앞에 대추 따고 뒤꼍에 알밤 줍고, 논귀에서 붕어 잡고 두엄에 집장 띄워 먹을 것 많건마는, 가련한 우리 신세 먹을 것 바이 없네. 세상에 죽는 목숨 밥 한 덩이 누가 주며, 찬 부엌에 굶은 아내 조강인들 볼 수 있나. 철모르고 우는 자식 배를 달라 밥을 달라 무엇으로 달래 볼까. 우리는 저 박을 타서 박속은 지져 먹고, 박적은 팔아다가 한 끼 구급하여 보세.”
동네 도끼 얻어 들고 지붕 위로 올라가서 박꼭지는 찍었으나 내릴 수가 없다. 정월 보름에 끌었던 줄 당산 나무에 감겼거늘, 그 줄을 풀어다가 박통을 동이고서, 흥보는 뒷줄 잡고 처자는 잡아당겨 간신히 내려놓고, 박 목수의 큰 톱 얻어 박통을 켜려는데, 흥보 꼴 이러하나 속 멋은 담뿍 들어,
“여보소 아이 어멈, 평지에 지어도 절은 절이요, 성복 술에도 권주가 한다네. 우리의 일 년 농사, 논을 한가 밭을 한가. 모 심을 제 상사 소리, 밭 맬 제 메나리를 불러 볼 수 없었으니, 우리는 이 박 타며 박 소래나 해보세.”
“무슨 노래 사설을 알아야 하지.”
“묵은 사설은 때 묻으니, 박 내력을 가지고서 사설 지어 메기거든 자네는 뒤만 맡소.”
“그럽세.”
흥보가 톱질 소리를 메긴다. “어기여라 톱질이야, 당겨 주소 톱질이야. 성인이 풍류 지을 제 쇠 돌 실 대 바가지 흙 가죽 나무 팔음이 박이 아니면은 팔음이 어찌 되리.”
“한 표주박의 음식으로 가난을 즐기던 안회의 낙도를 어찌하며, 소부의 둔세고절 이 박이 아니면은 기산에 표주박 걸기를 어이하리.”
“어기여라 톱질이야.”
“군자의 말 없기는 구멍 없는 박이 그 아닌가. 남화경에 있는 박은 크면서도 쓸데없다 아깝도다.”
“어기여라 톱질이야.”
“인간 대사 혼인할 제 박 잔으로 행주하고, 강산의 시주객은 표주박 잔을 들어 서로 권하도다.”
“어기여라 톱질이야.”
“우리도 이 박 타서 쌀도 일고 물도 떠서, 가지가지 잘 써보세.”
“어기여라 톱질이야.”
슬근슬근 탁 타 놓으니, 청의 입은 동자 한 쌍이 박통 밖에 썩 나서며,
“이것이 흥보 씨 댁이요?” 흥보가 깜짝 놀라 뒤꼭지를 탁탁 치며,
“이런 재변을 보았나. 초나라 유자 속에 노인이 바둑 둔다 하되, 박통 속에 동자들이 찬만고에 처음이라. 내 이름을 어찌 알고 무엇 하자 와 묻는지. 허 참 이 노릇이 도망케 되었나. 죽자, 원 내가 흥보다. 이 사이 풀밭에 누워도 진드기 한 마리 붙을 데 없는 사람을 찾아 무엇 하겠느냐.”
저 동자가 소매에서 대모 쟁반을 내놓는데, 병과 접시 종이봉지 드문드문 놓였구나. 눈 위에 높이 들어 흥보 앞에 드리면서 절하고 여짜오되,
“삼신산 열위 선관이 모여 앉아 공론하되, 흥보 씨의 지극덕화가 금수에까지 미쳤으니 그저 있지 못하리라. 수종 약을 보냈으니, 백옥병에 넣은 것은 죽은 사람 혼을 불러 돌아오는 환혼주, 밀화 접시에 놓은 것은 소경이 먹으면 눈이 밝는 개안주, 호박 접시에 담은 것은 벙어리가 먹으면 말 잘하는 개언초, 산호 접시에 담은 것은 귀먹은 이가 먹으면 귀 열리는 벽이롱, 설화지로 묶은 것은 아니 죽는 불사약, 금화지로 묶은 것은 아니 늙는 불로초, 가지가지 있삽는데, 약 이름과 쓰는 데를 그 옆에 썼사오니 그리 알아 쓰옵소서. 가다가 동정 용궁에 전할 편지 있삽기로 총총히 갑니다.”
사흘 굶은 흥보가 헛인사를 한 번 하여,
“저러하신 선동네가, 나 같은 사람을 보려고 그 먼데서 오셨다가, 아무리 염반이나 점심 요기해야지.”
동자 웃고 대답하되,
“세상 사람이 아니기로, 시장하면 구전단, 목마르면 감로수, 연화식을 못 하오니, 염려치 마옵소서.”
홀연히 사라지는지라. 흥보가 의사를 내어, 허소한 집구석에 선약을 혹 잃을까, 조그마한 오쟁이에 모두 넣어 꽉 동여서, 움막방 들보 위에 씻나락 모양으로 단단히 얹었구나. 동자를 보낸 후에,
“어허, 괴이하다.”
박적 속을 또 굽어보니 목물들이 놓였는데, 하나는 반닫이 농만하고 하나는 벼룻집만한데, 주홍 왜칠을 곱게 하고, 용 거북 자물쇠를 단단히 채고서, 초록 당사 벌매듭에 열쇠 달아 옆에 걸고, 둘 다 뚜껑 위에 황금 정자가 쓰였는데 “박흥보 개탁”이라. 흥보가 보고 장담하여,
“내가 비록 산중에 사나, 이름은 멀리 났지. 봉래산 선동들도 내 이름을 부르더니, 목물 위에 썼구나.”
둘 다 열고 보니, 하나는 쌀이 가득, 하나는 돈이 가득, 부어 내고 되고 세니, 동서반 생성수로 쌀은 서 말 여덟 되, 돈은 넉 냥 아홉 돈, 온 집안이 대희하여 그 쌀로 밥을 짓고 그 돈으로 반찬 사서 바로 먹기로 드는데, 흥보의 마누라가 살림살이 약게 하나, 양식 두고 먹었느냐. 부자 아씨 같으면 식구가 스물일곱, 모두 칠 홉을 낼지라도 이필 이십사, 칠칠은 사십구, 말 여덟 되 구 홉이니, 채워 두 말 하였으면 오죽 푼푼하련마는, 평생에 양식이 부족하여 생긴 대로 다 먹는다. 부부가 품판 삯을 양식으로 받으나 돈으로 받아 오나, 한 돈어치 팔아 오나 두 돈어치 서 돈어치, 사온 대로 하여도 모자라만 보았기로, 서 말 여덟 되를 생긴 대로 다 할 적에, 솥이 적어 할 수 있나. 쇠죽솥 그중 큰 집을 찾아가서 밥을 짓고, 넉 냥 아홉 돈은 쇠고기를 모두 사서 반찬을 하려 할 제, 식칼 도마가 어디 있나. 여러 자식놈들 고기를 붙들고서 낫으로 자를 적에, 고기 결을 알 수 있나. 가로 잘라 놓은 모양 연목 머리 잘라 놓은 듯, 기둥 밑 잘라 놓은 듯, 건건이와 양념 등물, 별로 수가 많잖아, 소금 흩고 맹물 쳐서 토정에 삶아 내고, 그릇 없어 밥 푸겠나. 씻도 않은 헌 쇠죽통에 밥 두 통을 퍼다 놓고, 숟가락은 근본에 없어 있더라도 찾겠는가. 깨끗이 씻지 않은 손으로 질통 가에 늘어앉아 서로 주워 먹을 적에, 이 여러 자식들이 노상 밥이 부족하여 서로 뺏어 먹었구나. 그리 많은 밥이로되 큰 놈 입에 넣는 것을 작은 놈이 뺏어 훔쳐, 큰 놈도 빼앗기고, 새로 지어 먹었으면 싸움 아니 하련마는, 악을 쓰며 주먹 쥐어 작은 놈 볼때기를 이 빠지게 찧으면서 개 아들놈 쇠 아들놈, 밥통이 엎어지고 살벌이 일어나되, 무지한 저 흥보는 밥 먹기에 윤기 잊어, 자식 몇 놈이 뒈져도 살릴 생각은 아예 않고, 그 뜨거운 밥이로되 두 손으로 서로 쥐어, 세죽 방울 놀리는 양, 크나큰 밥덩이가 손에서 떨어지면 목구멍을 바로 넘어, 턱도 별로 안 놀리고, 어깨춤 눈 번득여, 거의 한 말어치를 처치한 연후에, 왼편 팔 땅에 짚고 두 다리 쭉 뻗치고, 오른편 손목으로 뱃가죽을 문지르며, 밥더러 농담하기로 들어,
“여봐라 밥아, 내가 하도 시장키에 너를 조금 먹었으나, 네 소위를 생각하면 대면할 것 아니지야. 세상 인심 간사하여 추세를 한다 한들 너같이 심히 하랴. 세도집과 부잣집만 기어이 찾아가서, 먹다먹다 못다 먹어 개를 주며 돝을 주며, 학 두루미 때거우를 모두 다 먹이고도 그래도 많이 남아 쉬네 썩네 하는 것을, 나와 무슨 원수 있어 사흘 나흘 예상 굶어, 뱃가죽이 등에 붙고 갈빗대가 따로 나서, 두 눈이 캄캄하고 두 귀가 먹먹하여, 누웠다 일어나면 정신이 어질어질, 앉았다 일어서면 다리가 벌렁벌렁, 말라 죽게 되었으되 찾는 일 전혀 없고 냄새도 안 맡히니, 그럴 도리가 있단 말인가. 예라, 이 괴이한 것, 그런 법이 없느니라.”
아주 한참 준책하더니 도로 슬쩍 달래어,
“내가 그런다고 노여워 안 오려느냐. 어여뻐서 한 말이지 미워 한 말 아니로다. 친고가 조만 없어 정지후박에 매였으니, 어찌 이리 늦게 서로 만났는고, 원컨대 서로 떠나지 말고 지내보세. 애겨애겨 내 밥이야, 옥을 주고 바꿀쏘냐, 금을 주고 바꿀쏘냐. 애겨애겨 내 밥이야.”
밥이 더럭더럭 오도록 새 정을 붙이려고 이런 야단이 없구나. 밥하고 수작할 제, 흥보의 열일곱째 아들놈이 장난을 하느라고 쌀궤를 열어보고, 깜짝 놀라 아비를 불러,
“애겨, 아비 이것 보오. 이 궤 속에 쌀 또 있네.”
흥보가 의심하여,
“그 말이 웬 말이냐. 돈 든 궤를 또 보아라.”
“애겨, 돈 또 들었네.”
“어, 그것 맹랑하다.”
쌀과 돈을 또 부어 내고, 덮었다 열고 보면 돈과 쌀이 도로 가득가득. “어허 그것 장히 좋다. 그 많은 자식들이 팔 갈아 달려들어 종일을 부어 내니, 원 전곡이 가량없다.” 자식들은 그 노릇 하라 하고, 뱃심이 든든할 제 둘째 통을 또 켜는데, 장 굶던 흥보 신세, 뜻밖에 밥 보더니 아주 밥에 골몰하여, 톱질하던 사설을 밥으로 메기겠다. “어기여라 톱질이야, 좋을씨고 좋을씨고. 밥 먹으니 좋을씨고. 수인씨의 불 때는 법 가르침 날 위하여 가르쳤네.”
“어기여라 톱질이야.”
“강구 노인 배불리 먹고 배 두드리니, 나만치나 먹었던가. 남쪽 밭에 밥 날라 농부 기뻐하니, 나만치나 즐기던가.”
“어기여차 톱질이야.”
“만고에 영웅들도 밥 없으면 살 수 있나. 오자서 도망할 제 오 나라 저자에 걸식하고, 한신이 궁곤할 제 빨래하는 노파에게 기식이라.”
“어기여라 톱질이야.”
“진 문공 밭에서 밥 얻고, 한 광무 호타에서 보리밥, 중한 것이 밥뿐이라.”
“어기여라 톱질이야.”
“이 박통을 또 타거든, 은금보패 내사 싫어, 더럭더럭 밥 나오소.”
“어기여라 톱질이야.”
슬근슬근 탁 타 놓으니, 온갖 보물이 다 나온다. 비단으로 볼작시면, 하늘 문에 햇빛 쏘이는 황금방 일광단, 하늘 한가운데 이르러 만국이 밝은 월광단, 평치수토 하우공덕 구주토산 공단, 금성옥진 높은 도덕 공부자의 대단, 진시황이 안 무섭네 입이 바른 모초단, 남궁연 대풍가에 금도천지 한단, 팔년간과 지은 죄로 공 바치던 왜단, 훈금어 삼군무늬 노들십진 영초단, 나는 짐승 우단, 기는 짐승 모단, 쥐털 모아 짜내니 불에 씻는 화한단, 일조 낭군 이별 후에 독수공방 상사단, 월중단계 꺾었으니 낙수청운 장원주, 가련금야 숙창가 옥빈홍안 가기주, 팽조와 동방삭이 오래 사는 수주, 만동묘 대보단에 만세불망 명주, 만경창파 바람결에 번뜻번뜻 낭릉이며, 삼월방춘 좋을씨고 송이송이 화릉, 성자도 좋을씨고 세세초장 항라, 황국단풍 구경 가세 소소금풍 추라, 천간 열을 세어 보니 그 중 거수 갑사, 남월북호 멀다 마소 주먹 쥐고 뒤쥐사, 만물지리무궁하니 천지대덕 생초, 상풍구월 축장포에 백곡등풍 숙초, 뭉게뭉게 구름 문 두리두리 대접 문, 이견대인 용문이며 낙서 짓던 구문이요, 한수춘색 포도문, 용산축신 국화문, 팔짝팔짝 새발문, 투덕투덕 말굽문, 북포 저포 항저포 세목 중목 상목이며, 마포 문포 갈포 등물, 꾸역꾸역 다 나오고. 온갖 보패 다 나온다. 금패 호박 밀화며, 산호 진주 청강석 유리, 진옥 수만호, 대모 서각 고래 수염, 사향 용뇌 우황이며, 용주 한충 이궁전이 꾸역꾸역 다 나오고. 온갖 쇠가 다 나온다. 황금 적금 백통이며, 오동 주석 놋쇠며, 유납 구리 맑은 쇠, 생동 무쇠 시우쇠. 안방 세간 볼작시면, 삼층 이층 외층장, 오합 삼합 자드리, 상자 지롱 목롱 자개 함롱, 뒤주장 앞닫이 혼합경대 쌍룡 그린 빗접고비, 바느질 상자, 반닫이 선반 횃대, 장목 키 큰 병풍 작은 병풍, 온갖 그림 황홀하고, 핫이불 누비이불 각색 비단 좋을씨고. 화문 보료 우단 요와 녹전 처네, 원앙침을 한데 모두 괴어 놓고, 왜단 보료 덮었으며, 왕골 세석 쌍봉화문 홍수주로 꾸몄으며, 지도 서로 꾸민 족자, 산호구에 거는 주렴, 방장 휘장 모기장과, 순금 반상 천은 반상, 놋쇠 반상 화기 반상, 시저 주걱 국자며, 밥소래 놋동이 양푼 유합, 탕기 쟁반 열구자 전골판과, 노구솥 냄비 대화로며, 대야 요강 놋광명두 촉대 함께 놓았으며. 사랑 세간 다 나온다. 문갑 책상 가께수리, 필연 퇴침 찬합 등물, 사서삼경 백가어를 가득가득 담은 책롱, 오음육률 묘한 잡이, 가지가지 풍류 기계, 흑각장궁 유엽전을 궁대 전동 각기 넣고, 조총 철편 등채 환도 호반 기계 좋을씨고. 금분에 매화 피고 옥병에 붕어 떴다. 요지반도 동정귤을 대화 접시에 담아 놓고, 감로수 천일주를 유리병에 넣었으며, 당판책을 보아 가다 안경 벗어 거기 놓고, 귤중선 두던 판에 바돌 그저 벌였구나. 풍로에 얹은 다관에 붉은 내가 일어나고, 필통 옆에 놓인 부채 흰 것이 조촐하다. 질요강 침타구와 담배 서랍 재떨이며, 오동 빨주 천은 수복, 호박통 각색 연통, 수락 화락 별각죽에 맵시 있게 맞추어서 댓 쌈이나 놓았으며. 부엌 세간 헛간 기물, 농사 연장 길쌈 기계, 가지가지 다 나온다. 밥솥 국솥 대철이며, 가마 두멍 쇠소댕 개수통, 구유 살강발과, 물항아리 옹배기며, 소래 시루 항아리, 소반 모반 채반이며, 대소쿠리 나무 함지, 나무 함박 솥솔 조리 쪽박이며, 사기 그릇 사판때기, 재글겅이 부등가리, 부지깽이 부엌비며, 공석 멍석 맷방석, 짚소쿠리 멱서리며, 삿갓 도롱이 접사리며, 쟁기 따비 써레 발판, 괭이 가래 호미 살포, 자게 도끼 낫 자귀며, 벼훑이 갈퀴 도리깨 물레, 돌껏 씨아 베틀에 따른 각색 기계, 빨랫 방망이 다듬잇돌, 홍두깨 방망이며, 심지어 뒷간 가래, 다른 나무는 무겁다고 오동으로 정히 깎아 나주칠을 곱게 하여, 꾸역꾸역 다 나오니, 이러한 많은 기물 방이 좁아 놀 수 없고 뜰 좁아 쌓을 수 없어, 스물다섯 자식 중에 둘은 어려 못 시키고 스물세 명 데리고서, 크나큰 동학에다 비단 따로 포목 따로, 철물 따로 목물 따로, 보패 따로 기명 따로, 환부곡식 다발 짓듯 각기각기 쌓아 놓으니, 적막한 이 산중이 불시에 종로 되어, 육주비전 동상전과 마상전 박물판이 정녕히 되었구나. 흥보 아내 그 안목에 전후에 하나나 본 것이냐. 그래도 가장 네는 서울에도 갔다 오고, 병영도 다녀오고, 읍내 장에도 다녔으니, 매우 박람한 줄 알고, 청한단 통말이를 집어 들고 하는 말이,
“애겨, 그것 장히 좋소. 무명보다 광도 넓으이. 이렇게 긴 바디를 어디서 얻었으며, 짠 여인네 팔뚝도 길던가베. 이 편으로 북을 던지고 이 편에서 제가 받아, 물은 우리 치맛물, 청대인지 쪽물인지, 청물이 채 더 곱거든 짜가지고 들여올 텐데, 반들반들한 데하고 얼룽얼룽한 데하고 빛이 어찌 같잖으니.”
그 껄껄한 두 손으로 비단무늬 만지거든 오죽이 붙겠느냐. “애겨, 그것 이상하다. 손가락을 안 놓네.”
흥보가 문견 있어 수 터진 사람이면,
“선전 시정들도 비단 짤 줄 모른다네, 어찌 알 것인가.”
쉽게 대답하련마는, 여편네께 추졸될까, 곧 본 듯이 대답하여,
“비단 짜는 여인네는 팔뚝이 훨씬 길지. 그렇기에 대국에서는 며느리 선볼 적에 팔뚝을 먼저 보지. 물은 그게 청대물, 청 곱고 안 곱기는 사회 넣기에 매였지. 얼릉얼릉한 것들은 물들여 가지고서 갖풀로 붙였기로 손가락이 딱딱 붙지.”
흥보 댁이 딱 돌리어,
“애겨 그렇거든, 우리 부부 평생 한이 의식 없어 한하다가, 먼저 통에 밥 나와서 양대로 먹었더니, 다행히 이 통에서 옷감이 하 많으니, 눈에 드는 대로 옷 한 벌씩 해 입세.”
“내 소견도 그러하네, 언제 바빠 옷 짓겠나. 우리 식구대로 한 필씩 가지고서 위에서 아래까지 우선 휘감아 보세.”
“그럴 일이요. 무슨 비단 가지고서 당신부터 감으시오.”
“우리가 넉넉터면 큰 자식을 성취시켜 전가를 벌써 하고, 건방으로 갈 터이니 제 방위색 찾아 흑공단으로 감을 테세.”
“나는 무슨 색을 감고.”
“자네는 곤방 차지, 흰 비단을 감을 테지.”
“옛소, 백여우 같게, 붉은 비단 감을라네.”
“오, 딸이 없으니 아무렇게나 하소.”
“큰 놈은 부득이 진방 차지 청색이요, 그 남은 자식들은 제 소견에 좋은 대로 한 필씩 다 감을.”
흥보 댁이 또 말하여,
“저 두 말쨋놈은 온 필로 감아선 숨막혀 죽을 테니, 까치 저고리 뽄으로 각색 비단 찢어 내어 어깨에서 손목까지 잡아매어 드리우세.”
“오, 좋으이. 그리 하소.”
흑공단을 한 필 빼어 흥보 먼저 감을 적에, 상투에서 시작하여 뺨과 턱을 휘둘러서 목덜미 감은 후에, 왼쪽 어깨서 시작하여 손목까지 내려 감고, 도로 감아 올라와서 오른쪽 어깨 손목까지 내려 감고, 도로 감아 올라와서 오른쪽 어깨 손목까지 빈틈없이 감아 올라, 겨드랑에서 불두덩에 차차 감아 내려와서 두 다리 갈라 감고, 두 발은 발감개하듯이 디디고 나서니, 여인네와 자식들은 상투가 없으니까 머리 동여 시작하여 똑같이 감은 후에, 항렬 차례대로 뜰 가운데 늘어서니, 흥보가 보고 재담하여,
“이게 어디 호사냐, 늘어선 조를 보면 대촌 당산 법수 같고, 휘감아 놓은 품은 진상 가는 청대 죽물, 색을 의논하면 내 조는 까마귀. 아이 어멈은 고추잠자리. 큰 놈은 쇠새, 여러 놈들은 꾀꼬리, 해오라기 새 한 떼가 늘어선 곳에, 저 두 말쨋놈은 비단 장수 다니는 길, 성황당의 나무로다.”
온 집안이 대소하고 흥보가 하는 말이,
“이번 호사 다 했으니 이 통 하나 마저 탑세.”
흥보의 마누라가 박통을 타갈수록 밥도 나고 옷도 나니 마음이 장히 좋아, “이 통을 탈 소리는 내 사설로 메길 테니, 당신은 뒤만 맡소.”
흥보가 추어,
“가화만사성이라니, 자네 그리 좋아하니 참 기물이 나오겠네. 어디 보세 잘 메기소.”
흥보 댁이 메나리 목청으로 제법 메겨,
“여보소 세상 사람, 내 노래 들어보소. 세상에 좋은 것이 밥밖에 또 있는가.”
“어기여라 톱질이야.”
“우리 부부 만난 후에 서런 고생 많이 했네. 여러 날 밥을 굶고 엄동에 옷이 없어, 신세를 생각하면 벌써 아니 죽었을까.”
“어기여라 톱질이야.”
“가장 하나 못 잊어서 이때까지 살았더니, 천신이 감동하사 박통 속에 옷밥 났네. 만복 좋은 우리 부부 호의호식 즐겨 보세.”
“어기여라 톱질이야.”
“한 상에서 밥을 먹고 한 방에서 잠을 잘 제, 부자 서방 좋다 하고 욕심 낼 년 많으리라. 암캐라도 얼른 하면 내 솜씨에 결딴 나지.”
“어기여라 톱질이야.”
슬슬 탁 타 놓으니, 천만 뜻밖에 미인 하나 함교함태로 나오는데, 구름 같은 머리털로 낭자를 곱게 하여, 쌍룡새김 밀화비녀 느직하게 질렀으며, 매미머리 나비눈썹, 추파 같은 고운 눈동자 흑백이 분명하고, 연지뺨 앵도순에 박씨같이 고운 잇속, 삘기 같은 두 손길, 세류같이 가는 허리, 응장성식 금수의상, 외씨같이 고운 발씨, 걸음마다 연꽃 피듯 나오는 양, 해당화 조으는 듯 모란화 말하는 듯, 쇄옥성으로 묻는 말이,
“흥보 씨 댁이요?” 흥보가 깜짝 놀라,
“하 괴이하여, 당찮은 세간 그리 많이 나올 적에 만단 의심하였더니, 임자 아씨 오셨구나.”
납작 엎드려 절을 하며,
“좁은 박통 속에 평안히 오시니까. 이 세간 임자시면 모두 가져가옵시오. 쌀 서 말 여덟 되와 돈 넉 냥 아홉 돈은 한 끼 양찬하였삽고, 몸에 감던 비단가지 도로 풀어 놓았으니, 한 가지 것 속였으면 벗긴 쇠자식이요.”
그 여인이 대답하되,
“놀라지 마옵시고 내 말씀 들으시오. 당 명황 천보간에 눈 한 번 돌이켜 웃으면 백 가지 고운 자태, 육궁의 분대가 빛을 잃었다 하던 양귀비를 모르시오. 어양에서 북소리 천지를 울리는지라, 서촉으로 가옵다가, 마외역에 죽은 향혼이 천하에 주류하여 임자를 구하더니, 제비 편에 듣자온즉 흥보 씨의 적선행인이 부자가 되었다니, 천자 서방 내사 소원이나 육군이 발호하니 어쩔 수 없어, 강남 부자 옹을 도리어 부러워한다 하였으니, 부자의 첩이 되어 봄이 가나 밤이 가나 함께하여 무궁행락 하여보세.”
흥보가 저의 가속의 흑각 발톱 다목다리만 보았다가, 이런 일색을 보아 놓으니 오죽 좋겠느냐. 손목을 덤벅 쥐다 깜짝 놀라 탁 놓으며,
“어디 그것 다루겠냐, 살이 아니고 우무로다. 저런 것 한창 좋을 제 잔뜩 안고 채겼으면 뭉크러질 텐데 어찌할까.”
서로 보며 농탕치니, 흥보의 마누라가 좋은 보물 나올 줄로 소리까지 메긴 것이 못 볼 꼴을 보았구나. 부정 탄 손님같이 불시에 틀리는데, 손가락을 입에 넣고 고개를 외로 틀고, 뒤로 돌아앉으면서,
“저것들 지랄하지. 박통 속에서 나온 세간 뉘 것인 줄 채 모르고, 양귀비와 농탕치고. 당 명황은 천자로되 양귀비께 정신 놓아 망국을 했다는데, 박통 세간 무엇이냐. 나는 열 끼 곧 굶어도 시앗 꼴은 못 보겠다. 나는 지금 곧 나가니, 양귀비와 잘 살아라.” 흥보가 가난하여 계집 손에 얻어먹어 가장 값을 못 했으니, 호령이나 할 수 있나. 곧 빌어,
“여보소 아기 어멈, 이것이 웬일인가. 자네 방에 열흘 자면 첩의 방에 하루 자지. 그렇다고 양귀비가 나 같은 사람 보려 하고 만리 타국에 나왔으니, 도로 쫓아 보내겠나.”
처첩하고 수작할 제, 박통 속 우근우근, 무수한 사람들이 꾸역꾸역 나오는데, 남녀 종이 백여 구, 석수 목수 와수 토수, 각색 장인 수백 명이 각기 연장 짊어지고, 돌과 나무 기와들을 수레에 싣고 썰매에 싣고, 소에 싣고 말에 싣고, 지게도 지고 더미로 메고, 줄로 끌며 지레로 밀며, 방아타령 산타령, 굿 치며 나오는데, 이런 야단이 있느냐. 마른 담배 서너너덧 참, 뚝딱뚝딱 서둘더니, 기와집 수천 칸을 동학이 가득하게 경각에 지어 놓고, 참으로 이상하여 벽 붙인 그 진흙을 어느새에 다 말리어 도배까지 하였구나. 원채에 본처 두고 별당에 양귀비요. 안팎 사랑 십여 채며 사면 행랑 노속이요. 사랑 사랑 굽어보면 좌상에 객상만이요, 사죽이 낭자하며 시부로 소일하고, 곳간마다 열고 보면 전곡이 가득가득, 남은 곡식은 노적하고, 흥보는 심심하면 양귀비 데리고서 후원의 화초 구경, 옥란간 밝은 달에 둘이 마주 비껴 앉아 예상우의곡을 한가히 의논하니, 이러한 지상선이 어디가 있겠느냐. 흥보가 졸부되었단 말이 사면에 퍼지니, 놀보가 듣고 생각하여, ‘그것 모두 뺏어다가 부익부를 하면 좋되, 이놈이 잘 안 주면 어떻게 작처할꼬. 만일 아니 주걸랑, 흥보가 부자로서 제 형을 박대한다고 몹쓸 아전 뒤를 대어 영문 염문 적어 주고, 출패를 돈 백 먹여 향중에 발통하고, 도회까지 붙였으면 이놈의 살림살이 단참에 떨어 엎지.’ 흥보가 사는 동네 급히 물어 찾아가니, 고루거각 오간팔작, 봉방수와 천문만호, 즐비하고 웅장하다. 대문을 여럿 지나 안사랑 앞 당도하니, 흥보가 제 형을 보고 버선발로 내려와서 공손히 절을 하고 반기어 하는 말이,
“형님이 오십니까. 어서 올라갑시다.”
방으로 들어가서 상좌에 앉힌 후에, 흥보가 두 손 잡고 고개를 숙이고서 조용히 사죄한다. “박복한 이놈 신세, 자분필사하였더니, 선영의 음덕이며 형님의 덕택으로 부자가 되었기에, 자식들을 데리옵고 형님 댁에 건너가서 형님을 뵈온 후에, 형님을 모시옵고 선산에 성묘하자 일자를 받았더니, 형님이 먼저 오셨으니 하정에 황송하오.”
놀보의 하는 어조, 좋게 하는 말이라도 평생 남을 잡아 뜯어,
“저러한 부자들이 우리같이 가난한 놈 찾아오기 쉽겠는가. 어찌하여 부자가 됐는고?” 흥보가 제비 살려 박씨 얻어 부자가 된 내력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고하고,
“한퇴지는 강남에서 취식이라 하더니, 나는 강남에 앉아 먹는 것이오. 밥이나 옷이나 기물이 다 강남 것이요.”
놀보가 바로 가기로 들어,
“내가 집 일이 많은데 부득이 나왔더니, 어서 가야 하겠고.”
흥보가 만류하여,
“안으로 들어가서 처자나 보옵시고, 무엇 조금 잡수어야 환행차를 하시지요.”
놀보가 어서 가서 제비를 청할 테나, 양귀비 구경키로, 흥보 따라 들어가니, 제수가 나와서 연접하여, 이놈이 양귀비를 찾느라고 눈을 휘휘 내둘러, 수숙이 절한 후에 제수 먼저 문후하여,
“아주버님 뵈온 지가 여러 해 되었으니, 기체 안녕하십니까.”
놀보놈의 평생 행세, 제수 보기 종 같아서, 아주머니 고사하고 하오도 안 하더니, 오늘은 전과 달라, 앉은 방 차린 의복에 새 눈이 왈칵 띄어, 홀대를 하여서는 탈이 정녕 날 듯하고, 경대를 하자 하니 혀가 아니 돌아가서, 매운 것 먹은 듯이 입을 불며 얼버무려,
“허, 평안하오.”
흥보가 종을 불러,
“도령님네 게시느냐, 들어들 와 뵈오래라.”
이것들이 멍석 구멍에 근본 길이 들었구나. 세 줄로 늘엎디어 절하고 꿇앉으니, 소위 백부 되는 놈이,
“모시고들 잘 있더냐.”
하든지,
“선영의 음덕이다, 좀 잘들 생겼느냐.”
하든지, 할 말이 좀 많을새, 저 때려죽일 놈이 흥보를 돌아보며,
“너 닮은 놈 몇 되느냐.”
흥보 부처의 넓은 소견, 개 같은 놈 탄컸느냐. 묵묵무어하는구나. 자식들 나간 후에 또 종을 불러,
“일 오너라.”
이것들이 강남에서 나와서 아주 열쇠 같지. “예.” “강남 아씨께 여쭈어라.”
이윽고 미인 하나가 들어오는데, 당 명황 같은 풍류 천자도 정신을 놓았는데, 놀보 같은 상놈 눈에 오죽 놀랐겠나. 보더니 턱을 채고, 일어서 절 받기를 큰 제수께 비하면 갑절이나 공순하다. 양귀비 거동 보소. 옥수를 땅에 짚고 청산미 나직하고, 양도순을 반개하여 옥반에 구슬 떨어지는 소리로 문후를 하는데,
“먼데 살고 천한 몸이, 이 댁 문하에 의탁한 지 오래지 않삽기로, 처음 문후 드립니다.”
놀보놈 제 생전 처음 보는 미색이요 처음 듣는 옥음이라, 넉넉잖은 제 언사에 어찌 대답할 수 없고, 턱 들입다 안고 싶어 정신을 놓겠구나. 벌벌 떨며 대답하되,
“오시는 줄 알았더면 내가 와서 박 타지요.”
앵무 같은 아이 종이 주물상을 올리는데, 소반 기명 음식 등물 생전에 못 보던 것. 형제 함께 상을 받고 종년이 옆에 앉아 술을 연해 권하는데, 놀보가 좋은 술을 십여 배 먹어 놓으니, 취중에 광심이 나서 참다가 못 견디어, 양귀비의 고운 손목 썩 들입다 쥐면서,
“술 한 잔 잡수시오.”
다른 계집 같거드면 뺨을 치며 욕을 하며 오죽하겠느냐. 안색이 천연하여 좋게 대답하는 말이,
“왜 내가 물에 빠지오.”
놀보놈이 깜짝 놀라 손목을 썩 놓으며,
“일색뿐 아니시라 맹자도 많이 읽었구나.” 양귀비가 일어나서 안으로 들어가니, 흥보 마누라가 그 뒤 따라 가는구나. 놀보놈이 무안하여 술상을 물리고서, 무슨 심사를 부리려고 사면을 살펴보니, 좋은 비단 붉은 보로 이불을 덮었거든, 일어서서 쑥 빼내어 청동 화로 백탄 불에 비비어 던지면서, 부담을 하는 말이,
“계집년은 내외하여 안으로 가려니와, 이불도 내외하나.”
저 비단이 불 붙더니 재 되기는 어림없고 빛이 더욱 고와 간다. 놀보가 물어,
“그게 무슨 비단이냐.”
“화한단이오. 불쥐 털로 짠 것이라 불에 타면 더 곱지요.”
“얘, 그것 날 다오.”
“그럽지요.”
“또 무엇을 가져갈꼬. 너 그 첫 통 속에 쌀 들고 돈 들었던 궤 둘 다 주려느냐?” “부자 된 밑천이니 둘 다 어찌 드리겠소, 하나씩 나눕시다. 어떤 것을 가지시려우.”
“돈궤를 가질란다.”
“그럽시오. 또 무엇 생각 있소.”
“다 주면 좋건마는, 내가 바빠 가겠기로 그것만 가져가니, 다시 생각나는 대로 연해 와서 가져가지. 내가 번번이 올 수 없어 기별을 하는 대로, 칭탁 말고 보내어라.”
“그리 하오리다.”
벼룻집 같은 궤를 화한단 보에 싸서 제 손수 옆에 끼고, 제 집으로 급히 가서 문 안에 들어서며 종 불러 하는 말이,
“짚댓 묻 급히 축여, 돈꿰미 한 천 발을 어서어서 꼬아 오라.”
안으로 들어가서 제 계집께 자랑하여,
“여보소, 흥보놈이 참 부자가 되었거든. 그놈의 재산 밑천 내가 여기 뺏어 왔네.”
화한단 보를 풀며,
“이것은 불에 타면 더 고운 것이로세.”
돈궤를 내놓으며,
“이것은 돈이 생겨 비워 내면 또 생기지.”
궤 문을 열어 놓으니, 돈은 나전돈, 몸뚱이는 구전 꿴 듯, 구부려 누운 길이 넉 냥 아홉 돈만한, 샛누런 구렁이가 고개를 꼿꼿이 들고 긴 혀를 널름널름. 놀보 부처가 대경하여 궤 문을 급히 닫고, 노속을 바삐 불러,
“이것을 갖다가 문 열어 보지 말고 짚불에 바로 태워라.”
놀보 계집이 말려,
“애겨, 그것 사르지 맙쇼. 인제 그런 흉한 것들 돈 나는 궤 주었다고 자세하면 어쩌게. 구렁이 쌌던 보를 두어서 무엇 하게. 그 보로 도로 싸서 급급 환송하소.”
놀보가 추어,
“자네 말이 똑 옳으네.”
사환을 급히 시켜 흥보 집에 환송커늘, 흥보가 받아 열고 보니, 거렁이는 웬 구렁이, 돈이 한가득 들었지. 제 복이 아니면은 할 수 없는 법이었다.
욕심 없는 놀보놈이 제비를 청하기로 차비를 장만할 제, 이런 야단이 없구나. 신 잘 삼는 사람들을 십여 명 골라다가, 매일에서 돈 공가, 삼시 먹고 술 담배를 착실히 대접하고, 외양간 더그매에 신 삼을 찰벼 짚을 여남은 짐 내어놓고, 제비 받기 수백 짐을 밤낮으로 걸어 내어, 안채 사랑 행랑이며 곳간 사당 뒷간채에 앞뒤 처마 다 지르고, 제 대가리 상투 밑에 풍잠 지른 모양으로 앞뒤로 갈라 꽂고, 제비 몰러 나갈 적에, 서리 맞은 잎 이월 꽃보다 붉은 한산 석경에 올라가고, 눈 갠 뒤 구름 흩어지며 북풍 찬 초수오산을 다 찾아도 제비 소식 알 수 없다. 놀보가 제비에 상사병이 달려들어, 길짐승은 족제비를 사랑하고, 마른 그릇은 모제비만 사고, 음식은 칼제비 수제비만 하여 먹고, 종이 보면 간제비를 접고, 화가 나면 목제비를 하는구나. 그렁저렁 겨울을 지내어 정월 이월 삼월 된, 강남에서 오는 제비, 각 집을 날아들 제, 신수 불길한 제비 한 쌍이 놀보 집에 들어가니, 놀보가 제비 보고, 집짓기에 수고된다 하여 제가 손수 흙을 이겨 메주 덩이만씩 뭉쳐 처마 안에 집을 짓고, 검불을 많이 긁어 소 외양간 짚 깔 듯이 담뿍 넣어 주었더니, 미친 제비 아니면은 거기다 알을 낳겠느냐. 깃들일 집을 그릇 들었기로 알 여섯을 낳았더니, 마음 바쁜 놀보놈이 삼시로 만져 보아, 다섯은 곯고 하나 까서 날기 공부 익힐 적에, 이 흉녕한 놀보 소견, 구렁이가 먹으려 할 제 쫓았으면 저리 될까. 축문 지어 제사하되 구렁이가 아니 와, 대발 틈에 절각하면 제가 동여 살려줄까, 밤낮으로 축수하되 떨어지지도 아니하여, 날기 공부하느라고 제 집가에 발 붙이고 날개를 발발 떨면, 놀보놈이 밑에 앉아,
“떨어지소 떨어지소.” 두 손 싹싹 비비어도 종시 아니 떨어지니, 그렁저렁 점점 커서 날아가게 되었구나. 놀보가 망단하여, 절로 절각되기 기다리면 놓치기 가려하니, 울려 놓고 달래리라, 제비 집에 손을 넣어 제비 새끼 집어내어, 그 약한 두 다리를 무릎에 대고 자끈 꺾어 마웃 바닥에 선뜻 놓고, 천연히 모르는 체 뒷짐 지고 걸으면서 목소리를 크게 내어 풍월을 읊는구나. “황성허조벽산월이요, 고목은 진입창오운.”
앞으로 돌아서며 제비 새끼 얼른 보고, 생침 맞는 된 목소리로 제 계집을 급히 불러,
“여보소, 아이 어멈. 내가 아까 글 읊느라 미처 보지 못했더니, 제비 새끼가 떨어져 절각이 되었으니, 불쌍해 보겠는가. 어서 감아 살려 주세.”
저 몹쓸 놀보놈이 제비 다리 감으려 할 제, 흥보보다 더 하려고 대민어 껍질을 벗겨 세 겹을 거듭 싸고, 당사실은 가늘다고 당팔사 주머니 끈으로 단단히 동인 후에 제 집에 도로 넣고, 행여나 바람 맞을까 섶 두껍고 큰 누더기를 서너 겹 둘렀더니, 놀보 망칠 제비여든 죽을 리가 있겠느냐. 십여 일이 지났더니 절각이 완합하여 비거비래 출입하더니, 제비는 사일을 알고 보금자리 떠나가는지라, 강남으로 들어갈 제 놀보가 부탁하여,
“여봐라 제비야, 똑 죽을 네 목숨을 내 재조로 살렸으니, 아무리 짐승인들 재생지덕 잊겠느냐. 흥보 은혜 갚은 제비 세 통 박씨를 주었으니, 너는 갑절 더 보태어 여섯 통 열 박씨를 부디 쉬이 물고 오라. 삼월까지 있지 말고 과세 즉시 발행하여 정월 망전에 당도하면, 기다리기 괴롭잖고 오죽 좋겠느냐.”
그 제비 들어가서 놀보의 전후 내력을 장수 전에 고한 후에, 박씨 하나 얻어 두고 명년 삼월 기다릴 제. 이때에 놀보놈은, 정월 보름에 제비 올까, 앉은뱅이 삯군 얻어 강남에 급주 보내 보고, 안 질 난 놈 중가 주어 제비 오는 망을 보아, 제비에게 드는 돈은 아끼잖고 써낼 제, 그렁저렁 삼월 되어, 스스로 오고 가며 집 위에 앉은 제비가 놀보 집에 다시 오니, 놀보놈이 참으로 반겨,
“반갑다 내 제비야, 어디 갔다 이제 왔나. 금천씨 이조기관, 벼슬하러 네 갔더냐. 유소씨 나무 위에 집짓기, 집짓기 배우러 네 갔더냐. 오의항 어귀에 석양이 비끼는데, 왕씨 사당 앞에 네 갔더냐. 수많은 붉은 얼굴 황토에 묻히던 미앙궁 중에 네 갔더냐. 어이 그리 더디 와서 내 간장을 다 녹이냐. 박씨 물어 왔거들랑 어서 급히 나를 다오.”
손바닥을 딱 벌리니, 저 제비 거동 보소. 물었던 박씨 하나 놀보 손에 떨어치고, 두 날개 편편하여 돌아도 안 보고 백운간에 날아가니, 놀보 좋아 춤을 추며,
“얼씨구나 좋을씨고. 부익부를 하겠구나.”
저의 가속을 급히 불러 박씨 주며 자랑한다. 놀보 가속이 박씨 보고,
“애겨, 이것 내버리소. 갚을 보(報)자, 원수 구(仇)자, 바람 풍(風)자 쓰었으니, 원수 갚을 바람이니 어디 그것 쓰겠는가.”
놀보가 대답하되,
“자네가 어찌 알어. 원수 구라 하는 글자, 군자호구란 짝 구자와 통용하니, 어떠한 미인으로 내 짝 갚잔 말이로세.”
놀보 가속이 들어 보니 이런 죽을 말이 있나. 못 심을 말 연해 하여,
“만일 그러하면 바람 풍자는 웬일인가.”
“바람 풍자 더 좋지. 태호 복희씨는 풍성으로 왕하시고, 순임금의 오현금 안에 남풍시를 노래하고, 문왕 무왕의 장한 덕화는 천무열풍하였으며, 주공은 성인이라 빈풍시 지으시고, 한 태조 수수풍, 광무황제 곤양풍, 와룡선생 적벽풍, 대풍이 삼조한 장하다 하려니와, 백이숙제 고절청풍, 엄자릉의 선생지풍, 도정절의 북창청풍, 만고에 맑았으니 그 아니 좋을쏜가. 우리도 이 박 심어, 동풍에 입묘하여 삼월 남풍에 점점 자라, 우순풍조 호시절에 꽃이 피고 박이 열어, 팔월 고풍에 따서 켜면 보물이 풍풍 나와, 집안이 풍덩풍덩, 근래 풍속 좋은 호사, 갑사 풍차 금패 풍잠, 학슬풍안 떠 괴고, 은안 백마 도춘풍에 풍호무호하여 보고, 풍류랑 좋은 팔자, 밤낮 풍악으로 지낼 적에, 네 귀에 풍경 단 집, 방 안에 병풍 치고, 풍로에 차관 얹고, 풍석 없는 자네 배를 선풍도골 내가 타고, 바람 편에 방망이 소리 서너 번을 풍풍 찧었으면, 거울 같은 맑은 물 바람 없어도 절로 파도가 짤끔짤끔 날 것이니, 그만하면 풍족하지, 잔말 말고 심어 보세.”
책력을 펴놓고 재종일을 가려내어, 사랑 앞을 급히 파고 못자리할 거름을 모두 게다 퍼쟁이고 단단히 심었더니, 아침에 심은 것이 오후가 겨우 되어, 솟아난 큰 박 순이 수종난 놈 다리 만큼. 놀보 아내가 깜짝 놀라,
“여보시오 아이 아범, 이것 급히 빼 버리오. 은나라 상상곡이 아침에 났던 것이 저녁에 큰 아람, 요물이라 하였으니, 이것 정녕 재변이오.”
놀보가 장담하여,
“나물이 되련 것은 떡잎부터 알 것이니, 사오 삭이 지나가면 억만금 세간 그 덩굴에서 날 터이니, 일찌감치 잡죄겠는가.”
이 박의 크는 법이 날마다 갑절씩 더럭더럭 크는구나. 연거푸 순이 나고 순이 나고, 한 순이 커지기를 한 아름이 넘는구나. 어디 가 턱 걸치면 모두 다 무너질 제, 사당에 걸치더니 사당이 무너져 신주가 깨어지고, 곳간에 걸치더니 곳간이 무너지고, 온 동네 집집마다 부지불각 턱 걸치면 무너지고 무너지고, 무너지면 값을 물고 무너지면 값을 물고. 그렁저렁 거기에 든 돈이 삼사천 냥 넘었으니, 놀보가 벌써부터 박의 해를 보는구나. 꽃이 피어 박 맺을 제, 처음에 바로 북통만씩, 십여 일이 지나더니 나루의 거룻배만, 한 달이 되더니 조창 세곡선만. 여섯 통이 열었거든, 놀보가 좋아라고 가리키며 국량하여,
“저 통 색이 노란 것이 속에 정녕 금 들었지, 황금 적금이라니 은도 누르겠다. 어느 통에 미인 있노. 그 통을 꼭 알면은 포장으로 둘러 두게.”
한참 이리 걱정할 제, 허망이라 하는 놈이, 성명 듣고 행사 보면 명불허득하였구나. 동네 사람들이 앉으면 놀보 공론. “놀보 같이 약은 놈이 박에다 쓰는 돈은 아끼잖고 써내니, 무슨 꾀를 냈으면 돈 천이나 쓰게 할꼬.”
허망이가 장담하여,
“나밖에 할 이 없지.”
놀보 집에 건너가서,
“여보소 놀보씨, 박통 일을 몰라 걱정을 하신다니, 나를 어찌 안 찾는가.”
놀보가 반가이 물어,
“자네가 알겠는가.”
허망이 대답하되,
“모수자천하는 말을 남은 암만 웃더라도, 노형이야 속이겠나. 값 정해 주었다가 박 타보아 안 맞거든 그 돈 도로 찾아가소.”
“그리 할 일일세.”
맞히면 천 냥 결가, 삼백 냥 선폐하고, 박 속 일을 알려 할 제, 허망이 지닌 재조, 복구분법이었다. 박통 놓인 좌향을 복구분법으로 보아 가니 신통히 맞히거든, 첫 통 보고 하는 말이,
“모두 다 생금인데, 누가 혹 가져갈까, 노인 한 분 수직한다.”
둘째 통을 한참 보다,
“사람이 많이 들었구나.”
놀보가 옆에 앉아 손수 장담이 더 우스워,
“집 지을 장인들과 종들이 들었나뵈.”
셋째 통을 보더니,
“애겨, 계집 많이 있다.”
“서시가 나오는데, 계집종들이 따라오나.”
넷째 통 또 보더니,
“풍류 기계 많이 있다.”
“내가 두고 행락하게.”
다섯째 통을 가리키며,
“그 가마 장히 길다.”
“나하고 서시 둘이 타게.”
여섯째 통 가리키며,
“그 말 장히 좋다.”
“타고도 다닐 테요, 바 늘여 매어 두지.”
“대강만 볼지라도 들 것 다 들었으니, 어서 타고 보는 수세.”
책력을 펴놓고 납재일 가려내어, 박통을 타려 할 제, 섬 술 빚고 섬밥 짓고, 소 잡히고 개 잡혀서 먹이를 차린 후에, 팔 힘 세고 소리 좋은 건장한 역군들을 잔뜩 먹고 닷 냥 삯에 삼십 명을 얻어다가, 생금 통을 먼저 탈 제, 놀보가 좋아라고 제가 소리를 메기는데, 똑 금이 나올 줄로 금으로 메겨,
“여보소 세상 사람, 금 내력을 들어 보소. 여수에 생겨나고 흙 속에 묻히어서, 소진은 구변으로 많이 얻어 실어 오고, 곽거는 효성으로 묻힌 것을 파내었네.”
“어기여라 톱질이야.”
“오행의 가운데요 팔음의 머리로다. 아부를 반간키로 진평은 흩었는데, 고인이 주는 것을 양진어이 마다하고.”
“어기야라 톱질이야.”
“나는 제비 살렸더니 금 박통 씨 얻었으니, 이 통을 어서 타서 금이 많이 나오면은, 석숭을 부러워할까, 이 동네가 금곡 되리.”
“어기여라 톱질이야.”
“서시 소군 앉히기로 황금 옥을 지어 볼까, 자류청총 달리기로 황금편을 만들고저.”
“어기여라 톱질이야.”
슬근슬근 거진 타니, 박통 속에서 글 읽는 소리가 나,
“맹자견양혜왕하신데, 왕왈수불원천리이래하시니, 역장유이이오국호이까. 마상에 봄 한식날 만나니, 도중에 저무는 봄을 보내도다. 가련하다 놀보 망하니, 상전을 못 보는가.”
놀보가 듣고 하는 말이,
“어디 그게 박 속이냐, 정녕한 서당이지. 귀글은 당음인데, 강포가 놀보 되고 낙교가 상전되니, 그것은 웬일인고.”
한참 의심하노라니, 박통 문을 반만 열고 노인 한 분이 나오는데, 차린 복색 제법이어, 헐고 헌 쳇불관에 빈대알이 따닥따닥, 생마포 적삼 위에 개가죽 묵은 배자가 무릎 밑에 털렁털렁, 구멍이 뻔뻔한 중치막 아랫단에 황토 묻고, 세전지물 묵은 바지 오줌 싸서 얼룽이 지고, 석 자 가웃 홑베 주머니에 일가산을 넣어 차고, 또닥또닥 기운 버선, 넉 날 짚신 끌메 신고, 곱돌조대 중동 쥐고, 개털 모선으로 차면하고, 놀보의 안방으로 제 집같이 들어가니, 놀보가 보고 장담하여,
“흥보는 첫 통 탈 제 동자가 왔다더니, 내 박은 첫 통에서 노인이 나오시니, 그로만 볼지라도 관동지분이 있고, 저 주머니 속에 든 게 다 선약이지.”
바삐바삐 따라가서 자상히 살펴보니, 토끼 같은 낯에 반대코가 맵시 있다. 뱁새 눈 병어 입에 목소리는 장히 커,
“이놈 놀보야, 구상전을 모르느냐. 네 할아비 덜렁쇠, 네 할미 허튼 댁, 네 아비 껄덕놈이, 네 어미 허천네, 다 모두 댁 종이라. 병자 팔월에 과거 보러 서울 가고, 댁 사랑이 비었을 제, 흉녕한 네 아비놈 가산 모두 도둑하여 부지거처 도망했으니, 적년을 탐지하되 종적을 모르더니, 조선에 왔던 제비 편에 자세히 들어 보니, 네 놈들이 이곳에서 부자로 산다기로, 불원천리 나왔으니, 네 처자 네 세간을 박통 속에 급히 담아 강남 가서 드난하라.”
놀보가 들어 보니 정신이 캄캄하여 아무렇다 못 하겠다. 아니라 하자 한들 삼 대나 되었으니 증인 설 사람 없고, 싸워 보자 해도 이 양반 생긴 것이 불에 넣어도 안 탈 테요, 송사를 하자 하니 좋잖은 그 근본을 읍촌이 다 알 터니, 어찌하면 무사할꼬. 저 혼자 국량할 제, 저 양반의 호령 소리 갈수록 무섭구나. “이놈 놀보야, 구상전이 와 계신데, 네 계집 네 자식이 문안을 아니 하니, 이런 변이 있단 말고. 일 오너라.”
박통 속이 관문같이,
“예.”
범강 장달, 허저 같은 설금찬 여러 놈이 몽치 들고 올가미 바 들고 꾸역꾸역 퍼나오니, 놀보가 이 광경을 본즉 죽을밖에 수 없구나. 엎디어서 애걸한다. “여보시오 상전님, 이 동네가 반촌이요, 아비 가세 요부키로 착관하고 지내오니, 이 고을 통경 내에 모모한 양반 댁이 다 모두 사돈이요. 이 소문이 나게 되면 소인은 고사하고 그 양반들 우세오니, 방장 자라는 것은 꺾지 말라 생각하와, 아무 말씀 마옵시고, 속전으로 바치옵게 속량하여 주옵소서.”
“그새 여러 십 년, 네 놈의 아비 어미, 네 놈과 계집 자식, 드난 아니하였으니, 공돈은 어찌할꼬.”
“분부대로 하오리다.”
“네 놈 죄상을 생각하면 기어이 잡아다가 주야 악역시키면서, 만일 조금 잘못하면 초당 전 말말뚝에 거꾸로 매어 달고, 대추나무 방망이로 두 발목 복사뼈를 꽝꽝 우려 때려 가며 부려 먹자 하였더니, 네 말이 그러하니, 이 또한 사람의 자식이라, 잘 대접할 수 있으니, 공돈 속전을 바칠 테면 지체 말고 썩 들여라.”
놀보가 물어,
“몇 냥이나 바치올지.”
“너 같은 놈을 데리고서 돈 다소를 다투겠나.”
조그마한 주머니를 허리에서 끌러 주며,
“아무것을 넣든지 여기만 채워 오라.”
놀보놈 제 소견에 저 양반 저 억지에 많이 달라 하게 되면 이 일을 어찌할꼬, 잔뜩 염려하였다가, 이 주머니 채우자면 얼마 안 들겠거든, 아주 좋아 못 견디어,
“예, 그리 하오리다.”
주머니를 가지고서 제 방으로 들어가서, 돈 열 냥을 풀어 놓고 한 줌 넣고 두 줌 넣어, 열 줌이 넘어가도 아무 동정이 없었구나. 싸돈이라 그러한가. 양돈으로 넣어 보아 닷 냥 열 냥 스무 냥, 얌만 넣어도 간데없다. 묶음으로 넣어볼까, 스무 냥씩 묶음 묶음, 백 묶음이 넘어가도 형적이 없어 간다. 이 주머니 생긴 품이, 무엇을 넣으려 하면 주둥이를 떡 벌려서 산덩이도 들어갈 듯, 넣고 보면 딱 오무려 전과 도로 같아진다. “어허, 이것 어찌할꼬.”
돈 천 냥 쟁인 궤를 궤째 모두 밀어 넣으니 어디 간지 알 수 없다. 이대로 하다가는 묵은 상전 고사하고 자신 방매하여 새 상전 생기겠다. 부피가 많겠기로 곡식을 넣어 보자, 쌀 백 석을 넣어 보아 이백 석 삼백 석이 곧 넣어도 그만이라. 벼 천 석 쌓은 노적, 나무가리 짚가리, 심지어 뒷간 거름을 모두 쓸어 넣어도 볼록도 아니한다. 놀보가 겁을 내어 주머니를 들고 보아,
“이게 어디 구멍 났나.”
홈질한 솔기 밑을 다 보아도, 가죽으로 만든 것이 바늘 찌를 틈이 없다. “애겨, 이것 어찌할꼬, 사람 죽일 것이로다.”
주머니를 가지고서 양반 전에 다시 빌어,
“여보시오 상전님, 이게 무슨 주머니요.”
“에라, 이놈 간사하다. 그럴 리가 왜 있으리. 조그마한 주머니를 채워 오라 하였더니, 아무것도 아니 넣고 이 소리가 웬 소린고. 일 오너라, 네 저놈 매달아라.”
놀보가 황겁하여 애긍히 빈다. “비옵니다 상전님, 덕택에 삽시다. 공돈 속전 또 바치지, 이 주머니 챌 수 없소.”
“네 원이 그러하면, 네 할아비 네 할미, 네 아비 네 어미, 네 아들 네 딸년, 네 놈까지 일곱 구, 매구에 일천 냥씩 칠천 냥을 바치라. 만일 잔말을 해서는 네 놈을 여기에 넣으리라.”
주머니를 떡 벌리니, 놀보가 황겁하여 칠천 냥을 또 바친, 저 양반 그 돈 받아 주머니에 들여치니 경각에 간데없다. 놀보가 속량하더니, 상전이라 아니하고 생원으로 부르겠다. “여보시오 생원님, 이왕 작처한 일인, 주머니 이름이나 가르쳐 주옵소서.”
속 얕은 저 양반이 먹을 것을 다 먹더니, 마음이 낙락하여 수작을 좋게 하여,
“이 주머니가 능천낭이다. 천지 개벽한 연후에, 불충불효한 놈들, 무륜무의한 모든 재물을 뺏어 오는 주머니다.”
“뉘 것 뉘 것 뺏어 왔소.”
“어찌 다 말해야. 한나라 양기의 세간 한 편 귀도 못 차더라.”
“그 세간은 얼마나 되더라우.”
“돈 많아도 삼십여 만만이지. 당나라 원재의 세간 한 편 귀도 못 차더라.”
“그 세간은 얼마나 되더라우.”
“호초만 해도 팔천 석이지야.”
“그렇게 뺏어다가 다 어디다 쓰시오.”
“임금에게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고, 친구 구제하는 사람, 형세가 가난하면 이 재물 노나 주어 부자 되게 하였지야. 그것도 조선 땅이지. 박흥보라 하는 사람, 마음이 인자하고 형제간에 우애하되, 형세가 가난키로, 이 주머니에 있는 세간 절반 남짓 보냈지야.”
놀보놈의 평생 성기, 다른 사람 하는 말을 기어이 뒤받겠다. “만일 그렇다면, 안자 같은 아성인이 단표누항하였으며, 동소남의 출천지효, 숙수공양 못 하오니, 주머니에 있는 세간 왜 아니 보내었소.”
“그럴 리가 있겠느냐. 많이 많이 보냈더니, 염결하신 그 어른들 무명지물이라고 다 아니 받더구나. 누가 허물이 없으리요, 구치면 귀할 터니, 너도 이번 개과하여 형제간에 우애하고 인리에 화목하면, 이 재물 더 보태어 도로 갖다 줄 것이요, 그렇지 아니하면 한 장 동안에 한 번씩을, 큰 비가 올지라도 우장하고 올 것이니, 지질하게 알지 마라.”
당하에 내리더니 홀연히 사라지는지라. 박 타던 역군들이 이 꼴을 보아 놓으니, 무색이 막심하여 다시 탈 흥이 없어 각기 귀가하려 하니, 놀보가 만류하여,
“아까 왔던 그 노인이 상전인 게 아니시라, 은금이 변화하여 내 지기를 받자 하니, 만일 중지하여서는 저 다섯 통에 있는 보화 흥보 갖다 줄 것이니, 대명당을 쓰려 하면 초년패가 똑 있나니, 무안히 알지 말고 어서어서 톱질하소.”
놀보가 설 소리를 또 메기되 부자만 원하겠다. “어기야라 톱질이야.”
“인간에 좋은 것이 부자밖에 또 있는가. 요임금은 어찌하여 다사타 마다시고, 맹자는 어찌하여 불인하면 된다신고. 다사해도 내사 좋고, 불인해도 내사 좋으이.”
“어기여라 톱질이야.”
“범려의 부자 되기, 계연의 남은 꾀요. 백규의 치산하기, 손오의 병법이라. 재물이 없으면은 잘난 사람 쓸데없네.”
“어기여라 톱질이야.”
“공자 같은 대성인도 자공이 아니면은 천하를 두루 다님을 어찌 하며, 한 태조 영웅이나 소하 곧 아니면은 통일천하할 수 있나.”
“어기여라 톱질이야.”
“금문 들어서 대궐에 이르매 임금도 사랑하고, 일백 금전이면 빈 목숨도 돌아오게 하니 귀신도 안 무서워.”
“어기여라 톱질이야.”
“이 통을 어서 타서 좋은 보물 다 나오면, 부익부 이내 형세, 무궁행락 하여 보세.”
슬근슬근 거의 타니, 필채 꿰미가 박통 밖에 뾰조록이. 놀보가 보고 좋아라고,
“애겨, 이것 돈꿰미.”
쑥 잡아빼어 놓으니, 줄봉사 오륙백 명이 그 줄들을 서로 잡고 꾸역꾸역 나오더니, 그 뒤에 나오는 놈, 곰배팔이 앉은뱅이, 새앙손이 반신불수, 지겟다리에 발 디딘 놈, 밀지로 코 덮은 놈, 다리에 피칠한 놈, 가슴에 구멍 난 놈, 얼어 부푼 낯바닥에 댕강댕강 물든 놈, 입술이 하나 없어 잇속이 앙상한 놈, 다리가 통통 부어 모기둥만씩한 놈, 등덜미가 쑥 내밀어 큰 북통 진 듯한 놈, 키가 한 자 남짓한 놈, 입이 한쪽으로 돌아간 놈, 가죽관 쓴 놈, 쳇불관 쓴 놈, 패랭이 꼭지만 쓴 놈, 웅장건 끈 달아 쓴 놈, 물매 작대 멜빵만 진 놈, 감태 한 줌 헌 공석 진 놈, 온몸에 재 칠하여 아궁에서 자고 난 놈, 헐고 헌 고의 적삼에 등잔 그을음이 질음한 놈, 그저 꾸역꾸역 나오는데, 사람들 모은 수가 대구 시월령 만한데, 각청으로 “놀보 불러 놀보 불러.”
이런 야단이 없구나. 그 중에도 영좌 고원 있어, 영좌라 하는 영감, 나이 오십 남짓한데, 다년 과객질에 공것 먹는 수가 터져, 힘도 별로 안 들이고 예상으로 하는 수작 사람 조질 말이로다. 헌 갓에 벌이줄, 헌 중치막 방울띠, 훨씬 긴 담뱃대를 한가운데 불끈 쥐고, 점잖게 나오더니, 동무들을 책망하여,
“왜 이리들 요란하냐. 한 달 두 달 내에 끝날 일이 아닌 것을, 어찌 그리 성급한고. 아무 말도 다시 말고, 내 영대로 시행하지.”
놀보 안채 대청 위에 허물없이 올라앉아, 끝없는 반말 소리, “밖주인이 어디 있노. 이리 와서 내 말 듣지.”
놀보가 전 같으면 이러한 과객 보고 오죽 호령할 터로되, 여러 걸인 호령 소리에 정신을 놓았다가, 이분의 하는 것이 잠잖아 보이거든, 원정을 하여보자, 올라가 절한 후에 공순히 묻삽기를,
“본댁은 어디온데, 무슨 일로 오셨으며, 저리 많은 동행 중에 성한 사람 없사오니, 어찌하여 오셨나이까.”
영좌가 대답하되,
“우리들 온 내력은 오륙 일 쉰 후에 종차 수작하려니와, 수다한 동행들이 저 좁은 박통 속에서 여러 날 고생하여 기갈이 자심하니, 좋은 안주 술 대접과 갖은 반찬 더운 점심, 정결한 사처방에 착실히 대접하지.”
놀보가 깜짝 놀라 애긍히 비는 말이,
“저 많으신 손님네들 주식 대접할 수 있소. 대전 차하하옵시다.”
영좌가 대답하되,
“손님 대접하는 법이, 밥상 하나 하자 하면 접시 일곱 종자 둘, 김칫그릇에 갖은 반상, 반찬 값만 할지라도 닷 냥이 넘을 테나, 주인의 폐를 보아 닷 냥으로 작처하니, 손님 한 분에 매일 식가 석 냥, 술 담배 값 한 돈씩, 파전 소전 섞이잖게 착실히 차하하라.”
놀보가 하릴없어 삼천 냥을 내어 놓고, 한 끼 식가 차하하니, 몇 냥 어니 남았구나. 놀보가 다시 빌어,
“귀하신 손님네를 여러 날 만류하여 쉬어가면 좋을 테나, 내 집 십 배 더 있어도 못다 앉힐 터이오니, 오신 내력 말씀 쉽게 작처하옵시다.”
“주인 말이 그러하니 아무렇게나 하여 볼까. 우리 나라 벼슬 중에 활인서 마름 있어, 관원 서리 고자들이 누만 냥 돈 식리하여 수많은 우리 걸인 요를 주어 먹이더니, 주인 조부 덜렁쇠가 삼천 냥 보전 쓰고 병자년에 도망하여 부지거처되었으니, 매년 삼리 삼삼 구를 본전에서 범용되어, 그렁저렁 수십 년에 본전이 다 없어서 우리 반료 못 하더니, 조선 왔던 제비 편에 주인 소식 자세히 듣고, 활인서에 백활한즉 관원이 분부 내어, ‘만리타국에 있는 놈을 패문왕복 번거로우니, 너희들이 모두 가서 축년 변리 받아 오되, 만일 완거하거들랑 그놈의 안방에 가 먹고 반듯 누었어라.’ 분부 모시고 나왔으니, 갚고 안 갚기는 주인의 소견이지.”
놀보가 기가 막혀 공순히 다시 물어,
“우리 조부 그 돈 쓸 제 수표 착명 증인 있소.”
“있지.”
“여기 가져오셨습니까.”
“안 가져왔지.”
“수표가 있더라도 신사면이 중한데, 수표도 안 가지고 빚 받으러 오셨습니까.”
“일 년쯤 되면 강남 왕래할 터이니, 우리 식구 예서 먹고, 동행 하나 보내어서 수표를 가져오지.”
놀보가 들을수록 사람 죽일 말이로다. 무한히 힐난하다, 갑절로 육천 냥에 사화하여 보낼 적에, 영좌가 하는 말이,
“갖다가 바쳐 보아 당상께서 적다 하면 도로 찾아올 것이니, 홀홀히 떠난다고 섭섭히 알지 마소.”
일시에 간데없다. 걸인들을 보낸 후에 셋째 통 또 타려 할 제, 놀보 저도 무안하여 아니리를 연해 짜,
“선흉후길이요, 고진감래요, 삼령오신이라니, 무한 좋은 보화 이 통 속엔 꼭 들었지.”
박 타는 역군 중에 입바른 사람이 있어, 옆구리에 칼이 와도 할 말은 똑 하겠다. “여보게 놀보씨, 이 통 설소리는 내가 메겨 어떤가.”
놀보가 허락하니, 놀보를 꾸짖는 박 사설로 메기겠다. “요순우탕 태평시에 인심들이 순박, 공맹안증 성인님은 행실들이 검박, 밀화 늙어 호박, 구슬 발은 주박.”
“어기여라 톱질이야.”
“근래 풍속 그리 소박, 사람마다 모두 경박, 남의 말을 대고 타박, 형제간에 몹시 구박.”
“어기여라 톱질이야.”
“흥보의 심은 박 제비 은혜 받는 박, 놀보의 심은 박 제비 원수 갚는 박, 양반 나와 바로 결박, 걸인 나와 무수 공박.”
“어기여라 톱질이야.”
“네 정경이 저리 민박, 네 사세가 하도 망박, 불의로 모은 재물 부서지기 쪽박.”
슬근슬근 거의 타니, 사당의 법이란 게 그 중에 연계사당이 앞서는 법이었다. 허튼 낭자 때 묻은 옷, 박통 밖에 썩 나서니, 놀보가 깜짝 놀라,
“애겨, 서시가 나오느라고 하님 먼저 나온다.”
내외를 시키려고 금잡인이 대단하여, 울력꾼을 모두 다 문 밖으로 보내고서, 휘장이 모자라니 홑이불 이불 안팎, 돗자리 문발이며, 심지어 공석까지 담뿍 둘러 막았더니, 그 뒤에 서시들이 꾸역꾸역 나오는데, 낭자도 했으며, 고방머리 곱게 빼고, 주사 수건 자지 수건 머리도 동였으며, 연두색 저고리에 긴 담뱃대 물었으며, 따라오는 짐꾼들은 곱게 결은 오쟁이에 이불보 요강 망태 기름병도 달아 지고, 꾸역꾸역 나오더니, 놀보 보고 절을 하며,
“소사 문안이요. 소사 등은 경기 안성 청룡사와, 영남 하동 목골이며, 전라도로 의론하면 함열에 성불암, 창평에 대주암, 담양 옥천 정읍 동복, 함평에 월량사, 여기저기 있삽다가, 근래 흉년에 살 수 없어 강남으로 갔삽더니, 강남 황제 분부 내어, ‘네 나라 박놀보가 삼국에 유명한 부자라니, 박통 타고 그리 가서 수천 냥을 뜯어내되, 만일 적게 주거들랑 다시 와서 아뢰어라.’ 분부 모시고 나왔으니 후히 차하하옵소서.”
놀보가 하릴없어 제 손수 눅이겠다. “나오던 중 상이로다. 너희들 장기대로 염불이나 잘하여라.”
사당의 거사 좋아라고 거사들은 소고 치고, 사당의 절차대로 연계사당이 먼저 나서, 발림을 곱게 하고,
“산천초목이 다 성림한데 구경 가기 즐겁도다. 어야여, 장송은 낙락 훨훨, 낙락장송이 다 떨어진다. 성황당 어리궁 뻐꾸기야, 이 산으로 가며 어리궁 뻐꾹, 저 산으로 가며 어리궁 뻐꾹.”
“야, 잘 논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초월이오.”
또 한 년이 나서면서,
“녹양방초 녹양방초, 다 저문 날에, 해는 어찌 더디 가며, 오동야우 성긴 비에 밤은 어찌 길었는고, 얼싸절싸 말 들어 보아라. 해당화 그늘 속에 비 맞은 제비같이, 일 흔들 저리 흔들 흔들흔들 넘논다. 이리 보아도 일색이요 저리 보아도 절색이라.”
“얘, 잘 논다, 네 이름은 무엇이냐.”
“구광선이요.”
또 한 년 나오더니,
“갈까 보다 갈까 보다, 잦힌 밥을 못 다 먹고 임을 따라 갈까 보다. 경방 산성 빗근 길로 알배기 처자, 앙금살살, 게게 돌아간다.”
“네 이름은 무엇이냐.”
“일점홍이오.”
또 한 년이 나오면서,
“오독도기 춘향, 춘향월에 달은 밝고 명랑한데, 여기다 저기다 얹어 버리고 말이 못 된 경이로다. 만첩 청산에 쑥쑥 들어가서, 휘어진 버드나무 손으로 주르륵 훑어다가, 물에다 두둥두둥 실실실, 여기다 저기다 얹어 버리고 말이 못 된 경이로다.”
“잘한다, 네 이름은 무엇이냐.”
“설중매요.”
또 한 년 나오며 방아타령을 하여,
“사신 행차 바쁜 길에 마중참이 중화로다. 산도 첩첩 물도 중중, 기자왕성이 평양이라. 청천에 뜬 까마귀 울고 가니 곽산, 모닥불에 묻은 콩이 튀어 나니 태천이라. 찼던 칼 빼어 놓으니 하릴없는 용천검, 청총마를 들입다 타고 돌아오니 의주로다.”
“잘 논다, 네 이름은 무엇이냐.”
“월하선이요.”
또 한 년 나오면서 잦은 방아타령을 하여,
“유각골 처자는 쌈지 장수 처녀, 왕십리 처자는 미나리 장수 처녀, 순담양 처자는 바구니 장수 처녀, 영암 강진 처자들은 참빗 장수 처녀, 에라뒤야 방아로다.”
“네 이름은 무엇이냐.”
“하옥이요.”
한참 서로 농탕치니, 놀보 댁은 강짜가 났구나. 사양머리 동강치마, 속곳 가래 풀어 놓고, 버선발 평나막신, 왈칵 뛰어 냅다 서서 놀보 앞에 앉으면서,
“나는 누구만 못하기에 사당 보고 미치느냐.”
놀보가 전 같으면 볼에 금이 곧 날 터나, 사당에게 우세될까 미운 말로 별시하여,
“차린 의복 생긴 맵시 정녕한 사달들이, 예쁘기도 하거니와, 강남 황제가 보냈으니 홀대할 수 있겠느냐.”
매명에 일백 냥씩 후히 주어 보낸 후에, 설소리꾼에게다 분을 모두 풀어,
“방정스런 저 자식이 톱질 사설 잘못 메겨, 떼 방정이 나왔으니, 물러가라 내 메길게.”
놀보가 분을 내어 통 사설로 메기겠다. “헌원씨 작주거에 타고 나니 이제불통, 공부자 교불권에 칠십 제자가 육예 신통.”
“어기여라 톱질이야.”
“한나라 숙손통, 당나라 굴똘통, 옛글에 있는 통, 모두 다 좋은 통.”
“어기여라 톱질이야.”
“어찌하다 이내 박통, 모두 다 몹쓸 통, 첫 번 통 상전 통, 둘째 통 걸인 통, 셋째 통 사당 통.”
“어기여라 톱질이야.”
“세간을 다 빼앗기니 온 집안이 아주 허통, 우세를 하도하니 처자들이 모두 애통, 생각하고 생각하니 내 마음이 절통.”
“어기여라 톱질이야.”
“어서 썰세 넷째 통, 이는 분명 세간 통, 그렇지 않으면 미인 통.”
“어기여라 톱질이야.”
“내 신수가 아주 대통, 어찌 그리 신통, 뺏뜨려라 이내 죽통, 흥보 보면 크게 호통.” “어기여라 톱질이야.”
슬근슬근 거의 타니, 열대여섯 살 된 아이가 노랑 머리 갈매 창옷, 박통 밖에 썩 나서니, 놀보가 장히 반겨,
“애겨, 이것 선동이지.”
삼십 넘은 노총각이 그 뒤 따라 또 나오니, 놀보가 더 반겨,
“동자가 한 쌍이지.”
그 뒤에 사람들이 꾸역꾸역 나오는데, 앞에 선 두 아이는 검무쟁이, 북 잡아라 풍각쟁이, 각설이패, 방정스런 외초라니 등물이 지껄이며 나오더니, 놀보의 안마당을 장판으로 알았던지, 훨씬 넓게 자리잡고 각 차비가 늘어서서, 가얏고 “둥덩둥덩.”
통소 소리 “띠루띠루.”
해적 소리 “고깨고깨.”
북 장단에 검무 추며, 번개 소고 벼락 소고 “동골동골.”
한 편에서는 각설이패가 덤벙이는데, 머리털 밀어버린 자리 훨씬 돌려, 숭늉 쪽박 엎어 놓은 듯, 가로 약간 남은 머리 개미 상투 얹듯 하여 이마에 딱 붙이고, 전라도 장타령을 시작하여,
“뚤울울 돌아왔소. 각설이라 멱서리라, 동서리를 짊어지고, 뚤뚤 몰아 장타령, 흰 오얏꽃 옥과장, 노란 버들 김제장, 부창부수 화순장, 시화연풍 낙안장, 쑥 솟았다 고산장, 철철 흘러 장수장, 삼도 도회 금산장, 일색 춘향 남원장, 십리 오리 장성장, 애고애고 곡성장, 누릇누릇 황육전, 펄펄 뛰는 생선전, 울긋불긋 황화전, 파싹파싹 담배전, 얼걱 덜걱 옹기전, 딸각딸각 나막신전.”
한 놈은 옆에 서서, 두 다리를 벗디디고, 허릿짓 고갯짓, 살만 남은 헌 부채로 뒤꼭지를 탁탁 치며,
“잘 한다 잘 한다, 초당 짓고 한 공부가 실수 없이 잘한다. 동삼 먹고 한 공부가 진기 있게 잘도 한다. 기름 되나 먹었느냐, 미끈미끈 잘 나온다. 목구멍에 불을 켰나 훤하게도 잘 한다. 뱃가죽도 두껍다 일망무제로 나온다. 내가 저리 잘할 적에 네 선생이 오죽하랴. 네 선생이 나로구나. 잘 한다 잘 한다. 목 쉴라 목 쉴라, 대목장에 목 쉴라. 가만가만 종알거려라. 너 못하면 내가 하마.”
한참 이리 덤벙일 제, 한 편에서는 고사초라니가 덤벙이는데, 구슬 상모 담벙거지, 되게 맨 통장고를 턱밑에다 되게 매고,
“꽁그락꽁 꽁그락꽁.”
“예, 돌아왔소. 구름 같은 댁에 신선 같은 나그네 왔소. 옥같은 입에 구슬 같은 말이 쏙쏙 나오.”
“꽁그락꽁.”
“예, 오노라 가노라 하니, 우리 집 마누라가 아주머님 전에 문안 아홉 꼬장이 평안 아홉 꼬장이, 이구 십팔 열여덟 꼬장이, 낱낱이 전하라 하옵디다.”
“꽁그락꽁.”
“허페.”
“통영 칠한 도리반에 쌀이나 담아 놓고, 귀 가진 저고리, 단 가진 치마, 명실 명전 가진 꽃반, 고사나 하여 보오.”
“꽁그락꽁꽁.”
“허페페.”
“정월 이월에 드는 액은 삼월 삼일에 막아 내고, 사월 오월에 드는 액은 유월 유두에 막아 내고, 칠월 팔월에 드는 액은 구월 구일에 막아 내고, 시월 동지 드는 액은 납월 납일에 막아 내고, 매월 매일에 드는 액은 초라니 장구로 막아 내세.”
“꽁그락꽁, 허페.”
놀보가 보다 하는 말이,
“저런 되방정들, 집구석에 두었다는, 싸라기도 안 남겠다.”
돈 관씩 후히 주어서 치송하였구나. 잡색꾼들 보낸 후에, 남은 통을 켜자 해도, 이 여러 박통 속이 탈수록 잡것이라, 놀보 댁은 옆에 앉아,
“아이고 아이고.” 통곡하고, 삯 받은 역군들은 무색하여 만집한다. “그만 타소 그만 타소, 이 박통 그만 타소. 삼도 유명 자네 성세를 일조탕진하였으니, 만일 이 통 또 타다가 무슨 재변 또 나오면 무엇으로 방천할까, 필경 망신 될 것이니, 제발 덕분 그만 타소.”
고집 많은 놀보놈이, 가세는 틀리어도 성정은 안 풀리어,
“너의 말이 녹록하다, 천금산진환부래가 옛 문장의 말씀이요, 빼던 칼 도로 꽂기, 장부의 할 일인가. 무엇이 나오든지 기어이 타볼 테네.”
톱소리를 아주 억지쓰기로 메겨,
“어기여라 톱질이야.”
“초패왕이 장감 칠 제 삼일량만 가졌으며, 한신이 진여 칠 제 배수진이 영웅이라.”
“어기여라 톱질이야.”
“처음 없는 일이 없으나 끝이 있는 일이 드무니, 성인이 하신 경계, 자넨 어찌 모르는가. 나는 기어이 타볼 테세.”
“어기여라 톱질이야.”
“정녕한 좋은 보패 이 두 통에 있을 테니, 일락서산 덜 저물어 한 힘 써서 당기어라.”
슬근슬근 거의 타니, 큼직한 쌍교 대체, 거금도 가시목을 네모 접어 곱게 깎아, 생가죽으로 단단히 감아 철정을 걸었는데, 박통 밖에 뾰조록, 놀보가 대희하여,
“아무렴 그렇지. 아무리 박통 속이 내와하기 좋다 한들, 천하백 그 얼굴이 걸어올 리가 있나. 정녕한 쌍교 속에 서시가 앉았으니, 쌍교째 모셔다가 안채 대청에 놓을 테니, 휘장 칠 것 다시 없다.”
장담하여 기다릴 제, 쌍교는 무슨 쌍교, 송장 실은 상여인데, 강남서 나오다가 박통 가에 당도하여, 세상에 나올 테니 상여를 정상하여 마목틀 되어 놓고, 어동육서 좌포우혜 제를 진설하느라고 그새 종용하였구나. 불시에 나는 소리,
“신령이 이미 수레에 오르시어 그윽한 집으로 가시나니, 전별 예를 벌이고 영원히 이별하도다.”
대고 “워허너허 워허너허.”
“명정 공포 앞을 세고, 행자 곡비 곡을 하소.”
“워허너허 워허너허.”
“강남 수천 리 길 다 가고 나니 고생도 하였더니, 박통 문이 열렸으니 안장처가 어디신고.”
“워허너허 워허너허.”
“금강 구월 지리 향산, 산운불합 갈 수 없다.”
“훠허너허.”
“해 구름 속에 잠기니 우세 있다. 앙장 떼고 우비 껴라, 가다가 저물세라, 어서 가자 놀보 집에.”
“워허너허 워허너허.”
그 뒤에 상인들이 각청으로 울고 올 제, 낳은 아들 하나요 삯 상인이 여섯이니, 메기고 날 댓 돈에 목청 좋은 놈만 얻었구나. 한 놈은 시조청으로 울고, 한 놈은 산타령으로 울고, 한 놈은 방아타령으로 울고, 한 놈은 하 울어서 목이 조금 쉬었기로, 목은 아예 아니 쓰고 잦은모리 아니리로 남을 일쑤 웃기겠다. “애고애고 막동아, 기운 없어 못 살겠다. 놀보 집에 급히 가서 개 잡혀서 잘 고아라. 애고애고 오늘 저녁 정상을 얻다 할꼬, 놀보의 안방 치고 포진을 잘 하여라. 애고애고, 놀보 계집 뒷물시켜 수청으로 대령하라. 애고애고 이 행차가 초라하여 못 하겠다. 놀보 아들은 행자 세우고 놀보 딸은 곡비 세워라. 애고애고 철야할 제 심심하여 어찌할꼬. 글씨 잘 쓴 경쇠 한 목, 쇠 좋은 놈 얻어 오라. 애고 애고 설운지고, 가난이 원수로다. 삯 한 돈에 몸 팔리어 헛울음에 목 쉬었다. 애고애고.”
“훠허너허.”
땡그랑 요란하게 나오더니, 놀보의 안방에 정구하고, 허저 같은 상여꾼들 벽력같이 외는 소리,
“주인 놀보 어디 갔나. 대병 치고 제상 놓고, 촉대에 밀초 켜고, 향로에 향 피워라. 제물 먼저 올린 후에 상식상 곧 차려라. 방 더울라 불 때지 말고, 고양이 들어갈라, 구들을 막아라.”
이런 야단이 없구나. 놀보가 넋을 잃어 처자를 데리고서 대강 거행한 연후에, 상제에 문안하고 공순히 묻자오되,
“어떠하신 상 행차인지 내력이나 아사이다.”
상제가 대답하되,
“오, 네가 박놀본가.”
“예.”
“우리 댁 노 생원님이 너를 찾아보시려고 첫 박통에 행차하셔, 너를 속량해 주고 환행차하신 후에, 네 정성이 극진하여 자식보다 낫더라고 매일 자랑하시더니, 노인의 병환이라 병환 나신 하루내에 별세를 하시는데, 박놀보의 안채 정간이 장히 좋은 명당이라, 내 말 하고 찾아가면 반겨 허락할 것이니, 갈 길이 멀다 말고 부디 게 가 장사하되, 만일 의심하거들랑 이것을 보이면 신적이 되리라고 재삼 유언하시기로, 상행차 모시고서 불원천리 찾아왔다.”
소매에서 능천낭을 슬그미 내놓거든, 놀보가 이것 보니 송장 보다 더 밉구나. 꿇엎디어 섧게 빌어,
“상제님 상제님, 소인 살려 주옵소서. 노 생원님 하신 유언, 임종시에 하셨으니 정신이 혼미하여 난명의 말씀이니, 위과의 하신 일을 상제님이 모르시오. 산리로 할지라도 이 집터가 명당이면 일조 패가하오리까. 운진한 땅이오니, 상행 부비 산지가를 대전으로 바치올 제 환향 안장하옵소서.”
전답 문서 전당하고 돈 삼만 냥 빚을 얻어 상행 치송한 연후에, 남아 있는 여섯째 통 타려고 달려드니, 제 계집이 옆에 앉아 통곡하며 만류한다. “맙쇼 맙쇼 타지 맙쇼. 그 박씨에 쓰인 글자, 갚을 보자 원수 구자, 원수 갚자 한 말이라, 탈수록 망할 테니, 간신히 모은 세간 편한 꼴도 못 보고서 잡것들게 다 뜯기니, 이럴 줄 알았더면 시아재 굶을 적에 구완 아니하였을까. 만일 잡것 또 나오면 적수공권 이 신세에 무엇으로 감당할까. 가련한 우리 부부 목숨까지 없앨 터니, 기어이 타려거든 내 허리와 함께 켜소.”
박통 위에 걸터 엎어져 경상도 메나리조로 한참을 울어 내니, 놀보가 하릴없어 저도 그만 파의하여,
“이 내 신세 된 조격이, 계집까지 덧내서는 정녕 아사할 터이니, 여보소 톱질꾼들, 양줄 풀어 톱 지우고, 저 박통 들어다가 대문 밖에 내버리소.”
한참 소쇄하는 참에, 천만의외 박통 속에,
“대포수.”
“예.” “개문포 삼방하라.”
“예.”
“뗑뗑뗑.”
박통이 한가운데 딱 벌어지며, 행군 호령을 똑 병학지남조로 하겠다. “행영할 때 전면에 나무가 가로막거든 청기를 열고, 물길이 막히거든 흑기를 열고, 병마가 막거든 백기를 열고, 산이 험하거든 황기를 열고, 연화가 막거든 홍기를 열고, 지나가는 데 보이는 것이 있거든 곧 말아라. 길이 한 길로 갈 수 있거든 높이 서서 한 면을 招하고, 두 길로 고루 가거든 두 면을 세우고, 세 길로 고루 가거든 세 면을 세우고, 네 길로 고루 가거든 네 면을 세우고, 대영행이거든 다섯 면을 세우되 후대가 차례로 입으로 전하여, 앞길에 무슨 색 기 몇이나 높이 招한다 하여든 중군이 곧 변영호포를 들고 급히 호령하라.”
“정수.”
“예.”
“명금이하인, 행취타하라.”
“예.”
“쨍 나니나노 퉁 쾡.”
천병만마 물 끓듯이 나오는데, 그 가운데 나오는 장수, 신장은 팔 척이요, 얼굴은 먹빛 같고, 표범 머리 고래 눈과, 제비 턱 범의 수염, 형세는 닫는 말, 황금 투구 쇄자 갑옷, 심오마 높이 타고, 장팔사모 비껴 들고, 거뢰 같은 큰 목소리,
“이놈 놀보야.”
박 타던 삯꾼들 이 소리에 깜짝 놀라, 창자가 터져 죽은 놈이 여러 명이 되는구나. 놀보놈은 정신 잃고 박통 가에 뒤쳤으니, 저 장수 거동 보소. 놀보의 안채 대청이 쓸 만한 장대인 줄로, 하마포에 말을 내려, 승장포 삼방하고, 오색 기치 방위 차려 청동백서 세워 놓고, 각영 장졸 벌여 서서, 명금 대취타에 좌기 취한 연후에, 대상에서 나는 호령,
“놀보놈 나입하라.”
비호 같은 군사들이 놀보의 고추상투 덤벅 끌어 나입하니, 대장이 분부하되,
“네 놈 수죄할 양이면 네가 놀라 죽겠기에 조용히 분부하니, 자세히 들어 보라. 한나라가 말세 되어 천하가 분분할 제, 유 관 장 세 영웅이 도원결의하고 한실을 흥복하자, 천하에 횡행하던 삼형제 중 말째 되고, 오호대장 둘째 되는 탁군서 살던, 성은 장이요 이름은 비요, 자는 익덕이라 하는 용맹을 들었느냐. 내가 그 장군이로다. 천지에 중한 의가 형제밖에 또 있느냐. 한날 한시에 못 낳았어도 한날 한시에 죽는 것이 당연한 도리인데, 네 놈은 어이하여 동기 박대 그리 하며, 날짐승 중에 사람 따르고 해 없는 게 제비로다. 내가 근본 생긴 모양 제비 턱을 가졌기로 제비를 사랑하더니, 제비 말을 들어 본즉 생다리를 꺾었다니, 그러한 몹쓸 놈이 어디 가 있겠느냐. 내 평생 가진 성기, 내게 이해 불고하고, 몹쓸 놈 곧 얼른하면 장팔사모 쑥 빼내어 푹 찌르는 성정인 고로, 안득쾌인여익덕이요 진주세상부심인을, 너도 혹 들었는가. 네 놈의 흉녕 극악, 동생을 쫓아내고 제비 절각시킨 죄를 꼭 죽이려 나왔더니, 도리어 생각하니, 죽은 자는 다시 살릴 수 없고, 형벌은 이미 주면 속할 수 없으니, 네 아무리 회과하여 형제 우애하자 한들, 목숨이 죽어지면 어쩔 수가 없겠기에, 네 목숨을 빌려 주니, 이번은 개과하여 형제 우애하겠는가.”
놀보 엎어져 생각하니, 불의로 모은 재물 허망히 다 나가니, 징계도 쾌히 되고, 장 장군의 그 성정이 독우도 편타하시니, 저 같은 천한 목숨 파리만도 못하구나. 악한 놈에 어진 마음 무서워야 나는구나. 복복 사죄하며 울며 빈다. “장군 분부 듣사오니, 소인의 전후 죄상 굼수만도 못하오니, 목숨 살려 주옵시면, 전허물을 다 고치고, 군자의 본을 받아, 형제간에 우애하고, 인리에 화목하여 사람 노릇 하올 테니, 제발 덕분 살려 주오.”
장군이 분부하되,
“네 말이 그러하니 알기 쉬운 수가 있다. 남원이나 고금도나 우리 중형 계신 곳에 내가 가서 모셔 있어, 네 소문을 탐지하여 개과를 하였으면 재물을 다시 주어 부자가 되게 하고, 그렇지 아니하면 바로 와서 죽일 테니, 군사나 호궤하라. 이제 곧 떠나겠다.”
놀보가 감화하여, 양식 있는 대로 밥을 짓고, 소와 닭 개 많이 잡아 군사를 먹이면서, 좋은 술을 연해 부어 장군 전에 올리오니, 제 계집이 말려,
“애겨, 그만 합쇼. 그 장군님 술 취하면 아무 죄 없는 놈도 편타를 하신답네.”
놀보가 웃으며, “자네가 어찌 알아. 그 장군님 장한 의기, 의리로 엄안을 놓아주셨나니.” 장군이 회군하신 후에 가산을 돌아보니 일패도지하였구나. 방성통곡하고 흥보 집 찾아 나니, 흥보가 대경하여 극진히 위로하고, 제 세간 반분하여 형우제공 지내는 양 누가 아니 칭찬하리. 도원에 남은 의기 천고에 유전하여, 이러한 하우불이라도 감동하게 하시오니, 나쁜 사람을 착하게 하고 나약한 자를 용감하게 하는 백이의 기풍 같은가 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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