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조 낙시(즐거이 베풂) — 둘째 단: 봉록을 나눔, 귀양·전란·권문 가문
제6조 낙시(즐거이 베풂) — 둘째 단: 봉록을 나눔, 귀양 가는 이·전란의 떠도는 이·권문 가문
관(官)의 봉록을 절약하여 그 고을 백성에게 돌려주고 집안의 곡식을 흩어 친척을 보태어 주면 원망함이 없을 것이다. 사람들이 늘 말하기를, 「벼슬에서 무엇이 즐거운가. 남는 것이 곧 집안 사사로움이 된다」 하니, 이는 자기 전장(田莊)의 소출을 집에 보내지 않고 모아 두었다가 팔아서 그것을 잉여(贏羨)로 삼아 비로소 전토(田土)를 더 넓히는 데 쓰겠다는 것이다. 병법(兵法)에 이르기를 「양식을 적(敵)에게서 취하여 내 곡식을 허비하지 않는다」 하였으니, 이는 그 마음이 백성을 적(敵)으로 삼는 것이라 이런 꾀를 짠다. 어찌 종족(宗族)에게 나누어 주어 관(官)의 재물을 허비하지 않는 것이 더 나음만 하겠는가. 그러므로 옛날의 어진 아전은 외직에 있을 때 비록 세 해, 다섯 해를 지내도 집안 살림이 처음과 같았다. 그 어진 자는 반드시 관의 봉록을 그 백성에게 돌려주고, 집안의 곡식으로 친척을 두루 돌보았다.
유배(流配)되어 옮겨 가는 사람이 나그네 길에 쪼들리고 곤궁할 때, 그를 가엾이 여겨 보태어 주는 것 또한 어진 사람의 힘쓸 바다. 방극근(方克勤)이 제녕부(濟寧府)를 다스릴 때, 명(明) 태조(太祖)가 법(法)을 엄하게 써서 사대부(士大夫)들이 많이 귀양 갔다. 제녕을 지나는 자가 있으면 극근이 곧 두루 그들을 돌보아 주었다. 사람들이 그것을 위태롭다 만류하였으나 그래도 그치지 않았다. 김영구(金永耇)가 전주판관(全州判官)이 되었을 때, 부처(付處) 이하 모든 죄수들에게 속금(贖金)을 받는 명령이 있었다. 판중추(判中樞) 김공 수(金公睟)가 만경(萬頃)에 적거(謫居)하며 가난하여 그것을 마련하지 못하였다. 공이 그 집안과 평소 친하던 터라 노비 일곱 식구와 한성(漢城) 집의 전답 열 섬짓을 내어 그 집의 가동(家僮)에게 부쳐 주었다. 이때 청명(淸名)이 세상에 가득하였다.
전란(戰亂)이 어지러워 떠돌아 머무는 사람들을 어루만져 살게 하는 것은 의로운 사람의 행할 바이다. 강수곤(姜秀崑)이 고창현감(高敞縣監)이 되었을 때, 바야흐로 군사(軍事)가 일어나는 즈음에 나라에 큰 흉년이 들어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는 데까지 이르렀다. 공이 능히 계책을 마련하여 굶주린 자들을 진휼(賑恤)하였다. 양호(兩湖)의 유민(流民)이 천 수에 이르고, 북방(北方)의 친척과 친구로 굶주리고 추위에 떨며 객(客)이 되어 온 자가 또한 날마다 천 수에 가까웠다. 공이 몸소 박하게 먹으며 남에게 베풀어 천여 명을 살렸다. 홍이일(洪履一)이 대구판관(大丘判官)이 되었을 때, 병자(丙子)의 난(亂)을 당하였다. 대령(大嶺) 이남에는 병화(兵火)가 드물게 미쳐 피난한 사람이 마을에 가득하였다. 공이 몸소 두루 돌보아 살린 자가 매우 많았다.
권문(權門)과 세가(勢家)는 후하게 섬길 수 없다. 권문에 보내는 헌물(獻物)은 후할 수 없다. 내가 받은 은혜가 있거나 의지하여 친하게 지내는 자에게 때때로 보내는 선물이라야 음식 두어 가지에 지나지 않게 하고, 그 밖에 담비 가죽·인삼·비단 따위 보배로운 물건은 결단코 바칠 수 없다. 어째서인가. 재상(宰相) 가운데 청렴하고 밝아 식견 있는 자는 받지 않을 뿐 아니라, 도리어 나를 비루하고 아첨하는 사람으로 여겨 더러는 임금 앞에 들어가 고하여 벌(罰)을 내리기를 청한다. 이것은 재물을 잃고 몸을 망치는 위태로운 길이다. 만일 그 재상이 사사로운 선물을 즐겨 받는 자라면 반드시 어진 자가 아니니, 뒷날 죄를 얻고 녹(祿)이 떨어지는 일이 모두 그 사귐에서 말미암는다. 내가 바친 것이 도리어 스스로 화(禍)를 부른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옛날의 어진 아전은 권문과 세가에 대하여 글을 닦아 문안을 드릴 뿐, 감히 무거운 물건을 보내지 않았다. 그 가운데 헌물을 보내는 경우라도 반드시 청렴하고 밝으며 내가 은혜를 받은 이를 가려, 때마다 작은 선물을 보내되 종이만큼 가볍고 박하게 하고, 음식 따위에 그치게 하였다. 그 밖에 보배로운 물건은 결단코 그 문(門)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다. 방참(龐參)이 한양태수(漢陽太守)가 되었을 때 비록 권문에서 보내오는 선물이라도 모두 응하여 받지 않았다. 포효숙(包孝肅, 포증)이 변군(邊郡)에 있을 때 매번 아전을 시켜 절기(節氣)에 예의로 보내는 선물을 가지고 대장군가(大將軍家)에 보냈으되 음식 두어 가지에 지나지 않았다.