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 of 1

Chapter 1

사월 십칠일, 오이와케에서

호프만슈탈의 “문집”을 계속 읽고 있다. 일찍이 비안키 여사가 이 시인을 릴케와 나란히 논한 책을 읽었던 무렵, 이미 세상을 떠난 이 시인의 비창한, 진짜 모습을 알게 된 뒤로, 그 이래 어쩐지 마음이 끌리고 있었는데, 최근 그 문집의 불역(佛譯)을 손에 넣을 수 있어서, 며칠 전부터 읽어 가고 있는 참이다.

지금까지 다 읽은 몇 편(셰익스피어를 논하면서 극의 본질은 성격 묘사나 줄거리 따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분위기에 있다는 설을 세운 것, 또는 괴테의 “타소”에 관해 이야기하며 종래 등한시되곤 했던 레오노레 공녀의 중요성을 지적한 것, 그리고 또, 슈테판 게오르게의 시를 들어 시의 본질을 밝히면서 십수 년 후 순수시의 발생을 일찌감치 예견하고 있었던 듯한 “시에 관한 대화”)으로 보더라도, 호프만슈탈이 과거 대시인의 숭고한 작품을 자기 안에 훌륭히 살려 내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앞날의 시의 흐름에도 민감한 통찰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에는, 참으로 경복할 따름이다.

오늘 읽은 것은 “로드 챈도스의 편지”라는 한 편이다.

이 서기 1603년 8월 22일자가 적힌 옛 편지는, 필립 로드 챈도스라는 잉글랜드 문인이 그 친구 프랜시스 베이컨에게 보내, 일체의 문학적 활동을 내려놓는 변명을 위해 쓴 편지라는 주(註)가 붙어 있다. 그러나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호프만슈탈의 가탁(假託)이리라.

아무튼 그 로드 챈도스라는 사람은, 잉글랜드 문예부흥기에 흔히 보이는 박학다재한 인물이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목가적인 시를 짓기도 하고, 조부가 남긴 기록을 바탕으로 헨리 8세 연대기를 쓰려고 계획하기도 하며, 또 각국 각 시대로부터 자료를 모아 잠언집 같은 것을 엮을 것을 꿈꾸기도 했다. 그러나 돌연, 그는 그러한 일체의 일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그대로 긴 침묵에 들어갔다.

그 긴 침묵을 염려하며 편지를 보낸 옛 친구 베이컨에게, 그 침묵의 변명을 시도한 것이 바로 이 편지인데, 이하 그것을 조금 발췌해 두기로 하겠다.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제 경우는 다음과 같습니다. 저는 어떤 대상을, 사고나 언어 따위로써 순서를 세워 다루는 것이 전혀 불가능해지고 말았습니다. 우선 저는 보통 사람들이 쓰는 듯한 말로써 고상한 일도 평범한 일도 이야기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정신’이라거나 ‘영혼’이라거나 ‘육체’라거나 하는 따위의 말을 입에 담는 것이 말할 수 없을 만큼 불쾌하게 느껴집니다. ……아무튼, 비판을 환히 드러내기 위해서는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되는 추상적인 말은, 모조리 제 입속에서, 썩은 버섯처럼 가루가루로 부서지고 마는 것이었습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네 살 난 딸 카자린 폼필리아가 어린아이다운 거짓말을 한 것을 꾸짖으며, 늘 정직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일러 주고 있는 사이, 제 입에 모여들고 있던 생각들이, 돌연, 번쩍이는 빛깔을 띠기 시작하더니, 그것이 잇따라 옮겨 갔으므로, 저는 황급히 그 꾸지람을 끊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마치 생리적인 불쾌에라도 사로잡힌 듯이. 실제로 제 얼굴은 몹시 창백해지고, 그리고 이마 위가 격하게 짓눌리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저는 딸을 혼자 남겨 둔 채, 황급히 등 뒤의 문을 닫았습니다. 그러고는 말에 올라, 인적 없는 목초지를 한참 내달려 준 덕분에, 가까스로 저는 진정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 식으로, 로드 챈도스는, 오늘날이라면 일종의 신경 쇠약이라고 불릴 법한, 무위(無爲)의, 괴로운 상태에 다다른다. 그리하여 그는 일체의 정신생활, 일체의 사색을 단념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나, 그처럼 거의 식물에 가까운 듯한 존재 안에서도, 그는 일종의 기이한 행복을 발견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러한 존재는, 저의 이웃이나, 저의 친척이나, 이 나라에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귀족 대부분의 그것과 거의 구별이 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행복하고, 생기 어린 순간을 전혀 가지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순간이 어떠한 것인지를, 자네에게 이해시키는 일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여기에서도 또한, 말이 저에게는 부족합니다. 그것은 이름을 지니지 않는 것, 또 의심할 바 없이 그것을 지닐 수 없는 것, 그리고 그저 꽃병 안에처럼, 제 둘레의 눈에 보이는 사물 속에, 흘러넘칠 만큼 생을 부어 넣으면서, 그 순간 슬쩍 모습을 보일 따름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보지 않으면 자네에게 납득이 가지 않으리라 여겨지므로, 시시한 예이지만 두셋 들어 보겠습니다. 가령, 물뿌리개라거나, 밭에 버려진 쟁기라거나, 양지에서 잠자고 있는 개라거나, 초라한 묘지라거나, 온전하지 못한 자라거나, 자그마한 농가 따위가, 저의 영감의 자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습관이 되어 어느덧 그 위로 무심히 눈이 미끄러져 버리곤 하는, 그러한 사물들이며 그 밖에 그것과 닮은 수많은 사물들이, 돌연,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그것을 표현하기에는 일체의 말이 너무도 빈약해 보일 만큼, 장엄하고, 감동을 자아내는 자국을 저에게 새겨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눈앞에 없는 사물의 분명한 영상까지가, 전혀 헤아릴 수 없는 방식으로, 뜻밖에 감미롭게, 저를 거룩한 감정으로써 가장자리까지 가득 채워 버리는 일조차 있는 것입니다.”

어느 저녁, 로드 챈도스는 여느 때처럼 말에 올라 있었다. 조금 전 밭 한 곳에 쥐를 잡기 위한 독약을 다량 뿌리도록 일러 두었던 일 따위는, 이미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러고는 잘 일군 농토 속을 평보로 말을 몰면서, 군데군데 한쪽으로 모아져 봉긋이 쌓인 자갈 더미라거나, 저 멀리 밭의 기복 너머로 가라앉아 가는 커다란 석양 외에는 아무런 인상도 받지 않고 있던 때, 돌연, 그의 마음속에, 쥐 떼가 죽어 가며 괴로이 몸부림치고 있는 광 안의 광경이 문득 떠올랐다. 독약의 격렬한 냄새로 가득 찬, 광 안의 서늘하고 묵직한 공기, 쥐들의 괴로운 외침, 출구를 향한 헛된 쇄도, 막힌 틈새 앞에서 딱 마주친 두 마리 쥐의 겁에 질린 차가운 눈빛, 그러한 모든 것을 그는 자기 안에서 또렷이 느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연민 같은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그러한 인간적인 감정 이상의 것이었고, 또한 그 이하의 것이라고도 할 수 있으리라. 그것은 그 동물들에 대한 자기 몰입, 한도 없는 동화에 의한 것이며, 그 무아의 상태에는 전혀 극적 요소가 없고, 또 인간적 요소조차 조금도 없는 것이다. 그 점은 그가 드는 또 하나의 예에 의해 한층 분명해진다.

다른 저녁, 로드 챈도스는 호두나무 아래에서, 정원사가 잊어 두고 간, 절반쯤 물이 들어 있는 물뿌리개를 발견했다. “그 물뿌리개, 그 안에 들어 있는, 그리고 나무 그늘이 어둑하게 드리우고 있는 물, 그 물의 표면을 미끄러지듯 헤엄치고 있는 한 마리 물방개, 그러한 의미 없는 것들이, 무엇인가 무궁한 것 앞에 제가 세워져 있기라도 한 듯한 전율로 가득 채우고, 저를 머리에서 발끝까지 부들부들 떨게 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무언가의 말을 외쳐 내고 싶다고 여겼을 정도였으나, 만일 제가 어쩌다 그러한 말을 발견했더라면, 저는 제가 믿지도 않는 치천사의 무리조차 제 앞에 무릎 꿇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침묵한 채,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그러고는 몇 주 뒤, 그 호두나무를 알아보았을 때, 저는 그것을 곁눈으로 머뭇머뭇 바라보며 그 곁을 지나갔습니다. 그 추억이 아직껏 그 줄기의 둘레에 떠돌고 있는 듯한 기적이며, 가까운 떨기나무에 여전히 서려 있는 듯한 저편의 떨림을 놓치지 않으려 하면서…….”

그렇게 말한 듯한 순간에는, 참으로 보잘것없는 듯한 것, 가령 개라거나, 쥐라거나, 물방개라거나, 발육이 더딘 사과나무라거나, 언덕을 굽이굽이 뻗은 차도라거나, 이끼 낀 돌이라거나가, 무엇보다도 귀중한 것이 된다. 모든 것, 그의 둘레에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 그가 떠올리는 모든 것이, 그에게는 실로 의미 깊게 보여 온다. 그리고 그 자신의 텅 빈 듯한 머리의 상태조차 무언가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듯이 여겨질 정도이다. “……그러나, 그러한 기이한 환혹(幻惑)이 저에게서 떠나고 나면, 저는 더 이상 아무것도 말할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저와 세계 전체 사이의 조화가 어떠한 것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것이 지각되어 오는지를, 무언가 의미 있는 말로써 제가 표현해 내지 못하는 것은, 저의 내장의 운동이라거나 저의 혈액 순환의 정지 따위에 관해서 분명한 설명을 해 주기 어려운 것 이상이옵니다.”

정신적인 것인지, 육체적인 것인지, 어느 쪽인지 알 수 없는, 그러한 위기를 빼고 나면, 그의 생활은 거의 믿기 어려울 만큼 공허하다. 그는 그러한 마음의 공허한 상태를 자기 아내나 고용인들에게 가까스로 숨겨 내고 있는 것이다.

“저는 지금 제 집의 한쪽 곁채를 짓게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건축 기사와 그 일의 진행에 관해 적당히 이야기를 맞추고 있습니다. 저는 직접 재산을 관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소작인이나 고용인들은, 전보다 다소 제가 말수가 적어졌다고 여기더라도, 옛날과 조금도 다름없이 성품이 무던한 분이라고 여기고 있을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들 가운데 누구 하나라도, 저녁이면, 저마다의 문 앞에 모자를 손에 든 채 우두커니 서서, 말을 타고 지나가는 저를 바라보고 있는 동안, 저의 눈이, 시구 따위라도 찾고 있는 사람이라도 되는 양, 무언의 욕망을 지니고서 그들의 썩어 가는 마룻장을 어루만지고 있다고는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누구 하나도 알지 못할 것입니다, 저의 눈이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못생긴 강아지라거나, 꽃병 사이를 나긋이 빠져 다니는 고양이 따위의 위에 머물고 있는 것을. 그리고 또 농가 안의 변변치 않고 초라한 물건들 사이에, 언어를 끊는, 끝없는, 무엇인가 수수께끼 같은 황홀의 원천이 될 만한 것을 저의 눈이 찾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이제 그 편지의 끝에 가까운 듯한 페이지를 책상 위에 펼쳐 둔 채, 무언가 모를 감동을 안고서, 밖으로 나갔다. 눈이 몹시 피로하므로, 조금 걸어 보려고 여겼던 것이다. 자못 봄다운 날이다. 그러나 아직 어딘가 차고 서늘하다. 이삼일 전에, 이제 이것이 마지막이려니 싶은 눈이 내렸다. 그 눈이 산의 주름에도, 지붕 위에도, 밭 그늘에도, 그래도 거의 사라져 버리기는 했으나, 아직 여기저기 조금씩 남아 있다. 아사마야마는, 눈이 없는 곳만, 묘하게 거뭇이 보인다. 나는 격한 감동으로 가득해진 채, 도리어 묘하게 텅 빈 듯한 마음 상태로, 서쪽을 향해 걸어간다. 마을 변두리께에서, 두 갈래로 나뉘는 길의 북쪽을 잡는다. 거기서부터는 양옆 모두 줄곧 잎갈나무의 헐벗은 숲이다. 하루 종일 그늘져 있는 듯한, 그 왼쪽 가장자리는 줄곧 더러운 눈으로 묻혀 있다. 그러한 잔설이 그대로 성긴 숲 안쪽까지 사라지지 않은 채로 있는 곳도 있다. 온통 갈색의 작은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은, 토끼라도 뛰놀던 자국인 듯하다. 부드러이 햇볕이 닿고 있는, 또 한쪽의 숲에는 눈이 전혀 없고, 밑풀이 어느덧 연둣빛을 띠려 하고 있다. 휘파람새가 아직 어설픈 울음으로, 이따금 울어 보이고 있는 것도, 아무래도 이쪽 숲 안쪽뿐인 듯하다. ……나는 그렇게 무심히 몇 정쯤(약 수백 미터) 걷고 있는 사이, 가까스로 그러한 잎갈나무 숲이 끊어지고, 그러고서 이번에는 잡목림으로 바뀌려 하는 잇닿는 자리로부터, 저 멀리에 새하얗게 빛나고 있는 북알프스가 바라보이는 지점까지 다다랐다. 잠시 그곳에 멈춰 서서, 절절한 눈빛으로 그 산들을 바라보고 나서, 나는 다시 방금 온 길을 되짚었다. 그리고 다소 지친 채, 가까스로 마을 변두리까지 돌아오자, 조금 전까지 사람 그림자 하나 없던 그곳의, 관음상이며 옛 비석 따위가 늘어서 있는 야트막한 풀밭에, 마을의 작은 여자아이들이 열 명쯤, 와글와글 떠들며 놀고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다소 떨어진, 관음상 곁에 다리를 뻗었다. 무엇이라 할 것도 없이, 모두의 쪽으로 등을 돌린 채로. 그러는 사이 불쑥 그 아이들의 떠드는 소리가 한층 시끄러워진 듯하다고 여기고 있노라니, 내 등 뒤로 그 여자아이 하나가 발소리를 죽이고 다가오는 듯한 기척이다. 그래도 내가 모른 척하고 있노라니, 그 여자아이는 내 바로 곁까지 살그머니 와서, 무언가 흰 것을 내 발치에 두고는, 이번에는 웃음소리를 내며 달아나 버렸다. 보니, 유리 조각 위에, 눈의 작은 덩어리를 얹고, 그 위에 어쩐지 연노랑과 연보라의 자그마한, 풀꽃이라기에는 그저 이름뿐인 듯한 것들이, 몇 송이, 곁들여져 있다. 내가 웃는 얼굴로 모두의 쪽을 돌아보았더니, 여자아이들은 큰 소동을 부리면서, 비석 그늘로 모두 모습을 감추어 버렸다. 정신이 들고 보니, 내 바로 곁의 관음상 앞에도, 내 앞에 놓인 것과 같은, 가련한 공물이 놓여 있는 것이다. ……

그로부터 몇 분 뒤, 나는, 그러한 가엾은 여자아이들과 헤어져, 묵고 있는 곳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이번에는 길을 가며, 잘 살펴보고 있노라니, 길가나 밭 가장자리 따위에, 갈 때에는 조금도 알아채지 못했던, 그러한 연노랑이며 연보라의, 가련한 듯한 자그마한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도서 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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