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 용필과 명희의 어린 시절 정혼
제2장 · Janji Masa Kanak Yong-pil dan Myeong-hui
한 시골 사람이 어린 조카자식을 서울로 올려보내며 당부하는 말이라.
"용필아―, 잘 가거라. 서울은 시골과 달라서 대단히 번화하여 길에 잘못 다니다가는 말에게 밟히기도 쉬우니 조심하여라. 사동 김갑산 영감은 나와 죽마고우로 어려서부터 사이가 좋게 지내었다가 근래 칠팔 년을 서로 소식 없이 지내었는데, 그 집을 찾아가서 내 편지를 전하고 보이면 그 사람이 필연 반가워할 것이오, 또 너를 위하여 출세할 길도 열어줄 것이니 그런 데를 가서 있더라도 똑똑하게 하여라."
이렇게 당부하고 말하는 사람은 용필의 삼촌이니 만초 선생이라면 그 동리 근처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사람이오, 그 동리는 강원도 철원 고을 북편으로 십 리쯤 되는 땅이라. 무슨 까닭으로 자기 조카를 서울로 보내느냐 할 지면, 좋은 일에 보내는 것이 아니오, 사세 부득이한 일이 있어서 집에 있을 수 없는 형편이 있는 고로 서울로 보내는 터이라. 당초에 용필의 조부는 상당한 재산이 있어서 요부하게 살뿐 아니라, 그 근처에서 세력이 남에 지지 아니하고 행세도 점잖게 하는 고로 사람마다 존경하더라. 아들은 둘이나 있으되 손자를 못 보아 대단히 바라더니 맏아들에게서 용필이를 낳은지라, 아이도 대단히 탐스럽고 똑똑하게 생겼거니와 늦게 본 손자라 더욱 귀애하여 금지옥엽같이 사랑할 새, 이때 그 친구로 항상 서로 추축하는 박감역이 있으니 역시 가세가 넉넉하고 세력도 있고 문벌도 비등한데 늦게 손녀딸을 보아 대단히 사랑하여 이름을 명희라 부르고, 아침이든지 저녁이든지 명희를 품에 안고 용필의 조부 되는 김도사 집에 가서 담배도 먹고 이야기도 하고 놀다 오는 터이라.
용필이는 돌이 지내어 아장아장 걸어오고 걸어가매 김도사가 귀애하여 재미를 보느라고 사람마당 양지짝에 앉아서 용필의 걸음 걷는 양을 보려고 손에 들었던 담뱃대를 멀지 않게 집어 내던지고,
"오―, 내 손자야, 저기 가서 저― 담뱃대 가져온. 옳지, 옳지, 아이고 기특하다."
김도사가 이러할 즈음에 박감역이 명희를 품에 안고 나와서 역시 내려놓고 손을 붙들고 귀염을 본다. 두 어린아이가 빵긋빵긋 웃으며 혹 걷기도 하고 혹 기기도 하여 둥실둥실 노는 모양 남이 보아도 귀엽고 대견하여 어여삐 여길 터인데, 김도사와 박감역이야 오죽 귀여워 하리요. 두 늙은이가 어떻게 마음에 귀엽든지 그 자리에서 서로 언약을 맺고 혼인을 예정하여, 용필이 열일곱 살 되거든 성례하기로 작정한지라, 남녀가 일곱 살만 되면 한자리에 앉지 아니하는 것이 우리 조선의 예법이로되, 용필이와 명희는 예혼을 언약한 터인 고로 십여 세가 되도록 한방에 함께 앉기도 하며, 어른들이 실없이 구느라고 한 자리에 앉히고,
"명희가 네 아내다." "용필이가 네 남편이다." 하며 재미를 보고 웃고 지내더니, 세상만사가 사람의 뜻대로 되기 어려움은 옛적이나 지금이나 일반이라. 박감역이 세상을 이별한 후 일 년이 못 되어서 김도사가 역시 별세하니, 김도사의 집에는 환란이 그치지 아니하여 해마다 초상이 아니 나는 해가 없어, 김도사의 맏아들 죽고 그 둘째 아들 만초 선생의 내외도 중병으로 죽을 뻔하다가 겨우 살아나니, 어언간 가산이 탕패하여 용필이는 부모 없는 고아가 되고 가난한 살림살이로 궁하게 지내는 그 삼촌에게 의탁하여, 숙모가 뒤를 거두어 길러내니 수삼년 전에는 철원 고을에서 일반이 부러워하던 김도사 집이 지금은 아주 보잘것없이 되어 사람마다 세상의 부귀영욕이 일장춘몽과 같다 하는 말을 믿게 하는도다.
어제까지는 사람마다 떠받들고 집집마다 귀여워하던 용필이가 지금은 간데족족 천덕꾸러기가 되어 헐벗고 주리고 모양이 아주 말 못되는데, 그 삼촌 숙부 되는 만초 선생은 평생에 좋아하는 것이 글뿐이오. 돈 같은 것은 변리도 따질 줄 모르고, 집안 살림은 당초에 상관치 아니하여 그 아내가 어찌 어찌하여 지내어 가는 터이라. 그러한 고로 용필이는 더욱 말 못되게 지내어 어떠한 때는 끼니도 굶지 의복은 남부하여 불쌍한 경우에 이르렀는데, 세상 사람이 하나도 돌아보아 주는 사람이 없으되 오직 남모르게 속으로만 불쌍히 여기고 마음으로만 애닯게 여기는 사람 하나이 있으니, 이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박감역의 손녀 명희라. 박감역이 죽은 후로 박감역의 아들 명 희의 아버지 박참봉은 원래 인색하고 돈만 아는 사람이라, 빈궁한 사람은 사람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부자나 세력 있는 사람을 보면 그 앞에서 감히 얼굴을 들지 못하고 아첨하는데, 당초에 김도사가 살아 있을 때에는 김 도사 집이 요부하고 세력이 있어 자기 집보다 나은 고로 자기 딸 명희와 용필이와 예혼 언약한 것을 좋아하였으나, 지금은 김도사 집이 망하고 용필이가 말못되게 있음을 보니 혼인할 마음이 없는데, 명희의 얼굴이 절묘하고 침선 범절과 언어, 행동이 세상 사람 같지 아니하고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인 듯하여 원근간에 칭찬이 자자하고 소문이 널리 나서, 아들 있고 혼처 구하는 사람은 청혼하지 아니하는 자 없는 고로, 박참봉은 더욱 용필이와 성혼하기를 싫어하여 만초 선생에게 돈을 주고라도 파약하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나, 만초 선생은 원래 전재를 탐내는 사람이 아닌 고로 말도 하여보지 못하고 어떻게 하여 세력으로 내리눌러서 파혼할 마음이라. 명희는 나이가 아직 어리되 지각이 어른보다 출중한 고로 자기 부친의 눈치를 알아채었도다. 출중한 사람은 출중한 마음이 있나니, 명희의 마음은 용필이를 장래 자기의 배필로 알고 천하 없는 일이 있을지라도 이것은 변치 못하겠다 하여 이따금 담 너머로 용필이 지나가는 것을 보면 말은 못 하되 속으로만 간이 사라지는 듯이 불쌍하고 사랑스러운 마음이 저절로 나서 옷이라도 하여주고 밥이라도 먹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터이라.
하루는 명희가 그 모친과 함께 일갓집 혼인 잔치에 갔다가 저물게 돌아오는데, 만초 선생의 집 앞으로 지나갈 새 어떤 아이가 담 모퉁이에 서서 눈물을 흘리고 무슨 생각을 하며 대단히 슬퍼하는 모양인데, 자세히 보니 용필이라. 명희의 오장이 녹는 듯하고 눈물이 저절로 흐르는 것을 모친 모르게 씻고 집으로 돌아와 그 날 밤에 잠을 못 자고 규중에서 방황하다가, 달은 희미한데 후원으로 들어가서 높은 곳에 올라서서 용필이 섰던 곳을 바라보니 마침 용필이가 어디를 가는지 집 앞으로 지나가는지라. 큰 소리로 부를 수 없는 고로 담 너머로 지나갈 즈음에 명희가 담을 넘겨다보고 가는 목소리로 용필이를 부른다.
"용필아―, 용필."
용필이가 돌아다보고 조용히 단둘이 만나 하나는 담 너머 서고, 하나는 담 안에 있어 나직나직한 말소리로 이야기를 하는데, 저편에서 기침 한 번을 에헴 하고 이리로 향하여 오는 사람이 있는지라, 깜짝 놀라 명희는 제 방으로 들어가고 용필이는 갈 데로 갔으나, 기침하고 오던 사람은 명희의 부친 박참봉인데, 자기 딸이 용필이와 무슨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 마음에 대단히 괘씸하고 분이 나서 용필이를 죽여 없이 하였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까지 나는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