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
가을의 환영
도요시마 요시오
어느 시골에 어머니와 아들이 살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해 가을, 다음과 같은 일이 있었다.
“이제 정말 날씨가 좋아진 모양이지요.”
“그러게.”
어머니와 아들은 어느 아침 그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다 같이 맑은 낯빛을 들어, 푸르고 맑게 갠 너른 하늘을 우러러보았다. 너른 하늘을 우러러보기 전 두 사람의 눈길은, 너른 들판을 스치고, 들판 너머로 우뚝 솟은 산봉우리를 스쳤다. 그리고 이제, 그 너머의 푸른 하늘 속으로 눈길이 빨려 들어가자, 두 사람은 까닭 모를 미소를 흘렸다.
그해는, 초가을 무렵부터 거의 매일같이 장마처럼 비가 내렸다. 그 비는, 하늘에서 떨어져 오는 것이 아니라, 땅에서 피어오르는 가랑비 같은 것이었다. 길에는 깊은 진창이 졌고, 집 안은 눅눅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닭장 청소나 소와 말의 □에 애를 먹었다. 그것보다도 한층, 벼와 메밀의 알차기, 무와 토란의 수확에 마음을 졸였다. 그리고 그들은 매일 눈썹을 찌푸리고 비 내리는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하릴없이 노닥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덧 그 긴 비가 그치자, 소춘(小春)의 봄날 같은 좋은 날씨가 돌아왔다. 조금 남쪽으로 돌아 누그러진 햇살이, 들판 위를 한가득 노랗게 빛나게 했다. 그러자 대지 위는 둘러보는 한, 활동과 수확의 때로 돌아갔다. 비에 상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벼이삭은 알이 잘 든 노란 묵직함으로, 논 위를 한가득 물결치고 있었다. 무겁게 기울어진 메밀밭 사이에서는, 종다리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무와 토란도 검은 흙 속에 무럭무럭 뿌리를 뻗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은 모두 논밭에 나갔다. 수확의 기쁨이 그들의 햇볕에 그을린 얼굴 위에 있었다. 그리고 비에 갇혀 있던 그들의 근육의 힘은, 이제 대지 위에서 시험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서, 또 하나둘 순례 길에 오르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 앞에는 너른 들판이 있었다. 들판 위에는 한가득 단풍 든 초목이 있었고, 기도라도 드리고 싶을 만큼 맑게 갠 대기가 있었다. 아침에는 길가의 풀잎에 이슬이 맺혔고, 저녁에는 서녘 하늘이 붉게 타올랐다.
비에 갇혀 있던 마음이 비와 함께 개자, 모든 사람의 앞에는 갑자기 깊은 가을이 나타나 있었다. 수확의 가을이, 그리고 기도의 가을이, 또 소수의 사람들에게는 명상의 가을이. 어느덧 깊어진 가을을 놀라며 바라본 땅 위의 사람들은, 네댓새의 좋은 날씨가 지난 뒤에는, 어느새 스스로 깊은 가을 속에 잠겨 있었다. 그리하여 저마다의 길을 걸었다. 그것은 자기의 것을 거두는 계절이었다. 자기의 기도를 드리고, 자기의 마음을 묵상하는 계절이었다. 하늘이 높이 맑게 갠 채로, 단풍 든 잎사귀가 고요히 떨어졌다. 밤에는 창백한 달빛이 있었다.
어머니와 아들은, 그러한 자연과 그 속의 사람들을, 잔잔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어머니는 볕이 잘 드는 툇마루에 나와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들일에 바쁜 사람들이 일을 마친 뒤 몸에 두를 옷을 마름질해 짓는 것이, 그녀의 자그마한 일거리였다. 그는 ― 아들을 이제부터 그라고 부르기로 한다 ― 그 곁에 누워 뒹굴거나, 책상을 마주하기도 하면서, 책을 읽고 있었다. 소작 내준 토지에서 들어오는 수입을 학비 삼아, 다음 해부터는 도시로 나가 볼까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여행이라도 떠나고 싶은 날씨군요.” 하고 그가 말했다.
“정말 그렇구나.” 하고 어머니도 바늘을 멈추고, 넋을 놓은 듯 하늘을 우러러보았다.
“오랫동안 비가 내렸으니, 공기가 무척 맑아진 모양이지요.”
한참 있다가 어머니는 말했다.
“너, 산책이라도 다녀오는 게 어떻겠니?”
읍내에서 자란 그녀는, 시골에 오래 살면서도, ‘산책’이라느니 하는 시골 사람이 거의 쓰지 않는 말을 아직 입에 올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오랫동안 그대로 우두커니 하늘을 우러러보고 있었다. 하늘은 한가득 햇빛을 머금고 있었다.
그리고 까닭 모를 마음에 두 사람은 뜰로 내려서서 가을 풀을 만지작거리기도 했다.
산울타리 너머에서 곧잘 마을 사람들이 그에게 말을 건네고 갔다.
“안녕하세유.”
“안녕하세유. 올해는 농사가 잘되어서 좋구먼유.”
“에, 천도님은 잘하시는 게로구먼유. 작년엔 흉년에 쌀값이 헐했지만, 올핸 그 벌충이라구 해서요…….”
마을에서, 비단옷이나 하카마를 마름질할 줄 아는 단 한 사람의 여인으로서, 또 학문이 있는 단 한 사람의 청년으로서, 마을 사람들은 그들 앞에서 삿갓을 벗고 지나갔다. 그리고 그들 집의 툇마루에는, 곧잘 순례하는 사람들이 차를 마시고 갔다.
사초로 엮은 삿갓에 짚신과 각반 차림으로, 백목 지팡이를 짚은 여자 순례자들은, 그의 댁 바로 곁에 있는 다이시도(大師堂) 쪽에서, 지친 발을 끌며 와서, 한 잔의 떫은 차로 목을 축였다. 이마에 주름이 잡힌 눈빛이 빛나는 늙은 여인이, 어느 날 역시 그의 집으로 청해 들어와서, 툇마루에서 떫은 차를 홀짝이며, 그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면서 이런 말을 했다.
“이분께서는 인년(寅年) 태생이시지요. …… 아아 역시 그러시군요. 한 번 보면 알아요. 그렇다면 수호 본존이신 허공장보살(虚空蔵菩薩)님을 믿고 받드셔야 합니다요. 고마우신 보살님으로, 쌀 한 톨 사람에게 베풀면 열 톨로 돌려주신다고 한답니다요. …… 좋은 태생으로 복 받으셨습니다요.”
그러한 순례하는 사람들이 들려주고 가는 이야기는, 아득히 태어나기 전에 들은 듯이 여겨지는 이야기뿐이었다. 그녀들의 방울 소리가, 한적한 마을의 우거진 나무들 사이로 사라져 가는 것을 듣고 있노라면, 그는 자기 어머니의 무릎에 매달리고 싶은 심정이 되곤 했다.
어린 시절, 봄이 되면 곧잘 그는 가오리연을 띄웠다. 때로는 마을 농부들에게 야단을 맞으며, 자운영(紫雲華)이 핀 밭 위에 쪼그려 앉아, 자기의 가오리연을 저편 이어진 산의 높이와 겨루곤 했었다. 그 평야를 두르고 있는 저편의 줄지은 산맥은, 그러나 가을이 되면, 묘하게 그의 마음을 끌어당겼다. 그 산봉우리가 이 대지의 경계이고, 그 너머는 바닥 모를 절벽이 되어 있어, 그 너머에 무서운 것, 지옥이라거나 극락이라거나 하는, 들여다보면 눈이 핑 돌 듯한 것이, 있을 것 같은 상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저 어렴풋한 어린 환상과 또 할머니의 잠자리 옛이야기에서, 어느 결에 빚어진 것인 듯했다. 그 마음이, 지금 또, 순례자들의 방울 소리가 사라져 가는 것을 들으면서 우두커니 눈을 저편 산봉우리에 보내고 있는 지금, 그의 마음에 되살아났다.
그래서 그는 별다른 마음 없이 그 일을 어머니에게 이야기해 보았다.
그러자 어머니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그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 눈은 영락없이, 그를 낳아 준 어머니의 눈이었다. 그에게 젖을 물려 준 어머니의 눈이었다.
“그런 일이 정말 있다면 좋으련만.” 하고 한참 있다가 어머니는 말했다. 그리고 그 말로, 두 사람의 마음은 하나로 녹아들어, 가을의 높은 너른 하늘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저녁 무렵이 되어 밤이 되면, 시골 마을은 무서울 만큼 고요히 가라앉았다. 램프의 심지 타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그리고 그와 어머니는, 곧잘 툇마루에서 달을 바라보다가도, 벌레 소리에 재촉이라도 받은 듯, 자그마한 식모 한 사람에게 문단속을 시키고 자리에 들었다.
아침은 일찍 일어났다. 그래도 벌써 아침 햇살은 아침 안개를 통해, 이슬방울을 잎새 끝에 반짝반짝 빛나게 하고 있었다. 멀리서, 닭 우는 소리가 들리거나, 들로 나가는 말의 우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사내들은 모두 벼베기에 나가 있었다. 그리고 아침 일을 마치고 뒤따라 나가는 여인네들이, 그의 집 앞을 지나갔다. 맑은 공기가 들판 위를 건너와, 마을 위에 자욱이 깔린 아침 안개와 아침 짓는 연기를 흩어 보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논밭은 모두 소작 내주고 있었지만, 그래도 너른 댁의 뒤편에, 그들은 채소밭을 가지고 있었다. 가지가지 채소 외에 토란이며 고구마까지 가꾸고 있었다. 그것은 어머니와 그에게 좋은 운동이었다. 아침 이슬이 마를 무렵, 그들은 곧잘 괭이를 손에 들고 뒤편 밭 가운데 섰다.
그는 게다를 벗어 던지고 검은 땅 위로 발을 내디뎠다. 발바닥에는 검은 흙이 이슬에 젖은 차가움이 느껴졌다. 괭이를 그 흙 속에 찔러 넣어 일구면, 푸른 지렁이 같은 것이 기어 나왔다. 본디 지렁이를 매우 싫어하는 그도, 그런 때는 조금도 그것이 싫지 않았다. 그리고 푸르푸른 채소 잎이 검은 흙 속에서 뻗어 있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자기도 지렁이와 함께 그 대지 위에 누워 있고 싶어졌다. 모든 것이 차가울 만큼 맑았다, 그리고 건강했다. 눈물이 솟을 만큼 맑고 건강했다.
문득 거미줄 한 가닥이 얼굴에 걸려, 괭이 자루에 굽혔던 몸을 일으키니, 어머니도 맨발로 그곳에 서서 그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머니, 너무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 하고 그가 말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어머니는 갑자기 야위어 갔다. 그러나 그 때문에 조금도 뼈가 도드라지지는 않았다. 그녀는 아무리 야위어도, 둥글고 도톰하게 머물러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야위어 가는 몸 안에는, 꿈꾸는 듯한 영혼이 있었다. 그도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그러한 어머니의 영혼 속에 자기 마음을 안기게 하는 버릇을 익혀 왔다.
뜰의 나무들이 단풍 들어, 어느 결에 그 잎들이 떨어지게 되어 있었다. 거미줄에 낙엽 하나가 며칠이고 걸려 있기도 했다. 나무들의 줄기가 단단해지고, 사물의 그림자가 옅어져, 비치듯이 푸른빛을 띤 환함이, 노랗게 물든 땅 위에 가득 차자, 뱀은 굴로 들고, 벌레는 풀숲 속으로 숨어들었다. 모든 것이 자기 자신의 거처에 들어박히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이 자기의 드러난 모습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과거가 그에게 돌아오고, 그의 모든 것이 그 자신 안에 드러나는 때, 그는 자기를 낳은 어머니의 품으로 돌아가기를 생각하고, 자기를 빚어낸 대지의 살갗에 입술을 대기를 생각했다. 그리고 그곳에는, 어머니의 품속에는 자기의 온기가 있었고, 검은 땅에는 자기가 일구어 낸 푸른 채소가 자라 있었다.
그때 그는, 존재하는 것의 기쁨을 느끼고, 또 존재하는 것의 외로움을 느꼈다. 그리고 그는, 존재하는 자기와 존재했던 자기를 보았다. 존재하게 될 자기는 그의 시야 밖으로 벗어나 있었다. 그러고 나서 그는 무언가를 향해 두 손을 모으고 싶어졌다.
뜰 한 귀퉁이에 서면, 댁이 언덕 위에 있었던 까닭에, 들 끝까지도 둘러보였다. 농부들의 벼베기하는 모습이 바로 저편으로 보였다. 한 줄기 큰길 위에는, 광주리를 짊어진 행상 여인의 모습도 보였다. 그녀는, 수확철의 논 사이를 돌며, 단감과 벼를 바꾸어 거래하는 것이었다. 그 단감을 베어 물면서 아이들은 짚단 사이에서 놀고 있었다.
“고마우신 보살님으로, 쌀 한 톨 베풀면 열 톨로 돌려주신답니다,” 하던 순례 여인이 한 말을, 그는 그때 어떠한 공리적 셈도 없이 떠올릴 수 있었다.
“어머니, 순례 길에 떠나 보지 않으시겠어요?” 하고 그가 말했다.
“너도 함께라면…….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뒤로, 나도 한 번은 N…… 지장보살(地蔵様)님께 참배하려고 마음먹고 있었으니까.”
어머니의 대답은 참으로 잔잔하였다.
눈을 들어 보니, 먼 지평에서, 산봉우리에서, 또 높은 푸른 하늘에서, 돌아오라 부르는 듯한 이끌림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어머니 쪽을 다시 돌아보았다.
“참된 순례가 아니어도 좋으니, 그저 지장보살님께 참배하러 떠나 봅시다.” 하고 그는 어머니에게 대답했다.
그리하여 어느 맑게 갠 날 아침, 두 사람은, 식모에게 집을 맡기고, 이틀 묵을 채비로 N…… 지장존(地蔵尊) 참배의 길에 올랐다. 어딘가로 돌아가는 듯한 마음으로. 그리고 이틀 묵은 도보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에는, 논의 벼는 거의 베어 거두어들여져 있었고, 늦가을 나뭇가지 끝에 때까치가 울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